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쟁 당시의 여성 첩보원마타하리.그녀의 본명은 M.G.젤러(Margaretha Geertruida Zelle)이다. 마타하리는 ‘새벽의 눈동자’라는 뜻으로, 후에 매혹적인 여성 스파이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녀의 국적은 분명하지 않으나 네덜란드계(系)로, 1895년 네덜란드인 장교 C.매클라우드와 결혼하여 두 아이를 낳았으나 1901년 이혼하였다. 1905년 자바인 혼혈아라고 내세우며 파리의 물랭루주(1905년 몽마르트에 개장한 댄스홀)에 나타나, 미모와 스트립댄서로 이름을 떨쳤다. 그 무렵부터 파리 상류사회에도 드나들기 시작, 제1차 세계대전 무렵에는 독일의 스파이가 되어 연합국측의 공방작전이나 요새공사 등에 관한 군사기밀을 탐지, 누설하였다. 1917년 프랑스 당국에 탐지되자, 일단 에스파냐로 도망쳤으나 독일 첩보기관의 지령으로 다시 프랑스로 들어왔다가 체포되었다. 그녀의 죄명은 ‘이중간첩’이었다. 마타하리는 그 해 7월 사형을 선고받고 10월 15일 총살당하였다.우리나라에도 이와 같은 여성첩보원이 있었다. 우리들에게 첩보원, 혹은 스파이라 하면 웬지 서양적인 이미지가 떠오르지만, 한국전쟁 당시 우리나라에도 마타하리 못지않은 여성 첩보원들이 있었고, 그들의 역할은 대단하였다. 잊혀졌던 그들의 존재는 ‘아폴로스워리어’를 통해 세상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사라져 갔다. 전쟁 당시 대단한 공을 세웠던 그녀들이었지만, 그녀들 중에는 현재 지하 단칸방에서 어렵게 생활하는 이들도 있고, 작전 수행과정에서 몸을 다치거나 병을 얻은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은 충분한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우리의 기억 저편에 머물러 있다.1. 한국전쟁 당시의 첩보부대- HID와 제1교육대우리 나라 정보담당부서는 지난 46년 군정청 국방총사령부 정보과로 발족하여, 48년 조선경비대 총사령부 정보국으로 변경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육군본부 정보국으로 개편되었다. 50년 7월에는 신설된 육군본부 정보국 공작과가 첩보업무를 담당하였으며, 영문자 HID로 표기하였다. 한국전쟁 발발 후 첩보업무 활성화를 위해 51년 3월 공작과를 독립된 육군첩보부대로 발족하였다.HID는 직할대와 36지구대 18지구대 등 여러 지대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각 군단과 사단에 이러한 지대를 파견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HID소속 첩보부대는 30개가 있었다. HID직할대가 제1교육대 였고 36지구대와 27지구대는 동해과 서해안 지역을 각각 맡아 첩보활동을 벌렸다.HID 제1교육대는 52년 10월 서울 성북구 정능동 청수장에서 창설되어 53년 6월까지 3기의 교육생을 배출했다.- 켈로부대48년 미극동사령부 정보처는 미 제24군단 정보처 산하부대인 '442CIC'와 당시 서울에서 활동하던 정의사 등 여러 반공단체를 망라하여 켈로부대를 만들었다.켈로부대는 200~300명씩 3개 지대로 나뉘어 활동했다. 민간인 신분인 첩보원들은 초도 영종도 백령도 등에 파견대를 설치 운영했다. 51년 8240부대로 유격군 첩보부대를 통합 운영하면서 베이스캠프는 용산 선린상고에, 본부는 종로 태화관에 설치했다. 53년 9월 휴전협정으로 전격 해체하게 된다.이 부대의 20%는 여성첩보원들로 구성됐다. 켈로부대의 대표적 전과는 계인주대령 연정 최규봉 등 3명이 50년 9월 14일밤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인천앞바다 팔미도 등대를 점령함으로써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명단이 확인된 대원중 전사 실종자가 3,415명이고 생존대원은 350으로 알려졌다.이상은 당시 공식적으로 조직되었던 첩보부대이다. 하지만 각 부대에는 비밀리에 첩보부대가 구성되어 있었다. 많은 여성들은 각 부대의 유격대 소속으로 남성과 같은 강도의 훈련을 받으며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을 길렀고, 충분한 사상 검증도 받아야 했다. 그런 그들은 각각 정해진 위치로 보내어져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게 된다.2. 여성 첩보원들의 활동한국 전쟁은 첩보전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 어느 때 보다 첩보활동이 두드러졌다. 특히 여성 첩보원들의 역할과 공은 매우 켰다.초기에는 국경을 넘는 사람들을 통해 주로 정보를 얻었지만 한계가 있었고, 신빙성의 문제도 있었으므로 미국 CIA가 개입되어 첩보전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얼굴 생김새와 피부색이 다른 그들은 한국에서 첩보활동을 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리하여 CIA요원들은 그들을 대신하여 한국에서 활동할 새로운 첩보원을 양성시켜야만 했다.처음에는 남성들을 위주로 구성이 되었으나, 활동에 있어서 제약을 받고 의심의 여지가 많아서 실패확률이 높았다. 그리하여 여성 첩보원을 찾게 된 것이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다양한 방법으로 정보를 수입할 수 있었다. 특히 그들 중 외모와 지략이 뛰어난 18명으로 구성된 최정예 특수 첩보원( - 래빗)들은 그러한 점들을 이용하여 인민군 장교들과 가까워지며 그들에게 고급 정보를 빼내었다.다음의 내용은 당시 첩보활동을 했던 이들의 증언 내용이다.- 이순옥: 나는 당시 10대의 소녀였다. 당시 군인이었던 오빠의 권유에 의해 처음으로 북한 군대에서 정보를 빼내게 되었다. 그 내용을 오빠에게 알려주면 오빠는 다른 사람들에게 다시 알려서 작전을 세우곤 했고, 또 나에게는 새로운 임무가 전해졌다. 나는 후에 유격대 소속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아주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는데, 특히 낙하교육을 많이 받았다. 그것은 북쪽으로 보내질때, 주로 비행기에서 낙하하여 정해진 위치로 가게 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때로는 몇날 며칠을 걸어다니며 정보를 수집해야 했고, 그 과정에는 수없이 많은 죽을 고비를 넘겼다. 나는 밥을 뭉쳐 보자기에 싸가지고 다니며 끼니를 때워야만 했다.- 백운학: 내가 교육시켰던 많은 여성 첩보 요원들 중 많은 이들은 북으로 가는 과정에 죽기도 하였다. 비행기에서 낙하하는 과정에 프로펠러에 껴서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고, 낙하과정에서 사고로 사망하는 경우도 비일비재 하였다. 그러나 살아서 정해진 곳에 도착한다고 하더라도 생명의 안전은 보장될 수 없었다. 내가 교육시킨 48명중 북으로 갔다가 살아 돌아온 이들은 별로 없었다.- 오박: 그들의 활동이 얼마나 대단하였는가는 북쪽에 여성 첩보원 전용 수용소가 있었다는 점을 보면 알 수가 있다.-연정: 한국전쟁 당시 원산에 페스트가 유행한다는 소문이 돈 적이 있었다. 그 때 X5는 야전 병원에 간호장교로 잠입하여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밝혀냈다. 페스트가 퍼지면 북한이나 남한이나 모두 큰 피해를 보게 될 것은 뻔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전쟁을 고수하던 맥아더마저도 주저하게 되는데, 이런 상황에서 X5의 정보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김병직: 정보를 빼내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으나, 그것을 가지고 돌아오는 것 역시도 매우 힘든 일이었다. 그 과정에 발각되거나 목숨을 잃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언젠가 정보를 빼내고 동료 요원과 돌아오던 중 앞에 가던 동료가 지뢰를 밟은적이 있었다. 그녀는 죽었고, 나는 그 파편으로 배에 매우 심한 상처를 입게 되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소련군 병원이었다. 그들은 내가 죽을 거라고 여기며 그냥 방치하였고, 나는 일주일이 지났을때 정신을 차릴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곳이 폭격당한 틈을 타 도망쳤다.
임진왜란 당시 원군파견과 대명외교- 序論역사적으로 한국과 중국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국경을 맞댄 양국 사이에는 때로 중국의 침략과 그에 대한 우리의 저항에 의해 적대 관계가 지속되었던 시절이 있었지만 전체적인 흐름에서 볼 때 평화적이고 우호적인 관계가 더 오래 유지되었다. 그것은 책봉(冊封) - 조공체제(朝貢體制)라 하여 중국을 대국으로 섬기고 그 대가로 우리의 우호와 독립성을 인정받는 기제에 의해 유지되었다. 특히 조선 시대의 양국 관계는 책봉(冊封) - 조공체제(朝貢體制)의 가장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었다. 조선 전기에는 기본적으로 이에 기반한 사대관계를 바탕으로 조선이 명을 섬기는 상황이었다. 조선 왕조가 명에 대해 사대 정책을 취한 것은 어디까지나 새로 건국한 조선을 국제적으로 승인 받고 그를 통해 정치적 안정을 꾀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주체성이나 자주의식을 망각한 것은 아니었다. 요컨대 조선 초기부터 16세기까지 양국관계는 대체로 우호적인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요동 정벌 문제, 여진족 문제) 등 일부 현안을 놓고 상당한 파란을 겪었다.조선은 국가의 독립을 유지하고 선진 문물을 수용하려는 의도에서 사대 관계를 받아들였지만 명의 압력에 의해 자주성이 침해되거나 국익이 심하게 손상 받는 상황에 처할 경우 명에 대한 저항도 불사하는 양면적인 입장을 보였던 것이다. 명과 사대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자주성과 자존의식을 지키려 했던 분위기는 16세기 말엽을 지나면서 특히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맞아 조선이 위기에 처했을 때 명이 조선에 대군을 파병한 것은 이후의 양국관계를 임진왜란 이전의 그것과는 현격히 다른 성격을 지니는 것으로 바꾸었다.여기서는 임진왜란 당시의 원군 파견과 대명 관계에 대하여 알아보고, 임진왜란에 명군이 참전했던 것이 조선에서 재조지은(再造之恩)이 형성되고 숭앙되었던 사실에 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1. 명의 원군파견일반적으로 임진왜란 시 명이 조선에 군대를 파견한 것은 조선의 구원 요청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조선의 구원요청이히 가도입명(假道入明)을 떠벌이고 있었다. 이같은 사실은 명의 복건 지방과 일본을 오가며 무역했던 상인들을 통해 알려졌고, 명 조정에도 보고 되었다. 명은 실제로 왜란이 일어나기 2년 전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 가능성을 감지하고 있었다. 실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은 산동, 천진 등 자국 연안의 방어 태세부터 먼저 점검했다. 그러고는 상황을 관망했다. 그들은 일본군의 진로, 조선의 대응 등을 유심히 살피면서 자국에 미칠 영향을 따져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무엇보다 주시했던 것은 일본군이 과연 압록강을 건너 자국 영토로 진입할지의 여부였다.왜란이 일어나기 전 왜구들이 주로 공략했던 곳은 복건과 절강이었다. 왜구 때문에 이들 지역이 겪어야 하는 피해는 심각했다. 하지만 복건과 절강은 수도 북경과는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다. 왜구, 아니 일본 정규군이 복건과 절강에 상륙한다 해도 그들이 북경가지 위협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요동은 달랐다. 요동에서 북경은 그야말로 지척이었다. 명은 결국 원병을 보내기로 했다. 요동을 지키는 울타리로서 조선의 전략적 중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요동이 명에게 ‘이(齒)’라면 조선은 ‘입술(脣)’이었다.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린 법이다. ‘순망치한(脣亡齒寒)’. 그것이야말로 명군이 조선에 들어오게 된 진짜 이유인 셈이다.2. 재조지은(再造之恩)의 형성과 의미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에 이르는 명?청 교체기 때의 조선은 임진왜란을 겪게 되면서 명과의 관계에서 책봉과 조공체제라는 전통적인 기제 이외에 재조지은(再造之恩))이라는 또 하나의 변수를 형성하게 된다. 이는 훗날 후금과의 싸움에서 명이 조선에 원조를 요구하는 이용이 되기도 한다. 선조 ? 광해군 ? 인조 대에 걸쳐 이것은 조선의 내부 사정과 맞물려 오랫동안 많은 문제들을 야기 시키고 곤란을 겪게 하기도 했다. 이렇게 임진왜란 이후 대명관계에 있어서 변수로 작용하였던 재조지은에 주목하면서 대명관계의 실상과 추이를 살펴보도록 한다.(1). 재조지은(再造명과 일본 사이의 강화 협상을 결말을 맺지 못하고 시간만 지루하게 끌었으며, 그 과정에서 조선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강화논의 대두 이후 명군이 싸우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은 채 장기 주둔에 들어감에 따라 그들에 대한 부담과 민폐 등으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보아야만 했다. 이에 따라 조선 조정에서도 명군과 그들의 역할을 부정적으로 보는 인식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끝날 무렵을 전후해서 조선 조정에서 명의 참전을 재조지은이라 찬양하고, 그를 숭앙하는 관념이 형성되고 나아가 명에 대한 모화의식이 깊어지게 된다.이는 왜란 당시 조선이 처해있던 위기 상황이 어느 정도 절박한 것이었는가를 살펴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다. 거듭되는 패전과 추격해오는 일본군은 선조나 조정 신료들을 비롯한 지배계층에게 패망의 위기의식을 크게 심어주었고, 상황이 절박할수록 명군의 참전과 원조가 갖는 의미 역시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재조지은의 형성과 강화는 자연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었다.또한 일본군에게 쫒기고 그 과정에서 목도했던 민심의 이반 현상은 더욱 지배층을 불안하게 만들었고, 명군의 존재를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는데 중요한 버팀목으로 인식하게 되면서 재조지은의 관념은 더욱 강조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선조와 조정 신료들이 재조지은을 강조하였던 배경에는 전쟁을 불러온 책임 소재, 전쟁을 끝낼 수 있었던 동력이 무엇인가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재조지은을 강조하면 할수록 재야의 의병장들이 했던 역할의 의미는 퇴색하고), 전쟁과 연이은 패전을 불러온 책임 소재를 따질 때 상대적으로 무거운 부담을 질 수밖에 없었던 선조나 조정 신료들의 정치적 입장은 다소 완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2). 재조지은과 대명외교이렇게 형성된 재조지은은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에도 조선의 지식인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16세기 이래 조선을 소중화로서 자처하고 있었던 지식인들은 존망의 기로에 몰렸던 임진왜란 당시 명이 원병을 파견하여 도와줌으로써 양국 관계가 실질적으로 혈맹으은 당연히 명과의 관계를 유지해나가는데 하나의 큰 변수가 되었다.조선뿐만 아니라 정유재란) 이후에는 명 역시 재조지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제 명 스스로도 자신들의 조선 참전을 재조지은이라고 규정하고, 조선에 대해 그에 보답할 것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실제 1599년 총독 형개는 전쟁이 끝났다고 지적한 뒤, 이제 명의 궁궐 공사에 필요한 비용 가운데 일부를 조선이 보조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명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는 조선의 입장과 그를 강조하는 명의 태도가 맞물리면서 재조지은을 강조하는 분위기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욱 확대되었다. 조선에서는 선조 말부터 국가가 재조된 것은 털끝만한 것도 오로지 명의 은혜라고 인식하고 명에 대한 사대(事大)와 향상(享上)의 예를 행할 때 모든 정성을 다하되 다른 것을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17세기 초에 이르러 명나라 인사들은 왜란 당시 자신들이 조선을 구원했으며 그 때문에 자신들은 여러 방면에서 손실을 입게 되었고, 따라서 조선은 그 은혜를 깊이 새겨야 한다고 공공연히 내세웠다.ㄱ. 광해군의 대명외교광해군대에 들어와 후금(後金)에게 요동을 상실당하고 수도 북경으로 이어지는 전략적 요충인 산해관마저 위협받는 상황이 되자 임진왜란 당시 자신들이 베푼 은혜를 거론하면서 그에 대해 조선의 보답을 촉구하는 태도는 더욱 심화되었다. 죽, 장치 대병이 올 것을 안 명군은 재조지은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후금을 칠 터이니 조선의 병사를 보내달라는 요청을 조선에서 보내온 것이다.한편 이와 때를 같이 하여 후금의 누르하치로부터 함경감사에게 개전한 사실을 통보받았으며, 그 통보의 주된 내용은 조선을 결코 파병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명의 계속되는 파병 요청과 후금이 동병하지 말라는 요청을 둘 다 듣고 있던 광해군은 명의 계속되는 출병강요와 압력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군사들이 제대로 훈련받지 못해 조선을 지키기에도 부족한 형편이라 국내 수비에나 치중하게 하는 것이 후방수비라는 측면에서 유익한 것이라는 변명을선에 대한 후금의 보복을 막을 수는 있었다.이처럼 광해군은 명분과 의리만을 따지는 조정의 대신들과 달리 명과 후금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냉철하게 간파하여 국익에 유리한 정책을 꾀하였다. 광해군의 대북 외교는 당시 대명관계에서 가장 큰 부담이었던 재조지은을 극복하고 외세의 흐름을 읽고 전략적으로 행한 외교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광해군의 대외정책은 객관적으로 보아도 훌륭한 처세라고 할 수 있으나, 조선 내부의 정치 문제와 맞물려 뒷받침되지 못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명의 징병 요구 회피 등 반대파들에게 여러 가지 정치적 빌미를 제공한 것이 광해군의 정치생명에 치명적인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ㄴ. 인조의 대명외교광해군의 중립외교 정책은 유교적 대의명분을 중시하던 서인 세력의 불만을 고조시켜 결국 김류, 이귀, 김자점, 신경진, 이서 등에 의한 반정(1623년 3월)으로 축출되고 말았다. 광해군을 축출하고 왕위에 오른 인조를 옹립한 서인 정권은 중립외교 정책을 폐기하고, 유교적 대의명분에 입각하여 친명배금 정책을 채택하였다. 인 반정 이후 세력을 잡은 인조와 서인들은 광해군과는 달리 다시 재조지은에 보답하는 방향으로 외교정치를 꾸려나가게 된 것이다.조선 조정은 요동을 수복하려는 모문룡 휘하의 명나라 군대를 평북 철산의 가도(島 )에 주류시켜 이를 은연히 원조해나갔다. 모문룡에게 요동 진군에 필요한 지원을 약속하는 한편 해로를 통하여 명에 사신을 파견하여 인조 등극의 합법성 인정을 요청함으로써 광해군 말년에 소원해졌던 조선? 명과의 관계를 정상화시켰다. 그리고 훈련도감의 정예병과 하삼도(下三道 : 충청, 전라, 경상도)에서 차출한 병력 1만 여명을 서북방의 요충지인 의주, 용천, 안주 등에 증강 배치하여 후금의 침공에 대비하였다.조선은 해마다 국가 경비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엄청난 양의 군량을 계속 공급하고 때로는 군사도 동원하여 토벌을 꾀하는 등, 명에게 최대한의 성의를 보임으로써 재조지은을 뚜렷하게 실현해 나간 것이다. 이러한 인조 정권의 노력은 결국
외국인의 눈에 비친 한국인의 국민성민족성이란 무엇인가?민족성을 정의하기에 앞서 민족과 인종그룹의 개념을 파악하는 것이 먼저 필요하다. 민족이란 기본적으로 공통의 인종적인 기반 위에 성립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의미로서 인종은 민족구성의 본질적 요인은 아니나, 민족과 인종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인종그룹의 구성원이 공유한다고 상정되는 문화적·역사적 자질 등을 가리켜 민족성이라 한다.한 나라의 민족성을 몇 가지의 문장으로 요약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민족은 아주 다양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 모인 집합체이므로, 그들이 모인 단체가 통일된 성격을 갖고 있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많은 나라, 혹은 민족의 민족성에 대해 운운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특성들을 조합하여 유추해 낸 결과일 것이다.예를 들어, 우리는 일본의 국민성을 뚝배기에 종종 비유하고는 한다. 한국인들이 금방 닳아 올랐다가 식어버리는 것에 비해 일본은 서서히 닳아 오르는 만큼 서서히 식는다고 한다. 또 일본인은 대체로 애국심이 강하고 무슨 일에나 악착스럽고 단결심이 강하다. 반면에 마음이 너그럽지 못한데다가 소급하며 남의 나라를 침략하려는 경향도 있다. 왜냐하면 일본은 섬나라로서 환태평양 조산대가 그곳을 지나기 때문에, 일년에도 수없이 많은 자연 재해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살아남으려는 강한 의지와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야욕이 그러한 그들이 성향을 만든 것이다.그렇다면 뉴질랜드의 국민성은 어떤가? 그들은 타인에 대한 믿음을 아주 중요하게 여긴다. 그들은 상대가 무슨 소리를 하더라고 일단 믿어준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이 드러나는 순간 그는 지역 사회에 발을 붙이기가 불가능해진다. 정직은 뉴질랜드 사람들의 근본에 흐르고 있는 절대적인 가치인 것이다. 인간에 대한 신뢰를 기본으로 하여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일하게 취급되어야 한다는 평등주의, 도와 줄 사람 하나 없는 고립된 곳에서 어떻게 하더라도 살아남아야 하는 독특한 자연 환경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실용주의, 수구 세력이 존재하지 않아 개혁에 항상 적극적인 성향, 온갖 인종과 화합하면서 살아가는 다문화주의 등이 이들의 민족성을 묘사하고 있다.그렇다면 한국인의 국민성은 어떤 모습일까?사람들이 말하는 한국인의 국민성은 참을성이 없고, 빨리빨리를 좋아하며 타인은 생각지 않고 집단적인 이기주의가 팽배하다.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면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곧 잃어버리고 원상회복이 된다고 해서 냄비 기질이 있다고도 한다. 또 애국심도 대단해서, 평소에는 찾아보기 힘든 그것이, 나라가 어려울 때가 되면 심지어 결혼반지까지 팔아 금을 모르기도 하는 등의 저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안할 때는 손끝도 까딱하지 않지만 한번 한다고 하면 무서울 정도로 휘몰아친다. 월드컵 응원에서 보여준 격정적인 모습이 이러한 경우의 대표적인 예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을 통해 한국인의 국민성이 어떤지를 알 수가 있다.이 밖에도 외국인들이 말하는 한국인의 국민성을 살펴보면, 신념과 태도에 있어서 상하의식과 경로사상을 중요하게 여기고 폐쇄적인 ‘우리’관을 가지고 있으며, 한국적인 것을 과대 숭상한다. 가치 면에 있어서 ‘정’을 중요하게 여기고, 아들을 중요하게 여기며, 돈과 부를 중요하게 여긴다. 행동 면에 있어서는 눈치를 많이 보고, 타인에게 의지하는 마음이 크며, 명분을 중요하게 여기고, 감정과 의욕을 많이 억제하는 편이다. 특히 한국의 여성이 그러하다고 본다. 또 교육열이 대단하고, 공사를 혼동하며, 감시하지 않으면 법을 지키지 않고, 사치를 좋아한다. 그리고 화를 내야 말을 잘 듣는다고 알고 있다.그렇다면 정말 이와 같은 내용들이 정말로 한국인의 국민성을 반영하고 있는 것일까?위의 내용 중에서 몇 가지를 예로 들어 살펴보기로 하자.우선 첫 번째로 ‘눈치 본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자. 외국인들은 한국인들의 주변눈치를 많이 본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안건에 있어서 대부분의 의견이 비슷할 때 설사 내가 그와 같은 의견이 아니더라도 눈치를 봐서 아무 말도 못한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요즘은 시대가 많이 변하였다. 오히려 획일화된 사고는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한다. 얼마 전 모두가 ‘네’라고 할 때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내용의 광고에서도 나오지 않았던가.그렇게 멀리에서까지 예를 찾지 않고도 우리 주변에는 그것에 대해 반박할 만한 사례가 충분하다. 각자의 의견을 발표하는 토론수업의 경우 아니면 찬반 토론을 하는 경우 사람들은 저마다의 의견을 조리 있게 말한다. 나와 의견이 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더라도 사람들은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하면 그에 타당한 근거를 제시하면서 소신 있게 본인의 의견을 말한다. 또 거리를 나가보면 사람들은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만의 개성을 표출한다. 얼마 전에는 기모노를 입거나, 세일러 복장을 하고 강대 후문을 거니는 학생들을 본 적이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한번쯤 흘깃흘깃 쳐다볼만한 짧은 치마나 특이한 복장을 한 사람도 많다.그 사람들을 보자. 그들이 과연 눈치를 보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요즘 젊은이들은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란 걸까?.두 번째로 ‘돈과 부’를 가장 중요시 여긴다는 것에 대해 살펴보자.돈을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은 비단 우리나라 뿐 만이 아닐 것이다. 문명과 단절되어 살아가는 원주민들이 아니고서야 돈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다만 우리는 급속한 산업화를 거치는 과정에서 경제적으로 힘든 시련을 겪은 이들이 많았고 그렇게 때문에 돈을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모두에게 돈이 최고는 아니다. 더구나 요즘은 웰빙 시대라고 하여 돈보다 건강하고 질적으로 향상된 삶을 더욱 추구한다.어젯밤에 로또에 맞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텔레비전에 방송되었다. 인생역전을 경험한 후, 그들의 삶은 어떻게 변화하게 되었을까?그들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이 돈이었다면, 로또 1등에 당첨된 이후, 그들의 삶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의 상당수는 괴롭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들은 가족과 친구들을 잃어버리는 고통을 겪었다. 그들은 외롭다고 말했다. 오히려 2등에 당첨되어 적당히 좋은(?)금액을 받은 사람들이 훨씬 더 행복하다고 말하였다. 이는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세 번째로 ‘한국 사람들은 사치를 좋아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자.어떤 외국인의 말에 의하면 한국 사람들은 비싸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싸면 좋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정말 그럴까?우리도 텔레비젼에서 종종 본다. 백화점에 진열되어 있는 고가의 상품들, 그리고 그런 것을 구매하는 사람들... 꼭 텔레비전이 아니더라도 얼마 전 서울에 있는 어떤 백화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 백 만 원 단위의 옷과 가방들을 수없이 봤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그러한 물건을 파는 백화점의 직원은 한달 월급이 그런 상품들보다도 적다. 결국 사치를 한다는 사람들은 한국인이 아니라 한국에서 단지 몇 프로에 지나지 않는 상위층의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것이다. 그들의 모습이 과연 한국인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