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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체주의 평가A좋아요
    {1920년 - 세계의 자본주의가 상대적으로 안정과 번영을 누림1929년 - 미국에서 발생된 세계 대공황으로 인하여 세계의 자본주의가 위기를 맞음1930년 - 세계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큰 타격을 받았고, 전체주의의 급격한 대두로 인하여 위기에 직면1939년 - 제2차 세계대전 발발1. 전체주의(Totalitarianism)1) 전체주의의 개념전체주의라는 개념은 1924 ~ 1925년 이후 독재화된 이탈리아 파시즘이 사용하던 전체주의 국가(Stato totalitario) 라는 말에서 생겨났다. 이 개념은 대공황 중에 total이라는 말로 독일의 보수적 사상가들 사이에 널리 퍼져, 이윽고 나찌스 국가도 표현하게 되었다. 비 파시즘 진영에서도 이미 1929년 11월 2일의 런던 타임즈가 totalitaian 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지만 겨우 제 2차 세계대전 직전에야 이 말이 저널리즘에서 일관화 되었다.전체주의는 개인은 전체 속에서 비로소 존재가치를 갖는다는 주장을 근거로 강력한 국가권력이 국민생활을 간섭·통제하는 사상 및 그 체제를 말한다. 전체주의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후반부터인데, 당초에는 이탈리아의 파시즘, 독일의 나치즘, 일본의 군국주의 등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냉전 체제 하에서는 공산주의를 지칭하게 되어 공산주의 슬로건으로 전용되기 시작하였다.그러나 전체주의에 대한 정의나 속성에 관해서 확정된 정설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전체주의는 개인주의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러한 일반적 의미에서의 전체주의는 부분에 대한 전체의 선행성과 우월성을 주장한다. 즉, 전체주의란 개인의 이익보다 집단의 이익을 강조하여 집권자의 정치권력이 국민의 정치생활은 물론, 경제·사회·문화생활의 모든 영역에 걸쳐 전면적이고 실질적인 통제를 가하는 것을 말한다.2. 전체주의의 발생과 전개1) 발생 - 대공황제1차 세계대전으로 유럽의 주요 국가들이 전쟁의 피해로부터 회복되면서 산업 생산고는 꾸준한 증가세모순은 1920년대의 미국 주식시장의 번영에 의해 감추어져 있었고, 오히려 자본주의가 상대적으로 번영과 안정을 누리고 있었지만 1929년 가을 미국 주식시장의 파탄은 그러한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일거에 노정시켜 대공황을 몰고왔다.1929년 가을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은 세계의 모든 자본주의 국가의 경제에 커다란 타격을 가하였다. 국가들의 생산 활동과 노동자들의 생활을 파탄으로 몰고 갔고, 수천만 명의 실업자를 양산하였다.대공황이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 문화 사상 등 자본주의 사회의 전 분야에 미치면서, 1920년대의 자본주의 사회의 일시적인 상대적 안정은 단번에 붕괴되고 새로운 위기의 국면을 맞았다.이에 미국은 기존의 자유방임주의적인 경제 정책을 포기하고, 자본주의에 사회주의적인 요소가 가미된 혼합 경제 체제 방식의 뉴딜 이라는 새로운 사회 경제 정책이 채택하였다. 또한 미국이나 영국같이 민주주의의 기틀이 튼튼하고 넓은 시장을 보유하고 있던 나라들은 평화적인 외교정책을 유지였지만, 독일 이탈이아 일본과 같이 국내 시장이 좁고 민주주의의 기틀이 약했던 나라들은 대외적인 침략을 통해 그들의 위기를 극복할 것을 모색하였고, 이들 국가들은 대외적인 침략 정책의 원활한 추진을 목적으로 국내에서 강력한 전체주의 체제를 수립하였다.2) 파시즘 - 이탈리아의 전체주의배경이탈리아는 원래 경제적 기반이 약한데다가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막대한 외채를 짊어지게 되어 전후 극심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리고 실업자가 증대하여 파업과 폭동이 속출하는 등 극도의 사회적·경제적인 혼란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정부는 무능하여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편 3국동맹의 일원이었던 이탈리아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중립을 지키다가 전후의 영토와 전리품에 대한 관심 때문에 연합군 측에 가담하여 승전국이 되었다. 그러나 전후 이탈리아가 승전국의 지위로 연합국으로부터 받은 보상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이에 이탈리아는 승전국 중에서 베르사유 체제에 가장 불만이 큰 나라가 되었고, 이탈리아 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지리적·계급적 불균형은 민주화의 기반을 잠식시켜 갔다. 취약한 민주주의의 전통도 이에 한 몫을 했다고 할 수 있다. 19세기 후반에야 통일된 나라를 형성했던 이탈리아에서는 민주주의의 전통 및 제도적 준비가 결여되어 있었다.북부 산업지역에서는 조직화된 공산주의 운동이 성장해 가며 갈등을 야기 시키고 있었다. 당시 이탈리아의 이러한 만성적인 위기상황은 중산계급들에게 새로운 사태에 대비하게 하는 경각심을 불러일으켰고, 파시즘이 자리 잡도록 환경을 조성시켜 나갔다. 결과적으로 이탈리아의 사회와 정치의 이러한 상황은 열성적인 민족주의자들을 각성시켰고, 국민적 좌절감, 심리적 열등감, 경제적 혼란 등에 관련되어 파시즘은 발생되었던 것이다.파시스트당과 무솔리니제1차 세계대전 후 불안하고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1919년 3월 무솔리니에 의하여 파시스트당이 조직되었다. 무솔리니는 당시 이탈리아인들의 반사회주의적이고 국수주의적인 감정에 편승하여 보수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이데올로기와 강령들을 제시하였고 파시스트당은 유산 계급과 보수 세력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나아가 당시의 경제난과 사회적 혼란에 불만을 가진 대중들이 파시스트당을 지지하게 되면서 파시즘은 대중 운동으로 성공할 수가 있었다. 검은 셔츠를 입은 파시스트들은 주로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공격과 테러 활동을 통하여 세력 확장을 하였다.파시스트당은 처음에는 사회주의적 정책을 강조하였으나 곧 국가주의적 경향을 보이게 되고, 1920년 사회주의노동자에 의한 북부 이탈리아의 공장점령이 실패한 이래, 파시스트는 사회주의 조직에 대하여 폭력을 행사하여 사회당이 우세한 각 도시의 시의회나 시청을 공격 점령하였다. 1921년 군부·경찰·관리의 지지를 얻은 그들의 폭력은 대규모적으로 확대되었고, 1922년 국내가 거의 내란상태로 변하였다. 1922년 10월 27일 무솔리니는 4만 명의 병력으로 결성된 검은셔츠부대 를 이끌고 이른바 로마진군 을 결행하였다. 10월 29일 이탈리아 국왕 임마누엘 3세는 무 올렸으나, 지역적으로 볼 때에 북부지방에서는 그다지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였으며, 게다가 1924년 6월 파시스트에 의한 마테오티 사회당 의원 암살사건은 파시스트 정권을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하였다.그러나 1925년 반파시스트 운동을 철저히 억압하는 일련의 파시스트 입법 을 통하여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박탈하고 노동조합을 해체하였으며, 1926년에는 파시스트당 이외의 모든 정당을 금지하여 일당 독재 체제를 수립하였다. 그리고 무솔리니는 파시즘의 이데올로기인 파시스트 독재와 국가 지상주의 그리고 군국주의와 대외적 팽창주의를 실천해 나갔다. 그는 개인이나 계급의 이익보다 국가 전체의 이익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근거에서 서구식 의회 제도를 폐지하였다.경제적으로 자급자족적 경제의 실현을 목표로 하여 국내의 산업을 보호·육성하기 위한 통제 경제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로 인해 이탈리아의 경제는 차츰 부흥되었고, 거기에 따라 사회적 혼란도 진정되었다.무솔리니는 국민을 국수주의와 군국주의로 교육시키기 위해 국가가 개인의 모든 생활을 통제하고자 하였다. 또한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카톨릭교도의 지지를 얻기 위해 이탈리아의 통일 이래 불화가 계속되던 로마 교황청과의 화해를 모색하고 교황청과의 우호관계를 확립하였다.로마제국의 카이사르 무솔리니무솔리니는 고대 로마 제국의 영광을 부활시키려는 야망으로 적극적인 대외 팽창 정책을 실시하였다. 1924년에는 숙원이던 피우메 항을 병합하였고, 1926년에는 알바니아를 보호령으로 하여 아드리아해 제압의 목표를 달성하였으며, 1930년대 후반에는 이디오피아를 침공하여 이를 병합하였다. 무솔리니 자신은 내가 말하는 것은 항상 옳다 라고 호언하였고, 국민들은 또한 무솔리니를 로마제국의 카이사르로 여겼다. 이때부터 파시즘이 부르주아적 정치운동에서 탈피하여 본격적인 대중운동으로 전환되기 시작한 것이다. 1940년 6월 이탈리아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잇따른 군사적 패배와 전쟁으로 긴장은 결국 국내에 공황을 야기시켰으며, 히틀러성장1차 세계 대전 후 독일 노동당이라는 작은 정치 단체에서 활동하던 히틀러는 탁월한 웅변술을 바탕으로 성장하여 1921년 독일 노동당의 후신인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당(나치당)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의 세력은 초기에 미미한 수준이었으나, 1929년 세계공황은 히틀러에게 집권의 기회를 제공하게 되었다. 대공황으로 인해 중산층 및 노동자들의 생활이 타격을 입자 독일인들은 새로운 대안으로서 극우의 나치당과 극좌의 공산당에게 눈을 돌리게 되었다.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인해 전후(戰後)의 비참함에서 안정을 되찾으려던 중소기업가, 봉급자, 이자생활자 등을 포함한 중산계급과 중소농민층들은 큰 타격을 받게 되었고 결국 이들은 기존 정치에 불만을 갖고 나치를 지지하게 되었다.나치당은 대재벌을 공격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공산주의를 배격하고, 사유재산제 옹호, 소시민층에게 조합노동자와는 별도의 지위를 약속하는 나치당에게 중소시민층은 끌렸을 뿐만아니라 독일의 궁핍의 원인으로서 유대인을 지목하고, 베르사유조약 폐기를 주장하는 나치스는 국민감정 속 깊이 파고들었다.나치 정권 수립과 독재화1932년 7월 선거에서 제1당이 된 나치당은 100석이란 사상 최대의 의석을 얻은 공산당 세력 신장에 불안을 느낀 중간세력이 극우 지지로 방향을 급선회하자 결국 권력 장악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고 히틀러가 1933년 총리로 취임하게 됨으로써 나치 정권이 수립되었다.히틀러는 권력 장악 후 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해 의회를 해산하고 새로운 선거를 실시하여 제1당이 되었다. 또한 1933년 정부 독재권과 바이마르 헌법 정지를 규정한 수권법(授權法)통과 시켰고 나치 일당 독재 체제를 확립하였다. 그리고 1934년 연방 참의원을 폐지하여 연방제 국가가 아닌 중앙집권국가화 시키고, 대통령제를 폐지하여 대통령과 총리를 겸하는 총통이 되어 독일 유일의 독재자가 되었다.독일의 전체주의(나치즘)의 특징히틀러는 개인의 모든 생활과 생각을 민족과 국가의 이름으로 국가가 통제하려는 전체주의정책에 예속 시키려 하였다. 따라서 그.
    인문/어학| 2004.06.22| 6페이지| 3,000원| 조회(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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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진왜란의병 평가A좋아요
    서론16세기 조선사회는 점차 쇠퇴의 기미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미 당시의 조선사회는 오랜 평화 속에서 지배계층인 양반의 편당, 정치기강의 해이, 전세제의 문란 등 여러 폐단으로 인심이 동요되고 있었다. 조정의 권위는 표면적으로는 엄격히 행해지는 것 같았으나 실제와는 크게 달랐다. 중앙정부는 말단행정이나 민중과는 유리상태에 있었고 위정자나 정부가 폐단을 알고 있었다고 하여도 이를 근본적으로 개혁되지 못하였다는 것은 바로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이 있었기 때문이다.정치적으로 중앙의 붕당정치는 당파간의 상호견제 속에서 공론에 의하여 정국을 이끌어 가는 한층 진보된 정치형태라는 장점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당파간에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정국운영이 이루어지는 양상으로 발전하기 하였다. 한편 지방에서는 중앙의 붕당과 연관을 가지면서 서원을 중심으로 한 스승 밑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향약과 같은 조직을 통하여 상호부조와 결속을 다지는 현상도 나타났다. 또한 각 지역에는 학문과 행실이 뛰어나 존경받는 인물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러한 조직과 인물들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각 지역에서 의병의 일으키는 주체세력이 되었다.경제적으로는 건국 이래 여러 종류의 공신에게 지급된 공신전과 별사전이 모두 세습되고 입이 줄어들고 농민들의 생활이 곤궁해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특히 직전법이 폐지된 이후에는 관리들에 의한 토지소유의 확대가 심해져 삼남지방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침탈의 범위가 범위가 확대되어 갔다. 또한 농민들에게는 농장의 전호로써 2분의 1의 전세뿐만 아니라 특산물의 공납이 큰 부담이었다. 게다가 15세기 이래 계속되는 전국적인 가문과 홍수, 흉년과 전염병의 발생 등으로 농민들은 근거지를 잃고 떠돌아 다니다가 도적으로 변하기도 하여 국가재정의 근간이었던 농촌은 날이 갈수록 황폐화되어 갔다.사회적인 면에서는 지배계층의 엄격한 신분제를 고수하려는 쇄환정책에 따라 발생한 선조 16년의 옥비의 난과 붕당정치의 과정에서 선조 22년에 발생한 정여립의 난의 여파가 지배층뿐만 아니라 일반 서민들에어들게 되었다. 왜인들은 釜山僉使를 李友曾을 죽이고 제포를 점령하여 첨사 김세균을 납치하였으며 웅천성을 포위하여 성 밑의 인가를 분탕하는 등 삼포의 군민을 도륙하고 가옥을 분탕하였다. 대마도주가 부산포·제포·거제 등지에 분견한 병선은 수백 척으로 왜세는 한때 기세를 올렸으나 곧 관군에 의해서 진압되고 말았던 것이다.조전조정은 삼포를 폐쇄하고 왜인과의 교통을 단절하였다. 대마도는 이로 인해 물자의 곤란을 받게 되자 일본정부를 통하여 국교 재개를 요청하였다. 일본의 실정막부에서는 일본국왕사를 2차에 걸쳐 조선에 파견하여 강화를 시도하였다. 조선의조정에서는 찬·부의 양론이 있었으나 야인으로 인한 북방의 긴장고조, 왜구의 재발 가능성과 약재 수입 등의 필요에 따른 실리적인 강화론이 우세하여 중종 7년 8월에 이르러 임신약조를 맺게 되었다.조선은 강화의 전제조건으로 삼포왜란의 주모자를 처단하여 수급을 보내고 조선측의 포로를 송환하며 성친이 직접 와서 사죄할 것 등을 제시하였다. 이 중 첫째 조건은 약조를 체결한 후에 이루어졌고 셋째 조건인 성친의 친래진사는 이루어지지 않은 가운데 둘째 조건이 해결되어 임신약조가 체결되었다. 이를 살펴보면 세견선을 종전의 50척에서 25척으로 세석두미를 2배 석에서 1백 석으로 각각 반감하고 特送船制를 폐지하여 삼포 중에 단지 제포만을 개항한다는 것이었다.이 임신약조는 왜인에 대하여 삼포왜란 전보다 더 많은 제약과 구속을 가한 것으로 왜란에 대한 정계와 제한의 성격을 띤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식량과 생필품의 부족으로 인한 왜구의 침입이 계속되었고 중종 36년 제포에서 대마도 왜인과 관병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기에 이르자 이것을 문제로 삼아 제포에 거류하는 대마도 왜인 전부를 방출하고 왜관을 부산포로 옮겼다. 이러한 조치에 대해 일본정부에서는 거듭 사신을 보내 복구를 요청하였으나 조선에서는 이러한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따라서 이후에도 왜구의 침입은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왜구의 침입 중 크게 문제시된 것은 중종 17·18년의 침태가 벌어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계속되는 왜적의 만행은 백성들로 하여금 더 이상 자신과 가족만을 위한 생명보전에 급급하여 숨어 살 수 없는 적개심과 의분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당시 이러한 백성의 동향은 경상우도 순찰사 김수의 上啓에 잘 나타나 있다.영산·창녕으로부터 우도인 성주·개녕·금산에 이르는 일로는 모두 적의 소굴이다. 사방으 로 흩어져 겁탈과 노략질을 일삼아 도내세가대족들이 그들의 가업을 잃고 그 처자들을 잃어 팔 을 걷어 부치고 분격하고 마음 아파하면서 기회를 얻게되면 나아가 적을 토벌할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 『宣祖實錄』卷 29라고 하였다.이와 같이 임란 초기에 관군이 일본군에게 패하여 국토가 짓밟혀 수없이 많은 백성들이 죄없이 죽음을 당하자 동족을 구하고 鄕里를 지키기 위한 자발적인 움직임이 꿈틀거렸으니 이것이 곧 의병 봉기의 동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郭再祐 의병장은,적병이 이미 박두하였으니 우리의 부모 처자는 장차 적병의 포로가 될 것이다. 우리 동네에 나이 젊어 싸울 수 있는 자가 수백명은 될 것이니 만약 마음을 같이하여 정암 나루에 의거하여 지킨다면 우리 고장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죽기를 기다릴 것인가? {) 『然藜室記述』壬辰義兵 郭再祐라고 하여 향리의 보전을 강하게 강조하고 있다. 또한 金沔이 勤王將으로 임명되었을 때 영남인들은 만일 김대장이 본도를 떠나면 우리들은 믿고 의지할 곳도 없게 될 것이며 왜적을 토평을 방법도 없으니 장차 경상도를 어떻게 보전할 수 있으리오. 라고 한 것 등에서 살펴볼 때 倡義의 이유는 매우 구체적이고 그 활동은 향토 수호가 주목적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2. 호남지방임란이 발발하여 경상도 지역이 일본군의 피해로 시달릴 때 전라도는 일본군의 직접적인 유린하에 있지는 않았지만 일본군의 서진에 따라 점차 경상도와 같은 혼란이 야기되었다. 특히 경상도와 접경하고 있어서 경상도에서의 전란의 참상을 보다 상세히 접할 수 있는 전라좌도 지역의 혼란은 더욱 심하였다.풍문은직접적인 피해 지역이므로 향토수호는 어느 지역에서나 필요했고 자기 고을을 비워놓고 다른 먼 곳의 지역까지 가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병부대마다 독립성이 강하여 때로는 의병부대간의 불화도 생겼다. 합천의 정인홍이 의병을 일으켜 茂溪의 왜적을 토벌할 때 고령의 金沔과 손인갑 등이 그 휘하에 있었다. 그 때 손인갑은 군사를 따로하고 진영을 독립해 가지면서 정인홍의 명령을 받고 있었다. 손인갑이 복병시키기 위해 출발하면서 김면에게 원병을 청하였다. 김면의 진영에 있는 장수와 사졸들이 좋아하지 않는 자가 많았다. 김면이 사람을 시켜 출병을 중지하라고 하였으나 손인갑이 듣지 않았다. 그 달 17일에 300여명의 적병이 성주로부터 강의 흐름을 따라 내려오므로 손인갑이 약속하여 말하기를,포소리를 기다려 활을 발사하라.하였는데 박응성·장호 등이 손인갑과의 약속을 어겨 뛰어 나갔으므로 우리 군사가 패배하였다.손인갑은 면이 후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패하였다고 불만을 품고 김면은,손인갑이 여러사람의 의사를 어기어서 군사가 패하였다.고하니 손인갑이 크게 성내어 서로 틈이 생기었다. 이로부터 김면과 정인홍의 두 군사가 나뉘어져 두 갈래가 되었다.{) 『燃藜室記述』임진의병 정인홍 손인갑 金俊民條이러한 기사는 영남의병조직이 독립성이 강함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영남지방에서는 적들이 영남지방 전지역을 수시로 이동하면서 침략하였기 때문에 우선 향리를 수호하기 위한 독립부대의 의병단위조직이 급선무였고 따라서 다른 의병부대와 연합적인 조직은 수월하지 않았던 것이다.호남의병은 영남의병과는 달리 기병 처음부터 비교적 조직과 지휘체계가 정비되어 있었다. 그 까닭은 두 말할 나위없이 일본군의 직접적인 침략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남의 의병구성은 먼저 각읍내의 유력자가 수십명에서 수백명의 향군을 결성하였다. 이러한 구체적 사례로 먼저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장성남문창의를 들 수 있다. 前佐郞 김경수 등이 임진년 7월 19일에 장성남문의병청을 세우고 도내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고 있었다. 여기에 대해 김천일은 「待罪兼陳兵勢疎」를 올려 강화도에 주둔하고 있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신이 고도에 들어온 것은 처음에서 남으로부터 올라올 때에 …기내일대가 외적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오직 강화도만이 보전되어 있었는데 북으로는 한강을 따라 경성으로 통하고 서로는 … 그러므로 지세의 險에 의지하여 굳게 지킬 수 있 는 것이니 … 형세가 모두 강화도에 공집되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이 이곳에 주 둔한 것은 진실로 얕은 계책이 아니었는데 일이 뜻과 엇갈려…즉 강화도에 머물러 있는 이유는 計劃과 實際가 엇갈려 대공을 이루지 못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김천일의 강화도 주둔은 백성들을 안전하게 지키고 국가의 명백을 유지하는데도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선조가 의주의 행궁에서 강화로 옮겨올 뜻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강화의 전략상 중요성과 굳건한 방비가 되어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인데 이는 모두 김천일의 강화도 주둔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정에서는 경기도내에 주둔한 전의병을 4개 지역으로 통합하고 있는데 김천일에게 통진, 양주지역의 지휘권이 맡겨졌었던 것도 김천일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강화도의 장기주둔은 지친 군사를 낳게 하여 해산되기에 이르렀고 일부에서 실책이라고 하지만 이여공이 경성탈환시 김천일 대해 감탄의 말을 하고 있음은 김천일의 군사활동이 맹목적인 토적보다는 기본전략과 대책을 세워 실천하려 했었음을 알 수 있다.김천일의 순절지가 되는 곳은 진주성전투에서였다. 왜군이 후퇴 남하하므로 자연 이를 추격하는 관군, 의병, 명군이 모두 영남일대에 列陳하게 되어 김천일도 이곳으로 이군하여 왔다. 왜적은 앞서 진주성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서 재공세 준비를 하고 있었던데 반해 우리측의 대안은 겨우 공성책 등이 토의되고 있었을 뿐이었다. 유독 김천일만이 진주성을 굳게 지킬 것을 주장할 뿐이었다.그리하여 김천일은 왕게게 소청한 후 군사 300여명을 이끌고 진주성안으로 들어갔다. 그를 따라 여러 명의 의병들이 같이 입성하였다. 이들.
    인문/어학| 2004.06.22| 17페이지| 3,000원| 조회(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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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기의병 평가A좋아요
    서론1894∼1896년 청일전쟁을 전후하여 일제의 조선에 대한 군사적 위협은 더욱 구체화되어 나타났으며 이에 따라 일부 부일개화파를 제외한 국민들은 반침략 을 시대적 과제로 인식하게 되었다. 특히 전통적으로 일본을 비롯한 외세를 배척할 것을 주장해 온 척사유생들이 농민을 결속하여 적극적인 의병투쟁을 전개하였음은 이들이 반침략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보다 철저히 인식한 까닭이라 할 것이다. 또한 이들 척사유생들은 그 후 항일민족독립운동을 선도해 간 점에서 한국근대사에서 차지하는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이 글은 일제침략에 직면한 시기, 즉 1894∼1896년의 전기의병이라 할 수 있는 척사유생들의 구체적인 의병투쟁 양상과 이념 등을 분석하여 민족적 위기상황에 대한 척사유생들의 대응태도와 그 논리 등을 구명하는데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을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한다.첫째 1894∼1896년간에 전개된 전기의병의 봉기원인을 총체적으로 검토하고 한다. 사상적 배경으로 위정척사론의 시대변천에 따른 특성을 검토하여 의병투쟁을 위한 이론으로서의 기능을 밝히고 의병병사층을 형성한 농민들의 주장이 의병투쟁의 이념적 배경으로도 작용된 점을 부각시키고자 한다.둘째 전기의병 봉기의 주요 원인으로 기존에 설명되어 온 을미사변과 단발령 공포 이외에 1894년 6월의 갑오변란 과 한반도내에서의 청일전쟁의 도발이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음도 논증하고자 한다.셋째 항일의병의 기점에 대한 재검토 문제이다. 지금까지 의병투쟁은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계기가 되어 개시되었다고 설명되어 왔다. 그리고 이를 을미의병 이라 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항일의병투쟁이 을미사변과 단발령공포가 계기가 되어 비로소 전개되었는가? 이에 대하여는 그간 의문을 제기하여 온 바도 있다. 즉 그보다는 오히려 일제의 한반도내에서의 청일전쟁의 도발과 일본군에 의한 경복궁침범사건인 갑오변란 이 보다 큰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항일의병의 기점에 대한 재검토는 의병 봉기의 원인을 보다 사실에 근접하게 설명진압을 위하여 청에 군사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은 조선을 무력으로 침략하기 위한 절호의 기회로 단정하고 대병력을 출동시켰다.일본은 청군이 조선에 진주하자 일본공사관 및 거류민 보호 라는 구실을 내세워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였다. 이는 청세력을 조선에서 물리치고 나아가 조선을 대륙침략의 전진기지로 확보하려는 정책이었다. 일본은 먼저 조선의 경복궁을 공격의 목표로 삼았다. 6월 21일 경복궁을 무력으로 침범한 갑오변란 이 바로 그 사건이다.경복궁을 무력 점거한 일본은 자신들의 무력행사를 은폐하기 위해 대원군을 유인 입권시켰다. 대원군의 등장은 곧 민씨정권의 몰락을 의미하였다. 명성황후를 비롯한 민씨 일가는 궁을 빠져나가거나 정동의 외국인 집으로 대피하였던 것이다. 일본은 갑오변란을 기하여 조선왕궁을 장악한 뒤 친일적인 김홍집내각을 수립한 다음 갑오개혁을 추진케 하였으며 또 곧이어 청일전쟁을 도발하였다. 따라서 갑오변란은 일본이 추진한 조선 식민지화의 서곡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갑오변란은 이처럼 조선과 동아시아의 세력판도에 큰 변화를 초래한 대사건이라 할 수 있다.2을미사변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서 자신들의 우월권이 확보될 것으로 믿었으나 러시아의 삼국간섭이란 복병을 만나게 된다. 더구나 조선정부에서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막는 아전인수 의 친러정책을 적극 추진하자 일제의 조선지배 정책은 난관에 봉착하였다. 이에 일본은 친러정책의 주동인물인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이러한 일본의 만행은 개항 이후부터 쌓여온 일본에 대한 적대적 감정을 폭발케 하여 나라 전체가 반일 감정의 도가니로 화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유생들이 의병 궐기를 호소하자 민중들의 호응은 삽시간에 요원의 불길과 같이 확산되어 갔다.3단발령유교적 통념의 사회에서 단발령은 한민족의 문화적 자존의 표상이던 상투를 제거함으로써 전국민의 울분을 자아냈다. 당시 내세운 단발의 이유는 '위생에 이롭고 작업에 편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교 윤리가 일반백성들의 생활에 깊이 에 소속된 군인·경찰·관원 등 제한된 범위의 인물들에게 한하여 재차 강제 단발을 명하였으며, 그 해 10월에 가서는 이도재 등 정부 대신들에게도 역시 이러한 명령이 하달되어 이에 불응하는 사람은 그 머리를 자르게 할 정도로 강경한 입장을 천명하였다.4위정척사사상개화기 한국 민족 사상은 크게 위정척사사상(僞正斥邪思想)·동학사상(東學思想)·개화사상(開化思想)의 세 가지가 그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외세 침략의 위협이라는 민족의 위기 앞에서 외세에 대항하여 민족의 자주 독립을 수호해야 한다는 공통된 목적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 투쟁 방법에 있어서 개화 사상은 무력적인 투쟁보다는 근대화의 추진을 통한 문화적 투쟁, 즉 자강운동(自强運動)을 통하여 국권을 수호하려 했다는 점에서 위정척사사상이나 동학사상과는 흐름을 달리하고 있다.위정척사사상과 동학사상은 무력 투쟁의 의해 일제 침략 세력을 축출함으로써 자주 독립 수호의 의지를 실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의지는 바로 한말 의병의 항일 투쟁에 그대로 반영되어 의병 항쟁의 두 가지 정신적 원류가 되었던 것이다.위정척사사상과 동학사상도 본질적으로 그 의식면에서 큰 차이가 있었으니 전자는 존왕양이사상에 입각한 근왕 정신을 그 의식의 기반으로 하였고 후자는 전통 사회를 부정하는 반봉건주의를 의식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양자는 서로 이질적인 의식 기반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구국 투쟁의 실제에 있어서는 그 의식을 합치시켜 나갔다. 위정 척사적인 유림들은 그들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현실적인 방편으로서 민중과 합세하여 의병 운동을 주도 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동학 사상의 영향을 받은 농민 대중은 그들의 생존권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유생 계층과 협력하여 외세를 배척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개항 이후 위정 척사론자들의 외세 배척운동은 조정의 개화 정책에 대한 반발로 이어졌다. 개화 정책에 대한 이들의 반발은 1880년 6월, 제 2차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되었던 김홍집이 귀국할 때 들여온불길처럼 더욱 거세게 타올라 의병 봉기가 전국 각지로 확산되었다.의병 운동에서 가장 눈부신 활약을 전개한 것은 충청도 제천을 중심으로 해서 일어난 유인석의병 부대였다. 유인석은 충청, 경상, 강원 3도의 접경지역인 충주, 단양, 원주, 영월 일대를 지배하여 크게 위세를 떨쳤다. 의병은 일제 침략자들의 앞잡이가 되어 일본의 침략 행위를 방조하던 일부 친일파들을 그들의 적인 일본 침략자들과 마찬가지로 타도의 대상으로 규정하였다. 그들은 친일 관찰사와 군수 등을 처단하여 매국적 반민족주의자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친일 조정에 납입할 세미를 압수, 군량으로 사용하기도 하는 등 강력한 저항 의지를 나타내어 일본 침략 세력과 친일 조정을 당황하게 하였다.친일 조정과 친일파 관료에 대한 의병 진영의 이와 같은 적대 의식은 비단 유인석 부대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친일 조정, 친일파 관료 그리고 그들의 지휘를 받아 의병 진압에 나선 관군에 대한 의병의 적개심은 매우 강렬한 것이었다.춘천에서 일어난 이소응 부대도 친일 관찰사를 처단하고 일본의 조종으로 의병 진압에 나선 관군과 격전을 벌였다. 이 때 민승천, 김하락 등을 중심으로 한 경기 지역의 읫여은 서울 부근의 남한산성에 은거하여 직접 서울을 위협하기도 하였다.강릉에서는 민용호가 농민과 포수들로 구성된 의병 부대를 이끌고 강원도 일대와 함남 남부 지방 일대를 누비면서 기세를 크게 떨쳤다. 그리고 홍주에서는 이설과 김복한이 봉기하여 홍주성을 점령하고 본격적으로 의병대열을 확장시켜 나감으로써 충청도 일대의 의병 활동을 주도해 나갔다.또한 경상도 진주에서는 노응규가 봉기, 진주 관아 군기고의 무기를 탈취하여 무장을 갖추고 진주 인근의 의령, 함안, 진해, 창원 등 각 읍에 봉기를 촉구하는 통문을 돌려 각지에서 많은 의병의 호응을 받았다.안동 지방에서는 권세연을 중심으로 김도화, 김도현, 이인화 등이 의병을 일으켜 안동, 영양, 의성, 영덕 등 각지에서 그 지방의 실질적인 통치권을 장악하고 장기적인 항쟁 태세에 들어갔다.이 밖에도하는 한편 이들에 의해 수행된 갑오개혁에 반대하였다. 이들의 반대는 단순한 상소운동의 차원을 넘어 급기야는 무력투쟁의 양상을 띤 의병투쟁으로 발전, 반침략, 반개화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갑오개혁은 이와 같이 한국근대사에서 근대화와 제국주의에의 종속화라는 두 가지 요소가 맞물려 있는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하나는 일본의 내정개혁방안요강을 지도원리로 하여 일본공사관의 간섭과 지도에 의하여 성취된 근대적 개혁이라는 것이다. 반면 다른 하나는 갑오개혁이 근대화를 촉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주적인 근대화를 방해, 저지한 계기가 되었으며 일본자본주의 침탈체제를 조선에 정착시키는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는 등 부정적인 평가가 지배적이다.1894-1895년간 반침략과 반개화를 목표로 무력투쟁한 전기의병은 김홍집내각과 그들이 취한 일제의 개화정책을 반대하였음은 당연하였다. 전기의병은 갑오개혁 전체를 기본적으로 부정하였으며 그 내용을 조목별로 비판할 필요조차 느끼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 지방제도와 군사제도의 개편 또는 변복령과 단발령공포에 대한 그들의 입장은 더욱 와고한 것으로서 직접적인 반대행동까지 보여주었던 것들이다.의병들의 이러한 갑오개혁에 대한 몇 가지 반대투쟁의 실례를 검토한 결과 갑오개혁에서 개혁적 인 측면을 찾기는 더욱 어려워지게 되었다. 지방행정의 효율적인 운영을 꾀하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혼란만을 가중시켰으며 차라리 지방세력의 축소화를 꾀했다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또한 군사제도의 근대체제로의 정비를 목표로 했을지라도 군대해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군사력의 축소를 가져왔으며 개편된 신부대는 일본의 조선침략에 오히려 이용되는 반민족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다. 또한 동학농민군과 의병들의 전국적인 저항에도 김홍집내각이 그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일본군의 힘이 컸으며 이 사실은 정권 자체의 존재양태와 나아가 개혁의 타율적인 성격까지도 규정하게 될 것이다. 즉 갑오개혁은 갑오변란 이후 일본군의 비호 속에서 행해졌으며 그 결과 일본.
    인문/어학| 2004.06.22| 9페이지| 2,000원| 조회(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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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래사회의 전망
    Ⅰ.서론인터넷은 양날의 검과 같다. 우리 생활을 편리하고 풍요롭게 하는 순기능과 함께 무차별 음란물 유통, 정보 소외계층 대두 등 새로운 사회문제를 유발하는 역기능도 갖고 있다.`정보격차'(Digital Divide)란 인터넷ㆍ통신기술이 급속히 발달하면서 정보 접근도가 높은 계층과 그렇지 못한 계층 간에 발생하는 차이를 말한다. 이 차이는 주로 소득 차이에서 비롯되지만, 지식정보화사회에서의 정보격차는 다시 교육기회 및 소득 분배의 불균형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정보격차 문제로 인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정보화 시대의 심각한 사회경제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21세기 지구촌에 혁명적 변화를 불러왔던 인터넷은 새로운 가치와 기회 제공, 생활의 편리함과 여유로움, 그리고 사회적 불평등 해소와 경제 활동의 투명성 제고 등의 정의로운 사회 실현에 대한 기대를 갖게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능력 정도에 따라 정보의 접근성에 큰 차이를 보인다. 정보 소외 계층이 생겨나고, 다시 빈부 격차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나타나고 있다.정보격차 현상은 국제 관계에 있어서도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많은 선진국들이 정보 인프라를 선점함에 따라 대부분의 지식과 정보를 보유하면서 후진국과의 정보격차와 빈부격차를 심화시키고 있는 것이다.한국인터넷정보센터가 최근 발표한 국내 인터넷 이용 현황 자료에 따르면 성별 인터넷 이용자 구성비는 남녀 비율이 54.7 대 45.3으로, 지난 2000년의 57.6 대 42.3과 비교해 여성의 인터넷 이용률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직업별로 살펴보면 학생이 95%로 가장 높고, 사무직이 81%, 전문ㆍ관리직이 81%로 높은 반면, 주부는 37%, 생산관련직은 29%로 낮다. 또한 연령별로는 29세 이하의 경우 90%를 상회하나 50세 이상에서는 10%에도 이르지 못하고 있다. 직업별ㆍ연령별 격차가 다소 줄어드는 추세이지만 아직도 일부 직업 및 연령대에 인터넷 이용이 집중되고 있는 것이다.국가별 정보격차는 더욱 심하다. 북미와 유럽 선진지역은 50%전개되고 있다. 특히 노인을 대상으로 지난 2001년부터 실시되는 무료 인터넷 교육인 실버넷운동은 전국 100여개 대학에서 현재까지 3만4000여명이 교육을 수료했다.실버넷운동은 일회성 교육으로 끝나지 않고 교육생들의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인터넷신문도 발간하고 있다. 이 때문에 실버넷운동은 정보격차를 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좋은 사례로 해외에서도 벤치마킹하고 있다.정보격차 해소를 위한 활동은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에게까지 확대되고 있다. 한국인터넷정보센터가 지난 2001년부터 실시하는 `주한 외국인 노동자 무료 인터넷 교육'은 필리핀ㆍ몽고 등 22개국 5000여명을 교육해 개도국들의 한국에 대한 이미지 제고에 기여했다.우리나라는 IT 및 인터넷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인프라를 갖추고 있는 정보화 강국으로, 국내뿐 아니라 국가별 정보격차 해소에도 적극 나서야 한다. 특히 아ㆍ태 지역의 인터넷 맏형으로서 IT 허브 구축에 선도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지식정보화 사회에서는 `정보' 자체가 경쟁력이기 때문에 `정보에의 평등한 접근성' 보장이 건전한 사회 발전의 관건이라 할 수 있다.Ⅱ.본론정보화의 역기능 차원의 사회사업적 과제문제1. 정보격차에 따른 빈부격차, 소외현상 심화의 문제정보자본화, 음란정보로 인한 저질문화의 확산, 개인정보 유출로 인한 사생활 침해, 통신 및 인터넷 중독증, 빈번한 실업과 직업전환, 가족 공동체의 위기, 과다한 정보로 인한 스트레스 등 수많은 부작용이 예상되는 정보화 사회, 그러나 정보화사회의 최대의 사회문제는 바로 정보약자의 문제이다. 정보시스템 보유정도 및 이용능력에 따라 빈부격차,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심화될 수 있고 나아가 정보이용능력이 없는 사람은 생활행위의 무능력자로 전락할 수도 있다.사회가 정보화되어 간다는 것은 살의 양식이 점점 더 정보시스템 의존적이 되어 간다는 것이다. 과거의 정보시스템은 정보획득 또는 의사소통의 수단에 불과하였으나 이제는 홈쇼핑, 홈뱅킹, 원격 민원서비스, 재택근무, 원격교육, 원격진료, PC통신학습, 온능력자로 전락할 수도 있다.정보격차에 따른 빈부격차, 이것이 정보화시대에 있어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가 될 것이다. 지금의 사회적 약자들은 정보기술에 의해 장애를 극복하는 등의 혜택을 얻는 것 같으나 그것보다 더 빠르게 그리고 더 영향력있게 정보격차에 따른 장벽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가난한 사람과 장애인, 노인들은 대체로 정보약자이다.돈이 없어 컴퓨터나 모뎀, 휴대폰, 삐삐 등 각종 통신기기와 살 수 없거나 정보통신서비스를 구매할 수 없으며, 또는 배우지 못해 이용할 수 없거나 당장의 생계에 쫑겨 정보통신 서비스를 이용할 여력이 없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하여 상대적으로 정보약자에 속하는 계층이다.누구나 이용하는 전화기, 공중전화, 컴퓨터, 컴퓨터통신과 인터넷 등의 각종 정보통신 기기나 서비스가 장애 때문에 접근되지 못함으로써 장애인은 절대적 정보약자이기도 하다. 누구나 볼 수 있는 PC통신 정보나 TV를 시각장애 때문에 볼 수 없고 일반적으로 이용하는 전화서비스를 청각, 언어장애 때문에 이용할 수 없고... 장애인은 균등한 기회를 부여받지 못하고 있다. 결국 지금 우리가 돕고 있는 1차적 클라이언트라고 할 수 있는 사회적 약자들은 절대적 또는 상대적 정보약자이다. 정보약자는 정보화의 진전에 따라 점점 더 소외되어지고 상대적 빈곤은 심화되며 이는 다시 더 큰 정보격차를 낳고 악순환을 진행해 갈 것이다.이 문제는 다음과 같이 두가지 차원, 즉 정보통신쪽으로부터의 접근인 보편적 서비스와 사회복지적 접근인 중간집단의 활용책으로 나누어 대응책을 정리한다.--보편적 설계, 보편적 접근, 보편적 서비스정보격차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보통신쪽에서 접근하는 방법이 보편적 설계, 보편적 접근(Universal Design, Univeral Access)의 정책이다. 일반적인 정보기기와 서비스를 장애나 지역이나 경제력에 구애없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화기를 만들 때 난청인도 이용할 수 있게 증폭기능을 내장하게 하는 것이다. 시각장애인을 위해 통신의이용할 수 있게 한다.증폭기능이 내장된 전화기라면 시끄러운 곳에서도 통화할 수 있고 노인들도 잘 사용할 수 있다. 높이가 낮은 공중전화는 키가 작은 사람이나 어린이, 허리가 굽은 노인들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청각장애인을 위해 설계한 TV자막은 건청인의 외국어 학습에도 도움이 되고, 옆사람에게 피해주지 않고 조용히 시청할 수 있으며, 전화통화를 하면서도 시청할 수 있게 한다. 누구나 이용할 수 있게 보편적으로 설계하는 것이 어려울 때는 보조기기나 소프트웨어를 사용한다. 청각장애인이 문자전화기나 중계서비스를, 지체장애인이 컴퓨터의 특수 입력장치를, 시각장애인이 음성합성장치를 이용하는 것은 보조적 해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보편적 설계의 지침, 접근성 지침, 특수기기의 개발 및 보급,교육, 비용의 보조 등을 위한 각종 제도와 전달체계를 만드는 것이 사회사업적 과제이다.--Problem-Identification System정보격차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사업적 접근으로서 또 다른 방법은, 정보약자인 소외계층과 서비스사이에 제3자를 개입시키는 것이다. 정보 이용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중개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는 것이다. 일반 시민들이 자기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을 발견했을 때 적절한 복지기관 등에 알려 주거나, 정보와 자원을 이들에게 연결시켜 주도록 하는 것이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대했을 때 어떻게 응대하고 도와주어야 할 것인지에 관한 정보를 정보시스템을 통해 제공해야 하는 것이다. 가상공간의 네티즌들을 조직화하여 Problem-Identification System으로 활용하기 위한 사회사업적 접근이 Virtual Community 사업의 하나로 다루어져야 한다.문제2. 노동으로부터의 소외산업혁명에 의한 기계화는 수작업을 대체함으로써 수많은 일자리가 없어졌다.사람들은 실업문제를 염려하였으나 기계화로 없어진 일자리보다 새로 생겨난 일자리가 훨씬 많았다. 미래학자들은 21세기의 최대 사회문제가 '실업'의 문제일거라고 한다. 정보기술의 발달에 .미래사회는 서비스부문, 그리고 정보기술을 필요로 하는 새로운 직종과 일자리가 증가하고, 단순노동이나 지식산업은 퇴조할 것이라고 한다. 어쨌든 정보사회에서 실업률이 증가하지 않는다 해도 노동과 관련하여 적어도 두가지 문제는 사회사업가의 관심사항으로 다가온다.첫째, 노동시장으로부터 사회적 약자들이 소외된다는 것이다.정보기술 및 컴퓨터기술의 발달에 의해, 지금의 사회적 약자들의 일자리들부터 없어질 것이고, 반대로 새로 창출되는 것은 주로 고도의 정보기술과 정보시스템 접근능력을 필요로 하는 '고급 직종'들일 것이다. 서비스 부문에 수많은 일자리가 생겨나겠지만, 그것은 건강하고 잘 생기고 지적이며 세련된 사람들을 위한 자리가 아닐까? 그렇다면 가난하고 건강하지 않으며 세련된 복장이나 외모를 갖지 못한 약자들은 서비스 부문의 노동시장에서도 소외될 것이고, 고급직종의 노동시장에서도 상대적으로 불리한 입장이지 않을까? 적어도 지금의 소외계층의 대다수는 정보사회의 노동시장에서 경쟁력을 갖기 어렵고 따라서 이들에게는 실업률 그 자체가 문제가 될 것이다.둘째, 빈번한 실업과 재취업에의 적응에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어느날 갑자기 정보기술이 자신의 일자리를 빼앗아 가버린다면, 그로 인한 사회적, 가정적, 심리적 문제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또한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신기술을 배우고 준비해야 한다. 소외계층 뿐 아니라 누구에게라도 이런 경우에는 사회사업적 개입의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 동병상련이라고 했나? 같은 어려움을 겪는 실업자를 대상으로 새로운 복지 서비스와 상품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특별히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재취업 프로그램도 필요할 것이다.문제3. 온라인 착취 및 폭력, 유해정보로부터의 보호정신지체인이나 청각장애인 복지 분야의 전문가들은 정보사회에서 이들을 보호하는 것도 중요한 사회사업적 과제라고 한다. 정신지체인이나 청각장애인들 중 어떤 이들은 느끼는 대로 행동하고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거나 절제할 줄 아는 판단력과 의지가 다소 부족하다고 한다. 따라서 가상것이다.
    사회과학| 2004.06.22| 8페이지| 2,000원| 조회(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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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port한국인의 생활과 풍속사학과 9711001강병철노장춤노장은 탈춤의 파계승 마당에 등장하는 중심 인물로서 상좌나 먹중의 우두머리이며 평생을 불도에만 정진하여 도가 높은 노승이다.극중 내용 전개 과정에서 보면 노장은 먹중의 부추김으로 속가에 내려와서 소무라는 미색에 현혹되어 마침내 파계하기에 이르는데 고답적인 관념의 세계에서 비속한 현실의 세계로 이행하는 과정을 몸짓말에 가까운 묵극적인 춤을 통하여 표현한다. 특히 소무의 능란한 유혹에 빠져 거룩함과 속된 것 사이에 내면적 갈등을 겪다가 이윽고 소무와 결합하여 현실적인 육체성을 구가하는 대목은 응축되고 정제된 표현과 함께 유형화된 연극적 약속의 이야기춤 으로서 가히 탈춤의 백미라 할 만하다.한마디 말도 없이 몸짓과 춤으로만 엮어 가는 노장춤은 우리 춤언어가 지니고 있는 의미 전달 체계로서 정확성과 다의성(多義性)을 살펴보고 개발하는 데 핵심적인 연구 대상이 아닐 수 없다.노장춤은 소무와 관계를 맺는 배역춤의 하나이기도 하지만 한 탈춤을 구성하는 여러 마당 이름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또 산대놀이나 봉산탈춤에서는 노장이 중심이 되어 각기 독립된 마당으로 진행되는 파계승놀이(노장춤), 신장수놀이(신장수춤), 취발이놀이(취발이춤)를 하나의 틀거리로 묶어서 노장춤이라고 통칭하고 이들 셋을 각각 하나의 거리(景)로 나누기도 한다.전승내용노장춤 마당은 여러 지역의 탈춤에 두루 분포되어 있으나 내용의 질감상 큰 격차를 보이고 있다. 하회별신굿에서는 중이 등장하여 각시의 오줌 냄새를 맡고 기꺼워하는가 하면 고성오광대에서는 중이 두 소무에게 접근하여 맞춤을 추고 통영오광대에서는 상좌중이 제대각시와 노닐다가 한량에게 내쫓긴다. 여기에 나오는 중들은 노장춤의 원초적인 모습일 터이다.가산오광대에서는 노장이 은가락지로 서울애기를 유혹하여 등에 업고 상좌와 달아나다가 말뚝이에게 잡혀 양반 앞에서 볼기를 맞고 처량하게 신세 타령을 한다.은율탈춤에서는 노승이 이미 국화주에 취해 비틀거리며 나와 중타령을 하다가 새맥시를 사이에 두고 최괄이와 다투어 그에게 진다. 최괄이는 양반춤 마당으로 넘어와 새맥시와 말뚝이(또는 원숭이)사이에 낳은 아이를 자기 아이라고 좋아한다.이렇듯 가산이나 은율에서는 노장춤 마당과 양반춤 마당이 미분화된 채로 얽혀 있다. 노장춤으로서 짜임새가 탄탄한 것은 황해도 탈춤이나 산대놀이이다.봉산탈춤의 노장춤 마당은 앞에서 보듯 세 거리로 나뉘어 있다. 8목중에 이끌려 등장한 노장은 목중들의 놀림거리가 되고 나서 소무의 유혹에 넘어가 육환장을 버리고 염주를 건네주고는 파계한다. 현실 세계에 눈을 뜬 노장은 소무에게 신을 사 주고 신값 대신 장작짐으로 얼러 신장수와 원숭이를 물리친다. 신장수와 원숭이의 등장은 노장의 파계 과정을 마무리해 주고 노장이 현실 세계로 넘어온 바를 땅다짐해 주는 삽입 대목이면서 한편 취발이의 등장을 예고해 주는 이음새 또는 이행적 다리 의 몫을 한다. 취발이가 나타나면 노장은 소무를 지키려고 그에 맞서 힘겨룸까지 벌이나 결국 쫓겨나고 말고 취발이는 돈으로 소무의 환심을 사서 아이를 낳고 글을 가르치며 정착한다.강령탈춤의 노장춤은 봉산의 것과 비슷하나 신장수거리가 없다. 양주별산대놀이의 노장춤도 내용 전개상 봉산과 비슷하나 단락구조가 분명하고 한결 안정된 정형성을 보인다. 거기서 노장은 소무의 입술을 떼어 먹기도 하고 소무가 거절하면 화를 내고 투전판에 끼어들기도 하는 등 성격 창조에 적극적인 면을 보인다. 그러나 취발이의 재담과 완력에 당하지 못하고 결국 노장은 그에게 쫓겨 소무 하나를 거두어 나가고 취발이와 소무 사이에 아이가 나면 해산모가 받는다.송파산대놀이의 노장춤 마당은 양주의 것과 거의 같다. 남사당의 놀이 종목 가운데 탈춤인 덧뵈기에는 먹중 마당이 있어 피조리를 가운데 두고 먹중과 취발이가 다투는데 신장수놀이만 없을 뿐 내용은 위의 것들과 비슷하다.노장춤 마당의 내용은 탈춤의 기원이 그러하듯이 풍농굿의 갈등구조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겠다. 소무의 가운데 두고 노장과 취발이가 다투는 갈등 구조로 여름과 겨울의 싸움 이라는 세계 공통적인 민속 현상이면서 특히 우리에겐 풍물패 중심의 서낭굿의 싸움 주지(主旨)에서 그 원초형을 찾게 된다.이와는 다른 계통으로 노장춤의 선행(先行)예능으로서는 무엇보다 백제 사람 미마지가 중국 오나라에서 배워 일본에 전하였다는 불교 선전 묵극 기악을 들 수 있다. 거기에는 곤륜, 역사, 오녀가 나오는데 이는 그대로 노장과 취발이와 소무에 비견된다. 오녀 가운데 두 여자를 유혹한 승려 곤륜을 역사가 꾸짖으면 곤륜이 항복하는 시늉을 짓는다. 여기에 나오는 곤륜이라는 극중 배역이 노장의 한 원형으로서 절간의 탈놀음에 등장되다가 조선조에 들어와 현실적인 인물로 발전을 보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현행 노장춤은 불교 교훈극의 것이 아니어서 취발이가 노장의 파계를 꾸짖기 위해 등장하지 않고 그를 상대로 소무를 두고 현실 향유적인 몸싸움을 벌이는 것이다.기악과는 또 달리 문헌 기록을 보면 에 승광대 가 보이고 유득공의 에는 사호만석승무 와 당녀소매무 가 보이는데 이때 만석중은 노장이고 당녀와 소매는 산대놀이의 당녀와 소무탈과 연관되어 만석중놀이와 노장춤이 서로 영향 관계에 놓여 있음을 추정해 보게 된다. 또 정현석의 에 나오는 14종의 춤 가운데 있는 승무는 상좌와 노장, 소무와 풍류랑이 서로 갈등을 일으키며 다투는 일장 잡희인데 이것도 노장춤과 관련이 있을 법하다.이러한 선행 예능들은 풍농굿의 제의적 갈등 구조 속에 접수되면서 오늘날 노장춤에서 보듯이 현실주의적인 희극적 갈등 구조의 것으로 전화되었다고 보아 좋을 것이다.춤사위의 특징첫째 노장의 심리적 갈등이나 감정의 변화, 상황에 대한 대처등을 사실적으로 묘파하는 현실주의적인 몸짓춤이 주조를 이룬다.이러한 몸짓춤은 세부적인 것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세부적인 것 속의 핵심을 얻어서 이를 반복적으로 율동화시킴으로서 하나의 양식으로 틀을 잡은 연극적 약속 의 춤동작들이다.이를테면 산대놀이에서 복무대목을 보면 엎드렸다가 서서히 일어나 앉아 이도 닦고 세수도 하고 장삼 자락으로 얼굴을 문지르는데 이때의 동작은 몸짓말이면서도 장단을 탄 춤으로서 의미 전달의 내용을 담아 이를 유형적 율동으로 진전시킨 것이다. 이는 일상적인 것을 토대로 하되 일상성을 총체적으로 비약시키는 변증법적 과정을 거친 단계의 것이다.둘째 몸짓춤과 춤조 몸짓은 관계와 관계 속에서 이야기를 엮어가고 이것이 극적 내용을 구성한다. 이를 통해 정황과 사건 내용을 원활하게 전다, 소통시키는 이야기춤으로서의 상황 이 창조된다. 예를 들어 노장이 소무를 바라볼 때 하는 동작을 보면 소무를 바라본다는 의미 그 자체에 머무르지 않는다. 멀리서 또는 가까이서 부채를 편 채 부채 너머로 또는 어깨 너머로 또는 뒷걸음치며 홀깃 쳐다보는 등 여러 가지 동작군을 설정하여 그때그때마다 각기 다른 정황을 설정한다. 이는 노장의 숭고함과 비속함이 어떻게 교차되고 있는지 그 상황을 창출하는데 유효 적절한 표현 방식이 되고 있다. 같은 동작이라도 그 동작이 어떠한 다른 동작들 사이 어디에 배치되는가에 따라 극적 상황의 의미가 달리 안출되는 것이다.
    인문/어학| 2004.05.28| 4페이지| 1,000원| 조회(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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