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립구조안티고네는 전체적으로 대립구조로 되어있다. 이 대립구조에는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대립과 안테고네와 이스메네의 대립, 마지막으로 하이몬과 크레온의 대립이 있다.첫번째로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대립은 신의 법과 인간의 법과의 대립이다. 183행~210행까지는 크레온의 생각을 알 수 있고 450행~459행과 921행~926행까지에서는 안티고네의 생각을 알 수 있다.183행~210행 크레온누구든지 자기 조국보다 친구를 더 소중히 여기는 자 역시 나는 조금도 존중하지 않소이다. 왜냐하면 나는 언제나 만물을 굽어보시는 제우스께서 내 증인이 되어주소서 안전 대신 파멸이 시민들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게 되면 침묵하지 않을 것이며, 조국의 적을 나의 친구로 여기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오. 우리를 지켜주는 것은 조국 땅이며, 조국이 무사히 항해해야만 우리가 진정한 친구를 사귈 수 있음을 내가 잘 알기 때문이오. 이런 원칙에 따라 나는 이 도시를 키워나갈 작정이오. 그리고 내가 오이디푸스의 아들들과 관련하여 시민들에게 알린 포고도 그와 합치되오. 에테오클레스는 우리 도시를 위하여 싸우다가 모든 면에서 뛰어난 장수로서 전사하였으니 그를 무덤에 묻어주고 지하의 가장 훌륭한 사자들에게 어울리는 온갖 의식을 베풀 것이오. 그러나 그와 형제간인 폴뤼네이케스는, 내 말하노니, 추방에서 돌아와 조국 땅과 선조들의 신들을 화염으로 완전히 불사르고, 친족의 피를 마시고, 나머지는 노예로 끌고 가려고 하였으니, 그와 관련하여 나는 도시에 알리게 했소이다, 아무도 그에게 장례를 베풀거나 애도하지 말고, 새떼와 개떼의 밥이 되고 치욕스런 광경이 되도록 그의 시신을 묻히지 않은 채 내버려두라고 말이오 그것은 내 뜻이오. 나에게는 결코 사악한 자들이 올바른 사람들보다 더 존중받지 못할 것이오. 그러나 누구든지 이 도시에 호의를 가진 사람은 죽었든 살아 있든 똑같이 존경받게 될 것이다.450행~459행 안티고네네. 그 포고를 나에게 알려주신 이는 제우스가 아니었으며, 하계의 신들과 함께 사시는 정의의 여신께서도 사람들 사이에 그런 법을 세우시지는 않았기 때문이지요. 나는 또 그대의 명령이 신들의 확고부동한 불문율들을 죽게 마련인 한낱 인간이 무시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다고는 생각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그 불문율들은 어제 오늘에 생긴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살아 있고 어디서 왔는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지요. 나는 한 인간의 의지가 두려워서 그 불문율들을 어김으로써 신들 앞에서 벌을 받고 싶지가 않았어요.921행~926행 안티고네신들의 어떤 법을 내가 어겼다는 거예요? 어째서 불운한 나는 아직도 신들을 쳐다보아야만 하나요? 누구에게 나는 도움을 청해야 하나요? 이제 나는 경건한 행동 때문에 불경한 자라는 악명을 듣게 되었으니 말예요.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신들의 마음에 드신다면 나는 고통을 받으면서 내가 죄를 지었음을 시인할 거예요크레온은 실정법주의자로 국가의 법, 인간의 법을 존중하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나라의 법이 확고히 서기를 바라며 국가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한 사람을 확실하게 처벌하여 본보기로 삼아 뒷탈이 없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이에 반하여 안티고네는 크레온의 말을 법, 명령으로 말함으로써 즉 인간의 법으로 정의하고 있고, 자신의 생각을 불문율이라 말함으로써 신들의 법이라 정의하고 있다. 그녀는 양심에 입각하여 행동하고 있으며 인간의 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신들의 법만을 두려워하고 있다. 이 두 사람간의 대립은 통치자인 크레온으로서는 당연한 것이지도 모른다. 어떤 통치자든지 자기가 통치하는 국가에서 분쟁이 일어나길 바라지 않으며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법을 만들어 놓고 그 법에 의해서 판단하게 된다.두 번째로 이스메네와 안티고네의 대립이 있다. 이스메네는 두 번 등장하는데 하나는 안티고네가 이스메네에게 행동에 동참할 것인지를 묻는 부분과 다른 하나는 크레온이 이스메네에게 죄를 묻기 위해 부른 부분이다.57행~59행 이스메네유일하게 살아남은 우리 두 자매도 법을 무시하고 왕의 명령이나 권력에 맞서다가는 누구보다도 가장 비참하게 죽고 말 거예요.78행~79행 이스메네경멸하는 것이 아녜요. 하지만 내게는 국가에 대항할 힘이 없어요.2행~4행 안티고네오이디푸스에게서 비롯된 온갖 불행들 중에서 제우스께서 살아남은 우리 두 자매에게 이루시지 않은 것은 어는 단 한가지라고 알고 있니?895행 안티고네나는 맨 마지막으로 누구보다도 비참하게 그리로 내려가고 있어요. 타고난 수명을 다 채우기도 전에.536행~537행 이스메네언니만 동의하신다면, 나도 거기에 가담했으니 나도 함께 벌을 받겠어요.538행~539행 안티고네안돼. 네가 그렇게 하는 것은 정의가 용납하지 않아. 너는 원치 않았고 나는 너를 참가시키지 않았으니까.이곳에서 이스메네는 안티고네와는 달리 국가의 법을 존중하고 있으며 두려워하여 안티고네와 행동을 같이 하지 않는다. (78행~79행, 57행~59행) 그러므로써 이스메네는 안티고네에 의해서 없는 사람 취급된다. 이것은 처음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우리 두 자매라고 표현한 것에서 자기를 맨 마지막으로 표현하여 이스메네를 제외시킨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2행~4행, 895행) 이에 대해서 이스메네는 크레온에 의해서 불려왔을 때 함께 처벌받겠다고 하지만 안티고네는 이를 거부한다. 이곳은 이스메네가 가지고 있는 언니에 대한 사랑과 안타까움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안티고네와 이스메네를 10대 소녀들로 봤을 때 서로 공을 차지하려 한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536행~537행, 538행~539행)세 번째로 하이몬과 크레온과의 대립이 있다. 하이몬은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인물로써 처음에는 논리적인 말로써 그리고 아버지인 크레온을 존중하는 관점에서 아버지를 설득시키려 하다가 점점 크레온을 비난하는 말을 하고 있다. 그러다가 결국은 안티고네의 옆에서 자살하고 만다. 하이몬은 안티고네를 사랑하고 있었고 그녀를 구하기 위해서 아버지 크레온을 설득하려 했으나 아버지를 설득할 수 없었고 그로 인해 침착했던 하이몬은 분노했고 급기야는 자살까지 하게 되었다. (634행~638행, 690행~691행, 737행, 739행, 764행)또한 하이몬 역시 10대라고 생각되는데 이는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이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해결할 수도 있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아 과격한 방법을 통해 그 뜻을 이루려 하고 있다는 것과 자재력이 부족하다는 것에서 10대들의 해결방식을 볼 수 있다. (1233행~237행)634행~638행 하이몬아버지, 저는 아버지의 자식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저를 위하여 지혜롭게 규칙을 세워주시니, 저는 거기에 따를 것입니다. 저에게는 어떤 결혼도 아버지의 훌륭한 지도보다 더 큰 이익이 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테니까요.690행~691행 하이몬아버지의 눈초리가 하도 무서워서 일반 시민은 아버지의 귀에 거슬릴 만한 말은 입 밖에 내지 못하기 때문이지요.737행 하이몬한 사람에 속하는 국가는 국가가 아닙니다.739행 하이몬사막에서는 멋있게 독재를 하실 수 있겠지요.764행 하이몬친구들 중에서 아버지를 견뎌낼 수 있는 자들 앞에서나 날뛰십시오.1233행~237행 하이몬열십자 손잡이의 칼을 뺏으나, 아버지께서 도망쳐 뛰어나오시는 바람에 그 분을 맞히지는 못했습니다. 그러자 불운한 그는 자기 자신에 화가 나서 즉시 칼에 몸을 기대며, 칼을 반이나 옆구리에 밀어 넣었습니다.2. 크레온의 두려움483행~485행 크레온정말이지 이제 나는 사내가 아니고 이 계집이 사내일 것이오. 이번 승리가 벌받지 않고 그녀의 것으로 남는다면 말이오.525행 크레온내가 살아 있는 한, 여인이 나를 지배하지는 못할 것이다.677행~680행 크레온결코 한 여인에게 져서는 안 된다. 꼭 그래야 한다면, 우리가 한 여인에게 졌다는 말을 듣느니 차라리 한 남자의 손에 쓰러지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740행 크레온보아하니. 이 애는 여자들 편인 것 같소.크레온은 영웅적인 모습을 찾기 어려운 인물이며 한 나라의 통치자로써는 너무나도 평범한 인물이다. 그래서 더욱더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부분이 많이 나타난다. 크레온이 통치자로써 국가의 법을 존중하고 지킬려고 애쓰는 것은 당연하지만 소중한 많은 사람들을 잃어가면서까지 그 권위를 지키려 한다는 것에서 자신의 지위가 떨어지는 것에 대해서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여성적인 인간으로 규정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크레온에게 있어서 남성은 강한 존재로 자기 자신의 확실한 뜻이 있어 그 일을 추진해 나가는 사람이고 여성은 연약한 존재로 어딘가에 끌려가는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다. (483행~485행, 525행, 677행~680행, 740행)
목 차1. 머리말2. 가야의 건국설화1) 건국설화2) 건국신화를 통해 본 사회상3. 가야사 개관1) 가야의 역사2) 국가체제4. 주변국과의 교역1) 중국과의 교역2) 일본과의 교역5. 임나일본부설에 관하여1) 지금까지 한일학계의 임나일본부설 연구2) 종래 연구의 문제점3) 임나일본부의 실체6. 맺음말1. 머리말우리나라 고대사회를 살펴봄에 있어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마도 삼국시대에 관한 연구일 것이다. 삼국시대 중에서 특히 신라에 대한 연구 및 발굴은 거의 다 이루어져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며 백제는 요즘 한참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며 고구려는 유물 및 유적들이 북한에 있다는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여러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삼국시대라고 하면 3개의 국가가 있었다는 말인데 그 시기에 고구려, 백제, 신라 외에도 분명히 가야라는 국가가 있었다. 3개의 국가가 있을 때 삼국시대라고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무리 가야가 작은 국가이고 신라에 복속되었다고는 하나 문화면에서 뛰어났다고 전해지고 있고 이로 인해 여러 주변 국가들에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데 왜 가야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을 것일까? 왜 사국시대가 아니라 삼국시대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일까? 한번쯤 이런 의문을 가져볼만한 것 같다.이 글에서는 가야사에 대한 개괄적인 내용을 살펴보고 가야와 주변국들과의 교역관계를 통해서 삼국시대에 있어서 가야의 위치를 알아보고 그를 통해서 삼국시대라고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라는 문제에 대해서 알아보려 했다. 옳지 않다면 최근에 발해를 재조명해서 시대 구분상 통일신라시대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남북국시대라고 바뀐 것처럼 가야도 역시 사국시대라고 불리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2. 가야의 건국설화{가락국 시조 수로왕 영정{가락국 시조왕비 허씨 영정1) 건국설화천지가 개벽한 후에 이 땅에는 나라의 이름이 없었고, 또한 임금과 신하라는 칭호도 없었다. 옛날에 구간 - 아도간·여도간·피도간·오도간·유수간·유천간·신천간·오천간·신귀간이 있어산악숭배와 관련된다. 하늘의 신이 대개 땅 위의 가장 높은 곳, 곧 산꼭대기에 내려온다는 관념은 단군신화이래 우리나라 개국신화의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내용은 토착사회에 북쪽으로부터 새로운 이주민 집단이 도래하였음을 의미한다. 수로왕으로 대표되는 집단이 도래하기 이전에 이미 김해 가락국에는 몇몇 토착집단이 있었는데, 9간이 이들 집단을 각각 대표하는 우두머리였다. 이들 토착집단과 수로집단이 결합하여 성립된 것이 가락국이었다.6개의 알에서 수로왕이 태어났다는 사실은 고대사회에서 새에 대해서 하늘과 땅을 매개해 주는 존재로 인식된 것과 관련이 깊다. 새는 하늘을 항해하면서 하늘의 신성한 메시지를 땅 위의 인간에게 전해주고, 땅 위의 인간세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하늘에 전달해 주는 전령으로 비쳐졌다. 이처럼 하늘과 땅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새는 신성한 동물이므로, 새가 낳은 알에서 태어난 사람도 또한 신성하리라는 고대사회 사람들의 관념이 투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6개의 알이 황금색이며 해처럼 둥글었다는 기록은 태양숭배사상의 흔적을 보이는 것으로 수로왕이 태양신, 곧 천신의 후손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다. 천신의 후손이라는 관념은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지배하는데 널리 퍼져 있었다. 또한 수로왕의 개국신화에서는 남방계의 해양적인 요소도 담겨 있는데, 거북의 등장은 이러한 수신의 상징이었다.하늘에서 내려온 6개의 알에서 6가야(금관가야, 대가야, 아라가야, 소가야, 성산가야, 고녕가야)가 성립되었다는 사실은 6가야연맹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점이다. 그러나 금관가야 즉 김해 가락국을 중심으로 6가야가 동시에 성립되었다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현재의 신화적인 자료에서 볼 때 6가야 가운데에서 금관가야와 대가야(고령 가라국)에 관한 기록만 보인다. 이외의 다른 가야 제국에 대한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고, 고고학적인 발굴결과에 의해서도 6가야에 비정되는 곳의 지역적인 동일성을 찾기가 힘들다. 더욱이 고령 가라국의 개국신화는 가락국 수로 12곡에 서부 경남의 가야들을 포함시키는 정치적 통합체를 추진했다. 대가야왕은 축제의 마당에 가야왕들을 불러모았고, 가야금 12곡을 연주케 하여 가야의 일체감을 높였다.6세기 전반부터 가야는 신라와 백제의 침입에 휘말리게 됩니다. 에는 당시의 사정이 자세하게 기록되고 있다. 신라와 백제의 진출에 대해 독립유지를 위해 전쟁과 외교를 전개했다. 가야는 친백제노선과 친신라노선을 반복하기도 하고, 이합집산을 거듭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532년에 가락국(김해), 560경에 안라국(함안), 562년에 대가야(고령)가 차례로 신라의 회유와 무력 앞에 통합되었고, 가야의 역사는 한국고대사의 울타리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후 가야인들의 일부는 일본열도로 이주하기도 하였고, 신라의 지방사람으로 편제되기도 하였으나, 김유신 일족과 같이 정복국인 신라에서 최고 권력의 자리까지 오른 사람들도 있었다.2) 국가체제사회제도의 경우 금관국은 중앙 관료 기구가 매우 세분되어 있어서 제정을 담당하는 천부경과 사농경. 왕실 창고 관리인 내고, 무기고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군대와 군사를 관리하는 관리가 따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신분제도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보인다. 예로 구형 왕 때까지 태자 왕자 자로 구별해 놓았는데 이는 지배계급 내의 정통성을 구별할 정도의 신분질서가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일본서기에는 가야의 관직으로 한기와 하한기, 상수위와 이수위등이 있다. 이 또한 가야의 독특한 신분제도가 존재해 있고 계급화가 심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계급의 분화는 계급의 뚜렷한 층서화가 이룩될 정도로의 고대 국가 수준의 단계로 발전했음을 의미한다.군사제도로 보면 군대의 편성은 보병과 기병이 궁병대와 개지극부장대 등의 특수 부대, 이들 부대의 지휘를 맞았던 상수위와 하수위 개지감등 관료들이 통솔하는 체계적인 부대 조직을 구성했으리라 본다. 또한 가야의 철 생산 능력으로 봤을 때 무기생산 능력이 뛰었났을 것으로 예상되며 이것은 일본에 접어들어 동쪽으로 향하다가, 김해의 구야국에 정박한 다음, 대한해협을 건너 쓰시마를 거쳐 큐슈에 도착하는 항로였다.가야는 일본열도의 사람들이 처음으로 의식하였던 외국이었으며, 고대 삼한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교류를 가졌던 것도 가야인들이었다. 일본열도의 왜인들이 가야의 여러 나라들을 최초의 외국으로 인식하게 되었던 배경으로 정치, 외교, 교역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경우는 고대 한일간의 교류 전체에 있어서 극히 적은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오히려 가야인들에 일본열도에의 진출 내지는 이주를 통한 직접적 인적교류가 그 대부분이었다. 일본열도에 이주한 가야인들은 왜인들과 우선 용모에서 구별되고 있었으며, 그들이 지니고 온 선진기술과 문화는 왜인들이 최초의 외국인 또는 외국으로 인식하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일본열도에 이주한 가야인들이 단순한 선진문물의 전파자로서의 역할을 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가야의 여러 나라들이 신라에 의해 최종적으로 통합되는 6 세기 중엽에 이르기 까지 가야계 왜인 으로서 가야의 언어나 습관 그리고 문화에 익숙한 장점을 살려 왜의 가야에 대한 외교에 활약 하였으며, 왜의 사신으로 가야에 파견되기도 하였다.일본열도에 이주하였던 가야인들의 흔적은 무려 천오백년 가량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많이 남아있다. 현재 우리들은 고대의 문헌적 자료나 고고학적 자료, 그리고 가야에 관련된 지명이나 전승등을 통하여 이러한 사실들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으며, 그 수효 또한 적지 않다.그 예로 평양과 일본열도에서 화천(왕망전)이라는 화폐가 출토된 사실을 들 수 있다. 화천은 10년여 밖에 사용되지 못한 화폐이며, 3세기 경에 황해도에서 일본열도를 왕복하는 데는 2년 반 정도가 걸린 것을 고려한다면 왕복하는데 2년 이상이 걸렸던 바닷길의 곳곳에 화천의 흔적이 있다는 것은 빈번한 왕래를 보여주는 것이다.5. 임나일본부설에 관하여1) 지금까지 한일학계의 임나일본부설 연구1 출선기관설출선기관 이란 일본어적 표현으로 출장소 또는 출장기관 과 같은 뜻이다. 얼마전까지의 일실은 이 임나국을 중심으로 신라 백제 고구려 왜가 서로 각축하였던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임나일본부 는 한반도의 가야지역과는 전혀 무관하며, 일본열도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로서 규정지었다. 고대 일본의 한반도 남부에 대한 진출론을 완전히 거꾸로 하여 고대 한국의 일본열도진출론을 확립하고, 같은 맥락에서 임나일본부 의 문제를 해석하였던 것이다. 이 연구결과의 옳고 그름에 대하여는 재론의 여지도 적지 않으나, 고대한일관계사의 연구에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으며, 기본적인 발상에 대한 재검토를 촉구하였던 의미는 크게 평가하여 좋을 것이다.3 가야의 왜인설일본내의 출선기관설 에 대한 재검토의 분위기와 북한의 연구에 자극되어져 일본연구자의 입장에서 제기되어진 수정론의 하나가 가야의 왜인설 이다. 선사시대부터 가야지역과 일본열도의 교류는 활발하였으며, 그 결과 일본열도에 한반도의 주민이 이주하였던 것과 같이, 가야지역에도 일부의 왜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게 되었으며 임나일본부 는 그러한 왜인들 내지는 왜인과 한인과의 혼혈인들을 통제하는 행정기관으로 성립하였다고 해석하였다. 임나일본부 에 대해서는 근현대의 영사관과 비슷한 성격으로 이해하였으며, 가야지역에 거주하는 왜인들의 자치기관과 같은 성격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가야지역에 있어서 왜인들의 집단적 거주가 문헌적으로나 고고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4 백제군사령부설과거 일본의 출선기관설 에 대한 한국학계의 본격적인 비판 및 대안의 제시가 천관우에 의해 이루어 졌다. 일본서기 에 보이는 임나(가야) 관련사료 중에 일본 이 주체로 묘사되어 있는 기사들 가운데에는 백제를 주체로 바꾸어 놓아 보면 사리에 맞게 되는 것들이 적지 않다고 전제하였다. 4세기 말 경에 왜가 가라칠국 을 점령하였다는 기술에서 보이는 역사적 사실이란 백제의 가야제국 정복이라고 해석하였으며, 6세기 중엽에 보이는 임나일본부 란 다름 아닌 임나백제부 와 같은 것이었으며, 임나백제부 는 백제가 군사적 목적으로 가야지역에 설없다.
1. 유토피아유토피아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토마스 모어로 1515년-1516년 사이에 유토피아' 라는 책을 저술함으로써 처음 사용하게 된다. 원래 유토피아란 그리스어 ou(no)와 topos(place)의 합성어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곳 이라는 뜻이었으나 이 작품을 계기로 이상향을 뜻하게 된다.수많은 사람들이 유토피아를 꿈꾸고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왔는데 이런 양상은 시대별로 다르고 동서양이 차이를 보인다.동양에서는 유토피아를 말할 때 주로 무릉도원을 떠올리는데 무릉도원이란 복사꽃의 숲이 우거지고 잡목 하나 없이 복숭아 나무만이 감미로운 향기를 풍기고 아름다운 물줄기와 산이 어우러지는 곳이다. 이 곳에는 지극히 소수의 사람들이 자연과 벗하며 농사일을 하며 다른 마을과의 별다른 교류없이 살아간다. 동양에서는 이런 자급자족적이며 지극히 전원적인 마을을 떠올린다.반면 서양에서는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에서 나오는 것처럼 유토피아란 농사일을 하며 자급자족적으로 살아갈지라도 그 안에 나름대로의 조직이 존재하고 다른 곳과의 교류를 통해 성장하기도 하고 변화하기도 하는 약간은 도시적인 모델을 유토피아라고 생각한다.즉, 동서양의 차이란 둘 다 자연친화적인 환경에서 생활하는 삶을 꿈꾸기는 하나 동양은 산 속에 묻혀 사는 그야말로 신선같은 삶을 유토피아라고 생각하며 서양은 자연과 밀접한 곳에서 생활하나 비교적 도시적인 환경을 유토피아적이라고 생각한다.2. 유토피아의 아이디어가 적용된 계획사례유토피아의 개념이 단지계획에 적용된 사례 중에서 르꼬르뷔제의 브아쟁계획, 하워드의 전원도시, 파울로 솔레리의 생태도시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르꼬르뷔제는 고층화로 밀도를 집약시켜 남는 공지에 충분한 녹지를 조성함으로써 이상도시를 실현하려 했고 하워드는 전원 속에서 직장과 주거를 갖춘 반독립적인 도시를 이상도시로 생각했으며 솔레리는 환경친화적인 생태도시를 이상도시라 칭했다.(1) 르 꼬르뷔제의 브와쟁 계획르 꼬르뷔제는 건축가로써 각각의 건물을 설계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시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을 가졌던 인물이다. 이런 관심만큼이나 도시에 대한 수많은 계획안을 발표했으며 그 중 몇몇은 실행에 옮겨졌다. 그는 이상도시를 계획했으나 그에게 이상도시란 지어질 수 없는 이상향이 아니라 현재 존재할 수 있는 도시라고 생각했다.{브와쟁계획1실행에 옮겨진 것 중 브와쟁 계획과 알제의 도시계획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먼저 브와쟁 계획은 300만을 위한 도시 계획안을 파리를 실제 대지 삼아 계획된 것이다.{브와쟁계획2300만을 위한 도시계획이란 도시의 혼잡을 해소하고 밀도를 높이며 교통수단을 확충하고 조경 공간을 확대한다는 4가지 원칙을 가지고 있다. 즉, 좁은 땅에 많은 사람들을 수용하여 녹지를 확보하고 하늘과 햇빛, 나무와 바람 등 순수한 즐거움을 보장하는 동시에 교통과의 연계로 외부와 연결되고 확장되는 열린 도시로서의 성격을 충족하게 된다는 것을 기본 목표로 하였다. 이런 생각은 현대의 아파트와 유사하게 느껴지며 비록 르 꼬르뷔제의 이상적인 생각대로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현대를 정확하게 예견한 것으로 보여진다.밀도를 높인다는 차원에서 계획된 중심부 건물은 철과 유리, 콘크리트 등을 이용한 데카르트 마천루로써 60층 높이에 만명에서 오만명까지의 인구를 수용하게끔 되어 있다. 이는 십자형태로 24동이 질서정연하게 배열되어 있다. 그 주위에 10층 정도의 주거 건물들이 충분한 녹지공간을 가지고 배열된다. 공원에는 상업시설과 편의시설들이 들어서고 서쪽에는 공공건물이 들어서고 그 바깥쪽에는 도시 확장을 위한 예정지로 정원이 조성되어 있다. 동쪽은 교통의 거점과 산업시설이 자리잡고 있다. 이 도시는 중심부에서 60만의 인구를 수용하고 외곽의 전원 도시들이 200만 이상의 인구를 수용한다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브와쟁 계획은 주로 세느강 북쪽에 계획되었는데 오래된 파리의 구조 안에 현대적인 마천루를 밀어넣는 식이었다. 르 꼬르뷔제는 기존의 구조와 조화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다 밀어버리고 새로운 도시를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구시가지의 스케일을 무시하는 엄청난 크기의 마천루가 들어서게 되었고 기존도로와는 상관없이 간선도로가 자리잡게 됐다. 이런 요소들이 이상적인 도시를 건설하겠다는 르 꼬르뷔제의 의사와는 반대로 현대에 와서 비난받는 이유가 되었다. 또한 고층건물로 인한 공지 확보로 지가상승을 유도하고 그로 인한 투자를 유도한다는 생각이 긍정적인 측면보다는 실제로는 투기를 유발하게 되었다.{전원도시개념도(2) 하워드의 전원도시전원도시라는 개념을 처음 제시한 사람은 에베네저 하워드라는 인물이다. 하워드는 여러 직업을 경험하고 유토피아 소설에 감동을 받아 이상주의에 눈을 떴다.{레치워스전원도시의 주요 개념은 6000에이커의 토지에 1000에이커의 전원도시를 짓고 나머지는 자본주의적 농지로 계획했다. 인구는 3만명, 농지에 2만명을 계획했다. 전원도시의 시가지 패턴은 방사환상형으로 중심부에는 광장, 시청, 박물관 등의 공공시설이, 중간에는 주택, 교회, 학교 등이, 외곽에는 공장, 창고, 철도 등이 최외곽에는 대농장, 임대농원, 목초지 등의 농업지대가 입지한다.전원도시란 대도시와 전원의 매력을 버리지 않고 주거와 직장을 갖춘 반독립적인 소도시이다. 즉 직장과 주거가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베드 타운과는 다른 성격이며 도시내에 직장을 두는 개념은 그 이전의 종업원 도시와도 다르다.하워드가 위대한 것은 자신의 이론을 토대로 이상도시를 실제로 건설했다는 점이다. 그는 전원 도시 회사를 설립하고 레치워스와 월윈을 건설했다.레치워스 전원도시는 런던에서 54km 떨어진 지점에 건설되었다. 당초, 인구 3만명의 도시로서 거주 지역 1250에이커 주위에 그린벨트 지역 2500에이커 전체적으로는 약 4500에이커의 규모로 계획되었다. 전체 계획은 바리 파커와 레이몬드 언윈의 설계로 이루어졌는데 각 주택을 일종의 모델하우스로 설계한 건축가로는 H.M. 베일리 스코드, G. 루카스, H. 리크나우가 있다. 자연경관을 도입하고 철도역을 중심에 두면서 방사상으로 도로를 배치한 계획안은 현재에도 잘 유지되고 있다.웰윈은 런던에서 30km 떨어진 곳에 세워졌으며 첫 번째보다 훨씬 나은 성과를 거두었다. 이곳은 정부차원의 확산운동, 신도시 정책, 1946년 신도시법의 통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그렇지만 전원도시의 원래 개념은 직주근접형의 자립적인 도시였는데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이곳은 런던으로 통근하는 주민들이 대다수인 도시였다. 이것은 주택지로서의 매력은 충분하나 교통기관의 급속한 발달로 모체 도시에의 의존을 강화시켜 자급자족이 붕괴되어 버린 탓이다.레치워스 전원도시는 20세기에 이념과 실천이 기적적으로 탄생된 도시로 현재도 많이 참조되고 있으며 매력적인 외관으로 20세기 도시의 미래상을 제시하는 이상의 실현이었으며 그 이념에 공감한 사람들이 유지하고자 했던 도시였다.(3) 솔레리의 아르코산티우리나라에서는 솔레리가 단지 생태건축가로 알려져 있으나 스는 한 시대를 고민한 철학자이며 사상자이자 건축가이다. 그는 20세기의 현실 진단을 바탕으로 미래도시를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 유토피아적 건축가이다. 현재 그는 애리조나의 아크로산티에서 도시를 구축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그의 도시는 거친 대지에 뿌리박은 한 식물이며 거주를 위해 스스로 자라나는 최소 단위의 숲이다.솔레리는 건축(architecture)과 생태학(ecology)을 합친 합성어인 아르콜로지라는 개념을 가지고 생태학을 건축에 응용하여 삼차원으로 구축하고 있다. 이것은 복잡성과 유기체성에 토대를 두고 있는데 유기체가 발전할수록 그 내부의 복잡성은 커지면서 집약되고 최소화 체계로 전이되는 것처럼 도시 또한 똑같이 진행된다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도시의 유기체성을 도시효과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도시효과란 모든 요소들이 긴밀하게 연관되고 서로 맞물리고 얽혀 있고 상호 작용하는 방식으로 현실이 조직되도록 하는 것이며 어느 한순간에 이것은 삶을 창출해 내고 의식을 형성해 낸다. 즉 도시효과란 도시와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삶의 시작부터 중요하게 대두되는 무엇이다. 이것들은 차츰 한데 어우러지고 이러한 어우러짐을 통해 촘촘하게 짜여진 행동의 켜들을 가질 수 있도록 겹겹이 접혀진다. 이 겹칩은 더 강렬하고 풍부한 통합된 조건으로 향하게 된다.
IBA PROJECT20005525 송효정IBA 부지, 베를린1977년 베를린의 낙후지역을 개발하여 낡은 주택을 개선하고 새로운 주택을 공급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처음에는 새로운 주거 자산 겸 영구적인 전시회를 표방하였으며 전 도시에 걸친 야심적인 신축 및 재생 프로그램을 실현하기 위해 공적자금과 공공의 이익, 사적 부문의 개발, 그리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들을 한데 엮었다. 건물을 교외지구에 따로 두는 것이 아니라 기존 도시와 융합한다고 주장했다. IBA는 신축과 재생을 통해 베를린의 역사적 구조, 사회문제, 빈곤지역의 경제적 요구와 맞물려야 하는 복합적인 도시 프로젝트이다.클라이휘스를 신축부분의 감독으로 하르트 발테르 하머를 재생부분의 감독으로 정했다. 클라이휘스는 베를린을 대대적인 수리가 필요한 절음발이 도시로 간주하고 도시의 쇠퇴 원인을 비정치적, 무미건조한 건축. 자동차 중심의 도시교통 등으로 보고 이를 IBA를 통해 해결해보고자 했다.디자이너들이 가졌던 공통적인 문제는 베를린 장벽으로 서부 교외 지역은 전통적인 중심으로부터 단절되었다는 점과 서베를린 은 과거 제국시대의 일부 도심을 제외하고는 완전한 규모의 도심이 아니었다는 점이다.부지는 테겔지구~ 남부 티어르가르텐지구 4곳과 루이젠슈타트, 크로이츠베르크 SO 36지구로 정했는데 남부 티어가르턴과 남부 프리드리히슈타트는 신축의 측면에서 루이젠슈타트,크로이츠베르크 SO 36은 재생의 측면에서 계획되었다.테겔지구 전원으로 남아야 한다고 주장. 숲과 호수가 전 도시에 레크리에이션 공간을 제공. 광장 프라거 플라츠 폭력, 교통계획에 의해 없어진 곳. 건물들을 일종의 벽처럼 재건. 롭 크리에, 남부 티어가르틴 2차 대전 전 외국공관. IBA 중 가장 황폐. 인터바우 형태의 전시회 부지로 예정. 라우흐가 개발 임대 및 자가 주택 건설 계획. 롭 크리에가 마스터플랜을 계획. 남부 프리드리히슈타트 전쟁 전 베를린 상업 심장부. 나치 활동의 중심부 철저히 파괴. 과거의 도로망 남아있음. IBA는 거리의 크기를 복원, 전쟁전 주요 가로변의 전통적인 주거 구획의 규모를 그대로 유지. IBA는 이 곳을 상업, 주거, 공업기능이 적절히 조합된 노동자계급 지역으로 만들어지길 원함.노이바우(신축)사회주택이 주된 목적. 그 지역의 역사와 전통에 일치하는 디자인, 역사적인 연속성을 필수 요소로 하는 디자인을 건축가에게 요구, 기존 도로망 유지. 고층 아파트가 아니라 임대용 아파트 위주로 계획했다. IBA의 힘부족으로 설계변경과 취소되는 일이 빈번히 일어났다.프라거 플라츠Rob Krier가 디자인한 주거동으로 지붕모양이나 파사드의 일부가 당초 계획안과 약간 다르게 수정되어 건설되었다. 프라거 프라츠 광장의 모퉁이에서 랜드마크 역할을 하고 있으며, 판상형 주거동과 연결된 탑상형 주거동이다.126-4b남부 티어가르턴 지역BLOCK 189각각의 건물은 중층 타워형 주거동을 기본으로 하여 중정을 형성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9번부분의 Rob Krier가 설계한 건물이 입구를 형성하면서 서있고, 입구부분의 위치 때문에 상징적인 특성이 외관에 나타나 있다. 각 건물은 평이한 편으로 중층 타워의 외관이 단조로워지는 것을 막기 위한 파사드의 분절을 의도하고 있는 것 정도가 변화요소로 작용한다.돌과 회반죽을 바르지 않은 벽돌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베를린의 전통건축의 특징이다. 알도로시는 비독일계 건축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베를린의 전통을 재해석하고 다른 곳의 전통과 성공적으로 융합시켰다. 이는 역사적으로 건축언어와 도시 환경을 풍부하게 하는 강력한 수단이 되었다.P204-15 – 제임스 스털링기존 건물에 이어서 하나의 블록을 형성하고 있는 주택이다. 기존의 건물은 양식적인 건물로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주는데 반해 증축된 부분은 상당히 패셔너블한 분위기를 갖고 있다. 기존건물은 전면도로에 면해 있는데 이를 중심으로 후면에 증축되어진 건물과 함께 중정을 형성한다. 강렬한 색채와 함께 정형화된 격자를 기본으로 하는 입면이 반원형의 메스를 감싸고 있다. 제임스 스터링의 포스트 모던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데 파스텔톤의 원색, 격자화된 창과 채양, 원형의 매스 등이 그러한 느낌을 강화한다.P220-18 – 웅거스전후면에 일자형 주거동이 배치되어 사이공간에 보행공간이 조성되어 있다. 전면은 상당히 큰 대로에 면해 있는데 박공형의 지붕이 단조로움을 완화하고 하부는 셋백되어 있어서 가로와의 관계를 구축한다. 내부는 직접 주거동과 옥외공간이 만나는 방식을 피하기 위해 매스가 수직적으로 분절되어 테라스형식을 이용한 스케일 다운이 이루어지고 있다. 내부 보행공간은 넓은 공간을 확보하기보다는 수목으로 우거져 있어서 좁은 숲속 길을 걷는 듯한 느낌을 형성한다. 따라서 활동적인 옥외공간이용은 이루어지지 않고 정적인 분위기를 형성한다.남부 프리드리히 슈타트 지역P5-87a - 피터아이젠만피터 아이젠만의 건물로 IBA지구에서 비교적 잘 알려진 건물이다. 아이젠만의 설계답게 상당히 규칙적인 격자구조를 갖고 있다. 입면에는 강렬한 색채의 격자띠가 있는데 실제로는 이 색채가 잡지에 소개되는 것들과는 달리 약간 탈색한 듯한 색조로 되어 전체적인 느낌이 약화되어 있다. 총37세대가 계획되어 있는데 이중 11세대는 노인용 주거로 되어 있다. 아이젠만은 건물은 과거의 흔적이 갖고 있는 무의식과 집단적 기억을 들추어 내는 작업으로 본다. 18세기 이후 이 지역의 분위기와 베를린 장벽의 상징 등이 이 건물에 용해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설명을 듣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건물은 건물로서 설명되어야 한다.4-64 Block베를린 장벽으로 인하여 거의 유기되어 있던 대지에 도시 및 건축의 재건을 통한 활력을 도모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계획된 주거건물이다. 번잡한 가로에 면하여 있지만 도시내부에 주거건물(inner-city residential building)을 건설한다는 개념을 가지고 계획된 것이다 도로에 면한 건물의 파사드는 대단히 개방적인 필로티, 강렬한 원색조의 색채 단변방향 : 거대한 필로티 장변방향 : 빨간 색의 원색조 계단(도로에 면하는 부분) 은밀한 곳을 들어가는 듯한 상반된 중정으로의 접근법 장변방향의 건물이 가로와 만나는 방식은 계단과 도로에 직접 면하는 상가들이다. 중정은 밖의 세상과는 다르게 대단히 정적이고 사적인 분위기이다. 전반적으로 환경친화적인 조치들이 이루어져 있다. 여러 건축가들이 참여하여 토막 토막 설계하였기 때문에 하나의 콤플렉스를 이루면서도 서로 이질적인 건물들이 이어져서 마치 시간을 두고 별도의 건축행위가 이루어진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64a64c64e64fP4-66a – 렘 쿨하스대로변에 위치한 이 건물은 베를린 장벽이 있던 시절의 check point가 위치하던 지역이다. 전면은 커텐 월로 마감되어 있지만 후면은 데크를 이용한 전용정원 등이 있고, 상층부는 복도가 2개층이 보이드되고 최상층으로 접근하는 통로는 이 복도공간에 설치되어 수직적으로 분리되지만 하나의 공간에 통합된 가로를 형성한다. 후면공간은 이 복도공간에서 직통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건물내에 가로를 형성하고 있는 독특한 구성방법이다. 전체는 31세대로 구성되어 있다.28/30 BLOCK거대한 블록이 교차하는 방식으로 구성된 이 단지는 가운데 중정을 기점으로 각 블록의 중정이 연결된다. 각각의 중정은 가운데 광장의 모서리 부분과 연결되어 있는데 이 모서리에 설치된 통과동선으로부터 갑자기 넓은 공간으로 진입하는 공간의 변화를 느끼게 한다. 각각의 중정과 중정을 둘러싸고 있는 주거동은 각기 분위기가 다르고 설계자도 각각 다르다.포츠다머 광장 계획안하인츠 힐머와 크리스토프 자틀러의 계획안 과거도로를 복원하고 건물높이를 10~12층으로제한하고 연속된 공공 광장을 구축하고 베를린 주변 블록의 건물 형태를 유지한다.O.M 웅거스 지금 사라진 프리드리히슈타트 거리 체계 위에 현재의거리 시스템을 겹쳐 12개의 거대 마천루를 반사유리를 사용하여 세운다.알트바우(재생)가장 성공적 손상되고 쇠퇴했던 지역에 활기. 보육원, 양로원이 기존건물과 어우러짐. 거주자들이 자신들의 주택 디자인과 건설에 참여. 건축가들이 노이바우와는 다른 태도를 취해야 했다. 건축주가 협력자이자 디자이너, 건축가는 파트너. 노이바우와 알트바우를 모두 진행한 사무소는 거의 없다. 어디서든 국제적인 스타 건축가가 건축가의 역할을 재정립하는데 흥미를 보인 적인 거의 없다. 심미적 계획이 아니라 주민의 의견을 존중.인필 프로젝트-닐룬트,푸트파르컨,슈튀르체베기본적인 철근 콘크리트 골조와 바닥평판을 개발하고 비숙련 거주자가 개인적인 요구와 선호에 따라 자신만의 정면과 입면, 칸막이, 발코니 들을 건설할 수 있도록 목재 건축 시스템을 고안했다. 그래서 다른 건물처럼 균형잡힌 입면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공사중인듯한 인상까지 풍긴다.IBA는 대체로 성공적인 Project였는데 이것은 정부의 지원과 주민참여, 독일의 건전한 경제 등으로 인하여 이루어진 성과였다.IBA와 베를린의 미래단점 도시적 개입이라기 보다는 비실용적인 실천. 장소에 대한 개념이 불확실하고 고상한척 도시에 무관심했다. 유명 건축가들에게 나타나는 문제점. IBA의 유명건축가 고집. - 다양한 형태의 건물과 광범위하게 변화하는 업무에 여성 및 소수민족 건축가들을 참여시킬 이상적인 기회를 잃었다. 복합 용도의 계획을 허용하지 않는 프로그램의 구조적 허약성. 고립된 주거 지역으로 남게 됐다.{nameOfApplication=Show}
{{문화예술과 철학-------------------------------------------------------------------------------------전함{포템킨('하나를 위한 전체, 전체를 위한 하나)1. 줄거리이 영화는 총 5개의 에피소드로 나뉜다.'제 1장 사람들과 구더기, 제 2장 뒷갑판 위에서의 드라마, 제 3장 죽은자는 호소한다, 제 4장 오데사 계단, 제 5장 함대와의 조우' 가 그것인데 이것들은 결국 혁명의 완수라는 주제를 드러내기 위한 연결고리들이다.1905년 6월 오데사 항구에 정박한 포템킨호에서는 혁명의 기운이 넘치고 있다. 썩은 고기를 수병들에게 먹으라고 하자 그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고 갑판위에 집합도중 수병들에게 총살형을 내리자 바꿀린추크는 반란을 부르짖는다. 수병들은 권력을 가진 사관들을 제압하고 반란을 승리로 이끌어내지만 바꿀린추크는 사살되어 버린다.바꿀린추크의 시신은 오데사 방파제 천막에 안치되고, 오데사 주민들의 그를 애도하는 행렬이 줄을 잇는다. 주민들은 포템킨호의 수병들을 돕기 위해 전함으로 향하지만 그것도 일순간. 오데사 계단에는 병사들이 나타나 주민들을 진압하기 시작한다. 병사들의 총구는 불을 뿜고 주민들은 혼비백산하며 시체로 나뒹군다. 이때 포템킨에서 군본부로 대포를 발사하고 사태는 진정된다. 그러나 포템킨호를 향해 다른 전함이 다가오기 시작하고 전함은 긴박하게 돌아간다. 그러나 다른 전함은 포템킨을 향해 열광적인 환호를 보내고 있었다.2. 영화사에서의 위치수상 : 1925년 벨기에 세계영화제 1위, 1958년 브뤼셀 만국박람회 국제 우수영화 1위'전함 포템킨'은 에이젠슈테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예술작품이자 이와 동시에 가장 타 영화에 영향을 많이 끼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영화가 상영된 이후, 에이젠슈테인은 물론 새로운 소비에트 영화는 세계적으로 명성을 획득했고, 영화 언어에 있어 몽타주라는 신개념을 확립함으로써 중요한 영화사적 공헌을 했다.3. 영화의 특징(기술적인 면, 예술적인 면)이 영화에서 특이한 것으로 칭송받는 것은 몽타주(Montage)기법이다. 몽타주는 불어에서 유래하였는데, 'monter'는 단순히 '증가하다'나 '조립하다'라는 뜻을 지닌다. 편집을 통한 이 조립하고 증가하는 일은 소련 영화감독들에게 있어 궁극적인 창조행위가 되었다.에이젠슈테인(S. Eisenstein)은 1920년대 자신의 영화들에서 영화 속의 모든 시각적 기호에는 충돌과 갈등이 존재해야 한다는 쿨레쇼프의 이론을 적용시켰다. 쇼트들을 병치시키면 그것들이 충돌하거나 갈등하게 되고 이 충돌로부터 의미가 생성된다는 것이다.에이젠슈테인은 이미지를 서로 관련이 없는 그림 문자를 병치시킴으로써 새로운 관념과 새로운 단어를 창조할 수 있는 중국이나 일본의 상형문자 같은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이처럼 상호 관련이 없는 이미지들의 충돌을 지적 몽타주라고 불렀다4. 영화감상시 중점을 두어야 하는 부분주로 몽타주기법에 대한 것을 중점을 두고 감상을 해야 한다. 다음은 그 예이다.1 취사병의 분노편집을 통한 역동성의 추구는 몽타주 영화들이 보여주는 가장 일반적인 특색의 하나이다. 이는 당시의 다른 유형의 영화들보다 평균적으로 더 많은 수의 쇼트를 사용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취사병이 분노를 느끼며 접시를 깨는데 10개의 쇼트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개별 쇼트들 모두는 짧기 때문에 행위는 순식간에 일어난다. 일반적으로 빠르고 리듬있는 편집은 중복편집이든지, 생략편집이든지 간에 마찬가지이다.이 씬에서 에이젠슈테인은 쇼트에서 쇼트로 넘어갈 때 수병의 위치를 일부러 부조화시킴으로써 모순적인 공간을 창조한다. 그 수병은 왼쪽 어깨 뒤쪽에서부터 접시를 휘두르는데 그 다음 쇼트에서는 이미 오른쪽 어깨 위로 접시를 들어올리는 모습이 보인다.2 사자 석상전함의 선원들이 자신들의 처지에 우호적이었던 시민들이 학살당한 것에 복수하려고 오데사 거리를 향해 발포한 뒤에 따라오는 쇼트들의 병치이다. 불을 뿜는 점함의 대포 쇼트에 이어 목표물인 영화관의 큐피드 쇼트가 따라온다. 이 쇼트는 포탄이 영화관의 문을 파괴하는 쇼트로 컷된다. 이 쇼트 다음에 세 가지로 분리된 일련의 사자 석상이 뒤따라 나온다. 첫 번째는 엎드려 있고, 두 번째는 머리를 쳐들고 있고, 세 번째는 포효하는 모습으로 일어서 있다. 이 다음에 완전히 파괴되어 폐허가 된 영화관의 쇼트로 컷한다.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시퀀스에서 사자 석상이 아무런 맥락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사자 석상은 선원들의 분노에 찬 반라과 포화, 그리고 이전에는 수동적이었지만 이제는 깨어난 분노의 환기를 은유적으로 비교하도록 하면서 하나의 관념을 창조하기 때문에 그 시퀀스 내부에 위치 지워진다. 이 은유는 에이젠슈테인이 깨어나는 사자 석상을 선택한 덕분에 더욱 풍부해진다. 그는 수면 상태에서 완전히 깨어남과 도시의 석상들도 분노에 찬 반란군을 격려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3 오데사의 계단밝고 어두움, 수평과 수직, 긴 쇼트와 짧은 쇼트, 클로즈업과 롱 쇼트, 정시 쇼트와 이동 쇼트 등 양국면을 병치시켰다. 쇼트들 간의 두드러진 조형적 대조를 만들어냄으로써 갈등 편집을 더 진전시켰다. 커트는 구성상에 있어서의 뚜렷한 방향 변화를 낳기도 했다. 이 장면에서 그런 커트들이 내는 점증적인 효과는 긴장감을 더하도록 도와준다.또한 감독의 편집 방법이 요구하는 대로 상당수의 카메라를 다양한 공간에 배치되었다. 최고조로 극적인 행동의 순간에는 각 쇼트들의 두 프레임 정도로 짧고, 그 내용은 때때로 공포스러울 지경이다. 아래로 휙 내려지는 코사크병의 칼, 여인의 깨어진 안경과 피로 얼룩진 얼굴 등이 그것이다.5, 나의 감상영화를 꽤나 많이 보는 편인데 거의 대부분이 헐리우드 영화라서 그런지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이라는 감독이 있는 줄도 몰랐고 전함 포템킨이라는 영화가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내게는 처음 보는 러시아 영화 그리고 처음 보는 무성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