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문가 요청 쿠폰 이벤트
*상*
Bronze개인
팔로워0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1
검색어 입력폼
  • 무속에관한 다양한 관점
    개 요● 서 론 ------------------------------- 2● 본 론 ------------------------------- 31. 무속의 정의와 역사2. 무속의 사회적 기능 및 역할ㄱ. 노동력의 보장ㄴ. 경제의 상승효과ㄷ. 스트레스의 해소ㄹ.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변혁의지ㅁ. 정체성 확립● 결 론 ------------------------------- 7“무속”에 관한 다양한 접근● 서 론2003년 3월 한 방송채널에서 특집으로 “소리”란 제목을 가지고 잊혀져가는 무당, 기녀, 그리고 소리광대들, 누대를 대물림하며 일생을 송두리째 바쳐 수공을 들인 소리를 간직하고 있는 분들에 대하여 방영을 한 적이 있다. 그 다큐멘터리에서는 “소리”를 간직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의 모습도 담았지만 그 이면에는 한국의 무속의례인 “굿”에 대한 다양한 접근을 통해 한국의 굿과 현대사회에서의 굿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애쓴 흔적이 여기저기 나타나고 있다. 이는 캐나다 정부에서 포틀라치(Potlatch))를 복원하려는 움직임과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으며 굿이 단지 미신적인 행위뿐만 아니라 그 사회에 필요한 존재였으며 그들의 정체성을 확인시켜주는 중요한 매개체였음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굿의 주최가 되는 무속이 이런 미신적인 것 외에도 사회적으로 어떠한 기능을 하였으며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는가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본 론1. 무속의 정의와 역사어느 나라든 그 나라 특유의 토속신앙이 그 규모의 대소차이만 있을 뿐 존재하기 마련이며 그 중 한국은 샤머니즘)적인 성향을 띈 무속신앙이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왔다. 무속이란 무당이라는 사제가 신에게 신도들의 소원을 빌어주는 굿이라는 의례를 베풀면서 공동체를 형성하는 종교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일명 무격(巫覡)이라고도 하는데, 샤머니즘적 원시종교를 지칭한다. 무속의 중심인물은 무당이다. 무격이라 할 때 무(巫)는 여자를, 격(覡)은 남자를 지칭하는 것인데, 일반적으로 무당이라는 명칭이 보편적인게 했다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이런 까닭에 당시의 '무'와 오늘날의 '무당'이 같은 종교적 사제자인지 확인할 도리가 없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남해왕3년(기원후6년)에 처음으로 시조인 박혁거세의 묘를 세우고 제사를 지냈는데 왕의 친누이동생인 아로가 주관하게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가장 무속적인 의례는 신라 진흥왕 때에 시작된 팔관회)로서 지금 말로 하면 나라굿이라고 할 수 있다. 팔관회는 고려 때까지 이어졌고 국선이라는 일종의 나라 무당이 주관했다. 오늘날의 무속과 가장 비슷한 상황을 보여 주는 기록은 고려 중엽인 12세기에 들어와서의 일이다. 당시 문인 이규보는 개성의 늙은 무녀가 굿하는 모습을 묘사한 '노무편)'이라는 시를 남겼다. 이 자료를 통해 적어도 12세기에는 오늘까지 전승되고 있는 무당굿의 틀이 어느 정도 짜여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 기록은 이미 무속이 지배 계층에게 기피의 대상이 되고 밀려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무속은 고대부족사회에서부터 현재까지 이 땅에 가장 오래 전부터 있어온 토착신앙이긴 하지만 항상 환영받아왔던 것만은 아니다. 무속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이미 지배 계층에게 밀려나고 말았다. 한국은 삼국 시대 때부터 통치자들의 손으로 불교, 유교, 도교 같은 외래 종교들이 수입되었다. 특히 대개의 지배 계층은 불교 신앙을 강력한 권유하였는데 신라 이차돈의 죽음은 무속으로 짐작되는 토속 신앙의 반발이 얼마나 심했던가를 보여 주는 한 증거가 된다. 조선조가 통치 이념으로 삼은 유교는 관념적이고 형식을 중시했기 때문에 현실적이고 충동적인 무속과는 처음부터 융화될 수가 없었다. 그 결과 무당은 천민으로 떨어지고 도성 안에서 살 수 없게 되었으며 사대부 계층에게는 접해서는 안 될 금기가 되었다. 조선조에 들어와 나라굿은 없어졌지만 마을 단위로 하는 공동체굿은 여전히 성했다. 무속 종교는 국가의 지배 이념과는 달랐지만 여전히 일반 시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신앙이요, 위로였으며 또 오락이기도 했던 것이다. 살아남았다. 해방 후에도 무속에 관한 한 사정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육이오 전쟁과 남북 분단은 전통적인 삶의 양식을 여지없이 파괴했고 지연을 기반으로 했던 마을굿의 쇠퇴를 가져왔다. 사회가 급속히 근대화, 도시화되면서 마을굿은 더 위축되었는데 여기에 박차를 가한 것이 칠십 년대 새마을 운동이다. 옛날처럼 크게 모시지는 않아도 정신적인 구심점으로 남아 있던 당집은 잘 사는 우리 마을을 건설하겠다는 주민들의 의지 아래 여지없이 부서졌다. 무속은 우리 역사의 초반부에서 이미 지배 계층에게 밀려나고 말았다. 그러나 서민들은 여전히 굿을 통해 종교적인 심성을 유지해 왔다. 오늘날, 주민들을 단결시키고 하나의 공동체로 묶는 기능을 했던 마을굿은 거의 사라졌다. 대신에 개인 길복 위주의 굿이 성행하고 있음은 무속이 나라굿에서 마을굿으로 그리고 이제는 이기적인 목적을 지니 개인 단위의 굿으로 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2.무속의 사회적 기능 및 역할위에서 알 수 있듯이 무속은 지배층이 아닌 피지배층에 뿌리를 둠으로써 정권이 바뀌고 국가가 바뀌더라도 그 명맥을 계속해서 유지하며 사회의 문화에 직, 간접적인 영향을 끼쳐왔다. 그렇다면 무속은 한국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첫 번째, 무속은 협동 노동력이 많이 필요한 농경사회에서 그들의 협동력을 도모할 수 있게 하는 구심점이 되었다. 무속은 조선조에 완전히 지배 이념과는 유리되는 서민들의 종교로 정착하게 된다. 조선조가 통치이념으로 삼은 유교는 관념적이고 형식성을 중시했기 때문에 현실적이고 충동적인 무속과는 처음부터 융화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조선조에 들어와 나라굿은 없어졌지만 마을 단위로 하는 마을굿(공동체굿)은 여전히 성했다. 들이나 바다, 어디에 있든지 비슷한 생업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한 마을에 사는 공동운명체로서의 의식을 튼튼하게 다지고 긍지를 가지게 하는 사회적인 장치로서 마을굿의 기능은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마을굿은 지연(地緣)을 바탕으로 삶의 근거를 이루는 사람들이 모여 한 해 동안 마을이 평 사람들은 무속을 통하여 집단에 대한 소속감과 함께 노동력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두 번째, 무속은 경제의 상승효과를 가져왔다. 경제 패턴이 단조로울 수밖에 없는 농경사회에서 이것은 자본이 돌 수 있게 하는 윤활유 같은 역할을 했다. 어느 마을에서 굿을 한다고 하면 이웃에서 구경을 오기도 하고 사람들이 모이면 으레 장사꾼이 몰려오게 되어 점차 판이 커진다. 밥장수, 물장수, 엿장수가 오고 옷감이나 그릇을 파는 장사치도 오고 사당패 같은 떠돌이 놀이패가 기예를 팔기 위해 모여들고 요즘 같으면 서커스도 들어오고 난장을 한 바탕 벌이게 된다. 무속이 한국의 축제의 역할도 겸하고 있는 것이다. 이른 봄 경기도에서는 도당굿)을 한다. 그때가 되면 무당패는 물론 줄광대가 줄을 타고 묘기를 부리는 등 볼거리를 제공하며 사람들을 끌어 모은다. 그렇게 되면 술장수, 밥장수, 떡장수 같은 온갖 장사치들까지도 같이 따라오게 되며 자연스레 시장이 형성된다. 때맞춰 5일장이 열려 그 상승효과의 덕을 같이 보기도 한다. 모란 5일장이 바로 이때 열리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이웃 마을사람들은 구경을 하러 오게 되고 즐기면서 자연스레 자본의 유통이 이루어지고 서로의 정보를 교환한다. 이처럼 무속은 무딜 수밖에 없었던 경제의 흐름을 원활하게 해주는 장치가 되었다.세 번째로 무속은 부계사회와 계급사회 혹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생겨나는 사람들의 스트레스를 풀 수 있도록 해주었다. 굿과 탈춤의 풍습은 이른바 한(恨)으로 표현되는 과거 한국적 애증 심리의 독특한 양상을 드러낸다. 현실에서 풀지 못하는 스트레스를 무당 혹은 그 옆에서 판을 벌이는 탈춤패가 대신 풀어줌 으로써 대리만족을 느끼게 된다. 넋굿은 죽은 사람을 저승으로 천도하는 굿이다. 그 과정은 실제로 죽음의 과정을 다시 한번 차근차근 재현한 것이다. 죽음은 순간적인 사건이며 어느 정도 예정된 죽음이라고 해도 그것은 언제나 뜻밖의 사건이 되어 놀라운 충격을 주게 된다. 일단 사람이 죽으면 그는 절대 타자가 되어 살아 있는 사람과의 교류가의 즐거움을 느끼게 하고, 나아가 협동과 질서(규정) 익힘의 한 원천이 되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무속은 놀이를 통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그들의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장이 되었다. 강릉 단오굿은 옛날부터 관민이 하나가 되어 행한 축제의 성격이 짙은 마을굿이다. 아홉 구비를 돌아 올라가는 대관령의 사신을 모시는 강릉 단오굿은 강릉 사람만이 아니라 영동 지방의 강원도 주민 모두의 축제로써 오늘날까지도 활발하게 전승되고 있다. 제주신양 영등굿 역시 맨몸으로 거친 바다 물결과 싸우는 장녀들의 소라와 고동을 많이 수확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비는 날이지만 삶의 고단함을 잠시 잊고 여자들끼리 모여 노는 잔칫날이기도 하다.네 번째로 무속은 사회의 부조리한 모습을 스스로 내포하면서 그것을 해소하기 위한 변혁의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 기능이 있다. 사회의 부정적 요소의 긍정적인 배출구로 존재하며 그것을 변혁하기 위해 사회의 약자인 민중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천대를 받는 무당 등이 모두 힘을 합하여 노력한다는 점에서 무속은 큰 의의를 가진다. 민중은 무속을 통해서 견디기 힘들 정도의 환난을 극복해 왔다. 송기숙의 소설 '당제'에 나타나듯이 정든 마을이 수몰되어 내쫓김을 당하는 마을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당제를 지내는 모습은 그들이 민중의 아픔을 마을 굿을 통해서 조금이나마 견뎌보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전남 진도의 도깨비굿 역시 마을에 역질이 돈다거나 재앙이 미칠 때 마을 공동의 집단적 자위본능이 여자들의 숨겨진 속곳을 통해 역동적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이러한 도깨비굿)은 집단적 환난을 극복하는 민중의 벽사의례로서 굿의 건강한 모습을 보여준다. 댐 건설로 인해 어떤 마을이 이전하는 과정에서 생긴 혼란과 갈등을 그 동안 단절되었던 마을굿 때문으로 보고 온 마을이 힘을 합쳐 마을굿을 다시 지내면서 그를 통해서 그 동안의 갈등을 해소하고 새롭게 마을의 결합을 도모하는 것 역시 무속의 마이너리티적인 모습과 그를 통한 갈등극복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여성의 경우도 마찬가다.
    인문/어학| 2003.06.09| 7페이지| 1,000원| 조회(458)
    미리보기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4월 17일 금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1:52 오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