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정치 제도1) 개관독일은 16개의 주로 형성된 연방 공화국으로서 민주주의 법치국가이다. 사회 복지 국가, 그리고 각 주가 자치권을 갖는 연방 국가의 원칙을 가지고 있다. 주 국회들이 지정한, 연방 국회의원들과 같은 숫자의 대표로 구성된 대통령 선출 대통령 선출 연방 회의에서 대통령이 선출되는데, 대통령은 정치 활동의 실질적인 권한보다는 단지 국가 대표자로서의 상징적인 권한만을 갖는다. 그래서 대통령은 군대 통수권을 갖지 못하고 평상시에는 국방부 장관이, 전시에는 수상이 군대 통수권을 갖는다. 그리고 대통령의 정부와 의회에 대한 영향력은 의 도적으로 축소되었는데 이는 근대 독일 역사에 나타난 독재자의 출현을 방지하려는 의도에 서 나온 것이다. 독일연방공화국에서는 19,脚년 5월 24일에 제정된 기본법이 모든 법질서의 근간이 된다. 1990년 10월 3일 독일통일과 함께 이 기본법은 독일 전 지역에서 효력을 발휘 하게 되었다.2)독일의 정치의 기본체계1. 연방주의 원리독일 연방공화국은 연방 뿐만 아니라 연방주도 국가적 독립을 갖는 연방국가다. 그렇지만 최고 국가권력은 연방주가 아니라 연방에 주어진다. 연방주의적 구조 및 그와 관련된 국가권력의 분산은 무엇보다 세금수입 및 입법행위에서 잘 드러난다. 전체 세금수입은 해마다 약간의 변화가 있지만 연방(약 44%),지방자치단체들(약 12%)에 분배된다. 또한 연방 뿐만 아니라 연방주도 입법 능력을 갖고 있다.2. 연방여러개의 주정부관할구들이 모여 독일 연방공화국의 연방주를 구성한다. 독일 연방공화국 은 제 3제국 명망 이후 미국, 영국, 불란서의 점령지역들로부터 독자적인 국가들로 성립되었 고, 연방국가로 결합한 11개의 서독의 연 방주들로 구성되었다.독일 연방공화국은 연방국가이자 국가 연합이 아니다. 국가 연합은 하나의 기구로서 그 권 력은 구성국가들의 국민들에게 직접 적용되지는 않는다. 반면에 연방국가는 구성국가들의 국민들에 직접 적용되는 통치권력을 소유하고, 영토, 국민, 국가권력 등의 요소들을 갖는 새 로운항에 의하면 모든 국가권력은 국민으로부터 시작된다. 국가권력은 국민 에 의한 선거를 통해 행사되고, 이는 국민의 대표로 선출된 연방의회에 대표된다(소위 간접 민주주의), 의원내각제에서 국민의 대표기관인 의회는 입법행위 뿐만 아니라, 권력의 실행에 도 참여한다. 집권당에 의해 구성된 정부는 업무소행에 대해 의회 과반수 이상의 신뢰를 필 요로 한다. 의회는 불신임투표를 통해 정부의 사퇴를 강요할 수 있다. 연방의회는 입법권을 갖는다. 정부의 수반인 연방수상은 대통령의 제안에 의해 연방의회에서 선출되고, 연방장관 들은 연방수상의 제안에 따라 대통령에 의해 임명된다.4. 사회주의적 법치국가 원리독일 연방공화국은 사회주의적 법치국가의 이상을 천명하고 있다. 기본법은 재산의 사회 적 귀속성 및 사회화의 목적을 위한 토지, 자원, 생산수단 등의 공유화를 명시하고 있다. 물론 공유화는 보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3) 선제제도와 정당1. 선거 제도독일의 선거방식은 지역구 주표제와 정당지지도에 입각한 비례대표제의 혼합형이다.독일인들은 한번의 선거에서 두장의 투표용지를 부여받는데, 첫 번째 투표용지에는 해당 지역구에서 출마한 후보에 기표하고, 두 번째 투표용지에는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에 기표한다.1949년의 독일 총선에는 무려 36개의 정당들이 등장했지만, 1990년에 선출된 연방의회에는 4개의 정당만이 연방의회에 진출했다. 이는 군소정당의 난립을 막기 위해 1953년에 도입되고 강화된 소위 5% 조항 때문이다. 이 조항에 따르면 5% 이상의 정당지지율을 확보하였거나, 3명 이상의 지역구 의원을 확보한 정당에게만 연방의회에의 진출이 허용된다.2. 정당분단 후 45년만인 1990년 10월 3일에 독일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기본법 제 23조에 의해동독은 연방공화국(서독)에 가입하였다. 동독 연 방주들의 가입 시에 통일독일이 연방공화 국의 기본법을 계승하기로 결정되었다. 통일과 함께 독일은 연합군으로부터 완전한 주권을 돌려 받았다. 독일의 연방의회는 기민당, 기사당, 자민당, 사민당, 민주당)기민당은 1945년에 창설된 정당이다. 기민당에는 구 서독에서 1991년에 약 65만명의 당원이, 구 동독에서는 9만명의 당원이 있었다. 1990년 10월에 서독의 기민당과 동독의 기민당이 통합되었다. 기민당은 바이에른의 자매정당을 갖고 있는데, 이는 약 18만명의 다원을갖는 기사당(기독교 사회당)이다 기사당은 선거에서 바이에른 지역에서만 후보를 내며,기민당은 바이에른 이외의 지역에서 후보를 낸다. 그래서 이 두 정당은 하나의 정당처럼 기 민/기사당이 라 호칭 된다.☞ 사미당(독일 사회 민주당)사미당의 전통은 1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사민당에는 1990년 중반에 서독에서 약 95만명의 당원이 있었고, 동독에서는 1990년에 새로 설립되었는데 약 10만명의 당원이 있었다. 1990년 9월에 서독의 사민당과 동독의 사민당이 통합되었다☞ 자민당(자유민주당)자민당은 기민당처럼 1945년후에 비로소 창설되었고, 당시에 약 7만명의 당원이 있었다.동독의 시기인 1990년 8월에 서독의 자민당과 약 16만명의 당원을 가진 동독의 자유주의 정당들이 통합되었다. 개인 및 개인의 자유에 대환 권리를 강조하는 자유주의가 자민당의 이념적 기반이다.☞ 동맹 9G/녹색당동맹 9G/녹색당은 동맹 90과 녹색당이 통합된 당이다. 녹색당은 시민단체와 환경보호단 체에서 시작해서 1980년에 정당으로 설립되었고, 1983년부터 연방의회에 진출했다. 1990년 총선에서 녹색당은 민권운동그룹인 동생 90 과 함께 정당연합을 하여 입후보했다.1993년에 녹색당은 동맹 90과 통합해서 동맹 90/녹색당이라는 하나의 당이 되었다.☞ 민사당(민주 사회당)민사당은 1990년 2월에 독일 통일사회당의 후속정당으로서 동배를린에 설립되었다. 동독의 집권당이었던 등사당의 2백 3십만명의 당원들 중에서 35만명이 민사당에 잔류했다. 그러나 1991년 중반에 당원수는 약 3만명으로 급격히 감소했다4) 독일의 정치조직1. 입 법 부(1) 연방의회연방의회는 선거를 통해 선출된 연방의회 의원들로 구성된 국민평등, 비밀선거를 통해서 4년의 임기로 선출된다. 연방의회는 회의를 진행시키는 임무를 갖는 한 명의 의장과 두 명의 부의장을 선출한다. 연방 의회의 업무는 상임위원회 및 총회에서는 수행된다. 기본법에 의해 절대다수결 이 규정되어 있지 않는 한, 연방의회는 원칙적으로 투표자 과반수의 다수결(상대다수결)로 의결한다 연방의회는 원내 교섭단체들로 구성된다. 연방의회, 연방참의회, 연방정부는 법안을 상정할 수 있고 이 법들은 연방의회에서의 심의를 통해 법으로 확정된다. 지방정부와 이해관계가 있는 법안은 연방참의회의 동의를 필요로 한다.(2) 연방참의회연방참의회는 연 방주들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기관이다. 연방참의회는 주정부의 대표 들로 구성되는데, 연 방주들은 인구비율에 근거해서 최소 3명, 최대6명의 대표 총 68명을 갖는다. 연방참의회는 비록 주 정부의 구성원들로만 이루어져 있을지라도, 연 방주들의 기관이아니라 연방의 기관이다. 각 주의 주지사가 1년의 임기로 인구가 많은 순으로 순차적으로 연방참의회의 의장직을 수행한다. 연방참의회 의장은 연방대통령의 유고시에 그 직무를 대 행 한다.연방주들은 연방참의회를 통해 연방의 입법 및 행정에 참여한다. 연방참의회는 지방정부 의 이해와 직접 관련된 법의 의결과정에서 동참할 권리를 갖는다. 연방의회에서 통과된 법 을 연방참의회가 승인하지 않을 경우에, 연방참의회는 이 법을 연방의회 의원과 연방참의 회 의원으로 구성된 조정위원회로 보내거나, 전적으로 거부할 수 있다. 지방선거에서 이긴 주정부가 연망참의회에 참의원을 파견하기 때문에, 연방참의회에서 야당이 다수를 확보하 는 경우도 있다.1) 하원의 원정부체계의 초석(모든 법률이 하원에서 제정/ 상원의 동의 필요함)-선출방법: 4년마다 총선이나 특별한 중간선거에서 선출-구에서 선출되는 의원/ 지방전체를 대표하는 의원선출☞ 하원에서 주요당들의 안정성과 지속성을 보장하기 위한 수단인 동시에 국가, 주, 정당, 일반 유권자 집단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후자의 기능을 위해 주 색 경향을 견제하는 세력으로 작용하게 된다.2)상원의원-임명 : 주정부들에 의해 임명각 주는 크기와 인구에 따라 3-5명의 의원이 임명, 주들이 자체적으로 그들의 권리와특전을 보호하기 위해 권한을 행사-권한: 상원은 하원이 통과시킨 입법안을 거부함으로써 제약을 가할 수도 있으나 그 법령이 특정한 범주에 속하는 것이 아니면 하원의 반수동의로 상원의 표결을 무효화 시킬수 있다.-위임: 대통령이 장기간 해외에 나가거나 부재중이거나 또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경우상원의장이 그 권한을 받는다총 21개의 상임 위원회를 두고 있다.1. 선거, 면책특권, 의사일정관련 상임위원회 2. 청원위원회 3. 외무 위원회 4. 내무 위원회5. 스포츠 위원회 6. 법사 위원회 7. 재무 위원회 8. 예산 결산 위원회 9. 경제 위원회 10.식량, 농림 위원회 11. 노동, 사회 위원회 12. 국방 위원회 13. 가정, 노인, 여성, 청소년 위원회 14. 보사 위원회 15. 환경 위원회 16. 통신위원회 17. 건설 위원회 18. 교육 연구 위원회 19. 경제 협력 위원회 20. 교통 위원회 21. EU 위원회2. 행 정 부(1) 연방 정부연방정부는 연방수상과 연방장관들로 구성된다. 연방수상은 정치의 노선을 결정한다. 중요 한 문제들은 소위 내각회의에서 결정된다. 연방장관들은 자신의 부서를 독자적으로 자신의 책임하에 관장한다. 부서의 수와 업무영역은 기본법에 확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사안에 따라 혹은 정치적 필요성에 따라 유동적일 수 있다.1) 수상임기 : 4년 (연방회의 투표에서 과반수를 얻은자가 대통령에 의해 임명)권한 : 상당한 독립적 권한이 부여되며, 정부 정책을 주도한다. (특정한 기술분야에서 정당과 무관한 사람을 지명할 수도 있다.해임 : 연방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해임될 수 있다.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의 불안정을 피하기 위한 보호장치로 시행된 이 "건설적인 불신임 투표" 때문에 수상이나 그 정부가 물러나게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2) 장관각료수는 일정하지 않다. 대부분 연방의다.
-GE의 경영성공 사례♣GE의 성장전략⊙DigitizationGE는 21세기를 준비하며 이미 전체 사업부를 [인터넷형 조직]으로 탈바꿈하는 대대적인 구조 재편 작업을 진행 해 왔습니다. 이에 따라 GE는 인터넷과 전자 상거래를 접목시키기 위해 조직을 개편하고 웹 사이트를 고객 친화형으로 재개발하는 한 편 99년 말까지 사업별, 지역별, 국가별 현지 언어로 된 개별 웹 사이트를 구축하는 일도 추진하고 있습니다. 웰치 회장은 GE 전 사업부에 DestroyyourBusiness.com.이라 명명된 전자 상거래 담당 전담 팀을 지시하고 GE를 웹에 기반을 둔 새로운 조직으로 재편하는 작업을 진행 중에 있습니다.⊙GlobalizationGE는 미국 기업 중 세계화에 가장 앞선 기업입니다. 현재 세계 100개 이상의 국가에서 사업을 운영하고 있으며 미국 이외에 25개국 113 개 장소에서 생산 시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GE의 총 매출 중 절반 가까이는 미국 외의 세계시장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GE의 세계화는 세계 여러 나라의 파트너들과 자본과 기술의 제휴에서부터 전략적 제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경영의 현지화와 범세계적 경영 인력의 개발에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Six Sigma Quality (6 시그마 운동)GE는 보다 강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95년부터 Six Sigma품질 경영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식스 시그마 운동이란, 100만개의 제품이나 서비스 중 단 3개 또는 4개의 의 불량만을 허용하는 무결점주의 품질을 의미합니다. 현재 많은 기업들이 이와 비슷한 운동을 실천하고 있으나, GE의 품질운동은 제품에 국한된 품질 경영 뿐 만 아니라 서비스는 물론, 모든 경영과 영업 과정에 걸친 전 분야의 품질을 무결점 수준으로 끌어 올리고자 하는 데 그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GE는 1998년 말 현재 전 사원을 식스 시그마 요원(그린 벨트)으로 만들었습니다. 모든 임원과 간부의 승진에 있어서도 식스 시그마의 추진성과가 최우선적콤 등 전 계열사에 도입했다. 또 삼성 역시 올해에 삼성전자, 삼성SDI, 삼성코닝, 삼성에버랜드, 제일모직을 비롯 삼성카드, 삼성캐피탈 등 금융계열사로 확대시켰다. 철강업체 포스코도 6시그마 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올해 제2기 프로세스혁신(PI) 운동을 펼치면서 향후 2004년까지 6시그마를 새로운 경영전략으로 채택했다. 여기에다 현대자동차, 효성 등 국내 굴지의 제조기업들이 6시그마운동을 벌이고 있다.6시그마와 경영혁신 운동☞ 그리스문자 σ(시그마)는 통계학에서 표준편차를 나타내는 기호이다. 이 시그마 기호가 제품생산공정에서 제품 품질의 목표치를 표시하는 품질 특성값의 분포도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면서 이 시그마 개념은 경영학의 한 이론이 된다. 여기서 시그마(σ) 숫자는 크면 클수록 제품의 산포(散布)가 심해 낮은 품질수준을 의미하게 된다. 이후 시그마는 기업이나 혹은 경영 프로세스의 품질수준을 나타내는 지표로도 쓰이고 있다.☞ 따라서 시그마 개념은 프로세스에서 문제점을 해결, 고객만족을 이룩하는 활동 및 그 방법을 말하며 경영혁신을 위한 기업전략에도 활용된다.☞ 6시그마 운동은 ''87년 미국 모토롤라사가 제창한 새로운 품질혁신운동으로 100만개의 제품중 3.4개 이하의 불량률을 목표로 시작됐다. 이후 시장의 개념이 소비자 중심으로 바뀌면서 6시그마 이론은 경영계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그 이유는 불량률 제로에 도전한다는 것 자체가 고객만족경영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기업들의 경영전략은 고객만족을 달성하는 쪽으로 맞춰졌고 기업들은 모든 분야에서 혁신적인 개선활동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새로운 경영기법인 6시그마 운동을 통해서 가능해졌다.☞ 6시그마 운동은 제조공정은 물론, 제품의 설계, 자재관리(구입) 뿐만 아니라 간접사무부문인 판매, 영업, 회계, 마케팅, A/S의 모든 프로세스에서 비효율적인 면을 최대한 제거하고 최고의 품질수준을 유지시켜 고객만족을 달성코자 하는 경영전략이다.☞ 이 이론을 확장하면 제조업을 비롯해 비제조업하는 데 많이 쓰인다. 또 TQC는 기존의 QC활동과 함께 제품의 설계, 수입자재 관리, A/S 및 관리영역까지 지평을 넓히는 전사적 품질관리로서 QC의 확장단계이다.☞ 뿐만 아니라 TQM은 80년대 초반까지 일본의 경쟁력에 뒤지고 있던 미국기업을 중심으로 한 제조공정 및 설계단계위주의 관리시스템으로 기업경쟁력 회복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 즉, 고객중심, 공정개선, 품질문화형성을 기본요소로 최고경영자의 리더쉽, 교육과 훈련, 조직원의 참여 및 의사 소통을 중시하고 포상을 실시해 QC와 TQC보다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면모를 갖추게 됐다.☞ 이러한 기존의 품질관리기법들도 불량률 99%에 도전하는 우수한 기법들이다. 하지만 전 사업장에 불량률 99%가 적용됐을 경우를 생각해보면 불량률 100%에 도전하는 6시그마가 왜, 기업들에 게 최근에 호응을 얻는 지 알 수 있다. 만약. 전 산업에 99%의 품질개선이 이뤄진다고 할 때 이러한 일이 생길 수 있다.☞ 공공기관인 우체국은 시간당 2만부의 우편물을 분실한다. 또 수도사업장은 하루에 15분 동안 오염된 물을 가정에 공급하는 꼴이며 병원은 일주일에 5,000건의 잘못된 수술을 할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매일 주요 공항은 2건의 착륙사고를 일으켜야 하며 매년 20만건의 약처방이 잘못 이뤄지게 된다. 여기에다 전력공급 기관은 매월 거의 7시간 동안 정전이 불가피해진다.☞ 21세기는 지식정보화 사회이자 무한경쟁의 시대이다. 기업이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하는 환경이 도래한 것이다. 이를 위해 기업은 적극적으로 제품의 제조품질 및 서비스, 사무간접부문의 품질향상을 기하고 미스나 에러, 비효율 등 기업경영의 방해물을 제거해야 한다. 또 개별 프로세스의 업무개선을 통해 전사적으로 고객만족을 실현시키는 데 골몰해야 한다.☞ 이 때 6시그마는 기업의 품질비용을 효과적으로 절감시키고 기업의 인력, 기술, 판매, 생산, 제조, 서비스의 모든 조직에서 최대의 효율을 낼 수 있는 최적조건을 찾아주는 경영기법이 될 수 있다. 하는 ''6시그마추진'' 팀까지 출범시켰다☞ 추진 1차년도인 올해 제일모직은 해외 컨설팅사의 6시그마 경영진단을 실시하고 중장기 마스터플랜을 수립, 1차로 22명의 BB(Black Belt)요원을 양성하고 총 40여명의 BB인력을 육성중이다. 아울러 프로젝트 과정 및 성과측정에 따른 보상, 승격지침 등 관련 시스템도 정비하고 있다.☞ 또 제일모직은 6시그마 경영의 중장기 목표를 경영품질 시그마 6단계를 달성해 매년 1천억 원 이상의 손익개선 효과를 창출하고, 전 부문의 일상적인 경영활동을 6시그마 경영혁신 방법에 둘 방침이다.☞ 6시그마 경영의 국내 선구자격인 LG전자는 기업내부에 많은 변화를 경험했다. 이는 LG전자의 직원들간에 6시그마 경영을 통해 정확한 분석과 합리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하는 인식이 급속도로 사내에 확산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6시그마를 더욱 더 확산시키려는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났으며 디지털LG를 표방하는 LG전자의 성격에도 잘 부합된다는 인식이 커졌다.☞ 6시그마를 처음 도입한 LG전자의 홈 어플라이언스 사업본부는 사업본부 소속 전 임직원을 대상으로 6시그마를 활용한 ''1인 1 프로젝트''를 실시하고 이를 승진 및 고과에 반영했다. 이 사업본부는 97년에 109개, 98년에 663개의 6시그마 프로젝트를 단행, 전체적으로 75%의 불량개선효과를 거뒀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세탁기의 클러치에서 나타난 불량을 90% 이상 감소시켰으며 청소기 전원코드부의 내부단선 불량이 가혹시험조건에서 무려 10만 ppm이던 것을 완전히 제거했다. 여기에다 6천ppm이던 가스렌지 R-밸브의 시장불량도 사라졌다.☞ LG전자는 6시그마를 통해 불량이 감소하면서 고객의 신뢰가 높아졌다. 또 시장에서의 서비스비용이 절감되고 현장에서는 생산성이 향상되는 효과도 생겼다. 또 6시그마의 효과가 가시적으로 입증되면서 생산부문만이 아니라 R&D부문, 그리고 사무부문에까지 확대되는 효과도 거두고 있다.☞ 세계적인 철강회사인 포스코도 6시그마 경영을 일찍이 받아들여 정착포스코는 직원들의 일상적인 업무방식, 문제접근 및 해결방식을 6시그마에 바탕을 둔 과학적이고 통계적인 방식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마지막으로 포스코는 6시그마의 성공적인 추진을 위해 교육·훈련은 물론, 성과 평가 및 보상 체계를 파격적으로 정비, 직원들의 일하는 방법과 태도에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데 전략의 핵심을 두고 있다.☞ 지난 99년 부품업계 처음으로 6시그마 운동을 채택한 삼성전기는 최근 6시그마 운동을 통해 올해 모두 1천590개의 프로젝트를 완료, 1천390억 원의 재무성과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삼성전기는 65개의 제품과 핵심기종 중 빌드업기판 등 23개가 올해 말까지 품질 무결점 수율을 달성했으며 장치제품과 조립제품 수율이 연속 3개월 이상 99%, 99.9%에 각각 도달하는 품질 무결점 수율을 달성할 경우 재무성과의 5%를 포상금으로 지급하고 인사가점을 부여할 계획이다.⊙Services1980년 매출액의 85%가 제품 생산에서 비롯되었던 GE가 현재 매출액 70% 가 서비스품목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은 그 동안의 GE의 서비스 중심의 전략을 보여 주고 있으며 이를 통해 GE는 고객들에게 가치를 전달하기 위한 역량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GE의 경영방식⊙ Intergrated DiversityGE는 12개의 사업 집단으로 구성된 복합 기업이지만 단순 다변화한 사업집합체가 아니라 "통합된 다양성(Integrated Diversity)"을 가진 사업 집단입니다.사업 분야의 '다양성'이 총체적 안정성을 가져오며, 사업부 간의 유기적인 '통합성'이 경쟁력과 성장을 촉진시키는 힘이 되고 있습니다. GE의 각 사업 부문은 독립된 사업단위로서 각 사업단위의 최고 경영자의 리더쉽하에서 자율적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GE의 통합된 기술력과 인재, 자금, 사업개발, 연수, 통합구매, 품질 관리 등을 공유하며, 상호 활용하고 있습니다. 어느 사업 부문에서 개발한 새로운 기술과 경영 노하우는 다른 사업 부문에 이전되며 이를 상호 공유함으로써 경영 성습니다.
돈의 역사목 차1. 서문2. 돈의 짤막한 역사3. 중국과 극동4. 근대와 20세기5. 우리나라 돈의 역사1. 서 문나는 종교, 문학, 전쟁처럼 우리에게 알려진 대부분의 문명과 문화에 공통적인 화제 중 하나인 돈이라는 주제를 다루기로 했다. 세계 여러 지역의 돈의 형태, 제조, 기술 목적, 문화적 역할, 역사를 병행하여 제시하려고 한다. 계속 변화하는 돈의 성격과 그것이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에 대해서 돈의 역사는 많은 질문들을 제기한다. 2000년이 넘는 시점에서 그것들은 인류역사의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절박하게 여겨지는 질문인 것 같다. 이제 이 세상에서 돈의 위력의 영향을 받지 않거나 그것으로 삶의 틀이 잡히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돈에 대해 쓴다는 것은 위험한 작업이라서 때에 따라서는 민감한 곳을 건드려야 한다. 인류 역사상 돈처럼 그토록 끊임없이 열렬한 관심의 초점이 되었거나 그토록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비난을 유발했다거나 혹은 개인과 국가 간의 폭력적 투쟁과 경쟁의 원인이 된 것은 거의 없었다. 이 난해한 주제를 인류학이나 혹은 경제학 이 아닌 역사적 접근방법을 선택했다. 그렇다고 “기원”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통상적으로 다루는 것은 아니다. 극동과 중국 혹은 근대유럽처럼 아주 다른 여러 문화권의 돈을 분리하여 그 각각의 역사 안에서 시대별로 훑어 보고자 한다. 진정한 돈의 역사는 통계나 고전학(古錢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태도와 행동에 의존한다고 생각한다.2000년이 된 시점이지만 정치, 환경, 경제에 관한 우려로 인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 퍼져있다. 새로울 것도 전혀 없을지 모르지만 현재 우리가 지닌 모든 우려의 궁극적인 원인 그리고 우리에게 익숙한 옛 질서를 침식하고 불확실의 시대로 이끌어 가는 이름 없는 힘을 찾다보면 흔히 돈이 그 작품에 등장하는 악역으로 간주된다. 서양 세계의 많은 곳에서 종교가 없어지고(물론 모든 곳이 다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국제상업이 전통적인 정치기구들을 우회하 따라 여전히 신성하게 여기던 돈은 두 세계를 연결하는 다리가 되었다. (돈이 신성화된 이유는 초기의 금과 은이 가지는 의미가지는 신적인 숭배 때문이었다.) 하늘과 땅의 연결을 표시하기 위해 동전한쪽 면에는 신의 머리나 그 상징물이, 반대쪽에는 세속적인 상징물이 새겨졌다. 그러다 영국을 지배한 로마는 물질적 가치를 위해 금을 빼앗았고 신전을 파괴했다. 서기 1세기 후반 로마 네로 황제가 통치하던 로마에서 돈은 이미 세속적인 것으로 변질되었고 그런 전통은 현대까지 계속되고 있다.하지만 서기 4세기경 로마가 몰락한 후 유럽문화는 농경생활 방식으로 되돌아갔고 암흑시대 주화는 상류 계층에게나 하류계층에게나 매우 희소한 물건이었다. 교역과 물물교환이 다시 돈의 세계와 경제활동의 전면에 등장했다. 사람들은 흙에서 생계를 유지하는 삶을 영위하며 땅과의 관계를 회복했다. 중세가 끝날 무렵 세계적인 상업이 출현했고 그와 함께 상인계급과 상인 단체인 길드가 발달했다. 주화가 다시 유행하기 시작했고 지폐와 수표가 도입되었다. 이 시기는 물론이고 르네상스 시대까지 돈은 과거의 신성한 성격을 계속 유지했다. 돈이 영적 세계와 철저히 단절되고 오늘날처럼 완전히 물질적 세계에 귀속된 것은 산업혁명 이후부터이다. 새 천년이 시작된 우리는 또다시 2,000년 전의 로마와 같은 세계를 맞이하고 있다. 우리 시대에 돈은 신과의 모든 관계를 잃고 말았다.결국 과거에 했던 역사의 반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는 단 한번만의 사건 혹은 돌아오지 않는 사실 재생될 성질이 아닌 것이다. 역사는 비슷한 유형의 사건들이 반복되면서 다시금 출발점으로 회기하는 형식으로 진행한다고 본다. 결국 인간본성이 근본적으로 동일하므로 인간은 같은 여건에 대해 같은 대응을 할 것이며 그 결과 같은 제도, 사상, 관습, 언어체계, 법 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러므로 지금 영적 세계와 철저히 단절 된 채 철저히 물질적 세계에 귀속 된 채 흘러가고 있는 돈의 역사는 결국 어떤 한계에 부딪혀 다시 옛날과 같은 그의 청동 삽 모양과 칼 모양의 돈이었다.- 즉 서양의 첫 주화와 대략 같은 시기였다. 그것들은 농기구를 모형으로 해서 만들어졌지만 훨씬 더 얇고 작은 크기였고, 그 일족 이름과 장소명과 무게를 새겼다. 300년이 못 되어 중국의 모든 나라들이 삽 모양의 주화를 발행했는데 예외적으로 남쪽의 초(楚)나라에서는 칼 모양의 청동 돈을 만들었다. 기원전 3세기에 시황제(始皇帝)가 전국시대의 중국을 통일하여 기존의 자국의 화폐를 진(秦)제국의 기준으로 삼았다. 가운데 사각형 구멍이 있는 둥근 주화로서 반량(半兩: 말 그대로 무게가 半兩이라는 뜻)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이었다. 그 후 여러 가지 무게로 지속되던 반량은 기원전 118년 한(漢)나라 황제 무제(武帝)가 새로 만든 역사적으로 중요한 주화로 대치되었다. 오수(五銖: 1수는 1냥의 24분의 1에 해당하는 무게의 최저 단위)라고 새겨진 한나라의 주화는 중국 내부에서 널리 쓰였고, 제국이 확장되며 변방까지 멀리 퍼져나갔다. 한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오수전은 주요 주화로 지속되었고, 제국이 작은 나라들로 분열된(220년)후에도 계속 발행하는 지역도 있었다. 6세기 말 제국이 621년에 새로운 도안의 주화 개원통보(開元通寶)로 대치한다.새 주화도 가운데 사각형 구멍이 있는 둥근 모양이었지만, 전에는 무게를 나타내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던 반면에 이제는 발행 시기와 돈임을 나타내는 네 글자가 새겨졌다. 그래서 새 각인은 구멍을 가운데 두고 위에서 아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開元通寶’라고 쓰여 있다. 전 세계에 “황금시대”라고 알려졌던 당(唐)나라(618~907)가 극동에 두루 미쳤던 영향은 지대했다. 주화를 포함한 중국문화는 그 지역 전체에 퍼졌다. 일본에서는 708년 베트남에서는 970년, 한국에서는 996년에 첫 주화가 만들어졌다.(고려[高麗],성종[成宗] 15년 에 발행된 철전인 건원중보[健元重寶]. 앞모양은 당나라 개원통보와 같으나 뒷면에는 한국화폐임을 표시하는 동국[東國]이라는 두 글자가 표시되어 있다. 쓰는 지역들로 나뉘어져 있었다. 심지어는 구리 수출을 금지하는 지역도 있었다. 수표 형태의 지폐는 지역간 교역에서 이런 문제를 푸는 방법이었다. 게다가 저액 대용 철전을 돈으로 사용하는 지역이 많았는데 그것들을 다량으로 사용하려면 몹시 불편했다. 송나라 때 외국의 군사적 압력도 정부 재정에 압박을 주었다. 지폐는 정부의 지출을 보충하는 데 쓰일 수 있었다. 가격은 곧 지폐의 형태로 표시되었고 동전은 사실상 상품이 되었다. 게다가 차와 소금장사가 활성화되면서 차와 소금의 대금을 지불하고 창고에서 물품을 찾아가는데 사용되던 인수증 그 자체가 돈의 한 형태가 되었다. 이 모든 초기 지폐들은 개인이 발행했던 송금어음, 약속어음, 환어음들이었고 만기일이 정해져 있었다. 요즘 우리가 쓰는 것 같은 의미의 지폐(즉 관청에서 발행한 날짜 제한이 없는 수표)는 1189년 진나라에서 처음 발행한 수표였다. 몽골 원나라(1206~1367)때에는 금화, 은화, 동전의 유통을 금지하고 오로지 지폐만 사용하게 했다. 마르코 폴로가 중국의 지폐에 관한 그의 유명한 이야기를 쓴 것이 바로 그 시절이었다. 13세기에 몽골은 고려를 정복하고 지폐의 유통을 강제했다. 몽골인들이 이미 동전이 유통되던 그 지역에서 지폐를 탈없이 발행했던 반면에, 이란 같은 서방 국가들에서 지폐를 유통시키려던 그들의 노력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점이 흥미롭다.지폐는 중국에서도 점점 널리 사용되었고 일본, 한국, 베트남, 동남아시아에서는 주화를 몰아냈다. 1074년에는 중국 주화의 반출금지가 해제되었다.중국 돈의 역사에서 돈 이야기는 두 가지 화제에 집중되었다. 첫째는 주화의 장점 및 단점과 관련하여 주화를 옷감이나 곡물 같은 유용한 물품으로 완전히 대치해야 할지에 관한 논란이었고 둘째는 정부와 개인 기업 중 과연 누가 주화를 발행해야 할지에 관한 논란이었다.그것은 실제적일 뿐 아니라 윤리적인 문제였다. 유통되는 돈은 인간관계를 변화시킬 힘이 있으므로 사회의 기존 질서를 파괴할 잠재력이 있다는 것을 간파한 중국미국의 통화 체제는 아직 모두 귀금속 본위였다. 20세기 말로 접어들면서 그와는 대조적으로 실제 화폐를 쓰지 않고도 수표, 신용카드, 데빗카드(debit card: 은행예금의 인출 및 예입을 직접 할 수 있는 카드) 따위와 최근에 개발된 전자 기술과 컴퓨터 기술을 이용한 회계방법만으로도 수많은 화폐 거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주화대신 쓰였던 유사한 수단들은 물론 그 이전 세기에도 있었다. 예를 들면 환어음 같은 것은 이미 여러 번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현대 이전의 그런 방법들은 일반적으로 최악의 경우 언제라도 빚을 경화로, 즉 은이나 금으로 거둬들일 수 있다는 기대 위에 개발된 것들이었고 그런 면에서 어음은 그저 어쩌다가 의존하는 대용품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현대 이전의 서양 역사에서 돈은 개념상으로 금이나 은이라는 물질에 굳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이 책을 쓰는 21세기 초에는 대체로 더 이상 그렇지 않다고 단언할 수 있다. 금과 은은 이제 돈이나 교환가치의 으뜸가는 상징이 아니고 지폐나 신용카드를 귀금속 일정량의 대용품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영국 지폐에는 아직도 “나는 소지자가 요구하면 합계 ○○파운드(즉 그 무게만큼의 금으로)를 지불하겠다고 약속한다.”라고 적혀 있지만 그 문구는 그저 호고적(好古的)취미로 남아 있을 뿐이며, 영국인들 사이에서 그사이에 돈 가치의 의미는 근원이 혁신적으로 달라 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돈은 훨씬 더 유연해지고 더 다루기 쉽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상당한 이론적 논박이나 재난을 겪지 않고 이런 심대한 발전을 이룬 것은 아니었다. 이런 역사적 시각은 미래의 입장에서 과거의 입장을 서로 다른 돈에 대한 가치관으로 살펴본 것이다. 역사는 항상 앞으로 전진한다. 물론 항상 전진한다고는 할 수 없다. 중간에 과거를 되새겨 보고 그 과거를 배경 삼아서 쉬어갈 뿐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역사는 진보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시대가 발전하면 할수록 시대간의 격차는 더 커 보일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과거가 있기에 지금의 역었다.
공민왕 신앙의 지역성공민왕{1)1330∼1374. 고려시대의 31대왕.이 모셔져 있는 산성마을은 이 마을 주민들이 6.25전쟁 이후 입촌(入村)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개촌(開村) 시기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공민왕당 일대를 산성마을 이라 하는 건 산성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공민왕의 부인을 모신 북곡리 윗뒷실의 경우 월성(月城) 이씨(경주 이씨)가 입향(入鄕) 하였다고 하나 현재 거주하는 주민이 없어 선대를 확인 할 수 없으며, 월성(月城) 이씨 다음에 입향(入鄕)한 밀양(密陽) 박씨의 선대를 확인 할 수 있다. 마을 앞 낙동강에 북두칠성의 형상을 한 바위가 있어 두실이라고 하였으나 뒤실로 바뀌었다. 북곡은 일제 때 지여진 지명으로 추정되며 청량산 뒤 북쪽에 마을이 있어 북곡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밀양 박씨가 가장 먼저 입향(入鄕)하였다고 하니 지금 밀양 박씨들이 정착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아랫뒷실에서도 공민왕의 부인이 모셔져 있는데 현재 가장 많은 성씨인 淸州 鄭氏는 12세손 鄭思承이 마을에 정착을 하면서 번성하였다고 한다.이 외에도 가송리, 정자골, 높은데, 등자다리에서는 공민왕의 딸을 모시고 있으며, 구티미에서는 며느리를, 내살미에서는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청량산{) 경상북도 봉화군 재산면 남면리, 명호면 북곡리와 안동시 예안면 경계에 있는 산. 870m.일대의 각 마을에는 공민왕과 관련된 사당들이 많이 있다. 이 곳에서는 공민왕을 신격화시켜서 매년 제사를 지내고 복을 빈다. 어느 마을이건 자기네 마을에서 모시는 신에게 매년 제사를 지내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에게 복이 내리기를 바라는 것은 모두 같다.이렇게 볼 때 공민왕에게 제사를 지내는 절차나 방법 또한 여느 마을의 제사와 다를 것이 없다.하지만 좀 더 깊이 들어가서 제의 형태나 신격의 양상에서 보면 다른 지역과 차별화된 지역성을 찾아 볼 수 있다.먼저 찾아 볼 수 있는 것이 우리나라의 신들을 보면 대부분의 신들이 설명하기가 막연하며 성별을 구별 할 수 있는 신이 손에 꼽힐 정도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청량산에서 모시고 있는 공민왕은 고려시대 말기의 왕이었던 실존인물이며 남성임을 확인 할 수 있기 때문에 구체적이다.또 이 곳에서는 공민왕만을 모시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공민왕의 어머니, 부인, 딸, 며느리, 사위 등도 공민왕당 주위의 각 마을에서 모셔지고 있다. 이들 또한 공민왕과 마찬가지로 고려시대에 이 땅에 살다간 실존 인물들이다.따라서 이 곳의 신들은 모두 신분, 성별, 가족관계 들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지역과 차별화된 청량산 일대에서만 나타나는 지역성 하나를 밝혀 주고 있다.이렇게 청량산 일대의 신들의 성별을 구별해 들여다보면 남신보다 여신의 비율이 높다. 우리나라의 신들 중 여성신격의 비율이 높은 현상에서 한국 고대 산신의 성이 여성이었음을 감안해 볼 때 청량산 일대의 신앙 역시 산신신앙의 전통 속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다음으로 이 지역의 지역성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앞에서도 잠깐 설명한 바 있듯이 청량산 일대의 각 마을에서 모시고 있는 신들이 공민왕과 혈연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공민왕이 모셔져 있는 산성마을을 중심으로 내살미, 뒷실, 가송리에 공민왕의 어미니, 부인, 딸 등이 모셔져 있는 것으로 볼 때 사방에 공민왕과 혈연관계에 있는 가족들이 산재해 있음을 알 수 있다.신들이 혈연관계를 맺으면서 여러 마을에서 모셔지고 있는 것은 경산 자인면의 한 장군과 창녕군 영산면의 문호장 가족 신군을 비롯하여 인근의 도산면 토계에서도 전승되고 있다. 이는 각 지역 나름대로의 독특한 지역성을 반영하고 있다.각 마을에서 모시고 있는 신들은 그 마을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라 할 수 있다. 자신들의 정신적 지주의 혈연관계에 있는 이들이 다른 마을에서 신으로 모셔지고 있을 때 마을과 마을간의 공동체 의식을 더욱 강해지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그 대표적인 곳이 공민왕과 그의 가족들이 각 마을에서 모셔지고 있는 청량산 일대라 할 수 있다. 이 곳의 마을은 혈연관계에 있는 신을 모시고 있다는 것 외에도 지리적 영역과 사회적 상호작용과 더불어 공동의 유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공동체 의식이 강하고 주민들의 응집력을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여 공동사업과 협동 관행들을 많이 하고 있다.이들의 공동체 의식을 더욱 강화 시켜 주고 공동체 의식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신들에게 제를 지내는 것이다.공민왕의 딸을 모시고 있는 가송리에서는 정초에 공민왕이 모셔져 있는 산성마을에 가서 공민왕당에 세배를 하는가 하면, 제사를 올리는 도중 공민왕당을 향하여 재배를 하기도 한다. 공민왕의 부인을 모시고 있는 아랫뒷실에서는 부부를 함께 모시기 위해 공민왕당의 제일보다 날짜를 하루 늦추기도 한다. 이러한 의식들 속에는 공민왕 몽진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사회적 통념인 조상숭배의식이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이러한 공민왕계의 신의 혈연계보는 인근지역의 도산면 토계에서 모시고 가족 신군이 토계 마을의 분파(분파) 과정을 설명하는 주요 자료로 평가받고 있듯이 청량산 일대의 공동체 신앙의 일면을 보여 주어 지역성을 잘 나타내 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공민왕 혈연신들은 지리적·생태계적 배경에서 형성된 토착신격인 산신과 함께 신격화되고 있다는 것이다.이 지역의 모든 마을에서는 동제를 지낼 때 산신에게 미리 제를 행한 후 혈연 신들에게 제사를 올린다.또한 한 신격의 직능도 어느 정도 구분이 되어 자연과 생산에 관련하는 직능은 산신이 수행하고, 사회적이며 정치적·문화적인 활동과 연관이 있는 직능인 공민왕신이 담당하는 것으로 인식한다.하지만 현재 산신신격에 대한 역할 기대는 축소되며, 인물신격에 대한 역할 기대는 강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지역의 자연적인 환경을 바탕으로 형성된 토착신앙이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인물 신앙과 결합하게 되면서 무의식중에 신격을 평가하게 된다. 결국 비중있는 신격만이 전승력을 확보하게 되는 순차적 과정 속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마지막으로 이 지역의 공민왕 신앙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지역성은 가무오신형(歌舞娛神形){) 풍물을 이용하는 마을 굿의 하나.동제를 지내는 가송리의 경우 군사적인 성격의 풍물을 연행하고 있다는 점이다.이 곳에서 행하고 있는 가무오신형(歌舞娛神刑)에서 연행하고 있는 풍물이 군사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은 공민왕 시절에 군사들을 지휘하기 위해 만들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 시대1. 나폴레옹의 등장2. 統領政府와 第1帝政3. 나폴레옹의 內治4. 나폴레옹의 유럽 制覇5. 프로이센의 改革6. 나폴레옹의 沒落1. 나폴레옹의 등장프랑스가 제노아로부터 코르시카를 획득한 직후에 이 섬에서 태어난 나폴레옹(NapoleonBonaparte,1769∼1821)은 사관학교를 나온 후 자코뱅 국민공회 때 반란을 일으킨 틀롱항 탈환에 공을 세우고(1793.12), 다시 데르미도르파를 위해 파리에서 왕 당파폭동을 진압하여 젊은 장교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았다.제1차 대불동맹(大佛同盟,1793)은 프로이센이 바젤조약(1795)으로 라인강 서쪽의 영토를 프랑스에 양도하고 강화를 체결함으로써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나폴레옹은 1796년 오스트리아를 공격하기 위한 이탈리아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이탈리아로부터 오스트리아군을 일소(一掃)하였다. 그 결과 체결된 캄포 포르미오(Campo Formio,1797) 조약에서 오스트리아는벨기에와 롬바르디아를 프랑스에 양도하였다. 이탈리아작전에서 공을 세운 나폴레옹은 영국에 대한 간접적인 공격으로서 1798년 이집트 원정에 나셨다.나폴레옹의 이집트원정으로 지중해방면의 권익에 위협을 느낀 러시아는 오스트리아에 접근하여 영국과 더불어 제2차 대불동맹을 결성해(1798.12) 프랑스 본국을 위협하였고, 국내에서는 자코뱅의 진출로 정치정세가 어수선해졌다 이에 나폴레옹은 홀로 이집트로부터 귀국하여(1799.8.) 총재정부를 쿠데타로 쓰러트리고(브뤼메르정변) 새로이 통령정부(Consulate)를수 립 하였다2. 統領政府와 第1帝政브뤼메르 쿠데타의 의미를 처음에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브뤼메르파는 자기들의 이익에적합한 공화국을 굳히려고 하였다 바라스는 쿠데타가 끝나면 나폴레옹을 다시 전장으로 되돌려보내려고 하였고, 시에예스는 그를 실권 없는 최고권자의 자리에 앉히려고 생각하였다.그러나 브뤼메르파는 자기들의 계급적 특권을 유지할 수 있었을 뿐, 그들이 수립하려던 부르주아 공화국의 꿈은 나폴레옹의 개인적 권력과 군사 독재 앞에 급속히 흐려져 갔다.통령정부의 골격은 혁명력 제8년(1799.12)의 헌법으로 정해졌다. 헌법의 제정도 쿠데타의방식과 같은 것이었으며, 이를 통해 나폴레옹의 국가관을 알 수 있다. 그에게 헌법이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국민을 명령에 제빨리 움직이는 병사들로 여겼고 자기를그 부대장으로 생각했다. 그러한 통치자와 피통치자로 구성된 국가에 체계적이고 정교한 헌법이 필요할 리가 없었던 것이었다.제정된 헌법에 따르면 임기를 10년으로 하는 3명의 통령이 강력한 행정부를 구성하나, 실권은 제 1통령인 나폴레옹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4개의 기관이 각각 입법권의 일부를 행사하였다. 이 통령정부는 거의 나폴레옹의 독재체제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나폴레옹은 권력행사에 제약을 느꼈고, 1802년에 헌법을 수정하여 후계자의 임명권과 헌법수정권을 갖는 종신통령이 되고, 1804년에는 드디어 황제가 되어 나폴레옹 1세라 칭하였다. (제1재정)이러한 정체의 변화는 매번 국민투표에 회부되어 절대다수의 찬성을 얻었는데, 이것은 당시의 프랑스국민이 얼마나 질서와 안정을 원하고 있었던가를 여실하게 말해준다.나폴레옹은 과거에 선출제로 되어있던 지방관리들을 임명제로 바꾸었다. 通·郡·市邑面의장을 직접 임명하고 통제하였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중앙집권제가 성립되었다.3. 나폴레옹의 內治정권을 장악한 나폴레옹은 곧 오스트리아를 격파하여 뤼네빌(Luneville)조약(1801)으로 캄포 포르미오 조약을 재확인시킨다. 영국과는 아미앙(Amiens)조약(1802)으로 강화를 맺어 그동안 정복한 프랑스 식민지를 거의 전부 양도받아, 모처럼 평화를 얻은 나폴레옹은 내치(內治)에 힘을 기울였다.나폴레옹은 교황 피우스 7세(Pius 補,1800~1823)와 종교협약(Concordat,1801)을 맺고 카톨릭과 화해하였다. 이 협약을 통해 카톨릭이 프랑스 국민 대다수의 신앙임을 인정하고, 성직자를 선출하는 대신 주교는 정부가 지명하고 교황이 서임하며, 교구신부는 주교가 임명하기로 하였다. 나폴레옹은 혁명기에 구상하였으나 실현하지 못한 통일된 법전(法典)을 편찬하였다(1804). 이 (나폴레옹 법전) 은{) 이 법전은 2차대전 후까지도 큰 수정없이 실시되었다법적 평등·취업의 자유·신앙의 자유·사유재산의 존중·계약의 자유 등 혁명의 원리를 부분적으로 계승하였으나, 고문을 부분적으로 인정하고 개인의 권리보다 국가이익을 우선시키는 등 혁명원리와 상치되는 부분도 있었다. 또한, 파리 신문의 6분의 5를 폐간하고 연극 ·학회 ·설교를 감시하고 분석하는 둥 언론의 자유를 탄압하는 동시에, 교육에 있어서는 고등학교를 신설하고 국가재정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반관반민(半官半民)의 프랑스은행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1800)이렇듯 나폴레옹은 혁명의 결과를 부분적으로 수렴하면서도 그것을 제정(帝政)에 적합하게이용하고 왜곡하였다. 그렇기에 그의 시민적 자유에 대한 태도는 임시응변적이며, 편의주의 에 입각한 것이라 할 수 있다.4. 나폴레옹의 유럽 制覇전비(戰費)부담에 대한 국내의 반대로 불리한 아미앙조약을 맺었던 영국은 1803년부터 다시 프랑스와 교전상태에 들어가고, 1805년에는 오스트리아·러시아·스웨덴과 더불어 제3차 대불동맹을 결성하였다. 이 해 10월에 프랑스와 스페인연합 함대는 트라팔가(Trafalgar)해전에서 넬슨(nelson)의 영국함대에게 크게 패하여 나폴레옹의 영국침공의 꿈은 깨어졌다.그렇지만 유럽대륙에서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바젤조약 이래 프랑스와 평화를 유지해 오던 프로이센은 프랑스의 세력이 강하게 독일로침투해 오자, 1806년 프랑스와 개전 하였으나 예나(Jena)와 아우에르쉬타트(Auerstadt)에서패하여 1807년 굴욕적인 틸지트(Tilsit)조약을 맺었다. 이리하여 나폴레옹은 유럽대륙의 지배자가 되고 유럽은 그의 지배 하에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졌다. 하나는, 그 동안 국경지대의 영토를 병합하여 팽창한 프랑스제국, 둘째는 그 대부분이 나폴레옹 일가(一家)에 의하여통치되는 위성국가들, 셋째는 오스트리아·프로이센·러시아로서 패전으로 프랑스의 동맹국이 된 나라들이었다.나폴레옹의 지배권 밖에 흘로 남아있는 강대국은 영국뿐이었다. 트라팔가의 해전으로 직접적인 영국 침공을 단념한 나폴레옹은 1806년 베를린칙령(대륙봉쇄령(大陸封鎖令))으로서 이른바 대륙봉쇄체계(Continental System)를 수립하였다. 이는 유럽대륙과 영국의 통상을 금지한 것으로서 영국에 경제적 타격을 주는 동시에 프랑스의 시장을 확대하려는 목적을 갖고있었다. 영국도 어느 정도 타격을 입었으나 대륙의 여러 나라들은 더 심한 고통을 받았다.또한 유럽에서 프랑스시장의 확대는 영국의 우세한 해군력에 의한 해외시장의 상실에 비하면 별 것이 아니었다 제대로 실시되지는 않았음에도 대륙봉쇄령은 나폴레옹의 세력을 상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1810년 나폴레옹은 아들 없는 조세핀(Josephin)과 이혼하고 명문인 합스부르크 왕실의 나이 어린 공주를 새로 아내로 맞이하여, 다음 해에 아들을 얻어 로마왕이라 부르고 그가 창조한 제국을 계승시키려고 하였다5. 프로이센의 改革나폴레옹에게 완전히 굴복한 프로이센은 그 후 유례 없는 개혁을 시도하였다. 지식인들에의해 주도되어 위로부터의 개혁이라는 특징을 지닌 이 개혁은 그 후 19세기에 정착된 프로이센이라는 국가의 틀을 잡은 것이었다틸지트 굴욕은 프로이센을 2등국으로 전락시켰고, 특히 전쟁배상금은 국가의 재정을 바닥나게 했으며 엘베강 서쪽의 공업지대를 상실함으로써 심한 경제난에 직면하였다. 또한 틸지트조약 체결 후 베를린에 와 있던 나폴레옹이 영국을 고립시키기 위해 발표한 대륙봉쇄령으로 영국과의 무역도 단절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로이센은 국력 회복과 나폴레옹타도를 위해서 내부에서 개혁을 시작한 것이었다.슈타인(Stein)은 1807년 10월칙령으로 농노제를 폐지하고 길드중심의 중세적 도시자치제를폐지하고 중산계층을 중심으로 한 근대적 도시자치제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그의 개혁은 1년을 넘기지 못하고 막을 내리게 되고, 하이덴베르크(Hardenberg)가 이를 계승하였다. 하이 덴베르크는 1810년에 정부기구를 개혁하고, 다음해 조정령으로 농업개혁도 시도하였다.슈타인-하이덴베르크의 개혁으로 농민은 인신의 자유와 보유지처분의 자유를 얻었으나 오히려 보유지를 상실할 위험이 수반되었다. 즉, 이 개혁은 봉건적인 최악의 폐단은 제거하였으나 국가권력과 권위는 국왕, 융커, 군대에 남겨 두었던 것이다. 이들이 주도한 프로이센의개혁정책은 군제 개혁, 정치 개혁, 농업 개혁, 재정 개혁, 대학개혁으로 나누어 진행되었다.이러한 내정개혁 및 사회개혁과 더불어 독일의 민족정신이 각성되었다.프로이센 개혁을 한 마디로 규정짓는다면 실패한 근대화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슈타인, 하이덴베르크 등의 개혁가들이 추진한 개혁은·분명 자유주의이념에 충실한 근대국가수립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위로부터의 개혁은 강력한 기득권 층의 반발로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었고, 1815년 빈체제수립 이후 국제적인 반동 분위기 역시 개혁의 뒷덜미를잡고 있었다. 결국 프로이센이 야심적으로 추진한 개혁은 기존의 사회체제를 바꾸어 근대국가를 수립한다는 목표와는 달리 구체제를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6.나폴레옹의 沒落나폴레옹의 정복전쟁은 정복민과 굴복민들 사이에 민족주의(民族主義, nationalism)를 낳게하였는데, 이것이 나폴레옹몰락의 주된 원인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