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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대 한국과 일본
    《일본과 한국》고대 한국과 일본머리말지리적으로 한국과 일본은 지척의 거리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두 나라의 관계는 우호적이지 못하다. 그 이유에는 1592~98년의 임진왜란?정유재란, 1876년의 강화도조약, 1910년 한일합방 이후, 36년간에 걸친 일제의 한반도 강점이라는 사건의 일련이 증명하듯 반목의 관계 속에서 얽혀왔다. 결정적으로 19세기 이래의 한일관계는 침략과 저항, 대립과 경쟁의 관계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위에서 제시된 시점을 검토해 볼 때 한반도와 일본 열도사이의 관계는 본래부터 중세 이전까지 대립이었다고 할 수 없다. 특히 시기를 고대로 한정해 볼 때, 왜구의 출몰과 같은 작은 사례로 소란은 있었으나 반목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오히려 국가체로서의 일본이 성립되는 시기까지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긴밀한 교류관계에 있었다.고대의 한?일 교류관계후기 구석기시대에는 한반도와 일본열도가 빙하의 영향에 의해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때 선사인들은 지금의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하나의 대륙으로 인식하고 이동의 경로로 삼았음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한반도 후기 구석기문화의 표지 유물로 단양 수양개 유적의 형태가 대표적인 슴베찌르개와 동일한 형식의 유물이 일본 큐슈 구주九州의 후쿠오카와 쿠마모토 일대에서 발굴된 사실은 당시의 양상을 보여주는 분명한 사례의 하나이다.지금으로부터 약 1만년 전 빙하기가 종결되던 시점부터 일본열도는 섬으로 분리되면서 두 지역은 현재의 지형학적 모습으로 변모했다. 이후 한반도와 일본열도 두 지역에서는 빗살무늬토기문화櫛文土器文化와 죠몽토기문화繩文土器文化라고 하는 각기 다른 신석기 문화가 형성되었다. 그런데 부산 동삼동 조개더미貝塚에서 큐슈지방 제조의 죠몽토기가 발견되고, 쓰시마의 코시다카越高 유적과 큐슈 서북 연안에서 한반도의 덧무늬토기隆起文土器가 출토되는 등 이 무렵에도 바다를 통한 해상교류의 경로는 존재했다. 경남 진해의 웅천이나 부산 해안일대에서는 맑은 날 일본 대마도가 육안으로 관찰목되는 점은 일본의 이 선진적인 문화가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渡來人들에 의해 전파되었다는 사실이다. 반달돌칼半月形石刀은 물론 한반도에서만 보이는 홈자귀有溝石斧와 돌검磨製石劍 등의 간석기磨製石器, 한반도에서 발견된 것과 같은 남방계 단립형短粒型 자포니카종의 쌀 낟알古代米, 그리고 탁자형의 남방식 고인돌支石墓 등 야요이 전기BC 3C- BC 2C의 유물?유적은 농경을 기반으로 쌀을 주식으로 하는 일본문화의 기반이 한반도와 필연해 있음을 증명하는 예이다.야요이 중기BC 1C- AD 1C에 이르면, 북큐슈北九州 일대에는 청동검銅劍과 청동투겁창, 잔무늬거울細文鏡 등의 청동기와 민무늬토기無文土器, 독무덤甕棺墓 등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문화가 전개된다. 독무덤 내에 청동제의 무기를 부장하는 풍습은 지금의 전남지방과 진주 남강유역 등의 한반도 남부지방에서 전형적으로 관찰되는 풍습으로, 기원전후의 시기 한반도 남부와 북큐슈 지방이 유사 문화권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야요이 후기AD 2C- 3C에 들어서면 한반도로부터 전래된 금속문화는 일정한 변형을 거쳐 일본화하는 양상을 보인다. 한반도제의 청동검?청동투겁창?청동창銅戈?청동방울小銅鐸 등은 사라지고 대신 이를 모방하여 대형화?장식화된 검과 창, 방울이 나타나고, 철제 무기와 농공구가 보급되면서 석기는 자취를 감추게 된다.이와 같이 BC 3세기부터 AD 2세기에 걸쳐 파상적으로 일본열도에 건너간 한반도계 도래인들은 그곳에 벼농사와 철기 및 청동기, 무덤 양식과 종교-산동전통의 경향이 강한 농경의례와 북방 유목민족의 주술신앙:샤머니즘을 습합시킨 한반도의 샤머니즘- 등의 새로운 문화를 전파하였다. 이 새로운 선진 문화는 북큐슈의 연안 지방에 최초로 정착하여 서서히 주변으로 확산되면서 일본열도를 자극했다. 북큐슈 일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카야산可也山: 이토시마후지카후리加布里, 케야芥屋, 카라토마리唐泊 등 가야와 관련되는 지명들은 야요이시대에 걸친 한반도 삼한시대의 가야계(혹은 변한계) 도래인들의 흔적으로 볼 수 있다다.이후 일본은 식민사학의 지류로 일제의 한반도 강점기 한국역사의 타율적 측면을 조작하여 왜곡함으로써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약화시키고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려 의도에 있는 견해이다. 이를 통해 한국사는 한반도 중부의 중국 식민지였던 한사군漢四郡에서 출발하여 한반도 남부의 일본 식민지인 임나일본부를 거쳐 성립했기 때문에 일제의 한국 강점과 외세의 지배는 한국역사 전체를 일관하는 하나의 특징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사의 소급을 선사시대에서도 고조선에서도 아닌 한사군부터로 보는 인식에는 무리가 있으며 임나일본부설을 설정하는 4세기경 당시 선진의 가야로 비정되는 한반도 남부가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는 점은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다. 또한 왜倭가 국호를 일본日本으로 표방한 시기는 670년경에 이른다. 7세기 후반에 분명히 등장하는 일본 국호가 4세기 후반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할 수 있었다는 주장은 논리를 명백히 벗어난다. 이에 대해서 최근의 견해는 일본사료에 등장하는 임나일본부의 실체는 현재 경남 함안에 해당되는 아라가야에 파견된 왜의 사신(부)로 추정된다.현재 일본 사학계에서도 야마토 정권으로 상정되는 일본 고대국가의 성립 시기를 4세기 후반에서 6세기 후반으로 후퇴시키는 견해가 일반화되고 있는데 일본 서기의 사실史實이 두 갑주 정도 낮추어 볼 때 검증이 비교적 정확하다는 연구현황과 결부될 수 있는 견해이다. 이와 같은 움직임은 임나일본부에 관련한 종래의 통설을 부정하는 결과이다. 이와 관련하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휴가日向의 미야자키현宮崎縣을 출발하여 큐슈와 츄코쿠中國?시코쿠四國 지방을 제압한 다음 오사카大阪와 나라奈良 지방에 진출하여 일본의 초대 천황이 되었다는, 진무동정설화神武東征說話라는 일본측 기록을 주시해볼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 한국 학계의 일부 주장을 빌면 북큐슈에 자리잡았던 가야계통 소국小國의 지배층이 백제계통 소국의 지배층과 함께 5세기말~6세기초 동쪽 야마토大和 지방의 점령에 성공하고 천황가의 왕권을 형성한 사실을 반영한다고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크기 때의 고온에서 구워낸 가야계통의 질그릇인 스에키須惠器가 제작되었다는 사실은 주목해야한다. 5세기 후반에서 6세기에 이르는 기간이라면 한반도는 사국의 항쟁이 치열했던 시기로 전란의 결과, 신라?가야?백제 삼국 등지의 집단들이 일본으로 진출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현재 확인되는 대표적인 씨족들이 아야씨漢氏와 하타씨秦氏, 쿠레씨吳氏 등이다.아야씨족의 '아야'는 가야연맹의 소국이었던 아라가야安羅加耶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이는 대체로 백제 내지 가야계의 씨족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은 카와치河內와 야마토大和 지방에 거주하였다. 카와치에서 제조된 가야계 스에키토기의 전수 주체가 그들로 비정되는 견해가 있다. 야마토 지방에 정주했던 ‘아야비토漢人’는 백제계로 당시 기록에 나오는 야마토노아야東漢(倭漢으로도 표기)로, 타카마쓰총高松塚 벽화 고분이 발견된 유명한 히노쿠마가 그들의 대표적인 거주지였다.“‘8세기 후반 타케치군高市郡 내에는 히노쿠마노이미키檜前忌寸 및 17현의 민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일대에서 다른 성을 가진 자는 열 가운데 한둘에 불과하다”는 기록으로 보아 아스카飛鳥 지방 인구의 8, 9할은 이들 백제계 도래인의 자손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타'에 대해서는 한국어의 '바다'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는데, 신라계 씨족으로 추정된다. 하타씨는 지금의 쿄토京都 서부 즉 카쓰라가와桂川 유역 야마시로山城?하리마播磨의 충적평야를 개척하였다. 이밖에 타케치군高市郡의 히노쿠마檜常에 정착했다고 하는 쿠레하토리吳織의 '쿠레吳'는 쿠레句麗: 고구려에서 나온 것으로 고구려계의 도래 씨족으로 추정되며, 왕인王仁(와니) 박사의 후예라고 전해지는 카와치노후미씨西文氏 역시 카와치에 거주하면서 그 지방 개척에 중심적 역할을 담당한 씨족세력이었다.이들 씨족들은 자연 관개에 의지하는 기존의 벼농사단계와는 다른 토목?관개?제철기술에 관련된 종합적 고도의 기술을 통해 카스라가와桂川와 요도가와淀川, 야마토가와大和川 유역과 같은 충적평야 주변에 정착하여 개간능력과 제철과 스에키 기술을 전하였다. 후에 코大連 모노노베씨物部氏의 권력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일본 고대국가 형성과정에서 신구세력의 대립 투쟁이 표면적으로 불교 수용이라는 문제를 놓고 본격화되었던 것이다. 결국 이 대립은 587년 우마야도 황자廐戶皇子(후일의 쇼토쿠태자)의 지원을 받은 소가노우마코蘇我馬子가 모노노베씨를 섬멸함으로써 끝나게되었다.그런데 여기서 아스카시대 야마토정권의 최대문벌로 등장하는 소가씨는 다름 아닌 백제계 도래 씨족으로 추정되고 있다. 곧 『삼국사기』 개로왕 21년(475년)조에 보이는 목리만치가 바로 소가씨의 조상으로 일본역사에 나오는 모쿠마치木滿致, 소가마치蘇我滿智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 볼 때 소가씨는 마치가 도래한 이후 약 1세기 동안에 건전농업乾田農業의 새로운 기술을 구사함으로써 호족으로 입지를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6세기 중엽에는 천황가의 외척으로서 권력을 좌우하는 우력집단으로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소가씨가 불교를 받아들이는데 적극적이었던 것도 그에 따르는 승려나 목공?석공?기와공?주물사 등의 진보된 기술을 기대했던 까닭 때문이었다.이후 쇼토쿠태자聖德太子의 섭정기(593-622)에 해당하는 6세기말에서 7세기에 삼국의 수많은 학자 및 승려, 기술자가 일본으로 건너와 고대 일본의 새로운 시대의 문화 곧 아스카시대문화飛鳥文化를 꽃피웠다. 아스카시대에 세워진 절의 대다수가 도래 씨족의 마을에 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BC 3세기경 야요이시대彌生時代, 한반도로부터 전래된 벼농사가 일본문화의 기층을 이루었다면, AD 4세기말부터 6세기에 걸쳐 계속하여 밀려들었던 기술자집단을 비롯한 도래인渡來人의 물결은 일본 고대국가의 정치적 기반과 문화의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전달했다.7세기 중엽이후 일본은 다이카개신大化改新과 진신의 난壬申亂(672년) 등의 움직임을 겪게된다. 7세기 이후 일본의 변화에 대한 한반도 도래인의 직접적인 개입은 소원해지고 수?당-신라?고구려-백제-일본(소가씨)을 기본축으로 대립하고 있던 당대의 동아시아 정세로 영향력은 대체되었다. 따라서 더 .
    인문/어학| 2009.05.09| 6페이지| 1,000원| 조회(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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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고 보우의 사상과 전적
    太古 普愚의 사상과 전적1. 太古 普愚의 생애)普愚는 1301년(忠烈王 27), 洪州에서 洪延의 子로 출생했다. 太古는 號이며, 普愚 이전의 초기 법명은 普虛이다. 普愚는 諱이다.13세에 출가하여 楊州 檜巖寺 廣智의 제자가 되었고, 이후 迦智山 叢林에서 禪의 수행을 시작하였다. 19세에 이르러서는 ‘萬法歸一)’의 화두를 스스로 참구하였으며 26세에는 僧科, 華嚴選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경전을 통한 敎的 깨달음의 과정에서 경전 연구가 수단에 한정됨을 인식하여, 禪수행의 방법에 집중하였다.1330년(忠肅王 17) 봄에 龍門山 上院庵에 들어가서, 12大願을 세우고 觀音祈禱를 하였다. 1333년(忠肅王 復位2) 가을에 城西의 甘露寺에서 첫 번째 깨우침을 경험한 이후, 1337년(忠肅王 復位6) 가을에 이르러 佛脚寺에서 圓覺經 을 읽다가 “一切가 盡滅하면 이를 不動이라한다.”는 대목에서 크게 깨닫고 모든 知解를 타파하고 게송을 지었다.이듬해 1338년(忠肅王 復位7) 정월 7일 松都의 ?檀園에서 趙州)의 無字話頭)를 참구하는 과정에서 크게 깨달아 게송을 지었다.) 그 뒤 楊根의 초당에서 1700則 公案을 점검하였고, 1339년(忠肅王 復位8) 봄에는 소요산 白雲庵에서 수도하였으며, 1341년(忠惠王 復位2)에는 重興寺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重興寺 동쪽에 太古庵을 창건하여 5년 동안 머물렀다. 이때 중국 영가 永嘉 玄覺)의 證道歌 를 본떠서 太古庵歌 1편을 지었다.1346년(忠穆王 2) 봄, 元의 燕京으로 건너가 大觀寺에 머무르던 중, 그해 11월 궁중에서 順帝에게 般若經 을 강설하였다. 1347년(忠穆王 3) 7월에 湖州 天湖庵의 石屋 淸珙)으로부터 심계를 받고 발문과 가사를 전달받아 중국선의 정통인 臨濟宗의 19세가 되었다. 1348년(忠穆王 4)에 귀국하여 重興寺에 머물렀다가 迷源의 小雪山으로 들어 4년간 保任하였다.1352년(恭愍王 1), 왕에 의해 궁중에서 설법을 열고 開京의 敬龍寺에 머물던 차에 紅巾賊의 난을 예감하고 小雪山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1356년(恭愍다는 점을 인지한 상징적인 사례로 파악할 수 있겠다. 이처럼 경전을 떠날 수 있다는 확신은 본질적으로 禪學의 입장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된다. 이 같은 이해에서 본다면, 1337년 普愚가 佛覺寺에서 『圓覺經』을 통해 깨우침을 얻었던 일은 敎學의 방법을 禪 수행의 방편으로 활용한 경험으로 파악할 수 있겠다.이때에도 본질적으로 명확한 普愚의 입장이 드러나는데, 1338년 普愚는 圓覺經 을 통해 깨우침을 얻는 뒤, 松都의 ?檀園에서 趙州의 무자화두를 참구하여 대오하였다. 앞서 설명한 趙州는 六祖 慧能의 법계를 이은 南嶽 懷讓의 문하이다. 普愚는 지속적으로 趙州의 가르침을 수행 과정에서 반영하는데, 이는 太古錄 上卷의 법어 20편 가운데서 6편에 걸쳐 趙州의 사례를 들면서 법을 전하고 있는 사실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元에 유학하여 臨濟 종통을 승계하기 전까지 普愚의 선사상은 일관되게 정리하기 어렵다.2) 臨濟 종통의 법통 승계 이후普愚의 사상적 흐름에서 정통 선을 추구하는 禪旨와 禪風이 확인되는 시기는 元에 들어간 1346년 이후의 일이다. 이 시기 이후 普愚는 臨濟禪 정통의 선사상을 확립한 것으로 논급된다. 그 사상적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① 向上宗乘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즉, 언어 이전의 도리가 제1의라는 이해로, 이 같은 선풍은 石屋의 선풍으로 普愚 이전의 高麗 禪家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이다. ‘向上’은 臨濟禪의 중요한 특징으로 普愚는 이를 그대로 수용했다. 普愚의 선법은 언어적 표현을 철저하게 무시하는데, 이러한 선법을 지칭하는 것이다.) 언어적 선법을 지양하는 것이 중국 정통선의 전통이다.② 마음이 萬法의 王앞의 向上宗乘이 밝혀야하고 찾아야할 바를 普愚는 마음이라 하였고, 이 마음이 곧 부처이며 도이며 만법의 왕이라고 한다. 이때의 마음은 體와 用의 양면을 갖춘 것이라 밝힌다.)體와 用은 쉽게 풀면 ‘본체와 작용’으로, ‘頓悟漸修’ 또는 ‘定慧雙修’로 개념화된다. 여기서의 頓悟漸修와 定慧雙修)는 본래부터 中國 선의 용어이며 전통이다. 따라서외국의 납자들도 있었다.한편으로 普愚는 恭愍王의 개혁정치와 어울려 승단의 개혁 등을 주창하였다. 홍건적의 난을 예견하고 성을 쌓았으며, 漢陽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건의하였다. 內願堂에서 행한 설법에서 당시 승려들의 시대상을 비판하였고, 왕사로 봉해진 뒤 圓融府를 설치한 뒤에는 九山禪門을 一門으로 개편하고자 노력했다. 百丈淸規와 緇門警訓을 간행한 것도 승려의 기강을 새로이 하고자 한 노력으로 이해된다. 또한 三角山 重興寺를 중창하고 曦陽山 鳳巖禪寺를 중수하는 등 10여 곳에 절을 중창했다.그러나 태고어록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우선 법문 가운데 누락된 것이 있다. 行狀에 의하면, 普愚는 임종 직전, ‘왕에게 올리는 유언’과 ‘세상을 하직하는 글’ 여섯 통을 남겼다고 하는데 실려 있지 않다. 또 奉恩禪寺에서 개당법문을 할 때, 승려들과 법에 대한 문답이 있었는데, 처음 어록을 편집할 당시부터 ‘이것은 적지 않는다고 하였다. 상당법문에는 ‘16칙'이라고 숫자를 밝혀두었는데 구분을 해두지 않았으며, 행장에 그 제목이 나오는 게송 ‘청춘’도 실려 있지 않다.어록의 맨 끝에는 重興寺 비문(1385년 건립)이 실려 있고, 또 행장의 끝에는 小雪山 탑비도 일부 인용되어 있다. 한편 楊根郡 舍那寺에도 鄭道傳이 찬하고 그의 문인 達心이 세운 비(1386년 건립)가 있는데, 이 어록에는 빠져 있다.)4. 圓證國師塔銘(篆題)高麗國國師 大曹溪嗣祖 傳佛心印 行解妙嚴 悲智圓融 ?理王化 扶宗樹敎 大願普濟 一國大宗師 摩訶悉多羅 利雄尊者 諡圓證塔銘 幷序推忠保節 同德贊化功臣 三重大匡 韓山府院君 領藝文春秋館事臣李穡奉 敎撰前奉翊大夫 判典校寺事 進賢館 提學 臣 權鑄 奉敎書丹幷篆額上之十一年正月十日左代言臣仲容傳旨若曰國師太古浮屠汝其銘之臣謹案國師諱普愚號太古俗姓洪氏洪州人也考諱延贈開府儀同三司上柱國門不侍中判吏兵部事洪陽公?鄭氏贈三韓國大夫人夫人夢日輪入懷旣而有娠以大德五年辛丑九月二十一日生師師成童?悟?倫十三投檜巖廣智禪師出家十九?萬法歸一話元統癸酉寓城西甘露寺一日疑團剝落作頌八句佛祖與山河無口悉呑却其結句也後至元丁丑師年三十七적 3년 후인 1385년(우왕 11)에 세웠다.비문의 내용은 普愚가 洪州에서 태어나 檜巖寺로 출가하여, 만법귀일 趙州무자 등의 화두를 참구하고 깨달음을 얻었으며, 重興寺에 주석하며 太古巖歌를 짓고, 元에 유학하여 임제의 18대손인 石屋淸珙의 법을 이었으며, 小雪山에 들어가 부모를 봉양하다 恭愍王이 참석한 奉恩寺 법회를 주관하고 왕사에 책봉되어 圓融府를 중심으로 구산 통합 운동을 하였으며, 辛頓에 의해 俗離山에 금고당하기도 하였으나 辛頓 실각 후 국사에 책봉되었고 營原寺에 주석하다 입적한 생애를 기술하였다.圓證國師 普愚의 전적은 太古寺와 加恩 陽山寺와 楊平 舍那寺에 석종이 그리고 迷原 小雪巖에 석탑이 세워졌다. 음기에는 문도를 승계에 따라 열거하였는데 雲水 1천 3인이 특이한 부분이며, 재가신도는 고관 위주로 열거되었다.원증국사탑명(전액)高麗國 國師 大曹溪嗣祖 傳佛心印 行解妙嚴 悲智圓融 贊理王化 扶宗樹敎 大願 普濟 一國大宗師 摩訶悉多羅 利雄尊者 諡 원증탑명과 아울러 서문推忠保節 同德贊化功臣 三重大匡 韓山府院君 領藝文春秋館事 신 李穡이 교지를 받들어 비문을 짓고, 前奉翊大夫 判典校寺事 進賢館 提學인 신 權鑄는 왕명에 의하여 비문과 아울러 붉은 전액을 쓰다.上이 즉위하신지 11년이 되는 해 1월 10일, 左代言인 신 仲容이 교지를 전하여 이르기를 太古國師의 사리탑비문을 경이 지으라고 명하였다. 그리하여 신이 삼가 고찰하여 보니 국사의 휘는 普愚요 호는 太古이며 속성은 洪氏이니 충남 洪州 출신이다. 아버지의 휘는 延이니, 開府儀同三司 上柱國 門下侍中 判吏兵部事 洪陽公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鄭氏이니 三韓國大夫人에 추증되었다. 부인이 어느 날 밤 태양이 가슴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임신하여 大德 5년 辛丑 9월 21일에 스님을 낳았다. 스님은 성동의 나이에도 영오함이 남달리 뛰어났다. 13살 때 회암사 廣智禪師를 은사로 하여 스님이 되었다. 19살 적부터 萬法歸一이언만 一歸何處話를 들어 참선하였다.元統 癸酉年에 城西의 甘露寺에서 지내다가 어느 날 만법귀일에 대한 의단하고 廣明寺에 圓融府를 설치하여 정3품직 장관을 두어 禪門九山을 一宗으로 통합하려 하였으니, 스님을 존숭함이 지극함을 보인 것이다. 광명사에 있다가 이듬해에 왕사직을 사양하였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으므로 마침내 스님은 밤을 이용하여 왕성을 빠져나와 산중으로 은둔하였다. 玄陵이 스님의 확고한 뜻을 움직일 수 없음을 알고 법복·인장 등을 모두 스님의 처소로 되돌려 보냈다. 壬寅年 가을 陽山寺에 주지하도록 청하였으며, 癸卯年 봄에는 迦智寺의 주지를 맡도록 청하므로, 스님은 모두 왕명에 따랐다. 丙午年 10월에 또 왕사직의 사임서를 인장과 함께 보내면서 깊은 산중에서 임성양진 하도록 허락을 간청하였다. 玄陵이 윤허하였으니 이는 간특한 辛旽이 권세를 마음대로 부렸기 때문이었다. 이보다 앞서 스님이 왕에게 辛頓을 논박하는 상소문을 올려 말하기를 “국가가 잘 다스려지려면 진승이 그 뜻을 펴야 되고, 나라가 위태로워지려면 사승이 그 기회를 편승하게 되오니, 원하옵건대 폐하께서는 이를 살펴 辛旽을 멀리하신다면 종사가 심히 다행한 줄로 아뢰옵니다”라고 하였다.戊申年 봄, 雲水行脚하다가 全州 普光寺에 잠시 우거하였다. 신돈은 보우가 마치 눈엣가시와 같아 그를 사지로 몰아 넣으려고 백계를 꾸몄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후 스님이 江浙 지방인 해외로 가서 유학코자 하니, 辛頓이 玄陵에게 고하기를 “太古는 폐하의 총은을 입음이 지극하옵니다. 앞으로 편안하고 조용하게 노기를 보내는 것이 그가 해야 할 도리입니다. 이제 멀리 해외로 유학하려 함은 반드시 다른 의도가 있어서이니 청하옵건대 폐하께서는 통찰하여 주십시오” 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위급하게 느껴져서 玄陵은 하는 수 없이 따랐다. 그리하여 辛旽은 그 일을 형조에 내려 추문하여 신문토록 하여 스님의 좌우에 있는 이들을 무복케 하고는 스님을 俗離寺에 금고시켰다. 己酉年 3월에 이르러 玄陵이 스님을 금고한 것을 후회하고 小雪庵으로 돌아오도록 청하였다. 辛亥年 7월 辛頓을 주살하고, 玄陵은 사신을 보내어 예를 갖추어 스님을 國師로
    인문/어학| 2009.05.09| 13페이지| 1,000원| 조회(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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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산강 유역의 묘제 변화와 백제 세력의 확장
    榮山江 流域의 墓制 변화와 百濟 세력의 확장〈목차〉머리말1. 마한과 영산강 유역의 고대 사회1) 마한 사회의 전개 과정2) 영산강 유역 사회의 부각 시점2. 백제의 지배력 확대와 마한 사회의 변화1) 사료의 검토와 맥락2) 백제의 세력 확장?변동과 마한 사회의 세력 변화 관련 사료 기록과 검토3. 영산강 유역 사회의 묘제 변화와 백제의 세력 진출 관계1) 영산강 유역 사회의 묘제 검토2) 영산강 유역 묘제의 변화맺음말머리말영산강 유역의 羅州市 일대는 특정 시기에 걸쳐 유행했던 甕棺墓制로 인하여 역사학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이 일대의 옹관묘는 수적 개체 밀집도 뿐만 아니라 양적 규모에서도 특징적인 고고학적 지표로 인정된다. 이러한 옹관묘들은 나주시 潘南面?多侍面 지역에 이르면 여러 묘제 양식이 혼합된 거대한 고분 복합체를 이루어 분포한다. 고분의 분포 양상을 바탕으로 반남면?다시면 일대가 고대 영산강유역의 중심지라는 주장은 일반적이다.묘제는 보수성이 강한 전통이므로 묘제의 차별성은 분묘 축조 주체 세력의 성격과 사회상을 추론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따라서, 우선 반남면?다시면 지역 거대 고분 복합체의 축조 양상을 통하여 고분 축조 당시 이 지역을 점유했던 세력의 성격과 사회상을 확인하고자 한다.다음으로는 반남면?다시면 분포 대형 고분 복합체의 구조와 단계적 변화 과정에 주목한다. 이 일대의 거대 고분 복합체를 대표하는 반남면 新村里 9호분과 다시면 伏岩里 3호분의 연구결과를 검토해보면 한 분구 내에서 다양한 묘제들이 시기적인 간격을 두고 단계적으로 축조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즉, 3세기경에 축조가 시작된 전통 묘제인 옹관고분과 5?6세기경에 유입된 묘제 양식인 백제계 석실묘가 층위를 같이 하거나 달리하며 거대 고분을 구성하고 있으며, 각 층위, 각 묘제에 공반된 출토 유물간의 분기 간격이 명확하다.묘제라는 보수적 전통이 시기를 달리하여 규칙적으로 변화한다는 사실은 분묘 축조과정에서 축조 주체 세력과 해당 사회 내외에 포괄적 의미에서 특정한 사회적 요인이 나 고고학적 성과로 판단해 볼 때 그 가능성은 높다.영산강 유역의 고대 사회에 대한 이른 시기의 사료는 앞의 마한 사회 전개 과정에서 중기에 해당되는 기원후 3~4세기경 전후이다.) 이 때를 전후로 영산강 유역에서는 사료 기록자가 주목할 만한 두드러진 사회적 성장이 관찰된다. 대형화된 옹관묘의 거대 분구 조성)이 시작되는 시기도 이 때이다. 하지만 사료를 통해 획득할 수 있는 자료는 빈약한 것이 사실이다.이 단계에서 한강유역의 백제와는 달리 영산강 유역에서는 성읍국가 단계에서 벗어나 연맹왕국을 형성한 뚜렷한 징표를 찾아볼 수 없다. 다만 『晉書』 張華傳에 의하면 영산강 유역에 산재한 소국들이 新彌國을 맹주)로 하여 중국세력과 접촉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 사료는 晉朝의 통일과 幽州刺史로 임명된 張華의 적극적인 대외정책의 결과 그 동안 접촉이 단절되어 있던 신미국 등이 다시 조공관계를 맺게 된 사실을 전한다.)사료상의 제약으로 인해 영산강 유역 사회의 사회상에 관하여 보다 정확한 접근을 위해서는 고고학의 연구 결과, 즉 옹관묘의 등장과 발전, 옹관고분의 조성, 석실묘의 유입과 옹관 복합체의 구성, 묘제 양식의 교체 및 전형적인 사비계 석실분의 도입?전환에 대한 파악이 중요하다. 이를 통해 영산강 유역 사회의 양상은 보다 명확할 수 있다.2. 백제의 지배력 확대와 마한 사회의 변화1) 사료의 검토와 맥락백제와 마한이 한 시기에 공존관계를 갖는 시기에 관한 기사는 『三國史記』 百濟本紀, 『晉書』, 『三國志』, 『日本書紀』 등에 기재되어 있다. 『三國史記』 百濟本紀와 『晉書』의 경우에는 마한 관계 사료가 판이하게 다른 입장을 위하고 있어서 초기 백제의 사회적 상황에 대한 논리적인 파악은 쉽지 않다. 『三國史記』 百濟本紀에는 溫祖王이 재위 27년(9), 일시에 마한을 멸망시킨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晉書』에는 마한의 역사 활동이 3세기말까지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다.) 또한 『三國史記』 百濟本紀에는 온조왕 27년의 사실을 마지막 마한 관계 기사로 기록하고 있다을 정연하게 설명하는 핵심 단서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백제의 세력 확장은 마한의 영역을 축소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되었으며, 마한의 영역 축소는 또한 마한의 세력권과 맹주권을 他지역으로 이양시키는 흐름으로 진행되었다.마한에 대한 백제의 세력 확장은 한성백제를 기점으로 그 이남 방향으로 펼쳐졌다. 이미 고이왕代에 목지국을 멸하고 목지국 지역을 편제했다면 쇠망 이후의 지리 여건을 감안하여 볼 때, 우선 차령산맥과 금강 이남 지역이 해당될 것이다. 그러나 신미국의 위치가 익산 지역 이남일 수는 없다. 이미 익산에는 마한 54국의 하나인 乾馬國이 위치하고 있었다. 이는 역대로 韓과 관련되어 온 것이다.) 즉 신미국의 위치는 차령산맥과 금강 이남에서 익산 이북권이 될 것이며 또한 중국과의 교역 주체 자격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앞의 강역 내에 위치한 해안 일대가 될 것이다.다음으로 주목되는 기사는『日本書紀』 卷9, 神功紀 49年條이다. 이 條에는 倭가 백제의 요청으로 한반도에 상륙하여 가야에 이르러 먼저 신라를 공격하고 가야 7국을 점령한 뒤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古奚津에 이르러 南蠻 ?彌多禮를 무찌르고 백제에게 준 후 인근 4읍을 항복시켰다는 기사)가 전한다. 이 기사를 369년의 史實로 해석하는 견해를 따르면, 위의 사건은 백제 近肖古王 재위 24년에 해당된다. 왜의 참전을 且置하더라도, 근초고왕은 오늘날의 전라도 남해안에 이르는 마한의 舊土를 정복하였으며), 『三國史記』에는 진과 정치적으로 교섭한 사례가 등장)하며, 『通典』 百濟條에도 晉과의 통교이후 새로운 강대 세력으로 백제가 지목되는 바, 이들 기사를 백제의 세력 확장 정도를 판단할 수 있는 근거로 삼을 수 있겠다.) 즉 목지국을 이어 마한의 맹주로 부상했던 신미국은 백제의 세력 확장 정책-특히 근초고왕의 적극적인 정책-에 의해 편제되었고, 이후 마한 세력은 노령산맥과 영산강 이남, 혹은 영산강 이남으로 축소되었다.이상에서 계기적으로 나열한 의견들을 바탕으로 했을 때, 백제의 세력 확장과 마한의 세력 변화는 형태 또한 조명이 필요한 문제이다. 이는 고대 일본과의 친연적인 성격을 지적할 수 있는 근거로 작용한다. 물론 영산강 유역의 옹관고분 복합체가 일본식의 전형적인 전방후원 형태를 띄는 것은 아니나 대체적인 형태가 유사 전방후원의 형태를 지니며, 특히 신촌리 9호분의 경우에는 분구 중에 열을 지어 원통형토기가 출토되는데, 원통형 토기가 개별적으로 발견된 光州 明花洞?月桂洞 사례 이후로는 열을 지어 발견된 사례로는 한반도 최초이다. 이 원통형 토기의 의미는 일본 고분시대의 원통하니와圓筒埴輪와 유사한 것으로 葬制적인 측면에서 한?일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단서가 된다.)영산강 유역 사회 세력의 계통이나 성격, 마한 및 주변국과의 영향 관계, 범위는 다양한 시각을 통해 추적되어야 할 것이다.2) 영산강 유역 묘제의 변화영산강 유역에서는 3세기 후반?4세기초가 되면 기존의 전통 묘제인 토광묘와 옹관묘가 성토를 통해 대형의 분구묘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분구묘가 더욱 거대해지는 시점은 대형옹관묘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다른 권역의 묘제에 대비해 더 큰 차별성을 띤다. 정형화?거대화된 분구를 갖춘 고분이 특정지역에 집중되고 대형의 전용 옹관이 사용된다.5세기 후반이 되면 나주 복암리 3호분, 靈巖郡 月松里 造山고분, 長城郡 鈴泉里고분 등에서 보이듯 영산강 유역을 포함한 전남 지역 일대에서 석실묘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 단계는 백제 세력의 간접적인 판도와 연관된다.6세기 전반 단계와 사비시대 단계에 이르면 본격적으로 전형적인 백제계 석실묘가 조성되기 시작한다. 이 변화는 백제 세력의 직접적인 판도와 밀접하다.① 영산강 유역의 묘제와 석실묘의 유입앞서 언급한 바대로 영산강 유역에는 상한, 3세기 후반?4세기 전반 경부터 하한, 7세기 후반까지 토광묘, 옹관고분, 수혈식석곽묘, 횡구식석실묘, 횡혈실석실묘, 고분복합체 등의 다양한 묘제가 확인된다. 이 중에서 토광묘는 대형옹관묘의 동일한 봉분에서 조사되는 바, 그 시기를 같이하는 것으로 짐작된다.이후 수혈식석곽묘와 횡구식석실정한다. 6세기 전반에서 백제 사비시대에 이르면 전형적인 백제계 석실묘가 영산강 유역을 비롯하여 인근 지역에 조성되기 시작한다. 이 시기를 마지막 단계인 3단계로 지정한다.그러면 다시 사료를 통해 검토해 본 백제 세력의 확장 과정을 정리해보겠다. A단계는 백제 고이왕代인 260년경을 전후하여, 차령산맥과 금강 이북의 목지국 중심 마한 세력이 백제에 의해 정복된 시기인 3세기 중?후반 경이다. B단계는 비류왕代(재위 304~344년), 차령산맥과 금강 이남에서 노령산맥과 익산 이북까지 백제의 세력이 확장되었던 시기로, 4세기 전반 경이다. C단계는 근초고왕代(재위 346~375), 노령산맥과 영산강 유역까지 백제 세력의 진출이 이루어졌던 4세기 후반 경이다.이상의 두 단락인 고고학적인 묘제의 단계적 변화 과정과 사료의 단계적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다.우선 고고학적인 묘제의 변화 단계에 있어서, 선행 단계 시기에는 백제 사회와 영산강 유역 마한 사회가 직접적으로 정치적 관계를 경험한 바가 없기 때문에 선행 단계는 논외로 둔다.1단계인 대형화된 전용 옹관고분 단계는 A단계에 해당되는 3세기 후반 고이왕代의 백제 세력 확장과 밀접한 것으로 판단된다. 백제 고이왕代인 260년경, 마한의 맹주였던 목지국이 백제에 의해 편제되면서, 북쪽의 압박에 의해 영역을 상실한 마한 여력들이 남하하기 시작하여, 목지국 이남의 마한 권역에 유입되거나 마한 권역을 압박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舊목지국 세력들은 목지국 이남의 토착 마한 세력에 편재?복속 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목지국 이남의 마한 토착 사회에는 舊맹주국의 상위 세력이 유입되어 문화 자극이 일어나고 맹주 지위를 계승하게 되면서 지배 집단의 사회 권위와 사회 결속력은 상승한다. 그 결과 기존 옹관고분은 규모화 되고 B단계인 백제 비류왕代에 이르면 외부적 사회 자극이 더욱 활발해져서 사회 집단의 권위와 사회 결속력은 강화된다. 이 과정에서 대형화된 전용 옹관고분이 완성된다.이 사건이 영산강 유역의 세력과 직접적으로 무슨 관.
    인문/어학| 2009.05.09| 13페이지| 1,000원| 조회(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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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비의 정치참여와 민씨정권
    민비의 정치참여와 민씨정권의 정치성격Ⅰ. 서론Ⅱ. 민비의 정치참여와 민씨정권의 성립1. 민비의 정치참여 배경과 과정2. 민씨정권의 성립과 전개Ⅲ. 민비와 민씨정권의 정치 및 정책1. 민비와 민씨정권의 정책과정1) 집권초기(1873~1882)의 정책2) 집권중기(1882~1894)의 정책3) 집권말기(1894~1895)의 정책2. 민씨정권의 개혁사업과 그 성격Ⅳ. 결론Ⅰ. 서론고종哲宗 사후 고종高宗이 즉위와 동시에 왕의 생부인 대원군에 의해 섭정攝政이 실시된다. 이러한 대원군의 실질적인 집행과정은 조선 내?외로 여러 정치적 상황을 야기하는데 국내적으로는 핵심권력층내에 새로운 권력투쟁양상을 전개시킨다. 이 과정에서 민비는 특히 대원군과 연관된 가족구조 속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하게 되어 고종과 민비의 척족들과의 정치적 연대를 통해 대원군과 대립한다. 민비의 정치참여는 이렇게 대원군과의 갈등에 시작되어 내?외의 다양한 세력들과 갈등관계를 갖는 정치과정을 보인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민비의 정치참여와 정치과정 그리고 민씨를 중심으로 한 민씨정권의 정치성격을 통해 당시의 조선사회가 안고 있었던 내?외의 정치상황과 이들의 역할을 살펴보고자 한다.Ⅱ. 민비의 정치참여와 민씨정권의 성립1. 민비의 정치참여 배경과 과정민비閔妃는 1851년(철종2) 여흥민씨麗興閔氏 치록致錄의 무남독녀로 출생하여 8세 되던 해에 양친을 여읜 이후 주변 친지의 도움 아래서 성장하였다. 특히 대원군大院君의 처인 부대府大부인 민씨와의 인연을 통해 대원군과의 인간적인 관계를 맺게되었다.철종의 승하 이후 새롭게 전개된 대원군 중심의 정치질서 아래서 민비는 1866년(고종3) 고종의 왕비로 간택되어 정치구도의 일면에 등장하게 된다. 민비가 왕비로 간택된 배경에는 기존 세도의 연에 얽매이지 않은 민비의 친족환경과 지적능력이 큰 영향력으로 작용했다.그러나 1868년(고종5) 4월, 궁인 李氏에게서 고종의 첫 후사인 완화군完和君이 출생하여 궁 내?외의 정세에서 완화군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1871년(고과에 의해 배척된 노론의 불만 세력을 민비는 규합했던 것이다. 황현黃鉉의 「매천야록梅天野錄」(上卷)의 기록에도 민비가 노론을 자처했다는 기사가 확인되며 1873(고종10) 군국기무軍國機務를 의논하기 위하여 倫次入直했던 별입시別入侍도 노론 일색이었음을 볼 때 민비의 세력배후에 노론이 존재했음을 간파할 수 있다.끝으로 민비는 국외의 정치기반에도 주목하여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정한론征韓論이 비등해진 일본으로부터 문호개방을 표방하여 지지를 얻고 문호개방을 권유했던 청으로부터도 지원을 얻었다.)2. 민씨정권의 성립과 전개민씨척족세력에 의한 민씨정권이라 하면 민비가 고종의 비가 됨으로써 권력의 핵심부를 장악할 수 있었던 정치세력을 지칭한다. 이들은 민비가 왕비로 책봉된 1866년을 전후하여 정부의 주요관직에 진출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대원군의 안동김씨 견제책의 일환으로 선택된 제휴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의 대원군 집권기에는 전주이씨全州李氏, 안동김씨, 대구서씨大邱徐氏, 남양홍씨南洋洪氏 다음으로 관료를 배출한 가계였다.)이후 1873(고종10) 11월, 민비는 대원군에게 경복궁 중수의 강행과 천주교도 박해, 쇄국양이鎖國壤夷과 같은 일련의 정책에 대한 실정의 책임을 물어 최익현崔益鉉의 대원군탄핵상소와 같은 유림의 거센 비판의 분위기를 계기로 대원군을 정계에서 후퇴시키면서 민씨척족과 다수의 노론세력을 중심으로 정치질서를 재편한다. 민씨척족의 영수領首는 민승호, 민규호閔奎鎬, 민태호閔台鎬, 민겸호閔謙鎬, 민영익閔泳翊, 1892(고종19) 임오군란壬午軍亂 이후 민씨에게 피신처를 제공했던 민응식閔?植, 1890(고종27) 이후 민영환閔泳煥으로 계승된다.민씨척족에 의한 세도 기반은 대체로 이조?병조?형조?사헌부?승정원 등 인사?사법?행정 및 왕의 근시적인 직책을 바탕으로 그 대표자를 교체하는 과정에서 더욱 공고해졌으며 구축의 또 다른 측면은 1875(고종12) 1월 민비의 소생자所生子 탁拓의 왕세자책봉과 그 후 1882년(고종19) 2월 왕세자빈 간택에서 고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의 국제정세를 파악함에 있어서 일본을 가장 강력한 무력충돌 가능국으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1874년 여름, 민비는 고종으로 하여금 일본에 강화할 것을 원하는 친필외교문서를 보내도록 하였다.)그러나 민승호폭사사건 이후 잠시 주춤해진 민씨세력에 대항하기 위하여 양주楊州에서 돌아온 대원군에 의해 대일관계가 다시 대립에 이르자 일본의 메이지明治정부에서는 1875년(고종12)에 운요雲楊호 사건을 일으키다 이를 구실로 하여 1876년(고종13) 2월 朝?日 양국은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여 국교를 맺게된다. 이훈옥에 의하면 불과 4년 전 신미양요辛未洋擾에서 미함美艦의 요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한 바 있는 강화도 요새가 일격에 약탈당한 사실의 이면에는 민비와 민씨정부의 개항책이 특정한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간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일평의 주장은 강화도조약이 대원군과 그의 정책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정책적으로 맺어진 조약)이라고 하나 당시의 국제정세 하에서 개화정책을 표방한 민비의 입장에서 감정적 선택으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은 적어 조약의 체결은 민비의 개혁성향에 관련된 합리적인 선택으로 보아야 한다. 강화도조약의 불평등성은 비난의 여지가 충분하나 당시의 힘의 논리를 고려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강화도조약이 맺어진 1876년부터 조선책략이 조선에 전해진 1880년까지의 시기는 일본정부 단독의 조선 내 정치?경제적 침투가 지속되었다. 1880년 일본에 수신사로 다녀왔던 김홍집이 조선책략을 들여온 이후 일본 이외의 열강과 통상하여 일본을 견제해야한다는 개항확대론이 전개되면서 聯俄론, 聯美론이 등장하였고 1881년 김윤식金允植이 영선사의 자격으로 청에 파견될 때 한미수교 알선을 민비측에서 부탁하면서 조선정국의 일본 독주체계는 흔들리게 되었다. 동시에 개화파인 이동인李東仁을 일본에 보내어 주일청국공사 하여장何如璋에게도 대미수교 알선을 의뢰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1882년 4월, 민씨정부는 청의 주선으로 미국과 조미수호조규朝美修好條規를 맺게된다. 미국에 이어 영국, 독일과도 같은 내용의 서광범徐光範, 민영익閔泳翊 등의 개화파를 일본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개화파의 궁극의 목표가 사대당事大黨의 제거였던 만큼 결국은 민비와 타협되지 못한다. 또한 당시 외교관계에 있어 청의 영향권에 밀접했던 민비와 일본의 영향권으로 기울였던 개화파로 이분된 상황도 불협의 단면이었다. 대체로 임오군란 이후 정부 내부는 청의 양무운동과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각각 본보기로 하여 개혁을 추진했던 동도서기파와 급진개화파 사이의 갈등이 증폭되었다. 특히 국가 재정 위기를 둘러싸고 전개된 민씨정권과 급진개화파의 대립은 극에 달하여 민씨정권을 대변하는 재정고문 묄렌도르프Mollendorff는 악화惡貨를 주조할 것을 주장한 반면에 김옥균 등은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려 하였다. 결국 김옥균의 차관 교섭 노력이 무위로 돌아가면서 급진개화파의 정치적 입지는 매우 좁아졌고 개화파는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켰다. 정변결과 민치호, 민영목閔泳穆을 포함한 6명의 민씨척족세력 주요인물이 암살당하고 개화당세력과 대원군 측근세력의 연합으로 새로운 내각이 구성되고 그들의 개혁정강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3일만에 청국군이 무력 개입하였고 지원을 약속한 일본측은 청국과 충돌하는 것이 시기 상조라 여겨 철수하였으며 뿐만 아니라 개화정책에 피해를 본 서울의 상인과 빈민들도 급진개화파를 친일파로 보고 급진개화파를 공격하여 급진개화파를 중심으로 한 정변은 실패하고 개화 세력은 제거되어 정국은 다시 청과 민비 중심으로 운용되었다.갑신정변의 결과 두 개의 조약이 맺어졌는데 하나는 청?일간의 텐진조약이고 다른 하나는 조?일간의 한성조약이다. 텐진조약은 청?일간 동시 철병과 함께 이후 양국이 조선의 요청에 의해 파병할 경우 서로 미리 통고할 것을 약속하는 등 일본이 조선에 있어서 청과 동등한 지위를 차지하는 외교적 승리를 제공했으며 한성조약은 일본이 조선으로부터 막중한 배상금을 받아냄으로서 제물포조약에 이어 경제적 침투를 확대하는 발판을 마련했다.)여기서 묄렌도르프의 정치 개입과정을 유의할 필연결되어 민비정권의 정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데 무리를 제공한다.3) 집권말기(1894~1895)의 정책1880년대 보수와 진보의 갈등 그리고 청?일의 각축 속에서 난국을 겪어온 민씨정권은 사태수습과 정권유지에 급급한 나머지 국가재정의 확충이나 민생안정에 실패하였다. 따라서 내정에 대한 민비정권의 능력은 이미 퇴락하여 동학농민전쟁 당시 자력 수습이 불가능하게 되자 조정에서는 텐진조약의 폐해를 상기하여 청의 원병요청이 복잡한 국제문제를 야기할 것을 우려 반대여론이 비등하게 성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청에게 군사적인 개입을 요청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점은 반대여론이 많았고 또 당시 민비가 지속적으로 러시아에 의존했음에도 왜 러시아에 사태수습을 요청하지 않고 청에 파병을 요청했나하는 부분이다. 이훈옥은 민비정권이 러시아와 조약을 체결한 의도가 단지 세력균형의 유지하기 위함이었지 새로운 형태의 정권구조를 만들 의도는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이는 조선 국권의 침탈과정이 경제력과 군사력의 개입으로 시작된 이전의 과정들을 고려해볼 때 충분히 고려될 수 있는 의견이다. 그러나 동학농민전쟁이라는 정권 위협의 긴급한 상황하 조선 조정의 입장을 고려해 볼 때 가장 빠른 방편으로 선택된 결정일 가능성이 없진 않으며 여전히 불분명한 당시 러시아의 입장을 추정해볼 때 러시아가 파병을 거부했을 가능성도 없진 않을 것이다.동학농민전쟁으로 청군이 다시 파병되고 일본군도 청과의 텐진天津조약을 구실로 인천항을 통해 급파되어 동학농민전쟁을 진압했다. 그러나 이때의 일본군 파병은 이후 조선 내에서의 정치질서가 일본중심으로 재편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곧 일본군의 군사행동을 유도하였다. 1894년 7월 23일 새벽 일본군이 경복궁 침입을 통해 궁을 점령하고 민씨정권을 타도한 후 대원군을 옹립되었다. 그리하여 7월 27일에는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가 설치되어 김홍집金弘集을 수반으로 하는 친일내각이 구성되고 조선정부는 청과의 종주관계를 폐기하고 일본의 독자적인 노선에 집중하게 된다. 곧 일본은 청일전쟁을.
    인문/어학| 2009.05.09| 9페이지| 1,000원| 조회(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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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양사] 제갈량전 평가B괜찮아요
    名將賢臣 諸葛亮『목차』Ⅰ. 序 論Ⅱ. 後漢末과 三國의 情勢Ⅲ. 諸葛亮의 出生과 成長期Ⅳ. 劉備와 孔明의 만남(三顧草廬)Ⅴ. 孔明의 政治理念Ⅵ. 孔明의 "出師表"Ⅶ. 孔明에 대한 結論Ⅰ. 序 論三國志에 등장하는 諸葛孔明을 생각하면 恒常 戰場에서는 손에 백우선을 들고, 主君에게 絶對的인 信任을 받는 智略子로 떠오른다. 그리고 '제갈량' 이라는 고유 명사는 두뇌회전, 능력가 등의 모든 것에 뛰어난 사람을 일컷는 일종의 수식어가 되었다. 아마도 動陽漢字文化圈 사람들 중에서 戰術·戰略의 天才를 꼽으라면 제갈량이 가장 많이 나올 것이다.이 글에서는 제갈량이라는 人物에 대한 理解와 評價를 통해 나름대로의 정의를 내려볼 것이다.Ⅱ. 後漢末과 三國의 情勢後漢 말기에 地方豪族들은 政治·經濟 兩方面으로 實力을 기르면서 活動의 폭을 확대시켜 나아갔고, 反面 中央 朝廷에서는 차차 약화되어 統率力을 잃어가고 있었다. 後漢王朝가 약화된 原因은 천자가 14대를 繼承하는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어린 나이로 帝位에 오르기도 하고 혹은 後繼者를 둘러싸고 暗鬪가 거듭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예를 들면, 和帝는 10歲 卽位하여 27세에 죽고 그 뒤를 帝가 生後 百日로 즉위하였다가 그 이듬해 죽게 되자 그 뒤를 이어 13세의 安帝가 즉위한다. 이런 상황에서 중앙의 통치력은 강화될 수 없다. 안제 또한 32세에 죽자 少帝가 잠시 그 뒤를 이었다가 11세인 順帝를 擁立하는 무리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순제를 즉위시켰다. 쿠데타를 일으킨 자들은 환관들이었다. 후한은 이때부터 宦官들이 정치에 간섭하기 시작된다. 順帝의 學友인 曹騰이라는 환관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바로 曹操의 養祖父가 되는 人物이다. 順帝는 紀元 144년에 30세로 죽고 그 아들이 두 살에 즉위하였다가 수개월만에 죽고 8세인 質帝가 皇帝에 오르게 된다. 순제 사후 그 皇后 梁氏一族이 권력을 감아쥐고 天下를 뒤흔들었으며 조등은 이들 양씨와 손을 잡았다. 이와 같이 후한의 政權은 2세기 中葉부터 外戚과 宦官이 쥐게 되었다. 원래 환관은 宮中에서 天子권을 모두 쥐고 있었기 때문에 그 권력은 삼공을 제외한 모든 대신과 맞먹었다. 또한, 지방 관청에 대한 감독권도 갖게 되었다.諸葛豊의 후예이다. 父親 諸葛珪는 자가 君貢이며, 한대 말기에 太山郡의 丞을 지냈다. 그리고 章씨를 어머니로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형 瑾은 7세가 되어서야 동생 亮을 보았는데 諸葛亮의 身長은 8척이며 얼굴이 길고 말상이었다고 한다. 章氏는 그 뒤에 아들 均을 두었으며 이밖에 딸이 하나 더 있다. 어려서 부모를 잃어 孤兒가 된 亮은 亂이 일어나자 한 때 荊州로 피난을 간 적도 있었으나 叔父인 諸葛玄씨을 따라 南陽 隆中으로 간 것이 14세때의 일이다. 오래지 않아 숙부마저 세상을 떠나고 그는 아우 균과 함께 농사를 지었다. 少年 시절의 제걀량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알려진 바가 없다. 諸葛亮은 17세부터 약 10年間은 裵陽에서 보냈다. 그는 晴耕雨讀을 하였고 때로는 마을 서쪽에 있는 약산에 올라 고향인 山東地方에서 많이 불리우는 梁父(梁甫)라는 詩를 즐겨 을기도 하였다. 그의 집 앞에 臥龍江이 흐르는데 그 강에 자주 나가 노닐므로 別號를 臥龍先生이라 부르게 되었다. 항상 자신을 管仲, 樂毅에 비유했지만,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받아들이는 자가 없었다. 오직 博陵郡의 崔州平, 潁川郡의 徐庶만이 제갈양과 친교를 맺었으며, 확실히 이와 같다고 말했다亮은 특별하고 소중한 배우자를 만나 結婚을 했다. 裵陽땅에 黃씨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沔南의 名士로서 名文 집안 出身인 蔡諷의 딸을 아내로 삼고 있었다. 이런 황씨가 공명에게 自請하여 딸을 주겠다고 직접 찾아가 말하기를 자기 딸은 醜女로서 머리칼은 노랗고 얼굴은 검으나 才能이 뛰어나다고 했다. 공명은 欣快히 承諾하고 아내로 맞았다. 공명의 아내는 매우 賢夫人으로서 공부에 바쁜 男便을 알뜰히 도와서 거치는 일이 없게 하였다. 또 後日 공명이 戰場에서 神出鬼沒하는 兵法을 썼다던가 木牛와 流馬를 부리는 術法도 바로 그 아내가 허수아비를 부리는 것을 보고 暗示를 얻었다고 한다. 공명은 사후에도 중국에 많은사람은 이 쪽에서 찾아가 보아야 할 사람이지 불러올 수는 없다"고 하여 유비는 서서의 말대로 융중에 있는 제갈량을 찾기로 했다. 當時 유비는 左將軍 宣城亭候像州牧 이라는 쟁쟁한 직함을 가지고 있었고 제갈량은 20세의 천하의 무명 청년이었다.유비가 있던 新野에서 隆中까지는 200里 길이었고 찾아갈 때마다 제갈량은 피하고 보이지 않아 세 번을 往來한 후에 비로소 만나게 되었다. 유비의 이 行動으로 三顧草廬 라는 유명한 成語도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 삼고초려가 지금까지도 是是非非를 가리는 논란거리가 되고 있지만 오랫동안 구전되어온 부분이라서 논란은 배제한다. 그리고 공명이 유비를 만났을 때 披瀝한 것은 공명이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던 天下三分之計 라고 하는 것이었다. 삼분지계는 그 후 歷史의 展開와 꼭 合致하였다. 즉 그 당시 黃河 流域은 曹操가, 남쪽의 陽子江 유역은 孫權이 각각 點領하여 安定되어 가고 있었다. 다만 荊州와 益州는 그때의 州牧 유표의 힘으로서는 지탱하기가 어려웠다. 이 땅을 조조·손권 둘 중 누가 支配하던 그 땅을 차지하는 자가 天下를 統一하게 될 것이며 만일 第三者가 나타나 그 땅을 지배하면 천하는 삼분되리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當時의 代表的인 世論이었다고 한다. 그 세론을 공명은 정확하게 洞察하고 자기 見解를 유비에게 권유하였다.{) 지금 漢나라의 皇室은 날로 쇠퇴해지고 있으며 조조는 더욱 교만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결국 천하를 차지하게 될것이오. 그런데 荊州땅은 吳나라 서쪽에 있으면서 陽子江 上流 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또한 유표는 戰爭 같은 것을 싫어할 뿐 아니라 未來를 근심할 수 있는 人物이 아니오. 그 아들들은 더욱 어리석소. 그러니 장군은 속히 병력을 모아 형주 를 點據하도록 하시오 라고공명은 유비의 麾下에 들어간 후 신임이 날로 두터워졌다. 그렇게 되니 관우와 장비는 不滿을 吐露하게 되었다. 유비는 두 사람을 불러 말했다. "나와 공명의 사이는 꼭 물과 물고기 같아서 하루만 물이 없어도 물고기는 죽은 것, 난 물고기이고 공명은 물이그는 犯法者에 대한 赦免은 때로는 오히려 良民을 괴롭히고 정치에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할 때가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朋黨이 생기는 망한다는 증거이다 라고 말하였고 黨派로 갈라지는 것을 禁止하였다. 그는 정사와 연의 여러 곳에서 보이듯이 법가의 基盤을 둔 宰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고 판단할 때 오직 强制的인 법만 추구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마속을 處刑하고, 법을 엄하게 고쳐서 법가에 가까웠다고 말할 수는 있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融通性을 가지고 通治를 한 것으로 보인다. 상앙이나 이사같은 경우는 법을 혹독하게 適用하여서 百姓이 順宗하지 않았다. 아니 순종은 했지만 심복, 즉 마음으로부터의 순종은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연의에서 보면 제갈양이 죽었을 때 어떤이는 울다가 죽었다고 한다. 물론 誇張된 이야기로 울다가 죽을 정도는 아니지만 사람들이 슬퍼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상앙과 이사는 反對派에 의하여 비참한 最後를 맞고도 국민들로부터 同情을 사지 못하였다는 이야기는 그들의 통치가 너무 한쪽으로 치우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앙과 이사의 법은 매우 엄했고, 妥當性에 있어서도 반대파의 반대를 받을 수 있을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반대파가 생긴 것이고, 결국 그런 최후를 맞은 것이다. 그러나 제갈량은 반대파가 없었다. 즉 그가 施行하는 법에 있어서 그 이유가 주변 사람들이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는 것이 證明된다. 그의 법은 주군인 유비, 유선과, 다른 臣下들에게 비난받지 않았다. 그래서 제갈량은 원래 법가적인 인물이었으나, 유가적인 면도 다분히 섞여 있었다고 판단된다.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린다면 유가와 법가를 折衷한 사람이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즉, 政治的 모델로는 관중이었고 軍事的으로는 악의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리고 제갈양의 법은 주로 軍隊에서 나타나는데, 이는 군대의 사기와 연결되었을 것이다. 수많은 전쟁을 치루는데 있어서 군대의 사기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에서 말해주듯이 제갈량의 法은 항상 공평하고 嚴格했지 자는 단호히 처단할 일이다.·건방지다 : 명령을 받고도 다른 데로 전달하지 않는다 .전달해도 내용이 정확하지 않아서 장졸을 혼란에 빠뜨린다. 진군, 후퇴를 지시하는 징과 북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군의 상징인 깃발도 무시한다. 이러한 무리를 `군을 건방지게 대한다. 고 말한다.군을 얕보는 건방진 자는 단호히 처단할 일이다.·도둑질한다 : 장교가 군중에 있으면서도 군량을 먹지 않으며, 병졸들 노고를 생각해 주지도 않는다. 부하를 차별 대우하여, 친한자를 두둔한다. 마음대로 남의 물건을 가로채고 빌린 것을 되돌려 주지 않는다. 남이 공들여 벤 적의 머리를 가로채서 자기 공으로 돌린다. 이러한 무리를 `군을 훔친다. 라고 말한다. 군을 도둑질하는 자는 단호히 처단할 일이다.·속인다 : 제멋대로 이름을 바꾼다. 군복이 꾀죄죄하고 너절하다. 깃발이 걸레조각 같고, 진군, 후퇴를 알리는 징과 북따위도 갖고 있지 않다. 칼은 무디고 그 밖의 무기도 쓸모가 없게 보인다. 게다가 장수의 명령도 지키지 않는다. 이러한 무리를 `군을 속인다. 라고 말한다. 군을 속이는 자는 단호히 처단할 일이다.·배반한다 : 진군 나팔소리를 듣고도 전진하지 않으며, 후퇴를 명하는 징소리를 들어도 멈추지 않는다. 기를 내려도 몸을 엎드리지 않고 기를 세워도 몸을 일으키지 않는 등, 지휘대로 하지 않는다. 선두(앞장)에 서기를 꺼리고 후미에 붙기를 즐겨한다. 제멋대로의 행동으로 대열을 어지럽히고 사기에 물을 끼얹는다. 도망가는 것에 눈이 어두워 싸울 뜻이 없어 갈팡질팡하기만 한다. 다친자를 구출하고 전사자를 거둔다는 핑계로 전선을 떠난다. 이러한 무리를 `군을 배반한다. 라고 말한다. 군을 배반하는 자는 단호히 처단할 일이다.·어지럽힌다 : 군이 출동하여 싸움터로 향할 때 장졸이 서로 앞장서기를 다투어 제멋대로 흩어져 행동한다. 수레와 말이 길에 꽉 차서 기동적인 움직임을 방해한다. 큰 소리로 서로 불러대느라고 떠들썩해서 명령을 알아들을 수도 없다. 떠다밀고 잡아당기어 행군의 대열을 어지럽히며뜻이다.
    인문/어학| 2002.11.27| 9페이지| 1,000원| 조회(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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