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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자세가
    공자세가를 통해 본 공자의 삶"유교의 개조이자 동양에서 으뜸으로 꼽히는 지성선사" 바로 공자를 지칭하는 말이다. 동양 사상을 논하는 데 있어 공자를 빼놓고는 시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학문과 사상은 오랜 세월동안 동양 사회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여러 서적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는 그 자신의 학문적 깊이 뿐 만 아니라, 후대에도 귀감이 되는 유학자로서의 삶의 자세를 지님으로써, 우리에게 있어서 그의 삶 자체의 학문적 연구가치는 너무나도 크다고 하겠다. 중국 최고의 역사서로 평가되는 사기를 저술한 사마천의 공자세가를 통해서 이의 의미와 가치를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었다.공자는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정치 이념을 실현 할 수 있는 곳을 찾아 계속 돌아 다녔다. 그리하여 여러 곳에서 수난도 당했고 상가집의 개와 같았다 말도 들었다. 과연 이 오래된 책이 21세기인 이 복잡한 세상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상가집 개처럼 떠돌아 다녔던 공자의 처지는 불안정한 사회에서 살아가야하는 우리의 처지와 유사한 점이 없지 않다고 생각된다. 이 공자세가는 불안한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들을 남겨준다.극도의 숭배와 가혹한 비판이라는 양극단의 평가를 받는 공자의 삶을 사마천의 공자세가를 통해 조금은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가 익히 배운 공자의 사상으로 인해 공자는 뛰어나 지혜를 타고 나 항상 인과 예를 실천하며 군자로서의 삶만을 살아 온 초인간적인 존재로만 알았으나, 공자세가에 나타난 공자의 실제 삶은 극히 인간적이며 평범하였다. 이 글을 통해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도 ‘성인’으로서의 공자가 아닌 평범한 한 인간으로서의 공자의 삶이다. 도리어 평범하지 못한 고난의 삶을 살았다. 그렇기 때문에 평생 ‘인간다운 인간’이 되고자 끊임없는 반성과 노력으로 점철된 삶을 산 것이 아닌가 한다.공자세가에는 공자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한 부분이 있다. “공자는 가난하고 천하였다”는 것이 그것이다. 나는 공자가 어렸을 때부터 좋은 신분으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물질에 구애받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 공자사상이 비판되고 있는 주된 내용인 ‘신분의식’, ‘가부장의식’, ‘허례허식’, ‘혈연주의’ 등의 사상이 탄생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공자세가에 공자의 탄생을 아버지가 70세가 넘은 나이에 10대의 어머니 안씨와 야합하여 낳았다고 나온다. 야합이란 ‘남녀가 정당한 혼례를 치르지 않고 구차하게 교합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했던 훌륭한 가문의 자손도 아니라 평범한 집안의 자식만도 못한 출생이다. 동양의 최고 성인이며, 동양사상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공자이고 보면 그러한 공자의 출생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공자세가에서의 주된 공자의 삶은 망명생활이다. 제나라로 망명했다가 다시 노나라로 돌아오고, 위나라, 조나라, 송나라, 정나라, 진나라 등으로 망명하여 자신을 뜻을 펼치려 하나 끝내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키지 못하고 말년에 노나라로 돌아와 제자 육성에 힘을 쓴다. 공자세가의 전체 내용이 왜 공자가 망명하게 되었고, 어떤 망명생활을 했느냐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망명생활 과정에서 일어나는 망명국의 군주와 신하들과의 대화나 몇 가지 사건 등을 통해 드러나는 공자의 사상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가 익히 생각했던 성인으로서의 공자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끊임없는 정치적 혼란 속에서 이 나라 저 나라를 수백명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떠돌아다니며 방랑의 수난시대를 겪는다.이런 공자의 삶은 당시 공자의 사상을 보는 군주들의 입장을 잘 보여준다. 공자는 그 시대 사람들에게 ‘군자'로 널리 알려져 있어서 군주들은 공자를 데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민심을 얻는 데 유리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를 서로 등용하려 하고 극진히 대접했다. 그러나 어느 군주도 그를 정치의 한 복판에 내세우려고 하지 않았다. 살아남기 위해 갖은 술수와 음모를 꾸며야 했던 당시 권력가들에게 인과 예를 내세우며 덕치를 강조하는 공자는 '실전에 있어서는'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그러한 점은 공자세가 중 제경공이 공자를 등용하려 할 때 당시 재상인 안영이 공자 등용을 반대하면서 한 말에 잘 드러나 있다. 안영이 반대하면서 ’공자의 예‘라는 것이 실생활과 부합되지 않고 지나치게 번잡하고 화려해서 나라나 백성을 위해 취할 것이 하나도 없고 오히려 공자는 풍속을 해치는 존재밖에 안 된다고 한다. 이렇듯 정작 공자는 제후들 권력의 장식품에 불과했다. 현재 실생활 깊숙한 곳까지 공자사상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이것이 우리가 생각해 왔던 공자의 삶과는 다른 항상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고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여기저기를 망명하는 공자의 실제 삶이다. 정착하여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었던 시기는 노나라 정공 아래서 대사구등의 직책을 2년간 맡은 것뿐이라고 공자세가는 이야기한다.그렇다면 어떻게 극히 인간적이고 순탄하지 않은 삶을 산 공자와 제후들 권력의 장식품에 불과했던 그의 사상이 약 25세기가 지난 현재까지 영향력을 끼치며 우리 생활을 지배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과정이 공자를 바라보는 우리의 인식을 바꾸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문/어학| 2003.06.22| 2페이지| 2,000원| 조회(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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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교철학
    불교 철학철학과 970701황준구붓다는 모든 존재 현상을 연기(緣起)라고 주장했다. 연기는 ‘이것이 있는 곳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나타날 때 저것이 나타난다.’로 의지하여 함께 나타난다는 의미이다.모든 존재 현상은 어떤 실체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이 있으면 나타나고 있는, 즉 연기(緣起)하고 있는 것이다. 연기란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의미이므로 ‘인연이 화합하여 존재한다,’는 말은 ‘연기한 존재이다.’라는 말이다. 인연이 업(業)을 의미한다면 이 말은 다시 ‘모든 존재는 진리에 무지한 무명한 상태에서 지은 업의 결과 나타난 것’이라는 말이 된다. 따라서 연기는 업보(業報)와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으므로 연기설은 불교의 업설이라고 할 수 있다. 무아는 업보에 업을 짓고 보를 받는 시간적 존속성을 지닌 실체가 없음을 의미한다. 업은 실체가 아니라 잠시도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우리의 삶이다. 이렇게 시간적으로 잠시도 머물지 않고 변화하는 것을 무상(無常)하다고 한다. 모든 것은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으므로 잠시라도 지속하고 있는 존재는 아무것도 없다.바라문교에서는 상주 불멸하는 아트만을 ‘자아’라고 주장하고, 자이나교에서는 전지전능한 ‘명아’가 자아라고 주장하고 그리고 유물론 요소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여러 요소가 일시적으로 결합해 있는 몸이 우리의 자아라고 주장한다. 붓다는 이런 주장에 대해 일시적으로든 영속적으로든 시간적으로 존재하는 자아가 깨달았고 이들의 자아에 대한 견해를 부정한 까닭은 이들이 실재하고 있지 않는 자아를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 한 것과 같이 그가 깨달은 진리는 연기법이고 연기법에 의하면 우리의 몸안에 ‘아트만’과 같은 불변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실체는 무명(無明)이 있을 때 나타나는 허망한 생각이다. 그리고 고행주의와 쾌락주의의 대립적인 입장을 버리고 이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수행의 길을 선택한다. 우리의 삶이 현생뿐인가 아니면 내세로 이어지는가 하는 견해의 차이에 따라 고행주의와 쾌락주의라는 상반된 가치관이 나오고 있는데 붓다는 이들의 가치관을 사견에서 비판한 것이라고 비판하고 중도에서 제시한 가치추구의 길(八正道)을 보여주었다. 또 불멸의 자아와 자아에 대한 부정의 상반된 가치관에서 무아(無我)론를 통해 비유비무의(非有非無)의 중도적 입장을 취하였다. 자기 존재란 무명에서 연기한 망념으로 실체성이 없는 것이고(無我),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허망한 자기 존재에 집착함으로써 모든 괴로움이 생긴다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서 악업을 짓고 괴로움의 과보를 받는 자아를 문제 삼지 않고, 괴로움이 생기고 사라지는 인연의 과정을 십이연기(十二緣起)를 통해 밝힌 것이다. 이러한 연기법을 중도(中道)라 한다.연기(緣起)의 도리에 의하면 무엇이 생겼다거나 없어졌다거나, 영원하다거나 영원하지 않다는 등의 논란은 무의미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사견이다. 붓다는 이런 논란은 괴로움의 시작 이므로 금했고, 모든 사견을 떠난 중도(中道)에서 연기를 설하여 모든 말장난을 종식 시켰다. 붓다는 모든 대립과 모순을 떠난 중도에서 연기법을 설했다. 모든 존재현상은 연기하고 있으므로 그 실체가 없다는 것이며, 철학적이고 이론적인 모든 대립은 존재현상의 실체가 없음을 알지 못하고 실체를 찾으려 하기 때문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우리 몸에는 아트만과 같은 불변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업보는 삶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해 가는 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마음이 업에 따라 형성되는 것을 연기라 말하고 실체성이 없기 때문에 무아라고 한다. 이러한 마음은 결코 바라문교의 아트만도 아니고 자이나교의 명아도 아니다. 지금 여기 살아 움직이는 우리의 삶이 마음이다.윤회(輪廻)를 말하는 불교에서는 ‘불멸하는 자아’가 있다는 견해를 취하고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붓다는 이 유견을 배척하면서 무아(無我)를 주장하면서 존재의 지속성을 주장한다. 여기서 우리는 딜레마에 빠질 수 있는데 이것은 오온(五蘊)으로 설명될 수 있다. 붓다는 무아(無我)를 주장하면서 도덕적 허무론에 빠지지 않고 오온(五蘊)으로서의 나는 있다고 한다. 존재의 지속성은 오취온(五取蘊)으로써의 나의 의지로 재구성 되어 나간다. 오온(五蘊)은 우리가 ‘있다’라고 느껴지는 것들이다. 우선 책상, 나무, 돌과 같은 물질들이고 오온의 색(色)에 해당한다. 다음에는 정신이 있다고 느껴질 것이다. 정신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느끼는 정신으로 괴로움, 즐거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존재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느끼는 존재를 감정이라 하며 수(受)에 해당한다. 셋째는 행위를 선책하고 결정하는 정신이다. 이것을 의지라 하며 오온에 행(行)에 해당한다. 넷째는 사물을 분별하여 인식하는 정신이 있다. 이것을 우리는 의식이라고 부르면 오온의 식(識)에 해당한다. 우리가 있다고 하는 것은 이렇게 물질, 감정, 이성, 의지, 의식의 다섯 가지이다. 이 오온이 우리의 외부에 실재하고 있는 다섯 가지 요소가 아니라 인연으로 해서 생긴 촉(觸)을 통해 ‘존재’로 느껴지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생각하는 존재가 마음에서 연기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므로 연기설이라고 할 수 있고, 마음은 실체가 아니라 삶, 즉 업(業)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라고 이야기 하므로 업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오온(五蘊)이 집산에 있는 것은 ‘나’이다. 하지만 내가 있어서 오온이 있는 것은 아니다. 부처에 있어서 나는 언어적 약속 일 뿐이고 행위가 있으므로 내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부처의 ‘없다’의 개념은 영원, 불변의 존재로써의 내가 없다는 말이지 일반 현상의 육신 자체는 부정하지 않았다. ‘나’는 행위는 있지만 행위자는 없고 인식은 있지만 인식주체는 없고 괴로움은 있지만 괴로운 자는 없다. 이것이 부처의 무아(無我)이다. 연기(緣起)설에 기초한 무아설은 바로 불교의 업설인 것이다.
    인문/어학| 2003.06.22| 3페이지| 2,500원| 조회(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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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니체 초인사상 평가B괜찮아요
    니체의 대표적인 책이라 할 수 있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나타낸 중심적인 인간상은 초인이었다. 니체의 초인은 힘에의 의지를 존재의 근본 법칙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실천해 가는 사람을 이상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니체는 예언자처럼 선악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인류에게 제시하려 했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려 했다. 신 이외의 인류의 지탱돌을 니체는 힘에의 의지라고 했는데 니체가 주장했던 초인은 바로 이 힘에의 의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신봉했으며 그에 충실한 생활을 하는 인간상 혹은 그러한 무리를 뜻한다.니체의 초인은 우선 먼저 신의 죽음을 전제로 하고 그럼으로써 출발한다. 그리고 초인사상 속에는 존재의 근본으로서의 대지 위에 모든 것의 새로운 창조 즉 여기에는 새로운 가치체계를 만들어 내는 초인의 억센 의지로서 권력의지를 담고 있다. 니체는 보다 보편적이고 우주론적이며 동시에 생물학적인 특징을 갖는 형이상학적인 원리를 생각해 내었는데 그것이 바로 '권력의지'이다. 억센 삶에 대한 긍정이라는 거대한 노력은 동시에 인류를 초인으로 성숙시키는 이론적인 밑받침이 되고 있다.이에 또한 중요한 사상으로서 초인사상에 얽히어 따라 나오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근본개념이자 초인사상을 전제로 하는 영원회귀사상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스스로를 초극한 자만이 모든 존재의 여우언한 회귀를 바랄 수 있기 때문이다.'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 짜라투스트라의 서설에서 니체는 초인의 모습을 간결하게 그리고 있다. 초인은 대지의 의미이다. 인간이라는 이 자기 자신을 극복하는 존재자는 지금까지 늘 저편의 산을 향하여 자기를 초월하여 왔다. 그러나 니체에게 신이란 온갖 피안적 이상세계의 총괄을 의미한다. 이에 짜라투스트라의 입을 통해 니체는 신의 사망을 선언한다. 인간은 피안의 모습을 장식하기 위하여 대지를 사용하고 또 오용했다. 인간은 대지에서 그의 도량, 그의 열정, 그의 표상을 취해오고 그것들을 가지고 영원한 항상적 이념들로 성립하는 피안적 빛의 나라를 장식한 것이다. 인간은 대지를 포기하면서 그는 대지를 그릇 사용한 것이다. 인간은 즉 그들의 근본적 샘을 망각했다는 것이다. 신의 사망을 선언함으로써 자기소회에 빠져있던 인류에 대하여 신이 차지하고 있던 입장을 이제 대지가 차지한다.'예전에는 신을 모독함이 최대의 모독이었다. 그러나 신은 죽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이들의 모독자도 또한 죽었다. 대지를 모독함이 지금은 가장 두려워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탐구할 수 없는 것의 내장을 대지의 의미보다 더 존중하는 것도' 인간은 피안을 꿈꾸기를 일체 단념하고 지금까지 몽상의 세계로 향해져 있던 것과 똑같은 열정을 가지고 대지로 향한다. 현존재는 대지로 돌려보내어 져서 그 자유는 대지에 기초를 가지게 된다.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이 자유는 신에로의 자유도 아니고 무(無)에로의 자유도 아니며 바로 대지에로의 자유이다. 이 대지야말로 빛 속에 나타나 시공 속에 자리를 잡아 잠시 머무르는 모든 것이 거기로부터 나오는 모태이다.신의 죽음은 위 저작의 제1부의 중심사상이다. 이상주의, 즉 도덕적, 형이상학적, 종교적 이상주의가 인간의 큰 미로(迷路)로서 나타난다. 인간은 대지에 대한 불충실 탓으로 분열되어 감성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과의 대립, 육체와 영혼과의 대립에 빠져 있다. 이상주의에 의하여 인간은 분열된 불행한 존재자로 된다. 인간은 자기의 영혼이 육체의 사슬로 얽매여 경멸하여 그 감옥에서 도망치려고 한다. 그러나 초인의 사상에 포함되어 있는 이상주의의 전향이란 것은 인간을 찢어서 갈라놓고 있는 균열의 치유를 의미한다. 즉 육체와 영혼과의 대립이 사라져 버리는 그러한 화해를 의미한다. '감각과 정신은 도구이며 장난감이다. 감각과 정신의 배후에는 자기가 있다. 자기도 감각의 눈으로 찾고 정신의 귀로 듣는다. 자기는 항상 듣고 찾는다. 그것은 비교하고 강요하고 정복하고 파괴한다. 그것은 지배하며 또한 자아의 지배자이다. 그대의 사상과 감정의 배후에는, 나의 형제여, 강력한 명령자, 알려지지 않은 현인이 있다. 그것이 자기다. 그것은 그대의 육체 속에 살고 있고, 그것은 그대의 육체다.'라고 짜라투스트라는 육체를 경멸하는 자에게 설교한다. 여기서 육체를 정신과 감각을 따로 보지 않은 그 자체로서 커다란 이성으로 봄으로써 육체와 영혼과의 대립에서 벗어나 그들 신에 대한 의무와 금욕으로 인한 타율적 도덕의 그물 속에서 벗어나도록 말한다.기독교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세계와 역사에 대한 도덕적 해석에 있으며 이런 점에서 기독교는 종래의 도덕을 대표하는데, 종래의 도덕, 곧 기독교적 도덕 자체가 그 성실성을 고도로 발달시켜, 이 성실성이 도덕 자체를 부정하고 도덕을 넘어선 경지에 이르는 것이 '도덕의 자기초극'이다. '도덕을 키워 온 여러 힘 중에는 성실성이 있었다. 이성실성이 드디어 도덕에 반항하고 그 목적론, 그 타산적 고찰을 폭로한다.' 라고 니체는 말한다. 니체가 말하는 성실은 진리와의 합치이며 따라서 자기 자신에 대한 성실이다. 즉 도덕의 자기초극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확립하는 것이다. 종래의 도덕이 완전한 자기 상실이었는데 비해 도덕의 자기초극은 인간이 현재의 자기를 초극하여 본래의 자기 자신을 회복하는 것이다. 즉 참된 자유를 달성하는 것이다. 위의 책 제1부 '세 가지 변화'에 나오는 낙타, 사자, 어린애의 3단계의 변화가 바로 이러한 자유를 획득하는 과정이다. 신의 죽음에 의한 인간존재의 변화, 즉 자기소외에서 자기 자신을 알게 되는 창조적 자유에로의 변화가 말하여진다. 무거운 짐을 진 낙타는 의무와 금욕의 상징으로 '그대는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타율적 도덕에 복정한다. 그러나 낙타는 사막에 가서 '사자'로 변하는데 사자는 자유를 획득하고 고독을 견뎌내며 스스로 주인이 되려고 한다. 곧 가혹한 자기부정에 철저한 자유정신, 비판정신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나 사자는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유를 확보한 데 지나지 않는다.' 참으로 새로운 창조는 순수하고 절대적인 자기 긍정을 하는 어린애의 자율적인 의지로써 비로소 가능하며, 이 단계에서 비로소 참된 자유가 달성되는 것이다. 이에 낙타-사자-어린아이라는 은유 속에 우리가 인정할 수 있는 것이 단지 자기를 자기 자신에로 해방하는 인간적 자유의 본질적인 변화, 나아가서는 초인의 발생이란 것뿐만은 아니다. 그 은류ㅜ들은 보기에 따라서는 프리드리히 니체가 지녀온 사색의 길의 정거장들을 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가 그의 자기이해를 표명한 것으로서의 세 사람의 인물상이 위의 3단계에서 대응한다. 자기를 인간을 능가하는 어떤 위력의 통로로 삼는다는 의미에서 최대의 봉사적 인간인 천재는 낙타에 대응한다. 비판자이고 부정자이며 미지의 먼 해안을 향한 대담한 항해자인 자유정신은 사자에 대응한다. 그리고 긍정자이고 새로운 가치들의 정립자인 짜라투스트라 자신은 유희하는 어린애에 대응한다.이러한 세 가지 단계는 단지 개인의 내면적 발달만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 기독교에 의해 의미와 가치가 부여된 유럽의 정신사의 비유이다. 기독교적 도덕의 지배 밑에서 '낙타'이던 정신은 '신의 죽음'의 확인에 의해 사막의 '사자'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인간 존재에게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 오던 신이 죽음으로써 인간 존재는 무의미해지고 무가치 해진다.또한 세계와 우주에는 필연성이 없고 인간존재는 우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니힐리즘의 확인이 니체의 출발점이다.인간은 제 자신의 초극을 본질로 하는 존재자인데, 그것은 인간에 있어서의 생 일반의 보편적 본질인 권력에의 의지가 제 자신을 인식하거나 또는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권력에의 의지에 대한 통찰은 동시에 신의 죽음에 대한 통찰을 필요로 하고 또 그 역이기도 한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2부에서는 세계를 빈틈없이 지배하는 권력으로서 인간적 자유의 유희 속에도 현존하는 것의 이름이 명확히 진술된다. 기초적인 사상은 이제 권력에의 의지라는 교설이다. 그러나 그것은 돌연히 도입된 것이 아니다. 니체는 하나의 새로운 사상에 비약해 옮겨 가지는 않는다. 그는 그것을 선행한 사상에서 발전시키는데 변화한 인간 즉 어린이가 된 인간은 창조자이다. 이 자는 본래적, 본체적인 인간이다.물론 창조자란 창조적으로 유희하는 자, 가치들을 정립하는 자, 자기에 대하여 하나의 목표를 세워 하나의 새로운 투기를 감행하는 어떤 의지를 의욕하는 자를 의미한다. 창조자는 모든 사물에 대하여 근원적으로 대처한다. 그는 모든 척도와 저울을 새로이 정한다. 그는 인간의 생을 전체로서 새로이 정비한다. 만약 창조자의 자유가 신의 자유에 의하여 침해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신이란 사상에 대하여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창조자가 그 자의 한계로서 참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대지 즉 어떤 소원한 개별적인 존재자의 권력이 아니라 세계 종체의 권력이란 의미에서의 전능이다. 또한 창조로서의 창조는 근원적인 역사성으로, 시간의 현실성에 관련하여 있다. '내가 생이 있는 것을 발견한 곳, 거기에 나는 권력에의 의지를 발견한다. 다시, 봉사하는 자의 의지 속에도, 나는 주인이 되려고 하는 의지를 발견한다. 나는 항상 자기 자신을 초극하지 않으면 안 되는 바의 것이다.' 자기 초극은 여기서 조금도 금욕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정반대이다. 생은 상승의 경향을 가지고 있다. 생은 권력을 구현하는 형성물들을 창조하고, 이 창조에 있어 결코 쉬는 일이 없다. 생의 실체는 쉬지 아니함, 즉 운동이다. 생은 오히려 더욱 더 높이 쌓아 올려져서 점점 솟아 올라가는 거대한 탑과도 같은 것이다. 이미 도달된 지점은 어느 것이나 다음의 새로운 돌진을 위한 도약대가 된다. 생은 만물을 싸잡은 충일이 아니라 오히려 끊임없이 싸움이고 모든 개별화된 존재자 상호간에 대립관계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 2부는 창조자의 문제에서 시작하여 권력에의 의지란 근본개념으로 향하고 있다. 창조자임은 오직 시간을 진지하게 이해하는 데서만 가능하다. 시간의 경과에 따라 생은 권력을 구현하는 더욱 더 교차의 형성물들도 높아져 간다.
    인문/어학| 2003.06.22| 4페이지| 2,500원| 조회(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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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어낚시통신
    학과철 학 과학년4 학 년학번970701성명황 준 구담당교수이 상 우 교수님은어 낚시 통신을 읽고이 소설은 주인공을 통해 인간의 과거에 대한 그리움을 은어의 희귀 하려는 본성에 빗대어 표현한다. 은어낚시통신의 은어는 회유본능을 지닌 물고기로써 강에서 태어나 바다에서 살다가 다시 강으로 돌아오는 물고기다. 작가는 은어의 회유본능을 인간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원류를 찾아서 돌아오는 인간들에 빗대어 표현하고있다. 은어가 회유하듯이 인간사회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안정을 찾을 공간으로 회유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물론 그들을 낙오자라고 생각할수도 있겠지만 우리 모두는 어쩌면 이곳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귀소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작가는 인간의 이러한 본성을 상실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 사람과 꿈을 되찾아가는 모습을 소설속에서 보여준다.이 소설의 줄거리는 대강 이렇다. 은어낚시를 즐기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여름철마다 은어낚시를 다니던 주인공은 평소와 다를 바 없던 어느 날, ‘은어낚시통신’이란 모임(또는 지하집단)으로부터 초대의 내용이 담긴 우편물을 받게 된다. 주인공은 무심코 지나쳐버릴 수도 있었던 우편물을 열어본 것이 계기가 되어 낳선 어느 여자와의 통화를 하게 되고 긴장과 두려움을 느낀다. 자신을 부르는 우편물의 내용은 자신이 그 집단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에 기억을 더듬고 이내 과거의 한 여자를 기억해낸다. 주인공은 과거에 대한 그녀의 기억이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그 모임에 이끌려 나가게 된다. 현실의 삶에서 소외당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자신들만의 작은 세계를 형성하면서 이중적인 삶을 살아가는 그들을 만나게되고, 그들 속에 있는 ‘그녀’를 만나게 된다. 원래 있어야했던 장소로의 회귀를 말하는 그녀 앞에서 주인공은 차츰 현실을 낯설어 하면서 자신이 존재했던 곳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은어낚시통신 모임의 사람들은 은어(隱語)를 사용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은어(隱語)라는 것은 그 집단에 속해있는 사람들만 알아듣도록 쓰는 언어, 즉 이 소설에서는 사회에서 소외되고 버림받은 사람들이 모여서 그들만이 쓰는 언어를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은어(隱語)라는 단어가 아니라 은어(銀魚)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자신들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은어(隱語)를 사용하는 하나의 계층이라는 것을 부정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세계를 이루어서 은어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그들은 그 사실을 부정함으로써 좀 더 마음의 안위를 얻고자 함일지도 모른다. 사회에 적응하는 면과 적응하지 못하는 면을 가지고 있어서 이중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쓰는 언어에 대해서 별다른 언급은 소설에서 나타나고 있지 않지만 그들이 모임을 가지고 그들이 모여서 행동하고, 말하고, 눈짓하는 모든 행동이 그들에게는 은어일 것이다. 은어는 숨겨져 있고 밖으로 표출되면 은어가 아니게 된다. 그러하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감춰진 언어를 숨겨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들도 실제로 은어낚시를 하러 간다. 그들이 낚고자하는 은어는 은어(銀魚)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현실에서도 은어를 낚아보려고 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그들이 은어낚시를 하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은어처럼 다시 원류를 찾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그것에 자극받아 계속하여 은어낚시를 다니자고 서로 결심한 것임이 틀림없다. 은어는 자신의 원류를 본능적으로 찾지만 인간은 원류를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들은 사회에서 소외되어 자신들의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모임을 만들어서 모여보지만 그 모임에서조차 그들은 그 자신을 찾지 못하고 소외 받은 마음을 서로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더 아파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삶의 모습이 제일 잘 드러난 사람이 바로 김청미. 한자 이름이 청미(靑眉)인지, 청미(靑米)인지, 청미(靑美)인지 궁금한 여자이다. 그녀는 주인공의 근원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의 여자이다. 이러한 점은 소설의 끝에 드러난다. 그녀는 그를 그가 존재했던 원류로 끌어 올려주고 인도해주는 사람으로 나타난다. 은어는 모태로서의 희귀와 재생을 잘 보여주는 물고기이다. 그녀는 은어의 희귀처럼 그와의 만남을 처음으로 끌어 올려 뜨거운 사랑을 되돌리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녀 역시 소외되고 외로운 존재이지만 주인공을 그의 원류까지 갈 수 있도록 도와줄 여력이 있어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그녀 역시 그녀의 원류를 주인공과의 정신적, 육체적 교감으로 이루어 내려는 것이다. 인간이 그 자신의 원류를 찾을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이기에 이 시대의 공허함을 이겨내기 위해서 우리는 그 원류를 찾아 헤메어야하는 것이다. 그 결과가 현재보다 아플지라도 주인공과 그녀는 그 원류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소설에서 드러나는 또 다른 인간군상은 바로 은어낚시통신 모임에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소외받았던 사회에서 그들의 세계로 회류하였으면서도 그들의 세계 속에서마저도 서로 소외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그들 역시 자신의 원류를 찾아 여행할 뿐이다. 그러한 인간들 중 가장 많은 행동의 표출을 하는 인물이 빨간 스포츠카의 여인이다. 겉으로는 빨간 스포츠카에다가 지식수준도 상당한 사람인 듯이 나오지만, 그녀 역시 그들의 모임에 합류하게되면 하나의 원류를 찾는 은어일 수밖에 없다. 작가는 소설 속에 사람의 이름 한자조차 올려놓질 않았다. 결국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독자에게는 이름조차 없는 인물이 되버린 것이다. 작가는 인물들의 이름을 제시하지 않음으로서 좀 더 소설의 인물들처럼 원류를 찾아보라고 권유하는 듯하다.은어낚시통신을 읽고 난 후의 느낌은 비현실적인 이상을 중심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사실적인 묘사, 이를테면 ‘24시간 편의점 로손’, ‘을지로 3가를 지나 백병원을 지나 명동으로 이어지는 육교를 건너 명동성당 쪽으로…’ 와 같은 실제적 묘사들은 소설의 허구적인 본래의 성격에는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의 도시를 배경으로 하여 몽환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소설이라고 볼 때, 어느 정도의 현실과 이상에 대한 조율을 하는 역할을 하지 않는가 싶다.전체적으로 배경이 되는 시간은 밤이며, 어둡고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소설은 진행된다. 읽고 나서도 무언가 뿌옇게 머리 속에 남아있는 듯한 기분이 느껴지는 것은 이러한 점에 기인하리라 생각된다. 첫 배경도 밤이며, 비가 오고 있는 가운데 고적한 목소리의 흑인 가수의 노래를 듣고 있는가 하면, ‘그녀’를 단 둘이 처음 만난 곳은 사막같이 건조해 보이는 바닷가의 자정의 시간이다. 물론 유채꽃이 펼쳐진 배경이지만 그것조차도 그리 좋게 묘사하고 있지는 않다. ‘은어낚시통신’의 모임장소 또한 음산한 분위기의 동굴과도 같은 곳이다. 현실에 묻혀 사는 주인공의 세계와 소외된 자들의 모임장소가 모두 어둡게 그려지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눈에 쉽게 보이는 현실을 부정하는 자들이 그들만의 세계를 꾸밀 수 있고 바라는 바를 실현시킬 수 있는 배경은 ‘어둠’이 아니었을까 한다.
    인문/어학| 2003.06.22| 5페이지| 2,500원| 조회(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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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쉴러의 법철학과 문학
    소박시인은 자연스럽고 소박하며 자기분열과 자기비판이 필요없고, 정신과 감정의 갈등을 모르는 시인이다. 이에 반하여 감상시인은 보다 지적이며 회의적이고 자기분열적이고 반성적인 자기비판자이다. 쉴러는 소박 문학 감상 문학을 새로운 개념으로 이끌어 내어 대조시킨다. 지금까지 세미나에서 배운것처럼 문학이 자연이면 소박 문학이고 문학이 자연을 추구하면 감상 문학이다. 이 두가지의 비교로 쉴러는 그가 처해 있던 시대적 사회적 상황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해 그 나름대로 이해하고 분석하며 해답을 얻고자 노력하였다. 그것은 한마디로 구체적 예들을 통해 그 전체적 시대정신을 파악하려는 ‘절대 의식’속에서 가능하였다. 지금부터 나는 쉴러의 미철학과 소박, 감상문학을 살펴봄으로써 그 시대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한 그의 생각을 엿보고 자연의 소박성이 인간 생활에 재현되기를 희망한 그의 생각을 살펴볼 것이다.쉴러가 이룩한 미철학 체계의 골격은 칸트의 범주적 개념정리에 따라 정, 반, 합을 이루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즉 쉴러 미철학에 있어 인간본성의 충동역학은 질료충동, 형식충동, 유희충동의 끊임없는 변화를 보이고 있다면, 인간의 미학적 행위는 소박, 감상, 이상적 단계를 발전 모형으로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변증법적 구조는 인간학적 미학을 보다 원숙한 미철학적 체계로 발전시키고 아울러 미학적 차원과 정치적 차원의 상이점 또는 고대와 근대의 차이점을 해석학적 대화를 통해 인식하려는 시도의 기본틀을 이룩하고 있다.쉴러는 여느 동시대 지식인과 마찬가지로 또는 그 이상으로 프랑스 대혁명의 전개과정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철학적 시인이라고 할 수 있는 그가 그러한 시대 상황이 던져주는 문제들에(자유, 평등, 박애)대한 논의를 마다하고 미에 관한 문제 제기를 해야 하는 고충이 그의 서한에 담겨 있는 다음과 같은 말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이러한 일반적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는 것이야 말로 사회의 복지에 대한 무관심, 그 질책받아 마땅한 무관심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학적 맥락에서 볼 때 의미심장하다. 쉴러는 철학자로서 그의 대화의 진폭은 모든 교육받은 시민계층을 겨냥한 보편적 양상을 보이고 있다.쉴러는 같은 서한에서 위의 수사학적 질문에 대한 귀결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제가 귀하를 설득하고자 희망하고 있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가 경험영역에 속해 있는 저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미학적 문제를 통해 그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고 그 이유인즉슨 정녕 미를 통해야 자유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돋보이는 것은 1789년에 쓰여진 시(예술가)에서 미의 목표로 제시된 “진리”의 자리를 “자유”가 차지하고 있는 점이다. 즉 프랑스 혁명의 진행과정과 더불어 역사와 시대상황에 대한 쉴러의 인식이 달라졌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제 우리는 쉴러의 미철학적 사고의 논리적 전개를 살펴봄으로써 그가 내린 결론의 타당성을 검토하고자 한다.쉴러는 그 당시의 시민사회의 위기를 진단하건대, 대다수의 계층들을 이루고 있는 하류 사회에서는 욕구의 지배와 인간성의 황폐화가 판을 치고 문화적 향유에 젖어 있는 중상류 사회에서는 교양과 인품의 “극심한 결여”가 목격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프랑스 혁명이 그 초기의 이상적 조망을 상실하고 있다는 사실과 루이 16 세의 처형과 곧 그 뒤를 이은 공포정치에서 드러나는 가공할 폭력성과 세력의 난맥상은 쉴러에게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혁명을 통해 인간의 자기 목적과 참다운 자유를 실현하기에는 프랑스 국민은 도덕적 힘과 가능성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상국가의 건설을 위해 무엇이 전제되어야 하고 한 국민의 도덕적 역량은 어떻게 배양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당연한 논의의 대상이 된다.쉴러는 예술과 정치를 대비하고 있지만 양자의 차이를 직시하면서 “국가”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하여 “미의 예술가”와 “정치 예술가”를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말하고 있다. 즉 전자는 미를 창조하기 위하여 자기가 사용하는 재료를 그 질료 자체에 대한 존경심이 없이 마음대로 다루는 반면 것이다. 쉴러는 사고의 명료성을 위해 국가의 한계적 형태를 ‘물리적 국가’와 ‘도덕국가’로, 또는 ‘자연국가’와 ‘이성국가’로, 범주적 분류를 한다. 물론 전자의 형태가 후자의 형태로 발전되어 가는 것이 바람직한데, 그렇다고 해서 어느 한 순간에도 인간의 존엄이나 사회적 이념을 구실로 인간의 생존이 위태롭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예술작업과 견주어 볼 때 국가의 통치가 지닌 특수성이다. 따라서 국가에 있어 그 국민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쉴러는 생존권과 자유의 두 요소를 결부시키는 제 삼의 성격을 지닌 이상국가를 모형으로 제시하고 있고, 그러한 목표로의 무한한 접근을 이상적 예술형식으로의 접근을 통해 유추적으로 설명한다.쉴러는 이상국가 건설의 가능성으로 인간의 이상적 성향을 전제하는 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모든 개별 인간은 자기 속에 어떤 순수한 이상적 인간을 지니고 있어 그에게 일어나는 모든 변화 속에서도 자기의 불변적 통일성을 견지하여 나가는 것이 그의 지상 지상 과제가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쉴러는 물론 이러한 이상주의적 신념을 피력함에 있어 그 당시 예나 대학 교수였던 피히테와 보조를 맞추고 있다. 쉴러는 인간을 ‘본성’과 ‘정신’으로 나누어 생각하고 18 세기 칸트 철학의 비판주의에 힘입어 ‘오성’과 ‘이성’을 정신의 범주적 기능의 개념으로 사용한다. 이러한 ‘개념장치’에 따르면, 인격의 통일성을 요구하는 것은 이성이고, 감각 또는 상태의 다양성을 요구하는 것은 본성이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여타 동물과 구별되게 의지가 있고 그러한 의지가 행동으로 표현되자면 추진력이 필요하게 되는데, 그 힘이 바로 ‘충동’이라는 것이다. 이성은 법칙을 발견하고 제시하면 그만이지 그 실천력은 충동을 통해 획득되는데, 그 충동의 발원지는 감성을 규제하는 오성도 아니고 바로 ‘마음’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감정능력’의 함양이 가장 시급한 과제이라는 것이고 거기에 미학적 교육의 당위성이 있는 것통해 야기된 인간성의 분열과 기형적 발달은 많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또는 불완전한 시민으로 만들었다. 이를 시정하기 위해서는 미학적 교육은 개별 인간의 모든 소양을 자연이 부여해 준 총체성 속에서 조화롭게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쉴러의 역사철학적 구상은 칸트에게 영향을 받았지만, 후자가 자연목적론적으로 인간 능력들의 적대관계를 인류문화 발전을 위해 불가피한 것으로 보았던 반면, 쉴러는 역사의 진행을 변증법적 과정 으로 이해하였다.이러한 변증법적 관계를 개별 인간의 차원에서 살펴본다면, 인간의 ‘인격’은 시간을 초월해 존재하는, 말하자면 영원한 실체로서 통일성을 견지하는 형식충동을 유발한다면, 인간의 감성적 경험에 다양성을 부여해 주는 것은 ‘감성적 충동‘ 또는 질료충동이다. 인간 본성에 자리잡고 있는 이 두 충동은 본래 상반적인 관계에 있지 않지만, 그러한 현상이 나타난다면, 그 충동들이 서로 서로에게 월권을 하지 못하도록 공정히 조정역을 떠맡는 것이 문화의 과제라는 것이다. 한 발 더 나아가서, 이 두 충동이 조화적 평형을 이루는 때, 그것은 유희충동으로 나타나 모든 강제성을 지양하고 인간의 정서를 도덕적으로 또 물리적으로 동시에 움직임으로써 인간을 법칙과 감정의 괴로움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는 것이다. 또한 넓은 의미에서 감성적 또는 질료적 충동은 “삶”이라고 할 수 있고, 형식충동의 대상은 “형태”라고 한다면, 유희충동의 대상은 “생동 형태”로서 넓은 의미에서의 “아름다움”을 지칭한다.그러한 충동을 통해 인간은 “자기 인간성의 극치로서의 미”를 추구하는 바, 이성은 그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미와 더불어서는 오직 유희만을 해야하고, 그가 유희를 한다면 오직 미와 더불어 해야 한다.” 쉴러는 이어서 인간은 유희를 할 때 전인적모습을 되찾게 된다는 것과 그것은 인간성 회복을 가리킨다고 시사하고 있다. 반면, 이 선언의 이면에는 인간은 미의 영역이 아닌 다른 실제적 영역들에서는 유희적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가 또한 깔려의 대화에 처한 시인의 ‘자기 이해’라고 간주할 수 있겠다.쉴러는 그의 소박문학 논의에서 먼저 유년시절의 이상적 의미를 되새기며, 그것을 자연과 진리에 대한 동경과 연계짓고, 더 나아가서는 고대인 특히 희랍인의 존재방식과 자연을 내용으로 한 문화의 완전성에 대한 논의를 펼친다. 다음, 쉴러는 그의 시대를 대변할 입장을 조심스럽게 개진한다. 쉴러의 대주제는 한 편으로는 17 세기에 일었던 ‘고대?근대의 논쟁’을 연상시키고, 다른 한 편에서는 소박시인으로서의 괴테와 감상시인으로서의 자기 자신과의 ‘해석학적 대화’를 담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감상적 유형’의 논의는 독일 낭만주의의 담론을 선취하고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그 두 유형의 비교와 그 논의의 단초는 평범한 관찰로부터 출발한다. 예컨대 우리가 어느 사람의 행동을 보고 유치하다고 판단하면, 그것은 오성의 판단으로서 우리에게 우월감을 안겨주지만, 반대로 그 사람의 단순성은 그가 지닌 천진하고 참된 마음에서 울어나는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천진성을 덕목으로 받아들이는 이성의 요청이다. 즉 쉴러는 천진성을 유치함과 구별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소박함은 뜻밖에 마주치게 되는 천진성으로서 아주 엄밀한 의미에서는 실제의 유년시절에다 귀속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소박함은 기교적 또는 가공적인 것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그 완성된 양상을 천재의 예에서 찾고 있다. “모든 참다운 천재는 소박해야 하지, 그렇지 않으면 천재가 아니다. 그의 소박성만이 그를 천재로 만드는 것이다.” 쉴러는 소박한 시인의 유형으로 호머를 비롯한 고대 시인들과 근대에서는 괴테와 쉐익스피어를 들고 있다. 물론 소박한 유형은 고대에서, 감상적 유형은 근대에서 지배적인 것으로 관찰되지만, 그 근본적 차이를 시대적 상황의 차이에서 찾을 수 있음은 자명하게 여겨진다. 즉 우리가 자연아였을 적에는 우리는 행복하고 완전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자연의 품에서 떨어져 나와 자유롭게 된 반면, 그 두 가지 속성을 다 잃어버렸다. 다.
    인문/어학| 2003.06.22| 5페이지| 2,000원| 조회(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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