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연극일본의 전통예능에는 노(能), 교겐(狂言), 분라쿠(인형극),가부키(歌舞伎)가 있다.1. 노(能)노 에서는 무대와 등장인물, 등장인물이 등장시의 동작과 걸음걸이가 특이하다. 노를 걸음걸이의 예술이라고도 한다. 노배우의 특유의 걸음걸이를 노사바키라고 한다. 노는 가면극으로서 가면의 각도에 따라 여러 가지 다양한 표정이 나온다. 연극에 있어서 정해진 공식처럼 움직인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움직임을 마이 라고 한다. 노에서의 말은 고어를 사용하고, 실내극장에서 관객들에게 대본을 주고 불을 켠채 그냥 연극을 한다. 노의 분위기는 진혼의 내용을 다루는 것이기에 엄숙하다. 노 사이에는 교겐 이 중간중간 들어가서 분위기를 부드럽게 한다. 최근에는 교겐만을 하는 경우도 많다. 노는 노래, 가면, 무용이 일체된 것으로 600년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커튼도 없고 관객과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노는 사실적 연극이 아니므로 무대장치가 별루 없기 때문에 관객이 상상으로 무대를 만들어야 한다. 일본의 미타테문화에서 알수 있듯이 배우가 들고 있는 부채가 칼이 될 수도 있고 잔이 될 수 도 있다. 주연은 가면을 쓰고 천천히 움직이기에 극적인 요소는 적다.노 란 글자에서 알 수 있듯이 연기를 할 때 talent적인 기질을 발휘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농악과 비슷한 덴가쿠에서 출발하였는데 이때는 빠른템포였으나 현재는 대체로 느린템포로 변화되어 연극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빠른템포의 것도 여전히 있다. 노의 이전형태로는 덴가쿠, 사루가쿠라는 것이 있다.사루카쿠란 笑적인 요소를 지닌 동작이 있는데 이를 연극적으로 한게 사루가쿠노노이다. 사루가쿠노노에서 제의적 종교적 요소를 연극으로 한 것이 바로 노가 된다.노의 무대는 사각형의 무대와 통로무대(하시가카리)가 있다.통로무대에는 이찌노마쓰, 니노마쓰, 산노마쓰인 소나무가 서있다.이쯔노마쓰에서 자기소개가 이루어진다. 무대에는 악단들이 노의 음악을 연주하는데 피리(후에.笛), 소고(고즈쓰미,小鼓), 오-쓰즈미(大鼓), 라이코가면의 좁은 틈을 통하여 보기 때문에 그 시야가 좁다. 따라서 기둥은 배우가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는 표시역할을 한다. 무대한편에는 지우타이, 즉 합창대가 있다.노의 대본은 요-쿄쿠 라고 하는데 알아듣기 힘들다. 의성어,의태어들은 관객이 미리 어떠한 소리인지를 알아야 한다.노의 가면은 특정한 역할을 규정한 것이 아니고, 하나의 가면을 여러 가지 주제나 역할에 따라서 구별해서 사용하고 있다. 노는 극도로 추상화된 연기자의 동작과 단조로운 음악이 합쳐져서 독자적인 예술미를 발휘한다.노의 전개방식은 조(전개)-하(발전)-큐(클라이막스)로 전개되어진다.노는 14.15세기에 제아미에 의하여 원래야외에서 공연되던 조잡한 여흥에 불과하던 것을 매우세련되고 양식화된 형태로 다듬어 오늘날 실내의 빈 무대위에서 펼쳐지는 비극적 환상으로 완성되어졌다.Zeami Motokiyo는 일본의 셰익스피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이다. 많은 작품들을 써서 [노] 드라마의 발전에 크게 기여를 하였다.음악, 춤, 대사, 가면, 그리고 매우 화려하고 아름다운 의상이 어우러지는 [노] 드라마는 느린 템포와 매우 정적인 무대 장치로 인하여 현대의 관객에게는 매우 지겹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노] 드라마의 의미는 바로 이처럼 시대적 경향을 역행하는 듯한 느린 템포와 단조로움에서 찾을 수가 있다. [노] 드라마에서는 시간이 너무도 느리게 흘러 시간의 흐름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멜로디가 거의 없이 반복되는 음악, 조명변화가 없는 단일한 무대장치, 상징적인 동작과 춤 등이 [노] 드라마에서의 마술적이고 감동적인 순간을 자아내게 하는 요인들이다. [노] 드라마는 매우 오랜 전통을 지닌 예술로서 주로 짝사랑이나 매우 추상적이고 애매한 유령이야기등을 소재로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자기, 다도, 꽃꽂이 등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매우 일관성있고 진실되며 섬세하고 다양한 의미를 지닌 예술형태로 일본 사회에 굳건히 자리잡고 있으며 세계적으로도 가장 세련된 연극 예술의 한 형태로서 인정을 받고 있다교다. Zeami는 선불교의 영향을 받아 진정한 아름다움은 암시, 단순성, 미묘함과 절제에서 나온다고 결론지었다. 이같은 Zeami의 이론과 연극적 실천 덕분에 대부분의 [노]는 어떤 과거의 사건에 대한 회상을 통하여 감정적 상태나 분위기를 자아낸다. [노]는 기본적으로 이야기storytelling이 아니다. 쓰여진 대본은 서구적 기준으로 볼 때 매우 짧다. 그러나 공연은 두 시간 또는 그 이상 걸린다.[노]는 다섯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신들에 대한 이야기, 무사들에 대한 이야기,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 미친 사람들이나 귀신들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악마들과 초자연적인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들이다.[노]에서의 등장인물은 몇 명 안된다. 주인공인 sita, 그리고 조역인 waki가 있고 이들 각각에게는 tsure라고 불리우는 한두명의 시종들이 따른다. 모든 배우들은 남자들이다. 의상은 수세기전의 전통의상을 본딴 것으로 디자인이나 색상이 매우 화려하다.Sita와 그의 시종들은 색칠한 나무 가면을 쓰고 있다.무대는 전통적으로 매우 정형화되어 있다. 두 개의 주된 연기지역이 있다. butai라는 중심연기 지역과 hashigakari라는 다리가 그것이다. 뒤쪽의 건물과 연결되어 있으며 건물과 마찬가지로 지붕이 씌여져 있다. 무대 지붕은 네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는데 각각 이름과 씌임새가 다르다. 다리 앞에는 세그루의 소나무가 있다. 각각이 하늘, 땅, 사람을 상징한다. 악사들뒤쪽의 벽에는 소나무 한그루와 대나무가 그려져 있다. 그외 무대장치는 전혀 없는 빈무대다.무대 소품들은 매우 간단한 것들로서 대나무로 만든 조그만 구조물들이다. 이들은 경우에 따라서는 집, 산, 수레, 배 등을 나타낸다. 부채는 가장 중요한 소품이다. 바람, 물결, 달이 뜨거나, 비가 내리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고 그외 매우 미묘하고 섬세한 감정들을 표현하는데 쓰인다.Matsukaze에서 보듯 [노]는 서양적인 관점에서의 연극적인 효과에 대해 의문을 갖게 만든다. [노]에서는 이야기의 전개, 인물의 성격development, climax 등으로 나누어 살펴 보면 음악의 구성과 매우 유사하다.2.교겐교겐은 특별한 경우를 빼고는 가면을 쓰지 않은채 공연된다. 교겐은 대사극에 속한다. 교겐은 노무대를 그대로 사용하고 가면을 쓰지 않으며 대사와 몸짓으로 이루어진다. 오노마토페, 즉 의성어와 의태어는 장치를 통한 효과음이 아니라 연기자들이 직접 입으로 효과음을 낸다. 장소이동도 말로써 이루어지는데 예를 들면, 주인공이 한바퀴 휙 돌면서 도쿄에 왔네 이런 말한마디를 통해 장소가 도쿄로 이동하였음을 나타낸다.교겐은 역사는 오래되었지만 현대연극과 비슷한 점이 많다. 즉 교겐의 내용은 시원한 풍자가 들어있는 웃음의 연극, 웃기는 예술이라 할 수 있다. 노 상연뒤에 반드시 교겐이 뒤따르는데 노가 탈을 사용하는 가무극인데 비하여 교겐은 대사오 몸짓만으로 이루어지낟. 노는 옛 이야기나 설화에서 소재를 구하고 이름난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지만, 교겐은 무명 인물이 등장하며 일상생활에서 주변에 일어나는 사건들이 전개된다. 노는 차츰 비극적이고 상징주의적인 가무극으로 변화했고 교겐은 희극적이고 사실주의적인 대화극으로 변화했다.교겐은 익살과 해학적인 요소만을 따로 떼어 만든 대사극으로 노와 함께 프로그램속에 끼워넣어 번갈아 가면서 공연을 한다. 노가 장중하고 유연한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것과는 달리 교겐은 즐겁고 익살적인 풍자와 웃음을 다루고 있다.*노와 교겐의 비교*1. 등장인물노의 등장인물은 영(혼), 귀인이며 교겐의 등장인물은 동물, 곤충, 서민 등 다양하다. 노의 등장인물은 몇 명 되지 않는데 주인공인 시타. 조역인 와키가 있고 이들 각각에게는 한두명의 시종이 따르며 모두 남자배우들이다.[노] 드라마는 매우 오랜 전통을 지닌 예술로서 주로 짝사랑이나 매우 추상적이고 애매한 유령이야기등을 소재로 하고 있다.2. 내용노는 진혼을 주제로 하는데 매우 오랜 전통을 지닌 예술로서 매우 추상적이고 애매한 유령이야기들을 소재로 한다. 교겐은 웃음이 나오는 풍자를 하므로 엄숙한 분위기의 노사이에 향상시켜 그 지위를 굳혔다. 교겐은 작자미상이며 중간중간 연기자에 의해 고쳐진다.3.분라쿠분라쿠는 사람이름이다. 우에무라 분라쿠겐이란 사람에 의해 닌교조루리가 크게 부흥되었는데 후에 그의 제자들이 인형극 전용극장을 개설하여 이름을 분라쿠좌 라고 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닌교조루리는 분라쿠라고 불리게 되었다.분라쿠는 인형과 조루리(서사적 노래이야기), 샤미센이 통일을 이루어야 하기에 에드립을 할 수 없으므로 극작가의 대본대로 잘 지켜서 해야 한다. 즉 분라쿠에는 인형을 움직이는 사람과, 이야기를 말하는 사람(타유우), 샤미센 연주자 가 필요하다.인형은 인형을 움직이는 인형사에 의해 움직여지는데 모두 세명이다. 경력이 오래된 순으로 머리와 오른팔담당, 왼팔담당, 다리담당 이렇게 세명이 함께 인형을 움직인다. 주조종자(오모쓰가이)는 머리와 오른팔을, 좌측조종자(히다리쓰카이)는 왼팔을, 다리부조종자(아시쓰카이)는 다리를 움직인다. 각 단계당 10년의 수련기가 필요하다.하나의 인형을 세 명이 조종한다.조루리는 장단에 맞춰 음조림을 말하며 샤미센은 세줄로 된 일본의 전통기타로 분라쿠의 음악을 담당한다.인형의 움직임이 매우 사실적이며 캐릭터를 과장하지 않고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분라쿠는 17세기 초기에 1명이 움직이는 소박한 형태에서 정교하게 되었다. 닌교조루리는 17세기 초 에도시대때 풍속의 형태로 등장하였다.분라쿠는 메이지시대 이전까지 닌교조루리라고 불리었다.분라쿠의 대표적인 작가는 일본의 셰익스피어라고 불리우는 지카마쓰 몬자엔몬이다. 지카마쓰 몬자엔몬은 닌교조루리와 가부키를 하였는데 중점을 두고 한 것은 닌교조루리였다. 그 이유는 가부키는 배우중심으로 행해져 극본대로 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닌교조루리의 경우 인형과 조루리, 샤미센이 통일을 이루어야 하므로 극작가의 극본대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카마쓰 몬자엔몬의 첫작품은 1703년도의 소네자키신주 였다.소네자키신주는 동반자살이란 뜻으로 주인공인 도쿠베와 오하쓰가 소네자키라는 숲에서 동반자살을 한다는 내용이다. 간장가게
. 세익스피어잉글랜드에서 중상류 상공인의 아들로 태어난 세익스피어는 당대 교육기관으로서는 특수층 자제만이 다닐 수 있는 그래머 스쿨에서 라틴어를 익혀, 서양의 고전을 섭렵할 능력을 갖추게 되어 그의 천재성을 싹틔울 수 있었다.극작가로서의 셰익스피어의 활동기는 1590-1613년까지의 대략 24년간으로 볼 수 있으며, 이 기간에 그는 모두 37편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작품을 시기별로 구분해 보면, 초기의 습작적 경향이 보였던 시기, 영국사기를 중심으로 한 역사극에 집중하던 시기, 그것과 중복되지만 낭만희극을 쓰던 시기, 그리고 일부의 대표작들이 발표된 비극의 시기, 만년에 가서는 화해 경지를 보여주는 이른바 로맨스극의 시기로 나눌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이러한 시기적 구획이 다른 어느 작가보다도 뚜렷하게 구분되는 것이 특징이기도 하다.. 세익스피어의 비극세익스피어의 비극에서는 늘 고위의 인물이 다루어지고 있다. 지도자, 왕이나 왕자, 귀족의 자녀 같은 인물들이 그 예인데 적어도 그들 상호간의 사적인 충돌이 공공의 사건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이것은 중세의 비극적 사실에 바탕을 둔 것으로, 중세의 비극적 사실이란 귀족 등의 고위의 인물에게 뜻하지 않게 부닥치는 운명의 격변을 다루고, 이로 인하여 동정과 연민을 호소하게 하는 동시에 또 하나의 감정 즉, 공포와 전율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저마다 일반인과는 다른 위엄과 위대성을 지니고 있으며 또 그들의 운명은 한 나라의 행복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사사로운 개인의 이야기와는 성질이 다르다.그리고 세익스피어의 비극에서의 비극의 고난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에서 시작되고 발전하게 된다. 우리 인간은 분명 어떤 환경 속에 놓여 있다. 그리고 그 환경 속에서 성격의 상호작용이 어떤 행위를 낳게 되는데, 한 행위는 다른 행위를 낳게 되고 또 그것은 제 3의 행위를 낳게 되어 나중에는 불가항력의 파국으로 발전되는 것이다. 이 경우 세익스피어의 주인공은 자신의 파국이나 죽음에 상당히 책임이 있는데 본질적인 요소이다.. 세익스피어의 5대 비극. 햄 릿{"To be or not to be : that is the question"What a piece of work is a man"Alexander died""The rest is silence". 줄거리덴마크의 왕자 햄릿은 어머니 거투르드가 아버지인 선왕 햄릿이 죽은 지 석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아버지를 이어 왕이 된 작은 아버지 클로디어스와 결혼을 함으로서 극심한 슬픔과 우울증에 사로잡혀 어머니의 빠른 재혼을 욕정의 산물로 보고, 이를 근친상간의 죄로 규정하며 추악한 세상을 한탄한다.그러던 중 성을 지키는 병사들 앞에 죽은 선왕의 유령이 나타나고, 햄릿은 친구인 호레이쇼의 도움으로 성벽 위에서 선왕의 유령을 만난 현왕 클로디어스가 왕권과 왕비를 탐하여 아버지가 잠자는 틈을 타 귀에 독약을 흘려 넣어 왕을 독살했다는 엄청난 사실을 듣게 된다.복수를 맹세한 햄릿은 분명한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마침 당도한 연극 배우들을 동원하여 아우가 권력을 탐하여 형을 독살하는 연극을 연출한다. 연극을 보고 당황하여 괴로워하는 클로디어스를 보고, 햄릿은 그의 범죄를 확신하지만 그는 복수의 기회를 잡지 못하고 갈등과 고통을 겪는다. 그러던 중, 그는 휘장 뒤에 숨어 자신과 어머니의 대화를 엿듣는 왕의 신하 폴로니어스를 왕으로 착각하여 죽이게 된다. 이 일을 계기로 클로디어스는 눈의 가시인 햄릿을 영국으로 보내어 죽게 하려는 음모를 꾸민다.햄릿의 애인 오필리어는 아버지 폴로니어스의 죽음과 햄릿의 추방으로 인해 미치게 되고, 결국 물에 빠져 숨을 거두고 프랑스에 유학을 가있던 폴로니어스의 아들 레어티즈는 아버지의 죽음을 듣고, 복수를 위해 덴마크로 달려온다. 클로디어스로부터 아버지를 죽인 자가 햄릿임을 알게 된 레어티즈는 햄릿을 죽이기 위해 클로디어스와 공모한다.배를 타고 영국으로 가던 햄릿은 우연히 클로디어스의 밀서를 읽고 그의 음모를 알게 되고 때마침 햄릿은 해적의 습격을 받아 영국으로 가지 못하고, 다시 덴마크로 돌아온다보던 왕비 거투르드는 클로디어스가 햄릿을 위해 준비한 독배를 마시고 죽고, 죽어가는 레어티즈로부터 모든 음모를 들어 알게 된 햄릿은 마지막으로 클로디어스를 독칼로 찌르고, 자신도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한다..감상 및 문학사적 의의이 작품은 중세이래 덴마크 사람들에게 구전되어 내려오던 슬픈 왕자의 전설을 소재로 한 작품인데, 해석하는 관점에 따라 복수비극, 성격비극, 사랑의 비극, 문제 비극, 정치비극이라고 다양하게 불릴 수 있다. 한가지 놓칠 수 없는 것은, 복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는데도 햄릿이 머뭇거리면서 결행하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 있었냐는 것이다. 이 문제가 오늘날까지도 가장 논쟁의 표적이 되고 있다. 그 점에 대해 햄릿이 사색적일 뿐 성격의 담대성이 없었다는 성격적 무능성, 삶에 대한 비판 의식이 너무나 예리해 행동이 미처 따르지 못했다는 비관론, 또는 도탄에 빠진 덴마크를 우선 구해야 되겠다는 구국 사명설, 햄릿은 복수를 부도덕이라고 치부하여 고민에 빠졌다는 양심설, 심지어 숙부이지만 지금은 부왕이 된 왕에 대한 시기심으로 어명에 복종하고 싶지 않았다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설 등 매우 다양하다. 이처럼 햄릿이라는 인물의 특징은 19세기이래 돈키호테의 행동형과 대조되어 문학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맥 베 드{"To-morrow, and to-morrow, and to-morrow".줄거리스코틀랜드의 무장 맥베스는 마녀의 예언에 현혹되어 기승을 부리는 부인과 공모하여 자기의 거성을 방문한 국왕 던컨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다. 그리고 그 자손이 장차 왕자가 된다는 예언을 믿고, 친구 뱅코 부자의 암살을 계획하지만 그의 아들은 도망친다. 맥베스의 폭정을 저주하는 소리가 전국에 퍼지고 반란이 일어나자 맥베스는 다시 마녀를 찾아가 예언해줄 것을 요구한다. 마녀는 버넘의 숲이 그의 성을 공격하지 않는 한 안전하며, 여성으로부터 출생한 사람은 결코 그를 패망시킬 수 없다고 예언하였다.그러나 던컨왕의 유아 맬컴을 추대한 맥더프 비극 중 가장 마지막 작품인 이 작품은 스코틀랜드 역사극에서 모티브를 취한 것으로 외형상으로 볼 때 가장 짧으며 단일한 내용, 급속한 전개로 이루어져 있으며, 공포와 절망 속에서 죄를 더해 가는 주인공의 내적 갈등과 고독이 표현되어 있는 대사의 시적 완성도가 높은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그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작중인물들에 대한 심리적 경향이 매우 특이하게 표현되고 있는데, 주인공인 맥베드와 그의 부인에 대한 성격묘사가 그러하다. 맥베드는 애초에 야심은 있었지만 이를 실천할 능력이 부족하고 마음이 약하여 고민한다. 한마디로 맥베드의 비극은 야심의 비극임과 동시에 양심의 비극이다. 장군인 맥베드가 던컨왕을 죽이고 왕관을 쓰지만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양심의 반격과 신하들의 반란으로 무참히 죽는다는 인과응보의 비극이다. 이처럼 인간이 자기분수에 넘어 지나친 야심을 갖게 되면 이것이 바로 인간파멸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오 델 로{"Our bodies are our gardens""Chaos is come again".줄거리베니스 공국의 원로 브라반시오의 딸 데스데모나는 흑인 장교 오델로를 사랑하여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한다. 때마침 투르크 함대가 키프로스 섬을 향한다는 보고를 받고 오델로는 그 섬의 수비를 위해 아내를 데리고 키프로스로 출발한다. 오델로의 기수 이아고는 바라고 있던 부관 지위를 카시오에게 빼앗기자 앙심을 품고 두 사람에게 복수를 계획한다. 커프로스 섬에 도착한 날 밤 이아고는 주정이 심한 카시오에게 일부러 술을 마시게 하고 소동을 일으키게하여 오델로로부터 파면당하게 하는 한편, 데스데모나를 통해 카시오의 복직운동을 하도록 권유한다. 그 뒤 오델로에게는 카시오와 데스데모나가 밀애중인 것처럼 보고하고, 오델로가 그녀에게 주었던 귀한 손수건을 아내 에밀리아를 시켜 훔쳐오게 하여 나시오의 방에 떨어뜨려두고 거짓 증거를 만든다. 인간심리의 약점을 이용한 이아고의 교묘한 거짓말을 믿어버린 오델로는 데스데모나를 침대 위에서를 죽인다. 그러나 오델로의 영혼을 어둡게 했던 절망은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비로소 구제된다. 그가 데스데모나가 목숨이 다할 때까지 오직 자기만을 사랑했다는 것을 각성했을 때 오델로는 사랑의 살인자인 이아고에게 승리하는 것이다. 즉, 절망 속에서 죽은 맥베드와는 달리 오델로의 죽음은 죽음으로써 영혼을 구제받고 있으며 그를 사로잡고 있던 질투의 올가미를 벗어나 깨끗한 영혼의 소유자가 된 것이다.. 리 어 왕{"Have more than thou showest""Plate sin with gold".줄거리리어왕은 노쇠하여지자 세 딸 - 고네릴, 리건, 코델리아 - 을 불러 효심에 따라 땅을 분배하고자 한다. 아부를 하여 땅의 1/3씩을 받은 언니들과 달리, 진실한 막내 딸 코델리아는 과장된 효심을 보이지 않아 추방당한다. 그런데 두 딸들은 땅을 받게 되자 아버지를 잘 모시기는커녕 학대를 하고, 이에 리어왕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광야에서 딸들의 배반으로 괴로워하여, 헤매며 광란한다. 프랑스 왕비가 된 코델리아는 부왕의 참상을 듣고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군을 이끌고 영국으로 가지만 리어왕과 함께 포로가 되어 죽는다. 리어왕은 딸의 주검을 보고 슬퍼하여 절명한다. 두 딸은 불륜의 사랑으로 신세를 망쳐 독약을 마시고 죽는다..감상 및 문학사적 의의세익스피어는 이 작품에서 아버지와 자식간의 애정과 신뢰에 관한 문제를 다원적으로 전개시키고 있다. 등장 인물은 어느 정도 보편성을 띠어, 충성과 미덕의 인물(켄트, 글로스터 백작, 셋째딸), 그리고 배은과 악덕의 인물(에드먼드, 첫째, 둘째딸)을 극 속에서 볼 수 있다. 리어왕의 처절한 비극의 원인은 무엇보다도 지혜의 부족이다. 한 국가의 왕에게는 가식과 진실, 명과 암을 구별할 수 있는 명철한 지혜가 요구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분별력이 결여되어 비극의 원인을 자초했다. 결국 리어왕이 광증에 빠져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황야에서 헤매는 모습은 글자 그대로 참담하다. 그가 황야에서 보고들은 것은 천둥소리와 번갯불이며 비바람과 무한히 펼다.
목차1. 서론2. 4·19혁명의 성격3. 4·19혁명의 원인과 배경1)사회적 원인과 배경2)경제적 원인과 배경3) 정치적 원인과 배경4. 4·19 혁명의 전개과정5. 4·19혁명의 의의과 한계1)의의2) 한계(1)계층적 한계(2)사상적 한계(3)조직적 한계(4)구심체의 결여6.결론1. 서론대한민국헌법전문에서 보면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란 부분이 있다. 헌법전문에서 4·19정신을 명시적으로 기리고 있는 바와 같이 4·19혁명은 한국투쟁사의 시발점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4·19혁명이란 명칭도 5·16군사 쿠데타정권 당시 의거 로 규정되어지고 전두환정권 당시에는 의거 마저 헌법전문에서 삭제되었던 것이 문민정부(김영삼정부)에 들어와서야 학자들의 검증을 거쳐 혁명 으로 헌법전문에 다시 명문화 되었다. 후대에까지 그 정신이 널리 이어져 가는 4·19혁명에 대하여 좀 더 알아보자.2. 4·19혁명의 성격4·19혁명은 옆으로의 혁명 에 해당한다. 이는 위로부터의 혁명과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단행할 만한 존재가 없을 때, 주로 민중의지지 아래 지식계층에 의하여 단행되는 혁명이다.4.19혁명은 민중의 직접적 행동에 의해서가 아닌 소수의 지식계층과 학생들에 의해 주도된 혁명으로서 제 1공화국 당시 자유당 정권의 부정 부패와 독재, 이승만이 장기집권을 위하여 행한 3·15부정선거에 항거하여 전국의 학생들이 일어나 자유와 정의를 쟁취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4.19혁명으로 이승만의 장기집권의 꿈은 사라지고 자유당정권의 장기집권이 종식되고 제2공화국이 출범하게 되었다. 혁명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헌정체제의 변혁하고 정권을 교체하였다.3. 4·19혁명의 원인과 배경1)사회적 원인과 배경당시 사회는 농촌 경제의 파탄으로 인하여 인구가 도시로 모여드는 현상이 나타났다. 여기에남하한 500만 북한 피난민은 생활기반을 갖추지 못하였고 상이군경, 전쟁 미망인, 제대군인 , 실업자 등도 급격하게 늘어갔다.2)경제적 원인과 배경6·25로 인하여 기간산괴되어 생활물자가 부족해지고 정경유착, 부정부패가 만연 하고, 경제질서는 파괴되었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의 심화로 인하여 민중들의 마음은 자유 당 정권에 대하여 돌아서고 있었다.4.19전야의 한국경제는 그야말로 끝을 향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일반국민, 특히 농민과 도 시의 영세민, 고등실업자들은 보리고개와 쌀고개를 겪으며 굶주림에 시달렸다. 반면 정치권 력과 결탁한 매판자본가들과 정치권력을 장악한 정치관료들은 서구에 기생하여 고도로 서구 화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상대적 빈곤의식이 점점 극심해지고 인플레이션의 누중, 조 세 부담률 증가 및 실업률 증가, 특히 고급인 력의 취업률 저하로 상대적 비곤이 더 더욱 심 화되었다. 이러한 점들이 혁명의 원인이 되어 학생과 민중들로 하여금 저항의식을 가지게 했 다.3) 정치적 원인과 배경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의 지지와 신망으로 대통령이 되었으나 이러한 국민의 지지와 신망은 그로 하여금 오만과 카리스마적 권위의식만을 심어주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보다 강 화하고 오래 유지하기 위해 온갖 비리를 서슴없이 저지르기 시작하였다. 자연스레 그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는 떨어져 갔다. 더욱이 6.25전쟁이 발발하자 자신만 살기위해 피난을 가서 국 민들의 원성을 듣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권력 강화수단으로 친일파로 구성된 자유당은 1951 년에 만들었다.1952년에는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위하여 정치공작을 벌이고 1954년 11월에는 자신의 종신집 권을 위하여 헌법의 중임제한조항을 없애는 개헌안을 국회에 상정시켜 소위 사사오입개헌 을 단행하였다. 1956년 5.15정부통령선거에서 민주당 신익희후보가 급사하여 정권교체에는 실패 했으나 민주당의 장면이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를 통해 민심이 자유당정권에 등을 돌리고 있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58년 12월 자유당은 2.4보안법파동 을 일으켜 언론규제 와 야당탄압을 강화할수 있는 법적근거를 마련하여 1959년에 문제가 발생되는 글을 쓴 기자 를 구속하고 야당지의 하나인 경간하기도 하였다.1960년 정부통령선거에서 자유당정권은 처음부터 승리를 위하여 부정선거계획을 준비하였 다. 민주당의 대통령후보인 조병옥이 신병치료를 위해 도미한 틈을 타 2개월이나 빨리 정부통 령선거를 실시하였다. 이렇게 치뤄진 3.15선거는 4할사전투표, 3인조에 의한 반공개투표, 자 유당의 완장부대 동원으로 유권자위협, 야당참관인 축출, 유령유권자의 조작과 기권강요 및 기권자의 대리투표, 내통식 기표소의 설치, 투표함 바꿔치기, 개표 때의 혼표와 환표, 득표수 의 조작 발표 등의 음모를 꾸민 부정선거였다. 이 사실은 한 말단경찰관이 부정선거지령서 의 사본이 민주당에 전달하여 민주당에 의해 만천하에 알려졌다. 그러나 조병옥이 미국에서 급사하는 바람에 이승만의 4선은 거의 확실시 되고 이승만 이기붕 후보가 80%가 넘는 득표 율로 당선이 되었으나 국민들의 신임을 얻긴 어려웠다. 그것은 선거라 할 수 없는 명백한 유 린행위였고 국민에 대한 배신행위였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장기집권의 욕심이 4.19혁명의 정 치적 원인이 된 것이다.4. 4·19 혁명의 전개과정1) 1960년 2월 28일, 대구에서 개최될 민주당 선거 유세에 학생들이 참석하지 못하도록 일요일 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을 등교시켜 영화관람, 토끼사냥 등에 동원 하자 대구지역 고교생들은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거센 항의 시위를 벌였다. 2·28대구학생의거는 불의와 부정선거에 대한 최초의 항거로 4·19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다.2) 대구 2.28 학생의거에 뒤이어 서울, 대전, 수원, 부산 등지에서 계속적인 학생데모가 일어났다. 데모구호도 점차 정치적인 것으로 바뀌어서 학생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뭉치자 부정선거를 묵인하는 자는 자유로운 조국에서 삶을 포기한 자다 라는 등의 부정선거 규탄의 방향으로 바뀌 어갔다.3) 3월 15일 선거당일에는 마산에서 학생들이 데모를 벌이고, 자유당의 부패에 화가 난 시민들이 민주당 당사 주변에 모여 학생 데모에 합류하였다. 경찰과 자유당 정치폭력배들의 무자비한 제 지로 많은 사상명자가 속출하였으며, 갖가지 풍문은 마산시민들을 극도로 흥분시켰 다. 4월 11일 마산상고생 김주열의 시신이 바다위에서 발견되자, 전국의 학생과 국민들의 흥분 은 극도에 달하였다. 고려대생들의 4·18데모는 그 다음날 학생들이 총궐기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4) 1960년 4월 19일 서울 시내 각 대학 학생들이 모여 약속한 계획에 따라 총궐기의 선언문을 낭 독하고 중앙청을 향해 행진하였다. 이들의 선언문의 내용은 학생들은 더 이상 현실을 좌시할 수 만은 없으며 정의와 민주수호를 위해 궐기해야 한다 는 것이였다. 여기에 수많은 고등학생 들도 데모에 참가하였다. 경찰이 이승만과의 면담을 요구하는 학생들을 무시한채 무차별 발포를 하여 사상자가 늘어가자. 데모 군중은 흥분하여 경찰차를 불사르고 경찰서와 파출소를 파괴, 방 화하였다. 또 일부 시위군중은 자유당정권의 전위부대의 하나였던 서울신문사와 반공청년단 본 부, 그리고 자유당 본부 등을 습격하여 불태우거나 파괴하였다.5) 서울시내는 무정부상태가 되고 데모구호도 “3 ·15부정선거 다시 하라”, “1인 독재 물러가 라”, “이 대통령은 하야하라” 등 독재규탄과 민주수호 및 정권교체를 요구하는 혁명적인 것 이었다. 이에 당황한 정부는 오후 3시를 기해서 서울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을 진주시켰다. 사망자 약 100명에 부상자 약 450명에 달한 엄청난 희생을 가져온 데모는 계엄군의 진주로 다음날부터 일단 멈췄다.6) 4월 23일 서울시 주관으로 4 ·19희생자에 대한 합동위령제(合同慰靈祭)를 올리자 일제히 이에 반발, “어용(御用) 위령제는 4 ·19희생자에 대한 모독이다. 학생들이 주최하는 위령제를 다시 거행해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한편, 23일 부통령 장면이 정부의 만행을 규탄하면서 사퇴하 자, 이기붕도 자신의 부통령당선을 사퇴할 용의가 있다고 발표하고, 이승만도 자유당총재직에서 물러날 뜻을 밝혔다. 그러나 결코 정부통령선거를 다시한다거나, 대통령직을 사퇴한다는 의사는 밝히지 않았다한 자유당의 미온적인 태도에 국민들의 분노가 다시 일기 시작하였고, 25일 서울의 각 대 학 교수 259명이 “대통령 이하 3부요인(三府要人)들은 3 ·15부정선거와 4 ·19사태의 책임을 지고 즉시 물러나는 동시에 정부통령선거를 다시 하라”는 내용의 시국선언문(時局宣言文)을 채 택하고, 구속학생의 즉시석방을 요구하면서 데모에 나섰다. 이 날의 교수 데모는 자유당정권 퇴 진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에 자극받은 일반군중들은 계속해서 야간 데모를 벌이며 “자유 당정권 물러가라”고 외쳤고, 26일에는 다시 학생들이 거리를 메워 태평로는 4 ·19 때와 같은 혼란이 거듭되었다. 학생들의 요구에 따라 계엄사령관 송요찬(宋堯讚)이 주선하여 학생과 시민 대표 5명이 이승만과 면담하고 시국수습을 위한 요구조건을 제시했다.이 자리에서 이승만은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하고, 3 ·15부정선거는 다시 한다.또한, 이기붕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는 동시에 내각책임제 개헌을 한다”고 약속했다.그리고 이어 11시 이승만은 방송을 통해 직접 하야의 뜻을 밝히고 다음날 정식으로 '대통령사임 서'를 국회에 제출하였다.8) 28일 이기붕 일가(一家)가 경무대의 일실(一室)에서 자살하였음이 확인되었고, 29일 이승만은 극비리에 하와이로 떠났다.결국 이승만이 이끈 자유당의 12년간의 장기집권은 비극적인 종말을 고하였고 새로운 공화정 을 위한 준비를 위해 허정(許政) 과도정권(過渡政權)이 뒤를 이었다.5. 4·19혁명의 의의과 한계1)의의첫째, 4.19는 실리주의 미만과 가치관의 전도로 인하여 가성 세대에게 무기력과 퇴폐의 낙인이 찍혔던 젊은 세대인 학생들이 오명을 씻고 민주세력의 최선봉이라는 자각과 학생운동의 적극 적 가치를 인식시 키는 계기가 되었다.둘째, 자유민주주의의 기간인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사상의 자유 및 기회균등과 능력에 대한 공정한 문호개방의 요구에서 나타나는 경쟁의 자유, 시민적 경제 평등의 원리를 주장함으로써 동학이 잠정적 으로 내포하고 있던 시민 사회의 건설과 그 일맥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