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트벨트의 형성- 코어 주택 모형을 손보고 있는 리트벨트리트벨트는 1888년 6월 24일, 위트레흐트에서 태어나 1964년 6월 25일 76세로 위트레흐트에서 사망했다. 11살 때인 1899년부터 1906년까지 부친의 가구공장에서 견습공으로서 일한 후, 1911년 1919년까지는 스스로 가구공장을 경영하면서, 같은 위트레흐트 태생인 크리머(P.J.C.Klaarhamer) 밑에서 건축을 처음으로 접하게 된다. 이때, 리트벨트는 주간에는 가구공장을 경영하면서 주로 야간에 건축을 배웠다. 이 시기에 만난건축가 호프, 화가 레크 등을 통해 데 스틸과 최초로 접촉하게 되고, 그 다음해인 1919년 데스틸에 참가한다. 같은해 말 위트레흐트에서 건축사무소를 설립한 리트벨트는 1921년부터 슈뢰더 여사와 관계를 맺고, 그 이후 CIAM(근대 국제 건축주의)에 1928년에는 창립멤버로서, 1929년에는 네덜란드 대표로서 참가한다. 그 이후에는 미술학교, 대학 등에서 강의를 맡고, 1964년에는 델프 대학에서 명예박사를 수여받기도 하였다.◎ 슈뢰더 주택(Schroder House)의 형성1) 건축적 접근- 두스부르그의 개인주택 계획안슈뢰더 부인을 위한 개인 주택으로서 지어진 이 건물은 데 스틸에서 시도했던 이전의 여러 실험들의 종합적이고 실질적인 결과물이었다. 실제로 테오 반 두즈버르그는 이 주택의 완성된 직후에 ?조형적 건축을 향하여? 라는 데 스틸의 건축 이론을 발표하였다. 이전에 여러 곳에서 언급되어진 것처럼, 이 주택은 건축사적인 의이도 중요하지만 실제의 결과물에서 보여지는 데 스틸의 이론들 특히, 데 스틸에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공간을 어떠한 방식을 통해 건축 디자인으로 실제화시켰는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주택은 살기 위한 장소를 만드는 것이라는 건축의 기능적인 면보다는 근대 건축의 기반을 마련하였던 데 스틸 이론의 실제화라는 면에서 건축의 미학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어서 풀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슈뢰더 주택은 리트벨트가 가구 디자인을 하면서 습, 리트벨트의 중요한 작품으로 보존, 관리하면서 방문자들에게 주택 내부를 안내 해 주고 있다.2) 대지 현황 및 분석- 슈뢰더 주택 배치도이 대지는 2개의 중요한 방향에 면하고 있다. 하나는 다른 주택들과 같이 남서쪽의 프린스 헨드릭가에 면하고, 또 하나는 농장에 면하여 있다. 실제 지어진 주택에서는 특별한 방향성이 보이진 않지만 공간적으로 남동쪽, 즉 농장 쪽으로 열려진 구성을 취한다. 이 건물은 프린스 헨드릭가에 면하고 있지만, 현관은 남동쪽 면에 있어서 측면 진입을 하고 있다.당시, 이 대지는 자연에 인접해 있다는 이점이 있었지만, 이용할 수 있는 대지가 굉장히 적다는 점과 인접한 19세기에 지어진 3층 조적조 건물의 높은 특면 벽과의 관계 설정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른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리트벨트는 여기서 조적조 측면 벽을 슈뢰더 주택의 배경으로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 주택이 시골 주택이 아니라 가능한 미래 도시 주거의 전형이 되는 건물을 짓고자 했다.3) 프로그램이 주택의 건축주인 슈뢰더 부인은 처음에는 어린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도시로 가기 전 1년 정도 살기 위해 집을 빌려서 내부를 리노베이션할 생각이었다. 그녀는 이전에 남편과 살던 집이 리노베이션을 하고 가구를 디자인해 주었던 리트벨트에게 이 일을 부탁하게 되었는데, 리트벨트는 슈뢰더 부인이 생각을 바꾸어 새로운 집을 짓도록 설득하여서 슈뢰더 부인의 새 주택을 계획하기에 이르렀다. 슈뢰더 부인은 실내 디자인에 관심이 많았고 때때로 스케치들도 했기 때문에, 그들은 처음부터 건축주와 건축가의 관계보다는 협력자의 성격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그녀는 리트벨트에게 이 일을 의뢰하기 전부터 자신의 주거에 대한 명확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시골과 인접하고, 자유롭고, 개방적이고 융통성이 있는 주택이 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내부 공간을 자신과 3명의 자녀를 위해 가족 구성원이 각자의 프라이버시를최소한으로 유지하면서도 필요한 때는 모두에게 개방되는 하나의 큰 공간이 되기를 원했다낌의 탁 트인 공간을 접하게 된다.이것은 이층이 내부적으로도 트여진 공간이지만 많은 창들을 통해 외부적으로 트여져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층은 특별한 방 구분은 없지만 여러 가지 장치에 의해 영역의 구분은 되어 있다. 계단을 올라서서 오른쪽으로는 2명의 딸 방이 있고 왼쪽으로는 아들 방이 있다. 계단실 뒤쪽으로는 슈뢰더 부인의 방과 거실 영역이 위치하고 있다. 각 침실 앞에는 테라스가 있고 이 테라스 밑에는 일층의 내부로 통하는 출입구를 두었다.- 평면분석- 3층 조적조 벽돌벽당시에 리트벨트가 슈뢰더 주택을 디자인하는데 있어서, 이 대지가 안고 있는 큰 문제점 중의 하나는 인접한 19세기에 지어진 3층 주거의 조적조 측면벽과의 관계 설정이었다. 그는 회화에서의 화면과도 같이, 이 조적조 벽면을 이 주택의 배경으로 설정한 것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이쪽의 벽면은 개구부가 없는 내력벽으로 두고 그 앞쪽으로 공간을 구성하는 방식을 취하고 잇다. 리트벨트는 주어진 세 방향으로 모두 대등한 공간 구성을 하고 있다. 즉, 이층 평면에서 세 방향 모두에 외부 테라스를 두고 그 밑은 각기 스튜디오, 현관 홀, 부엌으로 들어가는 출입구를 두었다.이 주택의 평면에서 느껴지는 가장 큰 특징은 일층 평면과 이층 평면의 공간 구성 방식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일층 평면은 각 기능별 공간이 내력 벽에 의해 구획되어져 있는 반면, 이층 평면은 전체가 하나의 단일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슈뢰더 부인이 제안한 프로그램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즉, 일층은 서비스와 작업 공간으로서의 공적인 영역인 반면, 이층은 가족들이 거의 매일 생활하는 가족들만의 공간으로서 기능적 영역 구분이 명확히 되어 있다. 슈뢰더 부인은 가족들이 생활하는 공간은 하나의 단일 공간이 되면서 경우에 따라 구획 가능한 환경은 원했다. 이층의 개방 평면은 그 당시 매우 새로운 평면 형식이었으며, 이 주택에서는 테라스를 이용해서 바닥면이 외부로까지 확장되어서 공간에 관해 새로운 가능성을 주는 요인으로 작용한다간의 관점에서 볼 때 면은 내부 공간과 외부 공간의 경계선인 벽을 의미하게 되며 동시에 하나의 독립체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와 함께 입체의 내부에 마찬가지로 수많은 벽체로서의 면들이 존재할 수 있고, 반대로 그것의 외부로도 같은 형식으로 면들의 에워쌈이 진행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암시한다. 이와 같은 면의 자율성은 근대 건축 공간의 새로운 개념의 관점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으로, 그것은 19세기 이후 공간이 건축의 중심 개념으로 등장한 것과 시작을 같이한다고 말 할 수 있다.데 스틸 건축은 그 형태에 있어서 ‘면과 면의 구성으로 특징 지워지면 면이 어떤 구성 체계, 혹은 어떤 관계를 갖느냐’가 중심 개념이 된다. 데 스틸에서의 형태 체계는 면이 표피를 형성하고 그것들이 조합되어 공간을 형성한다는 관계를 가지는 것으로서, 다시 말하자면 면을 분절하여 건축의 형태를 구성하고 그것들의 접합에 의해 생성되는 공간에 관심을 가지는 요소주의로 설명된다.데 스틸에 의한 면의 체계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첫째, 파사드만으로 전체의 매스를 표현하는 것으로, 면의 구성은 전체를 하나의 화면으로 취급하여 개구부의 의미를 자체의 기능이 아닌 전체 화면의 구성 요소로 본다.둘째, 벽은 지지체로서의 기능이 없어지고 지지점만이 존재하며 단순히 칸막이의 용도만을 갖게 된다. 예를 들어 과거의 폐쇄적인 완결형의 지지체로 벽의 기능으로 주어졌던 반면, 바로셀로나 파빌리온의 미스의 벽은 과거 양식의 형태에 가깝지만 기능은 커튼 월로 되어 있고, 더욱 나아가 데 스틸의 벽면은 기능도 커튼 월이며 형태도 무정형, 비대칭을 이룬다.셋째, 매스 자체를 국부적으로 분할하여 면을 덧붙이는 식으로 면으로의 치환을 이룬다. 예를 들어 리트벨트의 슈뢰더 주택에서는 기능과 전혀 관계가 없는 면이 전체의 균형을 위해 덧붙여지고 있다.6) 공간 분석이 주택은 개방 평면을 위해 벽들이 개방된다. 이러한 벽들의 개방으로 인하여 내 ? 외부 공간의 상호관입이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2층의 단또한 북동 측면의 윗층 긴 코너 창은 그것이 열렸을 때, 공간을 한정하는 코너가 사라지고 거실 공간은 허공에 떠 있는 외부 공간과 같은 느낌을 준다.- 개방과 폐쇄에 의한 공간의 대조슈뢰더 주택은 일층과 이층의 공간을 구성하는 방식이 전혀 다르다. 일층은 각 기능별 영역들이 고정된 분할 벽들에 의해 구회되어지는 반면, 이층은 개방 평면으로 전체가 하나의 단일 공간으로 구성하여서 공간의 대조를 이룬다.- 2층 개방 평면도- 2층 분할 평면도이 개념은 리트벨트의 공간 개념들 중 하나로 개방과 폐쇄에 의한 공간 대조를 실체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또한 구조적으로도 새로운 구조방식인 철근 콘크리트의 사용으로 인해 이러한 개방 공간의 개념은 가능해졌다.리트벨트는 이 집의 이층 개방 공간을 위해서 모든 설비들과 붙박이 가구들은 벽조긍로 배치시키고 계단실 난간은 선적 요소로만 구성하였다. 따라서 계단실 조차도 이 공간 내에서는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 이 공간은 필요에 따라 이동 벽에 의해 기능별 영역이 구획되기도 한다. 계단실 주변의 벽도 필요에 따라 닫혀져서 계단실은 천창으로 상승하는 볼륨메틱한 공간으로 바뀔 수 있다. 이 때의 공간의 분위기는 이동 벽들이 거두어졌을 때와는 다른 공간감을 준다. 이러한 수법은 단순히 배열에 있어서, 경우에 따른 공간의 다양성을 주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내부는 낮과 밤의 다른 시간대의 변화하는 요구에 따라 매일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간의 가변성은 공간에 융통성을 주며 공간 자체에 변화를 준다.- 공간의 시지각화색체는 공간의 특성을 부여하고, 분위기를 만들고, 이념을 상징하기도 하며, 개인적인 감정의 표출 수단이 되는가 하면, 작품의 구성에 조직성을 부여케하고, 사물이나 사건을 확인시키도록 유혹하고, 미적인 호소를 완성시킨다. 이 주택은 색면과 색기둥의 기본 요소들로 공간과 형태를 구성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요소들은 구축성과 비구축성이라는 대립적인 특성을 담고 있다. 리트벨트가 그의 에세이에서 공간의 지각은 내부 대 외부,
기무치가 한국에서 유행이다? (Zen Style)최근 실내디자인을 비롯하여 전반적인 문화의 흐름 가운데 Zen Style이 유행을 하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 아닐까 싶다. 주택을 분양하는 선전을 보더라도 ‘Zen Style의 거실과 안방의 조화’, Zen Style의 가구, 심지어 Zen Style을 표방한 고깃집까지 있다고 한다. 도대체 Zen Style이 무엇이길래, 사람들은 Zen이란 말만 들어가면 좋다고 생각하고 몰래 드는 것인가.9912031 명 도 성Zen Style은 간단히 말하자면 미니멀리즘의 또 다른 형태로 해석하면 좋을 듯싶다. 거창히 설명하면 동양의 신비주의를 바탕으로 한 오리엔탈리즘이 미니멀리즘과 접목으로 90년대 후반에 들어서 Zen Style의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젠의 특성을 자세히 살펴보면 동양적인 느낌의 공간표현 요소들이 많이 내제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중 가장 키워드 몇가지를 살펴보고자한다.Zen Style의 공간특성첫 번째로는 간결함과 고요함을 특성으로 들 수 있다. 이것은 혼란스러운 환경과, 조화, 균형, 감동, 재미를 창조하고 집중시키는 환경을 나누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안에서 정신적인 내부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만족시키는 공간을 창조해 낼 수 있고, 고요함, 빛과 에너지의 자유로운 흐름을 끊임없이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공간 안에서 이러한 활기가 생겨나는 것은 중요한 포인트가 생겨나게 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이러한 간결함과 고요함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Zen Style은 대나무와 같은 식물의 사용하거나 해변으로부터 수집된 둥근 자갈의 배열, 또는 열린 창문을 통해 공기의 흐름을 방해하지 앟는 투명한 커튼 등으로 자연과, 자연의 본질적인 아름다움을 드러내게 하는 것이다. 마치 예전의 한옥의 사랑방에서 뒷 뜰의 나무를 바라보며 자연을 감상하는 모습과 같은 빈자의 미학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두 번째로는 균형이다. 균형은 젠 스타일의 또다른 중요한 특성으로써 어두운 공간은 빛으로써 균형을 이루어야 하고, 거친 질감에는 부드러운 것이 놓여져야 하는 것이다. 젠의 관계에는 따로 혹은 함께 존재하는 삶의 두가지 영역 - 음과 양으로 연관될 수 있는, 그것은 또한 남성과 여성, 긍정과 부정 등으로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Zen은 본질적으로 미스 반 데 로에가 주장한 “Less is More”를 추구한다. 즉 한 개인이 소유로 인해 침울하게 될 수 있는 점을 경고하면서 소유를 합리적으로 조절함으로써 정신적인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자신 스스로 시간을 받아들이고, 곳곳을 약간 변화시키면서, 자신이 편안하다고 느끼는 환경을 유지하는 것이다.세 번째로는 의도된 빈곤과 절제된 단순함을 꼽을 수 있다. 젠 스타일의 거실은 소파 대신 단순한 러그 한 장을 깔고 키 낮은 장식장을 놓는 것으로 아주 간단히 연출이 가능하다. 거실 테이블도 서양의 테이블이 아닌 낮은 좌탁과 의자 대신 방석을 사용하는 것으로 연출이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가구 디자인은 전반적으로 키가 낮고 각지며 가로로 긴, 정적인 공간비례를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특히 젠 스타일이 가구배치에는 동양의 전통적인 가구를 매치시키는 것도 아주 자연스럽고 센스있는 아이디어로 평가 받기도 하는 이것은 젠 스타일의 동양의 선적인 이미지를 표방으로 탄생한 것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듯 젠 스타일이란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저 예전에 우리가 생활하던 공간의 특성들을 조금 세련되게 표현했을 뿐이다. 그런데 왜 젠 스타일은 유행 아닌 유행을 하고 있는 것인가?오리엔탈리즘의 역수입 Zen Style-전통 한옥이미지옆의 이미지는 전통 한옥 이미지 중 한 컷이다. 여기에는 젠스타일의 조형적 특성인 간결함과 균형, 의도된 빈곤, 자연과 대화라는 특징들을 두루 엿 볼 수 있다. 그냥 이게 ‘젠 스타일이야’ 하고 설명을 해도 대부분 맞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전통적인 이미지를 빼버리고 조금만 세련되게 표현하게 되면 이게 Zen Style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아니 굳이 세련되게 표현하지 않는 것이 차라리 더 편하고 아름답다. 그런데 사람들은 굳이 Zen Style에 흥미를 느끼고 Zen 이란 말만 들어가면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 TADAO ANDO안도의 본격적인 건축활동은 스미요시 나가야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외부로 열려있는 창하나 없는 매끈한 질감의 노출 콘크리트 벽, 단순한 상자형의 엄격한 기하학적 구성, 전통적인 문화적 맥락, 그리고 상자의 3/1을 차지하는 한 가운데의 중정과 일상 생활 공간에 대한 새로운 개념의 주택, 그의 건축 세계가 응축된 원형과도 같은 이 주택은, 개인 주거로서는 처음 일본 건축 학회상(1980년)을 수상했으며, 동양주거의 원형을 만든 건축가로써 해외로 그의 이름을 알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그의 작품에 나타는 내용들을 살펴보자면, 대략 ◎ 벽의 건축 ◎ 지역주의 ◎ 텍토닉이라는 세 개의 성격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세 가지의 담론을 중심으로, 처녀작이라 볼 수 있는 스미요시 주택과 80년대 작품인 키토사키 주택을 비교 분석함으로써 안도의 건축 개념과 설게 방법을 살펴보고자 한다.◎ 안도 다다오의 건축에 대한 인식1) 벽의 건축그의 건물을 바라볼 때 가장 강하게 지각되는 것은, 매끄러운 질감의 노출 콘크리트 ‘벽’이다. 그의 건축에 있어서 원형이라고 일컬어지는 스미요시 나가야를 살펴보면, 이러한 느낌은 더욱 확실해진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외부로 열린 창하나 없는 매끈한 질감의 노출 콘크리트 벽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다른 건축가와 비료해 볼 때, “벽의 건축가”라고 하는 것은 얼핏 타당해 보인다.그러나, 안도의 건물을 기점으로 해서 기둥의 시대가 가고 벽의 시대가 도래 했고, 안도가 기둥을 버리고 벽을 택했는지는 의문스럽다.- 스미요시 나가야가 세워지기 전 풍경 - 스미요시 나가야의 침묵하는 벽안도는 공간 내엑서 거눅 공간 구성의 주 요소로 벽을 선호했지만, 그 자신도 밝히고 있듯이 기둥과 벽을 비교하여 벽의 우월함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기능성의 선행으로 자칫 일기 쉬운 벽과 기둥간의 관계 회복이며, 현대 도시의 혼란스런 소음의 한복판에서 자신의 건축을 위치시키는 방식에 대한 설명인 것이다. 그는 벽에 의해 외부를 차단함으로써 완결성 높은 공간을 도시로부터 잘라내고자 하는 것이다. 결국, 안도의 벽은 그의 건축을 만들기 위해 내딛는 첫걸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도시 상황에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건축 원리를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주변 맥락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방식은, 안도의 작품 활동 전체에 걸쳐 살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격리는 그 극명한 대립속에 역전과 의외성이 삽입됨으로써 좀 더 풍부한 건축을 가능케 하며, 동시에 안도의 건축원리에 의해 외부환경은 건축 내부로 선택적으로 수용되어, 눈에 띄지 않던 풍경을 인식 가능케 해준다.2) 지역주의지역성과 전통성 등은 동양의 건축가인 안도의 건축을 설명하는데 자주 키워드가 되곤 한다. 구체적으로는 스키야와 민가, 그리고 골목길을 들 수 있으며, 이러한 구체적인 유형 말고도 재료의 사용방식이나 자연을 바라보는 태도에서도 그것은 엿볼 수 있다.그러나, 안도가 전통이나 지역성에 대해 표현한 것은 전통으로 회귀하거나 풍토색으로 점철 된 것은 아니었다. 안도 스스로는, 근대성과 일본 특유의 풍토, 가치관과의 갈등 속에서 “서양의 근대성과 일본의 전통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에 관심을 둠으로써, “근대성을 다른 각도로 사고하고 일본의 저통 속에 숨겨진 근대성을 재발견”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자발적으로 생성된 지역의 풍토주의와는 구별되는 것이다.3) 텍토닉안도의 콘크리트 벽은 형태의 윤곽을 구성함과 동시에 구조적 역할을 담당한다. 또한 그 특유의 노출 콘크리트가 만들어내는 양감과 질감, 빛과 그림자의 대비는, 공간 감각과 밀착하여 공간에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그의 매끄러운 노출 콘크리트는 꼬르뷔지에의 그것과는 많이 다르다. 안도는 일본인의 감성에 시각적, 촉각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콘크리트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는지를, 그리고 그가 얼마나 질감과 촉각을 중시했는지 알 수 있다.이러한 것들이 안도의 건축을 ‘텍토닉’하다고 말하게 하고 있는 것들이다.◎ 안도 다다오 건축의 형태성 분석1) 구조와 기하학적 윤곽- 배치도스미요시 주택은 오사카의 중심부에 세 채의 목조건물이 줄 이은 가운데에 콘크리트 상자가 삽입되어 있다. 정면 2칸 X 안길이 7칸의 14평이라는 협소한 대지 위에서 전체의 약 1/3을 중정으로 하는 이 주택은, 건폐율 60%라는 제약 속에서도 부지 가득 들어서 있다. 스미요시 나가야는 안도 다다오의 대표저인 작품으로서, 과밀한 도시환경이라는 가혹한 조건 속에서 ‘도시주택’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기하학적 윤곽의 치수와 구조체- 스미요시 주택벽식 구조체인 이 주택은 전체 기하학적 윤곽을 형성하는 것이 곧 구조체이다. 철근 콘크리트조로서, 콘크리트를 그대로 노출시키기에 , 콘크리트 패널치수와 구멍 위치는 전체의 기하학을 결정하는 또하나의 결정 인자가 되고 있다.- 키도사키 주택키도사키 주택은 한적한 도심 주택지, 정방형에 가까운 대지에 위치해 있다. 이 주택은 3세대가 높은 프라이버시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옥외공간을 매개로 한 가족으로서 공동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일종의 집합주택 형식이다. 전망 좋은 주변의 조망을 오히려 잘라낸 높은 콘크리트 벽은 일부에서 원호 형태로 개방하고 있다. 정원에는 기억을 담고 있는 고목이 보존되어 있다.-정방형의 기하학 -12m각의 입방체와 둘러싸는 벽 -입방체와 대지 경계선벽식 구조인 이 주택은 정사각형의 기하학에서 출발한다. 전체를 매스로 잡은후, 중심에 4분할된 정방형을 넣어 이것을 3층으로 입체화 했다. 대지의 형상도 거의 정방형에 가까운데, 12m각인 입방체는 대지의 대략 중앙부에 놓여 있고, 높은 콘크리트 벽면은 대지 형상을 따라 주위를 둘러 싸고 있다.스미요시 주택과 키도사키의 주택은 크게 단일 구성과 복합구성으로 나뉘어 볼 수 있다.단일 구성 복합구성스미요시 나가야 기도사키 주택2) 프로그램 연결공간스미요시 나가야- 3분할된 기하학적 체계3a x b의 콘크리트 직방체의 내부는 균등하게 3분할된다.3분할된 a x b 의 단위는 각각 하나의 기능공간 단위와 일치하고 있다.왼쪽 그림을 보면, 프로그램에 의해 주공간과 부공간으로 나뉘어 진다. 양쪽 끝에 있는 두 개의 a x b단위가 주공간으로서, 침실, 거실, 식당. 그리고 서재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으며, 공간 구성상 중심을 차지하며 하늘을 향해 열려 있는 중정 (칠해진 부분) 은, 계단과 브릿지 등 동선의 흐름을 풀어내는 연결 공간의 중심으로서 이 주택 전체를 통합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스미요시 나가야의 동선을 따라가 보면, 직진한 후 중정으로 나와 190도 회전해 계단을 오르고, 다시 180도 회전해서 다리를 건너야 안쪽의 방에 이를 수 잇다. 3등분된 작은 직방체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다채로운 동선의 움직임이 발생한다. 직선 운동, 회전 운동, 상승 (하강) 운동의 배치를 통해 유도되는 시선의 변화는 건물의 전체적 구성을 읽어낼 수 있다.키도사키 주택- 2층 평면도- 1층 평면도- 3층 평면도이 주택은 부부와 그들 부모들을 위함 3세대 주거이다. 4분할된 12m각의 정방형은 또 다시 4분할되어 , 6m각의 정방형을 중심으로 각 기능은 나눠진다. 1층, 2층, 3층 평면도 그림에서 칠해진 부분이 현관, 통로, 계단실, 욕실, 설비 등으로 사용되는 부공간을 표시하고 있다.진입의 유도는 부지 앞쪽 언덕길을 따라 세운 벽이 안쪽으로 원호를 그림으로써 이뤄진다. 어프로치 동선은 도로면보다 하강되는 폭이 넓은 계단과 상승되는 좁은 계단에 의해 양분되고, 다시 하강하는 동선은 부모들의 주호가 있는 1층 천정에서 동서로 분할된다. 어프로치가 좁은 쪽의 상승하는 계단을 오르면 부부 주호의 엔트런스, 테라스와 거실, 식당이 있으며 한층 위에는 침실과 서재가 있다.이 주택에서는 독립된 어프로치 동선과 공동의 옥외공간을 통해서 가족들의 독립생활과 공동생활이 유지되고 있다.◎ 안도 다다오 건축의 구조와 기하학1) 기하학적 볼륨의 구성구성의 기본 단위를 이루는 기하학적 볼륨은 곧 구조적 단위, 즉 기하학과 구조가 일치하며 명쾌한 윤곽을 지닌 ‘자기 완결적’ 구성 단위이다. 이런 구성 단위들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는 그의 건축에서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몬드리안스미요시 나가야의 경우, 하나의 직방체를 삼분할해서 가운데에 중정, 그리고 양 끝에는 실을 배치하였다. 명료한 기하학에 의한 형태는 그의 일관된 건축의 주제였지만, 스미요시 나가야와 같은 단일 구성만으로는 다양하고 풍부한 건축을 설계하는데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설계 사무소를 시작한지 10년 정도가 지난 1970년대 말쯤, 콘크리트 상자 안에서의 어려움을 깨닫게 된 그는 코니소 주택(1981)에서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다. 코시노 주택을 설게하던 당시 그는, 건축 존재의 구상성과 함께, 몬드리안의 콤포지션에 의한 추상적 형태구성을 건축화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기에 추상화된 형태의 구성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단순하고 명료한 기하학을 견지하는 안도의 건축에서 이 기하학적 볼륨 자체가 그의 디자인의 핵심적 이슈는 아니다. 구조적으로 자립하는 이 기하학적 볼륨들을 하나의 구성 단위로 하여, 각각의 명확한 윤곽과 질서를 유지하면서 어떻게 상호관계를 맺고 구성할 것인가에 그는 초점을 맞추고 있다.2) 기하학적 볼륨의 생성- 스미요시 나가야스미요시 나가야는 최소규모의 단일구성이다. 세 채의 목조건물이 줄 이은 가운데, 57.3m3라는 협소한 부지위에 가득 들어서고 있다. 과밀한 부지 상황에 꼭 맞게 삽입된 하나의 기하학적 볼륨은 대지 경계선에 의해 형성되고 있다.- 키도사키 주택이와 반면, 키도사키 주택은 부지의 규모가 커지고(부지 면적 610.9m3) 프로그램이 복잡해지면서 개 이상의 기하학적 볼륨으로 구성되는 복합 구성을 이루게 된다.- 기하학적 볼륨 생성의 근거나무가 아닌 콘크리트의 선택으로 건축은 구조적 제약으로부터 벗어나 표현의 자유를 얻었으나, 동시에 건축에 부과되는 제한과 참조체도 동시에 상실했다. 안도 건축의 구성 단위를 이루는 기하학적 볼륨의 치수와 윤곽은 무엇에 의해 지배되는 것일까?
서론한국역사특강을 들으면서 내 생각이 정리되기보다는 더욱 혼란스럽고 왜? 우리나라는 주변 강대국에 휘말릴 수 없었나? 하는 답답함만이 밀려들었다. 한편으로는 지금의 정치권의 행태를 보면서 외세의 힘을 빌려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던 몇 백 년 전과 한국은 무엇이 달라진 것인가? 하는 하나도 나아진 것이 없지 않나.. 의구심도 들게 됐다. 그 중 내 궁금증을 두드린 한 가지가 바로 일본의 천황제와 황국사관, 그리고 역사왜곡문제와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의 문제를 일으킨 일본 극우익의 행태가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나 하는 것이었다. 또한, 일본인에게 있어 일제 군부 때의 천황의 이미지와 현재 일본인에게 있어 천황의 이미지가 어떻게 바뀌었나 하는 점이 가장 궁금했다.제 3강에서 나왔던 질문 중에 한 가지가 바로 천황의 신적 이미지가 군대에 의해 생겨났나?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천황의 신적 이미지가 강력한 군대를 기반으로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 이를 발판으로 대륙까지 침략하려 했던 이토오 히로부미 하의 일제 군부에 의해 생겨났다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잘 알고 있는 내용은 아니었지만, 일본의 천황의 칭호 대충 천무조 때인 700년대 정도부터 사용된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렇다면, 일본의 천황의 신적 이미지의 생성 배경과 황국사관은 일본인에게 있어 지금까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지에 대해 써 보려한다.본론천황제의 탄생일본이 왕을 '천황'이라고 부르게 된 유래는 중국 도교의 신화에 등장하는 '천황대제'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는 북극성을 신격화해 일컫는 말이다. 하늘의 모든 별은 자리가 바뀌지만 북극성은 항상 정북 쪽에 자리해 움직이지 않고 또 주위의 별보다 한층 밝게 빛난다. 7~8세기경 일본 지배계급은 이러한 중국신화를 본받아 당시 '대왕'으로 호칭하던 왕을 '천황'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8세기경 고대 일본 조정이 펴낸 것으로 알려진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이렇게 성립된 '천황'을 신성화하고 정당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두 책은 다시 만들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거꾸로 천황 귀족의 지위 권력을 정당화하고 신성화했다. 특히 고대 왕이나 귀족은 물론 후세의 지배계급도 이 신화를 움직일 수 없는 진실로 받아들이게 된다. '황국'도 이러한 천황이 지배하는 국가라는 뜻이 될 수 있다. 여기에서 황국사관이 출발하게 된다.메이지 유신으로 권력을 장악한 신진 세력들 역시 고대 천황제 사상을 바탕으로 천제를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해 신 이데올로기 확립에 박차를 가한다. 이렇게 왕을 신격화함으로써, 신진 세력들은 국민을 신의 이름으로 설득하고 신의 명분을 앞세워 조선을 침략하고 이를 발판으로 중국 대륙까지 넘볼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렇듯 일본 천황의 신격화는 확실한 대의명분 없이 일본인에 의해 이뤄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천황제를 교육칙어를 공포하여 일본인들에게 천황에게 무조건적으로 충성하도록 하는 교육 ( 아니 세뇌라고 해야 하나? ) 을 하게 되는 것이다.상징적 천황제...?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연합국, 특히 미국으로서는 일본의 천황제의 처리가 가장 큰 골칫거리가 된다. 그 중에서도 일왕 히로히토를 재판대에 세울 것인가 아니면 면죄부를 주어 천황제를 존속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는 미국으로서는 골치 아픈 문제였다. 연합국 측의 여론도 만만치 않았으며, 천황을 단죄하기에 일본인들의 동요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또한 미국은 천황의 말에 의해 빠르게 전투가 중단된 것을 보고 천황의 위력이 일본에서 얼마나 큰 것인지 그리고 천황을 이용하면 가장 적은 비용과 병력으로 일본을 점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미국의 이러한 선택으로 일본 천황의 '인간 선언' 으로면죄부를 주고 천황은 일본에 그대로 두 되 국가의 상징이자 국민통합의 상징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으며 정치적으로는 아무 권한도 행사할 수 없도록 제한한 것이다. 이는 천황제 폐지론자들의 주장을 누그러뜨리면서 동시에 일본 국민들의 반발을 무마하려는 뜻이 담겨있다.하지만 지금의 일본에서 천황은 과연 상징적라를 가려고 하더라도 정치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천황제 이데올로기의 작용천황제 이데올로기는 단순히 천황을 숭배하는 것만이 아니다. 이것을 통해 국민의 사상에 다양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첫째. 천황제는 불관용의 사상이다. 이는 국민을 사상적으로 통합시키는 기능을 하고 있다. 달리 생각해 보면, 이에 따르지 않는 것을 배제하는 사상이며, 비국민이라는 딱지를 붙인다. 또한 대외적으로 침략주의 모습을 띠며, 천황이 그 정신적 지주가 되고 있다. 태평양전쟁때 주창되었던 하츠코우이찌우(세계를 하나의 집으로 삼는다)라든가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슬로건은 천황과 연결된 것이다.둘째, 천황은 차별의 사상이다. 국가는 천황을 아버지로 하는 가족의 연장이라는 허구가 만들어져 있다. 이것은 일본단일민족론을 형성하여 다른 민족을 차별하는 사상이다. 또한 이것을 가정으로 끌고 들어오면 남성우위의 여성차별사상이 된다. 현재의 천황전범에서 여성의 천황위 계승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그 하나의 실레이다.셋째 천황제는 비합리주의 사상이다. 천황을 신비로운 존재라고 강요해 전전의 일본에서는 언론이나 학문연구의 자유를 방해받았다. 전전의 일본에서는 사회과학 발달의 가장 큰 장애물이 천황제였다. 천황에 대해 반대하는 것은 물론 논의하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는 상황이었다.넷째, 천황제는 무책임의 체계이다. 이것은 천황의 전쟁책임에도 관계되는 것이다. 전범을 재판하는 전후의 동경재판에서도 분명해졌듯이 군인, 정치가, 관료들은 "천황의 명령을 따라 했다"고 책임을 회피했다. 그런데 천황측은 정부나 의회의 결정에 따랐다고 책임을 회피해서 결국 책임의 소재는 애매하게 되었다. 이러한 무책임은 전쟁뿐만 아니라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이상을 종합한다면 천황은 반민주주의 사상이다. 주권재민의 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하는 일본국 헌법에, 더구나 처음에는 상징이라는 규정을 두고 있지만 이것은 헌법의 불충분함 혹은 원리적 모순을 나타낸 것이다천황제의 산물, 황국사관메이지 유신의 시대적 상황에서 싹트기 시작한 황국사관은 타개하기 위해서는 '일본 독자의 입장으로 돌아가 만고불변의 국체를 천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국민들을 깨우치고 인식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긴급한 일이라고 여겼다. 황국사관은 바로 이러한 위기 속에서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황국사관은 천황통치의 정통성과 영원성, 그리고 가족국가관에 따라 국민은 무조건 왕 아래 귀속 통합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갖고 있다.따라서 황국사관은 그 관점이 처음부터 사실을 무시한 독선성에 특징이 있다. 개인 문제인 사상이나 신앙의 자유 등이 일체 허용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였다. 정권 스스로가 국체를 개입시켜 개인의 사상, 종교, 윤리관을 통제하고 독점했다. 그리고 천황의 권위에 대해서는 일체의 비판이 허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황국사관은 자국민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는 기능 말고도 제국주의적 침략과 다른 민족에 대한 식민통치, 이를 위한 전쟁 등을 정당한 것으로 찬미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확실한 대의명분 없이 천황의 명령이라면 따를 수밖에 없고 따라야 하는 그들에게 자신의 생각 같은 것은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타민족을 침해하고 박해하는 것을 부당하다고 생각지 않는 논리구조야말로 황국사관의 병폐이자 독선이다. 그것은 천황제 국가와 일본 제국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그러면 이러한 황국사관이 왜 문제가 되는가?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봐도 황국사관은 합리주의적 여러 사상에 비해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부족한 점이 너무나 많다. 본질적으로 보아도 진무 천황으로부터 역사의 기술이 시작되고 있다는 점만 봐도 그 오류를 쉽게 알 수 있다.무엇이 문제인가? 황국사관!이렇게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황국사관이 오늘날 일본에서 다시 되살아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2001년도의 역사왜곡 문제뿐만 아니라, 오래전부터 되살아나고 있었다는 점이다. 벌써 1982년 여름에 일본 교과서 파동은 일본 집권층이 얼마나 황국사관에 깊이 젖어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도 남는 사거니라고 볼 수 있다. 침는 독일과 너무나도 대조적이다.지금의 일본 교과서 검정기준은 우선 자국의 역사를 지나치게 자기중심으로 미화한다는 점에서 전쟁 전 ( 천황의 신격화도 여기에 포함된다 ) 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자국의 정치나 경제상태, 지배층의 정책이나 행동 등을 될 수 있는 대로 미화하고 잘못이 없는 것으로 기술하도록 교과서 집필자들에게 요구하고 있다고 한다.둘째는 일제의 전쟁 책임을 적극 은폐하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지난 1982년 일본 문부성은 교과서 검정을 하면서 '중구 침략'을 '대륙 진출'로 우리나라 '3.1운동'을 '3.1폭동'으로 고쳐 쓰도록 했다가 피해 당사국으로부터 거센 항의와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그때 일본은 고위 외교관리가 직접 나서서 시정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혀 큰불은 일단 수그러뜨렸다고는 하지만. 오늘날 또 다시 역사 왜곡 교과서 문제로 피해 당사국들의 비난을 받는 일본을 보면서, 또 4년 뒤 있을 교과서 검정에서 붉어질 역사 왜곡 문제를 상상하면서 우리와 직결된 문제들은 아직도 바로 잡아야 할 점이 수두룩하다.황국사관의 밑받침, 극우보수단체일본 보수우익단체는 황국사관의 온상이자 메신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천황 반드시 있어야 할 국가 기본존재로 인식하고 '국가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아 평등국민 국가를 건설한다는 목표를 실현하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떠한 이념이 이들을 우익운동으로 몰아넣는 것일까? 에서 "우익과 우익사상은 애매한 점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국가에 대한 충성', '민족적전통과 문화의 존중', '전통적 권위중시', '가부장적 국가관', '반지식계급', '타국가 , 타민족 배타', '행동 중심', '힘의 신봉', '반자유쥬의', 반개인주의' 등을 공통된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우익은 우선 전통주의를 선호하고 있다는 설명으로 해석할 수 있을 듯싶다. 민족 고유의 역사와 문화를 중시하고 사회와 국가를 개혁함에서도 토착적 사상과 제도를 존중, 이에 입각해 실천하려는 일조의 보수주의를 본질로 하고 있는 것이 중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