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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리스와 로마의 제국주의
    ⊙그리스 제국주의⊙페르시아 전쟁이 그리스인의 승리로 끝나기까지 그리스인들을 지도한 국가는 스파르타와 아테네였다. 특히 테미스토클레스의 제의에 따라 전쟁 직전에 해군력을 증강했던 아테네인이 그리그인의 승리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고 그로써 아테네인들의 발언권과 영향력이 급부상하였다. 아테네인의 군사력이 해군력 위주였으니 만큼, 에게 해 연안과 도시국가들은 아테네인의 직접적인 영향하에 놓이게 되었다. 기원전 478∼477년에 창설된 델로스(Delos) 동맹은 아테네인의 그러한 지위를 더욱 공고하게 해주었다. 본디 델로스 동맹은 차후에 또 있을지 모를 페르시아인의 재침에 대비하여 아테네인과 에게 해 주변 국가들이 동등한 자격으로 맺은 동맹이었다. 각 동맹국은 전선과 선원을 직접 제공하든지 아니면 함대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동맹기금을 분담해야 했다. 동맹금고는 델로스 섬에 보관했고 동맹회의도 델로스에서 열었다. 그러나 아테네인, 키오스인, 레스보스인, 사모스인을 제외한 모든 국가들이 동맹기금을 내기로 했고, 특히 아테네인은 그리스 최대의 함대를 거느린 해군국가였기 때문에 동맹함대의 주축은 아테네인일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델로스 동맹을 이른바 아테네 제국으로 변질시킨 밑바탕이 되었다.페르시아인과의 평화가 장기화되면서 델로스 동맹의 명분에 회의를 갖는 국가들이 나타났다. 더욱이 기원전 449년에 페르시아인과 맺은 칼리아스 평화는 이제 델로스 동맹의 존립 근거를 부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동맹국들의 동맹 이탈 움직임이 생겨났다. 아테네인은 이들 탈퇴 국가들을 무력으로 응징했다. 기원전 454년에는 동맹금고를 델로스 섬에서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로 이전하여 동맹금고에 대한 통제를 아테네인이 장악했다. 뿐만 아니라 아테네인은 동맹국들에게 관리를 파견하여 동맹국의 정체 및 정치적 현안에 대해 간섭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약 700명의 아테네인 관리가 해외로 파견되었다고 전한다. 동맹과 관계된 소송은 아테네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으며, 동맹 내의 모든 상거래는 아테네를 경유해야 했다. 의 양성과 유지가 동맹의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그 해군력을 운영하는 자금은 동맹금고로부터 충당되었는데, 사실 해군력의 주축이 아테네인이었으므로 동맹금고의 자금은 주로 아테네인을 위해 사용되다시피 했다. 그런데 아테네인 중에서 함대에 노를 젓는 병사로 충원되는 범주는 대새 최하층 시민인 테테스였다. 종전에는 테테스층이 생계를 유지하느라 정체에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었지만, 이제 해군복무를 통해 충분한 급료를 받고 또한 국가 방위에 직접 공헌한다는 긍지도 갖게 되었다. 이들이 민회에서 지신들의 입장을 주장할 수 있는 경제적 여유와 시간의 여가가 생긴 것이었다. 그 결과 테테스층까지 포함된 보다 더 완성된 민주제가 등장하게 되었다.아테네 민주정의 대명서로 일컬어지는 페리클레스가 등장한 시기는 바로 아테네 제국의 황금기였다. 페리클레스는 에피알테스의 뒤를 이어 아테네 민주정의 대표적인 정치지도자가 되었고 그는 기원전 429년에 그가 죽을 때까지 아테네인을 대표하는 정치가로 활약했다. 그런데 그가 아테네인의 이익과 영광을 고양시키는 데 사용된 자금은 사실 델로스 동맹의 동맹기금에서 나온 것이었다. 페리클레스와 아테네인이 기원전 5세기에 누린 자유와 영광은 동맹국들의 희생 위에서 가능했던 것이다.펠로폰네소스 전쟁 후 아테네인이 본격적인 해상국가로서의 지위를 다시 찾은 것은 제 2차 해상동맹의 결성(B.C. 378/7) 이후였다. 동맹의 목적은 스파르타의 지배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테네인은 델로스 동맹의 전례가 있는 만큼 동맹국의 지위에 대해 신중하게 배려했다. 아테네인들은 아테네 이외의 어떠한 해외 영토도 소유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했다. 또한 모든 동맹국들의 자유와 자치가 허용되고 동맹국은 각기 자신이 원하는 정체를 보존하며, 동맹국에 외국인 수비대와 행정관이 주둔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동맹의 기본원리로 공표했다. 그러나 아테네인의 민회가 동맹회의보다 우위에 있음을 밝혀 아테네인의 특권을 여전히 보장한 면도 있었다. 동맹에 참여한 동맹국은 약 70여개 국가에 이르토지를 강점했다. 또한 동맹국의 국내 분쟁에 개입하기도 했고 동맹회의의 권한도 억제했다. 동맹의 존속과 운영에 대한 동맹국들의 불만은 결국 동맹국 전쟁(B.C. 357∼355)으로 발화되었다. 아테네인에게 대항한 동맹국 편에는 비교적 강대국들인 키오스, 로데스, 코스, 비잔티온인 가담했고 페르시아인도 개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쟁에서 줄곧 고전을 면치 못하던 아테네인은 결국 기원전 355년의 평화에서 교전 국가들의 동맹 탈퇴와 독립을 허용하고 말았다.동맹국 전쟁의 실패는 아테네인들의 제국정책을 위축시켰다. 제국의 유지는 이제 아테네인들에게 과중한 부담이었다. 아테네인이 제국 운영을 포기하게 되었다는 것은 특히 제국 운영을 통해 경제적 혜택을 받던 테테스층에게 타격을 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테테스층의 정치적 참여를 어렵게 했다. 그래서 기원전 5세기에는 배심원들이 주로 하층민들로 이루어진 데 비해, 기원전 4세게 후반에는 주로 중류나 상류층 시민들로 이루어졌다. 테테스층의 정치적 영향력의 감소로 인해 기원전 4세기 아테네의 민주정은 점차 그 급진성을 상실했다.⊙로마 제국주의⊙기원전 265년 무렵 피사(Pisa) 아님의 이탈리아에는 로마에 의해 주도되는 이탈리아 연방이 수립되었다. 여기에는 로마의 시민이나 반시민(半市民)뿐 아니라, 법률상으로는 독립적이었던 이탈리아의 많은 도시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도시들은 로마의 동맹자일 뿐이었으나 로마인들은 이들보다 우월한 위치에서 이들을 통제하고 있었고, 또한 동맹군은 로마군과 더불어 로마가 결정한 전쟁을 치르고 그 혜택을 공유하였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이탈리아는 연방이라 부를 수 있는 상태로 어느 정도 통합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반면 기원전 264년 시작된 해외 팽창은 로마에 최초의 예속지(속주, provincia)를 가져다주었고, 속주는 로마제국의 기본 단위가 되었다. 로마인들은 이때부터 대략 120년 정도 주요 지중해 세력들과 치열한 전쟁을 치루어 나갔고, 그 결과 기원전 146년 무렵에는 지중해 주변경우가 타국을 지배하려는 의사가 없었다는 것이다. 로마의 해외 팽창을 이와 유사한 시각에서 보는 입장은 흔히 '방어론'이라 불리우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로마인들은 침략 의지가 없이 상대국에 대한 공포에서 전쟁이 비롯되었으며 단지 안전을 지키기 위해 싸웠을 뿐이라는 것이다. 둘째, 로마인들은 경제적 착취를 위해 전쟁을 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승전 후 경제적 이익이 있었지만 그것은 의도한 것이 아니라, 전쟁의 부수적 결과였을 따름이었다. 셋째, 기원전 2세기 전반기 헬레니즘 세계에서 로마인들은 승전 후에도 영토를 병합하지 않았으며, 직접 지배하지도 않았다. 넷째, 이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페티알레스 법(ius fetiale)'이라 불리운 전쟁선포에 관한 일종의 종교적 의례인데, 이는 방어전이 아닌 침략 전쟁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로마인들의 팽창 욕구를 억제시켰다는 것이다.방어론은 한편으로 팽창 구조에 있어 로마적 독특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장점을 인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때때로 로마는 자신의 직접적 이익보다는 이탈리아 동맹국들의 맹주로서 위엄과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전쟁이나 분규에 휘말려 드는 경우도 있었으며, 때로는 권력욕보다는 이탈리아 방어를 위한 순전히 전략적 이유에서 전쟁을 시작한 경우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의 행동이 순전히 방어적 동기에 의해 지배되었다고 보기에는 로마인들은 너무나 빈번하게, 또 매우 적극적으로 폭력에 의존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로마는 기원전 146년 무렵 지중해 연안 대부분을 포괄하는 거대한 제국을 형성하였다. 제국은 6개의 속주(시실리, 사르디니아와 코르시카, 동부 스페인, 서부 스페인, 마케도니아,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나머지는 공식적 동맹이나 느슨한 우호관계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보호령(누미디아, 마실리아, 일리리아와 그리스, 소아시아의 왕국들, 시리아, 이집트 등)으로 이루어졌다. 로마의 해외정복이 시작된 기원전 264년부터 기원전 146년까지의 기간은요가 있다. 다른 하나는 야만인들과 접하고 있던 스페인과 북이탈리아 지역이었다. 문화적 동등자 혹은 우월자와 맞선 동지중해 지역에서 외교와 선전을 앞세운 패권 정책이 추구된 반면, 야만인 지역에서는 잔인하고 공격적인 정책이 추구되었다.먼저 로마가 동지중해 지역에서 직접지배보다 간접적 패권정책을 선호했던 이유는 다음 세 가지로 짐작해 볼 수 있다. 우선 로마의 도시국가로서의 정치체제가 속주 숫자의 계속적인 증가를 쉽사리 흡수할 수 없었음이 지적될 수 있다. 기원전 197년에 2개의 스페인 속주가 새로이 만들어지자 이를 통치하기 위해 2명의 프라이토르가 더 선출되었다. 한 해에 모두 6명의 프라이토르가 선출되게 됨에 따라 이들 중 두 명만이 오를 수 있었던 최고 관직인 콘술직을 위한 경쟁은 전에 없이 치열해졌다. 지나친 경쟁은 과두정치체제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물론 기원전 146년 이후 실제로 그렇게 되었던 것처럼 더 이상 프라이토르의 숫자를 늘리지 않고, 전시에 그랬던 것처럼 기존 행정관의 임기를 연장하는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속주 통치의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행정관의 임기 연장도 그 자체가 경쟁의 대상이 되었을 뿐더러, 임기연장 가능성의 여부가 전쟁을 수행하는 지휘관들이 국가 이익에 앞서 사적인 이유로 전쟁 처리 방향을 결정할 수도 있었음을 고려해 볼 때 이것 또한 결코 통치의 안정화에 도움을 줄 수는 없는 것이었다. 둘째로 원로원이 로마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속주의 총독들을 통제하기 힘들다는 사실도 고려되었다. 일찍이 기원전 171년 스페인 속주에서 총독들의 비행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었고, 기원전 150년대에는 더 많은 문제가 노출되고 있었지만 이들의 권력 남용은 효과적으로 처벌되지 못하였으며 이들 중 일부는 원로원의 명령을 무시하곤 하였다. 셋째로 로마인들은 위와 같은 이유보다 더 현실적인, 즉 군사적, 경제적, 그리고 외교적 이유들 때문에 병합을 미루곤 하였다.이와 같은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원로원이 매 전쟁이 끝난 후 즉시 하였다.
    사회과학| 2002.08.09| 6페이지| 1,000원| 조회(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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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진시황
    1. 서론중국 역사에 있어서 진시황제는 시비가 끊이지 않았던 인물이다.그 오랜 옛날, 기원전 221년에 전중국을 정치적으로 통일하였고, 그 이후로 중국인들은 통일된 중국을 정상으로 보고 분열된 중국을 비정상으로 보게되는 관념을 낳았다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진시황의 중국통일은 역사상 중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진시황은 진나라의 왕으로써 여불휘를 통해 13세에 왕위에 올라 20세에 친정을 시작하면서 전국 통일의 계획을 세우고 불과 19년 만에 그 계획을 완성한다.진시황제는 황제가 된 후 역사에 남을 많은 일을 하였다. 군현제의 실시, 문자의 통일, 사상통일, 도량형 통일, 흉노정벌 등등등.. 그 밖의 여러 가지 업적에도 불구하고 폭군으로 비쳐진 것은 분서갱유(焚書坑儒:B.C.213) 등과 같은 희대의 사건들을 저지른 대가가 아닐까. 460여명의 유학자를 생매장한 이유 하나만으로도 진시황 사후 중국의 유학자들에게 혹독한 비판을 받은 것은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전 중국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황제, 'CHINA'라는 영문 표기가 생기게 했던 인물, 진시황.이제 진시황제에 대한 평가를 새로운 각도에서 시도해 보고자 한다.2. 본론☆ 처음으로 황제(皇帝)의 칭호를 쓰다 ☆'황제' 라는 말은 영어로 emperor라고 한다. emperor는 로마 제국의 황제 emperialt에서 유래된 말이나 '皇帝' 라는 두 개의 한자로 칭호를 최초로 쓴 사람은 진시황제(秦始皇帝)였다. 시황제의 시대, '전국칠웅(戰國七雄;중국 전국시대의 일곱 제후)' 이라고 해서 중국에는 일곱 개의 강국이 있었고, 진(秦)은 그 중의 한 나라였다. 시황제는 나머지 여섯개 나라를 잇따라 멸망시켰는데 BC 221년에 최후까지 남아 있던 산동(山東) 반도의 제(齊)나라를 멸망시킴으로써 비로소 천하통일을 이룩하였다. 그는 통일 직후 왕이라는 칭호대신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삼황(三皇)에서 황(皇)을 오제(五帝)에서 제(帝)를 택해서 '황제'로 칭하기로 했던 것이다. 삼황오제(三皇五능가하고 삼황의 덕을 겸비하였으므로, 자신이 세상을 다스리는 유일한 절대자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중앙집권 제도의 확립 ☆시황제는 봉건을 실시하여 제후를 두는 것은 제후에게 군비(軍備)를 허락하게 된다고 여겨 이사의 말에 따라 법가 사상을 받아들이고 B.C.221년에 전국을 36군(郡)으로 나누고 군은 몇 개의 현(縣)을 관할하게 하였다. 또한 군의 장관인 군수(郡守), 현의 장관인 현령(縣令)은 모두 황제가 임명하여 수시로 부임지를 이동시켜 지방관이 한 지방에 정착하면서 세력을 부식하여 할거하게 되는 것을 막았다. 이 중앙집권을 향한 군현제는 오늘날의 지방자치제라 할 수 있으며 이사의 헌책에 따라 실시되었는데 이러한 군현제와 법가사상의 등용은 당시 획기적인 방편이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타국가에서는 귀족세력이 자신의 권력과 세력을 보호하기 위해 법가사상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하여 매우 반감을 샀다. 이는 법가사상이 귀족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음을 얘기해 준다.물론 법가사상은 이사가 상에 오르기 이전 상앙이란 사람이 진의 상이 되었었는데 그는 변법을 왕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강행하여 변방의 후진국으로 남아 있던 진을 부국이 되게 하였으며 강한 병력을 소유한 전국시대의 7웅중 한 국가로 만든다. 이후 상앙은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고 법가 사상을 잇지 않게 되는데 이사에 이르러 법가사상이 빛을 발하게 된다. 시황의 적극적인 투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동문(同文)--문자의 통일 ☆진시황은 여러 가지 새로운 제도를 제정했는데, 그 중에서도 누구의 생각에나 쉽게 떠오르는 것은 '동문(同文)' 즉 문자를 하나로 통일시킨 것이다. 전국시대의 7웅은 각 나라마다 글자의 형태가 달랐었다. 그 근본은 상(商)나라의 갑골문자(甲骨文字)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지역에 따라서 약간씩 자체(字體)가 달랐고 제각기 다른 문자가 있었던 것이다. 시황제는 진나라의 소전(小篆)이란 글자의 형태를 천하의 문자로 정하고, 나머지 문자들을 폐지시켰다. 그 폐서들을 버렸기 때문에 사료(史料)는 그다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가끔 지하에서 특히 사막에서 출토되는 인장에서 이 육국문자를 찾아 볼 수가 있다. 이 인장에는 읽을 수 없는 문자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것이 육국문자 즉 진시황제에 의해서 폐지되었던 문자였던 것이다. 같은 문자가 전국에서 통용된다는 것은 전국적으로 의사소통을 도모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단순히 국토통일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참된 뜻으로의 천하통일을 이루게 된 것이다.☆ 도량형(度量衡)의 통일 ☆진시황은 도량형을 통일시켰다는 점도 아주 중요하다. 한 홉(合), 한 되(升), 한 말(斗)이라든가, 길이의 단위인 보(步), 장(丈) 등이 각 국에서 약간씩 달랐다. 되나 말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한 말이 어느 나라에서는 한 말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생겼다. 그래서 전국의 도량형을 엄격히 통일시켰던 것이다. 이것은 천하를 통일했던 바로 그 해에 실시되었다. 한 홉이라는 표준 용기를 제작하여, 전국에 그것을 따르도록 명령했다. 중앙에서 보내온 한 홉짜리 용기가 동북 지방 근처에서 출토(出土)된 것으로 보아 사실상 전국에 배당되었던 사실을 반증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산업과 경제가 발달했다. 이제까지는 각지에서 다시 하나하나 환산해야만 했던 것이 그러한 수고를 면하게 되었다. 화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진(秦)의 화폐가 전국에서 통용되었다.☆ 동궤(同軌)-차륜(車輪) 폭의 통일 ☆진시황의 통일정책으로 또 하나 유명한 것은 '동궤(同軌)' 즉 바퀴 폭의 통일이다. 당시 각 국은 제각기 다른 나라의 수레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바퀴의 폭을 달리 하고 있었다. 수레는 대부분 전차(戰車)였다. 말이 끄는 전차는 도로에 깊은 바퀴자국을 만들고 그것이 레일같이 되어 있었다. 그 레일에 차륜을 넣어서 수레를 달리게 했던 것이다. 전차는 싸움을 위한 것이므로 타국의 전차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바퀴자국의 폭을 다르게 해 두면 적의 침입을 막는데 효과가 컸다. 그런데 이제는 천하가 통일된 것이다. 바퀴자국의 차이는 전국적인진(秦)나라가 멸망하고 30년이 채 되지 않은 무렵 한(漢)나라의 문제(文帝) 시대의 가산(賈山)이란 사람이 글을 남겼다. 그것이 도폭은 50보(步)였다고 한다. '보(步)'란 길이의 단위이며, 1보는 지금의 1.35m 정도이며, 50보의 폭이면 6 7m 정도이다. 그리고 3장(丈)마다(당시의 1장은 2.25m이며, 3장은 6 7m) 수목이 심어져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성들이 동원되어 도로가 만들어지고, 그 도로가 비에 의해 유실되면 보수를 해야 했다. 그리고 백성들은 관리가 파견되어 오면 그 관리의 식량이나 주거의 뒷바라지도 해야 했다. 역(驛)에는 말을 비치하여 그 말을 사육하는 것도 모두 그 지역 백성들의 일이었다. 따라서 백성들의 고통이 대단했다고 한다. 한(漢)나라때 다시 길을 만들자는 제안이 나왔으나 이것을 간(諫)한 사람이 가산(賈山)이다. 가산은 진나라의 시황제가 길을 개척했으니 다시 만들 필요가 없으며 진나라는 그 때문에 멸망한 것이라고 말했다. 시황제가 죽자 갑자기 나라가 멸망한 것은 도로 건설로 시달렸던 백성들의 원한이 컸기 때문이며 한나라는 그것을 모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진나라가 멸망한 지 30년이 지난 때였으므로 그 당시는 시황제가 만들었던 길이 남아있었다. 치도는 정말 훌륭한 도로였다. 폭이 6 7m, 그리고 6m마다 큰 가로수가 심어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북쪽으로는 구원(九原), 만리장성 근처에서부터, 동쪽으로는 황해 연안까지, 남쪽은 양자강(揚子江)에 이르기까지 길이 뚫려 있었다. 그래서 어느 곳이든지 하나의 수레로 갈 수 있게 길이 연결되어 있었다. 진시황 이전에는 강소성(江蘇省)이나 절강성(浙江省)까지 가려면, 한(韓)나라에서 수레를 바꾸어 타고, 위(魏)나라에서도 바꾸어 타야만 했다. 그 외에도 곳곳에서 바꾸어 타야 했지만 진시황에 이르러서는 그러한 번거로움이 없어졌고 한대의 수레로 전국 방방곡곡을 갈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도로로 인해 각지의 교역(交易)이 번창하게 되었고 산업경제가 활성화되는 에 대하여 유가사상가들이 고래의 제도를 근거로 비난했기 때문에 B.C.213년 이사(李斯)의 진언에 따라 사상을 통제하였다. 의약ㆍ복서(卜筮)ㆍ농림 관계 이외의 책은 관청에서 사용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몰수하여 30일 이내에 소각시켰다. 이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는 죄인으로서 자청(刺靑)의 형벌에 처하고 그전 해부터 시작되었던 장성의 건설에 종사시켰다.또한 유가의 주장을 선전하는 자는 사형, 당시 시행되던 법가사상을 근거로 한 통일정책을 비난하는 자는 일족을 사형에 처했으며 그것을 방관한 관리도 같은 죄에 처했다. 이 때 금지되었던 책은 유가(儒家) 이외의 것도 포함하여 광범위한 분야에 미치고 있었다. 그런데 장사(長沙) 마왕퇴(馬王堆) 3호 묘에서는 백서(帛書) 『노자』나 『전국책』이, 임기현(臨沂縣) 은작산(銀雀山) 한 묘에서는 『손자병법』『손민병법』『육도(六韜)』 등의 병가서 이외에 『관자(管子)』나 『안자춘추(晏子春秋)』 등의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유가의 서적이 발견되고 있지 않는 점을 고려한다면 결국 분서의 주요대상은 유가에 있었던 것으로 이러한 영향이 한의 무제(武帝)경까지도 유지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다시 이듬해에는 신선도(神仙道)를 주장하는 방사(方士)만이 아니라 유자를 포함한 460여명 상당의 학자들을 수도인 함양에서 흙구덩이에 파묻어 죽여버렸다. 이것은 오래도록 시황제를 비난하는 최대의 사건이 되었는데 이러한 점에서 정치가 지닌 비정함을 통감할 수 있다.☆ 흉노정벌 ☆진시황의 통일정책 가운데 하나가 군사적인 행동이다. 시황제는 현재의 광동ㆍ광서ㆍ베트남 북부에 세력을 펼치고 있던 남월을 토벌하기 위하여 군대를 파견하여 진의 세력 아래 장악한 것은 B.C.214년이었다. 북방에 대해서는 이보다 앞서 B.C.215년(진시황 32)에 장군 몽염에게 30만의 대군을 주어 흉노정벌을 위하여 출정케 하였다. 흉노는 북방의 몽고초원에서 유목생활을 하고 있던 종족으로 당시 여러 부족이 통합되어 강력해지면서 점차 남하했기 때문에 이를 토벌하여 황제의 위력을 시켰다.
    인문/어학| 2002.08.09| 5페이지| 1,000원| 조회(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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