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사회복지 및 역사1. 식민지 시대의 구민체계2. 독립전쟁 전후의3.구빈산업의 근대화와 전문사회사업의 성립4.전문사회사업의 시작5.전문사회보장법의 성립6.빈곤전쟁과 복지권 운동일본 사회복지 및 역사1.근대 이전의 자선 및 구제2.근대적 빈곤의 형성 및 구빈정책3.자본주의의 성립과 구빈체계4.민주화와 근대적인 사회사업의 성립5.전시체제하의 구수호법과 사회성립6.종전후와 복지3법 체제의 성립7.고경제성장과 사회복지의 발전8.일본형 복지의 등장미국 사회복지의 역사1. 식민지시대의 구빈체계1) 식민지 시대의 계층구조(1) 지배계층 : 국왕의 총독과 고관, 대상인, 대지주(2) 자영농민 : 자기 농토를 소유한 근면하고 독립심이 강한 사람(3) 계약노동자 : 영국 본국으로부터 온 교구빈민과 도제, 죄인들(4) 흑인 노예2) 신민지시대의 빈곤관(1) '퓨리턴'으로 대표되는 프로테스탄트의 생활은 근면과 절약을 최상의 미덕으로 간주.(2) 빈궁해지고 부랑화되는 것을 '죄악'으로 간주.3) 영국 구빈법체계의 응용(1) 구빈의 최소화(2) 구제대상자 :┌─노동무능력자 인디언의 습격과 학살에 의해 가족을 잃어버린 피난민, 고아, 과부, │ 노인 부상자, 재해와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 이주도중 병에 걸린 사람├─일시적으로 구제를 필요로 하는 사람│└─억압대상 : 노동가능 부랑자, 나태자(구타, 낙인, 고문, 추방, 형무소 수용).(3) 구제방법┌─초기: 친족, 이웃에 의한 상부상조.│└─후기: 빈궁자의 증가로 인한 구빈법의 제정 필요성 절감.(4) 구빈방법 : 거택보호 방식(현금, 물품의 지급, 稅의 감면, 교구의무의 경감, 의료비대 여).4) 구빈법과 작업장제도(1) 빈궁자 증가로 인한 공립구빈원에 의한 원내 구호가 출현.(2) 뉴립시립구빈원(1735년 설립): 나태한 방랑자에 대한 징계, 근로시설(혼합형 작업장).5) 민간의 자선(1) 교회가 주축: 병자, 과부, 고아만을 방문하여 구제.(2) 각 모국별 자선협회 설치: 1651년 스코틀랜드 이민자들에 의해 설치.(3) 박애협심으로 한 건전한 노동에 고용, 일정 연령 도달시 독립.* 각 고용의 집에서 건강한 걸식자와 부랑인을 수용, 훈련 시키기 위한 작업장, 감화 원 부설.* 18세부터 50세까지의 건강한 남자에세는 구호 제공 금지.3. 구빈사업의 근대화와 전문사회사업의 성립1) 자선조직협회운동(1) AICP(Association for Improving the Condition of the Poor)자선기관의 역할보다는 사회통제의 역할과 사회질서 유지와 안정되고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역할에 역점을 둠.CAS(Children`s Aid Society) 설립.(2) 설립목적: 빈민을 선량한 중산층 시민으로 재형성하고 고통스러운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3) 배경: 미국자본주의의 발전 속에서 발생한 대량실업빈민의 무질서하고 비체계적인 민 간자선기관으로의 집중을 반성하고 자선의 효율화를 위해 영국으로부터 자선조 직협회의 방식을 도입.(4) 거틴(Gurteen)목사의 의해 1877년 미국 최초로 버팔로에 자선조직협회 창립.* 지방적 자선단체의 대표로 구성된 하나의 위원회 설치.* 서비스의 중복, 자금의 낭비를 방지하기 위해 '중앙등록제' 설치.* 개벌적인 케이스마다 필요한 니드를 측정하여 '개별적 처우'를 결정.* 니드측정을 위한 '우애방문원'으로 하여금 구제신청자 조사.* 미국의 전문적인 케이스웍과 지역사회 조직기술의 시발점 형성.2) 인보운동(1) 형성: 1870년대 노동자간의, 공장지대와 주택가의 생활격차 발생을로 빈민가의 비위 생, 부도덕, 범죄 등의 무질서 출현으로 관심 집중.(2) Hull House(1889년): 빈민가의 불우한 사람들을 선량한 시민으로 만들기 위해 토인비 홀의 견학, 인보운동의 이념을 도입하여 제인 아담스(Jane Adams)에 의해 설립.(3) 구제관* 사회문제의 원인: 개인의 나태와 무절제가 아닌 '사회적인 환경'에 그 결정적인 원 인이 봄.* 사회문제의 개선방안: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사회연대의식을 기초로 한 사회개량주 의가.(2) 노동시간의 단축과 임금 절감으로 인해 지방자치단체와 민간기관에 의한 구제활동 활 발하게 전개.2) 실업에 대한 정부의 시각(1) 생활문제는 주와 지방정부만이 대처할 문제라고 봄.(2) 식민지시대 이후의 지방분권주의와 19세기 이후의 개인 책임이라는 전통적인 태도 견 지.3) 정부시각의 변화(1) 실업문제의 심각성 대두(2) 1933년 뉴딜정책에 의한 일련의 시책을 통하여 불황과 실업의 경제의 마비상태로부터 미국을 새롭게 부흥시키고자 노력.* 1933년 구제사업에 대한 보조금을 주에 교부.* 노동력을 투입할 수 있도록 공공사업 전개(도로건설, 공공건축, 공중위생사업 등을 연방사업화함).4) 사회보장법의 성립(1) 1935년 8월 14일 시행(2) 구성* 연방직영의 노령연금* 주운영 실업보험에의 연방보조금* 주운영의 공공부조(노인, 맹인, 모자부조), 사회복지서비스(모자보건, 지체부자유자 복지서비스, 아동복지서비스)에 대한 연방보조금.(3) 내용: 현금과 현물 중심.(4) 제입법의 시책을 구체화하기 위한 서비스 전달체계 전국적으로 구축.(5) 결과: 빈곤의 개인만의 책임이 아니라 사회체제의 결함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 인식.구제대책으로는 정부의 책임에 의해 구제가 수행되어져야 한다는 필요성 인식.5) 사회보장법과 전문사회사업(1) 사회보장법 성립으로 사회복지정책과 공공사회복지체계가 급격하게 강화되어 사회복 지의 '사회화와 국영화'가 이루어 짐.(2) 사회복지가 사화화 및 국영화되는 과정 속에서 자선이 조직화되고 체계화됨으로써 전 문적인 사회사업의 기술이 요청되는 계기가 됨.* 1935년 전국사회사업회의를 통해 문제중심의 상설위원회에서 '기술중심의 부문별 위 원회'로 변화.* 케이스웍, 구룹웍, 지역사회조직 등의 전문사회사업의 방법과 사회행동, 공공부조부 문이 새롭게 추가.6. 빈곤전쟁과 복지권운동1) 1950년대(1) 물가통제, 완전고용, 주택정책을 중심으로 사회보장정책의 확대, 개편.(2) 1953년 보건, 교육, 복지성이 창설.2) 1960년대(1) 고용) + 퍼스널 서비스.4) 1980년대(1) Trickle down 이론 등장 : 정부투자가 대기업의 경제성장을 촉진하면 간접적으로 복지 가 증대된다는 이론.*레이건 대통령은 부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여유있는 돈을 기업확장을 위해 활용하게 되면 그 이익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로 흘러들어갈 것이라고 생각.*복지프로그램을 감축, 신연방주의의 제창.*빈곤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교회와 민간부분의 제원을 호소.(2) HR1720, S1511(1988년 법령으로 인준)* 목적: 일할 수 있는 능력있는 복지수급자에게 필요로 하는 자원(교육, 직업훈련, 아 동보호)을 제공하기 위한 것(Workfatr).(3) 신연방주의(연방주의의 축소, 주정부에의 권한이양)* 복지국가를 반대하지는 않으나, 온정주의적 국가에는 반대.* 시장경제 중시.* 전통적 가치와 제도, 종교, 가족제도를 중시.* 완전 평등주의는 위험하다고 생각.* 압도적으로 적대적인 사회에서는 미국적 민주주의가 지속될 수 없다.(4) 신보수주의적 이념에 의한 사회복지정책 재편성* 진정으로 필요한 자만을 대상으로 한다.* 복지비리를 근절한다.* 노동능력있는 자에게는 노동의무를 부과한다.* 부당한 급여를 배제한다.* 부양의무자에게 부양을 강제한다.* 복지행정의 능률화와 효율화를 높인다.* 연방정부의 권한을 주정부에 이양하는 지방분권화를 추진한다.일본 사회복지의 역사1. 근대이전의 慈善·救濟1) 고대사회의 慈善·救濟(1) 출발: 593년 성덕태자의 공적에서부터 출발.*구호시설로 시락원(施樂院), 요병원(療病院), 비전원(悲田院) 등을 설치.*시락원(施樂院), 요병원(療病院), 비전원(悲田院) 등은 국가시설로서의 의료구호시설 로 변화.*자선의 동기: 불교의 종교적 동기로서, '慈悲思想'의 표현.(2) 공적자선제도의 시작*718년 '호령(戶令)'이 제정*구제대상자: 환과고독궁빈노질(鰥寡孤獨窮貧老疾), 불능자존자(不能自存者)로 규정.*구제방법: 근친자가 부조, 근친자가 없는 경우 지역에서 상부상조.2) 중세사회의 慈善·救濟*사 성립과 구빈체계1) 산업혁명과 근대적 구빈대상의 확대(1) 농촌에서의 변화는 급속한 농민해체를 야기 --> 광범위한 빈농층 속출.(2) 정부의 경제정책은 자본의 축적과 투자를 용이하게 하여, 민간대기업이 성장할 수 있 는 발판 마련.(3) 일본 국내경제의 취약성을 만회하기 위하여 제국주의와 군국주의가 결탁 --> 임금노동자의 급속한 증대를 초래.(4) 군국주의적 성향 속에서 정부와 자본가 사이에서 국가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을 배제하기 위한 사회사업입법과 노동자 보호를 위한 대책의 필요성 주장.2) 공적구제론 형성(1) '빈곤의 사회화'는 빈곤의 원인을 개인적 책임이 아닌 사회적 원인으로 보려는 사상을 형성하여 빈곤의 구제는 공적·국가적 책임이라는 사상으로 연결.(2) 근대적 사회구제의 원칙: 치안대책 혹은 군무행정의 일환으로 성립.3) 민간자선사업의 발생과 발전(1) 킹슬레이관(1897년): 동경 간다에 인보사업을 위해 설립.(2) 이엽幼稚園(1900년): 보육시설(3) 정신병자 자선구제회(1902년): 정신의학적 사회사업의 원류가 됨.4. 민주화와 근대적인 사회사업의 성립1) 민주화와 자본주의의 위기(1) 민주화의 사회적 배경* '쌀폭동'을 계기로 노동자, 농민, 빈민, 차별부락민, 조선인 등이 사회적 운동 전개.* 노동총연맹 탄생, 일본노동조합평의회 결성, 일본농민조합결성, 천민해방운동 및 사 회주의 정당 성립 등 민중세력이 강력하게 부상.(2) 민주화의 정치적 배경*제1차세계대전을 계기로 하는 세계 정치질서의 변화.*일본 자본주의의 구조적 변질.2) 근대적 사회사업의 성립(1) 사회적 배경*1920년 이후 쌀 폭동의 여파가 극복되지 않은 가운데 만성적인 불황에 직면하여 독 점자본이 동요되기 시작하여 민중의 궁핍화는 더욱 심화.*자선사업과 부분적인 구제사업만으로는 사회문제를 대처할 수 없게 되면서 근대적인 사회사업이 성립하는 계기가 됨.(2) 성립요인*구빈대상의 근대화*구빈행정의 근대화·구빈사상의 근대화(1919년 내무성 구호과 --> 사회과, 1920년 장.
만해 한용운I. 서론II. 본론(1) 불교혁신운동의 전개(2) 3.1운동의 주도(3) 3.1운동 이후 민족운동의 전개(4) 노년의 만해와 불굴의 민족정신III. 맺음말I. 서론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은 우리민족이 반봉건,반외세라는 내외적 과제에 직면하여 있을때 출생하여 일평생 그 해결을 위해 노력한 인물이다. 19세기의 조선사회는 부패와 타락으로 얼룩진 봉건왕조(封建王朝)의 말기적 모순들이 극명히 노출되어 있었다. 국제사회와 단절된 상태가 지속되다가 어쩔 수 없이 개국하게 된 조선으로서는 각종의 부작용이 야기되고, 열강국의 탐욕스런 이권쟁취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 것은 필연적 결과라 하겠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출생,성장한 한용운의 생애는 다사다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출생과 더불어 반봉건,반외세라는 동시적으로 해결하여야 할 민족적 과제에 직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용운의 주요 활동 내역을 알아보도록 하자.II. 본론(1) 불교혁신운동의 전개내면적 갈등과 혼란한 대외정세로 인한 번민과 방랑끝에 1905년 그는 완전히 불가에 입문하였다. 이후 그는 스스로의 불심연마와 불경연구에 전념하였고, 전국 각지의 사찰을 순회하며 불경을 설법하는 데 온 힘을 다하였다. 그에게 있어서는 혁신적인 불교계의 개혁을 통해 그 폐단을 제거하여 예전의 번성했던 모습을 되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는 타락하고 변질된 불교의 종교적 순수성을 회복하여 대중 깊숙히 뿌리박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였다. 바로 의 저술은 그런 그의 사상과 행동적 지침을 완성한 것이며, 친일매판불교에 대항한 불교의 자주화운동, 즉 임제종 종지수호운동은 이를 실헌하는 과정이었다. 만해는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각종 불교제도의 보완 및 개선과 함께 포교를 강조하고 있다. 그는 불교 대중화의 한 방편으로 불경을 주석, 정리하여 간행하는 작업에 크게 노력하였다. 을 탈고하여 이른 간행(1913)하던 시기를 전후하여(1909-1914)
그린라운드1. 머리말2. 본문1. 국제협약의 가입 및 예정2.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3. 맺음말 -우리의 대응책1. 풀 서비스(Full Service) 제도 개선2. 지구환경정보 맵 구축3. 환경 마인드 교육4. 환경기술 개발5. 환경정책 개발1. 머리말7년간을 끌어오던 우루과이 라운드가 타결된 시점에서 GR, BR, TR 등이 심심치 않게 거론되고 있다. 그 중 특히 지구 환경과 관련하여 그린 라운드가 부각되고 있는 실정이다.지구환경을 보존하기 위한 움직임이라는 점에선 바람직하나, 선진국들이 자신들에 의해 오염된 환경에 대한 책임을 개발 도상국들에게 떠넘기기 위한 수단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이제 그린 라운드가 무엇이며 그것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할 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2. 본문1.국제협약의 가입 및 예정그린 라운드는 어느 협상체 하나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체적 개념으로서, 다음과 같은 여러 협약 또는 협의체로 구성되어 있다.1) 오존층 보호협약가. 산업발달의 부산물로 생기는 각종 오염물질이 대기의 질을 변화시키고 있으나 그중 프레온 가스는 지구의 이불이라 일컫는 오존층을 얇게 만드는 역할.나. 프레온은 100년에서 200년 정도의 긴 수명을 갖고 있으므로 그만큼 오존층 파괴력이 강함.다. 프레온 가스를 사용하는 예 : 냉장고의 냉매체, 향수, 모기약, 헤어 스프레이 등 각종 생활에 편리한 스프레이 종류.라. 프레온은 현재 10가지 종류가 있으나 그중 오존층 파괴에 크게 작용하는 프레온은 CFC 11, 12, 114, 115 등.마. 프레온은 1931년 미국의 듀퐁사가 만들기 시작하면서 세계 모든 나라 사람들이 이용하게 됨.바. 현재 지구촌에서 연간 CFC 생산량은 약 100만 톤이므로 결국은 위험 수위에 달했음.사. 과학자들은 CFC가 가져올 악영향을 예측하여 이를 방지하기 위해 범세계적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 국가들간에 CFC를 줄이기 위한 1차적 협의를 함. 몬트리올 의정서.아. 이에 이어는 사실을 인지해야 함.2) 멸종 위기의 야생동식물 협약가. 1992년 6월 6일 브라질 리우에서 개최된 세계정상회의, 일명 환경정상회의에서 선언한 의제 중 제21조의 주요 내용은 생물 다양성 보존에 관한 것. 각국이 갖고 있는 생물학적 자원에 대한 주권 보유, 생물 다양성의 평가와 연구 및 체계적 감시능력 제고 등.나. 우리나라는 1993년 7월에 국가적 차원에서 멸종위기 야생동식물 협약에 가입.다. 이 협약은 이후 1993년 12월 UR협상에서 더욱 강화되었으며, 이제 밀어닥칠 GR에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지구 보호에 초점을 맞출 것이고, WTO에서는 감시가 강화될 전망.라. 우리나라는 1994년 상반기에 WTO에 가입할 것으로 확정되었기에 정부는 '한국의 생물 다양성 2000'이란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가입을 준비 중.3) 유해폐기물 협약(바젤 협약)가. 매년 4억톤의 유해 물질이 생산 및 운반되고 있다.나. 지리적 여건으로 국경이 서로 인접하여 있는 나라들은 유해 폐기물을 국경 근처나 국경 밖으로 내다버리기도 함.- 프랑스에서는 벤젠의 오염이 국경을 넘어 발생되는 사건이 일어나서 EC나 OECD에서 이를 규제하는 제도를 만들기 시작.- 1980년대에 들어와서 이탈리아, 노르웨이 등에서 PCB. Polychlorinated biphenyl, 폴리 염화 비페닐가 포함된 트랜스를 나이지리아에 투기한 사건이 발생다. 유해 폐기물이 국경을 넘어 이동하여 지구적 규모의 환경오염을 일으키는 일이 발생하게 됨.라. 1989년 3월 UNEP. United Nations Environment Program, 유엔 환경 계획 기관에서는 유해 폐기물을 국경을 넘어 수출입하는 행위는 위법이라는 것을 천명하고 이를 규제하기 위해 을 채택.마. 우리나라는 아직 이 조약에 가입하지 않음.바. 회원 64개국은 1994년 3월 25일, 미국, 일본 등의 반대를 물리치고 유독성 폐기물을 개발도상국에 수출하지 못하도록 하는 합의를 표결 없이 채택.4) 폐기물 해양투기 금지조약(런던 협고 함.다. 주요 골격은 다음과 같음.- 유기할로겐 화합물, 수은 등을 해양에 투기하는 것을 금지.- 아연, 구리, 납 등의 폐기물은 특별 허가를 얻어야 함.- 기타 물질은 일반적인 허가를 받아야 투기할 수 있음.- 이외 폐기물의 형상, 성질, 특성, 폐기 장소의 수심 또는 해안선에서의 거리 및 투기 전 폐기물의 처리 등을 규제라. 1983년 11월 12일에는 핵폐기물 해양 투기를 영구히 금지하는 협약에 71개국이 결의.마. 1993년 말경 러시아는 조약을 위반하면서 핵폐기물의 해양투기를 강행- 러시아가 1961년부터 1992년까지 투기한 총량은 15만 5천톤, 그 중 2만여 톤이 동해상에 버려짐.바. 러시아는 1976년에, 일본은 1980년에, 중국은 1985년에 가입했으며, 우리 나라는 준비 단계5) 기후변화(CO2 규제) 협약가. 최근에 곳곳에서 발생하는 이상 온난현상은 CO2의 증가에 따른 온실효과 때문이다.나. 1992년 6월 3일부터 브라질 리우에서 유엔환경개발회의(UNCED)가 개최되어 제3세계 국가들의 의견을 대폭 수렴하여 리우 환경선언과 의제 21을 채택. 여기에서 기후변화 협약에 대한 각국의 서명이 있었음.다. 우리 나라는 아직 서명하지 않았으나, 앞으로는 하지 않으면 안될 입장이기 때문에 준비 중. 즉, 1996년 OECD 가입을 추진하고 있어 기후변화 협약에 따른 에너지 사용량 규제가 어떤 식으로든 적용될 전망.라. 가장 중요한 것은 가스방출은 1990년 상태를 2000년까지 유지하자는 것이며, 그 이후는 협정에 의하여 규제하여 기후변화를 방지하자는 것.CO2탄산가스CH4메탄가스CFC-11프레온CFC-12프레온N2O아산화질소1750∼1800산업혁명 이전280ppm0.8ppm00288ppb1990 현재농도353ppm1.72ppm280ppt484ppt310ppb증가율(%)1.8ppm(0.5%)0.015ppm(0.9%)9.5ppm(4%)17ppt(4%)0.8ppb(0.25%)대기수명(년)50∼200101565130표 . CO2와 CFC 방출량2에 반영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순수원가가 낮아 기업의 폭리로 매도되어, 노사분규가 원가상승으로 이어져 선진국 상품 가격보다 높아졌다는 현실을 잘 모르고 있다.높아진 상품 가격에 UR, GR로 인한 환경 비용이 첨가된다면 G7국가들의 가격보다 1.5배 더 높은 가격으로 산출되므로 가격경쟁을 할 필요도 없이 문을 닫게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한탕주의에 젖어있는 기업은 G7 국가들에서 개발된 환경비용 절감요소를 수입하면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누가 그동안 엄청난 비용을 들여 개발한 노하우를 염가로 줄 것인가. 요즈음 매스컴에서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유수회사들과의 협력을 강조하나 이미 때는 늦었다고 본다. 영원한 기술 종속관계만 맺어 더 이상 우리의 경제라는 개념이 없어지게 되므로 어떻게 충격을 흡수할 것인가에 따라 우리들의 사활이 걸려 있다.2) 상업선진국들의 생산품은 환율도 있겠지만 원가에 환경비용을 합한 가격으로 국제시장에 내놓았다. 우리는 순수한 저가 가격으로 국제시장을 겨우 뚫고 들어갈 수 있었다. '90년대 이후 한국도 노사분규로 임금 상승률이 높아지면서 저가이던 물건이 선진국 수준의 가격과 맞먹게 되어 국제시장에서 따돌림 받고 있다. 그러나 이 가격에 환경비를 더하면 선진국의 물품보다 더 비싼 가격이 될 것이다. 그리고 환경시설이 불충분하고 기술이 없는 나라의 공산품은 자동적으로 구매하기를 꺼리기 때문에 생산해도 다 사가지 않는 물건이 된다.그러므로 생산, 판매, 서비스에 이르기까지 헤어나기 어려운 충격의 늪에 빠져들 것이다. 이제 우리는 감정에만 호소하여 설득력을 얻으려는 시대는 지났다고 생각해야 한다. 우리 물건을 팔려면 상대의 물건도 사주어 구매력을 일으킨다는 것이 일반적인 행위이나 그린라운드는 이것도 인정하지 않는 새로운 상품과 환경의 규제에 돌입하여 우리의 열악한 시장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킬 것이다.3) 환경1980년대까지는 오염에 관한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금기로 되어있던 시대도 있었다. 이렇듯 환경파괴는 아랑곳 없이 경제개발에만으로 UR과 GR은 모든 면에서 환경을 우선 고려한 제품이나 환경을 보전하는 제품 및 그러한 나라의 제품만을 구매한다는 것이므로, 지금과 같은 환경이 배제된 상황에서 생산된 물건은 쓸모없게 되어 스스로 문들 닫게될 것이라고 예측된다.이런 현실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고유의 환경기술을 생산현장에 적용하고 있는 것은 대단히 미흡한 기술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쓰고 있는 기술은 모두 선진국의 환경기술이므로 이에 대한 로열티, 기술자문료 등의 형태로 지불하고 있지만 그러한 기술도 시대에 떨어지는 기술이라는 점이 미래 사회에서 큰 장애물이 될 것이다.4) 에너지산업혁명과 더불어 현대사회의 자동화에 이르기까지 작용한 중요한 것은 에너지에 의한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에너지의 원천은 움직임으로부터 시작하여 그것을 어떻게 계속적으로 시간변화에도 관계없이 그 양이 채워지는가를 해결하려는 데 목적을 두어왔다. 그것의 해결은 자연상태에서 정상류상태로 발생되는 물의 흐름을 이용한다면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과 착오를 이용하여 결과적으로 수력발전의 결과를 낳아 지구촌은 암흑의 세계에서 밝은 세계로 변모하게 되었다.그러나 수자원은 지역성, 즉 장소적 제약조건과 무작위로 발생 가능한 수자원량의 변화가 때로는 불안정성을 예측하고 있기 때문에 이보다 더 안정성을 추구하기 위해 화석연료를 이용한 에너지를 선호하여 왔다. 그후 이보다 더욱 안정성을 가진 원자력 이용이 더욱 공헌하게 되었다. 우리 나라도 약 50% 이상이 원자력 발전으로부터 에너지를 공급받고 있다는 것은 이들로부터의 부산물 처리 및 발생이 환경파괴의 주범이 되고 있다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으므로 미래에는 환경파괴가 전혀 없는 새로운 형태의 에너지를 공급받는 시대의 기술혁신이 요구되고 있다.이렇듯 에너지를 일으키는 곳의 다양한 문제점은 현대사회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 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보면 원자력 발전소에서 발생되는 중저위, 고준위의 핵폐기물은 그 반감기가 수백 년에까지 달하며 그 농도도 높기 때문에 것이다.
목 차서론본론1. 그리스 / 로마신화의 시작2. 제우스 (ZEUS) 이야기3. 새턴 (SATURN) 이야기4. 야누스 (Janus) - 로마의 문지기 신5. 아틀라스 Atlas -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거인족6. 제우스(주피터) - 하늘의 지배자7. 포세이돈(넵투누스) - 바다의 지배자8. 하데스(플루톤) - 지하의 지배자9. 헤라 - 질투의 화신10. 아레스(마르스) - 전쟁의 광신11. 아테나(미네르바) - 처녀의 수호신12. 아라크네13. 아폴론(포이보스) - 태양의 신14. 아프로디테(비너스) - 사랑과 미의 여신15. 헤르메스(메르쿠리우스) - 여행자의 수호신16. 아르테미스(디아나) - 순결의 여신17. 헤파이스토스(불카누스) - 대장장이의 신18. 디오니소스(바쿠스) - 술과 연극의 신19. 황금의 손 마이다스20. 당나귀 귀 마이다스21. 프로메테우스 - 인간을 도운 신22. 아도니스 - 아네모네의 꽃23. 헤라클레스 -초인간적인 영웅24. 에우로페 - 대지의 여신25. 헤르마프로디트 - 남녀 양성의 신26. 테세우스 - 아리아드네의 실27. 아킬레우스 - 발뒤꿈치의 약점28. 아마존 왕국 - 최초의 여자 공화국29. 나르키소스와 에코 - 자기애와 비련30. 오이디푸스 - 성도착의 사랑31. 에로스(큐피트) - 만물의 생성32. 오리온 - 별들의 전설33. 오르페우스 - 죽음과 부활의 가르침34. 아틀라스 - 거인의 화신35. 티탄족 - 최초의 신족36. 황금의 사과 - 파리스의 심판37. 시지포스 - 부조리의 영웅38. 탄탈로스의 갈증 - 가혹한 형벌39. 판 - 목축을 다스리는 신40. 테세우스 - 아리아드네의 실41. 아킬레우스 - 발뒤꿈치의 약점그리스 / 로마 신화신화이야기에 들어가기에 앞서그리스 신화(Myth)에는 우리나라의 전설(Legend)과 마찬가지로 원전(原典) 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았고 특히 그리스에는 그 수많고 복잡한 이야기들을 적절히 조정하거나 해석하는 권위있는 단체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실제로 그리스의(Ovid) 같은 작가는 아틀라스를 세계의 끝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북서 아프리카의 왕국, 그리고 황금 사과가 열 리는 헤스페리데스 평원이 있는 마우레타니아의 인간 왕자로 만들었다.어느 날 메두사(Medusa)를 살해하고 도망친 영웅 페르세우스(Perseus)가 마우레타니아 왕국을 지나가다가 아틀라스에게 보호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제우스의 한 아들이 자신의 사과를 훔쳐갈 것이라는 예언이 생각난 왕은 그것을 거절했다. 그 말을 듣고 페스세우스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으나 왕과의 일대일 싸움에서는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틀라스에게 화해를 위한 선물을 주는 체하면서 자루에서 선물대신 메두사의 머리를 끄집어냈다. 그러자 아틀라스는 그 자리에서 금방 돌로 변하고(메두사를 똑바로 쳐다보면 돌로 변한다는건 다들 알고 계시죠?), 제우스의 뜻에 따라 하늘에 닿을 때까지 그 크기가 자라났다. 간단히 말하자면 아틀라스는 아틀라스 산이 되었으며 리비아의 아틀라스 산맥 전체가 되었다.그 신화에는 여러 가지 변형이 있지만 그 가운데 어떤 것에서도 왜 지도책을 '아틀라스'라고 부르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해답은 1595년에 종합적인 지도책을 출판했을 때, 루몰드 머케이터(Rumold Mercator)가 저지른 실수 속에서 찾을 수 있다. 머케이터는 아틀라스가 하늘보다는 지구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거인의 그림이 전세계를 포함하고 있는 지도책의 첫 페이지를 아름답게 장식해 줄 것이라고 상상했다. 그래서 그는 한쪽 어깨 위에 손쉽게 올려 놓을 수 있는 지구의 그림을 곁들였다. 1636년 그 지도책의 영국판이 나왔을 때, 그 지도책에는 , 또는 라고 하는 타이틀이 붙어 있었고, 그 이후부터 모든 지도책의 공통된 이름이 되었다.참고사이트:http://my.netian.com/~jyong2/myth/myth.htm위의 내용이 있는 사이트입니다.http://galaxy.channeli.net/sonst/greec알을 깐다"는 말이 생겼고 또 어느 시인은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어둠이 깃들어야 날개를 편다"는 노래까지 불렀다.아테나는 또 오디세우스, 아킬레우스, 테세우스, 헤라클레스 등 많은 영웅들의 뒤를 돌보아 주었다. 흔히 지혜의 여신으로 알려진 아테나 (혹은 아테네, 로마신화에서는 미네르바)는 고대 그리스에서도 가장 찬란한 번영을 누렸던 아테네 시를 그 보호 아래 두어 명성이 대단하였다.아라크네신들을 노엽게 하는 인간의 죄 가운데서도 가장 나쁜 것이 교만, 혹은 자만이다. 이러한 마음 때문에 인간은 신들에게 대항하고 신들을 무시하게 된다. 아라크네도 그렇게 어리석은 인간 축에 드는 사람이었다.아라크네는 그리스에서 물레질을 잘하기로 유명한 처녀 농사꾼이었다. 아라크네처럼 빠르고 정확하게 물레질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적어도 인간 중에서는 아무도 없었다. 아라크네가 만든 옷감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실 잣고 천 짜는 기술을 처음으로 고안해 낸 것은 지혜의 여신 아테나였다. 아라크네는 자기 수호신인 아테나도 자기만큼 좋은 천을 짜지 못할 거라고 자랑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아테나는 경솔한 처녀의 행동을 그저 웃어 넘겼다. 그러나 사람들은 갈수록 아라크네의 허풍을 진짜로 믿어, 아테나의 신전과 아테나 제전을 소홀히하기 시작했다. 아테나는 평소에는 온화하고 너그러운 여신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몹시 화가 났다.아테나는 지상으로 내려와 아라크네를 찾아 갔다. 그리고 아라크네에게 물레질 시합을 하자고 제안했다. 처녀와 여신은 각자 있는 힘을 다해 빠르고 능숙한 솜씨로 물레질을 시작했다. 아라크네가 자아 낸 실은 참으로 훌륭했다. 아테나는 아라크네가 진정으로 뛰어난 적수하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러니 아라크네가 시합을 하는 동안 티를 내지 않고 묵묵하게 있기만 했어도 아무 탈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아라크네는 아테나의 면전에서 자기 솜씨가 여신의 솜씨보다 훨씬 낫다고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아테나는 아라크네('거미'라는 뜻)을 보고 말했다. "네가 가장 잘하는 게신문이나 잡지에 자주 등장하던 프로메테우스도 티탄족의 일원이었다. 앞에서 일어날 일을 내다보는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와의 싸움에서 티탄족이 패배하리라는 것을 알고 싸움에 가담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제우스로부터 이무런 벌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그는 본시 인간과는 각별한 친분이 있었다. 그는 지상에 내려와 사람들과 놀기를 좋아했다. 어느 날 인간 세상에서는 신에게 바칠 제물로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살찐 소 한 마리를 잡아 살코기와 뼈다귀 그리고 내장 등을 두 모더기로 갈라 놓으라고, 특히 뼈다귀와 내장 쪽에는 기름으로 잘 덮어 두라고 일러 주었다. 그리고 이 중의 하나를 제우스가 선택하도록 하라고 했다. 평소에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가 자기만큼 영리하지 못하다고 멸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제우스는 기름이 번지르한 뼈다귀 쪽을 골랐다. 그후로 신에 대한 제사는 뼈다귀에 기름을 묻혀서 바쳐 왔었다.아무튼 화가 난 제우스는 인간이 타락하였다고 하여 불을 빼앗고 고생을 해야만 먹고 살수 있도록 형벌을 내렸다. 이에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신전 부엌에서 향나무 심지에 불을 붙여 인간 세상에 가져와서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뿐만 아니라 불의 관리법, 산술, 건축술, 조선술, 항해술, 목축 등의 지혜와 기술을 가르쳐 주었다.제우스는 화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에도 자기를 깔보던 프로메테우스를 이번엔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드디어 헤파이스토스가 만든 쇠사슬에 묶어 벌판 끝에 있는 코카서스 산의 바위에 묶어 두었다. 이곳에서 낮이면 머리가 벗겨진 흉칙한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먹히고 밤이면 상처가 다시 아물곤 하는 고통을 받았다. 독수리의 부리가 간을 찍을 때 얼마나 아팠던지 비명을 질렀다. 그 때문에 이곳에는 다시는 사람들이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는 후에 영웅 헤라클레스에게 구원을 받고 그에게 지혜를 가르쳐 주었다. 프로메테우스는 그 모진 고통을 받으면서도 인간의 편에 섰다.아도니스 - 아네모네의 꽃아도니스(Adonis)라고 하면 보통 미청년 혹은 미졌다. 이를테면 헤라클레스는 열두 가지 고행의 하나로서 아마존의 여왕 히폴리테의 띠를 빼앗았다. 테세우스는 히폴리테의 누이 또는 딸이라고 하는 암페티오를 약탈했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트로이 전쟁 때 아마존족은 트로이를 편들어 아티카에 쳐들어 왔으나 그리스 제일의 영웅 아킬레우스에 의하여 격파당했다.이때 아킬레우스는 여왕 펜테실레아를 죽였는데, 죽인 직후 그녀가 너무나도 아름다워 비탄에 빠지기도 했다. 그리스 사람인 테르테스는 이를 비웃으며, 아킬레우스가 송장을 사랑했다고 소문을 퍼뜨렸기 때문에 아킬레우스에게 맞아 죽었다. 이러한 내력으로 해서 아마존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용감한 여자, 여걸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남미에 있는 세계 최대의 강 아마존의 명칭도 아마존의 전설에 의해서 온 것이다. 유럽인이 이 땅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1500년 스페인 사람인 핀존이 처음으로 아마존 하구를 탐험했을 때부터이다. 그후 얼마 후에 스페인 사람 피사로는 페루 지방에 번영하던 잉카제국을 멸망시킨 다음 전설적인 황금의 나라 엘도라도를 발견할 목적으로 자기 아우를 지휘관으로 하는 탐험대를 안데스 산맥 저편으로 보냈다. 일행은 아마존강의 상류 나포하반까지 도달했으나 식량부족과 피로로 말미암아 행군을 계속 할 수 없는 상태에 빠졌으므로 부대장 오레야나를 시켜 소대를 이끌고 아마존 강을 따라 내려가게 했다.오레야나의 소대는 도중에 여성만으로 된 토인군의 공격을 받아가며 전진을 계속했드나 물론 엘도라도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 결국 그들이 여인군의 공격을 받았다고 해서 그 강에 아마존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 이 탐험 여행의 유일한 수확이었다.나르키소스와 에코 - 자기애와 비련나르키소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미소년이다. 그를 한번 본 처녀는 누구나 다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으나, 나르키소스는 제아무리 아름다운 소녀라 할지라도 거들떠 보는 법이 없었다.숲의 여러 요정들 중에사 가장 아름다운 에코가 그를 좋아하며 뒤따라 다녔지만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에코는 심판
고전 주의 시대의 대표적 인물인 베에토벤, 모짜르트, 하이든에 대한 전반적인 자료베에토벤(Ludwing van Beenthouen,1770-1872)베에토벤(Ludwing van Beenthouen,1770-1872)은 본에서 태어났다.그의 조부 루드비히는 앤트워프지방 출신으로 1733년부터 본으로 이주하여 선거후 궁정 악단에서 일했으며,67년에 그 악단의 단장이 되었다.베에토벤의 아버지 요한은 궁정악단의 테너가수였고,결혼 3년만에 베에토벤을 낳았다.그는 어린 아들에게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모짜르트처럼 신동으로 키우기 위해 밤중에 술이 취해 돌아와서도 자고 있는 베에토벤을 깨워 피아노를 가르쳤다고 한다.그는 베에토벤에게 정규선생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이 무렵부터 오르간,작곡법을 배우게 했다.1787년 베에토벤은 본을 떠나 비인을 찾아갔다.그곳에서 하이든을 만났으며,그의 작품활동은 활발히 진행되었다.베에토벤 전의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에 있어서,교양곡은 극히 매력있는 분야였으며 작곡가라면 누구나 명성을 올린다거나 실력을 이정받기 위해선 빼놓을 수 없는 음악의 분야였다.이러한 것은 바로 베에토벤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였다.베에토벤은 교양곡 작품에 있어서 이전 시대의 작곡가인 하이든의100곡이나 모짜르트의 50여곡인 교양곡의 수에 비하면 비교도 안될 만큼의 적은 분량을 남겼으나 그의 9개 작품이 지니는 음악적 내용을 생각해 볼 때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특히 교양곡에 무곡의 형태였던 스케르쪼(Scherzo:3박자의 쾌활한 곡)악장을 보다 유기적이고 예술적인 차원에서 취급하려 했던 혁신적인 시도는 그 의미의 중요성을 더해주고 있다.그리고 음악사적으로 볼때 그의 작품활동은,낡은 사회에서 음악적 기법과 양식이 필연적으로 새로움을 요구하는 중기에로의 중개역활을 했다.그의 작품에는 9개의 교양곡,11개의 서곡,연극의 부수 음악,하나의 바이얼린 협주곡,5개의 피아노 협주곡,16개의 현악 4중주,9개의 피아노 트리오,기타의 실내악,10개의 바이얼린 소나에 가깝다.이처럼 베에토벤적인 것이 뚜렷이 나타나 있다.베에토벤의 교양곡 가운데서는 제 2번과 함께 자칫하면 경시되기 쉽지만 짜릿하면서도 밝고 젊은 기분을 맛 볼 수 있는 작품이다.- 교양곡 제 2번 작품 36번 D장조 -이 곡은 제1번이 작곡된 2년 후인 1802년(32세)에 완성되었는데,이때는 이미 귓병이 악화된 상태였다.이 곡이 작곡될 무렵은 베에토벤의 생애에서 가장 비참한 시기였으니,유명한 하일리겐시타트의 유서 가 씌여진 것도 이 해의 일이다.이처럼 제 2번은 가혹한 운명과 싸우면서 작곡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절망적인 어두움 같은것은 털끝만큼도 찾을 수 없고 전체적으로 밝음과 사랑에 기쁨이 넘쳐 흐른다.이것은 아마 이곡이 제 1번이 완성되자 곧 착수되었고,또 그 비통한 하일리겐시타트의 유서 가 씌여지기 전에 어느정도 구상이 잡혀있기 때문이였는지도 모른다.제 2번은 아직도 외면적으로는 하이든이나 모짜르트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한 초기의 작품에 속하기는 하나 제 1번에 비하면 음악적인 원숨함을 보여주고 있다.서주는 밝고 색채적이며 규모가 약간 크고,제 1번에서는 볼 수 없었던 클라리넷이 한층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을 나타내는데 사용되고 있다.이 곡은 비록 사람을 압도하는 정열적이고 격한 것은 없을 지라도,고요한 환상과 안정감이 있는 구성 등으로 베에토벤에게서만 느낄수 있는 감미로움이 있다.이 곡의 초연은 1803년 4월 비인의 극장에서 베에토벤만의 작품 연주회에서 작곡가 자신의 지휘로 행해졌다.***** 제 2 기 *****베에토벤이 비엔나에 온후 12년 동안 유럽 전역의 가장 뛰어난 피아노 작곡가로써 그리고 하이든과 모짜르트와 어깨를 겨누는 작곡가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한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과감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생각의 점진적 발전의 유기성이 해쳐진다.그러한 그의 결점은 그의 위대한 작품들을 약화시키는데 그것은 너무 많은 생각을 담았기 때문이다......그의 작곡의 목표는 유일성과 독창성인 듯이 보인다. 고 말한 적대적인 비평은 그의 특이성을 공격하약간 복잡하지만 논리적인 형식을 갖는 따위는 당시로서는 대담한 모험이었다.또한 전제의 구성도 무척 견고 해졌고 악기 편성도 커졌으며 호른을 3개나 쓴다는 것도 파격적이다.이처럼 이 교향곡은 당시로서는 아주 혁신적인 교향곡이였던 것이다.- 교향곡 제 5번 작품 62 C단조 -암흑에서 광명으로 ,이것은 평생을 통한 베에토벤의 신조였는데 그것이 작품상에서,보다 힘차고 감동적으로 표현된것이 교향곡 제 5번 작품 62 C단조이다.베에토벤이 이곡을 작곡한 것은 38세인 1808년이며,작곡에 착수한 시기는 분명치 않지만 대개 제 3번을 완성한 직후인 1804년 무렵부터 손을 댄 것 같다.그러나 일설에 의하면 1795년(25세 때)무렵의 노트에 이 곡의 선율이라고 생각되는 대목의 스케치가 있다고 하는데,만약 그렇다면 합쳐서 약 12년이나 걸린 셈이 된다.이런 점에서 볼 때 베에토벤이 곡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는가를 엿 볼 수 있다.이렇게 해서 하나의 음도 허실이 없는 견고하고 정밀한 구성을 갖춘 걸작이 나오게 된 것이다.제 5번은 너무나 잘 알려진 곡으로서 교향곡의 역사상 만인에게 사랑받는 곡이며 이것은 이 곡의 연주횟수나 방송횟수 그리고 레코드의 경이적인 판매고만 보아도 알수 있다.그런데 이 곡이 이라는 별칭으로 널리 알려진 까닭은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있다.그의 제자인 신틀러가 하루는 이 곡의 제 1악장 서두에 나오는 주제의 뜻을 물었더니 베에토벤은 운명은 이렇게 문을 두드린다. 라고 하면서 힘찬 몸짓까지 하였다고 한다.그 뒤에 이 교향곡은 이라는 참으로 극적인 제목으로 불리게 되었고,또 그것이 인기를 높이는 큰 원인이 되었다.물론 그것은 베에토벤의 비통한 생애와 너무나도 잘 통하는 말이기도 하다.그런데 이 곡의 처음 주제에 나타나는 다다다다 하고 두드리는 동기는 베에토벤이 비인의 공원을 산책하다가 들은 새 소리를 소재로 한것이라고 하지만,그가 새삼스럽게 발명해 낸것은 아니며,교향곡 속에서 하이든이나 모짜르트도 이미 사용했던 것이다.게다가 이 4개 음부의 움직임은 실로 연주된다.고전파 교향곡에서 악장을 하나로 묶어 버렸다는 것도 대담한 수법이다.이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베에토벤은 역시 고전파와 낭만파의 양쪽에 걸쳐있는, 즉 고전파와 낭만파를 이어주는 교량적인 역할을 한 작곡가이다.***** 제 3 기 *****1815년까지의 시기에는 베에토벤의 음악이 비엔나에서 많이 연주 되었고 고국과 외국등지 에서도 칭송을 받는등 그에게는 좋은 시기였다. 또한 후견인의 도움으로 새로운 작품의 출판요구로, 그 당시의 오스트리아의 경제 상태가 심각한 지경이였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경제적 상태는 좋은 상태였다. 그러나 그의 귀가 점차 안들리게 됨으로써, 자신에게로 함몰되어, 까다롭고 병적인 의심을 갖게끔 되었다. 베에토벤은 가족간의 불화, 건강의 악화, 가난에 대한 두려움 등의 고통속에서도 계속 작곡을 함으로써, 의지의 극단적인 힘으로서만 견딜 수 있었다. 최후의 다섯 개 피아노 소나타인, 장엄미사는 1822년에, 디아벨리 변주곡은 1823년에, 합창 교향곡은 1824년에, 그리고 여러해 동안 애썼던 9번 교향곡은 1823년에 각각 완성되었다. 그리고 베에토벤의 유서라고 말할 수 있는 최후의 4중주들은 1825년과 1826년에 나왔다. 1827년 그가 죽을때 10번 교향곡을 계획했었고 다른 많은 작품들을 계획하고 있었다.앞선 작품들의 정신적인 소통은 확신을 가진 고요함과 침착한 긍정에 의한 토로의 감정과는 달리, 3기의 작품들은 더욱 명상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어법은 점점 집약적이고, 더욱 추상적이 되었다. 극단적인 것이 만나게 되었다. 그 예로서 미사와 제 9번 교향곡에서 숭고한 것과 기괴한 것이 만나고 있고, 후기 4중주에서는 심오한 것과 기괴한 것이 공존한다. 고전적인 형식의 기본이 남아 있는 것을 알 수 있다.-새로운 표면 아래에 이상한 각도로 놓여 있어서 새로운 외형의 이곳 저곳에서 그 형식을 인식할 수 있다.- 베에토벤의 후기 양식의 특징들-그의 후기작품에 있어서 명상적인 성격과 부합하는 이러한 특질들 중의 하나는 주제와 동기들교향곡을 보름 안에 완성하고 싶다고 루돌프 대공에게 편지를 썼고, 악보를 제작하는 한편 5월 연주회를 준비하고 있었다.이 곡이 쾨른나투어 극장에서 베에토벤의 지휘로 초연되었고 청중들은 열광적인 갈체를 보냈지만, 청각을 상실한 그는 그 사실을 못 알아차리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를 보다 못한 앨토 가수 웅가르가 그의 옷소매를 끌어서 그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 모습을 지켜본 청중들은 많은 감격을 받았다고 한다.한편 베에토벤은 제안을 받고 모처럼 구상했던 의 계획을 중지하고 제 9번늬 구성도 근본적으로 뜯어 고쳐서 < 환희의 송가 >를 생애의 마지막 단계의 대벽화 를 위해 제 9번의 끝악장에 넣기로 했다. 그리하여 베에토벤은 합차이 붙은 교향곡 구성을 즉시 실현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압도적인 감동으로 인도하고 짙은 호소력을 지닌 교향곡 제 9번을 로맹 롤랑은 이곡은 다른 8개의 교향곡과 달라서 산꼭대기에서 과거의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회고라고 해도 좋다. 제 8 교향곡과 제 9 교향곡 사이에 오랜 시일이 경과하였기 때문에 그 전망은 넓어졌다. 라고 말했다.교향곡에 인성을 넣는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대모험 이였으나, 베에토벤은 그것들을 예견하면서 굳이 감행했던 것이다. 그 결과는 대 성공이였고, 합창은 오케스트라에 종속되지 않고 또 오케스트라도 합창에 종속됨이 없이 완전일체가 되어 실러의 송가를 성대히 노래한다.이밖에도 이 교향곡은 여러가지 대담한 시도를 하고 있다. 제 4 악장을 한층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보통 교향곡과는 달리 제 2 악장에 격하고 거칠은 스케르쪼를 두었으며, 대신 제 3 악장에는 영롱하고 맑은 악장을 두었다. 또 전체를 통일하기 위해서 제 4악장 처음에 제 1,2,3 악장의 주요 주제를 재현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이 곡의 경우도 제 5 교향곡과 마찬가지로 고뇌에서 환희로, 모든 악장이 마지막 악장을 목표로 돌진하고 있다. 리틀러가 대음악가의 단 하나의 작품에 의해서 전 세계가 그것도 동시대의 세계 뿐만 아니라 그 후대의 세계까지 이미 1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