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조선통신사라 하면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일본 바쿠후 쇼군(幕府 將軍)에게 파견하였던 조선의 공식적인 외교사절을 뜻한다. 이러한 내용에 따르자면, 조선에서 일본으로 파견되었던 조선의 사절은 1607년에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 로서 정사 여우길(呂祐吉), 부사 경섬(慶暹), 종사관 정호관(丁好寬)을 삼사로 하는 일행 467명의 파견을 효시로 하여, 1617, 1624년의 3회와, 사절의 명칭을 통신사로 바꾸고 1636, 1643, 1655, 1682, 1711, 1719, 1748, 1764, 1811년의 9회를 합쳐 12회가 된다는 일반적인 견해에 이르게 된다.익히 알고 있듯이,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교류는 그 기원이 근대는 물론 고대에까지 이어진다. 여기서는 이러한 한일간의 교류를 조선시대, 특히 임진왜란 후 양국의 국교 회복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알려진 통신사라는 명칭으로 불렸던 사절 파견에 한정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또한 交隣體制로 특징 지워지는 당시의 양국간 외교관계와 그 이면에 대한 고찰, 그리고 통신사라는 명칭을 앞서 언급한 조선 후기 파견된 12회의 것으로 한정하는 것이 마땅한지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2. 국교회복과 교린체제의 부활(1) 강화교섭과 조선의 대일정책조선전기 200여 년간의 통교관계를 단절시킨 임진왜란은 동양삼국에 커다란 정치적인 영향은 물론 피침략국이었던 조선에게는 아물 수 없는 전쟁의 깊은 상흔을 남겨 놓았고, 이후 조선은 일본을 불구대천의 원수국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과 일본의 강화교섭은 의외로 빠르게 진척되어, 종전 후 불과 수년 만인 1607년 조선에서 回答 兼 刷還使 를 파견하여 국서를 교환함으로써 국교가 재개되었다.임란의 강화교섭은 전쟁이 끝나기 직전이었던 1598년 8월에 이미 명과의 종전 협상 중에 언급되었다는 설이 있고, 또 1599년 3월에도 대마도(對馬島)주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명에 따라 강화 교섭을 위한 사자를 파견하였다는 기록이 있지만, 조선 측의 기록에 의 강화를 요청하는 서계를 보내지 않고 대마도를 통하는가를 따지면서, 德川家康의 國書 와 犯陵賊 을 보내주면, 새로운 和好를 열어 가겠다고 하는 소위 강화를 위한 두 가지의 조건을 제시하였다.(2) 회답 겸 쇄환사의 파견강화의 두 가지 조선인 德川家康의 국서 와 犯陵賊 소환은 한일관계사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즉 당시 강화가 성립되지 않는 상태에서 어느 한쪽의 집권자가 먼저 국서를 보낸다는 것은 상대국에 대한 굴복을 의미하는 행위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에 대하여 국서를 먼저 보내라는 요구는 일본이 임진왜란의 침략행위를 사죄하지 않으면 강화 요청에 응할 수 없다는 강한 의지를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에서는 막부가 보내올 서계 양식에 관하여서도 德川家康가 日本國王 임을 칭하도록 요구하고 있다.조선 측에서 제시한 두 가지의 강화조건은 1606년 8월 전계신(全繼信)의 파견에 의해 쓰시마에 전달되었는데, 제시된 조건은 의외로 빨리 이루어져 쓰시마 도항 후 불과 1개월 만인 9월에 국서의 초안이 조선에 보내졌고, 11월에는 橘智正이 파견되어 정식으로 德川家康의 국서와 犯陵賊으로 쓰시마인 두 사람을 압송하여 왔다. 조선에서는 예상보다 빠르게 두 조건이 실행되자, 그것들이 僞書와 僞者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명분상 조선의 요구가 관철되었고, 교섭의 주도권을 조선이 갖게 되어 당초의 계획대로 강화를 성립시키기로 하고 신사를 파견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사절단의 명칭은 통신사가 아니라 쇼군 국서에 대한 회답과 납치된 피로인의 쇄환을 의미하는 回答 兼 刷還使 로 결정하였다.인원의 편성은 비변사로부터 1590년의 예에 따라서 정사에 여우길, 부사에 경섬, 종사관에 정호관을 임명하였다. 총인원에 관하여는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실제로 귀국 후 복명을 위한 부사 경섬의 기록에 의하면 406명으로 되어 있다. 이들은 1607년 (선조 40) 1월 12일 한양을 출발하여, 2월 29일에는 부산을 떠나 쓰시마를 거쳐 大阪까지는 해로를 이용그러나 양국의 교역관계가 이 조약에 의하여 곧바로 재개된 것은 아니고, 실제적인 교역은 1610년 9월에 다시 왜관 개시의 약정이 맺어져 왜관교역에 관한 제 규정이 정해진 후, 1611년(광해군 3) 9월에 쓰시마로부터 최초의 세견선이 파견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본 궤도에 오르게 되면서 임란 후 단절되었던 조일간 통교관계가 모두 재개되었던 것이다.(4) 中華的 交隣體制의 부활이상에서 임란 직후부터 시작된 조일간의 강화교섭과 통교 회복 과정을 살펴보았다. 그러면 교섭의 당사자들이 그렇게 복잡하고 무리한 과정을 밟아가면서 강화를 성립시키려 했던 이유는 어디에 있었으며, 그 입장은 어떠했을까. 그리고 재개된 양국간의 교린체제는 조선 전기 교린체제와 비교하여 어떠한 차이와 특징을 갖고 있었던 것일까.먼저 쓰시마의 입장을 보면, 조선과의 통교무역에 의해 생존권을 영위해 온 쓰시마가 전쟁에 휘말리면서 잃은 손해는 인원, 물자, 영토의 황폐뿐만 아니라, 생명줄이었던 교역이 단절되어, 조선과의 강화와 교역 재개는 그들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따라서 그들의 일관된 입장은 단절된 통교무역을 조선전기의 형태로 부활시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쓰시마는 강화 교섭의 초기 단계로부터 피로인을 쇄환하여 오고, 그 반대 급부로서 조선과 일본의 전쟁상태를 종결짓고 강화를 맺게 하는 것이었다.또한 쓰시마가 조선에 보인 태도로 빠뜨릴 수 없는 사항은 宗氏가 항상 바쿠후 정권의 대변자 또는 대리인은 자처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豊臣秀吉의 사망 후에는 秀賴의 습직을 알리면서 德川家康가 그 보좌 역할을 한다고 하다가는, 1600년 세키가하라 전쟁에서 德川家康가 승리하자, 이번에는 德川정권을 옹호하면서 쓰시마와의 강화가 막부정권과의 수호회복이라는 점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쓰시마의 이중적인 입장과 행위에 의해 의외로 빨리 강화가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결국 많은 문제점을 남기게 했던 것이며 국서의 위작 내지는 개작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기극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한편 당시 德川幕府의 기본 입장과 조이후라야 조선의 회답서에서도 일본국왕을 칭함으로써 대등 관계의 강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의사를 분명히 하였던 것이다.그러나 당시 일본은 명으로부터 책봉을 받을 수가 없었고, 이러한 조선 측의 요구는 쓰시마에 의해 국서의 위작 내지는 개작이라는 변칙적인 방법에 의하여 이루어지게 된다. 물론 조선 측에서는 쓰시마로부터 보내진 쇼군 국서와 범릉적이 거짓임을 알았다. 하지만 조선의 요구가 일단은 해결된 이상 더 이상의 추궁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여, 강화사를 파견하여 임란 후 적대관계를 교린관계로 재편해 나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1607년 회답 겸 쇄환사에 의하여 양국 사이에 국교는 회복되고, 실제적인 통교관계는 1609년에 별도로 그 담당자인 쓰시마와 기유약조를 맺어 臣下의 禮 를 취하는 교역의 형태를 취하게 함으로써 대등과 기미관계에 의한 교린 체제를 다시 부활시켰던 것이다.따라서 임란 후 대일 강화 교섭과정에서 취한 조선의 대일 정책은 조선전기의 중화적 교린체제(中華的 交隣體制) 를 부활하는 것이었다. 즉 명의 책봉을 전제로 한 조선 국왕과 일본 국왕간의 대등 관계를 회복하고, 그 관계 하에서 쓰시마와의 기미관계를 재편성하는 이원적인 교린 체제를 원하였던 것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임란 후의 대일 교린체제는 임란 전의 그것과 비교할 때 기본적으로는 같은 틀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5) 회답 겸 쇄환사 에서 통신사 로회답 겸 쇄환사 의 회답 이란 국교 회복을 위한 일본측의 노력에 대한 회답이었다. 동시에 조선인 포로의 송환을 요구하는 쇄환 의 사절이었다. 이렇게 해서 德川막부는 조선과의 국교를 회복하였는데, 명과의 국교 회복까지 열망한 家康는 조선이나 류큐(琉球)의 루트를 통해서 그것을 타진했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다음으로, 국서에 사용된 征夷大將軍이란 칭호가 문제였는데, 德川씨는 日本國王 을 피하고, 일본국 미나모토모(源某) 또는 일본국 주(主) 미나모토모 (조선에서는 豊臣씨를 平씨로, 德川씨를 源씨로 보고 있었다.)로 했다. 그런는 쓰시마 번에서 파견하는 사절이 부산의 왜관에서 머무르고, 동래부가 중앙정부의 현지 파견기관으로서 쓰시마 사절과의 교섭과 접대를 맡아 내륙 여행은 허용되지 않았다.(예외적으로 1629년에만 기하쿠 겐포를 정사로 하는 사절 일행이 서울까지 상경하였다.) 이것은 히데요시가 침략했을 때, 일본군이 이 세 개의 왜인 상경로 로 진격함으로써 부산에 상륙한지 불과 20일 만에 서울이 점령당하는 쓰디쓴 경험을 맛보았기 때문이다.이렇게 하여 에도기에 양국간의 외교와 무역은 왜관을 매개로 이루어지게 되고, 동래부와 쓰시마 번이 각각 정부의 현지 파견기관으로서 외교와 무역 교섭의 실무를 담당하게 되었다.그런데 메이지 초기의 서계(書契)문제를 둘러싸고 양국간에 분쟁이 일어났을 때, 일본측의 새로운 집권자들은 조선통신사가 일방적으로 서울 - 에도 간을 왕복하며 국서를 征夷大將軍에게 전달한 것을 藩屬의 예 로 착각했던 것이다. 여기서도 정권 교체에 의한 외교의 비연속성이 분쟁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메이지 정부는 서계 문제를 둘러싸고 조선과 대립이 일어난 다음인 1870년에 외무성 소속의 사다 하쿠보(佐田白芽), 모리야마 시게루, 사이토 사카에 등을 쓰시마에 파견하여 실태를 조사, 보고하게 하였는데, 그 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그 복서(復書, 조선에서 보낸 것)를 보니, 本朝에 번속의 예를 취하지 않는 것이 명확하 다. 그렇다면 본조의 사절을 청해야 하는데, 임진란 후 국내의 형세지리를 잘 감추기 위 해서 오히려 일본의 답례를 받지 않고, 막부 교체 때마다 일방적으로 사신을 보내는 것 은 필경 일본을 敬遠하는 뜻에서 나온 것을 보인다.즉 조선정부가 일본에 대해 서울에의 사절 파견을 요청하지 않은 것은, 국내의 형세지리를 잘 감추기 위해서 이며, 다이쇼군이 교체할 때마다 일방적으로 통신사를 파견한 것은 일본을 경원하는 뜻 때문이라는 것이다.여하튼 도쿠가와 막부는 외국에 대해 두 개의 창구를 열고 있었다. 하나는 말할 것도 없이 청국인과 네덜란드인이 일본에 와서 민간 차원의 무역을 이었다.
1. 들어가며중국을 제외하고 한국과 가장 가까운 나라는 일본이라는 것을 부정할 이는 없을 것이다. 같은 문화권에서 살아왔으며, 한국과 같이 한자(漢字)를 쓰고 있다는 점, 일본어의 어순이 한국어와 비슷하다는 점 등 일본과 한국의 유사점을 찾으라면 수도 없이 찾아 낼 수 있다. 하지만, 분명히 일본과 한국은 다르다. 사람들의 얼굴은 비슷할지언정 그 머리 속에 들어찬 생각들은 상당한 괴리를 나타낸다.이제부터 논할 일본의 "기업집단(企業集團)"과 한국의 "재벌(財閥)"에서도 그러한 차이점은 여실히 드러난다.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그로 인해 형성된 기업의 구조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이 두 집단이 걸어온 길도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우선 "기업집단"과 "재벌"에 대한 개념의 구분으로부터 시작하겠다. 이어 설명할 테지만, 두 용어 모두 일본에서 만들어지고 사용된 것이지만, 일본에서는 사라진 "재벌"이 한국에는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 이채롭다.이어 일본 "기업집단"과 한국 "재벌"의 형성과정 및 의의 그리고 소유구조, 지배구조, 경영 형태에 관해 알아보고, 이러한 차이가 나는 근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겠다.2. "기업집단"과 "재벌", 그 개념의 구분"재벌"이라는 용어는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사실 그 뜻을 정확히 알고 사용되는 용어도 아니며, 또한 좋은 의미로 사용되는 용어도 아니다. 그래서인지 공식적으로 사용되는 용어는 재벌이 아니라, "기업집단"이다. 재벌의 경제 활동을 통제하고 있는 『독점 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속칭 공정거래법)』에서도 "재벌"을 "기업집단"이라 부르고 있다. 그리고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도 "재벌"이 아니고 "기업집단"이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그냥 "대기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재벌"은 "기업집단"과도 구분되고 "대기업"과는 더더욱 분명히 구분되는 개념이다."재벌"이라는 용어가 "기업집단"이라는 용어로 둔갑된 확실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이 두 용어가 모두 일본에서 만들어지기업집단에 속해 있는 기업들의 총자산 및 총매출액은 87년의 경우 일본 경제 전체 규모 가운데에서 13%와 14.4%(은행, 보험업 제외)라는 높은 비중을 각각 차지하고 있다. 이와 같이 6대 기업집단들의 직접적인 경제력만 해도 엄청나지만 이들 기업집단에 소속한 개별 기업의 영향력 하에 있는 계열기업들의 경제력까지 감안하면 일본 경제가 사실상 이들 6대 기업 집단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미국 하원 무역소위원회 보고서는 일본의 기업집단들은 기업집단 내의 기업으로부터 조달이 가능한 경우 가격이 비싸더라도 값싼 수입품을 구매하지 않도록 도의적인 구속을 주는 방식으로 실질적인 수입 통제를 하고 있는 비난을 가하고 있다. 그 만큼 일본 기업집단의 존재 방식은 독특한 성격을 띠고 있어 주목을 받고 있다. 이 같은 일본 기업집단의 성격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해체된 일본의 재벌에서 유래됐다.주식회사 형태로 산하기업들의 경영활동을 강력하게 통제했던 재벌은 그룹 내 개별 기업들이 그룹 전체 이익에 반하는 활동을 제도적으로 금지시켰던 것이다. 이처럼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던 일본의 재벌이 2차 대전 이후 경제적 민주화 조치의 일환으로 미국에 의해 해체된 후 개별 기업들의 연합체적 성격을 띤 기업집단으로 변신했다.기업 집단내의 기업들은 형식적으로 대등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어 기업의 활동을 구속할 제도적 장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업 집단 내의 기업들은 상호 출자를 통해 상호 주주가 됨으로써 사실상 불가결한 이해의 공존 관계를 조성하고 있다.특히 이들 기업의 대주주인 사장들로 조직된 사장회는 그룹 내 기업들간의 이해조정, 그룹차원에서 추진할 프로젝트의 구상, 그리고 그룹 내 특정 기업의 문제에 대한 공동 대응책 마련 등 기업 집단의 사령탑 역할을 하고 있다. 기업 집단의 사장회는 2차 대전 이전의 주식회사에 비하면 구속력은 약하지만 산하 기업들의 활동을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장회는 긴밀한 정보 교환의 장으로 활용되며 개별 기업 차원에서 필요한 감행했다. 그 작업으로 접수받은 재벌의 주식을 종업원과 일반인에게 우선적으로 분산 매각함으로써 주식 소유의 민주화를 가능하게 하고,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전제로 하여 경영의 민주화를 유도하였다.그 후 주식의 개인 소유는 점점 떨어지고 그 대신 금융기관이나 사업회사 등의 법인 소유 비중이 높아졌다. 이는 1960년대 후반을 정점으로 점점 역전되어 1989년 3월 기준 개인 지주 비율이 22.4%로 떨어지고, 법인 지주 비율이 73.0%로 올라섰다.일본 대기업의 주식은 개인소유 형태가 아니라 법인 소유 형태로 변모하고 있는데 이것을 두고 "법인 자본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실제 일본 대기업에서의 법인화 현상은 널리 보편화되어 도요다 자동차사의 경우 상위 5위 주주는 미쓰이 은행(4.9%), 도가이 은행(4.8%), 산와 은행(4.7%), 도요다 자동직기 제작소(4.4%), 그리고 니혼 생명(3.8%)으로 구성되어 있다.결국 회사가 회사의 주식을 소유한다는 것은 주식의 상호 소유 현상을 의미한다. 일본의 100대 기업에 대한 20대 주주는 총 1815건으로 그 중 은행계열이 638건, 보험계열이 612건, 100대 기업의 상호소유는 246건으로 되어 있어 은행과 보험계열의 회사 지배 현상을 엿볼 수 있다.일본 대기업에 있어서 재벌 체제의 해체와 그 후 개인 주주의 후퇴, 법인 주주의 일반화 그리고 회사 내에 있어서 자본가의 몰락에 자본가의 경영자 화와 노동자의 주식소유 참여 및 의사결정의 보텀업(Bottom-up)시스템은 기업을 자본가의 지배에서 벗어난 "황금 알을 낳는 닭"으로 변모시켰다. 이것을 혹자는 자본주의와 구분하여 "회사주의"라고 부르고 있다. 일본의 대기업이 이윤배당의 대부분을 사내 유보시켜 R&D투자나 설비투자를 엄청나게 늘려 나갈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사회주의의 산물이며, 노동자가 한 회사에 신명을 바쳐 헌신 할 수 있었던 것도, 소위 "일본적 경영"이라는 것도 이러한 기업 조직위에서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일본에는 "회사주의"라는 "황금 정점으로 한 사원집단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상황이다.그 결과 기업은 자본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어 있고 경영권이 오히려 자본을 선택하여 출자시키고 있다. 그런 관계로 경영자는 주식 배당을 자본 코스트로 생각할 뿐 자본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경영은 자본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이다. 이 같이 기업은 경영권을 쥔 경영진과 사원의 자율에 맡겨지고, 기업의 흥망과 모든 기업 활동의 득실은 전 종업원에게 귀착된다.일본 사회는 개인의 생활이나 직업이 각 개인의 자유에 맡겨져 있는 자유로운 사회이다. 또한 전직이 어렵고 일반화돼 있지 않으면서 한편 고용관행은 종신 고용제이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종업원의 운명이 그가 소속한 기업의 흥망과 같이 부침(浮沈)할 수밖에 없게 되어있어 종업원은 그가 소속한 기업의 형편을 고려할 수밖에 없고 이 때문에 경영은 노사 갈등으로부터도 상당히 자유로운 입장에 놓이게 된다.이렇게 해서 얻어진 경영 자유는 사회주의 체제하의 국가간섭, 여타 자본주의 체제하의 자본 간섭과는 다른 일본 경영자만이 누리고 있는 특권이라 하겠다. 일본에서는 이미 대주주가 기업을 지배하는 주식회사 제도는 형해화(形骸化)된지 오래다. 주식회사지만 경영자와 종업원이 주체가 된 사단법인적 성격이 강하다.전전의 일본 주식회사는 주주총회가 이사의 선임, 이익 처분, 예결산의 승인, 정관 변경, 주요 의사결정의 권한을 갖고 있었다. 이와는 달리 새로운 상법 하에서는 회사의 합병, 해산, 증자, 감원, 임원선임 등 극히 제한된 사항만을 주주 총회의 권한으로 축소해 버렸다. 주식 소유의 분산과 법인 소유가 진행되는 가운데 경영권의 강화를 가져왔고 경영권은 법상 최고 의사결정기관인 이사회가 갖게 됐다. 그러나 실제로는 대부분 일본 기업의 경우 상무급 이상의 경영자에 의해 구성되는 경영위원회로서의 "상무회"가 사장의 지휘하에 판매, 생산재무, 총무, 노무 등 직분을 분장하여 사장, 부사장, 전무 등과 함께 회사 업무의 전반에 걸쳐 실질적으로 최고 의사 결정 권한을 행사해 가락과 신흥자본가계층의 등장을 가져오게 되었다. 귀속재산불하야말로 한국경제에 있어 기업가에게 축적의 토대를 제공한 획기적 사건이었다.전후에는 원조물자의 특혜배정과 재정투융자의 중점지원을 통해 재벌의 축적의 기반을 마련해주게 되었다. 한편 1958년 이후 원조가 줄어들고 1956~57년의 흉작으로 불황이 겹치자, 전근대적 방식으로 축적을 계속해온 일부 기업들이 적응능력의 미비로 도태되고 도산한 기업들을 인수, 합병하는 과정에서 일부기업들이 서서히 재벌화 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이렇게 50년대부터 성장하기 시작한 대기업들은 60년대에는 경제의 산업구조가 다양해지고 수출드라이브정책과 정부의 자금배분에 힘입어 성장할 수 있었으며, 기업가로서의 경영능력도 키우기 시작했다. 한편, 국유 기업의 신설로 공기업부문도 크게 성장하였는데, 그 대표적 사례가 1966년 종합제철공장건설계획을 확정하고, 1969년 대일 청구권 자금으로 건설된 포항제철이었다.60년대 차관을 통해 성장한 대기업은 도산 위험에 닥치면 다시 금융지원을 통해 구제해 주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기업을 계속 확장하는 것이 오히려 안정적인 경영방식으로 인식되는 폐해가 이때부터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차관공여의 방식은 불가피하게 독점을 강화하였는데, 외자의 도입, 배분에 수반되는 강력한 인, 허가제는 기술 및 특허의 배타적 점유를 가능케 하였고 강력한 진입 장벽을 형성함으로써 시장구조의 조기독점화를 초래하였다.70년대 중화학공업육성정책은 지난 50년간의 산업 조직 발전 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산업정책이었다. 중화학공업에 투자재원을 결집시킨 정책은 오늘날 한국 경제의 산업구조를 어느 정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나, 그 부작용은 80년대의 자본조정과 기업합리화를 불가피하게 하였고, 한국 경제의 재벌구조 또한 결국 이 시기에 고착화되었다. 70년대 대기업은 대량생산체제를 도입하고 수출 지향적 공업화를 통해 대량수출체제로 나아가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중간재의 수입대체를 통해 국제하청구조에서 벗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