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dernism & Post-ModernismHemingway'sThe snows of the KilimanjaroJoseph Conrad'sThe Secret Sharer실존적 위기 의식과 소외감, 고립감과 같은 주제 면에서 본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류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전대 미문의 제1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 많은 사람들은 극도의 위기의식과 비극적 상실감을 느꼈으며, 이런 위기 의식이나 상실감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이르러 한결 더 첨예하게 부각되었다. 적어도 주제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바로 앞서 일어난 문학 전통이나 이론을 거의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과 계승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작품에 형상화하고 있는 실존적 인생관은 대개 다음과 같다.1)20세기 현대인이 처해있는 비극적 상황에 남다른 관심을 보여준다. 삶을 무의미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그들은 허무주의와 공허감을 현대인의 일용할 양식으로 간주한다.2)개인과 사회의 사이에서 생겨나는 갈등과 긴장의 문제를 즐겨 다룬다. 이런 주제는 19세기 사실주의 소설에서도 중요하게 취급되어 있는 문제이지만,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사실주의 소설에서는 이 갈등이나 긴장은 어디까지나 사회 쪽의 승리로 끝나기 일쑤인 반면, 모더니즘 작품에서는 오히려 개인 쪽에 동정이 기울어진다.3) 자유의지: 개인이 사회의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유의지를 행사,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자유의지와 선택의 문제 역시 모더니즘 문학이 지니고 있는 중요한 특색 중의 하나이다. 모더니즘 문학이 19세기의 사실주의와 자연주의 문학 전통과 구별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점에서이다. 전통적인 사실주의, 특히 자연주의 작품에서는 인간의 모든 행위는 유전이나 환경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으로 파악함으로써 인간에게 아무런 자유의지를 인정하지 않았다.4) 이렇게 자유의지를 구사하여 사회의 모든 제약이나 구속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개인이 지불해야 되는 값비싼 대가는 바로 소외나 고립이다. 이들의 소외는 어디까지나 모든 사회적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개인의 참다운 자유와 정체를 지키고자 하는 노력에서 생겨나는 피치 못할 결과인 것이다. 모더니즘 작품에서 이 소외와 고립의 문제와 그것으로부터 파생되는 의사 소통의 문제만큼 일관성 있게 취급되고 있는 주제도 드물 정도이다.Hemingway의 The Snows of the Kilimanjaro를 통하여 우리는 헤밍웨이가 다루고 있는 인간의 내면적인 갈등을 잘 알 수 있다. 즉 주인공 해리를 통하여 그의 내적 존재와 외적 존재간의 모순과 갈등을 잘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양면성은 한 인간과 그 인간간의 내부적인 투쟁에서 나타나는 것이므로 순전히 자신의 갈등에서 빚어지는 것이다. 만일 주인공 자신이 죽음을 맞이하여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리고 편안히 숨을 거둘 것을 원한다면 그의 내적 존재와 외적 존재간의 갈등은 하등의 의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특별하다. 그의 죽음은 특별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주인공의 마음속에 갈등을 야기 시킨다. 그에게 있어서의 죽음은 그 자신의 단순한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하여 의지가 다시 살아나는 그러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의지를 통하여 큰 승리를 쟁취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이 나타내는 의지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개인적인 것이므로 이길수 있는 자기가 신과 이길 수 없으리라고 생각되는 자기자신과의 다툼에서 그 진실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모더니즘 소설들은 작중인물의 성격묘사에 있어서 기존의 소설들과 차이를 보여준다. 종래의 소설들에서는 성격이 뚜렷하고 사회적 신분이 안정된 주인공들이 등장했으나 모더니즘 소설에서는 사회에 적응 못하는 반사회적인 부적응자들, 추방자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내성적이고, 감성이 예민하고, 지적이어서 제도화된 세계에 적응 못하는 고립된 인물이거나 때로는 추방된 유랑자로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예술가로서의 길을 추구하기도 한다.Hemingway의 The Snows of the Kilimanjaro를 보면 헤밍웨이는 개인이 자신의 내부에 깃든 갈등의 존재를 파헤치며 스스로 승리의 의지를 불태우는 모습을 이 작품을 통하여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이 소설에서는 죽음이라는 공포가 항상 주인공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으며 성취욕구를 방해하는 요소가 되나 주인공은 오히려 이를 자신의 내적인 갈등을 통하여 기꺼이 감수한다. 드디어 그의 죽음은 갈등으로부터 해방되어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거대한 킬리만자로산의 눈으로 나타나게 된다.이 소설을 플롯을 살펴보면 주인공 해리는 사냥을 좋아하고 아프리카의 자연이 그리워 킬리만자로 산으로 돌아온다. 아프리카는 그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행복한 곳 중의 하나이다. 비록 화려하거나 사치롭게 생활을 하기에는 어려운 곳이기는 하지만 그는 자신의 묵은 때를 씻고 산과 더불어 강한 의지를 되살릴 수 있기 때문에 좋아하게 된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사냥도중에 다리의 상처를 입는다. 그것은 순전히 그의 실수로 일어난다. 상처를 입게 되는 과정을 보면 그는 사냥도중에 들판에서 노는 영양의 떼를 발견하고 이 모습을 사진에 찍으려 이동하다가 우연히 그의 무릎 부분이 가시에 찔리게 된다. 그는 약을 바르지 못한 채 2주일을 보낸다. 그후 그의 다리는 자신도 모르게 점점 썩어 들어가게 된다. 주인공 해리는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나 상처가 심하여 썩어 들어감에 따라 마음에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그는 점점 마음에 내적인 갈등을 갖는다. 그는 그의 강한 의지를 잃지 않기 위하여 과거의 처참했던 광경을 자주 회상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의지를 되살리려고 한다.Conrad의 소설 ‘The Secret Sharer' 에서도 이러한 소외를 발견할 수가 있는데secret sharer를 탈출시킴으로 해서 배와 완전히 하나됨을 느끼고, 새로운 운명을 향해 헤엄쳐 가는 그를 자신과 동일시함으로써 소외감으로부터의 탈출을 느낌은 장면에서 배 안에서 완전한 이방인이었던 이전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그의 소외감이 어느 정도 해소된 것으로 볼 수 있고 또한 secret sharer의 탈출도 주인공의 소외로부터의 극복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배와의 하나됨이 곧 다른 구성원들과의 하나됨을 의미할 수 없으며 탈출하는 sharer와 배에 남아 있어야하는 자신의 모습 속에서 오는 괴리감을 생각할 때에 이것은 완전한 소외의 극복이라 할 수 없고 다만 새로운 형태의 확장된 소외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자신의 소외감을 극복하고자 했던 주인공은 이를 위해 secret sharer와 함께 자신의 것을 공유하기 시작하지만 이러한 identification은 소외를 극복하기보다는 또 다른 소외의 양상을 낳는 결과를 초래한다. sharer의 탈출과 배와 자신의 하나됨으로 인하여 소외가 극복되는 듯 하지만 결과적으로 완전한 극복이 아닌 또 다른 형태의 소외를 낳게 되고 또 다시 극복해야 할 소외의 문제가 남게 된다.대부분의 모더니즘 작가들은 20세기 현대인들이 처해있는 소외, 고립, 절망 등의 특수한 비극적 상황에 동질감을 느낀다. 고립과 소외는 인간 사이의 의사소통의 단절이 가져오는 사회적 문제인 것이다. 모더니즘은 특히 개인과 사회간에 일어나는 긴장관계를 조명한다. 대부분의 모더니즘 소설에서 주인공들은 선택에 있어서 갈등하고 주저하지만 자신의 길을 자신이 선택하고, 그것을 감수하는 용기를 보여준다. 주인공의 자유로운 선택의 의지가 안겨줄 수 있는 고통은 자기 추방과 소외 그리고 단절이다.The Snows of the Kilimanjaro 에서 헤밍웨이의 투쟁의지는 너무나 숭고하고 위대하기 때문에 종국에 가서는 주인공에게 대의를 달성케 하고 행복한 마음을 가지게 한다. 대의는 곧 주인공으로 하여금 한 큰 승리를 갖게 한다. 그리고 죽음은 한 큰 승리에 크게 기여하는 것이라고 헤밍웨이는 이 소설을 통하여 암시하고 있다. 헤밍웨이의 이와 같은 죽음은 모든 소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이다. 죽음을 예상함으로써 주인공은 항상 불안정한 심적 갈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 해리의 죽음은 주인공에게 참기 어려운 갈등을 주지만 주인공은 그것을 강한 의지로 극복한다. 그는 육체적인 병으로 종내 죽게 되지만 그의 혼은 다시 살아한다. 해리는 생물학적인 패배자는 될지언정 성스러운 행위를 함으로써 그의 정신적 존재는 살아남는 것이다.
‘검열’음반 심의의 문제로 본우리나라검열이란 말은 기분 나쁘다. 누군가가 나를 '검열'한다는 것을 기분 좋아할 사람은 없다. 그런데 불행히도 한국 사회에 검열은 남아 있다. 어떻게 남아 있는가? 물론 공식 용어는 검열이 아니라 심의다. 누가 누구를 심의하는가? 심의의 주체는 각종 '위원회'들이고 그 앞에는 대체로 '윤리'라는 단어가 붙어 있었다. 윤리위원회는 방송, 신문, 도서잡지, 공연 등 4개의 전담분야로 나뉘어 있었다. 영화 필름을 가위질하고, 음반에 금지 곡을 지정해 오는 등 '사전심의'를 해왔던 기구는 '공륜(한국 공연윤리위원회)'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현재 공륜은 사라졌다. 1996년 '위헌' 결정이 내려지면서 사전심의가 폐지되면서 '영상물 등급위원회'로 간판이 바뀌고, 새로운 심의기구로 '공연예술진흥협의회'가 만들어졌다. 이 변화를 알아보기 이전에 과거부터 돌아보자.윤리위원회에 의한 사전심의는 오랜 역사를 가진다. 박정희라는 사람이 대통령을 맡고 있을 때부터 있었으니 말이다. 젊은 독자들이 관심을 가질 지 모르겠지만 한국에도 '문화정책'이란 게 있기는 있었다. 1970년대의 '문예중흥 5개년 계획', 1980년대의 '새문화정책' 등이 그것이다. 당시 문헌들을 훑어보면 문화기반 조성, 민족사관 정립, 고급예술 진흥, 대중문화 창달이 설정되어 있다. 갑자기 왜 옛날 이야기냐고? 다른 게 아니라 이 정책은 '민족' 예술이나 '고급' 예술은 지원했을 지 모르지만(그래봐야 '관변' 예술을 만드는 것에 그쳤지만), '대중' 문화는 '창달'이라는 용어와는 달리 '심의(=검열)를 통한 배제'라는 기조를 고수해 왔기 때문이다. 검열의 결과는 '예 아니면 아니오'라는 결론을 도출했다. 즉, 한국의 검열은 권유나 주장이 아니라 금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왜' 이런 일을 했을까? 금지의 대상은 '퇴폐'와 '불온'으로 나뉘었다. 대중음악의 경우에 한정해서 말하면, 퇴폐란 '패배적, 자학적, 퇴폐적 가사'를 가진 경우였고, 불온은 '국가안보, 든 것을 일임한다는 발상 자체가 괴상한 것이다. 게다가 심의든 검열이든 일관된 시각 하에 이루어졌으면 문제는 덜 할 것이다. 실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1975년 225곡을 무더기로 금지곡으로 지정한 '폭거'가 그것이다. '동백 아가씨', '돌아와요 부산항', '아침이슬' 같은 '국민적 애창곡'이 금지곡이 된 이유는 지금도 불명확하다. '그때 상황이 그랬다'는 이건 좀 슬픈 일이다. 그렇지만 웃기는 일도 있다. 이건 주로 외국 음반에서 발견된다. Beatles의 'Revolution'이라는 곡이 있다. '1968년 혁명'이 발생했을 때 John Lennon이 혁명을 비아냥거리는 가사가 들어 있고, 음악은 신나는 Rock 'n' Roll이다. 그렇지만 '제목만 보고' 금지곡이 되었다. 1980년대 초 소련 정부의 대외정책을 비판한 Sting의 'Russians'라는 곡도 똑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그래서 국내에서 발매된 오래된 LP판을 보면 황당한 경우가 많다. 한두 곡의 금지곡을 삭제하거나 금지곡 대신 엉뚱한 곡을 집어넣은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사태가 이렇다 보니 음반업계에서는 가사를 '경미하게' 변조하여 심의를 통과하는 편법을 사용했다. 예를 들어 Nirvana의 'Rape Me'는 'Rate Me'로 제출하여 통과되었다는 말이 있다. 이런 편법마저도 1997년 '캐니발 콥스(Cannibal Corpse)' 사건으로 들통이 나서 음반사 직원이 구속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검열을 통한 배제라는 '기조'가 변한 건 아니다. 지금도 이 '기조'에는 변화가 없다. 아니 바뀐 게 있기는 하다. 1990년대 이후 '공연법'의 개정에 따라 사전심의는 폐지되었다. 대중음악의 경우에 한정해 본다면 1996년 국내음반에 대한 음반 사전심의제가 폐지되었고 최근에는 외국 음반에 대해서도 사전심의제가 폐지되었다. '섹스, 살인, 폭력 등을 선동하는 가사'는 작년만 해도 금지상태로 묶여 있었지만 이제는 '연소자 이용불가'라는 딱지를 붙여 나오고 있다. '금지 보듯 '등급보류'라는 최후의 수단은 과거의 금지나 진배없다. 또한 검열이 모두 사라진 것도 아니다. 특히 대중음악의 경우 한국의 대중음악계가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방송 심의는 남아 있다. 음반의 '제작'에 대한 심의는 사라졌어도 음반의 '실연(performance)'에 대한 심의는 남아 있는 셈이다. 몇몇 국내 음반의 경우 공들여 음반을 제작하고 뮤직 비디오까지 만들었는데 방송 심의에 걸린 경우가 있다. 최근의 예만 들어도 YG Family와 Hip Pocket의 음반의 그랬다. 한국 사회에서 '방송을 타지 못하는 음악'이 대중에게 알려질 기회는 거의 없다. 이럴 경우 경제적 손실을 감수해야 하는 것은 이전 시기와 다를 바 없다. 이 음반을 제작한 음악인의 경제적 손실일 뿐만 아니라 국민 경제적 자원낭비다. 굳이 경제적 손실이 전부는 아니다. 결국 자기가 자기를 검열하는 식이 된다. 공륜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머리 속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삶에 대한 자유로운 태도'나 '창조적인 자기표현'이라는 대중예술의 미덕이 나타날 수 있을까. 실제로 방송심의에 따르는 '피해 사례'가 속출하면서 또 다른 편법이 또 발생하고 있다. 막상 음반이 나온 뒤 방송심의에 걸리면 피곤하고 골치 아프니까 음반 제작이 끝나기 전에 기획자나 매니저가 가사지(歌詞紙)를 들고 방송국 주변에서 '의견'을 묻는 일이 발생한다고 한다. 이것 역시도 불필요한 비용이다. 이래도 '사전' 심의가 모두 폐지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일반화해서 말한다면 한국 사회는 '금지'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익숙하다. 문제는 금지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각종 편법을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이는 정말 서로에게 피곤한 일이다. 혹시 '피곤하게 만들어서 궁극적으로 포기하게 만든다'는 게 검열의 주체의 발상인지도 모르겠다. 요즘 검열 주체들의 말은 과거와 좀 달라졌다. 이전에는 '건전한 미풍양속 저해'라는 말을 즐겨 했지만 요즘은 '유해 환경으로부터 청소년의 보호'라는 말을 안고 '보호' 받으면서 자란 사람이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나아가 이렇게 자란 이들이 과연 '문화산업의 세기'라는 21세기를 책임질 수 있을까?외국 사례를 통한 우리 음반 심의 해결책의 모색1996년 악명 높은 공연윤리위원회가 정태춘 씨의 헌법 소원에 대한 위헌 판결로 폐지되고 사실상의 검열인 음반에 대한 사전 심의가 철폐되었다. 만세! 이제 정말 끝이구나. 이제 모든 창작 예술인에게 창작과 표현의 자유가 무한대로 보장되고 사상과 가치가 자유롭게 떠돌게 되는구나. 일체의 부당한 간섭이나 검열은 이제는 없어지는구나. 원래 스토리는 이렇게 되어야 하는 거였다.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재에도 사태는 별로 그렇지 않아 보인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위한 '투쟁'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왜 그런지 말하려면 좀 길지만 다른 나라, 특히 미국 얘기를 해야겠다. 정부가 직접 어떤 대중음악을 만들어야 하는지를 정하는(+정했던) 나라는 한국과 싱가포르 외에는 거의 없다고 들었다. 그렇다고 다른 나라는 무한한 예술적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고 있은 것은 아니다. 이런 나라들에서 검열이나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제한 등은 오히려 보수주의 단체(시민 단체?) 등과 얽혀있는 보다 복잡한 '문화 정치'의 문제다. 1980년대 중반 즈음 미국에서 몇 가지 사건이 계기가 되어 대중음악과 검열에 관한 논쟁이 미국을 격렬하게 달구었다. 대표적인 예는 Heavy Metal 음악의 메시지에 관한 것으로, '오지 오스본(Ozzy Osborne)'의 'Suicide Solution'이란 곡이 10대의 자살을 이끌었다고 하여 벌어진 소송 사건이었다. 또 하나의 소송 사건은 Hardcore Punk band 데드 '케네디스(Dead Kennedys)'의 사건으로 이는 'PMRC'라는 단체와 관련이 있다.대중음악을 규제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 가장 유명하고도 힘있는 단체는 바로 미국의 PMRC(Parents' Music Resource Center)였다. 사친회쯤으로 번역되곤 하는 이 '신단체는 Rock과 'Rap?Hip Hop' 음악이 '간접적인 아동 학대'라고 주장하며 주요 표적으로 삼았다. 반항, 신성모독, 성적 방종과 성도착, 폭력, 신비주의 등이 특히 전통적인 '가족의 가치'를 저해하는 그들이 꼽은 주요 주제였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 이데아'를 둘러싼 사탄주의 논쟁의 근거도 바로 이들의 주장을 본뜬 것이라고 볼 수 있다.PMRC가 표적으로 삼은 band 중 하나가 바로 'Dead Kennedys'였다. 그들은 Dead Kennedys의 곡 'Moral Majority' 가사, 그리고 초현실주의 미술가 '기거(Giger)'의 작품 '페니스 랜드스케이프(Penis Landscape)'를 담은 앨범 속 포스터가 외설이라고 주장하며 이들에게 'Porno Rock'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결과적으로 PMRC의 캠페인은 성공했다. 이들은 메이저 음반사에 압력을 넣었고 결국 음악 산업의 '자율 검열'을 추동해냈다. 정부에서 어떤 법이 나온 것은 아니었지만 '미국 음반 산업 협회(Record Industry Association of America)'는 자발적으로 화답하여 '부모의 조언이 필요함 - 노골적인 가사 Parents Advisory - Explicit Lyrics'라는 딱지를 붙이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수입된 웬만한 Rap?Hip Hop 음반에는 다 붙어있는 '바로 그 딱지' 말이다.다소 장황하게 소개했지만 이 일련의 과정은 검열이 단지 정부의 간섭 이상을 의미하는 상황이 얼마든지 가능하며, 그런 '검열'은 상업주의와 결탁하여 뮤지션의 상상력을 가둘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국에서 사전 심의는 지금까지 수 십 년간 대중가요의 소재와 표현의 다양성을 제한해왔다. 그렇지만 심의가 철폐된 이후에 얼마나 다양한 가요가, 얼마나 자유롭고 창조적인 표현이 나왔는지 의문이다. 방송 심의에 걸린다는 것은 음반 판매와 방송에 막대한 지장을 받는 것이었기 때문에 '알아서 기는' 상황이 벌어졌다는 심증이 생긴다. 특히 가벼운 사랑 얘기를 담은 발라드나이다.
우주의 팽창{우주 탄생의 실마리를 결정적으로 제공해 준 것은 우주는 정지해 있는 것이 아니라 팽창하고 있다는 현대의 관측 결과였다. 1924년 미국 천문학자 에드윈 허블(E. P. Hubble, 1889 ∼1953) 은 윌슨 산(山)천문대에 있는 100인치 망원경으로 우주를 관측하고 있었다. 허블은 우주에 우리 은하 이외에 다른 은하가 있는지, 그리고 다른 은하까지의 거리는 어떻게 측정할 수 있는지 하는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당시까지는 우주 공간에 떠 있는 성운(星雲, 구름 모양으로 퍼져 보이는 천체. 은하계 내 성운과 은하계 외 성운으로 크게 나뉘는데, 전자를 성운, 후자를 은하라고 하는 경우가 많음) 을 모두 우리 은하계 내부의 천체로 생각하고 있었다. 결국 우리 은하계가 우주의 전부였던 셈이다. 허블은 당시 세계 최대의 망원경을 이용하여 안드로메다 성운에 있는 매우 특이한 별을 관측하였다. 그것은 일정한 주기로 밝기가 변하는 세페이드(케페이드) 변광성(變光星) 이었다. 허블은 이를 이용하여 성운까지의 거리를 측정{) 외부 은하의 거리는 너무 멀어서 태양 근처의 별과 같은 방법으로 구할 수 없다. 가장 많이 쓰이는 은하의 거리 측정 방법은 은하에서 발견되는 세페이드 변광성의 변광 주기와 밝기 관 계를 이용하는 것이다. 세페이드 변광성의 변광 주기와 밝기 사이에는 일정한 관계가 있다. 따 라서 세페이드 변광성의 변광 주기를 측정하면 그 세페이드 변광성의 실제 밝기 즉 절대 등 급을 알 수 있다. 별의 등급을 알면 별의 겉보기 밝기 즉 실시 등급을 측정해서 그 별까지의 거리를 계산할 수 있다. 즉 m-M=5logd-5 '를 이용하면 된다. 여기서 m은 실시 등급, M은 절 대 등급, d는 거리를 가리킨다.할 수 있고, 그 결과 안드로 메다 성운이 우리 은하계 안에 있는 천체가 아니라 외부에 있는 천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우리 은하의 지름은 10만 광년인데, 안드로메다 성운까지의 거리는 220만 광년이다. 따라서 안드로메다 성운은 우리 은하계에 있는 천체가 아니라 외부 은하이다.이 사실로 우주에는 우리 은하 이외에 수많은 은하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 졌다.한편 우주의 팽창은 스펙트럼(spectrum) 분석을 통해 이루어졌다. 스펙트럼은 빛을 분산시켰을 때 나타나는 여러 가지 색깔의 띠다. 스펙트럼은 빛의 종류에 따라 조금씩 다르며, 스펙트럼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색깔은 저마다 밝기가 다르다. 이런 차이점을 이용하면 별의 온도를 잴 수 있다. 또한 별에서 나온 빛을 분석했을 때 한 가지 색깔이 빠져 있다면, 그별을 둘러싸고 있는 대기가 어떤 화학원소로 되어 있는지 알아낼 수 있다. 화학원소는 특정한 빛을 흡수하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스펙트럼에서 특정한 색깔의 빛이 빠져 있으면 별의 대기 중에 그 화학 원소가 있다는 의미이다.허블은 이런 스펙트럼 연구를 통해 다른 은하에 있는 별들의 스펙트럼에서 나타나는 공통된 사실을 발견했다. 외부 은하의 스펙트럼은 모두 흡수선이 붉은 색 쪽으로 치우쳐 있었다. 이와 같은 적색 이동(적색 편이) 은 어떤 물체에서 나온 빛이 원래의 파장보다 길어지는 현상인데. 이런 일은 어떤 물체가 관측자에게서 멀어질 때 나타난다. 반대로 물체가 관측자에게 가까워지면 원래의 파장보다 짧아져 청색 이동 현상이 일어난다. 이처럼 빛의 파장이 원래의 파장보다 짧아지거나 길어지는 현상을 빛의 도플러 효과 라고 한다. 허블은 이 치우치는 정도를 연구하여, 은하의 후퇴 속도는 그 은하까지의 거리에 비례한다{) 이것을 허블의 법칙이라 하며, V=H·r 이라는 관계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여기서 V는 은하의 후퇴 속도, r은 은하까지의 거리, H는 허블 상수이다. 허블 상수의 값은 아직 정확히 정해지지 않았으나, 50∼100km/s·Mpc 정도라고 추측된다.는 사실을 알아 냈다. 즉 멀리 떨어져 있는 은하일수록 더 빠른 속도로 우리에게서 멀어져 간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허블의 관측 결과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허블의 관측과 그 결과에 대한 해석은 너무도 명확했고, 따라서 우주가 정지해 있다고 완고하게 믿던 많은 사람들도 우주 팽창의 개념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이 때 곤혹스러워했던 한 사람이 아인슈타인(A. Einstein, 1879∼1955) 이었다. 일반 상대성 이론 방정식이 우주의 팽창이라는 개념을 함축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인슈타인은 우주는 정지해 있어야 한다는 관념에 사로잡혀 허블의 주장 이전에는 우주 팽창을 부정했기 때문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이 일을 자신이 일생에서 저지른 가장 큰 실수 라고 인정했다.현대우주론우주론은 우주의 기원과 그 거대한 구조 및 진화를 다루는 천문학의 한 분야이다. 천문학자들은 수학을 이용해서 가상의 우주 모델 을 만들고, 이 모델의 특성과 이미 알려져 있는 우주의 특성을 비교한다. 현대 우주론의 유명한 두 개의 모델로는 정상 우주론 (The Steady State Cosmology) 과 빅 뱅 우주론 (The Big Bang Theory) 이 있다.정상우주론 VS 대폭발우주론{정상우주론대폭발 우주론호일, 본디, 골드(1948)아인슈타인, 드 시터, 프리드만(1917)영원 불변시공간 자체의 팽창공간 내에서의 물질의 연속적 탄생시공간의 응축으로 물질 생성우주 온도 X우주 온도 = 3K준정상 우주론호일, 버비지, 나리카, 아프대폭발 우주론+급팽창 이론=현대 표준 우주론30-40년대: 우주 25억년 vs 지구 45억년50년대: 우주 나이 50 억년1965년: 우주 배경 복사 발견정상 우주론의 모델에서는 우주는 항상 현재와 같은 모양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해 왔다. 따라서 우주가 팽창하여 우주의 밀도가 작아지면 이를 보충하기 위해 우주 공간에서 새로운 물질이 계속 생성되어 일정한 밀도를 유지한다. 이에 반해 빅 뱅 우주론 모델에서는 우주가 한 차례의 대폭발로부터 팽창해 나가고 있다고 주장한다.빅 뱅 이론의 도입에 공헌한 벨기에의 신부 르메트르 (E. Lemaitre, 1894∼1966)는 1927년 뜨겁고 밀도가 높은 하나의 점이 폭발함으로써 우주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영국의 천문학자 프레드 호일(F. Hoyle, 1915∼ )은 1948년에 우주에 출발점이 있다는 생각을 거부하고, 우주는 어떤 장소와 시점에 있는 똑같다는 정상 우주론을 발전시켰다. 즉 우주는 한결같은 상태를 유지하는데, 그러기 위해 우주 공간에 새로운 물질이 일정하게 생성되어 우주의 팽창으로 빈 공간을 정확하게 메운다는 것이다. 그런데 물질의 생성은 1만 년 동안 1㎤ 당 수소 원자 1개 정도의 비율로 일어나기 때문에, 실험적으로 관측하기에는 매우 느리다고 했다. 또한 르메트르의 대폭발설을 조롱하는 의미에서 빅 뱅 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기도 했다. 어쨌든 정상 우주론은 우주의 시작과 끝이 없다는 주장이다.{그림 퀘이사의 사진한편 19세기 열역학에 따르면 폐쇄계( 바깥 세계와 에너지 및 물질 교환을 하지 않는 계, 닫힌 계) 는 점차 무질서를 향해 가는데, 우주도 같은 과정을 겪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우주를 거대한 메커니즘(mechanism) 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물리학자들은 밝게 빛나는 항성이 언젠가는 다 타고 말 듯이 우주도 언젠가는 생명을 다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정상 우주론은 이러한 우울한 전망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으며, 우주의 출발점을 대폭발로 설정한 빅 뱅 이론에 비해 안정감을 주었다. 정상 우주론은 우주는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는 낙관론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그런데 1960년대에 발견한 퀘이사( quasar, 매우 먼 곳에 있고, 항성과 비슷하며 강한 전파를 내는 천체로서 모두 푸른 빛을 띠고 있다. 준항성 전파원)는 정상 우주론을 심각하게 위협했다. 퀘이사는 빅 뱅 만큼이나 오래전에 형성된 천체로, 현대 우주론에서 발견할 수 있는 어떤 천체와도 다른 특성{) 퀘이사의 가장 특이한 점은 스펙트럼 선이 큰 적색편이 현상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이다. 적 색 편이를 도플러 효과로 해석하면 가장 먼 퀘이사의 거리는 150억 광년에 이른다. 따라서 우주 팽창설에 따르면 퀘이사는 대단히 빠른 속도로 우리들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천체라고 생각된다을 나타내고 있었기 때문에 정상 우주론이 주장하는 곁코 변하지 않는 우주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정상 우주론에 대한 지지가 결정적으로 무너진 것은 1965년 아르노 팬지어스( A. Penzias, 1933∼ )이 발견한 우주 배경 복사(宇宙背景輻射) 에 의해서 였다. 만약 빅 뱅에 의해 우주가 탄생했다면 이 때 엄청난 양의 열과 복사선이 나왔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까지도 우주 곳곳에 그 복사선이 남아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우주 배경 복사 이다.
대학로 space붉은 벽돌 건물과 공원, 연극 포스터들과 찻집들. 대학로에 한번 발을 들인 사람은 오랫동안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머무른다. 찻집 밀다원에 앉아 있으면 나이 지긋한, 꽤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문화 예술인들을 쉽게 만나볼 수 있다. 문예진흥원, 예총회관을 비롯해 문학, 연극, 무용 등 각 문화 단체들의 협회들이 자리잡고 있을 뿐 아니라, 연극 극단, 출판사, 디자인 등 문화에 관계된 단체나 회사들도 많은 수가 이곳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대학로는 젊은이의 거리이기도 하다. 언제부턴가 저녁 무렵이면 이곳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시간을 보내기가 즐겁다. 손님을 앞에 두고 진지하게 초상화를 그리는 무명 화가와 비둘기 꽁무니를 쫓아 총총 뛰어 다니는 아이들의 모습이 있고 거리에서 행해지는 각종 공연과 촬영도 눈길을 끈다. 메마른 도시의 삶에 지치고 찌들어도 딱히 갈 곳 없고 쉴 곳 없는 우리들에게 대학로는 분명 숨통을 터주는 귀한 공간이다.대학로 라는 명칭은 관악산 기슭으로 이전하기 전 서울대 문리대로부터 시작된다. 우리 나라 최고 엘리트들의 산실이었던 서울대 문리대가 이사간 후, 토지공사는 이 자리를 1백 평씩 묶어 일반인들에게 평당 11만 원에서 17만 원을 받았고, 그 때 건축가 김수근 선생도 3필지(3백 평)의 땅을 구입했다고 한다. 우리 나라 건축사의 중요한 줄기인 공간 을 이끌어 갔던 고 김수근 선생이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3필지의 땅을 문예진흥원에 팔고, 그 자리에 들어설 건물을 스스로가 디자인하고 지었으니, 이 건물이 이후 운명을 좌우할 미술회관 이다.붉은 벽돌로 외장을 장식한 이 나지막한 건물 이후로, 대학로에는 붉은 벽돌 건물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문예회관 건물이 들어섬에 따라 본격적으로 이 지역은 문화와 예술인의 거리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대학로가 주는 예스럽기도 하고, 개방적이며 소탈하고, 편안하기도 한 느낌은 이 건물들의 인상에서 비롯된다.) 미술회관을 따라 화랑들이 하나 둘 자리잡기 시작했고, 문예회관 대·소극장을 터로 삼아 소극장과 극단들이 따라 들어왔다. 국가에서도 정책적으로 이 지역의 건축물에 제한을 두는 법규로서 지원을 해 주었음도 물론이다.대학로는 그 동안 땅 값이 1백 배 가까이 수직 상승했고, 땅 값을 뽑아 내느라 한 평의 여유 없이 빽빽하고 높게 지어지는 건물들이 올라가고 있는 현실은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바이다. 임대료를 견디다 못한 화랑들, 서점들이 먼저 대학로를 떠났고,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붉은 벽돌 건물들 역시 어떡하면 더 튈 수 있는지 경쟁하듯 외장을 치장하는 술집들에 의해 본 모습을 침범 당하고 있다. 그러나, 문예회관과 미술회관 두 건물이 자리를 잡고 있느 한, 이 거리의 성격이 쉽게 바뀌진 않을 것이라는 게 대학로 사람들의 얘기다. 건축가 민현식씨는 김수근 선생에게 고마운 마음이 새록새록 든다. 아직도 미술, 문예회관 만한 디자인 감각을 대학로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게 참 안타깝다 라고 얘기한다.
Modernism & Post-ModernismHemingway'sThe snows of the KilimanjaroJoseph Conrad'sThe Secret Sharer실존적 위기 의식과 소외감, 고립감과 같은 주제 면에서 본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류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전대 미문의 제1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 많은 사람들은 극도의 위기의식과 비극적 상실감을 느꼈으며, 이런 위기 의식이나 상실감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이르러 한결 더 첨예하게 부각되었다. 적어도 주제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바로 앞서 일어난 문학 전통이나 이론을 거의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과 계승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작품에 형상화하고 있는 실존적 인생관은 대개 다음과 같다.1)20세기 현대인이 처해있는 비극적 상황에 남다른 관심을 보여준다. 삶을 무의미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그들은 허무주의와 공허감을 현대인의 일용할 양식으로 간주한다.2)개인과 사회의 사이에서 생겨나는 갈등과 긴장의 문제를 즐겨 다룬다. 이런 주제는 19세기 사실주의 소설에서도 중요하게 취급되어 있는 문제이지만,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사실주의 소설에서는 이 갈등이나 긴장은 어디까지나 사회 쪽의 승리로 끝나기 일쑤인 반면, 모더니즘 작품에서는 오히려 개인 쪽에 동정이 기울어진다.3) 자유의지: 개인이 사회의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유의지를 행사,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자유의지와 선택의 문제 역시 모더니즘 문학이 지니고 있는 중요한 특색 중의 하나이다. 모더니즘 문학이 19세기의 사실주의와 자연주의 문학 전통과 구별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점에서이다. 전통적인 사실주의, 특히 자연주의 작품에서는 인간의 모든 행위는 유전이나 환경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으로 파악함으로써 인간에게 아무런 자유의지를 인정하지 않았다.4) 이렇게 자유의지를 구사하여 사회의 모든 제약이나 구속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개인이 지불해야 되는 값비싼 대가는 바로 소외나 고립이다. 이들의 소외는 어디까지나 모든 사회적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개인의 참다운 자유와 정체를 지키고자 하는 노력에서 생겨나는 피치 못할 결과인 것이다. 모더니즘 작품에서 이 소외와 고립의 문제와 그것으로부터 파생되는 의사 소통의 문제만큼 일관성 있게 취급되고 있는 주제도 드물 정도이다.Hemingway의 The Snows of the Kilimanjaro를 통하여 우리는 헤밍웨이가 다루고 있는 인간의 내면적인 갈등을 잘 알 수 있다. 즉 주인공 해리를 통하여 그의 내적 존재와 외적 존재간의 모순과 갈등을 잘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양면성은 한 인간과 그 인간간의 내부적인 투쟁에서 나타나는 것이므로 순전히 자신의 갈등에서 빚어지는 것이다. 만일 주인공 자신이 죽음을 맞이하여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리고 편안히 숨을 거둘 것을 원한다면 그의 내적 존재와 외적 존재간의 갈등은 하등의 의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특별하다. 그의 죽음은 특별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주인공의 마음속에 갈등을 야기 시킨다. 그에게 있어서의 죽음은 그 자신의 단순한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하여 의지가 다시 살아나는 그러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의지를 통하여 큰 승리를 쟁취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이 나타내는 의지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개인적인 것이므로 이길수 있는 자기가 신과 이길 수 없으리라고 생각되는 자기자신과의 다툼에서 그 진실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모더니즘 소설들은 작중인물의 성격묘사에 있어서 기존의 소설들과 차이를 보여준다. 종래의 소설들에서는 성격이 뚜렷하고 사회적 신분이 안정된 주인공들이 등장했으나 모더니즘 소설에서는 사회에 적응 못하는 반사회적인 부적응자들, 추방자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내성적이고, 감성이 예민하고, 지적이어서 제도화된 세계에 적응 못하는 고립된 인물이거나 때로는 추방된 유랑자로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예술가로서의 길을 추구하기도 한다.Hemingway의 The Snows of the Kilimanjaro를 보면 헤밍웨이는 개인이 자신의 내부에 깃든 갈등의 존재를 파헤치며 스스로 승리의 의지를 불태우는 모습을 이 작품을 통하여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이 소설에서는 죽음이라는 공포가 항상 주인공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으며 성취욕구를 방해하는 요소가 되나 주인공은 오히려 이를 자신의 내적인 갈등을 통하여 기꺼이 감수한다. 드디어 그의 죽음은 갈등으로부터 해방되어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거대한 킬리만자로산의 눈으로 나타나게 된다.이 소설을 플롯을 살펴보면 주인공 해리는 사냥을 좋아하고 아프리카의 자연이 그리워 킬리만자로 산으로 돌아온다. 아프리카는 그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행복한 곳 중의 하나이다. 비록 화려하거나 사치롭게 생활을 하기에는 어려운 곳이기는 하지만 그는 자신의 묵은 때를 씻고 산과 더불어 강한 의지를 되살릴 수 있기 때문에 좋아하게 된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사냥도중에 다리의 상처를 입는다. 그것은 순전히 그의 실수로 일어난다. 상처를 입게 되는 과정을 보면 그는 사냥도중에 들판에서 노는 영양의 떼를 발견하고 이 모습을 사진에 찍으려 이동하다가 우연히 그의 무릎 부분이 가시에 찔리게 된다. 그는 약을 바르지 못한 채 2주일을 보낸다. 그후 그의 다리는 자신도 모르게 점점 썩어 들어가게 된다. 주인공 해리는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나 상처가 심하여 썩어 들어감에 따라 마음에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그는 점점 마음에 내적인 갈등을 갖는다. 그는 그의 강한 의지를 잃지 않기 위하여 과거의 처참했던 광경을 자주 회상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의지를 되살리려고 한다.Conrad의 소설 The Secret Sharer' 에서도 이러한 소외를 발견할 수가 있는데secret sharer를 탈출시킴으로 해서 배와 완전히 하나됨을 느끼고, 새로운 운명을 향해 헤엄쳐 가는 그를 자신과 동일시함으로써 소외감으로부터의 탈출을 느낌은 장면에서 배 안에서 완전한 이방인이었던 이전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그의 소외감이 어느 정도 해소된 것으로 볼 수 있고 또한 secret sharer의 탈출도 주인공의 소외로부터의 극복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배와의 하나됨이 곧 다른 구성원들과의 하나됨을 의미할 수 없으며 탈출하는 sharer와 배에 남아 있어야하는 자신의 모습 속에서 오는 괴리감을 생각할 때에 이것은 완전한 소외의 극복이라 할 수 없고 다만 새로운 형태의 확장된 소외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자신의 소외감을 극복하고자 했던 주인공은 이를 위해 secret sharer와 함께 자신의 것을 공유하기 시작하지만 이러한 identification은 소외를 극복하기보다는 또 다른 소외의 양상을 낳는 결과를 초래한다. sharer의 탈출과 배와 자신의 하나됨으로 인하여 소외가 극복되는 듯 하지만 결과적으로 완전한 극복이 아닌 또 다른 형태의 소외를 낳게 되고 또 다시 극복해야 할 소외의 문제가 남게 된다.대부분의 모더니즘 작가들은 20세기 현대인들이 처해있는 소외, 고립, 절망 등의 특수한 비극적 상황에 동질감을 느낀다. 고립과 소외는 인간 사이의 의사소통의 단절이 가져오는 사회적 문제인 것이다. 모더니즘은 특히 개인과 사회간에 일어나는 긴장관계를 조명한다. 대부분의 모더니즘 소설에서 주인공들은 선택에 있어서 갈등하고 주저하지만 자신의 길을 자신이 선택하고, 그것을 감수하는 용기를 보여준다. 주인공의 자유로운 선택의 의지가 안겨줄 수 있는 고통은 자기 추방과 소외 그리고 단절이다.The Snows of the Kilimanjaro 에서 헤밍웨이의 투쟁의지는 너무나 숭고하고 위대하기 때문에 종국에 가서는 주인공에게 대의를 달성케 하고 행복한 마음을 가지게 한다. 대의는 곧 주인공으로 하여금 한 큰 승리를 갖게 한다. 그리고 죽음은 한 큰 승리에 크게 기여하는 것이라고 헤밍웨이는 이 소설을 통하여 암시하고 있다. 헤밍웨이의 이와 같은 죽음은 모든 소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이다. 죽음을 예상함으로써 주인공은 항상 불안정한 심적 갈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 해리의 죽음은 주인공에게 참기 어려운 갈등을 주지만 주인공은 그것을 강한 의지로 극복한다. 그는 육체적인 병으로 종내 죽게 되지만 그의 혼은 다시 살아한다. 해리는 생물학적인 패배자는 될지언정 성스러운 행위를 함으로써 그의 정신적 존재는 살아남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