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중서부 지방 지석묘의 분포와 특징- 충청남도 지역을 중심으로 -Ⅰ. 序 論Ⅱ. 韓國 支石墓의 특징과 연구현황Ⅲ. 忠南地域 支石墓의 분포 현황Ⅳ. 忠南地域 支石墓의 형식 검토Ⅴ. 忠南地域 支石墓 社會의 性格Ⅵ. 結 論Ⅰ. 序 論최근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는 支石墓)의 발굴과 연구 논문들은 각기 다른 다양한 의견을 내포하고 있다. 지석묘의 형식 분류에서 시작하여, 지석묘 사회가 平等社會였는지, 아니면 複合社會였는지에 대한 성격 문제에 이르기까지, 많은 의견들이 분분하다. 본고는 왜 지석묘가 이렇게 다양한 의견을 보이는 걸까? 라는 의문점에서 출발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충청남도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많은 숫자의 지석묘에 대한 분포와 특징을 살펴본 후, 기존의 연구를 간략히 살펴보고 그러한 연구를 기반으로 형식 분류를 하고자 한다. 또 한 본고의 궁극적인 목적은 선행 연구자들의 연구를 비교 분석하여 충청남도 지역의 支石墓社會의 성격이 平等社會였나, 複合社會였는지를 밝혀내보고자 하는 것이다.巨石文化는 전 세계에서 발견, 보고되고 있는데 우리나라 거석문화의 상징인 지석묘는 靑銅器時代의 대표적인 墓制라 할 수 있다. 東北亞 地方에서는 우리나라와 일본 큐슈지방, 발해만을 중심으로 한 遼東地方에 집중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다. 한반도는 그중 가장 많은 밀집 분포를 보이고 있으며, 특히 전라남도 지역의 경우 東北亞 전 지역에서 발견된 것보다 훨씬 많은 2만 여기가 넘는 지석묘가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靑銅器時代 墓制 연구에 있어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지석묘는 上石이 지상위로 드러나 있는 특징상 예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아왔고 또한 연구되어왔다. 특히 1970년대 이후 국토종합개발의 시작으로 인한 구제발굴의 폭발적인 증가는 지석묘 연구에 있어서도 획기적인 전환점을 가져다주게 되었고, 많은 양의 지석묘가 발굴 되어 자료의 양적인 성장과 질적인 축적이 이루어진 요즈음 지석묘에 대한 연구 또한 많은 부분에서 진행되고 있다.지석묘는 그 자체로써도 많은 우리에게우리나라 학자들에 의해 연구되어 왔다. 이러한 연구들을 살펴보면 먼저 우리나라의 각지의 유적을 답사하고 발굴조사에 종사하였던 鳥居龍藏은 우리나라 북부지방에 분포하고 있는 지석묘가 4매의 벽석 위에 1매의 커다란 개석을 올려놓은 형식인 반면에, 전라도 및 남해안 지방의 고인돌은 4매의 벽석이 없는 기반형을 보이는 상대적으로 간단한 구조임을 파악하고 전자를 진보된 구조로 파악하고 남방식 지석묘가 북방식 지석묘보다 선행한다고 하여) 처음으로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인식하였으며, 이에 따라서 우리나라 지석묘는 남방에서 북방으로 전파되고 있음을 시사 하였다. 1936년에는 대구에서 대봉동고인돌이 발굴되었는데) 어떠한 경위에서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榧本龜生은 남방식지석묘가 북방식지석묘보다 늦게 출현한다고 하여 鳥居龍藏의 설을 반박하고, 고인돌은 북방에서 남방으로 전파되고 있음을 주장하였다.또한 藤田亮策은 1948년 소위 탁자식이라고 하는 지석묘는 중국의 만주를 비롯하여 한반도 남해안지역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 있으며 탁자식지석묘의 하부가 생략되어 조합식의 석관 혹은 수혈식 석실의 묘곽을 갖는 기반식지석묘는 남해안과 그 주변 도서지역에 많은 분포를 보이고 있고 일본의 구주지방에까지 전파되어 일본에는 기반식지석묘만 있다고 하여 지석묘 문화가 북방에서 남방으로 전래되고 결국 일본의 구주지방까지 전파되고 있음을 주장하였다.)孫晉泰는 거석문화를 크게 支石墓와 巨石蓋墳墓의 두종류로 형식분류를 하였다.) 그리고 지석묘는 다시 축조 목적에 따라 祭壇과 住居 그리고 무덤 등으로 기능적 분류를 하였다. 또한 지석묘에 관련된 전설이나 축조방법 등을 고찰하면서 연대를 신석기로 추정하였고, 장법은 세골장을 채용하였다고 주장하였다.韓興洙는 거석문화를 선돌?지석묘?칠성바위?돌무덤으로 분류하면서, 지석묘를 크게 북방식과 남방식의 두 가지로 형식 분류를 시도하였다.) 그는 지석묘를 정착생활?농경 등이 시작된 新石器時代에 同族의 屍體를 매장하기 위해 축조하였다고 주장하였다.정백운은 석실위치에 따라 북것으로 인식하고 있다.)이영문은 지석묘에 부장된 유물의 유형, 지석묘의 분포 수에 따른 군집 수, 부장품에 포함된 교역품, 지석묘군의 지역적 거리 등을 검호한 후, 지석묘의 축조는 지배자의 출현과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지석묘의 거대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부장품으로 출토되는 유물은 상대적으로 희소하다. 이는 오랜 기간 동안 지표상에 노출되어 파괴되거나 도굴되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지석묘 사회가 평등사회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지석묘에서 출토되는 부장품 가운데 사회적 계층화를 가리키는 유물이 없음을 들어 지석묘 사회는 계층화가 진전되지 않은 평등사회라고 주장하며, 지석묘는 평등사회에서 오늘날 향약이나 두레와 같이 마을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협동 작업에 의해서 축조되었으며, 마을사람 모두들의 무덤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먼저, 이남석은 지석묘의 분포가 자연환경과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원형 또는 직렬의 형태로 지석묘가 축조되어 있는데, 이는 단지 지석묘사회가 혈연으로 연결된 사회임을 반영하는 것일 뿐이며, 석검 같은 부장품은 사회적 권위물로써 협동 작업에 의해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지석묘는 개인의 능력보다는 사회적 협동 작업에 의해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지석묘 사회는 신분적 계층화가 미약한 평등사회임을 주장하고 있다.)지건길은 지석묘의 크기가 정치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능력과 상관관계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지석묘가 반드시 소수의 지배계급들만을 위한 묘제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으며, 지석묘가 강변이나 산록아래의 평지에 분포하고 지석묘의 장축방향이 물의 흐름이나 산맥의 방향과 평행한 것은 자연사상과 연관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지석묘사회가 자연환경에 크게 영향을 받는 사회이며, 지석묘는 지배계층에 의한 인력동원이 아닌 공동체적 협동체제 아래서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강봉원은 한국 남부의 지석묘 사회는 영속화된 지도력, 호화로운 부장품, 교역품, 제도화된 정치체, 주기적인 의례활동 등 확인되고 있다. 분포양상을 살펴보면, 총 85개의 군집에 356기의 지석묘가 존재하며, 구릉상이 201기, 평지가 131기, 불명이 24기이다. 1~3기인 것이 50곳, 4~9기인 것이 23곳, 10~15기인 것이 10곳 15기 이상인 것이 2곳 존재한다.위에서 살펴본 충남 해안 지역과는 달리, 비교적 적은 수의 지석묘가 금강중심의 내륙 지방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약 94기의 지석묘가 존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은 총 32개의 군집이 존재하며, 약2/3정도가 구릉상에 위치하고 나머지는 평지에 분포하고 있다. 역시 1~3기의 소규모 군집이 가장 많은 분포를 보이고, 15기 이상의 군집은 단 한곳에 그치고 있다.이 상에서 알 수 있듯이 대체적으로 지역별로 군집 간 분포 수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15기 이상의 대군집에서 1~3기의 소군집으로 갈수록 수적으로 많아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양상은 서해안 남부지역에서 가장 뚜렷하게 보이고 있으며, 그 밖의 두 지역에서도 미미하지만 그러한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이렇게 안정적인 피라미드 구조를 가지고 각 군집간의 분포수의 차이에서 지석묘 축조집단의 규모나 세력의 우월 또는 축조기간의 차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라는 것을 적용하였던 전남지방의 예를 충남지방에까지 적용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점이 생긴다. 전남지역의 경우 수십여기가 넘는 대군집에서부터 시작하여 그보다 한참이나 적은 1~5기정도의 소군집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군집이 존재하는 반면에, 충남지역의 경우 대부분의 지석묘가 소군집이며 일부 대군집의 경우도 20여기를 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양상을 살펴볼 때 전라남도 혹은 전라북도 지역의 수천, 수만여기가 밀집된 분포를 보이는 지석묘 군집과는 다른 방향의 연구가 모색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 또한 많은 수의 지석묘군이 존재하지 않고 지석묘 군집간의 차이가 크지 않기 때문에 이를 집단의 높고 낮음의 위계문제에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관계로서의 접근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발굴조사가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2. 출토유물의 검토지석묘의 경우 많은 수의 유적이 분포하지만, 어느 지역에서나 출토되는 유물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러한 이유는, 장기간에 거쳐서 많은 지석묘들이 도굴되기도 하였지만, 처녀분으로 확인된 지석묘의 석실 내에서도 유물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 점을 감안하면 유물을 부장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특히 충남지역 지석묘의 경우 발굴 조사된 경우가 매우 희박하고, 지표조사가 대부분이라서 유물의 출토 사례 또한 매우 적다. 그렇기 때문에 유물상을 가지고서 형식 분류라든지, 지석묘간의 위계관계 등을 연구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충남지역에서 간헐적으로 수습된 유물을 살펴보면 지석묘의 매장 주체부에서는 석검, 석촉, 석도 등의 석기와 홍도, 무문토기편 등이 출토되고 있다. 논산 신기리 지석묘에서는 일단병식 석검 1점, 유경식 석촉 15점이 출토되었고, 논산 원봉리 지석묘에서는 이단병식 석검 1점, 유경식 석촐 3점, 홍도편 등이 출토되었다.) 대전 신대동에서 조사된 지석묘의 하부구조로 생각되는 석곽에서는 홍도 1점, 유혈구 이단병식 석검 1점, 삼각만입석촐 10점, 이단경식 석촉 3점 등이 출토되었다.) 신대동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비래동의 1호 지석묘에서는 비파형 동검 1점, 삼각만입석촉 3점, 홍도 1점이 출토되었고 2호 지석묘에서는 붉은간토기편, 3호 지석묘에서는 무문토기편과 관옥 1점 등이 출토되었으며,) 과 같다.논산 신기리일단병식 석검 1, 유경식 석촉 15논산 원봉리이단병식 석검 1, 유경식 석촉 3, 홍도편대전 신대동유혈구 이단병식 석검 1, 삼각만입석촉 10, 이단경식 석촉 3, 홍도 1대전 비래동 1호비파형동검 1, 삼각만입석촉 3, 홍도 1대전 비래동 2호홍도편대전 비래동 3호무문토기편, 관옥 1 충남지방 지석묘 출토유물이렇듯 충남지방의 지석묘에서는 유물이 출토되는 예가 극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렇게 소량의 유물들을 통한 다양한 연구는 어렵다고 판단된다. 앞으로 많은 발굴 조사의.)
사비나성의 축조에 대하여1. 머리말2. 泗?羅城의 構造와 範圍3. 泗?羅城의 築造時期4. 泗?羅城의 都城史的 意義5. 맺음말1. 머리말사비나성은 부소산성과 함께 사비도성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시설의 하나이다. 도성을 이루는 도시공간 전체를 외곽으로 둘러싼 새로운 형태의 도성제는 부여를 도성으로 하였던 6세기 중엽경의 백제 도성제에서 비로소 나타나는 것으로서, 그 도성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 동아시아 고대에 있어 나성이라는 외곽을 갖춘 완비된 형태의 도성제의 효시가 되는 점은 물론이려니와 이후 일본열도에도 영향을 미쳐 九州의 大宰府 방어시설 구축 시에도 그러한 방어전략 및 성벽 축조 기술이 전수되고 있어 史的 의의를 짐작할 수 있다.부여 나성이 지닌 이러한 중요성으로 인해 일찍이 1963년에 사적 제58호로 지정되었고, 이를 포함한 사비도성에 대한 여러 연구자들의 관심도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많은 관심에도 불구하고 아직 사비도성을 구성하고 있는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나성에 대한 미비한 점이 많다.본고에서는 나성의 구조와 축조시기, 그리고 그 의의를 살펴봄으로써, 단편적으로나마 접근해 보고자 한다.2. 泗?羅城의 構造와 範圍그 동안의 연구를 통해 알려진 나성의 구조는 대체로 부소산성 동편에서 雙北里의 靑山城까지 이르는 北羅城과 여기서 陵山里 고분군 서편 능선과 필서봉을 지나 ?倉里의 백마강변까지에 이르는 東羅城, 扶蘇山城 서쪽에서 시작되어 東南里ㆍ軍守里의 백마강 자연제방을 따라 있는 西羅城, 宮南址 동남편의 中井里와 旺浦里 사이 능선상에 동서로 있는 南羅城 등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이나, 최근 이루어진 일련의 조사결과 기존의 것과 다른 점들이 다수 드러나고 있다.)종래 나성의 평면형태가 도성을 사방에서 감싼 것으로 이해되어 왔는데, 최근까지 드러난 내용은 그와 달리 부소산성 동쪽에서부터 청산성까지의 북나성 0.9㎞, 청산성 동쪽에서 능산리를 거쳐 염창리에 이르는 동나성 5.4㎞ 등 모두 6.3㎞의 구간에서만 나성이 확인되었을 뿐 서나성과 남나성 지점에 대한 구체적인 사항은 홍재선에 의해 제시된 바) 있는데, 그에 따르면 석목리 부근의 산지로 이어지는 부분에서 성벽이 2개로 나뉘어진다. 그 가운데 보다 동쪽으로 확대된 성곽선은 그가 처음으로 확인한 것이고, 서쪽의 것은 기왕에 인지하고 있던 것이라 한다.그러나 박순발)은 조사결과에 따르면 이 부분의 성벽선은 역시 단일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한다. 즉 홍재선이 새롭게 확인한 성벽선이 당초 유일한 것이며, 그의 조사 무렵 旣認 성벽선은 誤認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머지 부분은 크게 다르지 않다. 동나성은 북나성 1문지에서 남쪽으로 꺾이는 부분부터 도면에서 보는 바와 같이 21지점까지 연결된다. 한편 동나성에서 2대의 문지가 또한 확인되어, 월함지의 수문지를 제외하고 동나성에는 모두 5개소의 문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하 각 지점별로 살펴보기로 한다.6지점은 청산성 동남방 평야에 남아 있는 성벽 잔존부이다. 현재 남아 있는 부분은 약 50m 미만이나 당초 동나성의 통과 지점 및 저지대 나성의 축조기법을 잘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잔존부분의 지형으로 보아 당초 이 지점의 성벽 기저부 폭은 약 30m 가량으로 추정되며, 농수로 단면 정리를 통해 확인된 성토부의 높이는 약 10m 정도이다. 성토부분은 다시 점토와 사질토를 교호 성토한 상부와 소위 뻘흙의 黑灰色 泥土로 구성된 아랫부분으로 나뉘어 진다. 흑회색 니토는 현재의 경작지면 약 2ㅡ 아래에 해당되는 지점에서 시작되고 있음이 농수로 단면층 조사에서 확인되었다.월함지 또는 “여삼방죽”으로 불리는 유수지는 지금도 일부 흔적이 잔존하고 있는데, 이러한 유수지의 형성은 이 부분의 나성축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은 물론일 것이다. 월함지 부분은 금성산 및 부소산 사면일대에서 유입되는 流水가 가증천으로 유입되는 소하천에 해당되므로 이 지점의 동나성은 이를 가로막게 된다. 이 경우 유수처리를 위한 水門이 필요할 것이며, 이 때 성벽에 가해지는 수압을 완화하기 위한 조치로서, 유수지가 필요할 것으로 이해되기 상당한 규모의 건물지군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동나성 제2장대지는 능산리에서 남쪽으로 능선을 따라 이어지던 성벽이 표고 118m 필서봉에 이르러 성벽이 크게 만곡하게 되는데, 이 필서봉이 곧 장대지로 보여진다. 이곳은 염창리 지역이 훤히 조망되는 곳으로서, 이 일대에서 가장 중요한 요충지에 해당하는 지점이다. 제3장대지는 산정부에 위치하고 있다.동나성 제6건물지는 동나성의 가장 남쪽 끝자락에 해당되는 성벽의 안쪽 부분으로서, 이 동나성이 끝나는 지점의 백마강변은 이전에 옥배지가 있었던 곳으로서, 백제 당시에도 저습지였을 것이므로 동나성은 자역히 이 곳에서 끝나게 된다. 이러한 지역에 자리잡은 제6건물지는 이 주변의 방위와 관련된 시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3) 南羅城남나성의 존재를 처음으로 제기한 연구자는 홍재선이다. 그에 따르면 西流하는 왕포천이 궁남지 동편에서 크게 回折하여 東南流하는 지점에서 시작하여 中井里 1리와 2리 사이에 동서 방향으로 뻗은 표고 30~60m의 능선을 따라 토축성벽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가 제시한 근거는 거의 대부분 건물지와 관련된 와편, 초석 등일 뿐 토축 부분의 구체적인 상태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다.이후 남나성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입장)과 함께 만약 그것이 축조되었다면 궁남지 축조 시점인 634년 이후로 볼 수 있으므로 그 축조 목적은 예상되는 당의 침입에 대한 방비였을 것으로 보는 견해) 등이 있다.그러나 최근 서나성 예상 통과 지점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궁남지 동편의 중정리 구릉 어디에서도 성벽의 흔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인위적인 성토는 확인되지 않았으며, 특히 홍재선이 주장하는 토축 성벽부분은 자연상태의 능선일 뿐이었다. 당초의 성토 부분이 완전히 퇴락되어 남아 있지 않다는 가정이 있을 수도 있으나 전술한 동ㆍ북나성 각 지점에서 보았듯 이 경우 성벽이 통과하는 능선의 하단부에는 적어도 축성과 관련된 석성 잔존 부재가 해결되어야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확증이 없는 남나성의 존재를 상정하여 추론을 진행할 필요는 없을 것이 확인될 뿐 제방은 없었으며, 이 곳에 제방이 처음으로 만들어진 시점은 조선시대였다). 군수리 조사지점에서 서쪽 강벽으로 연결되는 직선상에 설치한 다수의 탐색갱조사)에서도 현재의 강변 시설 원예 경작지 아래 약 3m 지점에서 백제시대의 구지표가 확인되나 제방 또는 나성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3. 泗?羅城의 築造時期사비도성은 外郭, 즉 羅城으로 둘러싸인 전체공간을 지칭하는 것이므로 이의 축조연대란 결국 나성의 축조연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나성의 축조시기에 대한 비정을 통하여 사비도성의 축조시점을 살펴보겠다.우선 사비도성의 축조 시점을 말해 주는 직접적인 문헌기록은 없다. 그러나 熊津都가 지니고 있는 긴급 피난적인 성격이나 지형적인 제한에서 비롯된 도시적 기능의 한계 등을 고려할 때 聖王 16년의 천도에 앞서 일찍부터 사비천도 계획이 수립되고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렇다면 한성으로부터 웅진천도 후 불과 25년 정도 경과된 시점부터 사비천도의 기본 구상이 전개되고 있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사비천도 계획이 이 무렵 동성왕대에 이미 구체화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근거로는 현재의 부여군 임천면 聖興山城으로 비정되는 ‘加林城’이 이 무렵에 축조되었던 사실을 전하는 『三國史記』 百濟本紀 東城王 23年條의 기사가 있다. 윤무병은 이 성의 위치가 사비 新都의 방어에 매우 중요한 요충지임을 들어 이 성의 축조는 결국 사비천도의 준비조치로 불 수 있다고 하였다.)그러나 이 무렵의 東城王代에 실제로 사비도성의 건설이 진행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문헌에 전하는 것이 없으므로 문헌사료상 사비도성의 축조시점을 비정하기 어렵다.나성의 축조시기에 대해서는 부소산성과 마찬가지로 천도 이전 또는 그 무렵으로 보는 견해)와 부소산성과는 별개로 武王代인 7세기 초로 보는 견해)가 대립되어 있다.나성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서나성, 남나성은 그 존재여부가 없고, 부소산성을 기점으로 하여 그 동쪽으로 뻗어 내려 청산성을 경유하여 석목리에 이르는 북나성, 능산리의 서쪽비교를 통해 사비나성이 있는 사비도성의 특징 및 도성사적 의의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漢城時代의 도성은 현재까지 알려진 자료로 보는 한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의 2개의 단위 성으로 구성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은 모두 평지에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평지성이 가지고 있는 방어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성벽 외곽의 삼면에 해자를 만들고 성벽 외면에는 목책 등을 설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해자와 목책시설은 그간 몽촌토성에서만 알려져 왔으나 최근 성벽이 절개 조사된 풍납토성에서도 그러한 흔적이 확인되고 있다. 이들 해자는 한강 支川인 成內川의 自然流路를 그대로 이용하거나 부분적으로 물길을 끌어들이는 방식을 채택하여 築造功力을 최소화하였던 것으로 드러났다.이처럼 평지성들만으로 都는 일단 유사시 전체 도성의 방어에 어려움이 예상된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背後 高山에 입지한 도피성이 있었음직 하나 현재까지 알려진 고고학 자료상으로는 그 가능성이 극히 희박하다. 그리고 문헌사료상으로도 배후 도피성의 존재가 시사되는 바도 없다. 한성에 가해지는 고구려의 위협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갑작스런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을 비롯한 지배층들이 도성 내에서 최후를 맞이하였던 사실은 『三國史記』 및 『日本書紀』에 보이는 한성 함락 과정을 전하는 기사 내용에 잘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웅진시대의 都는 긴급한 상황에서 정해진 만큼 천혜의 요충지인 공산성을 중시하였던 결과로 여겨진다. 아마도 한성이 안고 있던 취약점을 염두에 염두 해 둔 입지 선택으로 이해된다. 다시 말하며 배후의 도피성이 없음으로 해서 한강이라는 최후 방어선이 무너짐으로써 힘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한성이 지닌 방어상의 결정적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가장 우선적으로 도피성으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공산성이 주목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결국 熊津期의 都의 구조는 긴급 시 도피할 수 있는 산성을 도내에 두고 있는 점에서 평지성만으로 구성된 한성기의 都와는 다르다 할 수 있다. 이는 도있다.
백제 고분에 대한 고찰Ⅰ. 머리말Ⅱ. 백제고분의 특성과 묘제Ⅲ. 백제고분의 유형검토Ⅳ. 백제고분의 전개 현황Ⅴ. 맺음말Ⅰ.머리말우리나라 백제에 대한 연구는 일찍이 활발히 전개되어, 오늘날까지 많은 성과를 이뤄내고 있다. 본고에서는 현재까지의 연구결과를 토대로 백제의 고분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다.우리는 주검을 위한 시설을 무덤이라고 부르며, 한자로 “분묘(墳墓)”라 적을 수 있는데 우리말로 무덤은 한자어에 의해 분묘 혹은 묘지 ? 고분 등의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특히 우리는 무덤 중에서 오래된 것을 “고분(古墳)”이라 부르는데, 고분이란 용어는 오래 전이란 시간을 기점으로 역사성이 부여된 무덤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고분이란 용어는 학술적 의미가 강하다. 옛날의 무덤 중에서 학술적 가치가 있는 것을 고분으로 부르자는 의견도 있었고, 이로 보면 고분 자체의 의미는 학술적 측면에서 시작된 것이고, 여기에 역사성이 부여되어 고분시대 혹은 고분문화란 용어가 널리 사용되기도 한다.고분을 비롯한 무덤은 사람이 죽은 다음에 만드는 것으로 시신을 처리하는 시설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무덤은 여기에 묻힌 자가 누구냐, 즉 신분 혹은 지위에 따라 형태나 내용을 달리하고 있다. 나아가 일반적으로 무덤이라 부르지만 무덤 자체도 어떻게 생겼는가, 무엇으로 만들었는가에 따라 그 내용이 다양하게 구분된다. 즉 무덤을 만드는 방법은 문화권에 따라 혹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커다란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무덤을 만든 사람들의 문화배경 ? 민족성 ? 생활환경 나아가 자연환경의 차이에 따라 각기 다른 형태의 무덤을 만든다.따라서 본고에서는 백제고분에 대한 종합적 이해를 시도한다는 측면에서 백제고분의 성격을 검토하고자 한다. 백제고분의 정의를 시간 및 공간성에 맞추어 정리하고, 더불어 묘제의 특성을 살펴보겠다. 그런 다음에 각 유형의 묘제를 형식별로 나누어 그 현황을 살피면서 이들을 시간순으로 전개현황을 살핌으로써 다양한 묘제가 어떤 형태로 변화되는가를 살펴보겠다.Ⅱ.백제고인 매장부를 지하에 마련하는가 아니면 지상에 마련하는가, 보호시설로 흙을 사용하든가, 돌을 사용하는가와 더불어 주구묘처럼 매장부 외곽에 구를 조성하는 방식도 있어 대단히 복잡한 양상이다.백제묘제의 분류방식으로는 이남석은 『백제 석실분 연구』에서 축조재료와 매장부의 특성을 기준삼아 백제묘제를 12가지로 분류하였었는데), 여기에 분구의 존재여부를 분류기준에 추가하여 재분류를 실시한 결과 백제의 묘제를 모두 16가지로 나눈바가 있다.) 그에 따르면 백제묘제는 돌을 재료로 사용한 석축묘로 적석총, 횡혈식 석실분, 수혈식 석곽묘, 횡구식 석실분과 석곽묘로 세분할 수 있고, 흙을 파서 만든 토광묘는 순수토광묘, 목관토광묘, 목곽 토광묘, 주구묘, 분구묘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항아리를 매장주체부로 사용한 옹관묘는 석실 옹관, 토광 옹관, 분구 옹관, 횡혈 옹관으로 나누었고, 여기에 특수형식인 황장묘와 전축분 외에 와관묘도 또 다른 유형으로 추가하였다. 이러한 구분은 백제묘제의 경우 크게 석축묘 계열과 토광묘 계열, 그리고 옹관묘 계열 및 전축분 및 화장묘 등의 특수계열로 구분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토광묘는 조성방식과 구조내용에 따라 유형을 구분할 수 있다. 관 혹은 곽을 구성하기 위하여 목재를 사용하였는가의 여부에 따라 유형이 구분될 수 있는데 이미 고찰된 순수 토광묘, 목관 토광묘, 목곽 토광묘의 구분방식은) 여전히 타당성이 있다고 본다. 그런데 토광묘의 경우 축조방식을 고려하면 기왕에 검토대상에서 예외로 다루어왔던 토축묘와 즙석 봉토분, 혹은 분구묘로 분류되었던 것들에 대한 검토는 필요하다. 이들은 지상에 흙을 쌓아 올려 분구를 조성하고 여기에 매장시설을 갖춘 점에서 일단 분구묘로 통일할 수 있겠다. 사례로는 서울의 가락동 2호분이나 천안 두정동 분구묘를 들 수 있다. 이들은 지상에 흙을 쌓아 올려 분구를 조성한 다음, 여기에 다장의 형태로 여러 개의 매장시설을 갖추지만, 매장시설로 토광과 옹관을 함께 있어 토광묘의 범주에서 이해하기보다는 별도의 분구 들 수 있다.목관 토광묘는 순수 토광묘처럼 지반상에 토광을 파지만 안에 목재로 관(棺)을 결구한 것이다. 이 묘제는 대체로 한강유역에서 금강유역까지의 범위에서 많이 확인된다. 물론 그 분포권은 유동적일 수 있지만, 보다 남쪽 지역에 분구 옹관묘가 널리 사용되었음을 고려하면 백제의 목관토광묘 분포권은 큰 변화가 없을 것으로 여겨진다. 목관토광묘는 대체로 4세기대와 5세기대로 편년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상한은 보다 소급될 수 있을 것인데 특히 4~5세기 대에 백제묘제가 보편화되지 않은 것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목관토광묘의 입지환경은 구릉입지라는 전형적 형상을 간직하고 있다. 지하로 굴광한 토광은 형태가 다양하지만 대체로 장방형의 평면을 지녔고, 벽체는 거의 수직으로 굴착하고자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토광의 규모는 목관을 안치할 수 있는 공간의 확보와 그 안에 유물을 매납할 수 있는 공간을 고려하여 적당한 규모를 유지하고 있다. 다만 지금까지 확인된 토광묘를 통해서 볼 때 특정한 도량형을 사용한 통일된 수치는 확인되지 않는다. 오히려 규모나 형태는 지반의 굴착시에 나타나는 지질적 환경이 보다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토광내의 목관 설치는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지금가지 목관의 흔적을 정확하게 남긴 것은 천안 화성리 백제묘 등의 일부에 국한된다. 그러나 토광바닥에 목관의 흔적이 비교적 선명하게 남겨진 것이 많아 대체적으로 내용의 검토에는 문제가 없다. 지금까지 확인된 내용을 종합하면 우선 사용된 목재가 판재라는 점은 일반적 인식이다. 이들을 토광내에서 결구하는 방식은 짜 맞추기로 추정하지만 결구에 필요한 꺽쇠나 관못이 사용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별도의 방식도 추정할 수 있다.목곽 토광묘는 토광을 파고, 그 안에 목곽을 시설한 다음에 목곽내에 다시 목관을 안치한, 다시 말하면 이중으로 관과 곽 시설이 갖추어진 묘제이다. 이 목곽토광묘는 신라나 가야지역에서는 토광묘의 최종 발전단계에 이르면 보편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인정되나 백제에는 그러어렵다.기단식 적석총은 앞의 적석묘와 비교할 때 사용주체는 물론 형태적으로 차이가 있는 묘제이다. 이 묘제는 서울의 강남 석촌동에 대부분 밀집되어 있으며, 1910년대까지도 약 66기가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이들 중에 현존하는 것은 6기에 불과하며 1974년부터 1983년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조사된 6기의 고분중에서 1~4호분은 일단 적석총으로 볼 수 있지만 5호분과 파괴분은 봉토 위에 즙석된 것으로 적석총보다는 오히려 분구묘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적석총의 묘제는 분구를 석축으로 조성하고 그 속에 매장부를 꾸민 것으로 추정하지만 백제 적석총에서 매장부가 정확하게 조사된 것이 없다. 따라서 이 묘제는 외부의 형상만 언급될 뿐 실제 매장시설과 관련된 것을 검토하기는 어렵다.4) 석곽묘 유형석곽묘는 석축하여 묘실을 축조하지만, 이 묘실이 지하로 무덤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구축한 묘제이다. 특히 이 묘제는 연도 및 입구가 마련된 석실분과 대비되는 묘제로 연도 및 입구가 마련되지 않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석곽묘 자체도 횡혈식 묘제의 형향으로 입구가 마련되어 횡구식이 창출되기도 한다. 따라서 석곽묘는 입구가 전혀 마련되지 않는 것은 수혈식으로, 한쪽 벽체를 개구하여 입구로 사용하는 것은 횡구식으로 구분한다. 백제사회에 석곽묘의 등장은 4세기 초 ? 중반에 이루어지고, 특히 한강유역과 금강유역에 밀집된 형태로 잔존한다.수혈식 석곽묘의 입지환경은 대체로 구릉의 경사면에 자리한다. 무덤구덩이도 지반을 파서 묘실이 완전히 지하에 안치되도록 하였다. 물론 무덤구덩이는 유적에 따라 차이와 특징이 있다. 한편 묘실의 장축은 경사와 직교된 즉 등고선 방향으로 두는 것이 원칙이다. 입구가 없는 세장된 장방형 묘실의 배치는 경사방향보다는 오히려 등고선 방향으로 장축을 취하는 것이 효과적인 것과 관련 있다. 묘실 평면은 기본적으로 장방형이다. 그것도 세장된 것이 일반적인데 세장의 정도는 지역 혹은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다. 초기의 것은 평면이 아치식 ? 고임식 ? 수평식 ? 맞배식 ? 양벽 조임식의 8가지 형식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이러한 구분은 묘제의 변화 발전하는 모습도 반영되어 있다.횡구식 석실분은 횡혈식 석실분이 변화되어 발생된 묘제이다. 이 묘제는 입구를 만들지만 형식화되었고, 묘실 평면이 세장방형으로 변화되는데 특히 이전의 횡혈식 석실분이 존속된 지역에 대체로 남아 있으며 트깋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인 사비지역에 많다. 그 대펴적 사례로 송학리 고분군 ? 염창리 고분구을 꼽는다.횡구식 석실분의 구조특성은 입구나 연도가 형식화된 외에 횡혈식 석실분의 구조와 큰 차이가 없다. 표지시설이랄 수 있는 봉분 등의 현황은 여전히 확인이 어렵지만, 입지에서 남향의 경사면을 선호하면서 구릉의 선상부 혹은 산지의 정상부를 피한다. 횡혈식 석실분처럼 군집된 형태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조영되는데 군집 정도는 이전의 횡혈식 석실분보다 조밀한 것이 특징이다.6) 분구묘 유형분구묘는 매장 주체부의 형상과 관계없이 분묘의 외형에 따라 분류된 것이다. 즉 분묘를 조성함에 있어 시신을 안치하는 매장주체시설을 지반을 판 것이 아니라 지반상에 흙을 모아서 분롱을 만들고 이 분롱내에 매장부를 안치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묘제는 매장부의 형상에 따른 유형구분은 토광묘와 옹관묘의 범주에서 다루어야 할 것들이다. 특히 분구묘는 토광 및 옹관이 함께 조성된 것이 적지 않으며 지역적으로 영산강 유역에서는 대형 옹관묘로 알려진 분구묘가 독특한 형태로 오랫동안 지속되기도 한다. 여기에서는 일단 영산강 유역의 옹관묘, 즉 분구에 전용옹관을 사용한 묘제와 이외 지역에 있는 분구묘와 구분하여 전자를 분구 옹관묘, 그리고 후자를 분구 토광묘로 구분코자 한다.분구묘의 형상은 지상에 흙을 쌓아 분구를 만들고, 여기에 매장부를 조성한 형태의 무덤을 말한다. 따라서 분구묘는 지하에 토광을 파서 매장부를 만드는 분묘와는 축조환경에서 상당한 이질성이 있기도 하다. 백제 묘제로 분구묘의 자료는 많은 것이 아니다. 가락도이나 두정도의 자료 외에 서울의 석촌있다.
南海岸地方의 貝塚- 鐵器時代 貝塚形成을 中心으로 -目 次Ⅰ. 머리말Ⅱ. 貝塚이란Ⅲ. 鐵器時代 貝塚의 形成원인Ⅳ. 鐵器時代 貝塚形成배경에 대한여러 견해Ⅴ. 鐵器時代 貝塚의 形成Ⅵ. 맺음말Ⅰ. 머리말우리가 이번에 답사를 가게 되는 부산, 경남 일대의 남해안 지방은 일찍이 조개더미(貝塚) 문화가 발달한 지역이다. 이는 남해안 지방이 南海라는 바다를 끼고 있다는 자연환경적인 측면이 아주 강하다고 행각한다. 남해안 지방의 신석기 시대부터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선사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패총 유적은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더욱이 패총은 유적의 특성상 유기물 등이 잘 보존되기 때문에 토기나 석기, 기타 자연유물이 잘 남아 있고 이를 통해 당시 환경과 문화를 판단할 수 있기도 한다.본고에서는 남해안 지역의 경우는 신석기시대와 청동기 시대를 거쳐 특히 철기시대)에 이르러 패총이 급격히 증가하게 되는데, 이시기의 패총 형성과 관련된 여러 가지 견해와 원인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Ⅱ. 貝塚이란)패총이란 대부분의 연체동물, 조가비들과 함께 문화 유물 및 자연유물(짐승뼈, 숯, 부스러기등)이 들어있는 퇴적물을 가리킨다. 각 퇴적물에 들어 있는 조가비의 양은 유적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비율이 30%정도만 되어도 순수한 조가비로 구성된 듯이 보이기도 한다고 한다. 패총의 크기는 다양하며, 바닷가에 발달되어 있고 규모가 큰 조개더미는 살림터로 활용되기도 하였다.패총은 바다식량을 보편적으로 이용하였던 중석기시대부터 형성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들이 왜 패총에 눈을 돌리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세가지 견해가 있는데, 첫째는 가장 대표적인 견해로써 조개는 영양가도 낮고 하루 필요 열량 가운데 큰 몫은 못되지만 일종의 비상식량이자 보조식품이며 항상 손쉽고 안전하게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인구유지 및 정착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인데 이는 양의 문제보다 사냥, 채집 경제에 안전성을 부여하는 요소라고 보는 것이다.둘째는 바다식량을 낮게 평가하는 견해로서, 이들은 육지의 식량에살아가는데 드는 비용을 최소화하려고 하며 환경도 또한 그런 입장에서 선택되는데 이를 볼 때 바닷가는 매우 적합한 장소라는 것이다. 이는 바닷가는 생태계가 매우 풍부하며 생산성도 매우 높은데 거기서 얻어지는 식량자원을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연유가 어떻든 이렇게 패총이 만들어졌다면 우리나라의 패총 유적들은 어떠한 상황에서 쌓여진 것일까? 하는 의문점이 드는데 잠시 알아보고자 한다.우리나라에서 패총유적을 다룰 때 이곳이 계절성에 의해서) 이용되던 곳인지 일 년 내내 살 수 있는 정착생활)이 가능한 곳인지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다룬 연구는 아직 없지만, 계절적인 형성이었다고 추정하는 대표적인 경우는 서해도서지방이 있으며) 집터가 나오는 서포항이나 궁산 같은 경우는 영구 정착 살림으로 여겨진다. 최근에는 남해안 지방들의 패총에서도 정착생활을 의미하는 해석이 나오기도 하고 있고 이러한 상황들 사이에서 패총이 형성되었을 것이다.Ⅲ. 鐵器時代貝塚 形成 원인패총은 바다를 대상으로 이루어진 생업활동의 결과 형성된 것이므로 바다의 변화를 민감하게 반영하고, 바다의 변화는 제반 자연환경의 변화와 동시에 일어나므로 이 시기의 바닷가에서의 생업과 자연환경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신석기시대에 만들어진 충적지)를 이용하여 청동기 시대에는 농경이 행해졌으며, 이로 인해 청동기시대에 패총은 급격히 감소되어 농경 중심의 생활로 변화되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철기시대에는 다시 많은 패총이 형성되는데, 철제도구의 발달로 농업생산력이 증가됨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패총이 형성되었는데, 이는 무엇 때문인지 요인을 알아보고자 한다.1. 자연환경철기시대의 자연환경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자연과학적 방법과 문헌자료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는데 자연과학적 방법은 여러 가지 분석 방법을 이용하여 여러 지역의 자료를 종합하여야 하고, 문헌자료는 객관적인 자료가 아니기 때문에 간접적인 자료로 이용해야 한다.생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자연환경으로는 해수면과 기후를 들 수 있는데 우리나라 해수면 변동에경우 신석기 시대에 형성된 패총들보다 대부분 높은 지역에 위치하고 있어서 신석기 시대보다 해수면이 더 높아야 한다는 가설이 성립된 가운데 많은 주장들이 나왔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패총의 입지는 해수면을 통해서 논하는 적절한 방법이 아니며 패총은 사람들의 활동 결과 생긴 부산물이므로 얼마든지 입지지역이 변할 수 있는 가설)이 제시되고 있는데, 이러한 가설을 종합하여 생각해 볼 때 A.D 100년에서 250년 사이는 한랭기에 해당할 것으로 추측할 수 있고, 농경작물의 감소로 인한 해산물의 채집이 늘어났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2. 인위적 환경철기시대 집자리 중에서는 소실주거지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사회적인 현상과 관련이 깊다고 본다. 특히 당시에는 소실주거지와 환호가 증가하는 모습이 당시 사회상황을 보여주는 좋은 예로 보인다. 즉 소실 주거지의 주거지 폐기 원인은 단순한 소실로도 볼 수 있으나 당시 국가 형성기임을 고려해서 주민집단간의 갈등이나 전쟁이 있었던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특히 패총에서도 이러한 소실주거지가 보여지고 있으며, 철제 무기류와 골각촉이 다량으로 출토되고 있는데 이는 가장 집적적인 증거라 볼 수 있다.주민 집단간 갈등이나 전쟁은 주로 식량 자원의 약탈 혹은 식량자원의 획득과 관련하여 생계유지를 위해 가장 빈번하게 일어났을 것이라 생각되어지는데, 철기시대에 많은 패총이 형성되어진 까닭에는 이러한 요소가 작용했을 것이라 보여진다. 즉 농경에 유리한 지역에서 밀려난 집단은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은 집단에 비해 먹을거리가 풍부하지 못했을 것이고 비교적 채집이 쉬운 해산물을 식량으로 선택되어 패총이 늘어나게 되었을 것이다. 또 한 신석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내륙 지방에 패총이 형성된 것은, 이러한 싸움에서 밀려난 집단들이 방어성 취락을 형성하진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는데 이러한 견해에 대해서는 좀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3. 철기문화의 유입경로철기문화는 육로 뿐만 아니라 해로를 통해 중국 동북지방으로 교류가 많아지면서 해안지역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각 지역 간의 교류가 증가하였고, 또한 해산물의 채집활동이 많아졌을 것이다.Ⅳ. 鐵器時代 貝塚 形成 배경에 대한 여러 견해철기시대 패총의 형성과정에 대하여는 몇 가지 견해들이 제시되어 있다. 먼저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패총들이 낮은 구릉에 위치하는 김해기(즉 철기시대 후반 혹은 고분기)의 남해안 지방의 패총들은 평지보다는 고지에 위치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를 방어적인 측면의 방어성 취락으로 해석하고 있는 가설이 있다.)다른 견해에서는 철기시대 패총의 형성배격을 기후변화에 따른 현상으로 파악하고 있는데, 남해안 패총이 A.D 2~3세기에 속하는 패총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고 보면서 이 시기는 삼국사기나 기후 관련 자료로 보아 한랭기로 추정되기 때문에 이로 인해서 농업생산력이 감소하였고, 상대적으로 해양과 육상의 자연자원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으며, 해안가에 패총이 형성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실제로 패총은 한랭화 이전에도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고지에도 입지하고 있어 이러한 설명으로는 충분하지 못한 점이 많다.또 다른 견해로서는 남해안 지방 패총의 형성배경을 남한지역 복합족장사회에서 이루어졌던 경제정책의 일환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족장계층이 수산자원의 중요성을 파악하고 주민 일부를 해안가로 이주시켜 수산업에 종사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 또한 설명을 뒷받침하는 고고학 자료의 제시가 없고, 남해안에 분포하고 있는 패총의 입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해안에 상당히 거리를 두고 있는 산 정상부까지 무거운 해산물을 운반하였을 가능성은 어떤 경제 원리로도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반면에 지리학자들의 견해는 당시 해수면이 높아져서 패총이 자연스럽게 고지에 입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해수면이 높아지면서 농경지가 감소하게 되었고, 이에 사람들은 부족한 식량을 보충하기 위해서 패류를 대량으로 채취하게 되었고 그 결과 패총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형성은 근본적으로 철기문화의 시작과 관련된다고 보아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사천 늑도패총이나 해남 군곡리패총에서 알 수 있듯이 철기시대의 시작과 함께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들 패총의 형성은 해상활동과도 관련되고 해로의 발달로 인해 중요 지점들은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인구가 증가하였고, 기존의 농경과 더불어 해양자원의 획득이 필요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또한 이들은 해양에 대한 지식이 많아지면서 해산물의 채집뿐만 아니라 근해 어업까지도 가능하였다.한편, A.D 2-3세기경의 한랭화는 식량자원의 빈곤을 초래하였고, 그 대용으로 해산물을 이용함에 따라 패총의 증가를 초래하였을 것이다. 기후의 한랭화는 현재의 상상보다 더 피해가 컷을 것이라 생각되며 이로 인한 타결책으로 자연스럽게 해안가로 눈을 돌렸을 것이다. 또한 이로 인해 식량자원의 부족을 야기시켰으며, 내부적인 갈등으로 긴장상태를 가져왔다. 내부적인 갈등의 경우 국가 형성기에 빈번하게 일어난 전쟁이 가장 큰 원인이나 식량의 자급자족이 어렵게 됨에 따른 약탈도 많이 일어났고, 다수의 소실주거지의 원인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방어성 취락 역시 이 시기에 많은 전쟁과 약탈을 방지하기 위해 생겨났을것이라 생각되고 많은 패총이 내륙 고지에 위치하는 이유도 이러한 까닭에서 연유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따라서 철기시대 패총의 남해안 지역 패총의 형성은 복합적인 요인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외부적인 요인으로 해로를 통해 철제기술의 도래가 이루어지면서 철기문화가 시작되었고, 당시 해안지대로 주민들이 모이게 되면서 해안지역이 문화교류의 중심지가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패총에 형성에 있어서 가장 큰 원인이라 생각된다. 내부적으로는 기후의 한랭화로 인하여 많은 주민들이 해산물에 의존하게 되었으며 더불이 이 시기에 나타난 주민집단 간의 갈등에 의해 高地에서도 패총이 형성되었다.)Ⅵ. 맺음말이상으로 남해안 지방의 철기시대 패총의 형성과 배경과 원인에 대해 살펴보았다. 윗글에서 알 수 있듯이 가설을 제기해 보았으나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