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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사열전
    R E P O R T 제목 : 고려사 열전과목: 교양 세미나 담당교수: 김종식 교수님소속: 공학부 4반학번: 4404953이름: 김준철-목 차-1. 고려사 열전2. 고려사 열전의 기본구성3. 고려사 열전의 구성과 그 내용4. 내가 본 고려사 열전.......1.고려사의 편찬고려사는 기전체로 쓰여진 137권의 고려 475년간의 정사이다. 1~46권에서는 태조 이하 32왕(우, 창왕 제외)의 역사를 연대기적으로 서술하였고, 47~87권에서는 천문지 등 12분야와 연표를 연대기적으로 서술하였고, 88~137권에서는 후비·종실·공주, 문·무제신, 반역자 등 고려 일대의 인물 949명의 전기를 연대기적으로 기술하였다. 고려왕조의 역사정리는 조선의 개국과 함께 전왕조의 역사를 정리하고, 고려를 멸망시키고 개창한 조선왕조를 합리화하기 위한 의도에서 시작되었다. 처음으로 편찬된 고려역사는 정도전,정총등이 왕명을 받고 편찬을 시작하여 1396년(태조 4)에 완료된 편년체의 고려국사가 37권이었다.이 고려국사가 1414년(태종 14)까지 열람되다가 정도전 등의 정실이 개입되었음이 지적되면서 공민왕대 이후 부분을 개수하기로 하고 하륜,남재,이숙번,변계량등이 왕명을 받고 작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 작업은 1416년(태종 16) 하륜의 사망으로 일단 중단되었다. 그 후 1419년(세종 1)에 세종이 정도전 등이 필삭하여 본초와 같지 않은 곳이 많음을 지적함에 따라 유관,변계량 등이 왕명을 받아 고려국사 중 사초와 같지 않은 것을 수정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다시 정도전이 참월하다 하여 ‘종,절일,조,사,태후,태자 등을 왕,생일,유,태비,세자'로 격하하여 서술한 것이 논란되었다. 이어 세종의 직서 방침에 따라 5년 12월에 유관·윤회가 고려국사의 개정에 착수하여 세종 6년에 수교 고려사로 완성되었다.그러다가 세종 20년에 다시 승지 허후의 발의로 기전체에 의한 고려사 수찬이 제기되고 이를 세종이 가납하면서 최초의 기전체 고려사가 편찬되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개·권제·남수문 등이 왕소생, 주요 행적을 2권(88~89) 36쪽에 걸쳐 서술하였다. 종실·공주열전에서는 왕자·종친 86명과 공주 23명을 시대순으로 어머니·출생년·책봉·주요행적·몰년·시호와 어머니·출생년·봉작·남편 등을 2권(90~91) 31쪽(각 26쪽, 5쪽)에 걸쳐 서술하였다.문·무제신 열전에는 행적이 뚜렷한 문무반 507명(대개 1~2품관)을 시대순으로 자, 출신지, 가계, 입사로, 관력, 주요 행적, 졸년, 증직, 시호, 인물평, 자손 등의 내용을 29권 575쪽에 걸쳐 서술하였다. 양리·충의·효우·열녀열전에서는 행적이 뚜렷한 양리, 충의, 효자, 열녀 41명을 시대순으로 출신지·가계·관력·행적 등이나(양리.충의) 가계·행적 등을(효우·열녀) 1권 14쪽으로 서술하였다.방기·환자·혹리열전에서는 21명을 시대순으로 가계, 관력, 행적 등을 1권 15쪽으로 서술하였다. 폐행열전에서는 60명을 시대순으로 출신지·가계·출사로·관력·행적·졸년·시호 등을 2권 37쪽으로 서술하였다. 간신열전에서는 26명을 시대순으로 출신지·가계·출사로·관력·행적·졸년·시호 등을 2권 48쪽으로 서술하였다.반역열전에서는 50명을 시대순으로 출신지·가계·출사로·관력·행적·졸년·시호 등을 6권 109쪽으로 서술하였다. 신우·신창열전에서는 우왕과 창왕의 전기를 5권 105쪽으로 서술하였다.이를 볼 때 『고려사』 열전은 세가에 포함되어야 할 신우열전을 제외할 때 문·무제신열전과 반역열전이 각각 인원수로는 54%(507/947명)와5%(50/947), 분량으로는 63%(575/860쪽)와 13% (109/860)를 점하여 중심이 되었다고 하겠다.3.고려사열전의 구성과 내용1) 구 성앞에서 서술하였음과 같이 고려사 열전에 수록된 인물은 949명의 다수이고, 그 내용상 문·무제신과 반역자가 중심이 되었다. 또 고려기의 시대구분을 보면 크게 무신집권을 기점으로 그 이전과 이후의 2시기로 구분되고, 전자와 후자는 다시 고려귀족사회가 정착되는 태조~정종대의 초기, 귀족사회가 융성한 문종~의종대의 중기, 무신이 집권한입하자 중군사로서 북계에 파견되어 고려군을 지휘하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전세가 불리하다 하여 거란의 요구에 따라 항복하거나 서경 이북의 땅을 베어주고 강화를 맺고자 하였지만, 서희는 이에 극력으로 반대하고 적장 소손녕과 담판하여 거란군을 퇴각시켰다.이것이 바로 서희가 담판으로 얻어낸 강동 6주이다. 994년(성종 13) 청천강 이북에 살던 여진족을 축출하고 서해안 요지 6곳에 성을 쌓아 이후 거란의 거듭되는 침입에서 고려가 승리하는 토대를 구축하였다. 강조(?~1010)는 1009년(목종 12) 서북면도순검사로 재직하던 중 쿠데타를 일으켜 국정을 전횡하면서 국가를 어지럽히던 천추태후와 김치양을 제거하고 집권하며, 이어 목종을 폐위하고 현종을 옹립하여 혁신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1010년(현종 1) 그의 정변을 기화로 거란군이 내침하자 행영도통사가 되어 동주에 나가 맞아 싸우다가 포로가 되었으며, 거란황제의 회유를 끝까지 거절하고 살해되었다. 진짜 이름없는 충신이다. 강감찬(948~1031)은 문과를 거쳐 출사하였고, 1010년(현종 1) 거란 침입 때에는 예부시랑으로서 항복하자는 여론에 반대하고 하공진으로 하여금 거란을 설득하여 퇴각하게 했다. 귀주대첩으로도 유명하다.1019년(현종 9) 서북면행영도통사 상원수로서 군사를 지휘하여 전년에 침입한 거란군을 흥화진과 구주에서 대파하여 이후에 전개되는 평화와 안정의 토대를 놓았다. 이후 문하시중에까지 승진하면서 정치를 주도하였다.제2장 중기의 자주가와 사대가에서는 여진(금)의 대두, 귀족사회의 융성에 따른 문약과 함께 초기 이래의 자주정책을 계승하려는 인물과 현실에 안주하면서 금에 사대하려는 인물을 서술하였다. 윤관(?~1111)은 문과에 급제하고 출사하였다. 1095년(숙종 즉위)과 1098년에는 요와 송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수호를 닦았다. 1104년(숙종 9)에 왕의 뜻에 따라 동북면 행영병마도통사로 파견되어 여진을 정벌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 직후 그 실패가 여진의 기마군 때문임을 역설하여 "별무반"을 창하는 전횡을 자행하였다. 그러나 민란을 진압하고, 기강을 확립하고, 풍속을 순화하며, 문운을 진흥하였다. 또 강력한 권력기반을 구축하여 항몽을 가능하게 하였다. 조위총(?~1176)은 병부상서 서경유수로 재직하고 있다가 1174년(명종 4),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후 전횡을 일삼던 정중부·이의방 등을 제거하고 의종을 복위시키기 위한 반무신란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서북면 40여 성의 호응을 받고 개경 교외에까지 진출하였으나, 이의방군의 역습을 받아 진압되고 참형을 당하였다. 문극겸(1122~1189)은 음서로 출사하고 다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1170년(의종 24) 전중내급사 재직중에 정중부 등의 쿠데타군에 포로가 되었으나 좌정언 때에 직언하였던 일로 화를 면하고 이후 무신정권에 협조하고 상장군, 추밀원부사, 중서시랑평장사 판호부사, 권판이병부사 등을 역임하면서 문신을 많이 구하였다. 이규보(1168~1241)는 문과를 거쳐 출사하였다. 사관 초에는 불우하였으나 1207년(신종 3) 집정 최충헌의 인정을 받아 현달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최충헌·최이의 총애를 받으면서 파격적인 승진을 거듭하여 1233년(고종 20) 지문하성사 판예부사가 되고, 문하시랑평장사 수문전대학사 판예부사로서 치사하기까지 문한을 주관하고 문운의 진흥에 공헌하였다.제4장 몽고지배기의 항몽가와 친몽가에서는 몽고에 저항한 인물과 몽고에 투항하거나 아부하면서 사리사욕을 추구하고 권력을 농간한 인물을 서술하였다. 김윤후(신종~원종대)는 승려로서 백현원(白峴院)에 있다가 1232년(고종 19) 몽고가 침입하여 처인성(용인)을 공격할 때 적장 살리타이를 쏘아 죽여 몽고군을 본국으로 퇴각하게 하였다. 뒤에 다시 충주산성방호별감으로서 동성을 포위공격하는 몽고군을 격퇴하고 감문위상장군에 승진하였으며, 이후 추밀원부사를 역임하고 수사공상서우복야로 치사했다.김준(?~1268)은 최충헌의 가노이나 절륜한 무예로 최이에게 발탁되면서 사관하고, 이후 최이·최항의 측근에서 위세를 부렸다. 최의가 집권한 후 권력에서 소 14)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가 집권한 뒤에 지문하부사 겸대사헌, 우군총제사, 정당문학 등으로서 이성계파의 중심이 되어 창왕의 폐위와 공양왕 옹립, 전제개혁, 이성계 추대 등사를 추진하였다. 관학파의 중심이 된다. 최영(1316~1388)은 음서로 출사하였다. 역시 혁명가이다.1352년(공민왕 1) 안우의 휘하에서 조일신의 난을 토벌하였고, 1358년 양광전라도 왜적체복사가 되어 왜구를 토벌하였다. 이후 우왕 때까지 6도도순찰사, 6도도통사, 해도도통사 등의 각급 관직을 띠면서 수십 차에 걸쳐 최유의 침입, 김용의 난, 홍건적의 침입, 제주목호의 난, 왜구의 침입을 격퇴하여 왕권을 안정시키고 국가를 보전하였다. 1388년(우왕 14)에는 이성계와 함께 권신 임견미·염흥방을 제거하고 집권하였다. 그러나 8도도통사가 되어 요동정벌을 도모하다가 이성계 등의 위화도회군으로 유배된 후 살해되었다. 절의가인 이색(1328~1396)은 문과에 급제하고 출사하였고, 다시 원의 과거에 급제하였다. 1356년(공민왕 5) 원에서 귀국하여 공민왕의 전폭적인 신임하에 이부시랑 한림직학사 겸사관편수관지제고 겸병부낭중에 발탁되어 문·무관의 인사행정과 문한을 주관하면서 공민왕의 개혁정치를 뒷받침하였다. 이후 우왕말까지 대사성, 대제학, 판삼사사 등의 각급 관직을 역임하면서 문한을 주도하고 성리학의 육성에 기여하였다. 1389년(창왕 1) 위화도회군 직후 이성계일파가 우왕을 폐위하자 조민수와 함께 이성계일파의 의견을 물리치고 창왕을 옹립하였고, 이후 창왕을 보호하고 고려왕실을 지속시키려고 노력하였지만 이성계일파가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옹립함에 따라 실각되면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정몽주(1337~1392)는 문과에 급제하고 출사하였다. 이색의 지휘하에 성리학의 육성에 참여하였다. 1376년(우왕 2) 성균관대사성으로서 이인임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에 반대하고 유배되기도 하나, 곧 복직되어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384년(우왕 10) 명에 파견되어 공민왕 사후 단절되었던 명과의
    인문/어학| 2001.06.14| 11페이지| 1,000원| 조회(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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