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북아 공동체의 현황과 과제 》- 한, 중, 일을 중심으로 -목 차Ⅰ. 서 론 Ⅱ. 세계의 경제 블록화Ⅲ. 동북아시아의 조건 Ⅳ. 동북아시아 평화산업망 구상Ⅴ. 안보 협력체 Ⅵ. 문화 협력체Ⅶ. 결 론Ⅰ. 서 론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반은 무엇보다도 현실사회주의 국가의 몰락과 이를 계기로 등장한“역사의 종말” 이데올로기를 통해 특징지어진다. 이 시기는 1960년대에 나타나서 1980년대 이후로 유행하기 시작하여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을 계기로 더욱 힘을 얻게 된, 역사를 포함하는 “객관적 현실의 존재에 대한 본질적 회의”를 의미하는 탈근대 담론의 부상의 시기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오늘날 동북아시아를 하나의 공동체로 이해하고 나아가 그것의 미래에 대해 전망을 해 보려는 시도가 나타나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세계화의 단계에 들어선 지구촌에서 일어나고 있는 지역화, 특히 경제를 중심으로 하는 블록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상황에서 동북아시아 특히 한, 중, 일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구성에 있어서 경제, 안보, 문화를 중심으로 동북아 공동체에 대해서 전망을 해보도록 하겠다.Ⅱ. 세계의 경제 블록화세계는 지역에 따라 여러 나라들이 연합하는 블록화를 서두르고 있다. 국가연합이 세계적 추세라면 미국이 가장 앞선 나라이고, 이에 유럽연합이 경제공동체에서 정치공동체를 형성해 가고 있다. 특히 구소련의 붕괴로 양극화된 냉전체제가 와해되면서 블록화 현상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미국, 캐나다, 멕시코 3국을 연결하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다. 이것은 3국간 관세 및 수입제한을 단계적으로 완화하고, 상호투자를 장려해 자본이동과 물류유통을 확대한다는 것이다. 또한 노동력의 자유로운 이동과 동일한 노동법 및 환경보존법 등을 적용해 명실상부한 거대 시장권을 형성하려고 한다. 이와 유사한 남미지역의 국가간 연합체가 중미공동시장(CACM) 남미공동시장(MERUCOSUR)이다.경제블록화의 대표적인 것은 유럽연합이다어렵지만, 2국간 또는 다국간의 협력관계등을 점진적으로 발전시키는 방식으로 경제협력을 이루어 가고 있다. 그러나 동북아지역의 다자간 결합을 불가능하게 했던 정치적 이데올로기 등이 사라지고, 러시아와 중국에서 개방이 이루어지며, 이들 나라에서 경제개발이 추진되면서, 동북아시아의 사정은 크게 변하고 있다. 동북아시아 경제협력기구를 위한 논의에서 몇 개만 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일본의 동해권 경제연구회는 한반도와 일본을 중심으로 하고, 여기에 러시아의 시베리아와 연해주, 몽고, 중국의 동북 3성을 포함하는 “환동해경제권”을 구상하고 있다. 이 지역은 북미의 NAFTA 내지 유럽의 EU와 견줄 만하다고 한다. 환동해경제권을 구성하는 한국과 일본은 자원과 노동력이 부족하지만 자본과 기술이 있어 경제개발협력이 가능하다. 한편 러시아는 석탄, 천연가스, 비철금속, 목재, 수산물이 많으며, 중국 또한 광산물과 농산물, 노동력이 풍부한 나라지만 자본과 기술이 부족해 개발을 기다리는 나라다. 따라서 환동해경제권은 이 양 진영의 협력으로 가능하리라는 것이다. 즉 일본과 한국은 GDP와 1인당소득 등이 높고 무역액수가 높으며 3차산업이 발달해 기술과 자본이 있다. 하지만 중국, 러시아, 북한, 몽고는 기술과 자본이 없는 반면 자원과 노동력이 풍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과 한국은 식량과 에너지를 수입하는 나라이고, 러시아와 중국은 식량과 에너지를 수출하는 나라이다.발전량러시아몽고중국북한한국일본수력발전155조wh187조wh14조wh5조wh89조wh화력발전583조wh3조wh878조wh9조wh126조wh618조wh원자력발전109조wh14조wh74조wh302조wh총발전량847조wh3조wh1,079조wh23조조205조wh1,009조wh※《6개국 에너지 사용량》- 출처 : Book of the world -동북아시아 6개국에서 가장 긴요한 문제가 에너지와 식량이다. 한국은 화력발전이 전 에너지의 62%, 원자력발전이 36%에 해당하고, 일본은 화력이 전체의 61%, 원자력이 30%를 점달한다. 다른 하나는 야쿠즈크에서 하바로프스크, 블라디보스토크, 한국에 이르는 선과 야쿠즈크에서 하얼빈, 북한, 한국을 경유, 일본에 이르는 선으로 4,300Km에 이른다.두 번째 구상은 대도시를 연결하는 산업망으로 이것을 BESETO 벨트 축이라 하며, 여기에 다시 동북아시아 BESETO 벨트와 환동해 벨트가 있다. 동북아 BESETO란 북경, 신의주, 평양, 서울, 후쿠오카, 오사카, 도쿄를 잇는 축으로, 이 지대에는 약 1억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다. 이것을 항공기로는 일본의 간사이공항, 한국의 인천공항, 그리고 홍콩공항으로 연결하고, 컨테이너 항구로는 일본의 고베, 한국의 광양, 중국의 연운항을 연결하는 것이며, 다시 철도로는 부산, 서울, 심양, 북경을 있는 것이다. 이 지역 대도시에 컨벤션센터, 비즈니스센터, 박람회 등을 열어 국제업무를 강화하고, 물류의 유통, 사람의 유통 등을 통해 생활한경을 국제화하고, 국제교류를 통해 이곳 주민들의 생활의 질을 높이고 행정개혁으로 국제화를 더욱 촉진해 간다는 구상이다. 환동해권은 동해에 연한 항구들, 말하자면 한국의 부산, 포항, 강릉, 북한의 청진, 원산, 나진, 선봉, 일본의 하코다테, 오다테, 니이가타, 도야마, 돗도리, 러시아의 나훗카, 블라디보스토크, 중국의 훈춘과 도문 등 한구간의 교통을 빈번히 하고, 이것을 기반으로 인적, 물적 교류를 강화하며, 정보와 기술의 교환을 통해 생활의 질을 향상시킨다는 구상이다.셋째 구상은 두만강삼각주 개발계획으로, 이것은 특히 UN이 지원하는 UNDP 계획이기도 하다. 이것은 중국의 훈춘 러시아의 포시에트, 북한의 나진을 연결하는 소 삼각, 말하자면 “황금의 삼각”과 이것을 외각에서 둘러싼 중국의 연길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북한의 청진을 연결하는 대 삼각이 있다. 두만강개발은 이곳 소 삼각지대를 세계 제2의 국제무역항으로 건설한다는 것으로, 이곳에 국제비행장, 국제 금융센터, 보세창고, 경제무역대학 등을 설립해 무역의 중심지로 하고, 이곳에서 유럽까지 연결되는 철도를중국의 연운항에서 시작해 중앙아시아를 관통, 모스크바를 경유해 유럽에 이르는 대륙간 횡단철도를 구상하고 있다. 중국의 대륙간 횡단철도에 대항하기 위해 러시아는 한국의 부산에서 경원선을 경유,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로프스크를 거쳐 시베리아 철도를 연결, 모스크바, 유럽에 이르는 철도를 구상하고 있다. 이와 같이 경제 면에서 동북아시아는 러시아의 시베리아를 포함해 방대한 경제권을 형성할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으나, 과거 냉전의 앙금이 가시지 않았고, 무엇보다 국가간의 경제적 격차가 심해 그 실현이 극히 불투명하다. 그러나 EU나 NAFTA에서 보는 것과 같이 국가를 초월한 지역간 협력이 불가피한 조건이라면, 동북아시아는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경제 블록화를 서둘러야 한다. 이때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이 자본과 기술이 월등히 앞선 일본보다, 그리고 이에 크게 뒤진 중국보다 중진국의 위치에 있는 한국이 중간 매개자가 되고 주동해서 동북아시아 경제권을 형성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다.Ⅴ. 안보 협력체동북아에서 경제공동체보다 더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 안보협력체다. 동아시아지역에는 유럽의 NATO와 같은 군사동맹으로 동북아시아군사동맹(NEATO), 동남아시아조약기구(SEATO)가 있으나, 이들은 유명무실하고 미국과 한국의 한미조약과 미국과 일본의 미일조약이 있어 미국 중심의 2국간 안보체계밖에 없다. 안보에 관한 한 동북아시아는 냉전시대 때 가장 큰 희생을 치렀다. 1950년의 한국전쟁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구소련이 붕괴하고 동구권이 해체되고 세계는 탈냉전시대에 돌입했으나, 동북아시아를 포함한 아시아 국가들은 국방예산을 늘리고 신무기 구입과 군 현대화를 추진해 세계 최대의 군비경쟁지대가 되었다. 특히 동북아시아에서는 아직도 냉전체제를 청산하지 못하고 민주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의 대립은 여전하다. 그 구체적인 사례가 한반도 문제이다. 남한은 미국과, 북한은 러시아 및 중국과 군사동맹을 유지하고 있다. 최근 대북관계에서 한국, 일본, 미국 3자의 협력이 이루어지고 있써 자유세계의 일원이 되었고, 일본은 중국에 공적개발원조(ODA)차관을 계속 제공하고 있으며, 동시에 중국과 한국, 일본은 에너지 환경문제에서 긴밀한 연락을 갖고 있다.동북아시아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나라가 미국이다. 따라서 동북아시아에서 패권을 노리는 일본과 중국, 미국은 동북아시아 안보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국은 한미조약, 미일조약 등으로 아시아 국가와 군사동맹을 유지하고, APEC을 통하여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안보를 유지하는 한편, 아시아의 안보를 위해 일본 한국, 싱가포르, 대만 호주 등을 연결하는 “다자간 안보포럼”을 구상하고 있다. 미국은 중국을 장차 미국을 위협할 수 있는 잠재적 강대국으로 인식해 견제와 협력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일본은 미국과의 강력한 방위체제를 유지하고 미국의 핵 우산속에서 경제성장을 이룩했으나, 시간이 경과할수록 미국과 일본 사이는 틈새가 벌어지고 이것을 기화로 일본은 미국 일변도의 외줄 타기에서 자주적인 독립노선을 택하려 하고 있다. 특히 중국의 성장을 의식해 미국, 일본, 중국이 협력하는 3각 관계를 구상하고 있다. 일본은 경제력에 걸맞은 국제공헌을 명목으로 정치, 군사적 역할증대를 도모하려 한다. 일본은 미국과 중국을 압도하는 현금 동원능력을 바탕으로 아시아에서의 엔블록 구축을 모색하고 있다. 국제사회에서는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도모하고 있으며, 평화헌법 9조를 폐기하고 자위대평화유지군 협력법을 제정하여 국제사회에서 경제강국에 걸맞은 역할수행을 원하고, 종합국력에서 미국, 중국과 맞서는 자기 몫을 차지하려고 한다.중국은 미국과 일본의 동맹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미일동맹이 중국을 겨냥하기 때문이다. 특히 대만문제를 중국은 국내문제로 생각해 미국이 대만을 전략미사일방위체제에 포함시키는 것에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국가의 우선순위를 국방에서 경제로 돌리고, 미국을 위시한 열강에 대해 평화와 발전을 표방하고 냉전시대의 대결구도를 청산하고 평화로운 국제환경을 위해 각국이 발전하고 번영을 도모해야 다.
한반도에서 4강국의 정치적 상관관계- 한국이 취해야할 외교방향 -오늘날 동북아지역은 세계에서 분쟁발생 가능성이 높은 곳 가운데 하나로 인식되고 있으면서도 세계에서 경제발전속도가 가장 빠른 역동적인 지역으로 꼽히고 있다. 이 지역이 제2차 대전 이후 국제정치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의 이해관계가 중첩된 곳이기 때문이다. 이에 그 중심에 위치한 한반도를 중심으로 주변4강국의 정치적 상관관계를 통해 한국이 취해야할 외교방향에 대해 논해보도록 하겠다.오늘날의 국제정치에서 미국은 유일한 패권국가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그 작용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즉 과거의 냉전시기에서의 일방주의와는 다른 양상으로 다자주의로 변하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대외정책의 주요 변화는 안보중심에서 경제적 측면을 중시하고 있고, 국익과 도덕적 가치간의 갈등의 조화에 대한 문제에 직면해있다. 그리고 다자적 접근의 강조로 인해 미묘하고 민감한 쟁점들이 미국의 전유물이 되는 것을 회피하도록 노력하고 있다. 클린턴 정부 당시의 대외정책인 안보보장의 제고 자유무역체제 강화, 대량살상무기 및 생화학테러 방지와 비확산 추구 등에 집중되었는데 상당히 효과적으로 달성하였다. 하지만 부시 정부는 클린턴 정부와는 달리 군사력을 중심으로 한 힘의 중시, 독자주의적 성향, 강대국 정치의 중시와 선택적 개입의 성격을 보다 짙게 띠면서 전개 되었다. 이러한 부시정부의 동북아시아에 대한 정책으로는 러시아에 대해서는 러시아의 자립적 경제체제와 민주주의 원칙을 강조하고 핵무기 감축과 확산문제를 중시 하지만 포용정책의 틀을 유지하려고 한다. 중국에 대해서는 경제 교류를 통해 국제경제 통합을 주장하지만 중국의 잠재력 때문에 동반자라기보다 경쟁자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대중국 인식에서 한국, 일본, 타이완 등과는 안보적 협력을 강화하되, 북한 등에 대해서는 타협보다 힘을 위주로 한 강경책을 전개하고 있다.중국은 냉전시기가 지나고 화해와 협력이 국제관계의 조류로 변화된 지금 중국의 대외정책과 전략도 여기에 맞추어 사상의 해방과 실사구시를 제시하였다. 하지만 중국은 세계의 유일한 초강대국인 미국의 패권적 세계전략 및 대중정책에서 비롯된 국제관계와 양상을 통해 불안감을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중국의 대외정책 및 전략에서 미국의 존재가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는 것은 미국이 지닌 강력한 군사력과 함께 월등한 경제력에서 비롯되고 있다. 현재의 남반구의 빈곤과 북반구의 부로 나뉜 세계 경제의 상황은 자연현상과 미국의 역할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중국은 발전문제를 전인류적 차원에서 인식하여 정책과 전략은 개발도상국들과 상호 협력을 도모하여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의 독선과 폐단을 방지하는데 초점을 두었다. 그리고 중국위협론을 내세우며 압박정책을 전개하는 미국에 대항하기 위한 목적과 일본에 대한 경계심, 베트남, 필리핀 등과의 영유권 분쟁에 대처하겠다는 필요성과 함께 동북아지역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세력균형을 도모하기 위해 군사력을 증강시키고 있다.오늘날 러시아의 대외정책은 냉전체제 해체 이후 겪어야 했던 국제사회에서의 영향력 감소에서 탈피하여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는데 그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다. 이에 러시아는 미국을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는 국제관계의 기본요소들을 변경시키려는 시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즉, 미국이 제3세계 등에서 인도주의적 간섭 가능성에 대해 비판적이다. 이 때문에 러시아는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지역에서의 현상유지를 지지하며, 현상의 급격한 변화에 반대하고 있다. 러시아가 추구하는 동북아 정책목표는 첫째, 동북아지역의 상황전개에 있어서 러시아가 당연히 그리고 가능한 참여함으로써 지역의 안정과 예측 가능성을 높이려 한다. 둘째, 동방국경지대의 안보보장 획득과 장기적인 신뢰 형성을 도모한다. 셋째, 이 지역의 모든 국가들과 정치, 경제적 관계의 확대를 도모한다. 현재 러시아는 미국과 유럽지역에 치중되었던 외교활동의 무대를 동북아, 동남아 및 중동지역으로 확대하면서 강대국 러시아의 위상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일본은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그 대외정책의 근간으로 하여 성공적으로 진행되어왔다. 이러한 성공을 바탕으로 오늘날 일본은 상당히 적극적이고 폭넓은 영향력을 국제정치에 행사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러시아의 사회, 경제적 불안요소와 중국의 고도성장과 함께 군사력 증강을 도모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상황, 그리고 북한의 핵문제 및 경제난에서 파생되는 내부적 위기에 대해 매우 민감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안보적 위협인식은 일본으로 하여금 미국에 대한 외교, 안보적 상호 의존을 심화시키고 있다. 하지만 중국과 러시아와의 경제적 협력을 통해 유대관계를 추구하고 있다. 일본이 가지고 있는 동북아지역의 안보정책에 대한 논리에는 항상 일본의 안보를 지탱해주는 미일안보협력체제가 약화되는 경우 이러한 힘의 공백을 중국이나 러시아가 메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깔려있다. 따라서 가능한 지역 국가들의 군비경쟁을 억제하고 분쟁의 예방을 통해 지역안정을 유지하려는 정책을 전개하고 있다.
Ⅰ. 서 론많은 사람들이 북한정치의 종교성을 감지하며 북한을 신정정치경제라 하기도 하고 김일성 개인숭배의 독특성을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왜 한 나라의 2천만 백성이 그러한 정치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북한 주민의 정신세계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성찰이 필요하다. 이 글에서는 먼저 유교와 무속신앙 등 전통종교가 정치에 미친 영향을 고찰하고, 북한공산체제의 종교에 대한 관점과 정책을 살펴본 후, 김일성과 김정일의 신격화 과정에 나타난 종교와 정치의 관계를 살펴보도록 하겠다.Ⅱ. 종교와 정치의 관계대부분의 전통사회에 있어서, 즉 근대화의 충격을 경험하지 않은 국가들에 있어서 종교와 정치는 언제나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폴 틸리히가 종교는 문화의 내용이고 문화는 종교의 형식이라고 말한 것처럼, 모든 인간은 누구나 어떤 형태로든지 그의 종교를 갖고 있다. 일본의 천황은 신도의 수장으로서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중국의 천자의 주요한 직책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이었다.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의 이슬람은 정치권력의 정통성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고 힌두교는 인도의 정치문화를 형성한 결정적인 요소였으며 간디의 민족주의의 정신적 근간이기도 했다. 즉 전통사회에 나타나는 현상은 정치지도자가 신적인 존재로서 신격화되거나, 제정일치로서 제사장의 역할을 행한다는 사실이다. 정치지도자의 권력은 신비한 초월성, 범인이 감히 도전할 수 없는 신성성과의 관계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1. 전통사회의 종교와 정치관계 유형전통사회에서의 종교와 정치관계 유형은 신격화 유형, 제정일치 유형, 국교 유형의 세 가지로 분리할 수 있다. 신격화 유형은 인성과 신성의 구분이 확실치 않거나 연결선상에 있는 애니미즘, 샤머니즘 다신론, 범신론 등에 나타나는 것으로 정치적 지도자를 신적인 존재로 숭배하는 것이다. 제정일치 유형은 이슬람, 힌두, 유교문화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정치적 통치자가 종교적 제사장의 역할까지도 담당한다. 국교유형에서는 유대교,지배적 영향을 미치는 종교 지배적 정치체제, 세속화가 진척되어 종교가 정치권력의 정통성의 기반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는 종교 중립적 정치체제, 정치권력이 반종교적 이데올로기에 입각하여 적극적으로 종교를 탄압하는 반종교적 정치체제이다.북한은 철저히 종교를 탄압하여 지상에서 종교가 사라진 유일한 나라임을 주장했지만, 표면상 반종교적 정치체제임에도 불구하고 전통사회의 신격화 유형인 인민의 정치문화차원에서 지속되고 있으며 정치권력은 이러한 인민의 종교성을 지도자의 신격화에 의도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세속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종교 지배적 정치체제의 특성을 띠고 있는 것이다.Ⅲ. 북한의 종교와 정치우리의 전통문화에서 일반 백성의 삶에 가장 깊은 영향을 미친 것은 단군이래 전해 내려오는 민간신앙의 주요한 부분인 무속신앙이었다는 사실이다. 조선에 이르러 유교가 국교가 되었으나, 유교는 지배계층의 문화였으며, 배우지 못하는 중산층과 하층에는 무속신앙에 비해 깊이 퍼지지 못하였다. 북한에서는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이후 과거의 적대계층이 되고 과거의 빈농이 핵심계층이 되는 혁명적 변화가 일어났으며, 이것은 북한 인민의 무속신앙적 정서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1. 무속신앙우리나라의 전통사회에서 일반 민중에 깊은 영향을 미친 것은 무속신앙이다. 그런데 남북의 무속신앙에는 차이가 있었으며, 이것이 남북의 정치문화적 차이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무당은 강신무로서 북방계의 샤머니즘이다. 제신이 몸에 내리므로 무당을 만신이라고 부른다. 강신무는 신의 영력을 얻기 위해 제의에서 자신을 신격화해야 되기 때문에 신복으로서의 무복이 발달하여 무 하나가 12~20종의 무복을 입었다. 이에 비해 남한의 세습무는 영력을 소지할 필요가 없었고 신격화의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무복은 2~3종 이다. 즉 북한의 전통사회에서는 무당의 신격화가 드문 일이 아니다.가무에도 남북의 차이가 있었다. 북의 강신무는 징, 꽹과리 등 타악기 위주로 가무의 가락과 속도가 빠르지만 남의 세습무는 그 외에 피리,에는 단군, 주몽, 혁거세, 왕건, 수로왕 등이 있다. 그중 단군신앙은 단군을 태양신으로 혹은 산신으로 숭배하기도 하는 애니미즘이 형태이다.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 전처 김정숙이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찬미되는데, 이것은 성모신 숭배정서와 일치한다. 성모신은 고귀한 신분의 여인으로서 한 나라 시조의 어머니이거나 왕실의 영인 또는 국가나 왕을 위해 큰일을 하고 죽은 자의 부인 등이 사후 신격화된 것이다.이처럼 무속신앙은 초월적 존재에의 의존, 비합리적 신비주의, 운명주의, 접신 등의 초월적 행동을 통해 인간과 귀신을 매개하는 무당 및 점쟁이에 대한 의존을 특성으로 한다. 지도자는 하늘이 내는 사람이며 쉽게 신격화된다. 신내림과 초자연성은 정치권력의 정통성의 기반이었음 신화가 정통성 확립에 주요한 역할을 한다. 권력의 행사는 절대적이다. 이러한 무속신앙은 유교, 불교, 선교와 같은 전통종교와 결합하여 북한의 정치문화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2. 유교(1). 제정일치와 지도자의 가부장적 권위한국의 유교의 경우는 천일합일성, 역경, 이기론 에서와 같이 신성과 인성 사이의 구분이 모호하며, 무속신앙과의 밀접한 관계로 인해 연결소통, 상호보완 등으로 이해된다. 세속주의적이며 인간중심적인 것이 한국유교의 특징이다. 따라서 무속신앙과 결합하여 정치권력을 신격화하는 형태로 나타난다.(2). 정치권력의 정통성정치적 정통성은 물리적 힘뿐 아니라 윤리적 당위성이 중요한 것으로 치리와 명덕을 통해 획득한 윤리적 우월성을 토대로 피치자에게 윤리적 모범이 되어야 한다. 유교국가는 정치공동체이면서 동시에 윤리적 공동체이다. 여기서 유교 공산체제의 지도자들이 한결같이 사상가로 자처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3). 정치권력의 행사정치권력의 행사는 가족의 어버이같은 지도자가 덕치를 이루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권력의 남용을 규제할 장치가 없고 대부분의 지도자가 평범한 인간으로서 권력을 남용하는 경향이 있었기에 유교의 덕치의 이상에도 불구하고 현실정치에 있어서는 전제정치로 회에서 그 정통성을 공고히 하는 방법은 없을 것이다. 정치지도자는 혈연적인 관계로 맺어지며, 설사 권력의 남용이 있어도 거역할 수 없을 것이다.둘째 북한의 집단주의 사상을 강화한다. 사회 전체를 하나의 가족으로서, 김일성을 어버이로서 개념을 조작함으로써 “하나의 전체를 위하여 전체가 하나를 위하여”가 인식되도록 한다. 이러한 개념조작 하에서 개인의 권익의 신장이나 시민사회의 성장은 기대하기 어렵다. 셋째, 사회주의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권력 세습을 정당화한다.3. 일본식민통치의 유산천황을 신격화하는 일본의 신도문화의 지배는 정치권력의 세속화에 전혀 이바지하지 못했다. 그들은 정치권력이 어떻게 신도라는 민속종교를 이용하여 신격화를 강요함으로써 절대적인 충성을 요구하고 억압정치를 하는지 예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북한주민들은 신화와 미신의 민속 신앙적 삶의 형태 속에서 천황숭배를 강요받다가 김일성 숭배를 강요당하게 되는 것이며, 근대민주주의가 탄생할 수 있는 평등, 개인주의, 자유, 권력의 세속화를 전혀 경험하지 못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정치권력의 신격화는 익숙해져 있는 문화여권이며, 오히려 권력의 세속화가 낯 설은 형상일 수밖에 없다.Ⅳ. 북한의 종교관 및 종교정책의 변천1. 김일성 신격화 과정김일성의 신격화과정에서 교리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주체사상이다. 주체사상의 핵심은 수령으로서 주체사상은 수령의 유일사상으로서 수령의 생각과 행동, 지도이념을 반영하는 것이다. 수령은 단순한 정치적 지도자가 아니라 근로인민대중의 최고 수뇌이며 통일단결의 중심으로서 “그 누구도 지닐 수 없는 비범한 예지와 고매한 공산주의 덕성, 한없이 넓은 포용력, 탁월한 영도력을 지니고 근로인민대중의 혁명투쟁 전반을 통일적으로 지휘하는 최고 영도자”로서 정의 된다. 이러한 수령은 정치적 생명을 주는 “생명의 근원”이며 나아가 영생의 근원인데, 여기서 주체사상의 종교성이 출발한다.이러한 수령의 개념은 초기에는 소련의 강한 견제, 소련 내의 우상화 반대 움직임 등으로 본격적인 우는 개헌을 통해 주석제가 신설되어 김일성이 정신적 제도적 측면에서 유일지배체제를 구축하였다. 김일성의 신격화 내용을 보면 역사의 조작을 통해 항일유격활동 지도자로서 신격화가 이루어 졌고, 공산주의 지도자로서의 탁월한 천품이 강조되었다. 한편 김일성의 혁명사상이 그의 가계의 전통을 이어 받아서 나온 듯이 위장하기 위해 가계의 신격화가 이루어졌다.김정일에 대한 신격화 작업은 1980년 10월 제6차 당대회에서 김정일이 정치국 상무위원과 군사위원회 위원 등의 요직을 차지하면서 후계자로 부상하면서 부터이다. “혁명은 혁명전통을 이룬 김일성의 뜻을 아는 그 아들만이 계승할 수 있다”고 주장되고, 김정일이 “향토의 별”로서 부상되었다. 1990년대에 김정일은 인민의 운명을 책임진 혁명의 지도자, 위대한 수령, 친애하는 아버지 등의 호칭으로 불리우게 된다.김일성 사후 김정일의 신격화과정을 보면 탁아소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집중적인 신격화가 이루어지며 특히 김일성 종합대학 역사학부에 속해 있던 혁명력사학과를 김일성학과와 김정일학과로 분리하여 김정일의 위대성을 조작하고 있다. 또한 혁명사적지 조성, 구호나무조작, 전설집 발간, 불명의 꽃이라는 김정일화, 금강산 등 명산에 김정일 어록 및 이름새기기 등으로 상징물을 통한 우상화를 가속화하고 있다.2. 신격화 과정에서의 종교이용(1). 무속신앙적 요소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신격화과정에는 무속신앙적 요소가 다분하다. 그들의 탄생은 초자연적인 신화로 각색되며, 그들은 신출귀몰하는 술법의 소유자로서 김정일의 손길이 닿으면 바다가 옥토로 변하며 발길이 한번 미치면 심산계곡도 낙원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김정일에 대한 다음과 같은 찬사 속에 무속신앙의 신격화(일신, 성신, 장군신, 시조신)와 기타 전통종교의 정서를 발견할 수 있다.- 태양의 위업을 태양으로 이어가시는 위대한 령도자 (일신)- 민족의 향도성 (성신)-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 그 태양빛 이어갈 백두광명성- 비범함 :- 세기의 위인. “하늘이 낸” 절세의 걸출한 위인. 사상리론되었다.
< 냉전기, 탈냉전기의 국제질서 >Ⅰ. 서 론Ⅱ. 냉전기의 국제질서Ⅲ. 탈냉전기의 국제질서Ⅳ. 결 론Ⅰ. 서 론우리는 현재 우리가 전환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말을 듣는다. 국제정치적 측면에서는 냉전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탈냉전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탈냉전기는 과도적인 시대이며 냉전 이후의 시대가 앞으로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인지 누구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현재의 우리가 살고 있는 탈냉전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냉전시기를 이해 할 필요가 있다. 그중에서도 냉전기와 탈냉전기의 국제질서의 변화를 통해 알아보겠다.Ⅱ. 냉전기의 국제질서냉전기는 1945년 제2차 대전의 종전과 함께 형성되었다. 제2차 대전 이전의 국제정치는 영국이 패권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2차 대전을 겪으면서 전쟁의 주 무대인 유럽은 철저히 파괴되었고, 영국 역시 심각한 전쟁의 피해를 입으면서 패권국가로서의 위치를 상실하게 된다. 반면에 제2차 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국의 주역인 미국과 소련은 새로운 강대국으로 떠오르게 된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공동의 적이 사라지자 연합국의 관계에서 경쟁관계가 되었다.)시기기간내 용1시기1945~1955냉전 분위기 형성의 시작과 독일의 NATO가입과 바르샤바조약기구의 설립으로 냉전적 분위기가 하나의 체제로 성립되던 시기2시기1956~1970냉전이 심화되고 냉전체제가 중?소 분쟁, 프랑스 자주외교, 비동맹세력의 부상 등으로 인해 다극화 되는 시기3시기1971~1979닉슨 독트린과 미?중간의 핑퐁외교와 화해, 베트남전쟁의 종결, 카터 행정부의 이상주의적 정책으로 인해 해빙무드가 조성된 시기4시기1979~1989제2의 냉전기, 소련의 아프간 침공, 폴란드 무력 개입 대소 강경 성향의 레이건?부시 정부의 등장 등으로 냉전이 강화된 시기냉전기의 국제질서는 미국과 소련만의 국가 간 대결로 인한 질서가 아닌 전 세계가 이념을 축으로 해서 두 진영으로 나뉘어 대결을 벌이는 것이었다. 서방은 정치적 다원적 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국가 간의 군사관계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같은 다자적 동맹과 많은 쌍무적 동맹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국가 간 경제관계는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을 중심으로 시자원리에 따른 자유무역체제를 지향하고 있었다. 반면에 공산진영은 일당독재의 정치체제와 사회주의식 계획경제를 중심으로 하고 정치군사적으로는 바르샤바조약기구를 중심으로 하는 군사동맹 형성, 경제적으로는 사회주의식 분업구조와 각 국가 사이의 쌍무적인 거래를 특징을 하는 “상호경제원조회의(COMECON)"을 위주로 사회주의권 내부의 경제체제를 형성했다.) 이러한 냉전구도로 미국과 소련은 더 많은 국가들을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 두기 위해 군사적, 경제적 원조와 군사적 실력행사나 전복활동 등을 펼쳐왔다. 즉 냉전기의 국제질서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두 사회체제의 대결이었다.Ⅲ. 탈냉전기의 국제질서탈냉전기의 국제질서는 냉전기의 미국과 소련이 국제질서의 두 중심을 이루고 있던 국제질서는 소련의 붕괴와 함께 심각한 변화를 겪게 된다. 하지만 탈냉전기는 아직도 진행 중이기 때문에 단정적인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다. 하지만 국제질서를 좀 더 세분해서 파악한다면 현재는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미국의 헤게모니가 확립되었고, 경제적으로는 유럽연합, 일본 미국이 세 축을 이루는 다극체제가 형성된 단-다극체제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탈냉전기의 국제질서에 대한 중요한 관심은 미국의 패권이 확립, 유지될 것인가 하는 것이다. 현재 군사적으로 또는 경제적으로 미국이 패권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여러 학자들이 2015년까지 미국의 유일 패권이 유지될 것이고 2015년경에 오면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국가가 등장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그리고 도전 국가로 중국이 될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중국이 빠른 경제성장을 통해 미국의 국력에 필적하는 강대국으로 등장할 것이라는 예측에 근거하고 있다.) 하지만 기술적으로 미국이 그 기준과 운영을 장악하고 있는 인터넷, 혹은 컴퓨터 운영체계를 통해 세계를 지배하고, 국제무역에 대한 기준과 규범을 만들어내고 집행함으로써 세계경제를 자시의 영향력 아래 두고 있으며 또한 민주주의라는 규범을 전 세계에 확산시킴으로써 미국이 원하는 모습으로 전 세계를 변화시키고 있는 것들이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이러한 미국의 계획이 성공적으로 수행된다면 당분간 미국의 패권이 위협받는 것은 불가능 하다고 생각한다. 즉 현재는 미국을 중심으로 국제질서가 유지되고 있다.
《 스리랑카 내전 》- 선포되지 않은 전쟁, 실론섬의 눈물 -목 차Ⅰ. 머리말Ⅱ. 스리랑카의 민족 구성과 지리Ⅲ. 스리랑카의 역사Ⅳ. 스리랑카 내전의 배경Ⅴ. 타밀족에 대한 신할리화 정책Ⅵ. 타밀족의 분리 독립 운동Ⅶ. 인도의 스리랑카 내전 개입Ⅷ. 분리 독립에서 연방제로 선회한 LTTEⅨ. 결 론Ⅰ. 머리말현재 스리랑카에서는 소수 민족인 타밀족이 다수 민족인 신할리 족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분리 독립 운동을 벌이고 있다. 스리랑카 정부군에 대한 무장 투쟁을 주도하고 있는 반군 단체는 “타밀 엘람 해방 호랑이(the Liberation Tigers of Tamil Eelam = LTTE))이다.대륙 탐험 시대 아시아 무역의 대유럽 창구로 크게 부흥했던 콜롬보의 영화를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스리랑카 정부에게 타밀 반군의 분리주의 운동은 결정적인 장애물이다. 그러면 타밀 족들은 왜 분리주의를 고집하는가? 여기에 대한 원인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Ⅱ. 스리랑카의 민족 구성과 지리적도와 북회귀선 사이의 열대 지역에 위치한 스리랑카는 ‘찬란하게 빛나는 섬’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아프리카 남부의 희망봉과 마다가스카르섬을 지나던 유럽 상인들에게 망망대해의 인도양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거대한 섬이 바로 스리랑카였기 때문에 그런 의미를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스리랑카는 인도의 남동쪽에 있는 섬나라로 정식 명칭은 “스리랑카 민주 사회주의 공화국”이고 수도는 콜롬보이다. 면적 6만 5,610㎢로 한반도의 2/3 정도 크기이며, 인구는 1,9463만 명이다. 남북으로 437km, 동서로 225km로 남북으로 긴 서양 배 모양의 지형이다. 지형적으로 크게 중부 고지와 남서부, 동부, 북부 저지의 4개 지역으로 구분된다. 중남부의 고원지대에는 수량이 풍부한 하천과 함께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열대성 기후에 해당하지만 비교적 온화하며 상대 습도는 매우 높다.스리랑카의 주민은 약 74%가 아리아계의 신할리 족이다. 이들은 남서부와 고지에 많이 살고 있으며, 대부분이 했던 스리랑카 타밀 족과 19세기 이후에 이주한 인도 타밀 족으로 분류된다. 전자는 남인도의 촐라 왕조가 스리랑카의 북부를 점령한 시기에 이주한 타밀족의 후손으로, 총인구의 12%를 차지한다. 후자는 19세기 이후 영국이 커피, 차 등의 재식농업을 위해 반강제적으로 이주시킨 타밀족의 후손으로 총인구의 6%를 차지한다. 신할리 족은 기원전 3세기에 불교를 받아들였고, 이후 신할리 족의 대부분이 불교를 믿게 되었다. 11세기에 남인도의 타밀족이 스리랑카에 쳐들어와 신할리 족은 섬의 남부로 쫓겨났다. 신할리 족은 1070년에 타밀족을 물리치고 번영을 누렸으나, 13세기에 다시 타밀 족의 침입을 받아 여러 개의 소국으로 분열되었다.16세기 초 포르투갈 인이 서남 해안에 도착하여 콜롬보를 건설했으나, 17세기에 네덜란드 인이 포르투갈 인을 쫓아내고 콜롬보를 차지하였다. 18세기 중엽 인도에서 세력을 굳힌 영국은 스리랑카로 침략의 손길을 뻗어왔다. 당시 스리랑카의 중앙에는 신할리 족이 세운 캔디 왕조가 있었는데, 영국은 캔디 왕조의 내분을 틈타 1815년에 이를 정복하였다. 이로써 실론 섬은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영국은 스리랑카 인들을 분열시키기 위해 원주민인 신할리 족보다 타밀족을 우대하는 정책을 실시하였고, 이에 따라 타밀족은 시민권 행사나 각종 전문적인 업종의 취업에서 신할리 족보다 훨씬 좋은 대우를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8년에 스리랑카가 독립하게 되자 신할리 족과 타밀족 간에 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한편 스리랑카 타밀족과 인도 타밀족은 문화적, 경제적 차이로 인해 동질감이 비교적 약하며, 거주 지역도 다르다. 스리랑카 타밀족은 주로 자프나를 중심으로 하는 섬의 북부 및 동부에 거주하고, 인도 타밀족은 자농장이 집중 분포하는 중부의 고지대에 살고 있다.Ⅳ. 스리랑카 내전의 배경스리랑카가 독립하기 전에는 불교도인 신할리 족과 힌두교도인 타밀족과의 대립과 갈등은 그렇게 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카스트 제도 내의 사회집단 간의 갈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즉, 대하였다.이처럼 1950년대 말 이전의 스리랑카에서는 종교적, 민족적 대립보다는 계층, 계급간의 불화와 갈등, 대립이 더 심각한 문제였다. 그렇다면 종교 생활을 비롯한 사회생활에서 타밀족과 신할리족과의 대립과 갈등이 그렇게 큰 의미를 갖지 않았던 스리랑카에서 어떻게 해서 민족 간 갈등이 증폭되었는지 그 배경을 명확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Ⅴ. 타밀족에 대한 신할리화 정책스리랑카의 독립 운동은 대중적인 지지 기반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1947년에 인도와 파키스탄이 독립하면서 1948년 2월 스리랑카도 독립을 이루게 되자, 통일 국민당(UNP)의 보수당이 출범하여 정권을 장악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후 스리랑카에서는 통일 국민당과 스리랑카 자유당(SLFP)이라고 하는, 신할리 족 중상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2개의 정당이 서로 교대로 정권을 장악하였다. 통일 국민당은 친영, 친서방 색채가 강한 반면, 자유당은 신할리 민족주의에 입각하여 사회주의 국가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중시하는 정책을 펼쳤다.자유당을 창립한 반다라나이케는 1956년의 총선거에서 신할리 어를 스리랑카 유일의 공용어로 채택하는 공약을 내세워 급진적 불교도와 제휴함으로써 통일 국민당을 누르고 정권을 잡게 되었다. 이로써 스리랑카에서는 반다라나이케를 총리로 공산당 등 좌익 정당과 손을 잡은 최초의 좌익 연합 정권이 탄생하였다. 이 좌파 연합 정권은 외부적으로는 비동맹 외교 정책을 전개함과 동시에 내부적으로는 강력한 신할리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신할리어가 공약대로 유일한 공용어가 되고, 신할리 족이 군대, 경찰을 포함한 전 행정 조직을 거의 완전하게 독점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책에 대해 독립 후 계속 자치권을 주장해 온 스리랑카 타밀 족 이 반발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958년 타밀 족과 신할리 족 사이에 최초의 민족 분규가 일어났다. 그러나 반다라나이케 총리는 1959년 타밀 족과 타협했다는 의심을 받고 급진적 불교도에 의해 암살을 당하였으며, 자유당은 그의 부인인 시리마보가 이끌게 되었다.Ⅵ. 타부군을 습격하여 신할리족 병사 13명을 살해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이로 인해 수도 콜롬보 시에서는 신할리 족에 의한 무차별 보복전이 개시되어, 타밀족 정치범 52명이 옥중에서 학살된 것 외에 타밀계 주민의 상점이나 주택이 신할리족 폭도의 공격을 받았다. 이때 콜롬보 시에서만 약 10만명의 난민이 발생하였다. 1983년 7월의 폭동 이후 통일 국민당 정부가 타밀족 온건파 정당인 “타밀 통일 해방 전선(TULF)”을 불법화시키고 무력에 의한 해결을 시도하자, 타밀족 조직 가운데서도 가장 급진적인 LTTE가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Ⅶ. 인도의 스리랑카 내전 개입스리랑카 섬에서는 신할리 족이 압도적인 다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스리랑카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해안에는 인도 대륙이 존재하며, 그 남부에는 수천만 명의 타밀 족이 거주하고 있다. 그러므로 일부 신할리 족들은 자기들이 오히려 소수 민족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역대의 신할리 족 정권은 스리랑카 국내의 타밀 족 분리운동이 인도 남부 타밀나두주의 정치 세력과 연결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러나 스리랑카 정부는 타밀족을 박해하고 차별하는 정책을 취하자 다수의 타밀족 난민이 포크 해협을 건너서 인도의 타밀나두 주로 피신하였고, 이는 인도 정부가 스리랑카 민족 분쟁에 개입할 수 있는 구실을 마련해 주었다. 인도는 동족 문제라는 명목 하에 무력을 행사하여 스리랑카 정부에게 타밀족 문제 해결을 위한 협정을 체결하도록 강요하였다. 즉 1987년 초 통일 국민당정권의 자프나에 대한 경제 봉쇄, 5월의 정부군에 의한 총공격으로 양국 관계가 긴장상태에 놓였으나, 7월에는 양국 정부 사이에 인도, 스리랑카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다.이 협정에서 스리랑카 정부는 타밀 족이 다수를 이루고 있는 북부와 동부의 잠정적 통합 및 이들 지역에 대한 자치권 부여를 약속하였다. 그 대신 인도 정부는 타밀족 무장 조직의 무장해제를 보장하여 스리랑카 민족 분쟁은 끝이 나는 듯하였다. 그런데 인도 정부가 강경파 타밀 게릴라들을 무장 해방제로 선회한 LTTE현재 스리랑카 정부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신할리 족 불교도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그러나 신할리 족이 스리랑카의 분할을 수용할 기미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또한 타밀족 강경파는 머지않은 장래에 어떤 형태로든 분리 독립하여 타밀족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단호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1995년 스리랑카 정부는 타밀족 반군에게 중앙 정부의 권한을 지방에 대폭 이양하는 연방제적 성격을 가진 평화안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LTTE는 이를 거부하고 자살 테러를 벌였다. 정부군은 반군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펼쳐, 1996년 5월에는 LTTE의 최대 거점인 자프나 반도를 장악하였다. 그러나 정부군의 자프나 반도 확보에도 불구하고 내전 상태는 계속되었다. 오랜 내전으로 타밀족과 신할리족의 반목이 더욱 심해진 데다가 반군 게릴라들이 타밀족 밀집 지역인 동북부로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내전이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5만여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수도인 콜롬보 인근의 커다란 피해를 보았다.미국은 1997년 10월에 LTTE를 불법 단체로 규정했고, 스리랑카 정부도 1998년 1월에 LTTE를 불법 단체로 규정하고 자국 내 활동을 금지했다. LTTE는 이러한 조치에 반발하면서 오히려 테러 행위을 강화했고, 1998년부터 1999년까지 수백 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 예로 1998년 3월 5일 스리랑카 콜롬보의 번화가에서 폭탄을 터트려 30명 이상을 숨지게 하고, 250명에게 중상을 입힌 사건을 들 수 있다. 그로 인해 8월 쿠마라퉁가 대통령은 전국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LTTE소탕에 전력을 다했지만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정부와 반군 간의 전투가 지속되자 정부는 러시아, 이스라엘, 파키스탄, 우크라이나 등지로부터 다량의 신형 무기를 도입하여 반군의 주요거점에 대한 공세를 더해 갔고, 이에 반군의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다.2000년 5월 15일 북부 도시 자프나 공격에 이어 6월 7일 자살 폭탄 테러가 일어나, 구네라트네 산업부 장관 등 23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