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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문학지리] 중국의 소흥
    ♤ 소흥의 소개1. 紹 興 (소흥)소흥은 절강성 중북부에 위치하고 서쪽은 항주, 동쪽은 영파와 마주보고 있다. 전형적인 강남수향의 풍경도시로 중국 역사상의 명인 주은래의 선조 대대로 살던 도시로도 유명하다. 시 전체 면적은 7901평방킬로미터, 총인구는 429만 명이다. 소흥은 유구한 역사와 함께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도시이다. 시 면적의 10%가 운하여서 동양의 베니스라고도 불린다. 시내에 이리저리 얽혀 있는 운하, 자동차가 지나기 어려울 만큼 좁은 곡선형의 다리가 인상적이다.중국의 다른 곳에 비해 부패가 심했던 이 도시는 그만큼 현대화도 뒤떨어진 도시다. 7000년 전 소흥은 인류의 활동이 많았던 것과 중화민족 발원지중의 한 지역으로도 알려지고 있다. 예로부터 명인이 많이 배출되었고 오랜 역사는 대량의 명승고적을 남겼다. 소흥의 평원은 넓고도 넓다. 지리 조건이 매우 우수하고 자연산물이 풍부함과 동시에 소흥은 "물의 고장, 다리의 고장, 술의 고장, 책의 고장"으로 불리고 있다.춘추전국시대에는 越(월)나라의 도읍지였다. 그래서「臥薪嘗膽(와신상담)」이라는 고사의 현장이기도 하다.2. 경제수준1998년, 시 전체 총생산액은 651.3억 원, 전년대비 15%나 증가하였다. 특히 농업은 안정된 곡식생산으로 계속적인 발전을 유지하며 현대화에도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공업경제의 거시적인 환경 추세에 따라 시장경쟁이 가속화되며 공업생산은 평균적으로 계속적인 증가를 보이고 있다. 건설업도 안정발전을 이어가고 있으며 상업을 비롯한 관광산업의 중점 3차산업으로 급속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각종 상품 시장의 총 교역액은 523억원, 그 중 주요 7개 시장의 교역액만 10억 원을 넘는다. 이미 중국 내 우수 여행 도시로 잘 알려져 있고 "소흥은 절강 남부 물의 고장- 고풍의 모습을 지닌 도시" 라고도 불려진다. 현재 관광시설 확충에 많은 자본을 투자하고 있다.3. 대외개방1999년 개방형 경제의 안정발전으로 시 전체 개인 사업자 수출총액은 6.55억 달러, 전년대비 23.5%노신이 12~17세까지 공부하던 삼미서옥이 있는데, 이 곳에는 조(早)자가 새겨진 노신의 책상도 볼 수 있다.2. 瀋園(심원)소흥 동남쪽에 있는 송나라 시대의 유명한 정원으로 남송의 시인 陸遊(육유)(1125-1200)의 고사가 유명하다. 육유는 금나라에 대해 철저한 저항을 주장한 우국시인이었다. 육유가 스무 살 되던 해에 그는 문학을 사랑하는 塘婉(당완)과 결혼하였으나 어머니가 그녀를 미워하여 결국 이혼에 이르고 만다. 그 후 10년 만에 육유는 그녀를 이 정원에서 재회하게 된다. 그때 느낀 슬픔을 그는「 頭鳳(차두봉)」이라는 유명한 시로 표현했다. 이 시를 읽은 당완은 또「차두봉에 부쳐」라는 시로 화답하고 곧 숨을 거두었다. 육유는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팔십 평생을 사는 동안 많은 시를 남겼다.3. 소흥 양조장중국 8대명주의 하나로 손꼽히는 紹興加飯酒(소흥가반주)는 멥쌀과 밀을 鑑湖(감호)의 맑은 물로 빚어낸 것으로 2천 4백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중국의 대표적인 황주이다. 이 술을 거북모양으로 생긴 독특한 병에 넣어서 판다. 소흥역에서 광장끝 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加飯酒(가반주)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술을 빚는 소흥양조장이 있다. 부근 일대에는 술 향기가 그윽하다.소흥주는 우리나라의 약주나 청주와 비슷한 순한 술인데 중국요리에 잘 어울린다 소흥교외에 있는 물을 쓰는데, 호수에 함유된 미세한 양의 미네랄이 작용하여 그윽한 향기를 낸다고 한다. 소흥주는 그 향기와 빛깔이 좋고 맛이 그윽하여 「동방의 명주(名酒)」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역사는 3천년 이상이나 거슬러 올라간다.월나라 왕이 오나라 왕에게 이 소흥주를 선물로 많이 보냈는데, 오나라 군대가 물마시듯 마셔대서 술항아리가 산더미처럼 쌓였다고 한다. 소흥주를 담는 그릇은 독특한데 주둥이가 큰 둥근 항아리를 봉하고 이것들을 뉘여서 쌓아 놓는다고 한다.4. 蘭亭(난정)시내에서 남서쪽으로 12㎞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왕희지(王羲之)가 353년에 41명의 명사들과 함께 유상곡수(流觴曲水)에서 잔이으로 수출량도 많다. 원홍주는 소흥주 전체 생산량의 80%를 차지할 정도로 생산량이 많다. 1979년의 전국평주회의에서 우량주로 선정되었다. 원홍주(元紅酒)라는 이름은 술가마에 붉은 칠을 하므로 붙여진 것이라 하기도 하며, 과거시험에 장원하듯이 첫번째로 맛있는 술이라는데서 붙여진 것이라도 한다.향설주(香雪酒)는 물 대신에 소흥지방의 조소(糟燒)를 사용하여 빚으므로 도수가 20%정도로 비교적 높으며 달고 향이 진하다.따뜻한 물을 타서 마시기도 하고 탄산수를 타서 마시기도 한다. 선양주는 원홍주를 2, 3년 정도 묵혔다가 빚은 것으로, 옛날 어떤 선량한 노파가 신선으로부터 이 술을 얻었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고 한다. 우량주로 선정된 바 있다.이밖에도 소흥주에는 유명한 화조주(花雕酒, 후아ㄸ오지우)가 있다. 이것은 가반주의 하나인데 화조주는 백년까지 묵히기도 하므로 소흥주중에서도 특히 고급에 속한다. 소흥 지방에서는 예로부터 딸아이를 갖게 되면 가반주를 빚어 미녀나 꽃을 그려 넣은(花雕) 항아리에 담아 두었다가 딸의 혼례를 치르는 날 축하주로 내놓는 습속이 있었다고 한다.그래서 이 술은 화조주라고도 하고 여아주(女兒酒, 뉘얼지우)라고도 한다. 이런 까닭에 술을 얼마큼 묵혔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가반주나 화조주나 모두 한가지로 가반주에 속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특히 오래 묵힌 술은 이름 앞에 진년(陳年) 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여기서 진(陳)은 오래되었음을 뜻하는 말이다. 중국사람들이 좋은 술은 오래 묵기를 두려워 하지 않는다(好酒不 陳)고 할 때도 마찬가지의 뜻이다. 노신의 소설 「풍파(風波)」와 「공을기(孔乙己)」에는 함형주점(咸亨酒店)이 등장한다. 소흥의 노신 생가 근처에 이 주점이 새로 문을 열어 관광객의 발길을 끌고 있다. 콩안주와 함께 마시는 소흥주의 맛이 각별하다월극우리에게 중국의 전통극은 주로 경극이 알려져 있으나, 중국에는 각 지방마다 다른 명칭의 지방극이 300여종이나 된다.그 중 근현대에 출현하여 성숙한 새로운 극종 가운데 가淳化閣帖)》이라는 법첩에는 그의 편지가 많이 수록되었고, 당(唐)나라의 회인(懷仁)이라는 중이 고종(高宗)의 명을 받아 672년에 왕희지의 필적 중에서 집자(集字)하여 세운 ‘대당삼장성교서비(大唐三藏聖敎序碑)’ 등도 그의 서풍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그 밖에 《상란첩(喪亂帖)》 《공시중첩(孔侍中帖)》 《유목첩(遊目帖)》 《이모첩(姨母帖)》 《쾌설시청첩(快雪時晴帖)》 등의 필적이 전하여온다. 그러나 이것들은 왕희지의 육필(肉筆) 그대로는 아니고 진적(眞跡)과는 많이 다를 것으로 짐작된다. 당나라 태종(太宗)이 왕희지의 글씨를 사랑한 나머지 온 천하에 있는 그의 붓글씨를 모아, 한 조각의 글씨까지도 애석히 여겨 죽을 때 자기의 관에 넣어 묻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전하여오는 필적만 보아도 그의 서풍(書風)은 전아(典雅)하고 힘차며, 귀족적인 기품이 높다.※ 난정집서 [蘭亭集序]《삼월삼일난정시서(三月三日蘭亭詩序)》라고도 한다. 353년(永和 9) 3월 3일에 사안(謝安)·지둔(支遁) 등 41인이 회계산(會稽山) 양란저(陽蘭渚)의 정자에 모여서 제를 올리고 술을 마시며 시를 지었는데, 기사(記事)와 영회(詠懷)를 모아 문집을 만들고 왕희지가 서를 지었다.서(序)에는 우선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자연의 경치를 묘사하고 이어서 모인 사람의 감상을 적었는데, 소리와 색이 어울려 정경이 서로 일어나서 성대한 모임을 부각시켰을 뿐만 아니라 문장을 지어 의론을 발표하는 데 있어서도 자연스럽고 적절한 배치를 했다. 계속해서 성대한 일도 영원하지 못하고 길고 짧은 것도 서로 변하듯이 흥이 다하면 슬픔이 온다는 감탄을 표현했다. 마지막에는 서를 지은 연유를 밝혀 후대 사람들에게 감흥과 회포를 제공했다.문장은 삶과 죽음, 그리고 장수와 요절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것을 황당무계한 것으로 생각해 당시 성행하던 허무주의 사상과 언론을 비판하며 현실에 대한 낙관적인 자세를 중시했다. 이것은 높은 사상적 경지를 보인 것은 아닐지라도 서로 속고 속이는 과정에서 구차히 살아가기를 수루조두최락월 삼십종군금백발笛里誰知壯士心 沙頭空照征人骨 적리수지장사심 사두공조정인골中原干戈古亦聞 豈有逆胡傅子孫 중원간과고역문 기유역호부자손民忍死望光復 畿處今宵垂淚痕 귀민인사망광복 기처금소수루흔호로와 화의하여 십오년 지났거니싸움없이 변방 장군 허송세월 보내어라.아늑한 부자집엔 가락 맞춰 춤을추나살진말 늙어죽고 활시위 끊어졌네수루의 조두소리 달 지기를 재촉하고삼십부터 병사생활 칠흙머리 백발이라.장사 맘 우는 피리 뉘라서 안다더냐?전장터엔 장병 백골 달빛 내려 청량하다.예로부터 중원에 싸움이 잇었다만어이하여 호로들이 자손 길러 살아갈까?중원백성 죽음 참고 광복을 고대하여이방도 곳곳에서 눈물 흘리랴!육유는 나라를 사랑하는 열렬한 애국자 였으므로 부패무능한 집권자들의 굴욕적인 화의 정책에 대하여 지대한 분개를 표시하였다. 그는 관신의 달과 같은 시에서 봉건지배층이 나라를 망치는 비루한 행동과 호화방탕한 생활에 정신을 파는 정형을 폭로하고 통격하였다.육유의 시 가운데에는 애국적 사상 감정을 토로한 작품 외에도 국민들을 잔혹하게 수탈하는 봉건지배계급의 잔인성을 폭로하고 국민들이 받고 있는 고통에 대하여 동정한 작품이 많다.농부의 탄식가에서는 당대의 계급모순을 심각하게 반영하였다.농부의 탄식가有山皆種來 有水皆種粳 유산개종래 유수개종갱牛領瘡見骨 叱叱猶夜兼 우령창견골 질질유야겸竭力事本業 所願樂太平 갈력사본업 소원락태평門前誰剝啄? 縣吏征租聲 문전수박탁? 현리정조성一身入縣庭 日夜窮苔榜 일신입현정 일야궁태방人誰不憚死? 自計無由生 인수불탄사? 자계무유생還家欲具說 恐傷父母心 환가욕구설 공상부모심老人 得食 妻子鴻毛輕 노인당득식 처자홍모경비탈마다 밀심고 물댄땅 곡식 심었네소허리 헐러헐러 뼈 보이나 이랴이랴 밤에도 밭을 가누나죽을힘 다 내어 농사하면서 태평세월 보내자 바라고 있네우리집 문 두드리는자 누구냐?벼슬아치 조세내라 소리치누나의로이 동현에 붙잡혀가 밤낮없이 곤장을 맞고 맞았네그 뉜들 죽음을 꺼리지 않으랴만 도저히 살길을 찾을수 없네집에와 모조리 하소연하자하나 부모님 속상할가 두려워 었다.
    인문/어학| 2003.06.01| 16페이지| 2,000원| 조회(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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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측천무후
    【 시작하기 】어릴적에 텔레비젼에서 나는 "측천무후"라는 프로그램명인 중국 무협 씨리즈 물을 본 적이있다. 뛰어난 미모를 가진 첨엔 참 순수한 인물이었으나 갖은 고초를 겪으며 독해져가던 측천무후를 보며 나는 이것저것 생각했던 것 들이있다. 물론 그 무협물이 진실만을 그린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오늘 여동생에게 질문을 하나 던졌다. 가장 기억에 남는 중국역사적 인물을 하나만 말하라고 여동생은 거리낌없이 측천무후라고 대답하였는데 이유를 물어보니 삼국지에 나오는 그런 영웅들보다는 오히려 아주 인간적이면서도 중국역사상 보기 힘든 캐릭터인 측천무후가 더 기억에 남는다는 것이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중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여황제였던 자기 자식까지 스스로 자신을 위해 죽이던 그녀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나는 그래서 이번 기회를 개기로 측천무후에 대해 더 알아보고자 한다.【 황후가 되기까지 】성신황제(聖神皇帝) 측천무후, 즉 무측천(武則天: 624~705)의 본명은 무조(武照), 당(唐) 고종(高宗)의 황후였으나 고종이 죽은 후에 황제에 등극하였다. 황제로 16년간 재위하였지만 실제로는 50여년간 집권을 한 중국역사상 유일무이한 여자황제이다. 무측천은 황제에 등극한 후에 이름을 "조(明 아래에 空이 있는 글자. 무측천이 새로 만든 글자임)"로 고쳤다.측천무후를 우리 나라에서는 흔히 "칙천무후"라 하기도 하고 심지어 "즉천무후"라 하기도 한다. 이는 한자의 독음으로 빚어진 문제인데, 우리 나라에서 편찬된 자전에서 "則"자의 표준음을 "칙(법칙, 본받다)"과 "즉(곧)"으로 표기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면 "측천무후"와 "칙천무후", "즉천무후" 중에서 어느 것이 맞는 표현일까?먼저 "則"의 표준음이 "칙"과 "즉"임에는 분명하지만 그것이 "법칙, 본받다"는 뜻일 경우 본음은 "측"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한자어의 표준음을 정할 때 일반적으로는 당연히 본음을 표준음으로 삼았지만, 때에 따라서 속음이 본음 보다 더 널리 사용되는 경우에는 속음 아주 낮은 등급의 후궁)으로 삼았다. 이때 무측천은 불과 14세의 어린 나이였다. 무측천이 황궁에 들어온 후 태종은 그녀에게 "무미(武媚)"라는 칭호를 내렸다. 그러나 그녀는 성격이 다소 거친데다 여자로서 애교를 부릴줄 몰랐기 때문에 좀처럼 태종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 당시 그녀의 성격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일화가 하나 있어 소개한다.그녀가 갓 황궁에 들어온 어느날 태종은 후궁들을 데리고 성질이 포악하여 "사자총(獅子총, 총=馬+悤)"이란 이름을 가진 사나운 말을 보러 갔다. 태종은 사자총을 보고 웃으면서 말하였다."그대들 중에서 저 말을 제압할 재주를 가진 사람이 있겠는가?"후궁들은 아무도 감히 나서서 대답을 하지 못하였지만 무측천은 그것을 할 수 있다고 대답하였다. 태종은 의아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그 방법을 물었다. 그러자 무측천은 이렇게 대답했다."저에게 쇠채찍과 철퇴·비수만 주시면 됩니다. 먼저 저 말이 말을 순순히 듣지 않으면 채찍으로 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철퇴로 머리를 후려치고, 그래도 계속 난동을 피우면 비수로 저놈의 목을 따 버리겠습니다."실로 연약하고 아름다운 여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렵다. 이러한 거친 성격을 가진 여자를 그 누가 쉽게 좋아할 수 있었겠는가! 결국 무측천은 황궁에 들어간지 12년이 지나도록 태종을 위해서 단 한 명의 자식도 생산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재인의 직위에서 더 이상 올라가지도 못하였다. 이러한 무측천이었지만 오히려 태종의 아들 이치(李治: 고종)는 일찍이 태자 시절에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반해 버렸다. 이치가 태자 시절에 무측천과 어느 정도 깊은 관계를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역사 기록이 없어 확실히 알 수는 없다. 흔히 세간에 전해오는 그들에 관한 이야기는 허구화 된 소설일 뿐이다.649년(정관 22년) 태종이 세상을 떠나자 황실의 법도에 따라 무측천은 감업사(感業寺)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었다. 그 이듬해 태종의 기일(忌日)에 황제가 된 고종 이치는 분향차 감업 때 쯤이면 분위기를 파악하고 먼저 나가곤 했다. 무측천은 황후 왕씨를 제거하는데 바로 이 기회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무측천은 황후 왕씨가 딸애를 보러 왔다가 먼저 나간 뒤에 자기의 딸애를 목졸라 죽이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이불로 덮어두었다. 이때 고종이 들어오자 그녀는 웃으면서 고종을 맞이하였고, 잠시 후 고종이 이불을 젖혀보니 이미 딸애는 죽어 있었다. 깜짝 놀란 고종은 조금전에 누가 이 방에 왔다 갔는지 물었다. 그러자 무측천은 대성통곡을 하면서 조금전에 이 방에 왔다 간 사람은 황후밖에 없다고 말하였다. 이에 고종은 장손무기(長孫無忌)와 저수량(저遂良, 저=衣+者) 등과 같은 대신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황후 왕씨를 폐위하기로 결심하였다. 654년 겨울(고종 永徽 5년 10월 13일)에 고종은 마침내 무측천을 지지하던 이의부(李義府)와 허경종(許敬宗) 등의 주장을 받아들여 황후 왕씨와 소숙비를 폐서인 시킨다는 조서를 내렸다. 이로부터 6일 후인 10월 19일 무측천은 공식적으로 황후에 책봉되었다. 이렇게 하여 황후가 된 무측천은 황후 왕씨와 소숙비를 그대로 놔두지 않았다. 그 두 사람에게 각각 곤장 백대씩을 친 다음 잔인하게도 두 다리를 잘라서 산채로 술항아리 속에 넣어두고 고통 속에 죽어가게 하였다.【 자식을 죽인 비정한 어머니 】무측천은 황후가 된 후에 먼저 가장 위협적인 존재인 장손무기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그녀는 장손무기에게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명을 둘러씌워 외지로 추방한 다음 자살을 강요하였으며, 그후 장손무기와 그를 따르던 사람들도 모두 제거하여 후환을 없앴다. 그리고는 ≪성씨록(姓氏錄)≫을 개편하여 자신의 성씨인 무씨(武氏)를 최상에 놓고 문벌을 중시하던 당시의 사회적 풍토 속에 자신의 가문에 대한 위치를 확고히 해 두었다. 고종은 무측천의 전횡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급기야는 재상 상관의(上官儀)를 비밀리에 불러서 그녀의 폐위 문제를 논의했다. 그러한 고종의 의도를 파악한 상관의는 무측천의 폐위에 관한 조서를 작성하였으나 대신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무측천은 황위를 계승할 수 없었다. 이홍이 죽은지 한 달 후에 둘째 아들 이현이 태자에 책봉되었다. 이현은 형 이홍에 못지 않을 정도로 총명하였을 뿐 아니라 정치적 역량도 뛰어났다. 더욱이 재상들이 주변에서 그를 잘 보좌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측천은 다시 권력을 잃을지 모른다는 위기를 느꼈다. 결국 무측천은 다른 사람을 교사하여 태자가 여색을 탐한다고 모함하게 하였다. 680년 8월 이현은 태자의 신분을 박탈당하고 폐서인 되었다가 나중에 다시 파주(巴州)로 추방되었다. 684년 무측천은 중종 이철을 폐위시킨 사흘 후에 파주로 사람을 보내어 이현을 죽였다. 이현이 폐서인 된 이튿날 셋째 아들 이철이 태자에 책봉되었다. 683년 고종은 황위를 태자에게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으며, 이로써 태자 이철이 황위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중종(中宗)이다. 중종은 그의 형들에 비해 아주 나약했기 때문에 무측천은 처음부터 순순히 그의 즉위를 수용하였다. 그러나 중종은 황제에 즉위한 후에 황태후가 된 무측천을 안중에 두지 않고 그녀의 역량을 과소평가했다. 중종은 황후 위씨(韋氏)와 그 일족들을 총애하여 먼저 자기의 장인 위현정(韋玄貞)을 재상에 임명하였다. 고종이 임종시에 임명하였던 고명(顧命) 재상 배염(裵炎)이 동의하지 않자 중종은 안하무인격으로 그에게 말했다."내가 천하를 모두 그에게 주었는데 어쩌겠단 말이오?"배염은 무측천에게 달려가서 사실을 그대로 보고하였다. 이 말을 듣고 화가 난 무측천은 즉각 대신들을 건원전(乾元殿)에 소집하여 중종을 폐위시켜 여릉왕(廬陵王)으로 강등한 다음 그를 궁궐 깊숙한 곳에 유폐시켰다. 중종을 유폐시킨 후 무측천은 자기의 막내 아들 이단(李旦), 즉 예종(睿宗)을 황제로 옹립하였다. 이때부터 그녀는 예종의 정사 참여를 배제한 채 조정의 대권을 장악하고 모든 대소사를 직접 관장하였다. 무측천은 먼저 낙양(洛陽)의 명칭을 신도(神都)라 고치고 향후 새로운 왕국의 도읍으로 사용하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그여러 가지 방법을 이용하여 여론을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형성해 나갔다. 예를 들면 그녀의 조카 무승사(武承嗣)는 사람을 시켜 "황제의 모친께서 세상을 다스리시니, 황제의 업적이 영원히 번성하리라(聖母臨人, 永昌帝業)"라는 글귀가 새겨진 흰돌을 낙수(洛水)에서 가져왔다고 하면서 바치게 하였다. 그것을 본 무측천은 매우 기뻐하여 연호를 "영창(永昌)"이라 하였다. 당 고조 이연의 11번째 아들 이원가(李元嘉)의 반발이 있었지만 무측천은 즉시에 그것을 진압하고 황제의 등극을 향하여 순조로운 행보를 계속하였다. 이로부터 더 이상 그녀의 권세에 도전할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었다.690년 9월 9일 중양절(重陽節)을 기하여 무측천은 마침내 예종을 폐위하고 직접 황제의 자리에 올라 스스로 "성신황제(聖神皇帝)"라 칭하였다. 그리고 국호를 "주(周)", 연호를 "천수(天授)"라 하고 준비해 둔 도읍지 낙양으로 천도하였다. 이로써 그녀는 중국역사상 유일무이한 여자 황제가 되었던 것이다. 역사에서는 그녀를 "무주(武周)"라 일컫는다. 무측천이 황제에 등극했을 때 그녀의 나이는 이미 67세였으니, 중국역사상 그녀는 황제에 즉위한 나이가 가장 많은 황제가 되었다. 무측천은 황제에 즉위한 후에 수구세력의 반항을 제지하기 위하여 색원례(索元禮)·주흥(周興)·내준신(來俊臣) 등과 같은 악독한 관리를 임명하여 참혹한 형벌로써 수천명에 달하는 당왕조의 종실과 대신들을 주살하였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세력을 넓히고 다지기 위해서 많은 인재를 등용하기도 하였다. 과거제도는 위진(魏晋) 이래로 신분에 따라 관리를 임용하던 악습과 그로 인한 폐단을 타파하기 위하여 수(隋) 양제(煬帝) 시기에 처음으로 시행되었으나 무측천 시기에 이르러 제도적으로 정착되기 시작하였다. 이때 새로 임용된 관리들 중에는 미천한 집안의 출신들도 많았다. 그들은 신분의 상승을 필요로 하였고 무측천은 그러한 그들의 대변자가 되어 주었다. 이로써 많은 문인학사들은 무측천의 지지세력으로 성장하였고, 무측천은 수구세력을 타파하여 자
    인문/어학| 2003.05.31| 9페이지| 2,000원| 조회(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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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의 개봉
    ♠ 개요개봉시는 하남성의 성 소재지인 정주시와 인접되어 있으며, 면적이 6,444㎢이고, 인구는약 452만 명(1997)인 고풍스러운 명. 청때의 건물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TV에서 상영한 포청천의 배경이 되는 도시이기도 하다. 황허강[黃河] 남쪽의 충적평원에 위치하고 있으며 롄윈[連雲]~란저우[蘭州]간 룽하이철도[海哲道] 연변에 위치하는 중국 7대 고도(古都)의하나이며, 국무원에서 처음으로 공포한 23개 역사문화 명성중 하나이다. 개봉시는 5개 구와5개 현을 관할하며, 현재 구는 60만명 정도 되는데 북송시대에는 100만명을 넘는 대도시였고 강남의 여러 도시와 수로로 연결되어 있어『천하의 요회(要會)』라고 불렀다.또, 중국인들은 서안(西安), 낙양(洛陽), 개봉(開封)의 세 도시를 3대 고도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중국 최초의 왕조 하의 수도가 바로 개봉시 부근의 진류진陳留鎭이다. 전국시대의 위(魏)나라를 비롯해 오대의 양(梁), 북송(北宋), 금(金) 등 여러 왕조의 도읍이었던 유서깊은 도시이자, 중화민족의 발상지로써 2천7백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북방의 수성’으로호칭될 만큼 옛 건축이 많아 여행관광의 명승지이다. 시내 곳곳에는 옛 송나라 시절 유적으로 가득차 있으며, 소비를 중심으로 한 오래된 도시였으나 요즘 들어 서서히 공업이 발달하고 있다. 그리고 가을(10월 중순)에 벌어지는 개봉의 국화축제도 유명한데 이 축제가 시작할시기에 맞춰서 가면 송대 역사 재현 이벤트나 국화꽃과 관련한 볼거리가 많을 것이다. 또중국에서 최초로 유태인이 정착한 도시이다. 북송시기에 유태 상인들이 천축(지금의 인도)을거쳐 개봉에 들어와 송진종(宋眞宗)황제의 동의를 거쳐 한족 성씨를 받고 장기적으로 정착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오늘날까지 개봉은 유태인의 후손이 적지 않으며 유태인들의 종교사원 유태회당의 유적과 돌비석을 볼 수있다.공업은 공기업이 2천여개로 밸브, 바인더, 비료 등 국가 골간기업이 산재해 있으며 면종류,방직품, 합성세제, 발전소, 맥주 등이 유명하다. 수출상다고 한다. 어느 곳의 懸河는 개봉시보다 13m나 높다.*입장시간&입장료 - 7:00~18:30(무휴) 20元 (학생증 제시 할인가 50%)*교통편 - 10 '포공사'하차5. 송도어가 (宋都御街)개봉 중심가에 위치한 송도어가는 송대의 건축을 약 100M이상 복원해 놓은 거리로 중국은행부터 시작해서 각종 상점, 식당들이 들어서 있으며 끝으로 가면 용정공원과 청명상하원의입구가 이어져 있다.6. 고루광장 (鼓樓廣場)밤이 되면 고루광장을 비롯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큰 야시장이 형성되는데 개봉의 야시장은 전국적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해질 즈음 시작해서 새벽 2∼3시 정도에 끝난다7. 서점가 (書店街)고루광장을 벗어나 조금 지나면 서점가로 접어든다. 古書를 비롯해 유치원생부터 고등학생참고서, 대학 서적, 현대 출판 물, 잡지등이 있다. 고루광장과 마찬가지고 밤이 되면 야시장이 형성되는데 잡다한 생활필수품, 옷, 가구등이 주류.8. 철탑 (鐵塔)개봉 동북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정식명칭은 개봉사탑(開封寺塔). 북송원년 (1049)에 건립한13층 팔각형 탑인데, 높이는 55.58m에 이르고 탑의 표면 전체를 갈색의 유리로 씌워 멀리서보면 갈홍색 빛이 난다. 탑내에는 계단이 있어 꼭대기까지 오를 수 있도록 만들었고 꼭대기에서 개봉시의 모습을 조명할 수 있다. 철탑 남쪽 전각내에는 아직도 북송때 주조하여 인도해 온 銅彿이 보존되어 있는데 높이가 5m가 넘는다. 이 철탑은 하남대학 바로 뒤편에 위치.*입장시간&입장료 - 20元(학생할인 가 50%, 탑 내부 입장료는 할인불가 10元)9.우왕대(禹王臺)하(夏)왕조의 시조인 우왕의 사당으로 명나라 때 세워졌다. 춘추전국시대 진(晋)나라의 대음악가 사광(師曠)이 이곳에서 악기를 연주했다고 해서 취대(吹臺)라고도 부른다. 우왕대 양쪽에는 각각 작은 사당이 있는데, 동쪽 것은 삼현사(三賢祠) 로 당나라의 시인 이백(李白)고두보(杜甫) 그리고 고적(高適) 세 사람이 취대에 올라가 시를 읊었던 곳이다. 서쪽은 수 덕사(水德祠)라고 하는데, 부끄러웠기 때문이다.[주] 대량(大梁) :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내 개봉(開封:카이펑).2. 運用之妙(운용지묘)움직일 운, 쓸 용, 어조사 지, 묘할 묘. [출전]《宋史》宋나라의 용장 岳飛(악비)가 한 [그때 그때 변하는 상황에 따라 활용하고 대처하는 것은사람의 마음에 달린 것이다]란 말에서 나옴.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의 마음 여하에 달린 것이기 때문에 임기응변이나 융통성의 중요함을 강조한 말이다.여진족이 세운 金나라 대군이 남쪽으로 밀고 내려와 송나라 수도 개봉을 함락시켰다. 황제휘종과 그 아들 흠종 그리고 황후 고관들이 사로잡혀 북방으로 끌려갔다. 이로써 송나라는사실상 멸망한 것이다. 이 때까지의 9대 168년간을 北宋(북송)이라 하고 흠종의 동생인 고종이 강남으로 난을 피해 항주에 도읍하여 송나라를 이은 후부터 남송이라 한다.이때 남쪽으로 내려가지 않고 금나라에 항전한 사람이 宗澤(종택)이었다. 그의 휘하에 악비라고 하는 젊은 장수가 있었다. 그는 과감한 작전으로 수차례 공을 세웠다. 어느날 종택은악비에게 말했다. "그대의 용기와 능력은 옛 맹장도 못미칠 것 같네. 하지만 한가지 해주고싶은 게 있어. 그대는 野戰(야전)을 좋아하는데 그건 최상책이라고는 할 수 없네."이렇게 말하면서 종택은 군진을 펴는 방식을 그린 陳圖(진도)를 펼쳐 보였다. 그러나 악비는수긍하지 않고 말했다. "진을 쳐놓고 싸우는 건 전술의 상식입니다. 하지만 그 진을 운용하는 묘는 마음 하나에 달려있다(運用之妙 存乎一心)고 생각합니다" 악비는 백성들의 추앙을받는 명장이 되어 금나라 군사를 무찔렀지만 금나라와 화친을 주장하는 秦檜(진회)의 모함으로 목숨을 잃는다.♠개봉과 관련된 인물1. 포증(包靑天)포청천(包靑天: 999~1062)은 북송시대의 유명한 정치가이다. 자는 희인(希仁), 이름은 증(拯),여주(廬州) 합비(合肥: 지금의 안휘성 합비) 출신이다.그는 단주지주(端州知州), 감찰어사(監察御使), 삼사호부판관(三司戶部判官), 경동(京東)·섬서(陝西)·하북로전운사 그는 한 개인과 하나의 사건을 위해서 어떠한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고 집요하게 조사하여 공정한 판결을 내렸다.포증에 의해 탄핵된 사람들은 모두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었으며, 그들 중에는 포증보다 관직이 높은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 강서전운사(江西轉運使) 왕규(王逵)와 송상(宋庠)·장요좌(張堯佐)등의 탄핵은 모두 전국을 뒤흔든 대사건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장귀비(張貴妃)의 백부 장요좌를 탄핵한 것은 가장 전형적이면서도 대표적인 사건이다.현재까지도 중국인들은 포공의 사당을 찾아가 그를 신으로 숭배하고 있다. 그의 공평무사한판결과 청렴결백한 생활, 예리한 통찰력은 많은 대중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이로써 그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신적인 인물로 승화되었던 것이다.그는 민간종교에서 숭배하는 신이지만 그것은 보통 사람들이 믿는 종교적인 "하느님"과는다르다. 즉 그는 하늘에서 강림한 신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으로서 초인적인 신으로 변화된"인신(人神)"인 것이다.포공에 대한 숭배는 마카오에서 가장 성행한다. 지금도 마카오에서는 매일 포공의 사당을찾아가서 복을 기원하는 사람들의 행열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이러한 숭배는 포공이 선한 사람을 보호해주고 악한 사람을 징벌해 주며, 재앙을 없애주고복을 내려줄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포공에 대한 숭배는 사회 정의와 바른 정치의 실현에 숭배라고 할 수 있다.2. 휘종 徽宗 [1082~1135]중국 북송(北宋)의 제8대 황제(재위 1110∼1125).이름 조길(趙佶). 신종(神宗)의 아들. 형인 제7대 황제 철종(哲宗)의 병사(病死)에 따라 즉위하였다. 처음에는 신종의 황후였던 향태후(向太后)의 섭정하에 신구양법(新舊兩法)을 절충한정치가 시행되었으나, 즉위 이듬해에 태후가 죽고 친정(親政)을 시작하자, 신종이 단행하였던 신법을 채용하였다. 그러나 정치는 채경(蔡京) 등 총신(寵臣)들에게 떠맡기고, 휘종 자신은 태평시대에 궁정 정원 등을 조영(造營)하여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였다.한편, 문화재를 수집 보이 중앙정부로 하여금 낙양과 장안을 버리지 못하게 한 것이었다.그러나 강남의 경제력이 중원을 능가함에 따라 개봉은 지리적 이점으로더욱 중요해졌다. 그러나 상공업에 유리하다는 것은 그만큼 개방적이어서 방어에 취약하다는 말과도 통한다. 가뜩이나 군대의 힘을 억제한 약체송이 수도를 제대로 건사하지 못했음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결국 여진의금에게 두 명의 황제가 사로잡히면서 개봉의 시대는 금새 저무는 것이다.제목은 로 된 곳도 있다.· 水(변수): '碧水(벽수)'로 된 곳도 있다.·隋家宮闕(수가궁궐): 운하의 둑 위에 지어졌던 이궁들을 말함.·已(이): '盡(진)'으로 된 곳도 있다.·長堤(장제): 긴 둑. '隋堤(수제)'로 된 곳도 있다.·愁殺(수살): '殺(살)'은 조사. 근심하게 한다.♣감상♣이 시는 수의 멸망을 슬퍼하는 회고시. 유우석의 시와 마찬가지로 수의 멸망과 버들을 연관시키는 것은 당시에서 매우 흔하게 볼 수 있는 사상이다.중국 성당기(盛唐期)의 시인으로 국적은 중국 당(唐) 출생지는 중국 후베이성[湖北省] 장링[江陵]출생이다. 태종(太宗) 때의 재상 잠문본(岑文本)의 증손으로 744년에 진사가 되었다.안서(安西:新疆省吐魯番 근처) 절도사의 서기관으로서 두 번에 걸쳐 북서변경 요새의 사막지대에 종군한 일이 있는데, 그 체험을 살려서 쓴 새외시(塞外詩)는 풍부한 상상력과 이국정서를 생생하게 그려 당시(唐詩) 가운데서는 독자적인 지위를 차지한다. 그 집(集)을 《잠가주집(岑嘉州集)》이라 한 것도 마지막 벼슬이 가주(四川省樂山縣)의 자사(刺史)였기 때문이다.山房春事 산방춘래岑參梁園日暮亂飛鴉 양원일모난비아極目蕭條三兩家 극목소조삼량가庭樹不知人去盡 정수부지인거진春來還發舊時花 춘래환발구시화양원에 해 저물자 까마귀 어지럽게 나는데,끝까지 바라봐도 적막하니 두서너 집 뿐이네.뜰 앞 나무는 사람들 모두 가버린 줄 모르고봄 되지 오히려 옛날 꽃을 피운다.·山房(산방): 산 속의 집. 보통 선방, 승방의 의미로 많이 쓰이나, 여기서는 양원 옛터를 말한다.·春事(춘사): '春한다.
    인문/어학| 2003.05.31| 27페이지| 2,000원| 조회(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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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문학지리] 중국의 항주 평가A+최고예요
    Ⅰ.항주 개요항주는 절강성(浙江省)의 성도로 산과 호수, 샘, 정원으로 둘러싸인 옛 도시다.옛말에 '하늘에는 천당, 땅위에는 소주와 항주(上有天堂 下有蘇杭)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진(秦)나라 때(기원전 221-206) 전당현이 설립된 이후 2천년의 역사를 갖는 도시로 한나라때에 항주로 불리기 시작했으며, 항주는 화하(華夏)문명의 발상지이기도 했으며, 수나라 양제에 의해 대운하가 개설되고 남북을 잇는 교통과 무역의 주요거점이 되었다.마르코 폴로는 그의 견문록에서 이곳 항주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곳 이라고 했다. 또한 당나라 때에는 백낙천이 송나라 때에는 소동파가 각각 관리로 일한 곳이기도 하여 지금도 그들의 이름을 딴 백제와 소제가 유명한 서호에 남아있다.서호는 항주시 중심 구역에 자리 잡고 있는데 중국 10대 풍경 명승지중 하나이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수면은 맑은 거울처럼 잔잔하다. 서호는 면적이 5.6㎢이고 둘레가 근 15㎢이다. 호수를 빙 둘러싼 우거진 녹음 속에서 수많은 누각을 볼 수 있고 넘실대는 물결이 햇볕에 반짝반짝 빛을 뿌린다. 멀리에는 구름과 산이 어우러지고 뽀얀 안개가 자욱하여 신비감을 더해준다.서호의 아름다움은 옛적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화폭이나 시구에서나 표현의 한계를 느끼게 한다. 서호의 볼거리 중 제일 유명한 것은 "서호십경(西湖十景)"과 "서호신십경(西湖新十景)"으로 "서호 쌍십경(西湖雙十景)"으로 불린다. 서호10경이라는 말은 南宋西湖 山水畵의 제목에서 기인된 것이다항주는 온화한 기후와 풍부한 물산 덕에 일찍부터 산업이 번성하였다.특히 전통적인 견직물은 지금도 세계 각국에 수출된다. 그밖에 차와 부채, 비단우산, 가위 등 공예품도 유명하다. 사철 절기마다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지고 역사적 인물의 무덤이나 사원, 탑 등이 많이 있어 중국 굴지의 명승지로 발전해 나가고 있다.항주 전체 시의 총인구는 6,079,600명으로 그 중 시내지역의 인구는 1,692,900명이다. 시 전체의 총 면적은16,596㎢,생은 계속 증가하는 추세이다. 영파시 과학분야의 명문 "영파고등과학원(寧波高等科學院)"은 외국인 유학 과정이 개설되지 않았다. 그 밖에 금화의 절강사범대학(浙江師范大學) , 금화방송대학(金華廣播電視大學) 등도 명문대학이지만 현재 외국인 유학생은 없다.절강대학절강대학은 절강성의 성도 항주에 위치한다. 절강대학은 교육부직속의 대학으로써 국가중점대학이다. 1998년 9월에 절강대학, 항주대학, 절강농업대학, 절강의과대학의 4개 대학으로 합병되어 중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대학이다. 학교는 옥천, 서계, 화가지, 호빈, 지강 5개 교정으로 이루어졌다.중국공정원 원사118명중 72명이 이 학교 출신이다. 현재 절강대학에는 외국유학생이 약 480명 거주하고 있으며 그중 한국인은 약 50여명이다. 절강대학의 옥천교정은 노화산의 아래에 자리잡고 있으며 동, 남쪽으로는 서호가 자리잡고 있다.항주에서 한국학생이 없는 학교는 항주사범대학, 절강상학원 등이다. 그리고 절강공대는 학생이 많아서 숙사를 확정받고 들어가는 것이 좋다.항주에는 한국식당이 7개 있는데 덕수궁은 맛은 좋으나 너무너무 비싸고, 그다지 친절한 것도 아니다. 중산호텔 뒤에 있는 한국촌은 맛은 덕수궁에 비하여 떨어지나 가격도 저렴하고 학생증을 제시하면 30% 할인을 해준다. 그리고 학교 후문 옆에 한국식당이 하나 자리 잡고 있다. 식당이름은 산이라 하며 현지 유학생과 졸업생이 운영하고 있다.숙사:$6-개인독방-전화, 에어컨, 화장실, 책상, 옷장,(전기료 별도)$7-2인1실- 개인독방보다 방이 조금 넓다.(큰 차이가 없다)(절강대학으로 가는 학생들은 절강대학 숙사의 개인방을 사용하는 것이 유리하다. 2인1실은 비용이 비싸고 그다지 넓지도 않다)현재 절강대학은 크게 초급, 중급, 고급반으로 나뉘어져있다.(시간)초급: 독해6 말하기6 듣기4 읽고쓰기 2중급: 독해8 말하기4 신문열독5 쓰기2고급: 독해8 말하기4 발췌해서 읽기4 쓰기2일주일에 2시간씩 선택과목,서법,중국화,무술,태극권,대외무역한어,고대한어 기말에 교학실습게 언급하고 있습니다.칸발릭, 즉 지금의 북경, 당시의 대도에서도 넋을 잃게 하는 아름다운 도시의 이면에는 2만 5천여 명의 유곽의 여자들이 돈 때문에 남자들에게 몸을 팔았습니다.또 지금의 하미를 일컫는 것으로 보이는 '카인두' 지방에서도 "남자들은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아내나 딸을 제공한다."고 적혀있습니다..티베트 지방의 결혼 풍습에 대해서는 "남자들이 아내를 고를 때 성경험이 없는 여자를 기피한다"라고 소개하기도 합니다.당시 유럽에서 베스트셀러였던 그의 책을 읽은 유럽의 남성들이 동방에 대해 가진 환상과 호기심 속에는 아마도 동양 여성에 대한 것도 들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마르코폴로가 과연 존재했었는지 과연 그가 중국 땅에 왔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이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아무튼 남아 있는 기록은 당시의 모습을 유추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3. 이루지 못한 古土 복구의 꿈마르코폴로의 기록을 보면 항주를 ‘킨사이’라고 불러렀다고 했습니다.당시 남송의 사람들은 항주를 행재(行在)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마르코폴로가 말하는 킨사이는 행재라는 말의 발음을 옮긴 것이라고 합니다.금나라에게 밀려난 남송의 사람들은 항주를 수도로 삼았지만 언젠가 금을 쳐서 잃었던 땅을 되찾게되면 과거의 수도였던 변경(개봉)으로 돌아가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그래서 임안을 임시수도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행재라 불렀습니다.행궁이 왕이 잠시 머무는 궁궐이라는 의미를 지닌 것처럼 재란 왕이 임시로 머무는 곳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꿈을 이루기도 전에 쿠빌라이의 몽골군에게 접수되면서 그들의 꿈은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단지 그들이 임시 도읍지로 생각했던 행재는 항주라는 이름으로 남았을 뿐입니다.남송이 항주를 도읍지로 삼고 쿠빌라이가 이 지역을 접수하면서 항주는 세계적인 도시로 발돋움하게되지만 그 이전에도 항주는 오랜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전통을 지닌 고도(古都)였습니다. 항주를 얘기하는 과정에서 외신상담(臥薪嘗膽)과 오월동주(吳越하면서 항주도 역사의 전면에 부상하게 된 것입니다.이후 몇 개의 왕조가 바뀌는 동안 지방행정 조직인 군의 수준으로 남아 있던 항주는 수나라에 들어서 남북운하가 건설되면서 다시 주목받는 도시로 떠오르게 됐고 이름도 처음으로 항주로 불려지게 되었습니다.Ⅲ.항주의 관광지방학정 (放鶴亭)서호의 북쪽 북리호에 접한 곳에 있는 건물로 북송 시대의 시인 임화청(林和請)이 살았던 곳이다. 임화청은 평생 관직에 오르지 않고, 매화와 학을 바라보며 시를 읊었던 인물이다. 임화청은 자주 서호에 배를 띄우고 즐겼는데, 손님이 오면 하인이 학을 풀어서 주인에게 알였다고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 중산공원(中山公園)서호 북서쪽의 백제와 서랭교로 이어지는 섬인 고산의 중앙부. 청(淸)대에 건륭제의 이궁이었던 유적지에 조성된 공원이다. 근처에는 서호유람선 부두가 있으며, 면적은 약 20ha로 산책로가 볼 만하다. 고산(孤山)중앙부의 해발고도는 약 38m. 호심정(湖心亭) :서호 중앙부의 작은 인공섬에 만들어진 정자로 서호전체를 사방으로 둘러볼 수 있다. 이 섬은 버드나무 등이 심어져 있어 운치가 있다. 서령인사(西 印社)고산 서쪽 물가에 있는 금석전각(金石篆刻)연구소로, 서도나 조각예술에 관한 것을 볼 수 있다. 아름다운 정원 안에 백낙천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죽각(竹閣)이나 백당(柏堂), 사조각(四照閣)등의 누각이 자리하고 있다. 호빈공원(湖賓公園) :서호의 동북쪽 물가에 호반을 따라 약 1Km정도 조성된 공원이다. 저녁 무렵이 되면 서호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이는 바오시산을 배경으로 주위가 모두 붉은색으로 물들어 경치가 아름답다.악묘(岳廟)서호 북서쪽 물가에 있는 묘소. 1221년에 건립된 이 묘소는 이민족인 금과 싸웠던 남송 시대의 민족 영웅 악비(岳飛:1103-1142)의 것이다. 대전 안에 높이 4.5m의 악비 좌상이 있고, 대전 밖의 정원에는 악비 부자의 묘가 있다. 무엄 앞에는 손이 뒤로 묶여서 무릎을 꿇고 있는 4개의 철상이 있는데, 이것은 악비를 투옥하고 독살한 투항파(投 있다. 백낙천과 소동파가 쌍벽을 이루는 예인데 그들은 항저우에서 관리로 지내면서 백낙천은 시후호 동서로 1Km 누워 있고 소동파는 남북으로 2.8Km누워있다. 복사꽃과 버드나무가 늘어선 방죽을 백제라 하는데 백낙천이 항저우를 떠난 뒤 그를 기리기 위해 백사제를 백제라 부르는 것이라 한다.남북으로 뻗은 능수버들과 사철 꽃숲의 장막인 소제는 소동파가 재임중 시후 호를 넓히고 청결하게 하려고 인공적으로 축성한 방제이다. 여섯 개의 다리가 있는데 그 다리마다 경치가 다르고 시야가 달라 시후 호 10경의 으뜸으로 꼽히는 소제춘효 는 소동파의 업적이기도 하다. 그외에도 소제가 끝나는 남단에 빨간 창에 하얀 벽과 날 듯한 추녀를 가진 건물은 소동파 기념관이다. 그는 항저우에 재임하는 동안 훌륭한 업적과 미담을 남겼다.구산 산을 지나면 추근의 묘가 나오고 거기서 한참을 더 걸으면 방학정이 나온다. 학을 자식으로 삼았다던 시인 임포가 죽자 그의 묏등에서 학이 비명을 지르다 죽었다는 전설에 이 정자를 세웠다 한다.⊙주방언(周邦彦)【1056-1121】자를 미성(美成), 호를 청진거사(淸眞居士)라고 하였다. 전당(錢塘, 현 浙江省抗州) 사람으로, 박학 다재하였을 뿐만 아니라 음률에 정통하였다. 어려서부터 문재(文才)가 뛰어났으나, 방종한 성격 때문에 고향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하였다. 원풍연간(元豊年間:1078∼1085)에 수도로 올라가 변도부(都賦)를 헌상(獻上)하여 신종(神宗)으로부터 인정받고 태학제생(太學諸生)에서 태학정(太學正)으로 승진하였다. 주방언은 대성부에 재임시 많은 새로운 사조(詞調)를 창작하였으며 순창부(順昌府:安徽省) 처주(處州:浙江省) 지사(知事)등의 오랫동안 지방관을 역임하면서 항상 가기(歌妓), 무녀(舞女)들과 내왕하였다. 따라서 사의 내용은 대부분이 남녀 애정, 여수, 영물 등이고, 사풍은 유영의 것과 비슷하였다. . 음악에 정통하여 고전음악의 정비와 신곡(新曲)의 개발을 통하여 완약성(婉約性)과 전아성(典雅性)을 겸비한 팔면영롱(八面玲瓏)의 작품을 완성시다.
    인문/어학| 2002.10.23| 17페이지| 2,500원| 조회(1,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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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족보] 수원 백씨(水原白氏) 족보조사 평가A+최고예요
    1.성씨(姓氏)의 유래(由來)성씨의 발생근원은 정확한 기록이 없어 상세히 알 수 없으나, 대략 중국 성씨 제도의 영향을 받아 고조선(古朝鮮)의 왕족(王族)에서부터 사용한 것으로 전해온다. 고대 씨족사회로 접어들면서 그 집단을 통솔하는 지배자가 나타나는데 통솔에 필요한 정치적 기능을 부여함 있어서 다른 씨족과 구별하기 위한 호칭(呼稱)이 성(姓)으로 나타나고 점차적으로 지방세력이 중앙귀족화 되면서 다수의 부족을 통솔하기 위한 칭호이며 정치적 신분을 표시하는 중요한 의미로 나타났다. 따라서 성(姓)은 초기에 왕실이나 귀족에서만 국한되어 사용하다가 국가에 공이 큰 공신들이나 귀화인(歸化人)들에게 세거지역(世居地域)이나 강.산의 명칭을 따라 사성(賜姓)을 하면서 확대되어 나가기 시작하였다.그러나 일반서민들의 성씨 사용은 과거제도가 발달되는 고려 문종(文宗 1047)이후에서부터 보편화 되었으며, 상민(常民)과 노비(奴婢)를 포함한 모두가 성을 갖게 된 것은 조선말 개혁정치가 시행되면서 부터이다.2.성씨의 성장과정성씨의 수(數)와 종류(種類)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 역사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대변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세종실록 지리지에는 265성(姓)이 기록되어 있고 조선 영조(英祖)때는 도곡(陶谷) 이의현이 지은 에는 298성이, 조선 정조 때 아정(雅停)이덕무(李德懋)가 쓴 에는 486성이 영조 46년에 편찬되어 정조6년에 증보(增補)를 시작한 에는 조선 초에 무려 4296성이었던 것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289성으로 줄어들었으며 다시 496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외에도 성씨에 관항 문헌으로는 과, ,등이 있다.근래에 들어와서는 1930년 에는 250성으로 조사 됐고 1934년 중추원에서 펴낸 에는 326성으로 나타났다. 1960년 국세조사에서는 미확인(未確認)11성을 포함하여 258성으로, 1975년 국세조사에서는 249성으로 나타났다. 또한 1985년 경제기획원(經濟企劃院)에서는 본관별 분류를 처음으로 백계경의 아우로 되어있다. 백낙천이 지은 백굉의 사장(事狀)에 따르면 초평왕 웅거의 손자인 승(勝)이 오(吳)와 초(楚)사이에 살면서 백공이라고 일컬어 성씨로 삼았다. 그러므로 백씨는 우성(芋性)이며 초나라의 공족(公族)이다. 또한 이 사장(事狀)은 백을병의 후손인 무안군(武安君) 백기(白起)가 백굉의 27대조라고 기록하고 있다. 기해대동보 서문은 시조 송계공과 백낙천의 관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즉 향산문공연보 자서문에 기록하기를 시집(詩集) 5권중 한 권은 신라에 거주하는 족인(族人)이라 함은 당시의 송계공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나 확고한 문적(文蹟)이 없고 소연(昭然)한 계통이 전해오지 않았으니 고증할 곳이 없으에 매우 유감이로다 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향산은 백낙천의 호(號)이며 시집 5권이란 백낙천의 시집을 가리킨다. 현재에도 송계공은 백계반의 후손이 아니라 아들이며, 따라서 송계공은 백낙천과 사촌간이라고 주장하는 종인(宗人)도 있다. 그러나 송계공이 중국의 시성(詩聖) 백낙천과 사촌간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우리 수원 백씨는 1997년 3월 중국현지에 와서 헌원황제 대제(大祭)를 주관해 달라는 중국하남성 정부와 신정시 염황문화연구회의 공식 초청을 받았다. 그 자리에서 이러한 사실을 확인 한 것이다.4. 시조 송계공(松鷄公)백씨의 시조 우경(宇經)의 자(子)는 경천(擎天)이며 호(號)는 송계(松鷄)이시다. 공은 원래 당나라 소주(蘇州)사람으로 인품(人品)이 고결(高潔)하고 학문이 뛰어나 당나라 조정에 벼슬하여 관작(官爵)이 첨의사(僉議事)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이르렀다. 그러나 간신배들의 모함을 당하자 스스로 당나라를 떠나 신라(新羅)로 건너오시니 때는 신라 선덕왕(宣德王)원년(元年), 서기 780년 경신년(庚申年)이었다. 시조 송계공이 신라조정에 누린 관작(官爵)은 이조(李朝)세종조(世宗朝)의 명신 황공희(黃公喜)가 지은 영락보 서문에이라고 명기하고 있다.기해대동보 원계편과 시조 송계공의 망단비(望壇碑)에도 신라의 벼슬이 좌복야사공)을 추모하고 있다.5.세계(世系)와 중시조(中始祖)백씨의 세수(世數)는 시조 송계공으로부터 연계(連繫)하여 기산(起算)함이 원칙이다. 그러나 정산대동보, 갑자대동보, 임술대동보가 모두 중시조 창직(昌稷)으로부터 세수를 시산하고 있다. 이번 정축(丁丑)대동보도 이 선례에 따라 중랑장공으로부터 세수를 연계하기로 했다. 송계공으로부터 중랑장공까지 연계할 고증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과거에 발간한 백씨의 보첩은 [백씨 원계도]와 같이 중시조를 송계공의 14대손(15世)으로 하여 연계한 예도 있다.그러나 중랑장공을 송계공의 14대손으로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다. 우선 연대와 세순에 모순이 생긴다. 즉 시조 송계공이 신라에 입국한 연대가 서기 780년(선덕왕 원년)이며 중시조의 관직이 중랑장에 이른 것이 신라의 경명왕조이므로 그 연대차는 경명왕의 재위 말년을 기준으로 할지라도 144년에 불과하다. 그런데 한 세대는 30년으로 계산하는 것이 보통이므로 그 144년은 5대에 불과하다. 가령 한 세대를 20년으로 계산하더라도 7대나 8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사이에 15대가 경과했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 둘째 우잠공(牛岑公) 영(永)이 송계공의 현손(玄孫)이라는 사실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기 어렵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우잠공 영이 우잠태수를 제수한 연대가 신라 헌덕왕조의 병오(丙午)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연대는 서기 826년에 해당한다. 이 연대는 송계공이 신라에 입국한 연대(서기 780년)와 비교하면 46년에 불과하다. 이 46년 사이에 송계공의 현손 우잠공이 장성(長城)을 쌓은 사실도 수긍하기 어렵다.기해대동보도 동국사기(삼국사기)에 우잠공 영이 신라 헌덕왕 병오년에 축성한 사적(事蹟)이 기재되어 있고 한림학사공(翰林學士公) 사유(중시조의 손자)가 과거에 합격한 것이 고려 광종(光宗) 계유(癸酉)라고 하였으니 그 사이가 148년이다. 대개 30년을 1세로 계산하니 그 예에 준하면 그 사이가 5~6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제종(諸宗)의 계첩(系諜랑 탁(卓)이 외손(外孫)으로 기재되어 있다. 낭주최씨보(낭주최씨는 사유(思柔)의 배위) 사유의 아버지가 길(吉)이며 아들이 휘(揮)라고 명기하고 있으며 문헌비고씨족고는 진사공 휘가 중랑장공의 증손이라고 명기하고 있어 그 소목이 뚜렷이 고증되어 있는 것이다.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시조 송계공으로부터 중시조 중랑장공에 이르기까지를 연계하여 세수를 기산하는 것은 큰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역사적인 사실에 충실을 기하기 위해 중랑장공을 1세로하여 세수를 기산하기로 한 것이다.6. 백씨의 분파(分派)기해대동보는 전국의 백씨를 24개파로 분류하여 족보를 편집했고 임술대동보는 29개파로 나누어 대동보를 발간했다. 이번에 발간한 [수원백씨대동보]도 29개파로 분류하여 족보를 편찬했다. 중랑장공파가 새로이 입보했지만 사전공파(師傳公派)가 중랑장공파와 같은 게통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어 중랑장공파와 합보했기 때문이다. 분파의 기준인 각파의 파조(派祖)는 세수가 일정하지 않다. 예컨데 시랑공은 5세, 문간공은 7세, 동림공은 9세, 담암공은 10세, 선정공은 11세, 정신재공은 12세, 보공장군공과 청산공, 산음공, 임피공은 13세이며 좌랑공은 14세, 훈정공과 별좌공, 문경공은 모두 16세다. 각파의 명칭은 호나 시호(諡號)에 따르지만 관직에 따르는 경우도 허다하다.대동보는 송게공의 모든 후손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각파의 분류는 그 기준이 역사적이고 합리적이어야 하며 계통이 확립돼야만 한다. 따라서 대동보는 분파의 기준이 되는 파조의 세수를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족보 전체를 체계적으로 이해하는데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기해대동보는 분파의 기준인 선조의 세수를 너무 도외시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대가 끊겨 후손이 없는 경우도 있고 후손이 번창하면 파가 갈리게 마련이다. 이런 점에서 납단자를 중심으로 대동보를 편집할 때 선조의 세수만을 중심으로 파를 분류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자손의 수가 많고 적은 것이 파(都承旨公派)-파조는 익장의 둘째아들인 인영이며 훈정공의 아우다.참봉공파(參奉公派)-파조는 도승지공의 아우인 인웅이다.별좌공파(別坐公派)-파조는 보성공의 현손인 인호이다.문경공파(文敬公派)-파조는 별좌공의 아우인 인걸이다. 이 파는 충숙공파,또는 휴암공파라고도 한다.청산공파(靑山公派)-파조는 보성공의 둘째아들인 효옹이다.산음공파(山陰公派)-파조는 보성공의 셋째아들인 효연이다.임피공파(臨陂公派)-파조는 보성공의 넷째아들인 효약이다.중랑장공파(中郞將公派)-파조는 문익공의 손자인 공이다.봉익대부공파(奉翊大夫公派)-파조는 천장의 손자인 인석이다.보공장군공파(保功將軍公派)-파조는 천장의 셋째아들인 환의 증손 운실이다.부사공파(府使公派)-파조는 천장의 증손이며 환의 손자인 수희이다.금릉부원공파(金陵府院公派)-파조는 천장의 넷째아들인 산의 손자 수이다함판공파(咸判公派)-파조는 천장의 다섯째 아들인 황의 팔대손 응상이다.절제공파(節制公派)-파조는 천장의 다섯째 아들인 황의 후손인 흥남이다제주에 많이 살고 있다.수의부위공파(修義副尉公派)-파조는 천장의 여섯째 아들인 거다. 주부공계와 중직대부공계로 구분한다.시랑공파(侍郞公派)-파조는 행미인데 청헌공 휘의 둘째 아들이다.동림공파(東林公派)-파조는 경신의 증손이며 정당문학 천장의 아우인 지장이다.부여공파(扶餘公派)-파조는 영신이데 사유의 증손이다.문간공파(文簡公派)-파조는 문절인데 중시조의 둘째 아들인 탁의 6대손이다.이재공계와 쌍계공계로 구분된다.7.가문(家門)을 빛낸 선조(先祖)백이정(白易正) : 1247~1323. 고려 충선왕 때의 유학자. 자는 약헌(若軒), 호는 이재(理齋) 보문각학사 문절의 아들이며 안향의 문인이다. 1275년 문과에 급제 충선왕 때 첨의평리로 상의회의도감사를 겸하였고 뒤에 상당군에봉해졌다. 1298년 원(元)이 사신을 보내어 세자를 왕으로 삼고, 8월에왕을 불러가자 충선왕을 따라 원의 연경에서 10년간 머물러 있었는데그동안 주로 성리학에 깊은 관심을 귀울여 연구하였고 귀국할 때 정주(程朱)의 성리서적원
    인문/어학| 2001.12.15| 10페이지| 5,000원| 조회(4,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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