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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어학]후기 중세국어의 시대적, 음운적, 문법적, 음운적 특징 평가A좋아요
    후기 중세 국어의 시대적 특징언어의 차이나 변화는 공시적으로는 미미하여 확연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통시적으로 볼 때 음운·문법·어휘의 모든 층위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변화를 우리 국어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중세국어를 살펴보는 것은 단순히 그 시대의 국어를 이해하는 차원을 넘어서 고대 국어와 근대 국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중세국어는 10세기 초 고려왕조가 건립되던 때로부터 16세기 말 임진왜란이 시작되던 때까지의 국어를 일컫는다. 새 왕조인 고려가 오늘의 개성 지방을 중심으로 이룩되자,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가 경주에서 개성으로 옮겨졌는데, 이것은 국어의 역사에서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이로써 한반도의 중부에 위치한 개성 지방의 말이 우리나라의 중앙어로 등장하게 되었다. 개성어는 신라어의 방언이었겠지만 경주말 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고 개성 지방은 고구려의 옛 땅이었으므로 그 방언에는 고구려어의 잔재가 적지 않게 남아 있었다. 10 세기에 개성 지방의 방언이 중앙어가 된 것은 오늘날까지 계속 되고 있는 것이다. 현대 국어(서울말)는 이 중앙어의 직접적인 계속이란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중앙어의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고 국어학자들은 이 때를 국어의 역사에서 하나의 새로운 시기가 시작된 때로 보고, 이 때부터 대체로 16 세기까지 사용된 우리말을 중세 국어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동안 우리들의 가장 큰 관심을 끌어 왔던 것은 훈민정음이 창제된 직후 몇 십 년의 국어였다. 중세국어는 우리가 그 온전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최고의 국어라는 점 이외에 현대국어의 중요한 뼈대가 이 시기에 대부분 갖추어졌다는 점에서도 특별한 주목을 받아 왔다. 이 이전의 국어는 한자로 기록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표기 체계가 불완전하고 그나마 양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 단편적인 현상뿐이었던 것이다.10세기에서 16세기까지의 중세국어는 크게 두 가지의 견해로 시기를 나눌 수 있다. 전기 중세 국어는 10세기부터 훈민정음 창제(세종 25년 (같은 궁중기관에서 편찬한 것들로 동질성이 많다. 그 편찬에는 지방 출신자들이 참여했었지만, 전반적으로 당시의 중앙어, 그것도 상류계급의 언어를 반영한 것으로 생각된다.중세국어의 문헌 자료는 대체로 언해(諺解) 의 성격을 띤 것이 많다. 언해란 한문 원문을 우리말로써 번역한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한문을 바탕으로 하여 언해된 문장, 즉 언해문은 일종의 번역어이기 때문에 번역 당시의 우리말을 충실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한계점도 가지고 있다. 언해를 함에 있어서 한문에 구결을 달아 그 독법을 확정하였으므로 번역문은 구결의 영향을 많이 받아 한문의 번역문이 가지는 독특한 문체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언해 자료들은 민족 문자로써 우리말을 전면적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들 자료를 통하여 당시의 우리말을 거의 완벽하게 기술할 수가 있다.중세국어의 문헌 자료는 그 자료가 담고 있는 내용의 성격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가 있다. 1. 불교 관계 자료, 2. 유교 관계 자료, 3. 의학 관계 자료, 4. 역학 관계 자료, 5. 시가 자료, 6. 한자 학습서 자료, 7. 언간 자료, 8. 구결 자료, 9. 운서 자료, 10. 한글 및 외국어 관계 자료, 11. 군사 관계 자료, 12. 기타 자료 등이다.이 분류 중 어떤 것은 불교 관계 자료이면서도 시가 자료의 성격을 가지는 이중적인 성격을 띄는 것도 있다. 《금강경삼가해》나 《남명집언해》의 일부분은 이런 이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염불작법》의 경우에는 불교 관계 자료이나 거기에 실려 있는 국한문의 만이 시가인 경기체가이기 때문에 시가 자료로도 분류될 수 있다. 중세국어 자료에는 불교 관계의 자료가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유교에 관한 자료들이다.후기 중세 국어의 음운 문법 어휘적 특징1. 중세국어 음운적 특징1.1. 자음 체계훈민정음의 초성체계에 의해서 15세기 국어의 자음에는 기본적으로 평음(가, 가, 가, 가, ㅅ, ㅎ), 유기음(가, 가, 가, 가)의 양 계열이 존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중세국어的)인 발음의 영향과 중국 한자음의 영향 및 훈민정음 글자의 제정(ㅿ 글자의 제정)으로 인해 16세기 초까지 그 음이 부분적으로 존속되었다.'가'은 불청불탁의 후음으로 규정된다. 이 ㅇ 의 음가는 《훈민정음》의 설명과 ㅇ이 사용되고 있는 환경을 통하여 추정할 수 있다. 1훈민정음의 성모 체계에서 후음의 불청불탁으로 분류하고 있으며, ㅇ의 음가를 욕(欲) 자의 초성이라고 했는데, 이는 중국어 성모 체계의 유(喩)모 와 같다. 2ㆁ은 ㅇ과 서로 비슷해서 운서에서 의(疑)모와 유(喩)모를 서로 혼용해 사용하는 일이 많다(ㆁ與ㅇ相似, 故韻書疑與喩多相混用). 3ㅇ소리는 맑고 비어 있어 종성으로 사용할 필요가 없어 중성만으로 소리(음절)를 이룰 수 있다(ㅇ聲淡而虛, 不必用於終, 而中聲可得成音). 이들 설명 어디를 보아도 ㅇ 이 어떤 음가를 가진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중국어 성모 체계를 바탕으로 훈민정음 체계를 형성하고 이를 토대를 문자를 만들다 보니 음가 없는 ㅇ 글자를 만들게 된 것이다.중세국어에서는 어두에 자음군(두 자음)이 올 수 있었음이 특징이었다. 어두 자음군에는 가계(가, 가, 가, ㅷ)와 가계(ㅴ, ㅵ)가 있었는데, 17세기에 세자 합용병서가 소멸되고, 18세기에 극심한 혼동을 겪게되어 어두 자음군은 모두 된소리로 바뀌게 된다.중세국어의 음절말 자음은 매우 제한되어, 14세기 말에 완성된 절음화의 결과로 15세기의 음절말 자음은 ㄱ ㆁ ㄷ ㄴ ㅂ ㅁ ㅅ ㄹ 의 8개로 제한되어 있었다.{)《훈민정음》종성해 ㄱㆁㄷㄴㅂㅁㅅㄹ 八字可足用也 라 하여 15세기에 종성이 8개가 있음을 설 명하고 있다.음절말 자음군으로는 가 이 선행한 경우(ㄶ, ㄼ, ㄺ)는 음절말 자음군이 허용되었다.(실제 문헌에서는 ㄳ, 가으로 나타나나 가 은 발음되지 않음)1.2. 모음 체계15세기에는 7개의 단모음이 존재했었다. 7모음의 음가에 대해서는《훈민정음》제자해에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ㆍ는 혀가 오그라지고 소리가 깊다. ㅡ는 혀가 조금 오그라지고 소리는 깊지도 얕지도 않다. ㅣ는 혀있음.2.2.3. 격조사1 주격조사 : 자음 아래 쓰이는 이 와 i, y 를 제외한 모음으로 끝난 체언 뒤에 쓰이는 ㅣ , 그리고 i, y'의 뒤에 쓰이는 ø 등이 있었다. 마지막의 경우 체언의 끝음절 모음이 평성으로 되어 있으면 상성으로 바뀐다. 가 는 16세기 말에 나타나기 시작했다.2 서술격조사 : 이라,ㅣ라, ø라 의 세 이형태가 있었는데, 그 용법은 주격조사와 같았다.3 목적격조사 : 체언의 끝소리와 체언의 모음의 종류에 따라 을, 링, 를, ㄹ 로 실현4 보격조사 : 이 가 있었는데 그 용법은 주격조사와 같았다.5 관형격조사 : 평칭의 유정명사에 붙는 잎/의 특수한 명사나 대명사 뒤에 붙는 ㅣ , 무정명사나 존칭의 유정명사에 붙는 ㅅ 이 있었다.6 부사격조사 : 낙착점 처소(처격) - 애/에/예, 잎/의, 출발점처소 - 에셔, 셔, 에 이셔, 지향점 처소 - 잎로/으로/로, 비교의 부사격조사 - 과/와, 이/ㅣ(동등 비교) 라와, 으론, 두고 ( 차등 비교), 동반의 부사격조사 -과/와, 변성의 부사격조사 -로7 호격조사 : 아/야 (비칭), 하 (존칭)2.2.4. 대명사의 곡용대명사의 곡용은 명사와 비슷하지만 약간 차이점이 있었다. 1인칭 대명사 나 는 주격과 목적격이 모두 내 였다. 성조의 차이로 나타내었다. 2인칭 단수 대명서 너 는 네 (주격-상성, 목적격-평성)였고, 미지칭 대명사는 누 였다. 어느 도 중세에서는 대명사였다.2.2.5. 특수 조사(보조사)중세 국어에는 특수 조사가 여럿있었고 그 용법도 다양하였다.주제 대조의 의미: ㄴ/잎/은/다/는 과 (잎/으)란 , 란 이 더 강한 의미를 가짐, 반복의 의미: 도 (역시의 의미), 단독의 의미: 만 과 힝 , 강세의 의미: 힝, 곳/옷, 빛/봇, 곰/옴, ㄱ, ㆁ, ㅁ , 반의법의 주어(주제의 강조): 잇딪 (信잇딪 그츠리힝가), 의문의 의미: 가, 고 , ㄹ 과 ㅣ 로 끝나는 체언 뒤에서는 아, 오 로 교체. 가/아 는 판정의문, 고/오 는 의문대명사에 호응는 설명의문, 균일의 의미: 마 실제 어형은 빛아/빛사, 빛온/빛손 ~ 빛싶디/빛잎디 ; 비어/비서, 비옴/비솜 ~ 비운/비순 등이었다.ㄹ 받침을 가진 용언은 ㄷ, ㄴ, ㅿ 로 끝나는 어미 앞에서는 ㄹ 가 탈락되었다. (예 : 아롬, 알리오, 아라쇼셔 ~ 아디, 안, 아다니라, 아힝고 등)2.3.2. 선어말 어미2.3.2.1. 의도법의도법은 후기 중세국어까지만 존재하고 근대국어나 현대국어에 와서는 더 이상 언어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문법범주이다. 선어말 어미 -오/우-로 표시되었다. 과거시상의 선어말 어미 -더-와 결합하면 -다-(예:이링힝 붓그리다니), -거-와 결합하면 -과-(예: 오다힝 싶힝 얻과라), 경어법 -시-와 연결되면 -샤-(예: 님금 지힝샨 그리라)로 되었다. 이러한 의도법 어미는 항상 사용된 것은 아니어서, 사실의 객과적 진술에는 사용되지 않고, 주관적 의도가 가미된 동작 상태의 진술에 사용되었다. 15세기에 동요되어 16세기에 소멸되었다.2.3.2.2. 경어법중세국어의 경어법은 현대국어보다 훨씬 더 정밀하고 다양하여, 겸양법, 존경법, 공손법이 있었고, 모두 선어말 어미로 표시되었다.겸양법은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이 관련이 있을 때 낮은 사람의 동작이나 상태를 겸손하게 표현하는 언어적 방법이다. 여섯 가지 변이형태는 -싶-/-짜-/-힝- ( -싶-/-짜-/-힝- ) 또는 -싶오-/-짜오-/-힝오- 였다. 어간의 끝소리가 ㄱ, ㅂ, ㅅ 일 때는 -싶- 이 실현되었고, ㅈ, ㅊ, ㄷ 일 때는 -짜- 이 실현되었으며, 어간의 끝소리가 모음이나 유성자음 ㄴ, ㅁ 일 때는 -힝- 이 각각 실현되었다. 그리고 뒤에 모음어미가 이어지면 ㅂ 이 ㅸ 이나 오 로 바뀌었다. (예 : 막싶거늘, 듣짜게, 보힝건대, 돕싶힝니, 돕싶힝니/돕싶오니, 얻짜힝/얻짜와, 안힝힝/안힝와 등)존경법은 오늘날과 같이 높은 사람의 동작, 상태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기 위해 선어말 어미 -(잎/으)시-를 사용했다.공손법은 듣는 사람이 아주 존귀한 사람일 경우 말하는 사람이 자신을 공손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이- 등.)
    인문/어학| 2005.05.09| 14페이지| 1,000원| 조회(2,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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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전소설] 구운몽 작품분석 평가A+최고예요
    목 차1. 서론1) 지은이2) 연구사 겆토2. 본론1) 줄거리2) 무대 배경3) 의 제목에 대한 의미4) 등장 인물 분석5) 사건 진행 과정6) 사상과 성격상의 특징7) 구운몽의 한계점3. 결론1) 구운몽의 문학사적(文學史的) 가치2) 구운몽의 문학적(文學的) 가치3) 작품의 의의1. 서론1) 지은이김만중(金萬重, 1637∼1692)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소설가로 본관은 광산(光山), 아명(兒名)은 선생(船生), 자(字)는 중숙(重叔), 호는 서포(西浦), 시호(諡號)는 문효(文孝)이다. 조선조 예학(禮學)의 대가인 김장생(金長生)의 증손이고, 충렬공(忠烈公) 익겸(益謙)의 유복자이며, 숙종의 장인인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만기(萬基)의 아우로서, 숙종대왕의 초비(初妃)인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숙부이다. 그의 어머니 해평 윤씨는 인조의 장인인 해남부원군(海南府院君) 윤두수(尹斗壽)의 4대손이고 영의정을 지낸 문익공(文翼公) 방(昉)의 증손녀이며, 이조참판 지(遲)의 따님이다.1688년에 남인(南人)인 장숙의(張淑儀) 일가를 둘러싼 언사(言事)의 죄로 연루되어 추국(推鞫)을 받고 하옥되었다가 선천(宣川)으로 유배되었다. 이 선천 유배지에서 어머니 윤씨를 위해 을 지었다고 한다.의 저작 동기는 와도 상관관계를 갖는다. 의 저작을 통해서 의도했던 것이 실패하고 보니 서포에게는 날로 적막한 생활뿐이었다. 여기서부터 서포에게는 제 2의 저작활동이 시작된 것이다.김만중은 어머니의 남다른 가정 교육에 힘입어 성장하였다. 그의 아버지 익겸이 일찍이 정축호란(丁丑胡亂, 1637) 때, 강화도에서 순절하였으므로 형 만기와 함께 어머니 윤씨만을 의지하여, 어머니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유달랐던 것이다. 실은 그의 대작 도 귀양지에서 어머니의 외로움을 덜기 위해 지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로는 삼교화합의 이상화이다. 서포는 이 현묘하고 심도 있는 삼교의 이상화를 실제로 정치와 생활에 반영하고 싶었으나 시간이 너무도 없었다. 그래서 삼교의 이상적산의 선녀인 위부인이 팔선녀를 육관대사에게 보내 인사드린다. 용왕의 후대로 술이 취하여 돌아오던 성진은 연화봉을 구경하며 돌아가던 팔선녀와 석교에서 만나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희롱한다. 선방에 돌아온 성진은 팔선녀의 미모에 도취되어 불문의 적막함에 회의를 느끼고 속세의 부귀와 공명을 원하다가 육관대사에 의하여 팔선녀와 함께 지옥으로 추방된다.성진은 회남 수주현에 사는 양처사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양처사는 신선이 되려고 집을 나선다. 아버지 없이 자란 양소유는 15세에 과거를 보러 경사로 가던 중 화음현에 이르러 진어사의 딸 채봉을 만나 서로 마음이 맞아 자기들끼리 혼약한다. 그때 구사량이 난을 일으켜 양소유는 남전산으로 피신하였는데, 그곳에서 도사를 만나 음률을 배운다. 진채봉은 아버지가 죽은 뒤 관원에게 잡혀 경사로 끌려간다. 이듬해 다시 과거를 보러 서울로 올라가던 양소유는 낙양 천진교의 시회(詩會)에 참석하였다가 기생 계섬월과 인연을 맺는다. 경사에 당도한 양소유는 어머니의 친척인 두련사의 주선으로 거문고를 탄다는 구실로 여관(女冠)으로 가장하여 정사도의 딸 경패를 만나는 데 성공한다. 과거에 급제한 양소유는 정사도의 사위로 정해졌는데, 정경패는 양소유가 자신에게 가한 모욕을 갚는다는 명목으로 시비 가춘운으로 하여금 선녀처럼 꾸며 양소유를 유혹하여 두 사람이 인연을 맺도록 한다. 이때 하북의 세 왕이 역모하려 하니 양소유가 절도사로 나가 이들을 다스린다. 돌아오는 길에 계섬월을 만나 운우(雲雨)의 정을 나누었는데, 이튿날 보니 하북의 명기 적경홍이었다. 두 여자와 후일을 기약하고 상경하여 예부상서가 된다. 이때 진채봉은 서울로 잡혀 온 뒤 궁녀가 되었는데, 어느 날 황제가 베푼 주석에서 양소유를 보고 그 환선시(紈扇詩)에 차운(次韻)하며 애태운다. 까닭을 물어 진채봉과 양소유의 관계를 알게 된 황제는 이를 용서하고, 누이인 난양공주는 후에 진채봉과 형제지의를 맺는다. 양소유는 어느 날 밤에 난양공주의 퉁소 소리에 화답한 것이 인연이 되어 부마로 간택되지만에게 그의 전부를 자비로 베풀었으므로 다 함께 즐겁고 행복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인물이 아니라 이상적이고 전형적인 존재다. 한편 양소유(楊少游)는 성진의 후신으로 양처사와 유씨 부인의 아들이다.성진(性眞)이란 이름도 한갓 무의식적으로 아무렇게나 나오는 소리대로 갖다 붙인 이름은 아니다. 성진이란 말은 본래 불가의 언어로서 본성을 말하는 것으로, 불교경전 『능엄경(楞嚴經)』에 그 전거(典據)가 나타나 있는 말이다. 그렇다면 애욕(愛慾)의 그물에 빠져 있던 의 남주인공이 그 욕망에 의해서 잠시 갇힘을 당하였던 바의 그 불성(佛性), 즉 원융무애(圓融無 )한 본성에로 되돌아간다는 뜻으로 부합하게 된다.'성진'의 두 개 글자를 잠깐 도치시켜서 '진성(眞性)'이라 해도 그 말 자체 의 주인공 성진의 특색을 가장 잘 살려 표현하는 의미로 들어맞게 된다. '진성(眞性)'은 불교에서는 '진여(眞如)'와 같은 뜻으로 통용한다. 이 때 '진여(眞如)'란 불법의 본체로서 인간 누구나가 갖고 있는 진실한, 변하지 않고 바뀌지 않는 절대적인 본성이니, 성진이 마지막에 도달한 경지인 것이다.그 다음 '소유(少遊)'를 자의 그대로 풀면 '잠깐 노닐었다'는 뜻이 된다. 우선 김만중dl 택한 글자 자체를 최대로 존중하면 대강 '소경지몽유(少頃之夢遊)'(잠깐 동안의 꿈 나들이), '少留之夢遊'(잠깐 머무른 꿈놀이)의 뜻을 약한 언어쯤으로 상정된다.결국 남주인공은 궁극의 깨달음을 위한 중도에 이러한 필연적인 잠깐의 노닐, 즉 소유(少遊)의 과정을 겪고 그 마지막에 원래의 참 본성, 즉 性眞으로 회귀하였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고 믿어지는 것이다.② 육관대사세상의 모든 일을 관통할 수 있는 도통한 중(僧). 성진의 스승으로서 성진의 번뇌를 성진으로 하여금 직접 벗도록 한다. 속세에 성진을 따라가 호승(胡僧)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가운데 불가 노승의 당호인 대관(大官) '육관(六觀)'의 명도 단순히 아무런 뜻 없이 지어다 붙인 이름만은 아닐 것이다. '육관' 가운데 그 '육(- 생로병사의 사고(四苦)에다 애별리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부득고(求不得苦),오음성고(五陰盛苦)를 더한 인생의 여덟 가지 괴로움.팔난(八難) - 부처를 보지 못하고 불법을 들을 수 없는 여덟 가지의 곤란.팔대명왕(八大明王) - 악마를 굴복시키는 여덟의 명왕.팔복전(八福田) - 공경하거나 자비를 베풀어 복을 심는 여덟 가지 좋은 일.팔상(八相) - 석가여래가 중생을 제도하고자 이 세상에서 나타낸 변한 모습 여덟 가지를 이르는 말.이런 의미에서 '팔'선녀인 것이다.둘째, 지상으로 내려와서 인간 세상에서의 여덟 여인의 의미를 한 번보면 다음과 같다.지상은 천상의 도(이상 논리)와는 다른 현실 논리가 지배하는 공간이다. 김만중 시대에 이 현실을 지배하는 논리는 바로 유교이념이다. 이제 여덟 여인이 갖는 유교적 의미를 한 번 생각해 보자. 천상에서의 팔선녀는 지상으로 내려와 양소유(천상의 성진)와 관계를 맺게 된다. 이 여덟 여인은 모두 양소유의 처나 첩이 되어 양소유를 곁에서 모시게 된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이들 여인들이 처첩 사이의 질투와 시기로 갈등을 일으키기보다는 계급 질서를 바탕으로 조화로운 상하와 협력 관계를 유지한다는 사실이다. 이 여덟 명은 각기 네 그룹으로 나뉘어서 유교의 덕목들을 상징하고 있다.첫 번째 - 정소저(제1부인), 난양공주(제2부인) 인덕(仁德)을 상징두 번째 - 진채봉(제3부인), 가춘운(제4부인) 신의(信義)를 상징세 번째 - 계섬월(제5부인), 적경홍(제6부인) 기예(技藝)를 상징네 번째 - 심요연(제7부인), 백능파(제8부인) 무용(武勇)을 상징제 1·2부인은 정실(正室)로서 다스리는 자의 도리를 나타내고, 제 3·4부인은 정실 부인을 모시는 사람들로서 신하의 도리를, 제 5·6부인은 기생 출신으로 노래와 춤 등의 예술적 재능을, 제 7·8부인은 빼어난 무예와 도술로 변방의 오랑캐를 물리친 무예와 용기를 나타낸다. 따라서 이들 부인 여덟은 '유교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이상적인 덕목들'을 의미한다. 좀 거칠게 말하면, 서사구조의 진정한 의미와 그 주요 사상은 무엇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불교의 [金剛經] '公' 사상 이라 하겠다. 논자에 따라 일부다처제의 긍정으로 보기도 하고18), 다른 고대소설과 마찬가지로 환몽소설로 인간의 부귀 영화가 덧없는 것(無常)으로 보기도 하는19) 등 이견이 많으나, 어디까지나 혼미함에서 벗어나 깨달음에 달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空 사상의 구조이다.작품 전체가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만, 국문본 제16장의 말미에 언급되어 있는 금강경 한 구절은 이를 잘 보여준다. 에서 '공'사상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곳은 육관대사가 성진에게 금강경 큰 법을 베풀어 깨닫게 하기 위해 꿈을 꾸게 한 부분이다.일체의 인위적인 법은 마치 꿈과 환영과 물거품과 그림자와 같은 것이니라.이슬과 같고 또한 번개와 같은 것이어서 응당 이와 같이 볼지니라.에서 양소유가 전생의 팔선녀와 향략을 누리는 생활을 빼버리면 '공'사상의 강조도 빛을 보지 못하고 만다. 그러므로 이 공사상을 드러나게 하는데 도교는 매우 큰 역할을 한 것이다. 서포는 양소유의 생활상을 '空卽是色', '色卽是空'에서 '色'으로 보고, 성진은 '空'으로 대했던 것이다. 그의 스승 육관대사는 성진을 수제자로 키우기 위해 잠시 꿈속에서 허영되고 타락한 유가적인 생활을 경험하게 한 것이다. 꿈에서 깨어난 성진은 부귀영화가 덧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더욱 불도 정진에 전념하게 된다. '空'과 '色'은 서로 나눌 수 없는 관계이며, 이 두 세계가 서로 각기 떨어지게 되면 심각한 괴리현상이 일어난다. 그러나 두 개념이 조합을 이룰 때는 불교도들은 극락왕생하게 되고, 유교도들은 천지조화에 참여하게 된다. 불교에서의 중도사상, 유교의 중용사상, 도가의 충기는 바로 이에 해당하는 사상인 것이다. 양소유의 생활상은 '色'적인 것이고 성진은 '空'적인 생활이라고 볼 수 있다. 만물은 근본으로 되돌아오게 되는 것이 원리이듯 양소유는 이전의 성진으로 되돌아 온 것이다. 소설은 흥미위주로 쓰는 것이지만 은 서포가 윤씨를 위로하기 위한 여준다.
    인문/어학| 2003.10.04| 23페이지| 1,000원| 조회(2,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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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전소설] 서포 김만중의 생애와 작품 세계
    목 차1. 김만중의 생애와 인간1) 성장기, 수학기2) 관직 재임기3) 유배기2. 김만중의 작품과 시대적 상황1) 실학사상의 영향2) 당쟁의 격화3. 김만중의 작품세계1) 서포만필2) 구운몽3) 사씨 남정기1. 김만중의 생애와 인간김만중은 조선 후기 숙종 시대에 한글 몽환 소설 과 당시 숙종과 인현왕후, 장희빈을 모델로 쓴 등의 소설을 남긴 중세문학사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김만중(김만중, 1637∼1692)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소설가로 본관은 광산(光山), 아명은 선생(船生), 자는 중숙(重叔), 호는 서포(西浦), 시호(諡號)는 문효(文孝)이다.西浦 金萬重은 아버지 김익겸이 정축호란 때 김상용을 따라 강화도에서 순절함으로써 遺腹子로 태어났다. 어머니 윤씨는 그의 성장에 세심한 배려를 했을 것으로 본다. 그의 성장과 학문적 발전에 막대한 영향을 준 윤씨에게 효성을 다했다고 한다.그는 조선 중기 南人과 西人, 老論과 少論의 치열한 黨爭의 와중에서 늘 정의감에 앞장서서 왕에게 상소를 올렸는데 그것이 화근이 되어 몇 차례의 유배생활을 겪어야만 하였다. 거기서 그는 유배를 통해 그의 인간과 사상, 문학관과 학문관을 결집시켜 을 완성했다. 또한 그는 학문에서도 유·불·도의 같고 다름의 파악은 물론 산수·율려·천문·지리·패설 등에까지 두루 통한 박학자였고4) 당시 국가 사회의 강한 이데올로기로 지배됐던 주자학도 비판적 시각에서 수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천시했던 통속소설의 대중적 기능을 중요시하여 직접 창작도 했다. , 등 소설이 그것이다. 이 중 는 숙종 임금의 기사환국의 비리적 처사를 상징적으로 풍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당시 사회가 한문학권에 꽁꽁 묶여 있었을 때에, 인도 중국 한국 등 각 나라의 언어적 특징을 일찍이 파악, 한국 사람은 한국 언어로 작품을 써야 한다는 소위 국민문학론을 제창한 선구자였다.작품은 작가의 세계관의 표현이라는 관점에서 그의 생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1) 성장기, 수학기서포 문학의 사상적 의미를 구명하는 데에 니 윤씨가 만기, 만중 형제의 교육을 위해 얼마나 고심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2) 관직 재임기김만중은 위와 같이 어머니로부터 엄격한 훈도를 받고 14세에 진사 초시에 합격하였고, 이어서 16세에 진사에 장원급제하였으며, 그 뒤 1655년에 정시문과에도 급제하여 관료로 발을 내딛기 시작, 1666년에 정언(正言), 1667년에 지평(持平), 수찬(修撰)을 역임하였으며, 1668년에는 경서 교정언, 교리가 되었다. 아울러 1671년에는 암행어사로 경기 및 삼남 지방의 진정득실을 조사하기 위해 부교리가 되는 등 1674년까지 헌납, 부수찬, 교리 등을 지냈다. 이 기간이 그의 일생 중 가장 평온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30세 때는 그의 형 김만기가 정2품직에 오르고, 35세 때는 그의 질녀인 김만기의 딸이 세자빈(숙종비 仁敬王后)에 책봉되는 등 영광의 세월이었다.그러다가 1675년 동부승지로 있을 때, 인선왕후의 상복 문제로 서인(西人)이 패배하자 관직을 박탈당하였다. 제18대 현종 초년의 1차 예송 논쟁이 서인의 승리로 돌아갔지만, 현종 15년에 2차 예송이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이 해에 효종비인 인선왕후가 승하했는데,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조대비)의 복제문제가 터져 나온 것이다. [가례]에 의거, 효종을 장자로 인정하면 조대비는 기년상, 차자로 보면 대공상복을 입어야 했는데, 남인은 기년설(朞年說, 1년 동안 상복 입음)을 주장하고, 서인은 소위 대공설(大功說, 아홉 달 동안 상복 입음)을 내놓았다. 왕은 서인의 說이 근거가 미약하다 하여 남인의 기년설을 받아들였다. 이로써 서인은 쇠락하기 시작하여 숙종 초에 결정적 타격을 입는다. 이로 인해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 등 일파는 유배, 혹은 파직되었고, 김만중도 그 여파로 결국 삭직된다.이때부터 5~6년간 남인의 집권 중에 영의정 허적(許積, 1610-1680)의 전횡으로 숙종의 노여움을 사는 가운데 그의 서자 허견의 역모가 탄로나자 허적은 사사되고 남인의 대다수가 연좌되어 유배 또는 파직된다. 이를 경신환국였는데 그것은 농민들의 해방 투쟁과 함께 대중의 각성된 자주적 정신과 국제적인 과학 문명의 접촉에 기초하여 봉건통치계급의 사대주의적 숭맹사상과 함께 관념론적인 성리학설과 형식적인 예의 범절의 공리공담에 직접 대립하여 출현하였다.특히 거듭되는 전화 끝에 세습적 모순은 더욱 첨예화되고 양반토호들에 의한 토지 겸병의 급속한 진전과 함께 토지로부터 유리된 무장한 유민들이 횡행하였는데 이러한 절박한 민생문제는 일부 지식인들의 사회적 관심을 집중시키게 되어 사회 개혁적 사상을 잉태시켰다.또한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유럽의 선진 과학 문명이 전파되기 시작하여 지식인들의 시야를 넓혀 주었는 바 북경에 갔던 사신들을 통하여 유럽의 지도, 천문, 역학 서책들과 망원경, 자명종, 신식대포, 화약 등을 입수하게 되고 또 우리 나라에 표착한 화란인들을 통하여 조총, 대포의 제작과 조련법 등이 전수되었다.그리하여 실사구시를 표방한 실학적 학풍은 이상과 같은 당시 우리 나라의 사회 경제형편과 유럽의 선진 문명과의 접촉, 그리고 청나라의 고증학의 영향, 기타에 기초하여 선진적인 학자, 지식인들 속에서 대두하기 시작했다. 즉 지봉 이수광, 구암 한백겸, 잠곡 김육 등의 새로운 학풍을 거쳐서 의 저자인 반계 유형원에 이르러 실학의 개혁적 사상은 체계화되었다.따라서 김만중의 문학도 이러한 그의 실학적인 측면과 분리할 수 없는 바 오히려 그의 실학 사상은 다름 아닌 그의 선진적 미학 사상과 사실주의적 창작에서 구현되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2) 당쟁의 격화다른 한편으로 김만중의 가문은 서인의 노론 계열에 속하여 그가 벼슬하는 동안에 남인과의 당파싸움이 어느 때 보다 격화되었는데, 김만중도 그 영향을 입지 않을 수 없었다.17세기는 서인과 남인 세력이 힘의 견제와 균형을 이루어 붕당 정치의 기본 원리를 구현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런데 17세기 말엽에 이르러 지주·전호제의 진전에 따른 농민층의 저항이 이전과 다른 차원으로 급진전되었다. 이앙법의 전국적인 시행으로 두레조직이 한층 강화되면서 농민의 힘다.김만중은 그가 쓴 『윤씨부인 행장기』에서 자기의 유배살이에 대해 '영화로이 벼슬함이 미치고 미혹하야 화기를 밟아 대부인의 종신 근심을 끼치니' 라고 하여 그가 '미치고 미혹하야 화기를 밟았다'고 말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스스로 겸손하여 의례적으로 한 말에 불과하다. 오히려 그는 가장 맑고 참된 정심으로 숙종왕의 미혹을 깨우쳐 주려고 하였으나 나라일을 그르치며 자사자리(自私自利)만을 꾀하여 당파 싸움을 일삼는 자들과 타협하려고 하지 않았다.김만중은 비록 그의 가문이 서인 계열에 관련되어 당파싸움에 희생되기는 하였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어디까지나 불의 와 타협 할 줄 모르는 그의 공민적 입장으로 일관되었다. 그는 유배살이 에서도 자기의 입장과 주장을 굽히지 않았으며 조국의 장래와 민중의 복리를 염원하면서 국가와 대중을 안중에 두지 않고 자사자리를 일삼는 간악한 무리들을 단죄해야 한다는 사상을 자기의 창작을 통해 더욱 명확히 하였다. 그래서 본시 학자이며 작가인 김만중에게 있어서 정치적 권력에 대한 야망은 처음부터 찾아 볼 수도 없는 것이었지만 그의 공명정대한 공민적 입장으로 하여 생애의 마지막 시기에 유배생활을 당했던 것이다.3. 김만중의 작품 세계서포 김만중의 저작으로 , 등이 있으며 소설로는 , 등이 전한다. 행장(行狀)에 의하면〈채상행 採桑行〉·〈비파행 琵琶行〉·〈두견제 杜鵑啼〉등의 작품을 지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은 서포의 한문으로 된 시부를 중심한 문집이며 은 일종의 수필집인데 그의 선진적 미학 사상과 견해를 담은 것으로 특출하다.또한 에 의하면 김만중은 소설 뿐만 아니라 악부 가곡에도 능하여 무산고, 오서곡 등의 가곡을 편곡하고, 채상행, 비파행, 왕소군, 두견제 기타의 가사들을 지었다고 한다.'공은 비록 조그마한 말예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여 흉중에서 노출되는 감정이 유창하지 않음이 없다'이것은 에 서문을 쓴 삼연 김창집(金昌集)의 말인데 서포는 다방면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유학자들이 소위 『말예』라고 하여 천시하던 것을 가장 면서는 울어도, 진수의 정사〈삼국지〉를 보고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여 소설이 주는 재미와 감동의 힘을 긍정하였다. 이 때문에 그 자신이〈구운몽〉·〈사씨남정기〉같은 소설을 직접 창작할 수 있었다.서포 만필에 나타난 김만중의 문학관을 다음의 네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첫째, 감동론이 그것이다.동파지림에 이르기를 마을 아이들이 집에서 괴롭게 굴어 귀찮아지면, 아이들에게 돈을 주어 모여 앉아 옛 이야기를 듣게 한다. 를 들을 때, 유비가 패하는 대목에서는 슬픈 얼굴을 하고 눈물을 흘리며, 조조가 패하는 대목에서는 즉시 기뻐서 쾌재를 부른다고 하였다. 이것이 나관중이 를 지은 이유가 아니겠는가. 오늘날 사람들을 모아 놓고 正史 삼국지나 자치통감을 강설한다면, 눈물 흘리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이처럼 김만중은 문학의 본질적 기능이 독자를 감동시키는데 있다고 보았다. 이는 문학은 道를 전하는 것이라고 하는 載道論的 문학관에 대한 반론으로서의 의의를 지닌다. 사람의 마음이 둘이고 人心이 道心의 명령을 듣는다는 주자의 말대로 라면, 도를 전하는 삼국지나 자치통감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야 할 터인데, 사실은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소설인 삼국지연의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으므로 인심이 도심의 명령을 듣는다는 주자의 말은 진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문학은 도를 전하는 것이 아니고, 감동을 주는 것이라 보았으며 사람은 마음은 하나이고 문학 작품이 주는 감동은 하나인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고 하였다.둘째, 비평의 독자적 의의를 인식하였다. 김만중은 사물의 실제 모습을 '실상', 그와 반대로 책에 나타나 있는, 비슷하되 사실과는 다른 모습을 '가상'이라 하여, 가상을 격파하고 실상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실상론'을 강조한다. 문학을 논할 때에도, 자신의 창작경험이나 주관을 가지고 남의 작품을 보면 가상에 머무를 수밖에 없기에 비평은 객관성을 지녀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창작의 능력과 비평의 능력은 별개의 것임을 상기시키며 비평의 독자적 의다.
    인문/어학| 2003.10.04| 15페이지| 1,000원| 조회(1,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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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전문학] 춘향절 사설의 시대상 반영(열녀춘향 수절가를 중심으로) 평가A좋아요
    1. 서론소설 「춘향전」은 판소리 「춘향가」를 모태로 탄생되었다. 판소리는 광대가 소리와 발림으로 이야기를 극적으로 형상화해내는 민족 예술의 하나로 출발하여 17세기 후반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판소리라는 양식의 완성을 이룬 후에도 광대들을 비롯한 이 예술에 관심을 지닌 이들에 의하여 18세기 말에는 12작품으로 확대된다. 이러한 판소리의 성장은 대중 문화 성장기를 맞아서 새로운 판소리에 대한 대중의 성원이 높아지고, 판소리의 질적 수준을 높이려는 일부 지식층의 적극적 개입, 연행자인 광대들의 직업적 경쟁의식 등이 이루어낸 결과로 판단된다. 이즈음 판소리 「춘향가」에서 문학적 요소인 사설이 분화되어 소설 양식으로 옮겨온 것이 소설 「춘향전」이다.판소리 「춘향전」은 오랜 기간 대중 속에서 구전되어 오면서 시대나 사회의 흐름에 따라서 변형을 겪어 왔고, 여러 판본으로 문자화되어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판소리 사설에는 그 시대 사람들의 사고나 시대상이 여러 가지로 반영되고 있다.판소리계 소설은 대중성과 해학성을 가지고 당시 서민들이 일상 생활에서 제기되는 문제를 사실적, 구체적으로 다루면서 당시의 대중들의 모습 그대로 주인공이 나와서 인생의 어려움을 겪어가면서 풀어나가는 이야기여서 대중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그러므로 판소리의 삽입가요, 속담, 관용구, 고사, 한시들이 판소리계 소설에 그대로 수용되어 판소리 특유의 독창성을 가졌으며, 당시 대중들의 사고와 시대상을 반영할 수 있게 되었다.본고에서는 완판본 열녀춘향수절가를 바탕으로 하여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알 수 있는 시조, 잡가, 익살, 육담 등을 골라서 당대의 사회 현실을 유추해서 살펴보기로 한다.2. 본론「열녀춘향 수절가」를 차례대로 읽어보면서 시대상과 사회상을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을 골라서 그 시대상을 유추해서 살펴보기로 한다.우선 열녀춘향 수절가의 첫 시작하는 부분은 시대적 배경을 말해주는 역사적인 정황의 설명으로 시작되고 있다.춘향전의 배경이 되는 시대는 숙종 시대를 배경으로 하며 당시급의 신분 상승 의식과 그 변화과정을 보여주는 대목이 많이 등장한다. 이러한 것은 주인공 이몽룡과 성춘향의 설정 자체가 이미 양반의 자제와 기생의 딸이라는 관계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춘향의 절개와 사랑은 후에 결실을 맺게 되니, 대중들은 이러한 결말에서 대리적인 만족감을 얻었을 것이다.다음 대목은 이몽룡이 광한루에 가서 그네를 타는 춘향을 보고 방자를 보내어 만나기를 청하는 대목이다. 여기서는 당시의 단오날의 풍습과 춘향의 신분 인식이 보여지고 있다.< 아니다. 내가 네 말을 할 리가 없으되 네가 그르지 내가 그르냐. 너 그른 내력을 들어보아라. 계집아이 행실로 추천을 할 양이면 네 집 후원 담장 안에 줄을 매고 추천하는 게 도리(道理)에 당연함이라. 광한루 멀잖고 또한 이 곳을 논할진대 녹음방초승화시(綠陰芳草勝花時)라. 방초는 푸(르)렀는데 앞 내 버들은 초록장)초록장(草綠帳):초록색 장막.두르고 뒷 내 버들은 유록장(柳綠帳) 둘러 한 가지 늘어지고 또 한 가지 펑퍼져 광풍을 겨워)겨워:이기지 못하여.흐늘흐늘 춤을 추는데 광한루 구경처(求景處)에 그네를 매고 네가 뛸 제 외씨같은 두 발길로 백운간(白雲間)에 노닐 적에 홍상(紅裳) 자락이 펄펄 백방사(白紡紗) 속곳 갈래 동남풍에 펄렁펄렁 박속같은 네 살결이 백운간에 희뜩희뜩 도련님이 보시고 너를 부르실 제 내가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잔말 말고 건너가자.춘향이 대답하되네 말이 당연하나 오늘이 단오일이라. 비단 나 뿐이랴. 다른 집 처자들도 예 와 함께 추천하였으되 그럴 뿐 아니라 설혹 내 말을 할 지라도 내가 지금 시사)시사(時仕):아전이나 기생 등이 그 매인 관아에서 맡은 일을 치르는 것.가 아니거든 여염(집) 사람을 호래척거)호래척거(呼來斥去):사람을 오라고 불러놓고 다시 곧 쫓아 버리는 것.로 부를 리도 없고 부른데도 갈 리도 없다. 당초에 네가 말을 잘 못 들은 바라. >밑줄친 부분은 당시 여염집 규수들은 추천을 할 때에도 자기집 후원에 그네를 매고 해야 하는데 춘향은 많은 사람들이 하는 이몽룡과 방자의 태도에 격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춘향의 이러한 신분 인식은 조선 시대 후기의 신분 제도의 틀이 무너지고 하층의 신분 상승 욕구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너도 남의 집 귀한 딸이로다. 천정(天定)하신 연분으로 우리 둘이 만났으니 만년락(萬年樂)을 이뤄 보자.춘향이 거동 보소 팔자청산)팔자청산(八字靑山):미인의 고운 눈썹.찡그리며 주순)주순(朱脣):붉은 입술.을 반개(半開)하여 가는 목 겨우 열어 옥성)옥성(玉聲):고운 음성.으로 여쭈오되충신은 불사이군)불사이군(不事二君):두 임금을 섬기지 않음.이요 열녀(烈女) 불경이부절)불경이부절(不敬二夫節):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 정절.은 옛글에 일렀으니 도련님은 귀공자)귀공자(貴公子):지위가 높은 집에 태어난 젊은이.요 소녀는 천첩)천첩(賤妾):천한 계집.이라. 한 번 탁정)탁정(托情):정을 맡김.한 연후에 인하여 버리시면 일편단심(一片丹心) 이내 마음 독숙공방(獨宿空房) 홀로 누워 우는 한(恨)은 이내 신세 내 아니면 누구일꼬)원문엔 뉘가 길고' 즉, 누가 그 사람일꼬로 되어 있음.그런 분부 마옵소서. >윗글은 이몽룡과 만난 춘향은 이몽룡이 연분을 맺자는 말에 자기 감정에 빠지기 보다는 이성적으로 자신과 이몽룡의 신분차이에 대해서 인식을 한다. 이는 앞에서 춘향이 자신을 기생으로 생각하지 않으나, 현실적으로 이러한 신분적 제약을 극복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름을 보여준다.아래의 월매의 대목에서도 이러한 신분적 차이에 대한 인식이 보여진다.< 말씀은 황송하오나 들어 보오. 자하(紫霞)골 성참판(成參判) 영감)영감(令監):종이품(從二品), 정삼품(正三品)의 관원을 부르던 말로 대감(大監) 다음가는 관원의 존칭.이 보후)보후(補後):내직(內職,조정에서 근무하는 벼슬)에 들어가기 전에 임시로 외관(外官)을 맡는 일.로 남원에 좌정하였을 때 소리개를 매로 보고 수청)수청(守廳):높은 벼슬아치 앞에서 시중드는 일.을 들라 하옵기로 관장(官長)의 영을 못 어기어 모신 지 삼삭(三朔)만으로서 임금과 신하, 어버이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곧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鋼).뉘라서 내 딸이라 하리요. 가세(家勢)가 부족하니 재상가(宰相家) 부당(不當)이요 사서인)사서인(士庶人):사대부와 서인. 곧 관리와 농공상인(農工商人)상하불급)상하불급(上下不及):위아래에 다 미치지 못함.혼인이 늦어가매 주야로 걱정이나 도련님 말씀은 잠시 춘향과 백년기약한단 말씀이오나 그런 말씀 말으시고 놀으시다 가옵소서. >이몽룡이 춘향의 집에 찾아가서 월매에게 혼인하기를 청하는 대목인데, 당시의 신분과 혼례 제도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당시에는 신분의 구별이 엄격하여 반상과 적서에 따라서 혼인이 엄격히 제한되고 있었다. 양반이 첩을 두는 것은 비교적 흔한 일이었지만, 조선시대에 법적으로 엄연히 일부일처제 사회였고, 서출들은 혼인이나 관직 진출 등에서 차별과 제약을 받았다. 양반의 자제인 이몽룡과 서녀이자 기생의 딸인 춘향은 엄연히 신분상의 구별이 있었으므로, 이몽룡이 춘향과 혼인하기를 청하자 월매는 위와 같이 신분의 차이를 말하여 이몽룡이 청을 거두어 주기를 말하고 있다.본인들의 마음보다는 서로 가문과 신분에 의하여 혼인이 이루어졌던 당시의 제도를 생각해 본다면. 이러한 이몽룡과 춘향이 사랑이 앞으로 많은 험난한 앞날을 예고하고 있음은 짐작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언제는 남원 땅에서 평생 살으실 줄로 알았겠소. 나와 어찌 함께 가기를 바라리요. 도련님 먼저 올라가시면 나는 예서 팔 것 팔고 추후(追後)에 올라갈 것이니 아무 걱정 말으시오. 내 말대로 하였으면 군색잖고 좋을 것이요. 내가 올라가더라도 도련님 큰 댁으로 가서 살 수 없을 것이니 큰 댁 가까이 조그마한 집 방이나 두엇 되면 족하오니 염탐)염탐(廉探):남몰래 사정을 조사함.하여 사 두소서. 우리 권구)권구(眷口):한집에 같이 사는 식구.가더라도 공밥 먹지 아니할 터이니 그렁저렁 지내다가 도련님 나만 믿고 장가 아니갈 수 있소. 부귀영총)부귀영총(서울로 가는 아버지를 따라서 이몽룡이 남원을 떠나게 되자, 백년가약을 맺은 춘향이 기꺼이 따라가겠다 말하는 대목이다. 여기서 당시에 사대부 양반은 작첩을 하더라도 첩을 집에 들이지는 못하고 근처에 집을 하나 얻어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양반이 첩을 얻는 일이 비교적 많이 이루어지기는 하였으나, 이러한 일이 드러내 놓고 이루어지는 일은 아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는 공공연히 첩을 두면서도 적서의 차별 또한 매우 엄격했던 것과 연관해 생각해 볼 수 있다.다음으로는 당시 관리들의 부패상을 비판하고 폭로한 대목을 찾아보기로 한다. 특히 춘향전에서는 암행어사가 사또의 생일잔치에서 시를 짓는 대목이나 생일 잔치에 암행어사가 출두하자 관리들이 허둥지둥하는 모습에서 지배층에 대한 풍자와 비판 의식이 뚜렷이 드러아 있다.춘향을 데려오라는 명을 받고 춘향집을 찾아간 번수는 주안상을 대접받고 돈 다섯냥을 받은 후에 춘향의 집을 그냥 나온다.< 김번수며 이번수며 여러 번수 손을 잡고 제 방에 앉힌 후에 향단이 불러주반상 들여라.취토록 먹인 후에 궤문 열고 돈 닷냥을 내어 놓(으)며여러 번수님네. 가시다가 술이나 잡숫고 가옵소. 뒷 말 없게 하여 주소.사령 등이 약주에 취하여 하는 말이돈이라니 당치 않다. 우리가 돈 바라고 네게 왔냐.하며들여 놓아라.김번수야. 네가 차라.불가(不可)타마는 입 수(數)나 다 옳으냐.)돈이 사람 수에 걸맞게 적당하냐라는 뜻.돈 받아 차고 흐늘흐늘 들어갈 제 행수기생)행수기생(行首妓生):기생의 우두머리.이 나온다. >밑줄친 대목에서 사또의 명을 받은 번수들은 술과 뇌물을 받고 그냥 춘향의 집을 나온다. 물론 춘향의 사정이 딱함을 이들도 알고 있었으며, 사또의 명으로 어쩔 수 없이 춘향을 데리러 간 것이기는 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월매가 내미는 뇌물을 거절하지 않고 오히려 돈이 사람 수에 맞는지 확인을 하는 등 하급 관리들에게도 이러한 뇌물의 풍토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네째 낱을 딱 붙이니사대부 사또님은 사민공사)사민공사(四民公事):봉건사회의 보인다.
    인문/어학| 2001.10.31| 12페이지| 1,000원| 조회(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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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어학]아래아 순경음비읍 변천 평가A좋아요
    1. 서론국어는 아득한 옛날부터 배달 겨레가 의사 소통과 문화 창조를 위해 사용해 오는 동안 음운, 어휘, 문법, 표기 등 국어의 전 분야에 걸쳐 끊임없는 변화를 겪으면서 오늘에 이르렀다.훈민정음(한글)이 창제된 지 552년이 되었고, 반포한 지 549년이 되었다. 훈민정음 당시의 엄격했던 표기 원칙이 차츰 문란해져 오다가 1933년에야 현대 맞춤법이 정리되었으며 오늘날과 같은 국어 표기법의 기본 체계가 갖추어졌다.현대 맞춤법은 크게 보아 소리대로의 적기와 형태소 중심의 적기, 이 두 가지로 나뉘며, 엄격하게 보면 이 두 가지 적기 방법을 절충하고 있다 하겠다.한글은 창제 후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국어의 변화와 함께 시대에 따라 변화를 겪어 왔고, 그 과정에서 음운과 문자의 변천도 겪어 왔다. 그 중에서 'ㆍ'와 'ㅸ'의 변천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2. '아래아(ㆍ)'의 변천'ㆍ'의 음가는 '아'와 '오'의 중간에서 나는 소리라고 한다. 'ㆍ'는 2단계에 걸쳐서 음가의 변화를 겪었는데, 제 1단계로 15세기 중엽부터 단어의 제 2 음절 이하에서는 주로 ㅡ'로 바뀌게 되었는데, 그러한 변화의 확립은 17세기 초였다. 2단계로 'ㆍ'의 음가가 변화한 것은 18세기 말경으로 제1음절에서 ㅏ'로 바뀌게 된다.그러나 글자는 금방 사라지지 않아서 20세기 초까지도 발음과는 상관 없이 그대로 사용되다가, 1933년에 의 제정과 함께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즉 'ㆍ'는 그 음가의 소실과는 상관없이 오랫동안 문자로써의 사용되다가 현대에 와서 폐지된 것이다.먼제 'ㆍ'음의 1단계 소실에 대해서 살펴보자.제1단계의 소실은 비어두 음절에서의 소실이었다. 이 제1단계의 소실은 15세기에 싹터서 16세기에 와서 완성되었다. 그 변화 공식은 'ㆍ> ㅡ'였다. 그 예로는 까링치->까르치-(敎), 힝밑며>힝믈며(況), 다링->다르-(異), 기링마>기르마(鞍), 말밑>말밑(由), 밑힝>밑잎>밑을(邑), 밑힝>밑잎>밑음(心) 등이 있다.이중 까링치->까르치->가르치-(敎), 힝밑며>힝믈며>하믈며>하물며(況), 밑힝>밑잎>밑을>마을(邑), 밑힝>밑잎>밑음>마음(心)에서 처럼 한 단어 안에서 제 1단계와 2단계의 음운 변화를 연차적으로 보여주는 경우도 있다.특리 다리(橋)-딪리(脚), 말(言)-밑(馬)처럼 15세기에는 'ㆍ'와 'ㅏ'가 구별되어 뜻을 구별했지만 16세기에 와서는 이러한 구별이 제 2음절 이하에서는 사라지게 된다.결국 제 1음절에서의 'ㆍ'음가의 변화는 훈민정음 창제초인 15세기 중엽부터 이미 있어온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유를 훈민정음의 모음 제자 원리에서 찾아볼 수 있다. 훈민정음이 제정될 때 음양설에 따라 제자 원리와 표기법을 만들게 되었고, 다시 몽골 문자의 강력한 음양 대립 이론도 참고하여, 우리 문자 제작에도 음양 대립에 의한 체계를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즉 [a]와 [e], [o]와 [u] 소리를 양성과 음성의 대립 모음으로 파악하고, 문자도 'ㅣ', 'ㅡ'를 기준으로 좌우·상하로 대립하는 자형을 만들게 된 것이다. 다시 [ ] 음을 반영하는 문자로 'ㅡ'를 만들었으나, 음양설의 처지에서 이에 대립하는 문자가 필요했기에 'ㆍ'가 제정되었고, 또 중성 모음 글자 'ㅣ'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렇게 본질적으로 그 음가의 숙명적인 불안정성으로 인해 제정 당초부터 'ㆍ'는 'ㅡ'와 혼란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고, 'ㅏ'의 변이음 또는 방언음 표기를 담당했던 제1음절의 'ㆍ'는 어쩔 수 없이 'ㅏ'(또는 'ㅡ', 'ㅗ')와의 혼란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어두 음절에서 'ㆍ'가 다른 모음으로 변한 경우도 있는데, 최초의 예는 '흙(
    인문/어학| 2001.10.31| 7페이지| 1,000원| 조회(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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