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상허 유석창 박사의 생애1. 유년기(1900년-1908년)상허 유석창 박사는 1900년 3월 17일 함경남도 단천군 수하면 용원리 망상골에서 유승균, 홍숙경 사이에 2남 3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가 푸른 물에서 하늘로 치솟아오르던 용이 던져주는 푸른 여의주를 치마폭에 받아알는 태몽을 꾸고 상허를 낳았다고 한다. 상허가 출생하던 당시에는 세계의 열강들이 팽창주의의 사조에 휩쓸렸고, 그 와중에 일본도 끼어들어 우리나라를 차지하려고 혈안이 되어있었다.상허 유석창 박사가(이하 상허) 돌이 되었을 때 누이와 함께 이웃 집에 자신의 돌떡을 누이와 함께 돌렸는데, 누이가 들고간 떡그릇을 받아 상허가 내밀자 이웃 아낙네들이 기특하게 여기며 칭찬이 떠들석하였다. 돌무렵에 이미 상허의 총기가 빛나고 있었다. 상허는 총기가 뛰어날뿐만 아니라 몸도 튼튼하고 장난기와 호기심이 많은 개구장이였다. 짚신, 버선이 하루를 못 견딜 정도여서 그의 누이와 어머니는 매일 버선을 기우고, 바지를 덧대야 했다. 상허가 여섯 살 되던 해인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이 맺어지면서 민족의 수난은 시작되었다. 상허는 아버지로부터 지금 나라가 처한 상황과 여러 민족 투사들의 독립활동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을 들었기 때문에, 또래의 아이들과는 달리 생각이 많은 아이였다. 훗날 상허의 지식보다 인격을, 기능보다 기개를 더 중시하는 교육이념은 그를 가르친 아버지의 인품과 기품에 그 근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 상허가 여덟살이 되던해에 이준 열사가 순국하자 상허의 아버지는 식음을 전폐했고, 이를 본 상허도 한지에 대한제국황태자(大韓帝國皇太子)라고 써놓고 큰 울음을 터트렸다. 이듬해인 1908년초에 상허의 가족은 상허에게 신식교육을 시키기위해 교향 망상골을 떠났다.2. 소년기(1908-1912)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온 후 상허의 아버지 유승균은 4년제 초등학교인 '돌산 보통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이 되었다. 그 학교에 상허는 1학년으로 입학하여 다시 학업에 열중하였다. 아버지가 항상 상허에게 나라 망명온 이듬 해, 그 곳에서 유일우는 기존 '관립 언어 학교'의 부속으로 '태흥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이 되었다. 다시 1914년에는 학교를 독립시켜 교명을 '관화 학교'로 바꾸었다. 유일우는 육영사업을 통하여 자라나는 세대에독립의지를 심어주는 한편, 벼농사를 위한 수리 기술을 동포에게 지도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러한 유일우의 우국충정을 상허는 뒷날 건국대학교, 전국 농업기술자 협회, 하계 농민대학에서 되살리게 된다. 상허는 다시 학교에 입학하였고, 성적도 우수하고 품행도 방정하였다. 상허는 지나어에 능통했으나 말년까지 그 말을 입에 담지 않을 만큼 민족적 자긍심이 대단하였다. 또한 상허는 뒷날 외국 사찰 여행을 여러차례 권면받았으나 모두 거절하고 나라를 떠나지 않았다. 반면 유학이나 연구를 마치고 돌아온 제자들에게 저녁을 대접하며 그들이 전하는 말을 즐겨 듣곤 하였다.유일우의 노력으로 학교교육과 농민교육이 진척됨에 따라 동포사회는 그의 우국충정에 감복하고 그를 중심으로 하여 결집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유일우는 활동영역을 항왜무력투쟁으로 확대시켰고, 그의 구국의지에 찬동하는 동포는 날로 그의 휘하에 운집하였다. 유일우는 활동영역이 넓어질수록 집을 비우기 일쑤였고, 어머니는 풍토병에 걸려 가사를 돌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상허가 집안살림을 꾸려나가야만 했다.상허가 15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가 갑자기 경기를 일으키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석창은 한 겨울의 추위를 뚫고 의사를 찾아갔지만 왕진을 거부하는 의사에게 겨우 환약 몇 알만 받고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이 때 상허는 후에 꼭 좋은 의사가 되어야겠다고 결심을 하게 된다. 이듬 해인 1915년에 누이가 찾아오면서 상허는 고국의 소식을 듣게 되고, 잠시나마 누이로 인해 집안일에서 벗어나 학업에 전념할 수 있었다. 관화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상허는 보통과의 교사로 채용되었다. 그의 해박한 지식과 불같은 열의에 학생들은 감복하여 존경하였다.1919년 고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고 뒤늦게 그 소식을 접한 상허 학과 공부에 전념하는 한편 검약한 생활태도와 근엄한 정신자세를 견지하려고 애썼다.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상허는 동료학우와 어울리면서도 무척 어른스럽게 처신하였고, 형이 보내주는 돈으로 생활하면서도, 결코 궁한 티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돈을 쪼개어 신문과 잡지를 구독하며 우국청년의 기개를 견지하면서 올바를 시국관을 정립하려고 노력하였다.상허는 마침내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한해 동안 공부를 하기로 계획하였다. 일본어에 약하기 때문에 졸업과 동시에 경성의전 입학시험에 응시하는 것은 무모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도단에 나가는 일을 빼놓고는 모든 정력을 입시준비에 쏟은 보람이 있어 1924년도 경의전 입시에 합격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경신학교 졸업생 가운데 경의전에 합격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경신학교 교장인 군예빈은 누구보다 이를 기뻐했다. 군예빈은 미리 약속한 대로 상허에게 합격선물로 교장 사택을 빌려주었다. 상허는 경의전 재학 4년간 이 집에 살았으나 각별한 세 급우(김성우, 이종규, 한성환)외에는 아무도 그가 거기에 사는지를 몰랐다. 상허는 경의전 재학시 학기말마다 꼭 군예빈을 방문하였고, 자문을 구할 일이 생기면 그를 찾아가 간절한 기도를 부탁드렸다. 이렇게 군예빈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상허는 훗날 자신의 수많은 제자에게 대신 갚는다.4. 청년기(1924-1945)1924년 스물 다섯의 나이에 상허는 경의전 학생이 되었다. 그의 경의전 입학은 후에 민중병원, 건국대학교, 의과대학원을 설립하기 위한 첫걸음이였다. 경의전 재학 당시 상허는 동급생들이 함부로 말을 걸어오지 못할 만큼 학교 안에서 과묵했지만, 교문을 나서면 각별한 세 급우와 흉금을 털어놓고 겨레의 앞날을 걱정하며 열변을 토하였다. 상허는 이들과 함께 YMCA 연합회 학생부에 가입하였다. YMCA를 통해 여러 민족 지도자와 선각자를 만나서 그들로부터 구국방략을 경청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또한 YMCA에서 그의 아내가 될 ,한성환의 누이동생, 한동죽을 만받았다. 처음으로 부모를 모시고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살 수 있다는 기쁨도 잠시 그 해 겨울 아내가 폐결핵으로 몸져 누웠다. 상허는 아내의 병치료를 위해 최신의료시설을 갖춘 성진의 제동병원으로 아내와 가족과 함께 떠났다. 그 곳에서 온갖 의술을 다 동원하여 아내를 살리기 위해 애를 썼지만, 1929년 11월 그의 아내 한동죽은 스물 넷의 나이에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장례가 끝난 이튿 날부터 상허는 다시 환자진료에 나섰다. 그 곳 제동병원에서 만난 병원장 구례선은, 아내를 살리려고 경황이 없을때는 잘 몰랐지만, 주로 경제적인 능력이 없는 환자를 무료로 진료하여 그 명성이 간도에까지 퍼져 있었던 훌륭한 인물이었다. 구례선의 인술봉사자세에서 상허는 자신의 앞날을 내다볼 수 있었다. 이 기간에 상허는 나를 버리고 남을 위하여 헌신하기로 인생의 궤도를 수정하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가장 큰 고통을 체험하고서 그는 이타적인 인간으로 자신을 완전히 탈바꿈시켰다.1931년 상허는 서른 두 살이 되던해에 민중을 위해 대규모의 실비진료기관을 짓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후원자와 동지를 찾으러 서울로 상경하였다. 서울역에서 철마에 맹세를 하며 다시 한 번 자신의 의지를 확고히 하였다. 서울에서 만난 오하영과 이대위의 도움으로 우여곡절 끝에 진료기관을 설립하게 되었다. 진료원의 진료비 가격은 당시 물가에 비해 파격적인 염가였다. 진료원은 진료개시 이전부터 환자가 붐빌정도로 아주 잘 되었다. 그러나 1932년 7월 진료원은 서무과 직원의 실수로 건물이 모두 불에 타고 말았다. 허탈해하는 상허보다도 더욱더 통곡하며 자신을 위로해주는 많은 동포들에게 상허는 다시 한 번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추스릴 수 있었다. 이 때 상허 유석창 박사는 상허(常虛)라는 아호를 지었다고 한다. 그 해 11월에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진료원은 다시 문을 열게 되었고, 몇 차례 진료원의 명칭이 바뀌었다.상허는 아직 자식이 없고, 부모님의 연세가 많으셨기 때문에, 부모님의 권면을 받아들여 1931년 김계순과 왔다. 상허는 새 나라의 건설은 교육에 달려 있다고 보고, 민주주의를 실현시킬 정치 엘리트를 육성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광복이 가져온 환희와 이에 따른 혼란의 와중에도 광복된 조국의 국가 건설을 위해 대학을 세울 방도를 모색했다. 이에 상허는 낙원동 건물에 대학을 세우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그곳은 이미 여러 집단이 사용하고자 하는 표적이 되있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상허는 그 건물을 소유하게 되고 자신의 계획을 하나씩 실현해 나갔다. 민중병원의 설립계획때 상허를 도와준 오하영과 이대위가 이번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우선은 당장 대학은 설립하지 못하고, 일단 사설강습소인 '건국의숙'을 설립했는데, 이 '건국의숙'이 훗날 건국대학교의 모체가 된다. 이듬해 5월 15일 새로 경기도로부터 인가를 얻어 '조선 정치 학관'의 문을 열었다. 이 날은 건국대학교의 개교기념일로 기념되는 날이다.상허는 학교의 대권에는 언제나 초연하고 오로지 교육에만 그 목적을 두었기 때문에 일부 악인들에 의해 학교와 학생을 빼앗길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상허를 믿는 수많은 학생들과 민족투사들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난다. 그러던중 6.25사변이 일어나고 상허는 피란중에 어머니를 여위는 큰 슬픔을 겪게 된다. 그 해 상허는 부산으로 이동하여 여러 지인들과 힘을 합쳐 학교를 열었다. 서울이 수복된후에는 다시 서울로 상경하여 분교를 내기도 하였다. 이윽고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상허는 학교를 부산에서 서울로 다시 옮겼다.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상허는 귀한 인재들을 잃고 숱한 고생을 치러야 했다. 건국대학교의 1, 2회 졸업식이 부산의 정치대학에서 거행된 사실은 민족이 겪은 대환란에서 생긴 이변이었다.그 해 9월부터 상허는 대학을 새로 짓기 위한 부지를 매입하기 위해 분주했다. 여러 부지를 둘러보고 매입했으나 사정이 생겨 사용하지 못하고 이듬해인 1954년에 장안벌을 발견하게 되었다. 장안벌을 둘러본 상허는 대학을 세워도 전혀 손색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 부지를 매입하기로 결정했다. 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