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암사전북 부안군 산내면 감교리 울금산 정상에는 잘 생긴 한 쌍의 바위가 불쑥 솟아있다. 이 바위가 울금바위고 산 정상부의 산성이 울금산성이다.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항복한 후 도침과 복신의 지휘아래 저항군을 이루어 백제부흥운동을 벌였던 주류성이 바로 이곳이라고 전한다. 개암사는 주류성 아래 산중턱에 자리잡아 마치 울금바위를 머리에 이고 있는 형상이다.이 절의 역사는 634년 묘련왕사가 기존의 변한 궁전 터를 사찰로 고치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전한다. 백제 무왕 35년(634년)에 묘련왕사가 변한에 있는 궁전을 절로 고쳐 지을 때 묘암의 궁전을 묘암사, 개암의 궁전을 개암사라 부른데서 비롯되었으며, 40여년 후인 통일신라 문무왕 16년(676년)에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이곳에 들어와 개암사를 다시 지었다고 전해지고 있다.1313년(고려충숙왕)에는 원감국사가 순천 송광사에서 이곳으로 들어와 중창하면서 황금전, 청련각, 청허루 등 30여개소의 건물을 지어 대규모의 사찰이 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가운데로 축대가 가로 놓여 있는 절 안에는 대웅보전, 응진전, 요사채, 그리고 요사로 쓰이는 월성대 정도가 있어 한적한 편이다. 대웅전 오른쪽 새로 지은 요사를 둘러싼 대나무가지 울타리와 갈대는 입구의 단풍길과 함께 개암사의 고요한 멋을 더해준다. 보물 제292호로 지정된 이 절의 대웅전은 정면3간, 측면3간의 팔각지붕으로 조선시대 초기의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다.임진왜란의 전화로 전국 거의 대부분의 사찰들이 불에 타 없어졌다. 전쟁후 전국 각지에서는 가람복원의 도도한 움직임이 활발했지만, 전쟁으로 인해 나라 전체가 알거지가 된 형편이어서, 불사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따라서 전쟁전과 같이 대규모의 가람을 다시 재건하기는 불가능했고 기껏해야 주불전 한 동과 승방 정도를 지을 수 있었다.개암사 대웅보전 역시 임진왜란 40년 후인 1640년에야 비로소 중건되었고, 그 이후에 이렇다 할 불사가 없어서 대웅보전만 달랑 서 있는 단촐한 가람이 되었다. 그러나 비록 규모가 단촐하고 작다고 하지만, 이 시기에 지어진 불전들은 대단한 정성과 솜씨로 꾸며졌다. 전쟁을 통해 오히려 승화된 불심들이 가람의 건물을 장엄하게 장식하는데 모아졌기 때문이다.문화유적:대웅전(보물 제292호), 영산회괘불탱(보물 제 1269호), 동종(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 126호),우금산성(전라북도 기념물 제 20호){{개암사 진입로와, 울금바위{{, 대웅전, 요사채{(개암사 영산회괘불탱)개암사 영산회괘불탱은 1749년(건륭 14년) 「의겸」비구의 작품으로 장 13.25m, 폭9m 크기의 영산회상도이다. 의겸 비구의 작품으로 진양 청곡사, 무주 안국사, 고성 운흥사, 부안 개암사 등 4점의 괘불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불화 17점이 전해지는데 주로 전라도와 경상도 일원의 사찰에 전해지며 활동기간은 40여 년에 이른다.특히 현재까지 발견된 의겸 비구의 작품 4점의 괘불탱화는 크기에서 압도적이고, 영산교주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좌우에 관음, 세지, 문수, 보현, 아미타, 다보여래를 협시불로하는 안정된 구도와 굵은 필선은 거침없으면서도 부드럽게 구사하였으며 밝고 화사한 채색이 당대 최고의 화사(畵師)승이었음을 증명하여 주고 있다.{(응진전 16나한상)2000년 3월 31일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79호로 지정되었다. 모두 16구이다.다양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개암사 응진전의 16나한상은, 17세기에 제작된 여느 불상들처럼 단아한 형태와 부드러운 양감을 지니고 있다. 사적기와 발원기 등 관련기록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양식적인 면에서도 17세기 불상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사적기에 1677년(숙종 3)에 제작된 불상으로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