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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영경제]교보생명의 대수술(大手術)
    교보생명의 대수술(大手術)- 왼손엔 비전경영, 오른손엔 윤리경영목 차Ⅰ. 연구 목적 및 회사 선택 이유 1Ⅱ. 회사소개 21. 연혁 및 수상내역 22. 비전 3Ⅲ. 환경에 따른 변화의 필요성 인식 41. 외부환경 42. 내부환경 53. 필요성 인식 및 선택 5Ⅳ. 개입 방식 51. 변화추진 구심체 구축 52. 교보생명의 중/ 단기 목표달성 = 윤리경영의 실천 63. 구성원에 동기 부여 74. 단기적 성공사례 개발 125. 후속변화 창출 146. 새로운 변화 방법의 제도화 15Ⅴ. 비전경영, 윤리경영의 핵심가치 161. 비전경영 162. 윤리경영 16Ⅵ. 결론 18참고문헌 19Ⅰ. 연구 목적 및 회사 선택 이유현재 기업 환경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환경에 제대로 적응하지 않으면 서서히 끓는 물에 든 개구리처럼, 기업과 개인 모두 죽고 만다. 우리가 알아보려고 하는 교보생명은 보험업계에 있어 신바람을 몰고 온 회사다. IMF 혼란 당시, 1998년 은행 종금사를 필두로 한 금융권구조조정은 증권 보험, 상호저축은행으로 확대 되었고 각 분야에 확대, 2003년 1월말에는 전체에 금융회사의 30%넘는 약 650여 개 사가 정리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외국 생명보험회사가 물밀듯이 들어오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교보생명은 신창재 회장을 필두로 윤리경영 , 비전경영 을 선포하고 존폐위기의 회사를 현재, 전 보험 업계를 이끌어가는 최고의 회사로 만들었다. 5년 연속고객만족경영대상, 윤리경영 대상 등 수 많은 상들이 그것을 말해준다. 재무성과 역시 눈에 띄는 결과를 가져 왔다.우리는 이러한 놀라운 성과를 이룩한 교보생명의 조직개발 기법이 무엇인지 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비전경영의 핵심이 무엇이며, 그것을 이룩하기 위해 어떠한 개입 기법으로 회사를 살렸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은 앞으로 우리가 위치한 조직, 우리가 치유할 조직을 새로운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더 나은 성과를 이룩하도록 하는데 있어 좋은 공부가 될 것이다.II. 회사소개교보생명은 '자산에 대한 리스크 관리도 불충분한, 한마디로 종합적 위기상황이었다(방규식외 p.172).{자료 : 한국능률협회 신창재 회장 강연1) 글로벌 스텐다드(Global Standard)세상이 빨리 변화하고 있다. 보험업계 역시 외국계 보험사들의 맹공, 시장 확대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 그래서 국내에서 벌어지고 있지만 이것은 철저히 국제시합이다. 그래서 게임의 룰이 국제 룰에 적용된다. 이것이 곧 글로벌 스텐다드다. 핵심은 세계가 하나로 영역이 없이 하나로 통합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디지털 정보화뿐만 아니라 덩어리화 되는 것, 탈규제 때문에 점점 기업은 경쟁이 무한경쟁의 시대로 돌입해 있다. 보험 업계역시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집단소송제, 회계 공시, 분식회계에 대한 엄벌 등 이는 국제사회에서 예전부터 있어왔던 것이 한국에 도입되고 있다. 소비자 보호역시 보험 업계에서 커지고 있다(한국능률협회 동영상특강).2. 내부환경교보생명은 외환위기를 전후하며 무너진 여러 대기업들 때문에 그 기업들에 대한 투자 자산이 덩달아 부실해지는 바람에 그야말로 엄청난 자산 손실을 겪은 전후였다. 1999년에 교보생명의 수입보험료는 10조 5,500억 원에 유지율은 61%, 13차월 정착률 20% 수준에 불과했다.그러나 교보생명같이 규모가 크고 역사가 오래된 국내 대기업들은 대개는 관료화된 조직문화가 팽배해 있어서 변화혁신을 통해 경영방식을 쇄신하려는 조직자체의 관성 대문에 시간이 무척 오래 걸릴 것이라는 것이 신창재 회장의 가장 큰 고민이었다.3. 필요성 인식 및 선택이렇듯 보험시장의 성숙, 금융 산업의 통합화 흐름, 외국 생명보험 회사들의 약진 등에 따른 시장경쟁의 가속화로 인하여 고객의 요구 수준이 빠르게 높아져가는 상황에서 업계 공통의 잘못된 경영관행을 빨리 탈피해 근본적인 변화와 혁신을 하지 않는다면 교보생명 역시 수년 내에 시장의 고객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할 것이며, 그리 되면 수익성 측면에서도 외국 생보사들과는 도저히 경쟁이 안 되는 것이라는 심각한계층별 교육 훈련{계층별 교육 훈련이란 조직의 위계질서를 중심으로 각 계층별로 이루어지는 교육 훈련을 말한다. 교보생명은 팀장·지점장의 경영 관리층, 파트장, 과장급, 영업소장, 대리급의 중간 관리층, 일반사원 등의 네 계층으로 나누어져 있다.1 경영 관리층 교육 훈련경영 관리층이란 최고 경영층·중간 관리층을 말하는 것으로, 경영 관리층 교육 훈련은 경영 관리자로 하여금 의사 결정 능력의 향상과 자기 계발을 추구하도록 계획된 교육 훈련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최고 경영자에게는 경영 목표와 방침을 결정하고 이를 시행하기 위한 자원의 배분을 기업 전체적인 입장에서 결정하는 전략적 의사 결정의 능력을 기르고, 중간 관리자에게는 배분된 자원을 능률적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경영 내부의 조정에 초점을 두는 관리적 의사 결정의 능력을 개발하는 것으로, 리더십을 함양하고 경영 내외의 전체적 상황을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자는 데 그 목적이 있다.이에 교보생명은 의사결정기법, 리더십, 커뮤니케이션스킬과정, 시간관리기법, 경영컨설턴트, 효과적 갈등관리기법, 마케팅전문가과정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2 중간 관리층 교육 훈련중간 관리층 교육 훈련이란 대리·주임 등과 같은 현장의 감독자의 직위에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 훈련을 말한다. 중간관리자는 경영 활동에 대한 일선 책임자로서 일반 종업원을 지휘·감독하며 관리자와 작업자를 연결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으므로 우수한기술자, 유능한 관리자, 탁월한 통솔자, 모범적인 훈련자, 인간적인 협력자라는 자질을 아울러 구비하여야 한다.중간 관리자 교육 훈련은 특정의 직무 기술·기능의 향상은 물론, 관리에 관한 기초적인 지식과 능력을 배양하는 동시에, 아랫사람을 지휘하는 통솔력을 기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교보생명의 학습과정으로는 기획전문가, 문제해결기법, 인사조직관리과정, 효과적 갈등관리기법, 비즈니스응답스킬과정 등이 있다.3 일반종업원 교육 훈련신입사원 및 일반사원을 대상으로 훈련하는 것으로써 조직의 구성원으로서의 마문적 훈련 기관에 위탁하여 수행하기도 한다. 내용으로는 현장의 작업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보편적인 내용, 즉 일반적인 작업에 대한 사고방식이나 작업의 개선 방식 및 인간관계 등과 같은 것을 그 내용으로 한다.교보생명의 거의 대부분의 학습 과정은 계성원에서 2박 3일간의 일정으로 여러 차례 진행되며, 사이버 연수원에서는 1, 2개월의 일정으로 학습교육이 진행된다.2 자기개발자기 개발(Self-Development: SD)이란 자기의 책임 하에 자기 이해와 평가에 의해서 성장·향상의 의욕을 가지고, 자주적으로 자기 훈련을 하는 것으로 자기 성장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능력 개발 체계 중에서 자기 개발은 생애 교육과 더불어 그 중요성이 점점 강조되고 있다.교보생명의 자기개발 학습은 사이버 학습과 사외자격증으로 이루어지는데 부문별 전문인력양성과 직무성과를 창출하기 위함이다. 학습과정은 사이버연수원에 등록하여 과정을 배우고 평가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2 팀별 학습1 지식경영 토론회지식경영토론회는 간부사원 및 평사원이 조직의 비전과 조직단위 공통역량을 강화하는 연구 발표 및 토론을 통한 학습의 장으로써 우수사례 및 아이디어를 보상제도도 마련하고 있다. 지점이나 영업소 등 참여하기 어려운 사원들은 레포트로 대체하기도 한다.2 학습동아리학습동아리는 회사의 업무와 관련된 전문지식 습득 및 아이디어를 창출하는 동아리로 운영할 수 있으며 여기서 나온 아이디어는 포상을 주며 채택된 아이디어는 일선 부서에서 적극 활용하도록 권장하고 있다.(3) 교육훈련의 평가교육 훈련을 실시한 후, 그 훈련이 소기의 목적을 어느 정도 달성하였는지 여부를 알기 위해서 반드시 이에 대한 평가가 뒤따라야 한다.교보생명은 각 학습별로 참여자의 연수태도, 과정 참여도, 테스트 결과 등에 각 비율을 정하여 가산점을 부여하고 있으며 위탁교육기관에 의한 평가는 점수를 산출하지 않고 이수여부만을 반영하고 있다. 교육 훈련의 결과를 전산화, 점수화 하여 인사고가에 반영하고 있다.3) 기업문화의 변화변화된 시장 계획을 3년 주기로 수립해 추진하고 있다. 이에 따라 교보생명은 지난 2002년 2월 계정계 차세대 시스템(신보험시스템)을 구축했으며 2005년 8월 오라클 ERP시스템을 주축으로 한 EDW, EAI 등 정보계시스템(가치혁신시스템)을 구축해 향후 경영환경 변화에 대비한 글로벌 IT시스템 구축을 완료한 상태다.2) 가치경영 도입교보생명은 가치경영 도입을 위해 지난 2003년 재무, 경영관리, 상품, IT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마스터플랜을 수립했다. 이어 2004년 7월 IT기반 마련을 위한 본격적인 프로젝트 수행을 통해 완성된 가치혁신 시스템 구축에 들어갔다.가치경영은 기업의 모든 전략과 역량, 목표를 가치창출 중심으로 전환해 가치창출 기여도에 따라 공정하게 성과를 관리하는 것으로, 글로벌 선진 보험사들이 채택하고 있는 경영관리 기법 중 하나다. 이러한 가치경영을 실현하기 위해 진행된 가치혁신 시스템 구축 프로젝트는 고객만족 경영을 지원하고 경영관리를 선진화해 가치중심의 경영관리, 전략적 성과관리체제 구축, 손익관리 정교화, 신속한 경영정보 제공, 재무인프라 선진화 등 5대 핵심과제를 달성하는데 목표를 두고 추진됐다.세부적으로 회계의 투명성 및 신속성, 대외 공시 리포트의 신뢰성을 확보하고, BSC 성과관리제도 도입으로 전사, 부문 간 전략의 실행력을 고도화함은 물론, 관리회계 제도의 정교성을 높여 사내 거래제도, 다차원적 수익성 분석 등을 통해 고객별, 채널별, 상품별 손익분석 자료를 신속 정확하게 제공함으로써 경영 의사결정을 신속하게 지원하는 것이다.또한 월 결산일정을 대폭 단축함으로써 스피드경영을 실현하고, 재무관리 정보의 표준화, 프로세스 체계화, 시스템 간 유기적 연결 강화로 손익관리, 성과관리, 가치 중심 경영을 인프라 제공의 주요 목표로 하고 있다.재무회계, 관리회계, 성과관리, 경영계획 등을 중심으로 추진된 가치혁신시스템 구축 프로젝트는 지난 2005년 8월 재무회계, 부동산 고정자산, 예산 등과 관련한 재무시스템 부분을 먼저 오픈했다. 이어 9료 합계
    경영/경제| 2007.07.19| 19페이지| 2,000원| 조회(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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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문어학]유진 오닐(Eugene Gladstone ONeill ) 평가A+최고예요
    유진 오닐(Eugene Gladstone O'Neill )1. 유진오닐의 생애유진오닐은 1888년 10월 16일 뉴욕에서 아일랜드 혈통의 카톨릭교도인 부모 사이에 두 형제 제임스 오닐 2세(James O'Neill, Jr., 1878~1923)와 에드먼드 버크오닐(Edmund Burk O'Neill, 1883~85)에 이어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제임스 오닐은 가난한 집안에서 정식교육을 받진 못했으나 뛰어난 연극배우가 된 극히 잘생긴 미남에 구두쇠요 저돌적인 성격이었고, 어머니 엘라 퀸란 오닐(EllaQuinlan O'Neill, 1857~1922)은 중산계급의 교양 있는 가문에서 훌륭한 교육을받은 수줍고 얌전한 여자로 수녀가 되려다가 미남배우를 보고 홀딱 반해 결혼한사람이다.6세까지 형 제이미는 기숙학교에 가 있었고, 유진과 어머니는 유모와 더불어 몬테 크리스토 백작의 연기로 한창 인기 있는 아버지의 순회극단을 따라 일년내내 싸구려 호텔을 전전하며 전국을 돌아다녔다. 이때의 경험을 통해 그는 어릴 때부터 극장에 대해 남달리 조숙하고 정확한 지식을 갖게 되었고, 개인적인 환상의 세계에 젖어드는 경향을 지니게 되었다. 한편, 끊임없는 방랑생활은 언제나 그에게 뿌리와 안정에 대한 동경심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동기가 되었다.6세에 뉴욕의 리버데일에 수녀원이 운영하는 기숙학교인 세인트 얼로이시우스 아카데미(St, Aloysius Academy for Boys)에 들어갔으나 수줍음을 잘 타는 성격으로 그곳을 몹시 싫어하였고, 친구들과 어울리기 보다는 고독을 즐기며 독서를 좋아하였다. 1902년 가을 베츠 아카데미(Betts Academy)에 들어갔는데 후에 하버드 대학에서 받은 극작법 교육을 제외하고는 이곳에서 받은 4년간의 정규교육이 그의 유일한 수준급의 교육이었다.1903년 여름 어머니가 마약중독으로 강에 투신하겠다고 소란을 피우는 통에 유진은 자기를 낳다가 심한 산고 때문에 의사의 처방으로 시작된 어머니의 마약복용경위를 알고 크나큰 정신적 충격을 받아 죄의식코올 중독자였던 형 제이미의 방탕한 행동을 배우기 시작한다. 이 형의 영향으로 그는 주말이면 기숙사에서 나와 뉴욕의 술집이나 호텔 등에서 보냈다.1906년 프린스턴 대학에 들어가지만 공부는 전혀 하지 않고 놀기만 하는 생활을 하다가 다음해 성적불량으로 퇴학당한다. 대학생활의 첫 해를 이런 식으로 보내면서도 그는 왕성한 독서습관으로 콘라드, 잭 런던,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등을 탐독하였다.1909년 봄 뛰어난 미인인 캐슬린 젠킨스(Kathleen Jenkins)를 만나 곧 사랑하게 된다. 아버지는 아직 나이 어린 아들이 여자문제에 휘말리는 것에 놀라 마침 자기가 주식을 투자해 놓은 어떤 회사가 재정적 후원을 하는 온듀라서 금광 탐색대에 들어가도록 아들을 설득했다. 모험과 낭만을 꿈꾸던 유진은 그 일에 매력을 느끼지만 그녀가 이미 임신한 몸이라 떠나기 직전인 10월 2일 비밀리에 결혼을 한다. 2주후 콜롬비아 대학 출신의 광산기술자 스티븐슨과 그의 아내 앤 일행과 함께 온듀라스로 떠난다. 그러나 그곳의 극빈과 더위와 질병 등 온갖 난관으로 시련을 겪었고 더구나 앤 스티븐슨과의 이상한 관계로 말썽이 빚어지는데, 이러한 사정은 『어떤 생활의 반려자』(A Wife for a Life)란 그의 최초의 극에 잘 묘사되어 나온다. 또한 그곳 정글에서의 경험이 나중에 『황제 존스』(The Emperor Jones)에서도 활용된다. 결국 6개월 동안 아무런 성과 없이 그는 말라리아를 심하게 앓은 채 귀국한다. 5월에 그의 아들 유진 오닐 2세가 태어났지만 아내는 그가 아직 온듀라스에 있는 줄로만 알고 연락도 못한다. 그는 아버지의 순회극단에서 보조 매니저로 일하지만 곧 실증을 느끼고, 노르웨이의 대형버선을 타고 남미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훌쩍 떠난다. 훗날 이 사건은 그의 해양극에 귀중한 배경역할을 하게 된다. 그는 그곳에서 날품팔이, 부두 노동, 임시선원 등 갖가지 비천한 직업들을 전전하면서 술을 마시고 사창가를 드나드는가 하면 돈이 떨어지면 구걸하러 다니기도 하였다.1911생을 한다. 결국 결핵 진단을 받고 병원에서 쉬면서 처음으로 자기 생활을 성찰 해 보면서 비로소 극작가가 되기로 결심을 한다. 그리스극과 엘리자베스 시대의 고전극을 비롯하여 스트린드베리, 싱, 예이츠, 그레고리의 희곡 등 수많은 극을 독파하면서 단막극을 쓰기 시작한다. 그 후 『갈증』(Thrist), 『무모』(Recklessness), 『안개』(Fog) 등 11편의 단막극과 2편의 장막극을 썼다.아버지의 유진 극작품의 인정으로 하버드 대학에 베이커 교수의 “47 워크샵” 강좌에 보내주었는데 유진은 그곳에서 극작의 발단부를 처리하는 방법과 대사의 삽입방법 등 기교문제를 배웠다.이듬해에는 수잔 글래스펠(Susan Glaspell), 조지 쿡(George Cram Cook) 등과 함께 상업적인 미국극장의 공허함에 반감을 품고 새로운 실험적 극장을 만들었다. 1916년 여름 프로빈스타운 플레이어즈(Provincetown Players)란 극단은 오닐의 『카디프를 향하여 동쪽으로』를 공연하면서 오닐 자신도 극단에서 단역을 맡으면서 자기의 실험적 희곡을 공연할 수 있는 좋은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고, 그 극단도 전국적으로 주목받는 극단으로 급성장하게 되었다. 그 후 『먼 귀향 항로』, 『섬』 및 『밧줄』을 잇따라 공연하여, 오닐은 극계의 주목 받는 신진극작가로 부각되기 시작한다.1920년 초에 그의 작품으로는 처음으로 브로드웨이에 상연된 오닐의 최초의 장막극 지평선 너머(Beyond the Horizon)는 퓰리처상을 수상했고, 그 후 2년 안에 『황제 존스』, 두 번째 퓰리처 수상작,『안나 크리스티』, 『털보 원숭이』 등과 같은 강력한 극들이 상연되어 능력 있는 극작가가 출현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1921년 12월에 쓴 『털보 원숭이』는 다음해 초에 공연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공연 도주에 대역으로 여주인공을 맡은 칼롯타 몬터레이(Carlotta Monterey)는 후에 그의 세 번째 아내가 된다. 1922년 2월 말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셔 그 해 여름은 작품는다. 그가 죽은 후 미망인 칼롯타가 오닐의 원고와 서류 일체를 예일 대학에 위임한 것은 바로 이 같은 인정을 받은 데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1928년 1월『이상한 막간극』은 성공리에 공연되어 세 번째 퓰리처상 수상작이 되었을 뿐 아니라 출판되자마자 베스트셀러 목록의 1위를 차지하는 드라마가 되었다. 1931년 고독과 향수병에 시달린 끝에 3년 이상의 해외생활을 청산하고 창작에 몰두하여『끝없는 나날』,『아, 황야여!』 등을 썼다.1936년 11월에는 노벨문학상 수상을 하게 되지만 자기에게 영향을 준 스웨덴 극작가 스트린드베리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수상연설문만 보내고 식전 참가는 사양하였다. 1938년 말부터는 완전한 고립 속에서 『더욱 장엄한 저택』, 『얼음장수 오시다』, 『밤으로의 긴 여로』 등을 완성하였다. 이 당시 오닐은 연필을 사용하여 극작품을 썼는데, 그의 경련이 심해짐에 따라 다른 사람들이 보기 힘들어 칼롯타가 대신 타이핑을 해주기도 하였다. 그에게 있어 가장 행복한 시기가 이때였다고 회고한 적이 있는데, 바로 평생 동안 그를 괴롭혔던 한 많은 유령들을 몰아내고 정화시키는 데 성공한 때문이었다. 두 편의 자전적 극에서 마침내 자기 가족의 유령들을 완전히 잠재울 수 있었다. 즉, 『밤으로의 긴 여로』에서 그는 아버지의 유령과 화해하였고, 『잘못 태어난 자를 비추는 달』에서도 그는 형 제이미의 유령에게 조의를 표했는데. 어떤 다른 작품도 이 두 편의 극만큼 그렇게 심각한 정서적 고통을 그에게 강요하고 육체적으로 쇠진하게 만든 것이 없었다.1939년 이후 2차 대전의 발발로 인한 긴장으로 부부는 다 같이 건강이 악화된다. 그는 경련이 심해져서 글을 쓰는 것이 어렵게 되었고, 아내는 척추관절염과 오닐의 원고를 보느라고 오랫동안 고생해 온 눈병이 재발되었다. 1942년 그는 뇌세포가 점차 파괴되고 신경과 근육 사이에 협동작용이 이루어지지 않아 팔, 다리, 혀 등을 통제할 능력이 없어지는 이상한 병을 앓게 된다. 이런 가운데 그의 우울증과 비관주의가 날로 증 미국극계가 오닐을 무시한 사실에 격분한 칼롯타가 미공연 유작을 스톡홀름의 왕립극장에 맡겨『밤으로의 긴 여로』(1956), 『시인기질(1957)』, 『더욱 장엄한 저택』(1962)을 초연하였고, 『밤으로의 긴 여로』는 오닐의 네 번째 퓰리처상 수상작이 되었다.2. 유진오닐의 연극 세계현대 미국연극에 대한 논의는 유진 오닐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미국 연극이 예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확고한 기초를 마련한 사람이 바로 오닐이기 때문이다. 1910년대 말까지만 하여도 미국연극은 유럽연극의 모방 또는 저급한 상업적 엔터테인먼트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까지 미국의 연극계는 나름대로 활발하였고 관객동원에도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 대륙인들의 삶을 그리면서 동시에 예술성에서 유럽의 아류 수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내용과 기법면에서 모두 혁명적인 변화를 불러 넣을 선구자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오닐은 상업주의와 멜로드라마틱한 분위기에 젖어있던 미국연극을 새로운 사조의 도입과 독창적인 기법의 실험을 통해 국제적인 궤도에 올려놓았다.오닐은 전통적인 막과 장의 분리법을 파기하고 『이상한 막간극』은 9막으로 되어 있으며, 『상복이 어울리는 엘렉트라』는 공연하는 데 9시간이 필요하다. 아시아나 그리스 연극에 등장하는 마스크를 사용하며, 세익스피어적인 독백과 그리스 연극적인 코러스를 도입하고 조명과 음향을 통한 특수 효과를 이용함으로써 연극을 새롭게 정의했다.오닐에게 극장은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는 곳이고 관객을 즐겁게 하기보다는 고민하게 만드는 곳이었다. 오닐에게 연극의 소재는 외적 인간관계나 사회,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과 심리의 움직임이었다. 그가 집요하게 추구하던 주제는 실존적 삶, 영혼의 문제, 우주와 인간의 관계, 인간의 양면성 등이다. 오닐의 작가의식은 그에게 대담한 극적 실험을 부단하게 감행하도록 만들었고 그 결과 전 세계의 관객과 연극인들이 즐기고 또 연구할 수 있는 참신한었다.
    인문/어학| 2007.07.17| 4페이지| 2,000원| 조회(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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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문]작가론-김애란론- 평가A+최고예요
    ■작가론■그곳,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꿈꾸다.-김애란론-1. 낯선 곳에서의 관계 맺기“작가라서, 무슨 이야기를 썼는지는 알고 있지만, 그것이 당신에게 어떤 이야기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기쁘고, 다행입니다.” 이것은 소설집 달려라 아비를 장식하고 있는 ‘작가의 말’ 중 일부이다. 이것에서 자기 소설과 독자와의 만남에 대한 작가 김애란의 기대감을 엿볼 수 있다. 이런 기대감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상상에 닿아있는 김애란 자신의 소설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애란 소설에서 볼 수 있는 상상이, ‘작가 자신은 알고 있는 이야기가, 독자에겐 어떤 이야기가 될지 모르는 상황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사람들은 흔히, 작가의 의도를 읽어내려는 태도를 가지고 소설을 대한다. 자신이 읽고 있는 소설 안에서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기 위해 정신을 집중한다. 작가가 던지는 메시지를 놓치지 않고 민감하게 반응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김애란의 소설에서는 어떤 의미가 될지 의문이다. 어찌됐든 김애란의 소설에서 이러한 태도를 유지시켜 나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독자 내부에 존재하는 기준들과 의식들을 수반하는, 작가의 의도를 읽어 내려는 태도가 김애란 소설 속의 상상과 서로 맞부딪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소설 안에서 나는 철저한 타인이 되며, 그곳이 낯설게만 느껴지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김애란의 기대감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작가 자신은 알고 있는 이야기가 독자들에겐 다른 이야기가 되는 것, 이것은 먼저 소설과 그것을 읽는 독자와의 관계 맺기가 선행되어야 한다. 작가의 의중을 읽어내려는 독자의 일방적인 방법은 이에 부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관계 맺기란 수평적인 관계로 독자의, 소설 내부에서 끊임없이 질문하고 생각하고 상상하는 즉 소통하려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이 관계 맺기의 전제 아래에서 독자는 김애란의 상상에 머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소통하려는 태도가 주는 상상에의 정착으로부터 우리는 상상과 대면하는 새게 된다. 그런 익숙함은 우리의 의식을, 감정, 감각을 잃어버리게 만들고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잊게 만든다. 거기에는 의문이나 호기심은 없다. ‘왜’ 라는 이유가 없다. 그러나 여기, 수많은 이름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는 사람이 있다. 바로 「사랑의 인사」 의 ‘나’ 이다. 사랑의 인사에서의 나는 블루월드라는 수족관의 관리요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는 블루웓드에 있는 수많은 물고기들의 이름을 보며 ‘왜’ 라는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게 된다.‘블루월드’에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물고기들의 이름이었다. 저 많은 이름들은 어디서 다 생겨났을까. 그리고 도대체 누가 사람들은 관심도 없는 저런 생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느라 애를 썼을까. 돼지코거북이, 톱가오리, 각시붕어, 돌고기, 위디씨드래곤, 스트라이프 버터플라이, 씨애플, 그린 모레이, 업다운 젤리피시…… 블루월드에는 약 일억 마리 이상의 물고기를 관리, 전시하고 있었다. (『달려라 아비』,「사랑의 인사」, 151면)이런 그의 호기심, 즉 상상은 우리들로 하여금 이름이라는 현상에서 현상의 ‘근원’ 으로 소급하는 계기가 된다. 그 근원이 무엇이며 어떻게 그리되었을까를 생각하며 또 상상하게 된다. 과거로부터 있어온 이름은 하나의 경험처럼 되어버려 이것을 의심을 하거나 질문을 던져 볼 여유도 없이 지내왔지만 김애란은 그 근원을 제시하고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상상이란 공간 안에 마련한다. 그리하여 잃어버린 의식, 감정, 감각들이 되살아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김애란 소설의 방식이며 방법이다.특히 이런 김애란의 방식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선 흠(欠)이라고 불리는 것에 적용되어진다. 여기서 흠이라는 것은 소설 안에서, 아버지가 없는 이, 거듭 실수를 하는 이, 세상을 거부하는 같은 것과 같은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은 세상에 있어서 분명 긍정적이지 못한 부정적인 것들이다. 또한 그것은 상처이며 아픔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왜 부정적인 것이 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 혹은 타인과 다른 상황 속 익숙해져 버린 이유이기도 하다. 이에 김애란의 상상은 고정적인 것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원동력이 되어 현상을 바라보는 경직된 눈을 풀어준다.3. 부드러운 눈으로 들여다보기 - 아버지의 부재(不在)를 바라보는 태도소설 속에서 작가가 ‘부재(不在)’ 를 바라보는 태도는 담담하며 독특하다. 사람들이 흔히들 부재를 대하는 방식과 다르다. 다른 이들과의 동일한 양상 속에서 자신에게 선명하게 존재하는 부재가 말해주는 것은 이방인으로서의 삶이다. 부재라는 것은 세상이 정해놓은 기준에 미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애란은 그들을 담담하게 자신의 상상 속에 펼쳐 놓는다. 이때 그들은 더 이상 이방인들이 아니라 그저 세상 속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 일뿐이다. 그들에게 부재란 더 이상 아픔도, 금기도 아닌 것이 된다.김애란의 소설 속에 나타나는 부재의 사연 중에 단연코 돋보이는 것이 있다면, 아버지의 부재를 다룬 「달려라 아비」일 것이다. 이 소설에는 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는 ‘나’ 가 존재한다. 나에게 아버지는 없다. 아버지는 아버지가 되기 전날 집을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대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동일한 생각은, 이런 아버지를 가진 사람들은 성장하는 과정에서 한번쯤은 내면가운데 원망과 증오를 또한 존재에 대한 분노를 품어보았을 것이고 또한 타인들에게서는 동정의 시선을 받았으리라는 것이다. 아버지란 존재가 자신의 삶에서는 지울 수 없는 아픔이 되어 그를 괴롭힐 것이라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가끔 이런 불행했던 시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파멸시키기도 하는 더욱 끔찍한 상황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흔한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상황은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집을 나가버린 아버지가 계속 뛰고 있다고 나는 상상한다. 나의 세계에 존재하고 있지 않는 아버지는 저쪽 세계에서 달리고 있을 뿐이다.내겐 아버지가 없다. 하지만 여기 없다는 것뿐이다. 아버지는 계속 뛰고 계신다. 나는 분홍색 야광 반바지 차림의 아버지가 지금 막 후꾸오까를들러, 이베리아반도의 과다라마산맥을 넘고 있는 모습을 본다. 나는 깜깜한 어둠속에서도 아버지의 모습을 잘 식별할 수 있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야광 바지가 언제나 반짝이고 있기 때문이다. (『달려라, 아비』,「달려라, 아비」, 15면)이렇듯 우스운 이미지 아버지를 상상을 하는 나의 모습이 조금은 낯설다. 이것은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아버지의 부재는 가정 뿐 만 아니라 사회에서 누리는 행복과 관련이 있다는 의식이 우리를 장악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없으면 행복해 질 수 없었다. 이것은 가슴속에 분명히 존재하는 상처이자 아픔이었다. 아버지가 없으면 왜 행복해 질 수 없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전에 이미 행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단정 짓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시선에 김애란은 담담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나를 통해 내비치고 있다. 그는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자신을 더 이상 동정할 필요도 없으며, 그것이 상처가 될 필요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저 당당하기를 담담하게 이야기 하고 있다.어머니가 내게 물려준 가장 큰 유산은 자신을 연민하지 않는 법이었다. 어머니는 내게 미안해하지도, 나를 가여워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가 고마웠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내게 ‘괜챦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정말로 물어오는 것은 자신의 안부라는 것을. 어머니와 나는 구원도 이해도 아니나 입석표처럼 당당한 관계였다. (『달려라, 아비』, 「달려라 아비」, 16면)4. 상상의 저편, 지루한 현실.굳건할 것만 같던, 상상에 의존하여 현상을 바라보는 유연한 시선도 엄연히 존재하여 상상 안으로 뛰어드는 현실 앞에서 흔들리기 마련이다. 김애란 소설 속의 인물들이 현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가능했다고 한다면 이것은 현실 속에서 자꾸만 커지려고 하는 현상의 확대를 상상이라는 것이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균형이 깨어지고 현상이 어떤 계기에 의해 상상이 관여할 수 없는 정도로 확대되자 인물들은 상상불가사의를 다 읽을 동안 나타나지 않은 않았다. 나는 미아보호소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며 중요한 사실을 하나 깨닫게 되었는데, 자신이 버림받은 것이 아닌 아버지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아버지에게 버림 받은 사실에 상상이 작용한 것이다. 이런 의식을 안고 나는 자라서 어른이 되었다.나는 텔레비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정말 어디 있는 것일까? 누군가 그 날 아버지를 살짝 들어올린 뒤 그대로 파고다공원에 내려놓았고, 순간 아버지는 폭삭 늙어버린 것이 아닐까? 나를 놀이공원에 두고 사라진 것은, 자신에게 갈 공원이 따로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달려라 아비』, 「사랑의 인사」, 155면)하지만 블루월드가 바쁜 5월의 어느 날, 유리창 넘어 오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낯익은 한 사내의 등장으로 이런 미동 없는 의식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실종된 아버지였던 것이다. 나는 아버지에게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하여 눈을 부릅뜨고 미친 듯이 유리벽을 두들겼다. 그리고 그런 행동에는 사라지는 일에만 충실한 아버지를 향한 물기어린 목소리가 베어들었다.아버지를 쫓아가는 내내 계속해서 유리벽을 두들겼다. 하지만 아버지는 절대 돌아보지 않은 채, 예전부터 유일하게 잘해왔던 일, 즉 내 앞에서 사라져가는 일에만 충실할 뿐이었다. 아버지는 점점 작아지더니, 마침내 사람들 사이로 없어져 버렸다.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솟구쳤다. 물안경 안으로 순식간에 수증기가 찼다. 나는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아버지, 아버지를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미 사라졌고, 나는 호흡기를 문 채 물속에서 울었다. (『달려라 아비』, 「사랑의 인사」, 155면)처음 아버지가 사라져 버린 그 공원처럼 아버지는 수족관에서, 자신이 보는 앞에서 다시 사라져 버렸다. 이것은 상상이 현실의 균형이 깨어져버린 것을 의미하고 상상에서 지루한 현실에 머물러 있는 계기가 되어 버렸다. 어른이 되어 다시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지는 아버지를 목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달려.
    인문/어학| 2007.07.17| 6페이지| 2,000원| 조회(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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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문]영미 드라마 개관 - George Bernard Shaw
    영미 드라마 개관 - George Bernard Shaw 발표자료1. George Bernard Shaw의 생애출생: 1856년 7월 26일, 더블린 (아일랜드)죽음: 1950년 11월 2일 (나이: 94 )직업: Playwright, 비평가, 정치적인 적극적 행동주의자국적: 아일랜드장르: Comedy(희극)영향을 받은 작가 : Schopenhauer, Richard Wagner, Henrik Ibsen,Friedrich Nietzsche, Henry George.영향을 받은 이론 : 영국의 사회주의와 패비어니즘.2. 개 관George Bernard Shaw (1856. 7. 26. ~ 1950. 11. 2.)는 아일랜드의 작가이다. 각본가로서 유명했던 그는 60편 이상의 희곡 작품을 썼다. 그는 그의 문학적 공헌을 인정받아 192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고, “피그말리온” 작품으로 1938년에 오스카상을 수상하는 등 노벨문학상과 오스카상을 수상하는 유일한 작가가 된다. 그는 사회주의와 여성의 권리를 강하게 지지하고, 공교육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Shaw는 94살이 되는 1950년에 죽었다.3. George Bernard Show의 생애Ⅰ. 불우한 성장 환경내성적이고 불우한 환경으로 고독하게 자라났다. 그는 1856년 7월 26일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 조지 카 쇼는 영국의 하급 귀족인 준 남작의 6촌이고, 어머니 엘리자베스 걸리 쇼는 유능한 성악가였다. 쇼의 아버지는 공무원을 했으나 사무실이 문을 닫게 되자 퇴직을 해 매우 가난 했고 알코올 중독자였다. 그리고 어머니는 교양 있고 야심이 많아 쇼의 성장에 지적으로나 교양 면으로나 크게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자식에게 정을 주지 않는 어머니였고 남편에게 애정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런 가정의 불협화음으로 항상 불안하고 고독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Ⅱ. Shaw와 사회주의그는 1882년 미국의 사회주의자인 헨리 조지의 연설을 듣고 감화를 받았으며 마르크스의 마르크스의 역사관과 자본주의의 횡포와 부종에 대한 비판에는 공감했지만 마르크스주의는 증오와 열정이 너무 강하고 혁명에 의존하는 사회개혁의 방법이 비현실적이라고 마르크스주의의 사상을 거부했다. 그래서 쇼는 계급투쟁과 노동자의 혁명 없이 점진적인 의식 개혁을 통해 사회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진적 사회주의를 신봉하게 되어 페비안회(Febian Society)에 가입했다. 그것의 사상은 대부분의 작품에 사회개혁의 이상으로 나타난다. 또한 Shaw는 Febian Society에서 만난 아일랜드 출신의 상당한 재력의 상속녀 "Charlotte Payne-Townshend"와 1898년 결혼한다.Ⅲ. 수상그는 노벨상(노벨문학상, 1925)과 오스카상(Pygmalion, 1939, 아카데미 각본상 수상) 두 분야에서 모두 상을 받은 유일한 사람이다. 그의 노벨상 수상에 크게 기여를 했다고 여겨지는 작품은 Saint Joan(1923)으로 1920년에 쟌 다르크 시성식을 본 Shaw는 그녀에 대한 역사극을 쓸 결심을 했다. 이렇게 탄생된 이 극에서 조안은 교회와 법률이라는 강력한 힘 사이에서 파괴된 탁월한 존재로서 비극적 여주인공의 화신이다. 그녀의 죽음은 인류가 성자와 영웅들을 두려워하고 때로는 살해하기도 하는 모순을 보여준다. 에필로그를 포함하여 전 7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Shaw 작품 중 가장 많은 비평과 또한 상반된 비평을 받아온 작품이다. 오스카상 수상의 영예를 안겨준 작품 Pygmalion(1939)은 Shaw의 걸작 희극 중에서 가장 흥미진진하고 인기 있는 극으로 그리스 시대의 조각가 Pygmalion이 자신이 만든 조각상에 애정을 쏟고, 그 조각상에 입을 맞추자 아리따운 여인으로 변한다는 Pygmalion Story를 이용하여 5막짜리 희곡을 썼다. 그는 이 작품이 음성학에 관한 교훈극이라고 주장했으며 반 영웅적인 주인공 헨리 히긴스는 음성학자이지만, 이 작품은 사랑과 영국의 계급제도를 다룬 인간적인 희극이다. ??이 극은 히긴스가 런던 토박이인 꽃 파는 재미있는 부분이다. 이들은 신화 속의 주인공들처럼 행복한 결말을 맺지는 못했다. 결말을 이렇게 처리한 것 쇼의 낭만적 의식을 개혁하고자 하는 의지가 표현된 것이다. 이 작품은 1938년에 영화화해 아카데미 각본상을 쇼에게 안겨주었고, 뮤지컬〈마이 페어 레이디 My Fair Lady〉(1956, 영화화 1964)로도 각색되어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최근에 또다시 이라는 영화로도 각색되었다.Ⅳ. 죽음과 위트그는 죽음에도 위트가 있었다. 그의 비문에는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라고 새겨져 있다. 이것은 그의 위트를 들어내 주는 것으로, 그에게 있어 위트는 작품에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그의 위트의 역할은 영국 드라마의 혁명에 있어서 간과하여서는 안 될 요소라 하겠다.4. George Bernard Shaw의 작품 성향Ⅰ. 사상극(Plays of Ideas)사상극이란 1850년 이후의 모든 현대극작가들의 작품에 적용되는 말이다. 현대 사실주의의 대부라 불리는 Ibsen의 극작품들에는 현대사상과 이념들이 풍성하게 들어있다. 그의 작품 속에서 언제나 플롯과 인물, 성격 및 주제들이 전통적인 형식을 따라 조화되고 있다. 지식인들에게 특히 지지를 받은 이념소재의 활용은 입센이 그 효시이다.그의 희극 작품들은 사상극, 특히 사상희극(comedies of ideas)이다. Shaw의 극에 대한 관점은 예술 지상주의와 근본적으로 상반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Shaw는 예술을 위한 예술, 혹은 오락을 위한 예술을 거부하고 극은 인간의 도덕적 정신적 개혁, 나아가 사회 개혁을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극은 철학이나 사상을 담고 있어야 하며 극의 가치는 담고 있는 내용의 가치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관객을 현실의 참모습을 파악하는 극적 동기를 수행하게 하여 쇼의 희극을 보면서 단순히 재미들이 쇼가 제시한 문제에 토론을 하게 했고 따라서 그의 극의 중요한 요소는 액션이 아닌 사상인 것이다.그의 극 형식의 특성을 보면 먼저 그가 세상을 조명하는 데 사용했던 역설적인 방법이다. 그는 겉으로 보이는 것 이면에 존재하는 진실을 항상 염두에 두었던 희극 작가였다. 그리고 토론극의 도입이다. 그는 기존 극의 기계적인 제시-상황-해결 구조를 제시-실험-토론의 형식으로 변화시켰다. 심각한 사상적인 충돌을 유도하는 데서부터 인물들이 토론을 통해 갈등이 표출된다. 그리고 그의 극에는 풍자와 아이러니가 활용되고 있으며 반 클라이막스 수법도 자주 쓴다. 쇼는 이런 과정을 통해 자신의 극을 사상극으로 만들었으며 토론 방식은 결국 인류와 사회의 발전을 위해 자신이 주장하는 것을 담은 교훈적인 내용을 독자나 관객이 수용하도록 한다. 그러므로 극 전체가 일종의 사상극인 것이다. Shaw에 대한 대체적인 비난은 사상에 대한 관심과 사상을 해설하려는 열성이 그의 극을 지나치게 지적으로 만들었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Shaw는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순수한 감정극은 더 이상 극작가의 소관이 아니다. 즉 그것은 음악가의 소관이다. 사상극 이외의 다른 드라마의 미래는 없다.” 그의 대표작인 (Man and Superman)에서도 태너와 앤의 대화를 비롯한 대부분의 대화는 쇼의 생명력 이론을 극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Ⅱ. 생명력(Life Force) 이론쇼는 생명력의 탐구(삶의 의지, 종족 보존의 본능)를 통한 초인사상을 구현하여 자신의 확고한 사회 개선의 주장을 민주화 방식인 토론의 형식을 극장에 활용한 것이다. 쇼에게 있어 드라마는 수월성을 지닌 대중 문학이며, 무대는 강단이자 설교단이었다. 쇼의 작품은 자신도 예상 못할 정도의 강연조였지만, 특유의 익살을 활용하여 그의 극작품에 맛을 냈다. 그것은 단순한 희극적 이완(comic relief)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내면의 진실을 표출하는 방편이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비록 강론식이었지만 가르치기 보다는 독자와 관 조직, 더 넓고 심오하며 더 강렬한 자아의식, 그리고 좀 더 명백한 자기 이해를 향한 삶의 부단한 열망’이 있다고 본다. 즉, 쇼는 본질적으로 낙관적이고 개량주의적인 견해를 피력한다. 이러한 열망에 부응하는 인간은 결국 쇼가 니체의 말을 빌려 초인이라고 부르는 존재로 진화한다. 그런데 초인을 낳은 것은 여자의 역할이고, 여자가 남자보다 생명력의 근원에 훨씬 더 가깝기 때문에 그만큼 여자가 남자보다 우위에 서 있다.Ⅲ. 여성관Shaw는 여성 해방 운동가였으며 따라서 빅토리아 시대의 전형적인 여성관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쇼는 동시대의 여성들로부터 화려하고 로맨틱한 의상과 애교에 찬 가짜 마스크를 벗겨 버리고 자유와 평등을 얻을 수 있게 하는 현실적인 통찰력을 부여하고자 노력하였다. 쇼 극에 있어서 여성의 지위는 빅토리아시대에 비해 거의 혁명적이라고 할 만큼 자유롭게 설정되어있다. 쇼는 여성이 갖는 우월한 가치를 인정하고 우주의 목적을 이루는데 더욱 긍정적으로 발휘되어야 할 적극적인 여성의 힘을 강조했다. 동시대의 남성작가들에 의해 그려진 여주인공들이 자기희생적 이며 이상적인 여인상을 구현하도록 되어 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Shaw의 여성들은 도덕과 이상을 거부하는 혁명적인 여인으로 나타난다. 그녀들은 관례적인 것들에 순응하기를 거부하고 남성들이 정해놓은 여성으로서의 행동규약을 따르기를 거부한다. 또한 법적으로나 지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열등한 위치에 있기를 거부한다. 이와 같이 Shaw의 작품 중의 주요 여성인물들로 하여금 가족의 이상, 의무감, 자기희생들에 반대하는 주장을 하게 함으로써 상당히 충격적인 효과를 나타낸다. 그래서 주요 여성인물들은 대체로 사랑스럽다거나 전통적 의미에서의 여성다운 여성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숙녀다운 여성에 반기를 드는 행동을 보여줌으로써 불쾌하게 여겨지는 정도의 여성들도 많다.?Shaw에게 있어서 여성은 생명력의 생물학적 대행자이며 미래 초인을 낳을 존재가 된다. 따라서 여인은 남성의 종속적인 존재가 아니라 중심적인 존재며 창이론)
    인문/어학| 2007.07.17| 5페이지| 2,000원| 조회(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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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문]역사적 시련과 평가(솔로몬이 죽고 난 후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되었다)
    역사적 시련과 평가솔로몬이 죽고 난 후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되었다.이스라엘 왕국은 10개의 지파를 대표하는 보다 큰 나라였고, 반면 유다 왕국은 단 2개 지파만으로 이루어졌다.북이스라엘은 한세기가 조금 지나서 유다 보다 먼저 멸망하였다.253년간 존속하였고 19왕이 나와서 통치하였는데, 이들 중에 한사람도 좋은 왕이 없었다. 한결 같이 하나님이 무서운지를 모르는 왕 들뿐이었다. 왕들끼리도 서로 모함을 하고 반기를 들어 살해하며 왕의 자리를 빼앗기도 하였다. 북방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여로보암까지도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고 사악했다. 여로보암은 자기 백성들이 유다 땅에 있는 예루살렘에 돌아가서 예배하지 못하게 하려고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세워놓고 백성들로 하여금 그곳에서 예배하도록 했다. 백성들은 르호보암에게서 떠나온 것을 후회하고 예루살렘에 돌아가서 예배하기를 원했다. 이러한 왕의 행동을 보신 하나님은 대단히 노하셨다. 그리하여 아히야 선지자를 여로보암에게 보내어 그의 집과 이스라엘이 멸망할 것을 경고하셨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쳐서 물에서 흔들리 는 갈대같이 되게 하시고 이스라엘을 이 좋은 땅에서 뽑아 저희를 하수 밖으로 흩으시리니(왕 상 14:15)" 과연 200년이 조금 지나서 아히야 선지자의 예언은 말한 그대로 이루어졌다. 여로보암이 죽자 우상숭배의 경향은 더욱 왕성해졌다. 특히 이스라엘의 제 7대 아합왕 때 에는 바알신 우상을 들여와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에게로 돌아갔던 일도 있었다. 이스라엘은 80년간이나 남방 유다와 전쟁이 계속되어서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많이 부패되어 갔고 백성은 도탄에 빠져들어 갔다. 아합 왕은 왕위에 오르자 이런 백성들을 건져 주기는커녕 다시 나올 수 없는 깊은 골짜기로 이스라엘 백성을 몰아 넣었다. 즉, 아합 왕은 두로 왕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맞아 우상숭배를 도입한 것이다. 이세벨은 성경에 나타난 여인 중에서 가장 요염하고도 파렴치한 여자였다. 그는 자기 남편 아합 에게 바알 신을 어느 신이 참인가를 증명 하는 겨루기를 하였다. 물론 하나님이 이기셨고 바알신이 졌다. 이런 일들로 인하여 이세벨은 독기를 품고 엘리야를 죽이려고 여러 면으로 시도하였으나 그의 기도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아마도 북방 이스라엘 왕 중에서 가장 훌륭하였던 임금은 예후일 것다. 예후는 아합의 아들 여호람의 뒤를 이은 왕이다. 그는 참다 못하여 이세벨을 죽이고 바알 신을 파괴하려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도 얼마 못 가서 불타던 열심이 식어졌습니다. 여로보암이 세운 금송아지를 파괴시키지 못하고 말았다. 예후 다음의 왕들도 여로보암이 지은 죄를 되풀이 하였다. 이와 같이 회개할 줄 모르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드디어 멸망시켜 버린다는 약속을 이행 하셨다. 하나님은 기원전 722년 그 당시 강대국인 앗수리아 군대를 시켜 이스라엘을 치도록 하셨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앗수리아로 붙잡혀 가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이것으로 북방 이스라엘의 역사는 끝나는 것다.남방 유다는 북방 이스라엘보다 적고 힘도 약하였다. 그러나 300년 동안의 역사를 통해서 이들은 하나님께로 가까이 접근하려고 애를 썼다. 대부분의 왕들은 대단히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하나님께 대한 충실한 신앙을 지켰다. 물론 이 나라에도 악한 왕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이스라엘 왕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이 모든 왕들은 다윗의 혈통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다. 북방 이스라엘은 그 건립 당초부터 나라가 부패했었고 힘이 약 하였다. 남방왕국도 이미 르호보암 왕 때 나라의 기운이 쇠하여지기 시작하였는데 그 후 아사왕, 여호사밧 왕과 같은 훌륭한 왕들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 크게 부흥이 되었다. 그렇지 만 어느 나라든지 나라가 부흥하기 시작하면 그 반면에 나라가 타락하기 쉬운 일이 많은데 남방 유다왕국도 곧 이스라엘로부터 바알 신을 도입해 왔던 것이다. 이 우상숭배는 히스기야왕 이 모든 우상을 전부 때려부수기 전까지 유행하였다. 아마 히스기야왕과 그의 손자 요시아왕이야 말로 유다의 역대 왕 짓까지 즐겼다. 이와 같은 어리석은 행동은 하나님의 눈에 분명히 거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서 유다 나라가 이러한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멸망 당할 것이라고 예언케 하신 것이다(왕하 21:10-15). 요시아 왕은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아가 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잃었던 율법책이 성전 안에서 발견되자 요시아 왕은 종교개혁을 단 행하였다. 이러한 일은 이스라엘의 역사상 보기 드물게 훌륭했다. 그러나 요시아 왕이 죽자 유다 나라는 또 다시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다. 그 후의 모든 왕 들은 다 약하고 악한 왕들뿐이었다. 얼마가지 못하여 유다는 바벨론의 위성국이 되어 버렸다. 기원전 606년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유다의 많은 백성들을 바벨론으로 잡아갔다. 이것은 약 100년 전에 앗수리아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잡아 간 것과 꼭 같았다. 남은 백성들을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가 다스렸지만 약 20년 후에는 이 마지막 왕과 남은 백성들마저 다 바벨론으로 잡혀갔다(기원전 587). 이러한 하나님의 형벌은 유다 민족 에게 큰 교훈을 남겨 주었다. 즉, 그들로 하여금 다시는 우상숭배를 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을 하게 한 것이다.바벨론 포로는 느브갓네살에 의해 4차례가 있었다.1)BC606 다니엘과 친구와 왕족을 포로로 데려갔다. 현재 이란에 다니엘 유적지로 탑이 남아 있다.2)BC597 보물과 여호야긴 왕과 10000명의 관리와 왕자가 포로로 데려갔다.3)BC586 예루살렘 성벽을 헐고, 불지르고 832명 포로와 여리고에서 붙잡은 시드기야(시드키아-제데키아) 왕은 눈을 빼서 함께 데려갔다.4)BC581 포로745명을 데려갔다. 예레미야와 많은 유대인은 그전에 애굽으로 도망갔다.활동한 선지자는 예레미아, 에스겔, 다니엘이다. 예레미아 '옛 계약 대신에 새 계약을 주신다.'고 예언 하였다. 에스겔 '하나님의 백성은 버리지 않고 고국으로 돌아간다'라고 바벨론에서 예언하였으며, 애굽은 아주 미약한 나라가 될 것과 (겔29장) 자국 인은 왕이 되지 못할 것지의 약 반세기 기간을 '바벨론 유수기'라고 한다.넓게는 바벨론 지방을 성경에서는 갈대아(칼데아)라고 부르기 때문에 BC734년의 북 이스라엘의 제1갈리리 포로와 BC722년의 제2갈리리 포로도 '바벨론 유수'라고 볼 수 있다.당시 유대의 총인구는 25만 정도로 추정되며, 포로 수는 '예레미아(야)서' 52장 30절에 의하면 포로의 수는 전후 3회에 걸쳐 4,600명이라고 기록되었으나 이것은 남자만의 수일 것이며, 부녀자를 포함하면 4만 5,000명 이상으로 추정한다. 귀환할 때에 많은 유대인들이 돌아오지 않고 터키나 동유럽으로 흩어져 살았다. 바울 사도가 전도할 때에 복음을 받아드리거나 전도를 방해한 사람들 일부는 그 후손들이다.[법궤에 대한 이야기가 이때부터 없다. 아마 포로 시절 때 잃어버린 같다.][그림: 포로기의 유다인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엘레판틴 파피루스(대영박물관 소장; Miller, 432).]바벨론에서 달라진 사상과 예배방식(사상)1)하나님은 성전 안에만 계시지 않고 어디든 계신다.(포로시대는 성전에 갈 수가 없었다.)2)고난은 조상의 죄가 아니고, 내 죄 때문이다.(포로생활이 조상의 잘못임으로 회개하지 않았다. 겔18:2)(예배방식)포로 때의 바빌론에서 종교적 자유는 허용되었으나, 예루살렘 신전에서와 같은 제의(祭儀)는 할 수 없었다. 대신 안식일 예배가 중심이 되어 회당(會堂)에서의 율법낭독과 기도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예배의식이 비롯된 것이 오늘날 교회예배의 모태가 되었다.그리고 귀환한 느헤미아, 에스라 등에 의하여 새로운 법전(法典)이 나오고 민족이 재건되어 유대교가 성립되었다.이스라엘과 유다는 하느님이 그들을 다스리기 위해서 세운 토라(율법)와 예언자들, 그리고 판관들의 말을 듣지 않았었다. 심지어는 왕조차도 신앙을 버렸으며, 많은 왕들은 이방의 신에게 어린아이를 잡아서 제물로 바치는 끔찍한 제의에 몰입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느님과 율법을 지키라고 충고하는 사제들을 죽였고, 자신의 사욕을 채우고 다른 종교를 섬기는데 성전해 유다로 귀환한 해인 538년까지 약 60년이 된다. 바벨론으로 끌려간 유다인들은 대부분 개척이 필요한 지역에 정착했다. 폐허된 도시나 산언덕에 새로운 공동체를 개척하고 나름대로 상업자본을 형성할 수 있었다. 서기전 5세기의 상업활동이 적힌 무라슈 토판에 유다인들의 이름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볼 때 당시 유다인들은 상당한 상권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유다인은 상당한 자치권을 누릴 수 있었고(겔 33:30-33), 사유재산과 노비를 가졌다(렘 29:5; 스 2:65). 나중에는 다른 민족과 마찬가지로 관직에도 오를 수 있었으며 자치공동체에는 유다의 장로들이 지도자로 활약하고 있었다(겔 8:1; 14:1; 20:1, 3). 그들은 바벨론의 유화정책으로 팔레스타인에서 지켜온 종교적 관습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유다의 지도층이 바벨론에 끌려온 사실을 중시하는 이들은 유다인들이 바벨론에서 회당중심으로 야훼신앙의 전통을 유지했던 것으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회당은 대체적으로 그 보다 수세기 후대에 설립된 것으로 밝혀졌다. 폐허된 옛 성전이 그들의 성전이 되었고 그곳에서 희생제사가 행해진 것으로 보도된다. 유다인은 정결의식을 행했으며 안식일과 할례를 중시했다. 특별히 안식일 준수와 할례는 유다인이 다른 민족과 어울려 살면서 자칫 잃어버리기 쉬운 민족적 정체성을 지켜주는 버팀목이 되었다. 당시 국제도시인 바벨론은 유다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유다인은 그곳에서 나름대로의 자본과 생활터전을 이루게 되고 관직에도 오를 수 있어서 소위 살만한 세상을 누리고 있는 사람도 많아졌다. 바벨론을 멸망시킨 페르시아의 고레스는 서기전 538년에 유다인을 포함한 이주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칙령을 반포하지만 그것을 달가와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때는 이미 포로로 끌려온 1세대가 거의 죽고 없었을 때며 2세와 3세들은 유다인보다는 바벨론의 상황에 더욱 익숙해져 있었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이다
    사회과학| 2007.07.17| 6페이지| 1,000원| 조회(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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