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KAPF, Korea Artista Proletaria Federatio)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기까지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의 주도권은 부르주아의 영향력 하에 행사되고 있었다. 그러나 3.1운동의 좌절이후 소위 민족 부르주아의 물적 토대가 급속히 와해되어감에 따라 그들은 더 이상 민족해방운동의 주도 측으로 성장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와 함께 개량주의적 민족운동에 대한 비판 속에서 출발한 혹은 해외 유학을 하고 돌아온 선진적 지식인들에 의해 사회주의 사상이 유입되고 이를 기반으로 한 계급운동이 문화정치 공간을 이용하여 널리 확산되어 감에 따라 문단 내에도 기존의 낭만적 퇴폐주의와 자연주의에 반대하고 신흥예술을 주창한 신경향파 문학이 등장하기 시작했다.신경향파 문학의 특징적인 면모는 두 가지 점에서 찾아진다. 첫째는 그들의 문학론은 생활에 의한 예술결정론이었다는 점, 또 하나는 사회의 선각자, 지도자로서 예술가의 임무를 규정하고 예술의 역할 또한 그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는 점이다.1920년대 초 프로문학의 형성으로부터 1935년 카프조직이 해체될 무렵까지, 사실상 당대 문학예술운동의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었던 쪽은 카프(KAPF)였다. 문학예술운동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인 카프의 조직부터 해체까지의 역사를 살펴보고, 시대에 따른 카프의 변천사를 살펴보도록 한다.①염군사:프로문학조직의 첫머리에 오는 것이 염군사(焰群社)이다. 염군사는 1922년 9월에 이적효, 이호, 김홍파, 김득수, 최승일, 심훈, 김영팔, 송영 등이 조직한 프로문학 단체인데 그 강령은 '해방문화의 연구 및 운동을 목적으로 함'으로 되어 있다. 잡지 『염군』이 2호까지 편집되었으나 미간으로 그치고 말았다. 염군사는 무산계급해방문화의 연구 및 운동을 목적으로 함이라는 강령을 내건 최초의 프로문화단체였다. 염군사는 문학적 측면의 역량에서는 다소 떨어졌지만, 사회적 정치적으로는 자각되어 있었으며 사회운동과 보다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하지만 염군사의 성원들은 높은 사회적 관심과 낮은 문화적 교양을 가지고 있었기에, 후에 그대로 정치활동으로 진출했거나 혹은 다른 생활을 거쳐 다시 문학 활동으로 돌아왔던 사람들이 많았다.②PASKYULA:1923년에 박영희, 안석영, 김형원, 이익상, 김팔봉, 김복진, 연학년 등의 이름의 머리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염군사가 사회적으로 이름나 있지 않은 청년들이라면 파스큘라는 당시로서는 사회적으로 이름난 문사들로 조직된 것이다. 염군사가 강한 정치적 성격을 갖고 있던 반면, 파스큘라는 염군사보다 문학적인 면에서 뛰어났다. 파스큘라의 성원들은 높은 문화적 교양을 지닌 중견문인들의 조직이었다. 1925년 2월에 행한 파스큘라의 문예강연회는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③KAPF:KAPF(Korea Artista Proletaria Federatio,에스페란토어로 된 것)는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을 약칭이다. KAPF는 염군사 계열과 파스큘라 계열의 합동단체로서, 그 구성원은 박영희, 김팔봉, 이호, 김영팔, 이익상, 박용대, 이적효, 이상화, 김은, 김복진, 안석영, 송영, 최승일, 심대섭, 조명희, 이기영, 박팔양, 김양 등이다. 구성원은 문학 중심이었지만 미술부, 문학부, 연극부 등의 부서가 구성되어 있었다.④목적의식적 방향전환:총회를 거쳐 문호개방과 조직확대를 감행한 카프의 제 1차 방향전환은 자연발생적인 단계에서 목적의식으로 나아간 것인 만큼 특별한 의의가 있다. 여기에는 『제 3전선』을 들고 나온 동경유학생인 조중곤, 김두용, 한식, 홍효민, 이북만 등이 주축이 되었다. 그들은 기관지 『예술운동』(1927.11)을 간행하였다.카프의 목적 의식적 방향전환은 예술운동조직의 성격보다는 일반적인 정치조직으로서의 성격을 뚜렷이 드러내게 하였다. 특히 지부는 거의 정치조직화 되어 가고 있었다. 이 같은 정치성의 강조는 카프의 창작을 기계적 공식적인 것으로 위축시켜 정치와 예술의 기계적 혼합, 정치적 사건의 신문 기사식 창작의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카프의 목적 의식적 방향전환은 사회운동에서의 방향전환을 문예의 매개 없이 그대로 주입한 것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카프조직 내의 아나키스트 계열과 민족주의 계열을 배제함으로서 계급적 조직체로서의 결속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5볼셰비키적 재조직의 시도:1927년 목적의식적 방향전환 이후 카프는 재조직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었는바 그 논의는 기존의 대중조직의 오류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비판은 예술운동에 있어서의 기준을 무시한 대중조직은, 진정한 의미의 예술을 낳지 못하도록 방해함으로써 예술운동의 발전을 저해하고 나아가서는 정치운동의 발전마저 저해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930년 4월 카프는 중앙위원호를 개최하여 중앙위원을 보선하고 회비의 개정 및 조직개편을 단행 1국 4부의 새로운 조직형태를 낳았다. 하지만 이 재조직도 예술운동의 볼셰비키화라는 원래의 목적을 모두 소화해낼 수 없는 불완전한 것이어서 예술운동의 차원을 넘어선 대중적인 문화조직으로서 무산계급의 문화적인 요구까지 충족시킬 수 있는 조직으로의 발전이 필요하다는 인식 속에서 재조직논의는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 작가 도연명 (365년-428년)도연명은 동진(東晋)의 심양에서 태어난 전원시인이다. 그의 자는 연명, 본명 도잠이고 호 오류(五柳)선생이다. 20세 때까지는 유복한 가정에서 살았으나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가운이 쇠퇴하여, 그의 일가를 지탱해야 했다. 관리가 되어 생계를 유지했지만 41세 되던 해 이를 사임하고 63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전원생활로 일관하여 생애를 수많은 시와 함께 하였다.도연명의 유명한 시들은 연명이 42세 되던 무렵 귀거래사를 쓰고, 농촌으로 돌아온 후의 것들이다. 없으면 구하고 있으면 나누어주는 솔직하고 담담한 태도, 즉 고궁절의 허명에 이른 사람인 것이다. 세속의 명리에 탐한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도연명의 인품과 시를 논할 수 없고 공감 할 수 도 없을 만큼 도연명의 그것들은 매우 소중한 것일 것이다. 허구와 가식에 사는 오늘날 우리의 삶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세계를 도연명은 만들어 갔다. 그는 인생이란 잠시 현세에 기우(杞憂)하다가 다시없는 것으로 돌아갈 몸이라고 생각하여, 후세에 무엇을 남기려고 중상과 모략으로 세상을 사는가에 대한 질문을 남겼다. 후세 사람들은 그를 참으로 사람답게 살다간 인물로서 추앙한다. 그의 작품으로는 , , 등이 있다.2. 도연명에 관한 사람들의 말.....1구양수는 진(晉)에는 글이 없고 오직 도연명의 귀거래사만이 있다 라고 그를 평가했다.2황정견은 자로 재지 않고도 저절로 맞는 경지의 시, 연명은 시를 지은 것이 아니라 자기 가슴속의 오묘한 경지를 그렸다. 시나 문학은 기교가 아니라 사상이며 덕이다. 그러나 그 도 한 인간으로서 외로운 나그네였다. 라고 그를 평가하였다3도연명을 가장 잘 이해해 준 사람은 안연지(顔延之)였다. 안연지는 연명을 일러 은둔자, 고고한 정신의 소유자, 학문이나 생활을 자유롭게 한 사람, 가난하여 손수 밭 갈아먹은 선비 라고 말했다.4당대의 시객 백낙천은 연명의 가장 열렬한 찬미사였다. 연명이 죽은 후 그의 고향인 강주 의 사마로 부임해간 백낙천은 도연명의 옛집을 찾아 이렇게 읊었다.《今來訪故宅(금내방고택)》오늘 그대의 옛집을 찾아《森若君在前(삼약군재전)》숙연한 마음으로 그대 앞에 섰노라.《不慕樽有酒(불모준유주)》허나, 나는 그대의 단지에 있는 술이 그리운 것도 아니고,《不慕琴無絃(불모금무현)》또는 줄 없는 그대의 거문고가 그리운 것도 아니다.《慕君遺榮利(모군유영이)》오직 그대가 명예나 이득을 버리고《老死此丘園(노사차구원)》이 산과 들에서 자유롭게 스쳐간 것이 그리웁노라5蘇東坡(소동파)는 도연명은 나가서 벼슬하고 싶으면 벼슬을 했고, 또 은퇴하고 싶으면 은퇴했다. 그렇다고 고결하다고 자처하지도 않았다. 배가 고프면 남의 대문을 두들이고, 살림이 넉넉해지면 닭이나 술을 빗어 손님을 청했다그 때나 지금이나 연명을 그리워하는 것은 아마도 무위자연에 귀일한 그 참 삶이라 하겠 다. 후에 소동파는《采菊東離下 悠然見南山 (채국동리하 유연견남산)》《嘯傲東軒下 樂復得此生 (소오동헌하 요복득차생)》《客養千金軀 臨化消其寶 (객양천금구 임화소기보)》의 세 구절을 도(道)를 득(得)한 경지의 시귀라고 했다.3. 도연명의 시(詩)《춘수만사택(春水滿四澤)》봄 물은 사방 연못마다 가득 차고《하운다기봉(夏雲多奇峯)》여름 구름은 기이한 봉우리를 이룬 것이 많기도 많구나.《추월양명휘(秋月揚明輝)》가을 달은 밝은 달빛을 발하고《동령수고송(冬嶺秀孤松)》겨울 고개엔 외로운 소나무가 빼어나도다.4. 도연명의 사(辭)歸去來兮 田園將蕪胡不歸 旣自以心爲形役 奚 愴而獨귀거내혜 전원장무호불귀 기자이심위형역 해추창이독悲悟已往之不諫 知來者之可追 實迷塗基未遠 覺今是而비오이왕지불간 지내자지가추 실미도기미원 각금시이昨非舟搖搖以輕 風飄飄而吹衣 問征夫以前路 恨晨光之熹微작비주요요이경 풍표표이취의 문정부이전노 한신광지희미乃瞻衡宇 載欣在奔 僕歡迎 稚子候門 三徑就내첨형우 재흔재분 복환영 치자후문 삼경취荒 松菊猶存 携幼入室 有酒盈樽 引壺觴以自酌 眄庭柯以怡顔황 송국유존 휴유입실 유주영준 인호상이자작 면정가이이안倚南 以寄傲 審容膝之安易 園日涉以成就 門雖의남 이기오 심용슬지안이 원일섭이성취 문수設而常關 策扶老以流憩 時矯首而游觀 雲無心以出岫설이상관 책부노이유게 시교수이유관 운무심이출수鳥倦飛而知還 景峠峠以將入 撫孤松而盤桓 歸去來兮조권비이지환 경상상이장입 무고송이반환 귀거내혜請息交以絶遊 世與我而相遺 復駕言兮焉求 悅親戚之情話청식교이절유 세여아이상유 복가언혜언구 열친척지정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