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 논쟁 요약★◑ 태극 논쟁의 발단 ◐태극논쟁은 무극태극논쟁이라고도 한다. 이는 성리학의 주요 개념 가운데 하나인 태극이 무엇이며 어떻게 체득할 것인가, 이를 바탕으로 한 실천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놓고 회재 이언적과 망기당 조한보가 벌인 논쟁을 가리킨다. 이 논쟁의 발단은 이언적이 27세 때에 외숙인 망재 손숙돈과 망기당 조한보 사이에 서신으로 왕복했던 무극·태극에 관한 논설을 얻어 보고 나서 시작되었다. 즉, 조한보가 손숙돈에게 보낸 「망재의 무극태극에 대한 주장에 답한다 答忘齋無極太極辯」를 얻어 보고 나서 「망재와 망기당의 무극과 태극에 대한 주장 뒤에 붙여쓴다 書忘齋忘機堂無極太極說後」는 비평을 썼는데, 그 글이 뜻하지 않게 조한보에게 전해지고 이 비평에 대한 견해를 조한보가 먼저 편지를 통해 보내 오면서 논쟁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태극 논쟁의 내용과 전개 ◐①첫째 논쟁조한보의 학설은 태극이 곧 무극이고 대본이 곧 달도라는 입장에서 상달하여 근본과 대체를 세우면 말단과 지엽은 필요없으므로, 구구하게 말단과 지엽을 따질 필요가 없다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이에 반하여 이언적은 정조본말과 내외빈주 및 체용동정과 선후본말을 분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언적은 조한보의 무극·태극에 관한 견해가 주돈이의 본지를 얻은 것 같으면서도, 그 이론이 너무 고원하여 근실을 추구하는 유학의 종지에 배치되는 점이 있다고 주장하였다.이언적은 조한보의 태도는 통합하는 것을 좋아하고 분리하는 것을 싫어하며, 근실한 것을 버리고 허원한 것에 빠지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그것은 '눈금이 없는 저울이나 마디 없는 자'와 같은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이언적은「답망기당제1서」에서 조한보의 적멸론과 존양론을 비판하였다. 그는 유가의 리는 지극히 무한 가운데 지극히 유有가 있기 때문에, 즉 이는 무성무취하지만 천지만물의 근저가 되기 때문에 "무극이면서 태극이다"라 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언적은 조한보의 '일리태허설'이나 "무극에서 마음을 노닌다"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상달천리만 있을 뿐이라서 허학에 빠질 우려가 있음을 지적하고, 유학은 하학인사의 실학임을 강조하였다.②둘째논쟁「답망기당제2서」에서 조한보가 '멸滅'이나 '유심遊心' 등의 표현을 제거한 것을 일단 수긍하였다. 그러나 조한보가 "허무는 곧 적멸寂滅이고 적멸은 곧 허무이다"라 하여 여전히 적멸론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비판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유가의 허는 허하면서도 유이나, 저들의 허는 허하면서 무하다. 유가의 적은 적하면서도 감하는 것이나, 저들의 적은 적하면서 멸한 것이다. 따라서 유가나 저들이 모두 허·적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같지만 그 귀결은 전혀 다르다.-즉, 유가의 허는 실리가 있는 허이며, 적은 감이수통이 있는 적이라는 것이다. 이언적은 또한 조한보의 "경을 주로하여 마음을 보존하여, 위로 천리에 통달한다"는 주장을 일단 수긍하면서도, 거기에 '하학인사'가 빠져 있음을 지적하고, "경을 주로 하여 마음을 보존하고, 한결같이 하학에서 공부를 쌓아, 천리에 통달한다"고 수정할 것을 제의하였다.③셋째논쟁조한보는 "세상 사람들이 환형을 견실한 것으로 착각하여 집착하는 것을 깨우치기 위하여 '적멸'이라고 말했다"고 하여, 자신의 적멸설을 변명하였으며, "하학을 통하여 상달하는 것은 어린 초학들에게나 해당되는 것이요, 호걸한 선비는 그렇지 않다"고 하여, '하학인사'에서 출발하는 것을 거듭 부정하였다.「답망기당제3서」는 이러한 주장에 대한 이언적의 비판이다. 이언적은 육체는 하늘이 내려 준 것으로서 결코 환형이 아니라 하고, 따라서 인간은 천형(타고난 신체를 소중히 여기고, 신체의 각 기능을 활용하여 사람의 도리를 다하는 것)을 해야 할 것이요, 결코 육체를 단멸하려 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공자孔子는 성인이었지만 '하학인사'에 충실하였음을 지적하고, 조한보의 주장을 선가의 돈오법이라고 비판하였다.④넷째논쟁조한보는 마침내 '적멸'이라는 말을 버리고, '하학인사'의 공부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일 뿐, 속으로는 여전히 자신의 본래 주장을 크게 바꾸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조한보는 '주경존심'을 '경이직내'에만 해당되는 것으로 규정하고, '의이방외'를 배제하였으며, 먼저 '대체'를 세운 다음에 '하학인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답망기당제4서」는 이러한 주장에 대한 이언적의 비판이다. 이언적은 '경이직내'와 '의이방외'는 동시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으로서, 하나만을 추구할 수는 없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인사'를 의도적으로 배제한 다음, '주경존심'을 통하여 '대체'를 세우고 난 뒤에 비로서 '인사'를 배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비판하였다.이에 조한보는 자신의 주장을 일부 굽히기는 하였지만, 이언적과 완전한 합의에 이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 철학사에서의 의미 및 평가 ◐한국 성리학의 핵심적인 부분은 이황과 이이의 학설을 통해 거의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 같은 논의의 지평을 연 선구자는 화담 서경덕과 회재 이언적이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본격적으로 우주론적인 形而上學을 탐구하였으며, 理氣論에 대한 주장을 통해 각기 뚜렷이 자기의 강조점을 달리함으로써 독자적인 학문을 개척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 결과로 서경덕이 이이에게 많은 영향을 준 반면에 이언적은 이황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이후 체계적인 성리학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였다.16세기에 이루어진 많은 연구 성과 중 앞에서 다룬 이언적과 조한보의 태극논쟁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그 당시 「太極圖說」은 天地萬物의 이치를 구비한 것으로 중시되어 학자들 사이에서 많이 논의되었던 주제이었다. 그 중 이언적과 조한보의 태극 논쟁은 중국의 주륙 논쟁과 쌍벽을 이루는 것으로 평가된다. 그런데 주륙 논쟁의 핵심 주제는 존재론적 범주에 있었다. 그러나 이언적과 조한보의 태극 논쟁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모습을 보인다. 이 논쟁의 출발점은 주륙 논쟁의 주제들과 같았지만 무극과 태극으로 표현되는 절대를 어떻게 체득할 수 있으며 그러한 체득이 실천과 어떠한 관련을 갖는가를 따지는 수양과 실천의 문제로 발전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