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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윌리엄 모리스와 존 러스킨 평가A좋아요
    윌리엄 모리스 William Morris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1834-1896)는 처음에 시인으로 세상에 등장했으며, 사회주의자, 디자이너, 모리스 상회의 경영자, 사회문제와 예술에 대한 강연가로서 활동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미술공예운동(Arts and Crafts Movement)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미술공예운동이라는 용어는 1888년 미술공예전시협회(Art and Craft Exhibition Society)회원이었던 곱덴-샌더슨(Thomas Cobden-Sanderson 1840-1922)에 의해 사용되기 시작했다.모리스는 수공예품에서 산업 제품으로의 전환은 추한 제품만을 생산하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에 수공예를 부활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술공예운동은 그러한 모리스의 생각과 그의 영향으로 형성되었던 일련의 움직임이었다. 피터 스탠스키(Peter Stansky)는 이러한 영향을 모리스주의(Morrisism)라고 말한다. 그리고 모리스는 수공예 부활과 더불어 중세에 관심을 가졌다. 왜냐하면 그는 수공예가 활발했던 시대를 중세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중세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길드' 형태가 예술 제작의 모범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는 중세 로망스(Romance)를 즐겨 읽었고, 자신의 작품에 중세적인 모티프를 사용하기도 했으며, 모리스 상회 작업장은 중세 길드의 형태를 따랐다. 그런데 중세에 대한 관심은 비단 모리스만의 관심은 아니었다. 그것은 당시 건축에서 일어나고 있던 고딕 건축양식에 대한 관심과 맞물려 있다.이처럼 모리스의 예술 사상은 당시 영국의 상황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는 사회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졌으며, 특히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과 당시의 노동자들의 환경 개선에 적극적이었다. 따라서 그의 예술 사상 및 사회주의적 시각은 당시 시대적 상황과 관계를 맺고 있다. 어떤 이는 그의 예술 사상이 시대적 산물이라는 점을 다소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기도 하지시의 사회적 상황, 말하자면 자신들의 지위를 높이려는 예술가들의 의욕으로 인해 촉진되었다. 르네상스 시대는 미가 보다 높이 평가받기 시작하면서 미를 산출하는 화가, 조가가, 건축가들은 높은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그 당시 이들은 공예가들 보다 우월하다고 생각되었다.1747년 샤를르 바뙤(Charles Batteux 1713-1780)는 이러한 경향을 확고히 했다. 바뙤는 회화, 조각, 음악, 시, 무용만이 진정한 예술로 인정했으며 그 이외의 대상들은 기능술로 취급했다. 18세기 중엽 이래로 수공예는 더 이상 예술이 아니었다. 바뙤에 의해 확립된 예술 개념 속에 포함되는 것만이 진짜 예술이 되었으며, '독립적인 것'으로서 순수예술의 개념이 미학적 사고의 중심이 되었다. 그리고 오스본(H. Osborne)은 이러한 구분이 오늘날까지도 일반적인 통념으로 자리잡고 있다고 파악하고 있다. 그는 예술과 공예의 구별을 위해 다음 4개의 주된 전제가 제기되어 왔다고 보고 있다. "1)예술은 감정이나 정서를 표현하지만 공예는 그렇지 않다. 2)공예는 결과를 지시 받지만 예술은 그렇지 않다. 3)공예는 전형적으로 유용성과 기능을 구상한다. 그러나 예술은 유용성과 기능과는 분리되며, 그것은 불필요하다. 4)장인의 솜씨(Craftsmanship)에 의한 생산물은 일상적인 사회 생활의 범위 안에서 작용하는 반면, 예술은 새로운 통찰력을 가져다주거나 생활과 임무를 이해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해준다." 오스본은 이러한 구분을 언급하면서 이러한 견해가 그다지 동의를 얻지 못했다고 덧붙여 설명한다. 사실상 예술과 공예의 구분 즉 예술과 기능술의 구분에 대한 논의보다는 예술 개념 자체에 대한 회의적인 담론들이 제시되었다. 그것은 19세기 이후, 예술에 포함될 수 있는 새로운 영역들의 등장과 관계가 있었다."예술적인 가구와 여러 가지로 다양한 소위 작은 미술품들의 지위는 논쟁의 소지를 안고 있었다. 바뙤는 이것들을 자신의 체계 속에 포함시키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에만 적용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대예술 즉 순수예술도 유용성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모리스가 어떤 사물이 기능을 잘 발휘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면, 그 사물은 아름답다고 판단하는 기능주의적 이론을 옹호하려는 것도 아니며, 그것을 주장하려는 것도 아니다. 또한 그가 유용성을 예술의 유일한 평가 기준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서, 모리스가 말하는 예술의 유용성이라는 것은 단순히 기능적인 측면만을 언급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가 주장하고 있는 예술의 유용성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대예술과 소예술의 논의에서 예술의 유용성의 의미를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대예술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미와 소예술에서 중요한 유용한 측면이 서로 교류해야만 진정한 예술 작품으로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예술은 기능적으로 훌륭한 만큼이나 미적으로도 훌륭해야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는 "여러분이 유용하다고 생각하지 않거나 아름답다고 믿지 않는 것은 어떠한 것도 집에 두지 말 것"을 충고한다. 덧붙여서, 모리스는 실용성과 미적인 외관과 실내를 가진 건축이야말로 미와 유용성을 함께 함축하고 있는 예술 작품으로 찬양했다.그런데 모리스에게 있어 이 유용성이라는 것은 기능의 편리함과 미만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이 유용성에는 또 다른 의미가 함의되어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예술의 유용한 측면을 이야기한다. "예술품은 인간의 노동을 유쾌하게 하는데, 예술품 속에서 일하면서 보내는 수공예가들의 생활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사람들의 하루 일과의 변화 속에서 예술품을 봄으로써 인해 영향받는다. 우리의 힘든 일을 행복하게 만들며, 우리에게 충분한 휴식을 제공한다." 모리스는 예술의 유용성을 단지 사물의 기능적인 측면과 미적인 요소를 제공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휴식과 쾌를 제공하는 측면도 내포하고 있다. 또한 시대에 따라서는 자유에 대한 희망이 없고 억압받던 사람들 사이에서 화려하게 꾸며서 사용했던 장식미술은 특히 그들에게 기쁨을 주고 위안을 주었다고 보았스부터 19세기까지 변화해왔다. 존슨은『심미주의 Aestheticism』에서 예술가라는 관념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예술가'라는 관념은 19세기 사람들이 생각해낸 관념이었다. 19세기 이전에는 예술가라는 말이 이른바 '자유교과(The Liberal Arts)'에 정통한 사람, 즉 학식과 넓은 교양을 갖춘 사람을 의미했거나 아니면 '창조적'이거나 아니거나를 막론하고 어떤 특별한 기술을 갖춘 사람을 의미했었다. 이 낱말 속에는 시인, 화가, 의사, 석공 및 천문학자 같은 여러 가지 부류의 인물들이 포함 될 수 있었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창조적 예술가들은 별개의 계층을 이루는 사람들로 흔히 여겼고 '예술가'라는 말은 어떤 특별하고 흔히는 존칭적이기까지 한 의미를 띠게 되었다."그리스 시대에는 우리가 쓰는 의미(18세기 이후 미학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의미)에서의 예술 혹은 예술가라는 말이 없었다. 그리고 기계생산 시대 이전에 제조업은 노동 제조업과 같은 의미로서의 제조업이었다. 높은 임금이 장인에게 부과되었던 시대에서 예술가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제조업자로 여겨졌다. 통상적으로 그를 장인 혹은 제작자라고 불렀다. 그래서 플라톤은 조각가 피디아스(Phidias)를 그의 직업의 정상에 있는 제작자라고 말하고 따라서 신들 가운데 어떤 조각을 만들 때, 무엇이 옳고, 무엇이 적당한가를 결정하는 권위자로 말한다. 그러므로 고대에서 중세까지 창작적 예술가와 기술적으로 숙련된 자인 제작자를 구별하는 그러한 범주가 없었다. 예술가의 사회적 지위를 변화시킨 예술가라는 개념은 학자나 과학자라는 개념이 강화된 르네상스 동안에 자리를 굳혔다. 그리고 19세기에 와서 '천재'라는 관념으로 자리잡았다. 그래서 예술가는 특별한 사람으로 인정되었고 그들이 생산한 예술작품은 천재의 산물인 만큼 특별한 것이 되어버렸다. 모리스는 이와 같은 상황이 대중과 예술 사이의 간격을 형성하고 예술가들은 '예술을 위한 예술'만을 외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고 본다. 또한 이것은 행복의 증cunabula본을 가지고 있었다. 일찌기 모리스는 아름답고 숙련된 필치의 본문과 섬세한 가장자리, 유연한 형태와 차분하고 선명한 색채들을 사용한 두문자들로 장식했던 수많은 필사본을 제작했었다. 지상의 천국 The Earthly Paradise의 2절 판을 출판하던 1866년 실패로 돌아갔다.번-존슨의 1백 개 일러스트레이션 중 모리스가 35개의 수공 목판을 제작했고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졌다. 치스윅 인쇄소는 캐슬론체로 견본 페이지를 시험애 보았다. 그러나 목판과 활판 인쇄가 둘 다 인쇄에서 기술상의 결함늘 드러냈을 때 그 프로젝트는 취소되고 말았다. 모리스는 그의 첫번째 활자체를 골든Golden이라 이름 붙였다. 왜냐하면 처음 그의 계획은 윌림엄 캑스톤 William Caxton이 번역한 보래진 Voragine의 작품 황금전설 The Golden Legend을 출간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골든체는 1470년부터 1476년 사이에 니콜라스 장송 Nicolas Jenson이 디자인한 베베치안 로만 Venetian roman 체에 그 기초를 두고 있었다. 모리스는 장송의 글자체의 대형 사진을 놓고 연구해가며 그것을 거듭 그리고 또 그렸다. 최종 디자인의 수정 작업이 끝났을 때는 결코 천한 모방이 아닌, 장송 작품의 정수가 그대로 포착되어 있었다. 골든체의 활자 주조는 1890년 12월에 시작되었다.주조공들이 고용되었고, 모리스가 전원 주택으로 구입했던 해머스미스Hammer- smith의 켐즈코트 Kelmscott 장원 근처의 자그마한 임대주택에, 어느 인쇄업자의 창고에서 구해온 수동식 인쇄기가 설치되었다. 켐즈코튼 인쇄소의 Kelmscott Press의 첫 번째 작품은 윌리엄 모리스가 글을 쓰고 월터 크레인이 삽화를 맡았던 빛나는 평원의 이야기The Story of the Glittering Plain였다. 원래는 20권만 찍을 예정이었으나 소문이 퍼짐에 따라 모리스는 2백 권의 종이본과 6권의 고급 피지본을 찍게 되었다. 1891년부터 모리스의 사후 2서
    예체능| 2000.10.09| 25페이지| 1,000원| 조회(2,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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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빅토리아 시대의 예술 평가A좋아요
    빅토리아 여왕{여성의 권리가 여전히 새로운 것이었을 때, 그녀는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제국을 통할하는 19세기의 가장 강력한 국왕이었다. 독일인 어머니와 생후 8개월 되었을 때 돌아가신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영국 역사상의 어떤 국왕보다 오랫동안 --64년간-- 치세를 누렸다. 빅토리아 여왕(Queen Victoria, 1819-1901)은 영국이 정치, 문화, 산업에서 황금기에 달했던 시대에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 (빅토리아 시대 (The Victorian Age)빅토리아는 조지 3세의 네째 아들인 켄트공 에드워드와 독일의 삭스 꼬부르그 고타 공령의 프란쯔 공작의 딸이며 벨기에의 레오폴트 1세의 누이였던 빅토리아 마리아 루이자 공주 사이에서 난 딸이었다. 그녀는 18세까지 외부와의 접촉을 피하는 고적한 생활을 하였다.조지4세는 부도덕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다보니, 그에게는 유일한 상속녀인 샬럿만 남게 됐다. 이 상속녀는 벨기에의 레오폴드 왕과 결혼 후 출산을 하다가 잘못되어 불행히도 죽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가 세상을 떠나던 1830년에는 직계상속자가 전혀 없어 그의 동생인 클래런스 공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렇게 윌리엄 4세가 된 클래런스 공도 직계상속자를 얻지 못하고 결국 1837년 그녀의 아저씨 윌리엄 4세(1765 -1837)가 사망하자 갑작스럽게 대영제국의 여왕으로 등극하게 되었다. 보호 속에 자라난 그 십대소녀는 자신이 여왕의 자리에 오른다는 소식을 차분하게 받아들였다. 그녀가 가진 추밀원(the Privy Council)에서의 첫 모임에 대해 웰링턴공(the Duke of Wellington)은 이렇게 회고한다. "그녀는 빈 왕좌를 메웠을 뿐만 아니라 그 방 전체를 압도했다." 빅토리아 여왕은 그녀의 사촌 삭스 코부르그의 알버트 왕자(1819-1861)와 1840년 2월 10일에 결혼하였고 9명의 자녀를 두었다.결혼 후 여왕은 남편의 지혜와 조언의 혜택을 크게 입었으며, 왕가의 모범적인 가정 생활은 군주제의 권위를 크게 증대시켰다. 엘릭 덱화적, 기술적 중추가 되었다. 런던은 지구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풍요로운 도시였으며 그곳에서는 다른 어떤 곳에서보다 과학과 문학이 번성했다. 또한 빅토리아 여왕은 우리나라와 최초로 인연을 맺은 인물이다. 1883년 한˙영수호통상조약 후 조선은 여오아즉위 기념식에 사절을 파견하기도 했다. 빅토리아 시대는 영국의 황금기였다. 그리고 그 황금기는 빅토리아 여왕이 1901년 81세를 일기로 사망했을 때도 여전히 그 절정에 있었던 것이다.1901년 1월 22일 런던은 잿빛이었다. 국민들은 슬픔에 잠겼다. 창 녀들까지 검은 옷을 입고 '휴업'했다. 빅토리아 여왕이 사망한 것이 다.시인 로버트 브리지스는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초석이 떨어져 나 간 느낌"이라고 했다. 70세 이하의 영국인은 다른 군주 밑에서 산 것 을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에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영국 최장수 군주 빅토리아여왕 재위 64년은 영국의 영광 그 자체 였다. '빅토리아 시대'는 확장과 정복, 승리와 번영의 동의어였다.이 모든 영광의 원동력은 18세기 후반 세계에서 가장 먼저 시작된 산업혁명. 1858 년 인도를 직접 통치하기 시작한 것을 비롯, 빅토리아 사망당시 대영 제국은 전세계 모든 대륙에 걸쳐 있었으며 넓이로 따져 1,100만 평방 마일(지표면적의 약 20%), 인구로 따져 4억인(전세계 인구의 약 25%) 을 '지배'하고 있었다.'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란 말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었다. 이 시 대 영국은 세계의 '공장'이자 '은행'이었다. 1850년 전세계 공업생산 의 28%를 영국이 차지했고 강철의 70%, 면직물의 50%가 영국제품이었 다. 또 전세계 상선의 3분의 1이 영국 소유였으며 금융자본의 90%가 파운드화로 결제됐다.경제지표 뿐만 아니다. 유사 이래 신이 창조한 것으로 믿고 있던 인류사를 진화론적으로 설명한 '종의 기원'이 나온게 빅토리아시대였다.빅토리아 여왕 후손과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지 않은 유럽 국가 가 없을 정도였다.1819년 켄트공작의 외동딸로 태어난 빅토리아는 독피신처인 가정이 중간계급 여성에게는 감옥이 되어버렸다. 중간계급 여성에게는 가정 바깥에서의 활동이 금지되었고 남편만이 가족의 유일한 수입원으로서 가부장적 위치를 차지하게 됨으로써 남성에게는 공적으로 그리고 여성에게는 사적으로 분리된 영역이 확립되었다.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여성은 심각한 차별에 시달렸다. 기혼여성의 모든 재산은 남편 소유였으며, 1857년의 결혼법 제정 이전에는 여성은 이혼조차 할 수 없었다. 그후에도 여성이 이혼허가를 받으려면 남편의 간통 외에 이중결혼, 가혹행위, 유기 등의 죄목을 증명하여야 하였다. 이것은 남성이 상대편의 간통만을 증거로 제시하면 즉시 이혼을 허용받을 수 있었던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법과 제도상의 엄청난 성차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빅토리아 시대 가치관의 이중성을 발견할 수 있다.빅토리아 사회의 번영은 빈부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진보를 믿게 만들었다. 가장 눈에 띄는 진보는 물질적, 경제적 진보였지만, 단순히 거기에 그치지 않고 정치적, 도덕적 진보에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믿었다. 1850년 허버트 스펜서는 진보는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며 인간은 완벽해져야 한다 고 선언하였다. 1851년 수정궁(Chrystal Palace)에서 개최된 세계 대박람회는 산업혁명이 그 때까지 이루어 놓은 업적만이 아니라 미래사회가 가져다줄 경이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물론 빅토리아 시대의 물질주의에 대한 경고와 비판도 존재하였다. 토머스 칼라일(1795-1881)은 빅토리아 인들이 정신적인 것을 잃고 공리주의와 이기심의 철학에 붙잡혀서 정신적 본성을 제대로보지 못하고 있음을 경고하였고, 매튜 아놀드(1822-88)는 철도, 기업, 돈벌이에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을 빨아들이는 물질적 진보의 야만스런 영향력 을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소수의 의견에 불과하였다.19세기를 통해서 전통적 기독교의 엄격한 교리에 대한 신념이 약해졌는데, 여기에는 복음주의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복음주의 교리는 개인의 양심과 도덕성을 강조하고다 더 자유방임적으로 나아갔다. 사회전체가 자유방임의 이념에 불들게 되면서 보호주의와 제국주의는 군국주의를 조장할 뿐이며 국가간의 갈등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유무역을 통해서 상업상의 교류를 확대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수용되었다. 이제 자유주의의 원칙이 안팍을 지배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원칙이 확립되었을 때에는 영국은 이미 전성기의 고개를 넘어가고 있었다.빅토리아 양식빅토리아 시대의 부르주아들은 건축과 실내공간의 장식을 자신들의 부와 지위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따라서 실내공간은 방안에 가구를 가득 채우거나 공간과 가구의 스케일을 크게 하여 그들의 권위를, 공간을 통하여 과시적으로 표현하였다. 빅토리아 시대의 디자이너들은 건축, 실내공간, 섬유제품, 벽지, 가구, 생활용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제품의 표면에 과거의 기존양식에서 따온 모티브를 인용하거나 전혀 다른 성질을 지닌 요소들을 절충시키는 방식으로 디자인하였다.그 결과, 제품의 구조적이고 기능적인 측면보다는 표면효과에 치중한 장식과다의 양상으로 나타났다. 이런 양식의 특징은 새로운 산업기술의 발달로 건축과 실내공간의 장식에 관한 문제, 인간과 기계와의 대림, 공간에 선택된 재료와 구조의 역할, 양식의 계승과 새로운 공간조형, 인간 사회와 실내환경 사이에 내재된 윤리성 등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빅토리아 시대의 실내공간에서는 나무를 대리석 질감으로 표현하거나 철에 나무무늬를 묘사하는 등 선택한 마감재료를 다른 특성을 지닌 재료처럼 보이게 하였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철, 시멘트, 판유리, 직물, 벽지 등과 같은 새로운 재료들이 대량 생산됨으로써 재료는 특성이 있는 그대로 표현되기 시작하였다.이에 따라 1851년 팍스톤 수정궁 건축은 주철구조와 유리로 지지되는 투명한 벽으로 공간을 형성함으로써 폐쇄된 공간에 꿈처럼 개방된 공간을 창조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빅토리아 시대의 주택 내부를 묘사한 글을 인용해 보면,『...그러나 달라진 것은 개개 가구리 질이 아니라 그 양이었다. 처음으로 전체보다 이 참가하고 있다. 이미 박람회 이전부터 기계공업제품의 미적 수준이 저하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박람회에 있어서도 각국의 제품을 비교하기를 주장한 H.콜은 잡지 『저널 오브 디자인』(1849∼1852)을 창간 편집하여 이를 통해 산업계와 일반대중에 대해서 공업의 추종 기준을 호소하고 있었다. 즉, 그는 예술과 공업의 분리된 상태를 해소하기 위해 공업에 예술을 주입하여, 그 협력에 의해 향상 시킨다. 바꿔말하면 예술가와 제조업자들의 협력이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했다.이렇게 해서 H.콜의 혁명운동은 미술공예운동에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염직과 모드18세기 말 부터 19세기 전반의 염직을 살펴보면, 1798년, 프랑스에서 쟈카루에 의해 쟈카드직기가, 또 영국에서 토마스·벨에 의해 1783년, 회전식요판 나염기가 발명 되었다. 또 프랑스에서 사페이스 나염기(최전식 철판 나염기)가 발명되어 실용화되고, 나아가 1804년에는 쟈카드기가 실용화 되어 대량생산이 가능하게 되었다. 또 프랑스인 페로에 의해 1834년 페로친 나염기가 발견 개발이 영국, 프랑스, 독일에서 이루어진 결과, 염직은 비약적으로 발달했다.이렇게 해서 영국에서는 19세기에 들면 그때까지 견직물 공업의 중심지 스피탈필드가 쇠퇴하고, 그 대신에 맨체스터 등이 견직물 산지로서 번영하게 되었다. 또 스코틀랜드의 페즈리 지역에서 페즈리·실크가 만들어지게 되고, 1780년대부터 유행한 캐시미어·숄을 모방해서 숄 생산이 시작되게 되었다. 그리고 1840년경이 되면 페즈리 지역에서 쟈카드기가 대규모로 사용되어 페즈리 숄의 대량생산이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또한 랑카샤 지방을 중심으로 한 나염공업의 생산향이 확대되어 시장을 리드하고 있던 빅토리아조 시대에는 빅토리안 색조가 유행하게 되었다.C.P.오베르캠프(C.P.Oberkamp)의 공장이 회전식 나염기를 도입 염색법의 개량 등에 의해 생산량의 증대를 이루고, 1805년에는 1,300人 이상의 종업원을 두었다고 한다. 19세기 초두 나폴레옹 1세의 방문때 C.P.오베르캠프는 프켰다.
    예체능| 2000.10.02| 17페이지| 1,000원| 조회(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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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업혁명이 디자인에 끼친 영향 평가B괜찮아요
    ⊙ 산업 혁명의 빛과 그늘18세기 말 프랑스 혁명에서 정점을 이룬 시민 혁명은 전제적인 절대 왕정을 무너뜨리고 봉건적 잔재를 제거함으로써 근대 시민 사회와 국민 국가성립의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거의 같은 시기에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 혁명은 자본주의의 발전을 완성시켰다. 그리하여 19세기에는 국민 국가를 단위로 자본주의적 시민 사회가 성립되었다. 그리고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노동 문제를 비롯한 새로운 사회 문제가 제기되고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사회주의도 대두하였다.다음은 산업 혁명의 불길이 세차게 일어나던 19세기 초반의 런던, 지금 우리나라와 같이 대학 입시에 시달리는 일 같은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영국의 청소년들의 말이다.제레미아 혜인즈(12살) : "4곱하기 4는 8이고, 4를 4개 더하면 16입 니다.""왕이란 모든 화폐와 황금 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우리 나라에도 왕이 있는데, 그는 여왕 이고 그녀의 이름은알렉산드라 왕녀라고 합니다. 왕녀는 남자입니다."리암 터너(12살) : "나는 잉글랜드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나라가 있다고는생각합니다만 이전에는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습니다."에드워드 테일러(15살): "런던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헨리 매튜만(17살) : "자주 교회에 다녔습니다. 설교에 나오는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인데그 밖의 다른 이름은 하나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대해서도 하나도 모릅니다. 그는 살해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죽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는 어딘가가다릅니다. 이는 그가 신심이 깊은 데가 있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또다른 소녀 : "악마는 착한 사람입니다. 그가 어디 살고 있는지는 모릅니다. 그리스도는나쁜 놈이었습니다."이 소녀(10살)는 god을 dog이라고 쓰고 여왕의 이름도 몰랐습니다 -「아동 노동 조사 위원회 보고서 제5차 보고서」 중에서).이 아이들은 개그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별난 구석이 있는 아이들은 더욱아니다. 산업 혁명 당시 대부분었지 공업국은 아니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들을 근거로일부 학자들은 산업 혁명이라는 용어 대신 '산업화'라고 부르기를 주장하며 산업 '혁명'이란 것이 과연 존재했는가 하는 의문을 나타내기도 한다.그런데도 구태여 18세기 후반에서 19 세기 전반에 이르는 이 시대를 가리켜 산업 '혁명'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사실 이 용어가 최초로 등장한 것은 1840년대 사회 사상가들의 입을 통해서였다. 당대의 사상가들은 점진적인 기술 변화의 배후에서 전개되는 중대한 사회적 변화, 더욱이 되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읽어 냈고 이를 혁명이라는 용어로 적절히 묘사했던 것이다.무엇보다 중세 봉건제하의 양대 세력이었던 봉건 영주와 농노를 대신하여 자본가와 산업 노동자가 사회의 중추 세력으로 등장했다. 또 경제 생활의 중심이 농업에서 공업으로 이동하고 도시가 서서히 이루어졌다. 한편 산업 혁명의 선두주자 영국은 막강한 공업력을 무기로하여 세계 시장을석권하여 경제 활동의 무대를 과거와는 달리 세계적인 범위로 확대시켰다. 그리하여 한 민족이 자본주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없는가 문명이냐 아니면 야만이냐를 결정하게 되는 사상 유례가 없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산업 혁명이 혁명일 수 있는 까닭은 이러한 근본적 변화의 중심축에 바로 그것이 놓여있기 매문이다..왜 영국에서 산업 혁명이 시작되었을까 ?[해상권 장악과 무역 독점]18세기 후반 영국에서는 산업 혁명과 자본주의의 본격적 발전을 위한 유리한 전제 조건이 마련되어 있었다. 우선 영국은 1588년 스페인 무적 함대를 격파함으로써 16세기 내내 진행된 네덜란드, 스페인과의 해상권 쟁탈전에 최후의 승자가 되었고 17세기에는모직물을 비롯한 상품무역과 노예시장을 독점하고 유럽과 아메리카 식민지, 인도를 연결하는 황금의 삼각 무역을 통해 막대한 상업적 부를 축적하게 된다. 아직 자본주의가확립된 상태는 아니었지만 무역 독점으로 생긴 이득은 자본주의 발전과 산업 혁명에 필요한 화폐적 부를 축적하는 과정이었다는 점 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된 것만은 아니어서 도처에서 인클로저에 저항하는 농민의 봉기가 잇따랐다. 애초 대토지 소유자들에 의해 개별적으로 진행되던 인클로저 운동은 농민들의 저항에 부딪치자 정부와 의회의 후원하에 더욱 강력하게 추진되었고농민들의 저항은 결국 분쇄되고 말았다.화폐 자본의 축적한편 자본주의의 발전을 위해서는 풍부한 노동 공급과 함께 다량의 화폐가 사전에 축적되어야 한다. 자본축적을 위한 화폐적 부의 원천은 다양한 것이었다. 우선 영국 상인들은 상품 무역의 독점과 반문명적인 혹인 노예 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윤을 수중에 넣고 있었다. 이와 함께 영국은 식민지 약탈과 해상 약탈(도둑질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고리 대금업 등으로 대량의 화폐를 끌어 모았다. 또 하나의 중요한 자본 축적 원천은 봉건 경제의 붕괴 과정에서 등장한 다양한 자영 농 밀 자영 수공업자층 중에서 성공한 부류들이 보유한 소규모 자본이었는데 이들 중 사업 감각을 가진 이들은 산업 혁명이 시작되자 재빨리 다양한 공업 분야에 뛰어들어 공업의 주역으로 변신한다.이상의 과정을 통해 18세기 후반 영국은 산업 혁명의 전제 조건인 풍부한 노동 공급과 다량의 화폐 자본이라는 면에서 어느 나라보다도 유리한 위치를 차지한 것이다..산업 혁명은 왜 면공업에서 불이 붙었을까?산업 혁명 이전에 영국의 가장 중요한 수출품이었던 모직물은 매뉴팩처 방식으로 생산된 사치품으로서 주된 수요자가 해외에 있었다. 반면 면직물은 일상적인 의생활에 이용되는 대량소비형 생필품이었으며 주로 내수 시장을 겨냥한 생산이 가능했다. 그렇지만 면직물의 이러한 특징이 곧바로 자본주의적 공업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봉건 경제하에서도 면직물은 이미 생산되고 있었고 이는 영국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 나아가 세계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유독 영국에서 면직물 공업이 산업 혁명의 시발점을 이루게 되었던 것은 왜일까? 봉건 경제하에서 면직물은 주로 농업과 수공업이 분리되지 않은 장원 경제 단위로 자급 자족되고 있었다.따라서 면직물이 대량"확실히 공장제 기계 공업으로 대표되는 거대한 생산력은 인류에게 빈곤과 야만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을 가져다 주었다.인간 생활이 더 편리하고, 더 안전하며 풍요롭게 될 가능성이 활짝 열린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가능성이었을 뿐이었다. 현실은 어떠했는가?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상태여성과 아동 또한 훨씬 적은 시간과 노력으로 조작법을 배울 수 있는 기계의 보급이 가속화됨에 따라 전통적인 수공업 기술을 사용하던 남성 숙련 노동자들은 설 자리를 잃게 되었고 산업 자본가들은 인건비를 크게 절약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보다 다루기 쉬운 노동력을 대량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함께 최저 12시간에서 16시간 심지어 20 시간에 이르는 살인적인 장시간 노동이 부인과 아동들을 포함한 노동자전체를 괴롭혔고 극도의 저임금으로 노동자 가정은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없었다, 첫머리에서 본 문명화된 대영제국 소년들의 어처구니없는 교육 상태가 이제는납득이 될 것이다.노사 대립의 격화산업 혁명 초기에 노동자들은 아무런 제도적 보호 장치를 가지고 있지 않고 노동조합 또한 존재하치 않았기에 자본가들의 무제한적인 이윤 동기에 의해 큰 희생을 치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자각이 싹터감에 따라 노동자와 자본가의 극한 대립이온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식민지 수탈의 강화산업 혁명이 초래한 또 다른 중요한 영향은 식민지의 고통이다. 이전에는 군사력을 앞세운 단순한 약탈과 무차별한 원주민 학살이 식민지 지배의 내용이었던 반면, 산업 혁명을 거치면서 식민지의 경제적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었다. 본국의 공업 생산물의 수출 시장이자 원료의 공급 기지로서 식민지는 더욱 체계적인 수탈의 대상이 되었고 식민지를 획득하기 위한 경쟁이 서유럽 국가들 사이에 본격화됨으로써 지금까지도 이 어지고 있는 식민지 민족들의 고통스런 역사가 시작되었다. 영국의 면직물 수출을 촉진하기 위해 인도의 가내 수공업적인 직포업은 궤멸 당했고 영국 면공업에 값싼 원료를 공급하기 위해 북아메리카의 흑으로 굳어진 자본가와 노동자 관계라는 새로운 인간 관계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과도한 인간 혹사를 저지하는 사회 입법을 만드는 노출으로 이어진다. 그리하여 1833년 일반 공창법이 제정되고 1847년에 와서는 10시간 노동, 여성과 아동의 노동 시간 제한 및 야간 근로 금지를 법제화하게 되었으며, 나아가 노동자의 정치 참여를 위한 차티스트 운동과 경제적 조건 개선을 위한 노동 조합 운동 등이 생겨났다.⊙ 디자인의 모태18세기부터 19세기에 걸쳐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은 말 그대로 인간생활의 전 영역에 커 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산업혁명의 배경에는 서양의 과거에 깊숙이 뿌리를 둔 문예 부흥시대의 자본주의 16세기와 그 이후의 식민주의 그리고 중상주의 등이 자리를 잡고 있 다. 이와 함께 근대화에 기여한 정치적 종교적 과학적 지적 노력도 또한 커다란 역할을 하 였다. 국가 제도의 경쟁적 발생이나 신교도들의 근면에 대한 강조 17세기의 과학자와 18세 기의 계몽사상가들에 의한 전통의 부정이 전면적인 경제번혁을 가능케 한 계기가 되었지만 산업혁명의 직접적인 원인은 무엇보다 경제적인 것으로써 다음 네 가지를 들 수 있다.첫째, 동력으로 가동하는 기계의 생산과정에 대한 응용의 증대둘째, 석탄 강철 등의 보다 능률적인 생산셋째, 운송 및 통신수단의 빠른 건설마지막으로 은행과 신용기관의 확장을 들 수 있다.이 중에서도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기계공업의 발전으로 그 핵심이 된 산업은 면방업이었다. 생산방법의 혁신 대량생산과 일관 작업에 의한 분업에 따라 산업의 생산성은 비약적으로 증대되고 부유한 자본가계층도 많아졌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도 심각해졌다.18세기에 시작된 산업혁명은 기계에 의한 대량생산과 그에 따른 분업화에 따라 현대디자인이 가지고 있는 모든 가능성과 문제점을 한꺼번에 드러내 보였다. 대량생산은 지금까지 수공예에 종사하던 장인들을 공장의 노동자로 전락시키고 새로운 생산 시스템에 적합한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만들어 내었다 중세에는 주로 보이다.
    예체능| 2000.09.23| 10페이지| 1,000원| 조회(4,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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