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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화] 그리스로마 신화 평가B괜찮아요
    그리스 로마 신화는 더 이상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 로마 신화는 아직도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유지해 갈 것이다. 고금의 시와 회화에서 최고의 걸작품들은 이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이해는 서양의 역사와 문화의 이해에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그리스 신화는 B.C. 12-11세기부터 그리스 반도에 거주한 아리이 민족과 그 후손들이 가졌던 신화와 전설로서 주로 고대 그리스 문학 작품에 수록되어 있고 미술로 표현되어 전해졌다. 문학작품으로는 B.C. 8C경의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 가 대표적이다.제우스그리스인들이 믿었던 신들은 지극히 인간적이다. 그들은 인간과 유사한 행동을 취하고, 분노하고 사랑하며 미움과 질투, 복수를 일삼는다. 또 어떤 신들은 예를 들어 아테나처럼 도시의 수호신으로 숭배되거나, 아폴론의 자식 아스클레피오스처럼 병을 고치는 신, 헤스티아처럼 성화를 보호하는 수호신으로서 신앙을 모으거나 민중에게 친숙한 신들도 있었다.헤라그리고 그리스 로마 신화는 고대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술품과 생활 유물 등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스며들어 있다. 과거의 신화는 시간을 뛰어넘어 그리스인들의 놀라운 상상력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신화는 현재의 문화와 역사 속에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아폴로이러한 의미에서 예술의 전당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그리스 로마 신화전은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다. 기원전 6세기부터 4세기까지 그리스 로마에서 제작된 대리석상, 청동상, 프레스코화와 그리스 항아리 등 다양한 문화 유산은 우리에게 신화의 의미를 일깨워 주고 있다.각각의 문화유산은 나름대로의 줄거리를 갖고 신화를 표현하는 듯 하다. 전시회에서 가장 시선을 끄는 작품은 기원전 2세기에 만들어진 아프로디테와 에로스의 대리석 조각상이다. 아프로디테는 아름다운 누드의 상반신을 내보이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아프로디테와 함께 있는 에로스도 귀엽게 묘사되어 있다.아프로디테이들이 눈길을 끄는 이유는 아마도 그 아름다움뿐 아니라 유럽의 신화가 여성신 중심으로 적지 않은 이야깃거리를 제공하며 발전하여 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유럽 사회는 여성신으로부터 유래된 재미난 에피소드들을 간직하고 있다.여명의 신인 에오스와 제우스와 잦은 부부싸움을 벌인 헤라, 그리고 여러 신들과 연애행각을 벌이는 아프로디테, 전쟁을 사랑하고 도시를 지켜낸 아테네 여신 등 그 수는 무수히 많다.아테네아프로디테는 버려진 성기에서 탄생했다는 설화에서 진한 관능의 기운이 느껴진다. 그리고 거품에서 생겨났다는 전설에서 아름다움의 찰나성을 엿보게 한다. 따라서 아프로디테는 육체적 욕망을 대표하는 신이다. 미와 사랑의 여신으로 육체적 욕망과 매춘의 여신이며 창녀의 보호 신이다. 후에 많은 예술 작품에서 나체 모습으로 그려진다. 연애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화살을 가진 자식 에로스를 항상 데리고 다닌다.에오스샤항상 아프로디테는 에로스를 데리고 다니기 때문에 아프로디테가 나오는 예술작품에는 에로스가 거의 등장한다. 에로스는 사랑의 신이다. 아프로디테도 사랑의 여신이지만 그녀는 어른으로 모든 사랑의 광기를 표현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에로스는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난만함으로 그것을 표현한다.에로스이 작품은 아프로디테 외에 에로스가 비둘기를 품에 꼭 안고 있는 모습도 눈 여겨 볼만하다. 여기서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이 아니라 사랑의 상징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둘기는 여러 화가를 통해 아프로디테를 표현하는 그림에 많이 등장하게 된다.휴식중인 헤라클레스를 표현한 대리석상은 아프로디테의 조각상과 대조적으로 남성미를 극대화한 작품이다. 편안히 쉬고 있는 순간인데도 강한 남성미가 물씬 느껴진다. 가장 위대했던 그리스의 영웅 헤라클레스. 그는 키가 크고 힘센 근육질 남성으로 사자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거대한 몽둥이를 가지고 다닌 것으로 그려진다. 그는 초인적인 힘을 가지고 초인적인 임무를 완수했다.헤라클레스이런 헤라클레스 이야기는 물론 허구의 신화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역사적 경험이 깔려있는 영웅 이야기이다. 헤라클레스 신화에는 해양 민족인 그리스인들이 지중해 변경까지 상업망을 확장하면서 겪은 온갖 고난과 성취의 경험이 진하게 녹아 있다.이번 전시회 관람은 신화를 표현한 다양한 예술품과 생활유품을 통해 시대를 뛰어넘는 다채로운 문화를 경험하게 되는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그리스 로마 신화가 주는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이미 오래 전에 과학 기술 발전으로 지구의 모습과 세계지도 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러나 그리스 로마신화에 의한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의 세계관이 지금 시대에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현재 과학에 의해 나타난 세계와 달리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의 세계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인문/어학| 2001.11.30| 5페이지| 1,000원| 조회(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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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학] 베트남 전쟁
    베트남 전쟁과 미국--------------------------------------------------------------------------------♠ 베트남 전쟁의 배경과 전개 과정1. 배경베트남 지역은 오랫동안 프랑스의 식민지였으며, 2차 대전중 이를 잠시 점령했던 일본이 물러가자 베트남에는 다시 프랑스 군대가 들어왔다. 베트남의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은 곧 무력 독립투쟁을 시작했고 1954년 제네바 협정을 통하여 외부세력을 조국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제네바 회의의 합의에 따라, 독립투쟁의 중심세력이었던 공산주의세력이 주도하는 베트남 독립동맹이 베트남 북반구를 장악하게 되었는데 이를 북베트남이라고 불리게 되었고, 비공산주의자가 이끄는 베트남 남반부는 남베트남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북베트남은 남북 양쪽에 이미 만들어놓은 광범위한 정치 조직에 힘입어 이 선거에서 자신들이 승리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또한 당시의 호지명이란 인물이 남북 베트남은 물론 인도차이나 전역을 통틀어 유일한 존경받는 지도자였다는 사실은 북베트남의 승리를 더욱 확실시해 주었다. 그러나 휴전협상기간 동안에 미국의 전폭적 지지에 의해 남베트남의 총리가 된 고 딘 디엠(Ngo Dinh Diem)은 "공산주의 사회는 선거를 통제할 수 있는 체제이기 때문에 선거는 무의미하다" 고 하면서 총선을 거부하였는데 이는 미국의 의사였다. 미국은 베트남이 반공기로서 남아 있기를 원했던 것이며, 선거를 통하여 합법적으로 공산화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미국에 있어 베트남은 매우 중요한 전략거점이었다.(???) 만약 이곳이 친소 공산화되면 인도차이나는 물론, 남아시아 전체가 공산주의 위험에 직면하고 미국의 대소 세계전략 또한 결정적으로 타격을 입게 될 것이었다. 그래서 프랑스 군이 물러가자마자 미국은 공산세력의 공격에 시달리는 남쪽의 고 딘 디엠 정권을 지원하게 된다. 이러한 지원은 이미 아이젠하워 행정부 때 시작되었으며, 케네디가 암살될 즈음에는 이미 1만 6천명의 미군이 베트남에서 군사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2. 전개과정과 그 결말1964년 북베트남의 수뢰정이 통킹 만에서 미국 구축함을 공격했다. 이 소식을 접한 미 의회는 월맹의 미국에 대한 군사적 공격을 격퇴하고 이후의 공격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들을 취할 수 있는 권한을 존슨 대통령에게 부여했다. 미국의 본격적인 베트남 참전이 시작된 것이다. 존슨 대통령은 즉각 대규모 전투병력의 투입과 월맹의 군사시설에 대한 폭격을 승인했다. 이렇게 해서 베트남 전쟁의 막이 올랐다. 1965년 말에 이르기까지 18만 4천의 미군병력이 베트남에 파견되었고, 1968년에는 그 숫자가 무려 53만 8천명에이르렀다. 열대정글에서의 전투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네이팜 탄, 고엽제 같은 비인도적 무기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압도적으로 우세한 화력과 병력을 가지고도 게릴라 전술로 맞서는 월맹군에 대해 미군은 결정적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전쟁이 길어지고 사상자가 늘어나면서 국내에서 반전여론이 거세게 일기 시작했다. 1970년까지 4만여명의 미국인이 베트남에서 목숨을 잃었다. 반전운동의 본거지는 대학이었다. 앨라배마, 캘리포니아, 뉴욕 등 전국의 대학에서 격렬한 반전시위가 벌어졌고, 시위진압을위해 출동한 군대와 시위대 사이에서 충돌이 빚어져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사태가 점점 악화되어 갔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존슨 행정부는 군부와 정부 내 매파에 끌려 희망없는 전쟁을 계속하고 있었으며, 사회적 갈등은 점점 더 심화되어 갔다. (관련발언)1968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이 존슨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닉슨은 베트남 전의 조속한 종식을 공약으로 걸었기 때문에 닉슨의 승리는 국민들이 이제 베트남에서의 무모한 전쟁을 더 이상 원치 않고 있다는 사실의 명백한 증거였다.1972년에 닉슨은 중국, 소련과의 관계 개선을 도모하여 소위 데탕트라 하는 동서 화해의 시대를 열기 위한 시도를 행했으며,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미국과 월맹은 베트남전 종식을 위한 회담을 재개하여 같은 해 10월 전쟁의 종식, 미군 철수, 전쟁포로 송환에 합의했다.1973년 체결된 파리 협정은 모든 미군 병력의 조속한 철수, 베트남 내 미군기지 폐쇄, 전쟁포로 석방, 국제연합군의 휴전감시 등을 규정했다.미군 철수 이후에 월맹과 이들의 지원을 받는 베트남 남부 공화임시혁명정부의 공세가 더욱더 강화되었다. 1975년에 월맹군의 대공세가 시작되어 3월에는 월남정부가 최후의 보루로 여겼던 쾅트리와 휴가 월맹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4월 30일에 월남 정부는 무조건 항복을선언하였으며, 월남에는 임시혁명정부가 들어서 토지개혁, 반혁명분자 숙청을 단행했다. 이듬해인 1976년 하노이를 수도로 하는 통일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정식 출범했다.--------------------------------------------------------------------------------♠ 베트남 전쟁이 미국에 끼친 영향1. 국내의 반전 운동베트남 전쟁에 더욱 깊이 빠져들면서 미국사회에서는 반전 분위기가 더욱 확산되었다. 1965년에는 많은 대학에서 토론회가 시작되었고, 그 해 4월에는 2만5천명이 백악관으로 몰려가는 항의의 행진이 일어났다. 10월에는 전국베트남전쟁종식위원회(National Committee to End the War in Vietnam)가 8만회 이상의 전국적인 반전시위를 주도했다. 1967년 10월에는 워싱턴 DC에서 10만명이 참가하는 반전 행진이 벌어졌다. 행정부 안에서도 전쟁에 대한 염증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맥나마라(Robert McNamara) 국방장관은 베트남에 있는 미군의 수를 슬그머니 축소하였다. 그리고 그는 존슨 대통령에게 미군 철수를 설득하는데 실패하자, 장관직을 사직하고 말았다. 이는 미국이 승리할 수 없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반전주의자인 미네소타 주의 유진 맥카시(Eugene McCathy) 상원의원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 나서겠다고 발표함으로써 존슨 대통령의 영도력에 정면으로 도전했다.그러나 존슨 대통령은 비판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무시해 버리고, 전쟁 축소에 대한 지지자보다 전쟁확대 지지자가 더 많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오자 그는 전쟁 게속의 결의를 더욱 더 굳혔다. 그는 가끔 호치민과 협상하기 위해 폭격을 중단하곤 하였다. 그러나 그것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때마다 그는 미군병력을 더욱 더 증강시켜 나갔다. 그는 외교적 타결 시기가 임박할 때면 오히려 공중폭격을 다시 시작하거나 더욱 더 강화하였다.장기간에 걸친 베트남 전쟁은 관련된 모든 국가들에게 가혹한 희생을 가져다 주었다. 베트남 정부군 25만이 사망하고 60여만명이 부상했으며, 월맹의 경우는 희생이 더욱 커 90만의 군인이 사망하고 200만이 부상했다. 수십만 민간인들이 촉격과 기타 전쟁과 관련된 살상행위로 목숨을 잃었다.60년대 미국은 젊은이와 기성세대 사이에 강한 불신의 벽이 생겼다. 이젠 수단에서 목적으로 고착화되어버린(???) 지긋지긋한 미국 기성세대들의 호전적인 전쟁 지상주의에 젊은이들이 적극적으로 넌더리를 치기 시작한 것이다. 문화는 결국 그 시대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했던가. 기성세대의 가식과 위선에, 젊은이들은 히피문화라는 것을 통해 강렬하게 조롱과 저항을 던졌다.
    사회과학| 2001.11.30| 4페이지| 1,000원| 조회(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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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예] 삼국시대 종 평가A좋아요
    성덕대왕 신종경북 경주시 인왕동(仁旺洞)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신라시대의 종.지정번호 : 국보 제29호지정년도 : 1962년소장 : 국립경주박물관소재지 : 경북 경주시 인왕동시대 : 771년크기 : 높이 3.33m, 입지름 2.27m, 두께 2.4cm종류 : 종1962년 국보 제29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3.33m, 입지름 2.27m, 두께 2.4cm.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한국 최대의ㅣ 종으로, 에밀레종 또는 봉덕사(奉德寺)에 달았기 때문에 봉덕사종이라고도 한다. 종명(鐘銘)에 의하면 신라 35대 경덕왕(景德王)이 그의 아버지 33대 성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큰 종을 만들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그의 아들 혜공왕(惠恭王)이 뒤를 이어 771년(혜공왕 7)에 구리 12만 근(72t)을 들여 완성하고 성덕대왕신종이라 불렀다고 한다. 원래 봉덕사에 걸었던 것을 1460년(세조 6) 영묘사(靈妙寺)에 옮겨 걸었는데, 홍수로 절이 떠내려가고 종만 남았으므로 현 봉황대(鳳凰臺) 옆에 종각을 짓고 보존하다가 1915년 경주박물관으로 옮겼다.종 모양은 입 부분에 당초문으로 된 띠가 있으며, 당초문 사이에 8개의 큼직한 연화무늬를 일정한 간격으로 둘렀다. 종 위에는 웅건한 모습의 용(龍)이 음관(音管)을 감고 있다.몸체에는 당초문을 두른 견대(肩帶)가 있고 그 아래에 4개의 유곽(乳廓) 안에 각각 9개씩 모두 36개의 연꽃을 넣었으며, 그와 대칭으로 보상화무늬와 연꽃으로 된 당좌(幢座)가 있다. 비천상(飛天像)은 양각된 종명을 사이에 두고 2구씩 상대한 4구가 연화좌(蓮花座) 위에 무릎을 꿇고 공양하는 공양상(供養像)이다. 그 주위로 보상화(寶相華)가 구름처럼 피어오르고 있다. 비천상 사이의 2개처에 이 종의 유래와 종을 만들 때 참가한 사람 및 글쓴이의 이름이 적힌 종명이 있어 신라사를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성덕대왕 신종(종신){경주시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국보 제29호. 신라시대. 한국 최대의 종이며, 에밀레종이라고도 한다.성덕대왕 신종(비천상)경주시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국보 제29호. 신라시대. 종의 표면에 부조된 형태.{성덕대왕 신종경주시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신라시대. 국보 제29호. 한국 최대의 종이며 에밀레종이라고도 한다.낙산사 동종강원 양양군 강현면(降峴面) 낙산사에 있는 구리종.지정번호 : 보물 제479호소재지 : 강원 양양군 강현면 낙산사시대 : 1469년(조선 예종 1)크기 : 높이 158cm, 입지름 98cm, 보살상의 높이 36.8cm종류 : 종보물 제479호. 높이 158cm, 입지름 98cm, 보살상의 높이 36.8cm. 1469년(예종 1)에 조성된 것으로, 낙산사의 앞뜰 한 구석에 마련한 종각(鐘閣)에 있다. 종신(鐘身)에는 중앙에 세 가닥의 굵은 선으로 띠를 돌려 상하로 구분하고, 상부에는 4구의 보살상이 양각(陽刻)되었으며, 그 보살 사이에 범자(梵字)가 4자씩, 또 보살상의 어깨 근처에는 16자가 각각 새겨져 있다.이 보살상은 따로따로 마련한 연화대(蓮花臺) 위에 선 입상(立像)으로, 법의(法衣)는 매우 두꺼워 지체(肢體)의 존재마저 무시되어 있다. 옷자락은 연화대 밑까지 넓게 퍼져 드리웠다. 호사한 보관(寶冠)을 쓴 머리에는 무늬 없는 둥근 두광(頭光)이 있고, 얼굴의 윤곽은 정돈되어 있으나 약간 파손된 상태이다. 하반부에는 9.5 cm의 가로띠를 돌리고, 그 안에 고사리 모양의 물결무늬[水波文]가 선명하다. 어깨 부분에는 홑잎, 연꽃 36송이가 둘러져 있고 그 꽃 끝에 삼각형으로 세 꽃이 장식되었다. 정상에는 좌우 2마리의 용이 서로 반대쪽으로 연결되었고, 발과 몸의 일부가 끈을 다는 부위를 이루어 매우 사실적이고 웅대한 기품이 넘친다.이 종은 조각 장식에 있어서 그 형태가 뚜렷하고 아름다우며, 보존상태도 비교적 양호하여 조선시대의 걸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중앙의 가로띠 밑의 물결무늬 사이에 장문의 명(銘)이 양각되었다. 또한 세조 때에 중수하였다는 사실이 몸체에 기록되어 있다.{낙산사 동종(부분)강원 양양군 강현면 낙산사. 조선 초기. 보물 제479호.{낙산사 동종(상부의 보살상)강원 양양군 강현면 낙산사. 조선시대. 보물 제479호.{낙산사 동종(부분)강원 양양군 강현면 낙산사. 보물 제479호. 조선시대. 동종을 메다는 부분이며, 2마리의 용으로 되어 있다.동종사원에서 사용하는 동제(銅製) 범종(梵鐘).동종은 금속공예품 가운데 극치를 이루는 것의 하나로, 시각을 알려주는 실용적인 기능도 있지만 의례용, 특히 불가에서는 중생제도(衆生濟度)의 종교적 기능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사찰용 종을 범종이라 하며, 독자적인 양식과 의의를 가지고 있다.종은 원래 일종의 악기로서 중국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하였으며 철종이 많았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와 같이 청동을 기반으로 한 동종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예가 많다.동종의 화학성분을 보면 강도를 높이기 위해 동에다 12∼18% 가량의 주석을 함유한다. 이를테면 한국 최고(最古)의 동종인 오대산 상원사동종(上院寺銅鐘:국보 36)의 경우, 구리 83.87%에 주석 13.26%와 납 2.12% 등으로 분석된 바 있다.종은 동서양이 각기 독특한 형식을 지니며 발전해왔다. 우선 타종방식에서 서양종은 종신 내부에 방울을 매달아 종 전체를 움직여 소리를 내게 하는 내타식(內打式)으로 일종의 탁(鐸)과 같다. 반면 동양종은 종신 표면에 당좌(撞座)를 형성한 후 당목(撞木)으로 쳐서 소리를 내게 되어 있다.동종의 크기는 실내용의 1척 미만의 소종도 많지만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奉德寺鐘:국보 29)과 같은 높이 3.75m에 이르는 거종도 있다.특히 한국의 종은 한국종이라는 학명으로까지 불리고 있을 만큼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으며, 그 양식의 전형은 신라종에서 완성되었다. 한국종의 특징은 우선 종을 매다는 꼭지인 용뉴(龍쐤)가 있어 원통을 지닌 한 마리의 용이 고리를 형성하고 있다. 그 밖에 종신의 상단과 하단에는 당초문과 같은 문양대가 돌려져 있으며, 상대(上帶)에는 사각형 유곽(乳廓)이 있어 그 속에 3줄로 된 9개의 유(乳)가 돌기되어 있다. 특히 종 몸체의 중간부분에는 비천상(飛天像)을 비롯하여 불보살상(佛菩薩像) 등을 양각해 아름다움을 한층 더해준다. 신라종의 전체 구성비는 종의 입지름에 대한 높이의 비례가 대략 1:1.3 정도로 매우 안정되어 세련된 외관과 더불어 고도의 주조기술은 세계적으로 손꼽힌다. 널리 알려진 명종으로는 오대산 상원사동종(725년)을 비롯하여 경주의 성덕대왕신종(771년), 설악산의 선림원종(禪林院鐘:804년), 남원의 실상사종(實相寺鐘) 등을 꼽을 수 있다.{성거산 천흥사 동종국보 제280호. 고려 초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높이 167.6 cm, 입지름 95.5 cm.{태안사 천순명 동종전남 곡성군 죽곡면(竹谷面) 태안사 소장.{갑사 동종충남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갑사. 조선시대. 보물 제478호. 갑사 해탈문을 지나 오른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모지붕의 종각 안에 있다. 종신부 윗부분에는 두 마리의 용이 네 다리와 몸체로 뉴(종을 매다는 꼭지)를 이루어 그 표현이 매우 사실적이다.{여주 출토 청령사년명동종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려시대. 보물 제1166호. 경기 여주 출토.{희방사 동종경북 영주시{강화 동종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보물 제11호. 이 종은 조선 숙종 37년(1711) 강화유수 윤지완이 주조한 것을 그후 유수 민진원이 정족산성에서 현재와 같은 형태로 다시 주조한 동종이다.봉선사 대종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富坪里)의 봉선사에 있는 조선 전기의 동종.지정번호 : 보물 제397호소재지 :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富坪里)의 봉선사시대 : 조선전기크기 : 높이 238 cm, 입지름 168 cm, 두께 23 cm, 무게 2만 5000근종류 : 동종보물 제397호. 높이 238 cm, 입지름 168 cm, 두께 23 cm, 무게 2만 5000근.정상에는 쌍룡(雙龍)으로 된 꼭지가 있고, 어깨에는 복판(複瓣)의 연꽃무늬가 돌려져 있다. 종신은 중간에 세 줄기의 굵은 융기횡선(隆起橫線)을 쳐 상하로 구분하였으며, 윗부분에는 당초문 장식이 있고 안에 9유(九乳)를 갖춘 4각 유곽(乳廓) 4구(區)와 그 사이에 장신의 보살상 4구를 교대로 배치하였고, 상하에 범자(梵字)를 양주(陽鑄)하였다. 아랫부분에는 종구(鐘口)에서 훨씬 올려서 수파문대(水波文帶)를 돌리고 그 위의 공간에는 명문(銘文)이 꽉 차 있다.
    예체능| 2001.11.29| 10페이지| 1,000원| 조회(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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