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굴암과 불국사의 창건지금껏 석굴암과 불국사는 신라 경덕왕과 당시의 재상인 김대성이 함께지은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들이 누리고 있는 분에 넘치는 영화가 내세에까지 이어지길 바라는 소망을 담은 건축물이라는 것이다. 즉, 전형적인 기복 불교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석굴암이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한 호국 불교의 상징물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석굴암이 동해를 바라보고 있다는 점으로 근거를 두고 있다. 종합해보면 이 두 절은 왕실과 재상 등 당시의 지배계층이 자신들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지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런 관점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석연치 못한 점이 많다.종교적인 신앙심이나 예술적인 심미안까지도 모두 정치적인 의도와 결부시켜 해석하려는 견해에 대해서는 의문이 없지 않다. 김대성의 창사 계획은 깊은 신앙심의 발로였고, 특이한 건축설계는 그의 불교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는 비원이 더욱 독실해졌기에 두 절의 창건을 계획했었고, 그라 또한 화엄학을 수업했던 일 등은 일차적으로 주목되어야 마땅하다. 이와 같은 사실을 지나쳐 버리고 정치적인 의도와 관련지어 설명하는 것이 옳은 것만은 아닐 것이다.-김상현 김부식의 에는 이 두 사찰에 대한 기록이 없다. 원래 김부식은 신라 왕실의 후예로 대대로 경주에 살았다. 그렇기에 경주에서 유년기를 보낸 김부식이 두 사찰을 몰랐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는 이 두 사찰이 조정에서 공론화 되지 못했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는데, 이로써 두 사찰이 국찰이나 왕실 원찰이 아닐 가능성이 높아진다.두 사찰의 유일한 창건연기설화는 일연의 에 있는 것이다. 는 잘 알려진대로 종교적인 상상력과 문학적 향취가 넘치는 최고의 신화. 설화 집이다. 그 점은 김대성 설화'도 마찬가지인데, 그 설화는 크게 전생담과 현생담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김대성의 전생은 경주 모량리에 사는 경조라는 한 가난한 여인을 어머니로 해서 시작되는데. 아버지 이름이 남아있지 않은 정도로 집안이 빈한했다. 머리가 성(城)처럼 커서 대성이란 이름이 붙었다. 부잣집에서 날품을 팔아 겨우 마련한 땅 몇마지기를 마련한 그는, 홍륜사 법회에 그 땅을 몽땅 보시 한다. 얼마 후 죽은 그는 당대의 세도가인 김문량의 아들로 환생하여, 전생의 모친인 경조를 모셔다 한 집에 사는 기이한 삶을 산다. 그는 장성하자 사냥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사냥 도중 죽인 곰이 꿈에 나타나 자신을 위한 절을 세워 줄 것을 부탁한다. 그리하여 대성은 그 곰을 위해 장수사 를 세우니 이 후에 그의 불심이 더해갔다. 이에 이승의 양친을 위해 불국사를 세우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를 세웠다. 이상이 에 남아있는 기록의 내용이다. 여기서 전생의 부모와 현생의 부모에 대한 해석이 또한 다양하다.현세에 생을 받은 김씨 왕족들이 일가 일신의 영화를 빌기 위해 불국사가 세워졌다고 한다면, 석불사는 이미 앞서 이 세상을 떠난 역대의 김씨 왕가의 선조들이 사후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기원하며 건립된 것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황수영 [석굴암]우리 고대 국가 중 일반적으로 곰을 토템으로 삼은 나라는 부여족의 한분파가 세운 백제로 짐작된다. ...(중략)...이와 같은 역사적인 정황을 위의 설화에 대입해볼 때, 김대성이 죽인 곰 이 혹 백제 후예민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지나친 비약일까? 결국 그의 내면에는 통일 전쟁 과정에서 희생된 원혼들을 위로하고, 백제 유민을 끌어안고 나가야 한다는 새로운 삶의 지표가 설정된다....(중략)... 정말이지 김대성이 신라의 아들 이자 백제의 아들 로서 두 사찰을 창건했다면 전세 부모 는 사라진 나라 백제 로, '현세 부모 란 자신이 태어난 나라인 신라 가 되고, 그 결과로써 불국사는 신라를 위해, 석굴암은 망국 백제를 위해 지었다는 결론 말이다.-성낙주 [석굴암, 그 이념과 미학]어떤 해석이 옳은지는 알 수 없지만, 여기서 확실해 지는 점이 한가지 있다. 그것은 두 사찰이 감대성 개인에 의해 지어졌다는 점이다. 이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는, [불국사고금창기]에 실려 있는 최치원의 글이다. 이 글에는 왕이나 왕실의 참여는 드러나지 않고 있으며, 불국사 건립이 김대성 개인의 작업임이 강조되고 있다. 또한 에 기록된 대성이 죽으니 이를 나라에서 완성시켰다 라는 구절도 처음에는 국가의 간여가 없었음을 거꾸로 증명하고 있다. 그 때는 이미 공사를 시작한지 4반세기나 지난 시점으로 이미 대체 적인 공사가 끝나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무엇보다 천개석에 관한 기록으로 보아 석굴암의 경우는 진작 준공되어 있었다. 김대성은 남은 생을 오직 두 사찰 건립에 바치겠다는 각오로 벼슬을 그만 두었고, 일 년 정도의 준비 기간을 거쳐 다음해(751)부터 본격적인 토목공사에 들어간 것이다.석굴암과 불국사, 그곳으로 가는 길누구나 한 번쯤은 가봤을 만한 곳, 수학 여행지에 감초처럼 끼는 곳이 석굴암과 불국사지만 의외로 이 곳의 진짜 맛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나에게는 이것이 네 번째 찾는 길이였지만 돌아오는 길에 왠지 모를 아쉬움과 뭔가 빠뜨리고 보지 못한 듯한 마음에 자꾸만 다음을 기약하게 되는 것이였다. 4월의 첫 주, 경주는 벚꽃이 만발해 있었다. 이른 아침에 서둘러 떠난 길이 였음에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발길이 닿아 있었다. 길게 뻗은 선은 바다와 맞닿아 있고 북쪽으로는 토함산을 등지고 있는 경주..... 그 옛날 이 거리에 가득했을 신라인들의 삶을 위한 활기찬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일단 경주 시내에 들어서면 석굴암을 찾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다. 불국사를 그냥 비껴 구불구불한 석굴로를 따라 가면 언덕을 넘어 어렴풋이 동해 바다가 보이고 조금만 더 올라서면 유네스코가 세계유산으로 지정한 우리의 석굴암이 자리잡고 있다. 처음 이 길을 따라 간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멀미가 심했던 나는 그만 이 길을 다 가지 못하고 길가에서 한참을 쉬었다. 아무런 배경 지식도 없었던 철없던 나지만 그런 나에게도 석굴암은 왠지 모를 경건한 마음을 불러 일으켰었다. 어렴풋이 그 땐 지금 석굴암을 막고 있는 유리가 없었지만 차마 본존불에 다가서지 못하고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주차장을 지나 입장권을 끊어 잘 닦아진 산길을 조금 걸어가면 곧 석굴암이다. 사월 초파일이 한 달정도 앞으로 다가온 탓에 길가에는 등이 즐비하게 걸려있다. 잘 닦여진 길이라 산책하는 맘으로 조금 걸으니 넓은 뜰이 나타나고 감로주를 마시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일단 걸음을 재촉해 석굴암 안으로 들어섰다. 전에도 그러하였지만 들어서는 순간 일단 실망감이 밀려온다. 석굴암의 아름다운 자태를 보리라 한껏 기대하였것만 가로 놓인 얄미운 유리벽이 그 모든 즐거움과 기대를 꺽는다. 관음보살의 아름다운 선도 인왕상의 역동적인 힘도 유리벽 앞에선 절반이 되고 만다. 본존불 머리 위에 놓여 있을 세 갈래로 갈라진 천개석도 보이질 않는다. 11대 제자상은 본존불에 가려 그 모습조차 볼 수 없고 조명으로 빛을 내는 석굴암은 왠지 처량해 보이기까지 하다. 잔뜩 책에서 본 내용을 확인해보리라 생각했던 나는 김이 빠졌다. 어떻게든 그 유리벽 너머로 보이는 석굴암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잘 보려 고개를 이쪽 저쪽으로 내밀어 보지만 쉽지가 않다.석굴암의 내부 구조전체상과 본존불석굴암의 석실 법당. 즉, 주실의 평면은 원형이다. 우리 나라의 건축사에 있어, 평면 구성을 원형으로 한 건축은 이곳이 유일한데, 그 직경이 24 당척이다. 이 24 당척은 석굴암 전체의 평면 구성에서도 기준이 되고 있다. 전실과 주실의 총 연장 길이가 48 당척이며, 그 절반인 12 당척은 본존불의 대좌의 밑지름과 비도의 폭이 된다.석굴암을 멀리서 바라보면 아담하고 안정된 느낌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그 크기에 놀라게 된다. 바닥에서 천개석까지의 높이는 거의 9m에 이르고, 본존불이 1.6m 높이의 연하 대좌를 포함해 5.6m에 달하기 때문이다. 한 겹 두텁게 막아선 유리문을 뚫고 그 흡인력을 발휘하고 있는 붓다, 본존불의 자태는 숭고함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이 불상의 표정은 인자하고 자애로운 것과는 거리가 있다. 오히려 우리를 내리누르는 듯한 날카로움이 배어난다. 다문 입술은 고집있어 보이며 어찌 보면 화난 듯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토록 냉정한 붓다의 표정에서 우주의 침묵을 읽을 수 있다. 값싼 연민이나 사랑의 시혜자가 아닌 그는 인간을 한없이 사랑하고 가엽게 여기지만 그것을 표현하지 않는다.그 붓다상의 도상은 굽타 시대의 여러 불상들 중에서, 특히,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상이라고 보는 설이 일반적이다.먼저 석굴암의 불상의 중심인 본존상의 형식은 나발의 머리칼, 얇고 간결한 우견편단의 착의법, 오른발을 위로 얹은 길상좌의 자세, 무릎 앞의 부체꼴의 옷자락, 오른손을 무릎 아래로 내려뜨린 항마촉지인의 손 등이 뚜렷한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형식이 출현한 것은 굽타기부터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문명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