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우리가 보통 시저라고 부르는 그에 대해 내가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몇년전 시오노 나나미가 쓴 로마인 이야기라는 책을 읽게 되면서부터이다. 예전에는 그가 단지 고대로마의 유명한 독재 황제 중 한명일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카이사르란 인물에 대해 미화한 것이 아닌가 할만큼 그는 모든 면에서 완벽해 보였다. 그는 로마의 유서 깊은 귀족 집안 출신으로 태어났으나, 그의 조상중에 유명한 정치가는 없었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로마가 건국된 지 653년, 서력 기원으로는 기원전 100년 7월 12일, 로마의 수부라에(시장인근 ..귀족들이 사는 언덕이 아님) 있는 집에서 태어났다. 위대한 인물의 탄생에는 여러가지 전설이 따라다니듯, 카이사르의 경우에는 재왕절개술로 태어났다는 설이 있다. 재왕절개(caesarean section)란 말이 여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관한 재미있는 예기가 있다. 카이사르가 한 장수와 싸울 때 그 장수는 다음과 같은 신탁을 받았다고 한다.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자는 그를 죽이지 못한다." 그러자 카이사를가 자신은 여자의 몸에서가 아닌 제왕절개로 태어났다고 하며 그를 이겼다고 한다.어린 시절 카이사르는 어머니인 아우렐리아의 교육에 의해 이루어지게 된다.그의 어머니는 그의 인생에 많은 영향을 준 인물로 그를 특징지은 것인 하나인 아무리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도 유쾌한 기분을 잃지 않는 낙천적인 성격을 이룰 수 있었던 자신감을 이루게 해주고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를 바라보는 적극성도 기르게 도와주었다.카이사르가 16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집안의 가장이 되던 해 정략결혼이라고 할 수 있는 결혼을 하게 된다. 이 결혼에는 아직 어리지만 그의 승부사적 기질이 나타난다. 먼저 정해져 있던 안전한 약혼을 파기하고 위험하기도한 민중파에 속하게 되는 결혼을 선택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가 결혼하고 얼마 뒤 술라가 오리엔트 원정에서 돌아와 반대파 숙청이 시작되었을 때 그도 술라의 살생부에 이름이 올랐다.(그의 아내가 술라의 반대파의 딸이었다)그러나 많은 술라의 주위사람들과 여러사람들이 카이사르는 아직 어리고 정치적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으니 죽이지 말아 달라고 하자 술라도 내키지 않는 승낙을 하면서 한가지 조건을 건다. 먼저 한 결혼을 파기하고 자신이 정해주는 사람과 결혼하라고 한 것이다.그런데 카이사르는 무모해 보일지도 모르게 거부를 하고 도망을 치게 된다.여기서도 그의 어느 누구도 각자의 사생활을 방해할 수 없다는 그의 가치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술라의 조건을 거부하고 국외로 도망치게된 그는 술라가 죽은 뒤 돌아왔다가 때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다시 도망을 가게 되는데 그때 해적을 만나서 잡이고 풀려나기위해 지불해야하는 자신의 몸값을 오히려 올리라는 말을 하고 행동도 조금도 굽힘이 없이 하며 오히려 자신이 풀려난다면 그 해적들을 죽일 것이라고 말하는 등 자유롭고 거만하게 행동한다. 이것도 그의 신변안전과 돈을 모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저울질하여 나온 결과라 할수 있다. 그리고 해적에게 풀려난 뒤 실제로 그는 근처에서 배와 사람을 모아 해적을 소탕하여 그들의 목을 효수하고 돈도 다시 찾게된다.해적에게 잡힌 일이 있은 얼마 뒤 그는 제사장이던 외삼촌이 죽어 그가 대신 제사장에 임명되고 로마로 돌아와 입후보하여 대대장이 된다.지위는 얻었지만 27세가 된 그의 출세속도는 보잘 것이 없었다. 제사장도 15명중의 하나일 뿐이고 대대장도 한군단에 있는 10명의 대대장 중의 하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그리고 몇 년뒤 그도 31세에 회계감사관에 취임하게된다. 그러나 여전히 그에 대한 평판은 좋지 않았다. 막대한 부채를 가지고 있었고 멋을 내는데 열중했기 때문이기도 하다.35세에는 안찰관에 취임하여 여러 가지 사업을 벌려 민중의 인기를 얻고 역적으로 취급된 민중파 마리우스의 파괴됐던 승전비를 다시 세워서 민중이 카이사르를 자신들의 희망으로 여기게 되었다. BC 69년 재무관, BC 65년 안찰관, BC 63년 법무관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면서 인심 파악의 수완이 능하여 민중과 친근한 입장에 서서 로마와 기타 속주에서 군무에, 그리고 실제의 정책 운영면에서 착실하게 성과를 거두어 명성을 획득하고 대정치가로서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BC 60년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제1회 3두동맹(: 제2회 3두동맹이 공식적인 것에 반해 이것은 사적인 것)을 맺고, 이것을 배경으로 하여 BC 59년에는 공화정부 로마의 최고 관직인 콘술에 취임하였다.콘술로서 국유지 분배법안을 비롯한 각종 법안을 제출하여 크게 민중의 인기를 얻었다. BC 58년부터는 속주 갈리아의 지방장관이 되어 BC 50년까지 재임 중 이른바 갈리아전쟁을 수행하였다. 그 동안 갈리아의 평정만이 아니라 라인강을 건너 게르만족의 땅으로 침공하기를 두 차례, 영국해협을 건너 브리튼섬으로 침공하기를 두 차례나 하였다.(처칠은 그가 영국에 상륙한 날이 영국에 역사가 시작된 날이 라고 했다.) BC 52년 베르킨게토릭스의 주도 아래 갈리아인의 대반란이 일어났으나, 이것도 진압하여 일단 갈리아전쟁은 종지부를 찍고 평온을 되찾았다.언젠가 싸움 중 심한 폭풍우가 몰아친 날 밤이었다. 간신히 빈 집 하나를 발견했다. 그 집은 몹시 좁았기 때문에 15~16명밖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장병들을 한번 둘러본 시저는 우선 부상자를 들여보내고 다음에는 지친 듯한 병사를 들여보낸 후 자신은 집 밖에서 잤다. 또 식사도 사령관이나 병사간에 차이를 두지 않았다. 이렇게 되니 모든 부하들은 입을 모아 `시저 장군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는 말을 주고받았다.실제로 그는 체격이 약하고, 간질병도 있었다고 하나 몸이 약한 것을 호사스럽게 사는 구실로 삼지 않고 군무를 지병에 대한 치료로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전리품으로 사리를 꾀하지 않고, 군의 기금으로 쌓아두었다가 부하들의 보수를 주고 명예를 높이는 데 아낌없이 썼다. 때문에 누구든 그의 부하가 되어서는 생명을 걸고 싸웠던 것이다.오랜 갈리아전쟁의 승리는 그의 경제적 실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증대시켰다.BC 53년 크라수스가 메소포타미아에서 쓰러지자 제1회 3두정치는 붕괴되고 원로원 보수파의 지지를 받은 폼페이우스와도 관계가 악화되어 마침내 충돌하기에 이르렀다.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돌아오라는 원로원의 결의가 나오자 BC 49년 1월, 그 유명한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말과 함께 갈리아와 이탈리아의 국경인 루비콘강을 건너 로마를 향하여 진격을 개시하였다. 우선 폼페이우스의 거점인 에스파냐를 제압한 다음 동쪽으로 도망친 폼페이우스를 추격하여 BC 48년 8월 그리스의 파르살로스에서 이를 격파하였다. 그후 패주하는 폼페이우스롤 쫓아 이집트로 향했으나 그가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하기 전에 폼페이우스는 암살을 당했고, 카이사르는 그 곳 왕위계승 싸움에 휘말려 알렉산드리아전쟁이 발발하였다(BC 48년 10월∼BC 47년 3월).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클레오파트라 7세를 왕위에 오르게 하여 그녀와의 사이에 아들 카이사리온(프톨레마이오스 15세)을 낳았다.이어서 BC 47년 9월에는 소아시아 젤라에서 미트리다테스대왕의 아들 파르나케스를 격파하고, 이때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의 세 마디로 된 유명한 보고를 원로원으로 보냈다. 이어서 스키피오가 이끄는 폼페이우스의 잔당을 속주인 아프리카 탑소스에서 소탕하고(BC 46년 4월) 오랫동안 공화정의 실권을 쥐고 있던 원로원 지배를 완전히 타도하였다. 다시 BC 45년 3월에는 에스파냐의 문다에서 폼페이우스의 두 아들과 싸워 승리함으로써, BC 49년 이래의 내란의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