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정원1. 정원이란?2.정원의 기능(현대인에게):3.일본정원의 특징*심리적 요인을 바탕으로 한 정원의 시초는 미술이다.*산업화와 정원:*바다를 동경한 일본정원(신비와 미학을 담은 일본의 자연):*일본정원의 기본골격*일본 정원의 종류(일반적으로):*경관조성을 위한 정원 조경사들의 3가지의 기본 원칙:*거대한 자연을 생활공간으로 이끈다.*일본정원의 구성요소:*우주정원을 꿈꾸는 사람들*시대별로 알아본 일본정원의 특징적 변천사*주변국인 한국, 중국과의 비교를통한 일본정원의특징:일본의 정원1. 정원이란?흙·돌·물·나무 등의 자연재료와 인공물 및 건축물에 의해 미적이고 기능적으로 구성된 특정한 구역.2.정원의 기능(현대인에게): 건축이 실내 생활 공간인데 반해 옥외 생활 공간이다.①심신의 피로를 회복하기 위한 휴식의 장소②건강을 위한 체력단련의 장소③어린이들의 놀이 장소=>·주택의 외부공간을 실용적, 미적으로 처리한 것·주거문화의 반영·한 사회와 시대의 생활문화가 가치체계 및 예술이 총체적으로 결집하는 장소3.일본정원의 특징*심리적 요인을 바탕으로 한 정원의 시초는 미술이다.-정원문화는 일본의 대표적인 특징가운데 하나이다.-일본의 정원을 화가의 캔버스에 담긴 그림에 비유해 본다면 나무와 바위, 그리고 인공적인 작은 언덕과 물을 소재로 한 한 폭의 수채화라 말할수 있다. 이는 실제로 맨 처음 일본의 정원은 일본화를 그리던 화가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뜰이라고 하는 캔버스위에 그려진 사생화인 것이다.-인간은 자연을 요구하는 심리를 가지며 그러한 심리적 욕구에 의해 정원이 만들어졌다.=>그것은 정원이 사람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자연공간이기 때문이다.*산업화와 정원:-사회가 산업화되어 갈수록 자연은 그와 반비례하여 파괴되어 간다.=>일본에서는 이미 나라 시대 때부터 인구과밀현상이 나타나 새도시를 건설하는 대규모작업이 진행되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자연은 거의 손실되어 녹지를 찾아 볼 수 없었다고 한다.일본인들은 이때부터 스스로 없애버린 녹지를 찾고자 하였으며, 헤이안 시대외국에 갈 때 바다를 통해야만 가능했는데, 그들에게는 그러한 멋진 해양풍경이 육지에 살면서도 언제나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고대인들은 바다건너에 이상향이 있다고 믿었고, 그 바다의 경치를 정원에 꾸미기를 즐겼다.=>그래서 일본의 정원에는 연못이 있다. 그리고 연못 가운데 돌을 놓아 섬을 만들었다. 그들이 옮겨다 놓은 자연은 일반적인 풍경이 아니다. 후지산과 같은 명승지를 모사 하여 압축시킨 것이다.-돌은 광대한 자연, 넓은 바다와 산하를 압축시키는 정신이며 방법이다.=>그래서 일본정원의 특색은 돌에 귀결된다.-파도치는 해안의 모습을 어떻게 돌로 표현하는가 하는 것은 그들에게 그다지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돌을 놓는 기법에 따라 물의 흐름도 자유롭게 나타난다.-물과 나무를 사용하지 않고 돌과 모래로 자연을 표현하는 이러한 세키데이石庭양식은세계적으로 알려진 일본정원의 걸작이며 또 하나의 상징이다.=>무로마치시대의 선사에서 비롯되는 세키데이양식은 자연의 무한한 세계를 깎고 생략하고 응집시켜 더 이상 성장하지도 않는 공간화 된 모습으로 좁혀지는 것이다.-세키데이양식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생물을 제거해 버리고 마지막까지 남는 무생물인 돌과 모래만으로서 자연을 표현한다.=>그러므로 나무가 울창한 산이나 풀이 없어도 자연의 세계는 몇 개의 바위로 교묘하게 재현된다.-정원에 한 그루의 나무도 심지 않는 것은 기발한 착상같으나 , 료안지龍安寺의 정원을 보고 있으면 결코 그것이 우연에서 비롯되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다.=>거기에는 파도치는 바다가 조각되어져 있다. 그리고 빗자국이 남긴 가느다란 선 속에 동경된 파도가 있다. 세키데이의 자연은 먼 곳에 있는 자연이 아니다.=>뜰 안으로 들어온 변형된 거대한 자연이다.*일본정원의 기본골격: 바위와 그 바위가 모여있는 방식에 따라 출발한다.-고대 일본인들은 바위로 둘러싸인 곳에 신이 살고있다고 믿었으며 이 곳을아마츠 이와사케(천국으로가는 관문), 또는 아마츠 이와쿠라(천국의 자리)라고 불렀다.-울창한 나무숲은 히모로기(신의평지정원): 언덕과 연못이 없는 정원. 다도의식과 ‘차시츠’(茶室-다도방)가 전래되면서 더욱 인기를 끌게되었다. ex)제한된 공간*경관조성을 위한 정원 조경사들의 3가지의 기본 원칙: 규모의 축소, 상징화, 경치의 차용1.규모의 축소: 산과 강의 자연적 경관을 축소하여 만듦으로서 제한된 공간에 모두 재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이는 도시 안에 산간마을의 경관을 창조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2.상징화: 예를 들자면 흰모래가 바다를 상징하는데 쓰이는 것과 같은 추상성을 뜻한다.3. 조경사들은 정원 뒤 또는 주위의 배경경관을 이용하여 그 경치를 차용하는데 이는 경관조성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거대한 자연을 생활공간으로 이끈다.-옛날부터 일본인들은 거대한 자연을 자기 집 앞마당으로 끌어들이려는 꿈을 꾸어 왔다. 집안에 자연 세계를 들여놓는 일본의 폐쇄성, 작위성, 축소지향성 등이 잘 드러나 있다.=>그래서 그들은 정원이라는 형태를 빌어 그 꿈을 실현 시켰다. 자연 중심적인 생활을 영위하면서도 일본인들은 자연을 찾아 밖으로 나가지 않고 밖에 있는 거대한 자연을 줄로 묶어 끌어다 놓는다는, 다분히 문학적인 상상력을 실제 생활 속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일본의 정원이다.*일본정원의 구성요소:-일본의 정원은 그것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을 공간적인 미적 감각에 맞추어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만들어졌다.=>따라서 작은 공간의 정원이 비례를 교묘하게 사용함으로서 매우 광대한 자연의 경치처럼 보이도록 창조되기도 한다.-일본인들의 세계에서는 자연 어디에나 신이 존재한다고 강조한다.=>그래서 일본의 산천초목에는 그들의 신이 있는 듯 하다. 이것은 일본적인 해석이지만 대승불교의 범신론과도 통한다.*우주정원을 꿈꾸는 사람들-일본의 자연은 신비를 담은 독특한 미학으로서의 그것이다.-복합구조의 현대산업시대에 이르러 일본의 정원은 그 앙증스러운 모습으로 현대인들에게 특이한 위안제가 되어주기도 하기에 어느 사이엔가 공장 안 작업대의 한 귀퉁이에는 분재와 수석으로 꾸며진 쟁반정고야 말 것이다.*시대별로 알아본 일본정원의 특징적 변천사*최초의 정원: (아스카 시대(飛鳥時代 593∼710)와 나라시대(奈良時代710∼794))-야마토(大和) 지방(현재의 나라(奈良)현)의 왕족이나 권력층의 조경사들은 섬이 있는 큰 연못을 만들어 바다경치를 묘사했다.=>불교가 한반도를 거쳐 대륙으로부터 전래된 때도 바로 이시기이다.-대륙에서 온 이주자들은 일본 정원에 대륙적 요소를 도입하였는데 중국식의 돌분수와 석교(石橋)가 그 예이다.*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794∼1185):(794년에 수도가 나라에서 교토로 바뀌면서 시작)귀족가문인 후지와라는 그들의 권력을 강화하고 전통예술과 문화를 발달시켰다. 이러한 귀족계층들은 신덴-즈쿠리(寢殿造り) 형식의 사치스런 저택에서 살았는데 이 시대의 정원 또한 매우 호화로웠다.- 몇 개의 강이 교토에서 합쳐지는데 교토사람들은 도시의 여러 곳으로 물이 흐를 수 있도록 수로를 팠다. 교토의 여름은 덥고 습도가 높아서 사람들은 시원함을 느낄 수 있는 폭포와 연못을 좋아하였다. 따라서 야리미즈(遣り水)라고 불리는 개울이 건물과 저택의 정원사이에 흘렀다. 이러한 후나 아소비(船遊び)형식의 정원에는 종종 보트를 탈 수 있을 만큼 큰 타원형의 연못이 있었는데, 물위에 설치된 천막건물이 낚시를 편하게 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저택의 다른 건물들과 통하는 복도도 있었다.-주 건물과 연못사이의 넓은 공간에는 하얀 모래가 깔려 있었는데 이곳은 의식행사를 치르기 좋은 아름다운 곳이었다. 또 다른 정원으로는 사람들이 각각 자기위치에서 다른 경치를 즐기며 산책할수 있는 슈유(周遊-산책) 형식의 정원이 있다. 이러한 정원에는 종종 헤이안(平安), 가마쿠라(鎌倉), 무로마치(室町) 시대의 사찰이나 큰 저택이 있다. 무로마치 시대의 승려 무소 소세키가 만든 교토의 사이호지(寺)의 정원은 전형적인 산책형식의 정원이다. 이 정원은 배경의 산을 이용하여 연못이 자연적으로 조화되도록 디자인되었다.*10세기 귀족계층들은 점차 불교의 관습에 심취했다.-조우도(뵤도인(平等院)의 정원[우지(宇治 - 교토 근교)에 있는 절]은 후지와라 노미치나가라는 권력자의 시골집이다. 또한 상류계층이 정원에 흥미를 가진 까닭에 정원들은 수많은 작품의 주제가 되기도 했는데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는 타치바나 노 토시츠나(1028-1094)가 쓴 사쿠테이키(정원조경에 대한 논문)가 있다.*가마쿠라 막부시대(鎌倉幕府 1185∼1333년):(중국의 선종의 영향을 받은 무사계급이 성장함)-주택과 정원의 양식이 변화.집안에서 정원을 감상하는 것을 더 즐겼는데 [정원에서 화려한 의식을 치르는 것은 무사들의 관습이 아니었다] 그에 따라 정원도 그들의 시각적인 흥미를 끌만한 형식으로 디자인되었다. [바로 이시기에 조경사와 이시타테소(직역하면 바위를 배치하는 수도사)가 등장함]*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 1333∼1568): 일본정원의 황금기-카레산스이(枯山水-돌과 모래로만 산수를 표현한 정원)는 센즈이 카와라모노(산, 도랑, 강바닥을 만드는 사람들)라고 불리던 숙련된 장인집단이 선종의 영향을 많이 받은 이러한 정원들은 매우 추상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는데 바위들은 산과 폭포를, 흰모래는 유수를 표현하는데 쓰였다. 민둥산 과 건조한 강바닥을 그린 중국 수묵풍경화의 영향을 받았다.ex) -료안지(龍安寺) [교토에 있는]: 15개의 바위와 평지의 흰모래로 꾸며진 이곳은 평지정 원의 전형적인 예로 바다, 호수 연못 등이 주제이며 돌, 나무, 석등, 물동이, 우물 등 으로 이루어져있다.-다이토쿠지(大德寺)의 바위 정원-도코노마(床の間 - 베란다), 치가이다나(違棚 - 흔들이는 선반), 후스마( -종이 미닫이문)[쇼인 즈쿠리(書院造り)라는 건축양식의 영향을 받은] :오늘날 일본 가옥의 원형이 됨.-칸쇼(感想) 또는 자칸(관조라고 불리는 형식의 정원은 마치 그림처럼 아름다운 쇼인 즈쿠리형식의 건물에 있는 방인 쇼인(書院 )에서 감상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고요한 정신세계가 깃들어 있는 다도 정원은 센 노 리큐(1522∼1591)가 가르친 다도의식과 함께 발달하였다. 인공되었다.
마코토(まこと)마코토(まこと)는 고대 시대의 미적 이념으로서 근세 초기에 상대(上代)가 의식되면서 논의되기 시작한 문학이념이다. 아무런 거짓 없는 사실을 표현한다는 면에서 고대에 있어서 마코토(まこと)는 문학이념이라기보다는 윤리적, 종교적 이상으로 파악될 수도 있으나, 문학적 의미에서 마코토(まこと)는 예술적 사실성을 표현하기 위해 소박하고 순진한 가풍을 이상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에서 마코토(まこと)란 이념을 찾아보기엔 거의 힘든 일이 되고 말았다. 다행이 문예개념으로서의 마코토(まこと)를 가론의 이상으로 적극적으로 주장한 것을「고긴와가슈(古今和歌集)」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905년에 편찬된 일본 최초의 칙찬집(勅撰集)인「고긴와가슈」에는「기노쓰라유기」가 쓴 가나서문과「기노요시모지」가 한자서문에 거의 같은 해석으로 마코토(まこと)가 나와 있다. 두 문헌에 따르면 깊은 감동에서 우러나는 심정, 상상이 아닌 실감, 진정, 성실성, 사실에 정대하는 마음가짐 등을 뜻하고 있다.이 후에 마코토(まこと)는 크게 두 사람에 의해서 계승되게 되었는데 「우에지마 오니쓰라(1661~1733)」와「마쓰오 바쇼(1644~1733)」이다. 이 두 사람은 거의 동 시대에 살았으나 양자간에 직접적인 교류는 없는 것 같고, 양자가 표방하는 이상인 "마코토(まこと)"도 지향하는 바에 차이가 있다.오니쓰라의 마코토(まこと)는 배인(俳人)의 정감의 진솔성과 인간심성의 성실성이라는 다분히 윤리적이고 심정주의적인 색채가 강하다.이에 비해 바쇼의 마코토(まこと)는 심정의 마코토(まこと)를 물(物)과 합일(合一)이라는 점에서 보고 있는 것 같다. 즉, 바쇼에 의하면 사의(私意)를 배제하고 물(物)과 일여(一如), 일체(一體)가 되었을 때 마코토(まこと)의 하이까이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후에「마쓰오 바쇼」의 마코토가 받아들여지게 되는데 일본의 전통적 시가론에서는 마코토(まこと)를 감동과 언어, 즉 심정과 시어의 측면으로 보았으며 이는 불교의 영향에 의한 유식론적(唯識論的) 심정주의(心情主意)가本相)을 작자의 주관적 사의(私意)를 벗어나서 직관하는 것이 마코토(まこと)라고 해석할 여지가 충분히 있다. 하이까이는 작위적(作爲的)으로 창작하는 것이 아니고 작자의 뜻과 지향성(志向性)을 배제하여 물의 본성과 합일하였을 때 자연스럽게 성립되며, 이를 꾸밈없이 언어로 형상시키는 것이 마코토(まこと)의 하이까이이다. 그리하여 물(物)과 마음(心)과 언어의 성실성이 가능하며 따라서 「마쓰오 바쇼」의 마코토(まこと)는 위 삼자의 통일적인 세계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이제 마코토(まこと)의 이념이 가장 잘 나와 있는 만요슈 (萬葉集)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만요슈 (萬葉集)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가집(歌集)으로 구분은 가집(歌集)으로 나눌 수 있다. 시대는 일본(630년대~760년대)으로 만뇨슈라고도 한다. 여기에 수록된 노래는 4,536수이며, 그 중에서 장가(長歌) 265수, 단가(短歌) 4,207수, 기타 64수로 되었다. 이 가집은 오래 되었을 뿐만 아니라 문학적으로도 높이 평가되며, 일본사상사(日本思想史) 및 생활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이다. 그 성립 시기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설(說)이 있어 확실하지 않으나, 대체로 630년대부터 760년대까지 약 130년간에 걸쳐 가장 많은 작품을 만들었으며, 이 시기를 "만요슈 시대"로 본다. 이 가집은 일관된 방침 아래 한 사람 또는 몇 사람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역대 선인들의 뒤를 이어 보충 및 정리된 것으로 이름이 밝혀진 작자만도 수십 명에 이르며, 성명 미상의 작자도 수십 명이다.시기별로 중요한 작가들을 들면, 제1기에는 덴무천황[天武天皇]의 비(妃)인 누카다노 오키미[額田王], 제2기에는 가키노모토노 히토마로[枾本人麻呂], 제3기의 야마노우에노 오쿠라[山上憶良], 제4기의 오토모노 야카모치[大伴家持]에 이르러 종합 및 정리되었다.이 가집의 특징은① 오랜 세월에 걸쳐 위로 천황에서부터 아래로는 서민, 한량에 이르기까지 작자가 각양각색이므로 고대인들이 가졌던 즉흥적이고 의욕적인 힘, 즉 섬약한 아 방대한 양도 그렇지만 '만요가나'(萬葉假名) 표기가 좀처럼 완전한 해독을 허용하지 않았다. 언제나 새로운 해석의 장이 열려있어 연구의욕을 자극하지만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기는 어렵기 때문이다.만요슈 해독의 어려움은 비슷한 시기에 흡사한 방법으로 씌어진 향가 해석의 어려움에 미루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향가는 겨우 25수만 남았지만 '양주동' 박사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전체적인 해독이 이뤄졌다. 물론 그 후에도 새로운 해석이 끊이지 않고 있어 정확한 해독은 여전한 과제로 남아있다. 만요가나는 향가를 표기한 향찰이 '선화공주님은'(善花公主任隱)이라고 썼듯 한자의 소리와 뜻을 빌려 적었다. 시기에 따라 한자음이 변화가 있기는 했지만 그나마 '아메'(阿米촹하늘)나 '고코로'(許己呂촹마음)처럼 한자의 소리를 빌린 표기는 해독이 비교적 쉽다. 한자의 뜻을 빌린 표기의 해독은 암호풀이에 가깝다. '구니'(國촹하늘)나 '도후'(問촹묻다)처럼 한자의 원뜻이 굳어진 것은 곧바로 풀리지만 한자 하나가 여러가지 뜻을 가진 경우 과연 어떤 뜻으로 표기한 것인지 애매해진다. 더욱이 장난기 섞인 표기도 지뢰처럼 깔려있다. '시시'(獅子)라고 쓰면 될 것을 일부러 '十六' 라고 써서 읽는 사람이 '4?=16'에 착안해 '시시'(四四)로 읽도록 하거나 '이즈'(出)를 '산 위에 또 산이 있다'(山上復有山)고 '김삿갓'처럼 쓴 예도 있다. 일일이 암호를 풀 듯 260여수의 장가(長歌)를 포함한 4,500여수를 읽어내는 작업이니 어려움이 클 수밖에 없었다. 물론 현재 남아있는 판본은 한자로만 씌어진 원본이 아니라 편찬자들이 원본의 한자 옆에 가나로 읽는 법을 달아둔 필사본이다. 그러나 10세기 이후 잇따라 만들어진 이런 필사본은 해독의 실마리에 지나지 않는다. 가나로 씌어진 풀이가 현재의 모습과는 상당한 거리가 먼 옛말, 옛글이고 같은 노래를 필사본마다 다르게 풀이한 것도 걸림돌이다.893년에 첫 신찬본을 만들면서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眞)가 "만요슈는 옛 노래여서 이미 읽을 수 없게 이 끊겼다. 만요가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향찰이 고려시대 들어 쇠퇴했던 과정을 연상시킨다. 시가 해독이 어렵다 보니 만요가나가 일본어 표기수단이라는 기본가정을 버리고 아예 한국어로 해석하려는 시도도 이뤄지기도 했다. 편찬 당시 한반도계 도래인이 지배층을 형성한 만큼 한국어를 표기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는 흥미로운 시도였지만 8세기 당시 한국어의 모습을 제대로 복원하지 못하는 근본적 한계에 부딪혀있다. 현재의 경상도 사투리, 그것도 반쯤은 욕설로 해독해 대중적 인기를 끈 예도 있지만 언어와 역사에 대한 상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실소를 금할 수 없는 내용이다. 한반도계 도래인의 대부분은 가야와 백제계가 차지했다. 가야와 백제어의 연관성은 깊었고 경남 지역이 가야의 중심무대였으며 사투리에는 비교적 옛말의 흔적이 진하다는 점에서 경상도 사투리로 가야어의 모습을 더듬어보았다고 이해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고대어에 대한 지식을 보여주지 못해 '장님 코끼리 더듬기'에 머물렀다. 태반을 음담패설로 해독, 세계적 문화유산으로 떠받드는 일본인은 물론 만요슈 편찬에 깊이 관여한 한반도계 도래인까지 웃음거리로 만든 것은 악취미 치고도 심할 정도였다.오랜 세월 불린 노래를 모아 길에 후세에 전한다는 뜻에서 붙은 만요슈라는 이름이나 궁중의례 등 공식행사에서 불린 노래가 많다는 것도 사실과도 맞지 않는다. 만요슈의 시가에 대한 일본의 사랑은 이후의 보다 세련되고 정형화한 시가와는 달리 소박하고도 웅장한 기풍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역대 필사본을 통해 언어 변화를 추적할 수 있는 자료의 보고이기도 하다.다음은 만요수에 있는 몇 가지의 시가에 대해서 알아보고 감상을 해 보도록 하겠다.1. 枾本人麻呂君がため 手力疲れ 職りたる衣ぞ春さらば いかなる色に 摺りてば好けむ당신을 위해 팔 아프게 짠 옷입니다.봄이 되면 어떤 색으로 물들이면 좋을까요.사랑과 정성이 듬뿍 담긴 작품이다. 남편에 대한 아내의 사랑과 남편에게 새 옷을 입게 해 주는 아내의 기쁨이 잘 나타나 있다. 남편을 위해 정성껏 분위기 속에, 스산하게 불어오는 바람소리와 바람결에 대나무들이 부딪히는 소리들이 마치 들려오는 듯 생생하게 느껴진다. 시인의 운치 있으면서도 다소 고독한 심정이 느껴지는 것 같다.3. 物部古麻呂わが妻も にかきとらむ 假もが旅行く吾は 見つつしのはむ아내의 그림을 그릴 정도의 시간만이라도 있었으면길을 떠나는 나는 그것을 보며 아내를 그리워 할 텐데.九州지방을 지키기 위해 갑작스럽게 떠나게 된 남편이, 그리운 아내의 얼굴을 그림으로라도 그려서 간직하려고 하나 갈 길이 너무나 촉박하기만 하다. 남편의 아내에 대한 진솔한 사랑과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잘 나타나 있는 작품이다.이처럼 만요슈의 시가들은 자신들의 사랑을 과감히 표현하고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사실적인 물(物)의 표현으로서 나타나 있다.다음으로 만엽집의 이야기 중에서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던 이야기와 만엽집에 관계된 장소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① 일본의 견우와 직녀 이야기 - 타나바타일본의 7월 7일을 '타나바타'라고 한다. 중국의 칠월칠석 전설이 일본에 전래된 것은 나라시대라고 하며, 일본의 가장 오래된 시가집인 만엽집(万葉集)에는 실제로 약130수의 타나바타 노래가 있다. 이 노래의 전부가 남자와 여자의 사랑 이야기를 읊고 있다. 만엽집(万葉集)에 실려 있는 타나바타 노래 가운데 작자불명의 노래가 있는데, 여기서 어떤 내용으로 일본화 되었는지 대략 알 수 있다.[태초에ㅡ'天地の初めの時'] 라는 신화풍의 단어로 시작하여, 하늘의 강을 사이에 두고 애태우고 있는 견우가 가을바람 부는 7월 7일 밤에 배를 장식하고 강 건너 직녀가 있는 곳에 가서 일 년에 한번 소원을 이룬다고 씌어져있다. 이것은 오늘날 전해지는 타나바타 전설과 그 내용이 같다. 그러나 중국의 전설에는, 하늘의 강을 건너는 것은 직녀이고, [까치다리]를 건넌다고 되어있는 등 부분 부분 다른 곳이 보인다.타나바타 축제는 원래 음력 7월 7일에 행해지는데 지방에 따라서는 8월 7일인 곳도 있다. 타나바타 축제를 단순히 '별 축제'라고 생각하기한다.
한국경제의 현단계와 전망I. 한국 금융위기의 원인한국에서 발생한 금융 위기는 경기 침체, 경상 수지 적자 등 실물 경제의 악화뿐만 아니라 동남아 외환 위기, 국제 금융 자본의 신흥 시장 이탈 등 대외적 환경 요인, 그리고 정부의 위기 관리 능력 부족과 국민의 거품 소비 등 총체적인 요인의 결정체였다. 더 나아가서는 한국의 경제 발전 전략 측면과 생산성 측면 등 금융 위기를 초래하게 된 근본적인 요인이 존재한다. 이와 같은 금융 위기의 원인을 요인별로 상세하게 살펴보고자 한다.(1) 대내적인 원인1) 국내 기초 경제 여건의 악화외환 위기가 발생하기 이전에 경제 성장률이 둔화하였고 대기업의 부도율이 증가하였으며 교역 조건은 악화되었었다. 그리고 세계 반도체 시장의 가격 폭락으로 인한 경상 수지 적자폭의 확대, 금융 기관의 부실채권 누적증가 등으로 인한 기초 경제 여건 악화 등의 조짐이 나타났다. 또한 적절한 금융 감독 기능이 없는 상황에서 대기업의 부도와 금융 기관의 부실화는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원리금 상환에 대한 우려를 증폭시켜 경쟁적으로 투자 자본을 회수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한국의 외환 위기 이전의 주요 거시 경제 현황{연 도지 표1986∼91199219931994199519961997GDP 성장률(%)소비자물가 상승률(%)경상 수지(10억 달러)경상 수지/GDP(%)외채(10억 달러)교역 조건(1995=100.0)9.96.14.13.039.15.16.3-3.9-1.342.85.84.81.00.343.98.66.2-3.9-1.056.98.94.5-8.5-1.978.4100.07.14.9-23.0-4.7157.587.75.54.5-8.6-1.9154.477.2자료 : 한국은행2) 지나치게 높은 단기 외채, 환율 정책 실패 및 해외 투자자의 자금 회수한국은 외채 수준, 특히 단기 외채 수준이 매우 높았고, 환율이 고평가 되어 있어서 국제 환투기자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해외 기관 투자가들은 한국의 주식 시장에서 자금을 급격히 회수해 감으로써 외환 위기를 외국인 투자가의 심리적 효과 뿐만 아니라 한국의 외환 보유고 상황 및 외신보도에 의해 증폭되었기 때문이다.1990년대에 선진 금융 기관들은 일본의 버블 붕괴 후의 초저금리, 멕시코의 통화 위기 등으로 마땅한 대출선을 찾지 못하자 아시아 시장으로 눈을 돌려 아시아 지역으로 국제 자본이 크게 유입이 되었다. 이 당시 아시아 지역에 대한 신규 여신 총액은 1992∼1996년 기간에 2배 이상 증가하였다. 그러나 아시아에 유입된 자본은 주로 비교역재ㆍ부동산ㆍ투기적 목적의 자산 등 비생산적인 부문에 쓰여졌고, 주식ㆍ부동산 등 자산 가격에 거품을 형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과잉 투자를 유발시켰다.BIS 보고 은행들의 전세계 지역별 여신액 추이{구 분1993년 말1994년 말1995년 말1996년 말1997년 6월아 시 아라틴아메리카중 동아 프 리 카동 구 권개 발 국 가190.3189.948.937.083.5128.9238.1197.651.636.779.0140.8306.9212.251.252.490.6152.5367.0242.448.650.2103.0171.0389.4251.150.953.1116.9184.6합 계678.5743.8865.8982.21,046.0자료 : BIS (단위:10억 달러)동남아 지역 국가들은 1995년도부터 수출 부진과 경상 수지 적자가 확대되었고, 경기가 침체 국면에 접어들면서 자산 가격의 버블이 1996년부터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자산 가격의 붕괴는 그러한 자산에 투자하였던 투자가들에게 자산을 담보로 대출하였던 동남아 금융 기관들의 부실을 초래하였다. 이에 따라 이들 금융 기관들의 신용도는 하락하였고, 국제 투자가 감소함에 따라 아시아 지역에 대한 국제 유동성도 감소하게 되었다.이러한 동아시아의 상황은 한국의 외환 위기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그것은 다음 네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1) 일본의 금융 기관의 부실 심화와 이에 따른 대출 연장 거부1990∼1991년에 자산 가격이 붕괴하여 일본 금융 시스템은 비수익 대출 과다로 인해 매우 불안정한 상의 역할은 수출 기업에게 균형 이자율 이하로 대출을해 주거나 보조금을 지급함으로써 제조업과 무역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케인지안의 정책논리에 따른 것이다.1980년대 들어서는 금융 부문에서도 진입 규제 완화, 직접 규제 방식에서 간접 규제 방식으로의 이행 등 일련의 자유화 및 개방화 시책이 추진되었고, 1990년대에 들어서는 환율이 어느 정도 시장의 수급에 따라 조절되도록 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그러나 근본적인 개혁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관치금융과 인위적인 환율 통제는 상존 하고 있다.2) 생산성 측면1997년도의 대기업의 연쇄 부도와 이에 따른 금융 기관의 부실화는 근본적으로 한국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 된 규모의 경제 효과, 즉 생산량이 증가할 때 생산에 소요되는 생산물 한 단위당 비용이 감소되는 효과가 이제는 정체 내지는 퇴보하게 되어 더 이상 경제 성장에 기여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자아낸다. 과연 한국 경제가 과거 30∼40년 동안 고도의 경제 성장이 가능했던 요인들은 무엇인가?일반적으로 노동과 자본, 토지 등 생산 요소들이 생산에 보다 많이 사용된다면 자연히 생산은 증가하게 되므로 경제는 요소 투입량이 증가할수록 보다 크게 성장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동일한 양의 생산 요소가 투입된다고 하여도 생산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더 많이 생산될 수 있다면, 즉 생산 요소의 생산성이 증가한다면 당연히 경제는 크게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한국 경제는 생산성 증가가 기술 진보보다는 양적인 확대에 따른 규모의 경제 효과에 크게 의존하여 왔던 것이다.Ⅱ. IMF 구제금융 조기상환의 의의한국정부는 2001년 8월 23일 외환위기당시 IMF로부터 차입한 구제금융자금 중에서 잔여 분인 1.4억 달러를 상환함으로써 당초 예정(2004년 5월)보다 조기에 IMF 체제에서 벗어 나게 되었음국제금융기구 자금도입 및 상환실적(단위: 억 달러){국제금융기구차입액상환계획 및 실적IMFSRFSBL1951356099년 9월 16일 전액 조기DP 성장률은 3.6%이었으나 설비투자는 전분기의 -12.6%에 이어 전년동기대비 무려 25.9%나 감소설비투자는 98년 들어 더욱 위축되어 1/4분기에 -37.7%, 2/4분기에 -46.5%에 달하였음.98년 들어 민간소비도 GDP 성장률보다 훨씬 빠른 속도인 -10% 이하로 위축되기 시작 하여 내수는 극도로 침체이러한 내수위축은 수입급감을 통해 국제수지의 대폭적인 흑자에 기여경상수지는 만성적인 적자기조에서 벗어나 97년 11월 8억 640억달러의 흑자, 12월 에는 무려 35억 8540억 달러의 흑자를 기록하였고, 98년 경상수지는 GDP의 14.2%인 403억 6천 5백만달러의 흑자를 기록98년 2월 외채만기연장에 성공하면서 환율급등이 멈추었으며 대규모 경상수지 흑자가 누적되면서 환율은 3월부터 달러당 1300원대로 하락하였고 이로써 금리하락의 여유가 생김.그러나 금융경색은 98년 4월부터 더욱 악화되어 이 시점부터 기업부도가 대량으로 발생하고 실업이 크게 늘어나기 시작98년 3/4분기에 이르러 설비투자 증가율은 -40.4%에 달하였고 9월 러시아 모라토리엄 선언 이후 아르헨티나, 멕시코 등 중남미 국가가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는 등, 향후의 경 제전망이 매우 불투명하자 국내 산업기반 붕괴에 대한 우려가 팽배99년 1/4분기중 실질 총통화의 전년동기대비 증가율은 35.3%로 73년 2/4 분기 이래 26년만에 가장 높은 수준를 기록하는 등 99년초부터 통화정책 은 기록적인 확대기조로 급전환재정에서도 SOC를 비롯한 자본지출을 상반기중 크게 늘임(1/4분기161%, 2/4분기 46%) 으로써 99년의 경기는 내수를 중심으로 빠른 회복을 보이기 시작99년 2/4분기부터 2000년 1/4분기까지 4분기 연속 분기별 경제성장률은 10%를 초과하였고 그 결과 99년의 실질 GDP 성장률은 10.7%을 기록99년의 불변 GDP 성장률은 98년의 -6.7%에 비해 무려 17.4%나 개선된 것으로서 이와 같은 실질 성장률의 급격한 개선은 제2차 대전 이후 세계경제 역사상 년간 GDP성장률이 연평균 4.3%, 소비자물가상승률은 연평균 3.5%를 기 록하는 등 여타 아시아 외환위기국가에 비해 빠른 회복 구현2000년말 현재 한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은 9,628달러로, 말레이시아(3,587달러), 태국(1,845 달러) 등 아시아 5개국중 가장 높은 수준우리나라의 공적자금 지원규모가 1997년 외환위기를 겪은 동남아시아 국 가들에 비해 크게 높은 수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GDP는 2001 년 3/4분기 현재 1.8%의 견조한 성장세 유지우리나라의 GDP 대비 공적자금 지원비율은 33%로 말레이시아 5%, 태국 25%보다는 높지 만, 인도네시아의 50%보다는 낮은 수준공적자금이 우리나라보다 많이 투입된 인도네시아는 3.5%의 GDP성장률을 보인 반면 적게 투입된 말레이시아는 0.5%, 멕시코는 -1.6%, 칠레는 -0.4% 성장각국의 공적자금 투입규모(단위 : %, 억 달러){한국태국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멕시코(94∼96)브라질(94∼)칠레(82∼85)공적자금1,3*************176GDP대비 비율(%)33(공적자금 2차분까지)25(98년 말현재)50(99년 중순 현재)5(99년 3월 현재)14(98년 기준)3(96년 기준)10.3(82∼85년 연평균)최근 GDP성장률1)1.81.9*3.50.5*-1.63.6*-0.4자료 : 예금보험공사 금융구조조정의 방법과 사례 (2001), Bloomberg통신경상수지는 1996∼1997년의 대규모 적자에서 1998∼2000년중 770억달러 의 흑자를 기록하였고, 2001년 역시 86억달러의 흑자를 기록하는 등 외환 유동성이 크게 개선우리나라의 GDP 대비 경상수지비율은 1996년 4.6%에서 2000년 2.2%로 상승, 여타 아시 아국가에 비해 국제수지가 균형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원/달러 환율은 1997년말 1,695원까지 상승하였다가 2002년 4월 현재 1,294원으로 하락하여 실물경제를 반영하는 수준으로 회복아시아 5개국의 GDP대비 경상수지흑자 비율 추이(단위 회
중국경제의 두 얼굴Ⅰ 들어가는말Ⅱ 낙관/긍정론적 시각1 경제강국으로 성장하는 중국2 중국경제의 고도성장 요인1) 개발전략의 유효성2) 초기조건3) 시스템간의 정합성/보완성4) 국제환경3 세계기업 대규모의 중국투자4 WTO가입과 올림픽유치효과5 세계를 위협하는 중국기업Ⅲ 비관/부정론적 시각1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의미2 중국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특징3 중국 사회주의 경제가 당면한 문제들1) 등소평이후의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앞날2) 중국경제가 당면한 내부적 문제들1 국유기업의 개혁2 인플레의 억제3 지역분권화4 도,농간 /지역간 소득격차의 확대와 빈곤계층가. 생활수준의 향상과 저축의 증대나. 소득격차의 확대5 에너지 수급4 부정적인 시각Ⅳ 종합 - 중국경제의 두얼굴과 미래Ⅰ 들어가는 말최근 IMF는 중국이 현재의 고도 경제성장을 유지할 경우 앞으로 10년후 미국, 유럽연합(EU)의 경제규모에 필적하고 15년 내에 서구경제를 압도할 것이라고 전망하는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이렇듯 중국은 우리가 방심하는 새에 한국을 뛰어 넘어 이제 미국과 일본을 겨냥하며 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여기에 장쩌민국가주석이 공산당 창당 80주년 기념식을 맞아 행한 연설에서 ‘중국 공산당은 사영기업인들의 입당을 허용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경제개혁에 맞춰 이제 사회주의에 또한 개혁을 단행하고 있는 것이다. 장 주석은 “개혁·개방 이후 20여 년 동안 사영기업인·과학기술인 등 새로운 계층이 생겨남으로써 중국 사회계층의구성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며 “이들 계층도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건설자”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들 계층을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건설에 어떤 작용을 하는 가로 사상의 건전성 여부를 판단해야지, 단순히 재산의 많고 적음에 따라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중국 대륙이 시장경제 체제를 향해 빠르게 줄달음치고 있다. 사영기업인들에 대한 공산당 문호 개방 외에도 대표적인 시장경제 체제인 사유재산권 불가침 헌법 명문화, 소비재 가격통제전면 해제, 거주이전 자유화 등을 통해 사회주의의.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뿐 아니라 적어도 중국이 아직 사회주의 국가라는 선입견을 갖고 잇는 사람이라면 누가 상하이를 봐도 천지개벽했다는 느낌을 갖는다.이처럼 중국을 우리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서고 있다. 과거처럼 우리의 임금이 비싸서 저노동력을 찾아 공장을 이전하거나 수출을 통해 한국에 엄청난 부를 가져다주는 달러박스가 아니다. 일본이 과거 세계의 공장이었듯이 이제 중국은 세계의 공장으로 제조업대국으로의 길을걷고 있다.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에 첨단기술이 결합할 때 중국을 이길 나라는 세상에없다.제조대국에만 머무는 것도 아니다. 중국을 상하이 푸동지역을 중심으로 금융대국과 정보통신대국으로의 진입을 목적에 두고 있다. 실제로 중국은 이미 국내총생산(GDP)총액이 1조 달러를 넘어 세계7위의 경제대국이 됐을 뿐 아니라 매년 8%의 내외의 고속성장을 지속하면서 최근 수년간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시아에서 독야청청하고 있다.2.중국경제의 고도성장 요인{) 중국경제발전론 나카가네 카츠지,나남출판,1999중국경제가 개혁개방 이후 고도성장을 지속한 것은 경제개별의 초기조건, 문화/전통, 경제실적, 경제정책 경제체제가 적절한 관계를 형성하면서 순환했기 때문이다1) 개발전략의 유효성우선 제일 먼저 지적할 것은 등소평이 채택한 개발전략이 유효했다는 점이다. 모택동 시대에 채택되었던 중공업우선 정책을 수정하고 소비재 생산과 제3차 사업을 재평가한 것은, 중국이 정상적인 발전패턴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대외개방의 적극추진은 후발국으로서 후발성의 이익 을 향수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선택이었고, 해외로부터의 직접투자는 대외채무를 늘리지 않고 국내투자와 기술도입을 촉진하는 적절한 방법이었다. 평등주의를 버리고 격차를 적극 용인한 것도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 물론 그 결과 격차가 확대되어 현재 그 모순이 격화되고 있지만, 격차를 용인함으로써 사람들을 크게 자극했다는 것, 그래서 그것이 시장화를 촉진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중국이 계획으로부터 시장으로의 체제전환에 성공한 것 면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주변국가들이 발전을 이룩하면서 비교우위를 잃은 산업이 직접투자를 통해 점차 중국으로 옮겨왔다. 동아시아의 역동성은 이렇게 중국에도 파급되었던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국제적 긴장완화라는 국제정치상의 환경으로부터 입은 혜택, 또 중국을 외부세계와 연결시켜 개방을 견인한 화교 및 중국인 자본의 존재도 간과할 수 없다.3. 세계기업 대규모 중국투자{) 차이나 쇼크 매일경제신문사.2001중국의 지난 20년간 평균 9.7%의 경제성장률에 있어서 2.7%포인트는 외자유치가 기여했다. 세계 500대 기업중 400여개가 이미 중국에 진출했고 9.11 테러 이후에는 intel 등 다국적기업들이 상하이에 수십억달러 규모의 투자를 추진하고 있다.중국경제의 지속성장으로 중국은 세계 직접투자의 집중지역으로 성장하고 있으며 7년 연속 개발도상국중 외자유치국 1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의 경제성장과 투자환경의 개선으로 이러한 추세는 지속될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외자유치를 통해 중국경제 성장의 주요 원동력으로 작요할 것이다.2001년 한해 중국정부가 승인한 외상투자기업은 2만6,139개(전년대비 16.01% 증가)로, 계약액 기준 691억9,100만달러(10.43% 증가), 실행액 기준으로 468억4,600만달러 (14.6% 증가)의 수치를 나타냈다. 2001년 말 현재 중국에 진출한 외상투자기업은 39만484개사로 계약액 기준 7,459억달러, 실행액 기준 3,954억6,900만달러에 달하고 있다.WTO가입에 따라 중국정부는 외자기업에 내국민 대우를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수출의무비율, 기술양도의무 등 외자기업에 불리하게 작용해 왔던 각종 규제의 철폐로 외자기업의 중국내 기업활동은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보인다.외자기업은 중국내 경공업, 화학, 의약, 기계, 전자 등 분야에서 이미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타이어 생산에 있어서 외자기업은 중국내 59개 주요기업의 매출액중 1/3를 차지하고 있고 전자분야에서도 생산액의 1/3을 점유하고 있다. 통신어치를 따지자면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은 1조달러 짜리가 될것으로 보고 있다. 어쩌면 그 이상의 상승(시너지) 효과를 낼 수도 있다.중국은 2010년 국내총생산(GDP)을 2000년의 두 배로 끌어 올리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2000년 GDP가 8조 9,404억 위안 (미화 약 1조 1,000억 달러)이니까 2010년의 GDP는 약 2조 2,000억 달러가 된다.10년 사이에 GDP를 두배로 끌어 올린다는 목표는 WTO가입에 따른 경제개방과 구조조정으로 경쟁력을 높이고 올림픽 특수를 통해 매년 7%이상의 지속적이 s고도 성장을 이룩한다는 데 근거를 두고 있다.베이징시는 우선 올림픽 개최를 위해 179억 달러를 투자해 각종 경기장과도로망 통신망을 정비할 계획이다. 바꿔 말하면 아직은 열악한 중국의 사회간접시설(SOC)이 베이징 올림픽 유치를 계기를 크게 개선될 전망이다.WTO가입과 베이징 올림픽 개최로 중국에 대한 외국인 직접투자는 더욱 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자체가 전 세계에 대해 중국의 국가이미지를 개선하는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5 세계를 위협하는 중국기업{) 아시아 경제지도 중국이 다시 그린다.뉴스위크,2001.3.6Made in china 가 세계를 위협하고 있다. 외자계 기업이 만드는 제품 뿐 아니라 중국 기업이 만드는 차이나 브랜드 가 세계시장에서 주름잡고 있다. 제품의 품질과 기술력 향상을 바탕으로 현재 아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경제 강국으로 부상한 중국은 일본부터 싱가포르까지, 대만의 정교한 반도체 칩 공장부터 캄보디아의 노동착취형 섬유공장까지 곳곳에서 놀라움과 두려움을 자아내고 있다. 아시아의 대다수 국가가 최초로 공동의 경쟁자를 만난 것이다. 그들 국가는 또 2차대전 후 아시아경제부흥의 원동력이 됐던 성장 모델의 붕괴라는 공동의 문제점을 안고 있다.1960~70년대 일본의 경제기적 이후 아시아의 신흥 경제 주체들은 편대 비행하는 기러기떼 로 묘사됐다. 일본정부는 이웃 국가들에 대한 투자와 기술 전수를로 나타나고 있지만 결국 공유제를 위주로 하고 비공유제는 공유제를 보충하는 기업구조를 형성해 나간다는 것이다.둘째, 사회주의 체제인 중국 사회에서 인식하고 있는 바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나타나는 개인자본의 무제한의 증대와 수입의 양극화를 방지하기 위하여 정부가 통제를 하고, 적절한 분배와 조절정책을 통하여 최종적으로 전 인민이 함께 부유해지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것은 공유제라는 제도에 의해 사유재산으로 유입되는 배분을 국가가 제도적으로 통제함으로써 극단적인 소득의 격차를 저지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셋째, 강력한 국가의 거시적 관리와 사회주의라는 정치적 우위성을 배경으로 정부가 경제·사회정책, 경제법규, 계획지도 등 필요한 행정관리를 통하여 시장경제 운영의 질서를 지켜나간다는 것이다.이상을 요약하면 '사회주의시장경제'란 공유제를 주체로 사유제를 비롯한 모든 경제성분을 포함하며 최종적으로는 모든 인민이 잘 살수 있도록 국가의 거시관리를 받는 사회주의 아래의 시장경제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2. 중국사회주의 시장경제의 특징{) 중국경제발전론 , 나카가네 카츠지, 나남출판, 1999첫째, 공유제를 주체로 삼는 것을 견지하고 기타 所有制 형식을 병행하여 발전시킨다; 둘째, 노동에 따라 분배하는 것을 주체로 하면서 기타 분배 형식을 병존시킨다; 셋째, 공통적으로 부유해지는 길을 견지하면서 일부 지역과 개인이 먼저 부유해지는 것 을 허락하고 장려한다; 넷째, 중국 공산당의 영도 아래 개혁 개방과 건설을 진행시킨다.3. 중국경제가 당면한 문제들{) 중국시장 경제 발전상황과 추세간담,중국마안산시주개1) 등소평이후의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앞날등소평은 경제면에서는 70년대말 이래 개혁·개방정책의 총설계사로서 제2의 혁명(개혁·개방)을 추진해왔다. 그 결과 중국사회는 연율 9%이상의 최근에는 두자리수의 고도성장을 이룩하였다.등소평은 천안문사태와 동유럽,소련의 몰락과정에서 개방독재형의 노선을 추구하며 이를 한층더 등소평의 지도하에 강화하였다.과연 등소평이후 이 개발독재가 변경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