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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1경제관리개선조치 평가A+최고예요
    7.1경제관리개선조치1. 내용① 국정가격의 현실화, ② 임금의 대폭적인 인상, ③ 기업의 자율성 및 책임성 강화와 ④ 북한 '원'의 평가절하 등이다.2. 배경① 생산성 제고에 두면서 ② 생산물의 암시장 유출 억제, ③ 국가경제부문의 정상화, ④ 개별 경쟁체제 확립과 기업의 자율성 강화 및 ⑤ 국가의 재정적 부담을 축소하려는 데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3.생산물 가격을 암시장 수준으로 인상시킴으로써① 기업과 농장 생산물의 암시장 유출을 억제, 국가경제부문의 정상화를 도모하는 동시에 ② 생산물의 국가 납부 의욕을 증대시키고, ③ 비합리적으로 낮은 수준에서 고정된 국가공급 기초생필품과 용역의 가격을 현실화시킴으로써 물자의 낭비를 억제하는 한편, ④ 국가의 재정부담을 축소하고, ⑤ 임금을 실질 생계비에 부합되는 수준으로 인상시킴으로써 국가복무규율을 준수할 수 있도록 하였다.4. 7.1경제관리개선조치 이후의 변화① 근로자 임금 실적 따라 차등지급북한이 7월 1일 경제관리개선 조치 이후 ‘누진노급제’를 시행, 노동자들의 임금을 실적에 따라 차등지급하고 있다. 예를 들면 평안남도 순천시에 있는 ‘2·8직동청년탄광’에서는 ‘정량계획의 70%만 달성하면 기본생활비 전액을 지급하고 그 이상을 하면 누진생활비가 붙는다’고 한다.또한 소식통은 ‘계획을 120% 이상 수행한 다음부터의 생산실적에 대해서는 5배의 누진생활비가 지급된다’며 ‘매달 계획을 300%로 수행하는 탄부들은 기본생활비 이외에 2∼3만원의 누진생활비를 받는다’고 소개했다‘누진노급제’는 누진율을 대폭 상향조정한 것으로 ‘7·1 조치에 의해 누진비율이 새롭게 정해져 종전에는 계획을 100% 달성해야 기본생활비 전액을 받을 수 있었고 120% 이후의 누진생활비도 2배 수준이었다.이처럼 상향된 누진율을 적용한 ‘누진노급제’가 시행되면서 일부 광산노동자의 경우 최고 기본생활비의 10배에 달하는 6만원의 임금을 받는 것으로 전해졌다.탄광, 광산지대에서 힘든 일을 하는 노동자들은 5,000원 이상 고액 월급을 받게된다고 알려졌지만 함북 무산광산 노동자들은 1,500~2,000원 정도 받았다고 한다. 아무리 힘든 일을 해도 돈을 벌지 못하면 월급을 제대로 탈 수 없게 된 것이다.② 장사 분위기 고조이번 경제조치로 장사꾼들이 돈을 움켜쥐고 내놓치 않아 현금 흐름이 원활치 않다는 판단아래 장마당에서 농산품과 가내수공제품을 제외한 일체의 제품을 국가에서 운영하는 직매점이나 수매상점에 팔도록 유도하고 있다.그러나 국영상점의 현금지급 능력이 부족해 개인들이 수매를 꺼리고 있지만 장마당을 강력히 통제한 탓인지 서서히 개인이 만든 제품들이 국영상점으로 흘러들고 있고, 자금 숨통도 조금씩 트이고 있다고 한다.최근 평북 신의주 지방을 방문했던 한 재중동포는 『북한 일반 주민들이 첫 월급 봉투를 받았지만 물가인상과 각종 공공요금 때문에 생활은 크게 나아진 게 없어 장사를 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다시 확산되고 있다』고 전했다.③ 1,000원 지폐 발행북한 당국은 지난 7월 1일 물가와 공무원 봉급을 동시에 인상하면서, 종전의 최고 액면가인 500원의 2배인 1,000원권 지폐를 발행했다.지폐는 앞면에 화환 위에 받쳐진 김일성 얼굴 초상화와 함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은행’이란 발행기관명이 적혀 있고, 네 모퉁이에 1,000이란 숫자와 천원이란 액면가가 표시돼 있다. 또 발행기관 아래에는 ‘주체 91(2002)’이란 발행연도가 인쇄되어 있다. 중앙은행 글귀 아래에는 북한 ‘국장’(國章)이 그려져 있다.뒷면에는 만경대(김일성 생가) 그림과 함께 역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은행’이란 발행기관과 ‘천원’이란 액면가가 한글로 인쇄돼 있다.④ 평양 거리·관광지 간이판매대 급증7·1 경제관리개선 조치 이후 평양에는 간이 판매대들이 늘어나는 등 외견상의 변화가 눈에 띄고 있다. 이번에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이들 도시에 간이 매대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평양에는 창광거리나 전철역 주변, 관광 명소 등에 각종 상품을 파는 간이 매대가 몰라보게 많아졌다. 남포에는 전에는 없었던 곳에 새로 생겼다. 7월 15일 집단체조 ‘아리랑’ 공연이 폐막되면서 없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늘고 있다고 한 소식통이 전했다.영업도 밤낮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고려호텔 주변에 설치된 간이 매대들에서는 대성총회사 등 여러 회사에서 2~3명의 직원이 나와 직접 생산하거나 수입한 상품을 팔고 있다. ‘경제관리개선 조치’에 따라 기업소의 독립채산제가 강화되자 각 수출입 회사에서 경쟁적으로 간이 매대를 설치한 것이다.만경대나 주체사상탑, 개선문 등 관광 명소에서도 간이 매대들을 쉽게 볼 수 있으며 관리사무소에서 수익 사업으로 직원들이 돌아가며 매대를 운영한다. 이런 매대에서는 아이스크림이나 중국제 단물(음료수)을 사먹을 수 있다.⑤ 미 달러 환율 현실화북한 원화의 달러 환율이 현실화됐다는 것은 평양 순안비행장에 도착하면서 바로 알 수 있다. 공항 구내 한 구석에 ‘1달러=150원’이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그러나 외화상점에선 달러를 그대로 사용하고, 숙소인 고려호텔 상점에선 1달러를 151원에 바꿔준다. 순안비행장과 고려호텔 간에 1원의 환율 차이가 나는 것은 수수료로 생각된다.고려호텔에서 바꾼 북한 원화는 호텔 안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는 얘기가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고 체크 아웃할 때 원화를 다시 달러로 바꿀 수 있다고 한다.⑥ 근로자 월급 현금 대신 ‘증서’발급7·1경제관리개선 조치 이후 일부 공장·기업소들은 재정부족으로 근로자·사무원들에게 월급을 현금으로 주지 못해 “약속증서”를 지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물가·임금인상 조치 이후 첫 월급을 받은 북한 주민들의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공무원, 학자 등 국가관련 종사자들은 2,000~3,000원 정도의 월급을 정확히 받았지만 일반 공장ㆍ기업소 근로자들은 월급이 기대수준에 미치지 못했고, 일부 기업소에서는 돈이 없어 월급대신 「약속증서」(월급액수와 지급을 증명하는 증서)를 발급하기도 했다.공산품을 독점한 화교들에게 막대한 내화가 집중되자 이를 끌어내기 위해 단행한 1992년의 화폐개혁 직후에도 내륙지방의 많은 기업소들이 현금 부족으로 노동자들에게 약속증서를 발급한 적이 있었다.
    사회과학| 2007.12.26| 3페이지| 1,000원| 조회(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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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의 추운곳의 지명과 특징
    북한지역의 혹한기는 1월, 혹서기는 8월이다. 개마고원은 북쪽에 위치한 때문에 7월이 혹서기이다. 최고기온은 함경북도 회령이 40.9℃를 기록한 적이 있고, 최저기온은 자강도 중강(中江)의 영하 43.6℃이나 백두산에서 1984년 3월에 영하 47.5℃를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연평균 기온이 가장 낮은 곳은 많은 사람들이 자강도 중강진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백두산 아래 백무고원 일대다. 행정구역상 량강도 삼지연군에 속하는 이곳 1000m 이상 고지대의 연평균 기온은 -7.5∼3.0℃로 매년 최저 기온은 -40℃밑으로 내려간다. 역대 최저 기온은 1984년 2월 백두산 천지에서 기록된 -47.5℃ 이다.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곳은 어디일까. 많은 사람이 망설이지 않고 중강진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정답은 백두산 기슭의 백무고원 일대다.일제시대 때인 1933년 1월 중강진의 기온이 영하 43.6℃까지 내려간 적이 있는데 이로 인해 이곳이 가장 추운 곳이라는 인상을 남겼다.1991년 평양 금성청년출판사가 발간한 '우리 나라 지리와 풍속'에 따르면 해발 1000m 이상의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는 백무고원의 연평균기온은 영하 7.5∼3.0℃. 매년 최저 기온이 영하 40℃ 이하로 내려간다. 1977년 1월 2일 이곳 삼지연군 신무성의 기온이 영하 45.1℃를 나타냈으며, 1984년 2월 백두산 천지는 영하 47.5℃로 최저 기온 기록을 남겼다.행정구역상 양강도 삼지연·대홍단·백암·운흥군과 함북 연사·무산군 일대를 포괄하는 백무고원은 한반도에서 개마고원 다음으로 넓은 고원으로 면적은 6520㎢, 평균 높이는 1260m이다. 백무고원이라는 이름은 백두고원과 무산고원의 머리글자를 따서 지은 것. 두만강의 지류인 서두수를 경계로 그 서쪽을 백두고원, 동쪽을 무산고원이라 부르고 있다.연사군통나무생산지의 하나이며, 가구, 교구비품 등 목재가공품이 도내에서 비중을 갖고 있다. 감자가 도내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는 지역으로 도전체 생산량의 50%를 차지한다. 1역에 비하여 지대가 훨씬 높은 고산지대로서 제일 낮은 곳인 강의 골짜기도 해발 500m를 넘는다. 군의 남부에는 높고 험한 산맥의 하나인 함경산맥이 북동 ~ 남서방향으로 지나고 있으며 여기에는 관모봉(2540m)을 비롯한 2000m를 넘는 산들이 솟아 있다. 연사군은 바다와 멀리 떨어진 내륙지대이므로 기온교차가 심하며 도안에서 기온이 가장 낮은 지방이다.연 평균기온은 3.5℃, 1월 평균기온은 -15.8℃, 8월 평균기온은 19.7℃이며, 연 평균강수량은 580㎜이다. 첫서리는 9월 21일경, 마감서리는 5월 15일경에 내린다. 군의 가운데에서는 연면수와 그 지류들이, 북서부에서는 서두수가 흐른다.연사군은 산림자원이 매우 풍부한 지역이다. 산림넓이는 군넓이의 84%를 차지한다. 전반적 지역에 걸쳐 이깔나무, 전나무, 분비나무, 가문비나무, 봇나무, 사스래나무 등이 자란다. 토양유형은 산림갈색토양, 산악표백화산림갈색토양, 산악표백성토양, 고산습초원토양 등으로 이루어졌다.해발 2540m의 관모봉은 백두산에 이어 두번째로 높은 산으로 함북 연사군과 경성군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희귀한 약용식물과 유용식물들이 약 250여종 서식하고 있다. 관모봉의 식물분포상을 보면 해발 800m까지는 주로 소나무와 참나무의 혼합림으로 되어 있고 1000m지점에서부터는 점차 침엽수로 변하게 되며 좀 더 위로 올라가 1400 ~ 1800m 사이에 이르면 추위에 잘 견디는 가문비나무, 분비나무 등 침엽수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무산군북한 최대의 철광석 산지이며, 통나무 생산 및 목재가공 중심지의 하나이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담배는 질이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작지는 군 면적의 약 5%를 차지하고 있다. 그중 밭은 90.5%, 논은 4.6%, 과일밭은 4.7%를 차지한다. 새골리, 독소리, 흉암리, 림강리에 경작지가 많다. 특산물로는 이 군의 특산종으로 '풀또기'라는 나무가 있다. 이 나무는 아름다운 꽃이 펴 관상용으로 가치가 있다.무산군은 함경산맥의 북서쪽에 펼쳐진 백는 함경산맥의 주요 봉우리들인 도정산(2199m), 고성산(1754m), 대련골산(1549m), 검덕산(1899m) 등이 솟아 있다.연 평균기온은 5.2℃, 1월 평균기온은 -13.4℃, 7월 평균기온은 21.3℃이며, 연 평균강수량은 500㎜정도이다. 첫서리는 9월 29일, 마감서리는 4월 22일경에 내린다. 큰 하천은 국경을 이루는 두만강과 그 지류인 성천수, 연면수이다. 성천수 중류부에는 전력생산에서 큰 의의를 가지는 마양저수지가 있다.산림넓이는 군 면적의 90%로 함경북도 일대에서 산림자원이 제일 풍부한 곳이다. 주요 수종으로는 삼송류와 사스래나무, 황철나무, 자작나무, 참나무 등이다. 무산군은 하부원생대지층이 기본이며 여기에는 철광산이 있다. 자철광석은 동력변성작용을 받아 이루어졌으며 매장량은 수십억t에 이른다.대홍단군군 넓이의 90.9% 이상을 산림이 차지할 정도로 산림자원이 풍부하며 대홍단군종합농장에는 약 3500리에 달하는 방풍림이 조성되어 있다고 한다. 축산업의 비중이 크며, 그 중 돼지와 젖소를 많이 키운다.대홍단군은 1952년 7월에 김일성 주석의 지시로 종합농장(당시 국영5호종합농장)으로 창설되었는데, 최근 식량난의 타개책으로서 감자농사가 강조되면서 국가적인 지원하에 감자농사가 지어지고 있다. 특히 1998년10월 1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대홍단군을 현지지도 하면서 "감자는 흰 쌀과 같다"고 감자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을 계기로 이 지역의 감자농사에 대해 국가적인 지원이 이어지고 있다.먼저 대홍단군내 감자연구소를 중심으로한 『2·17과학자기술자돌격대(유사시 인민경제 각 부문을 지원하기 위해 구성되는 과학 기술부문의 전문가집단)』를 파견, 영농에 필요한 기술을 지원하고 있는데, 이들은 바이러스없는 감자개발에 주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100여 대의 감자가공설비를 설치한 감자가공식품공장을 건립, 감자를 원료로 한 국수, 쌀, 빵, 순대를 비롯한 다양한 종류의 감자음식물을 시험생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감자파종기, 감자선별기, 감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대부분 지역이 소홍단수 연안에 펼쳐진 현무암덕으로 되어 있다. 이 덕('더기'의 준말, 높은 언덕)은 화산모래가 두껍게 덮인 높고 평탄한 높은 평야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천평'(하늘중천에 있는 평야)이라고 불리어 왔다.군안의 한가운데에는 거의 동서방향으로 로은산맥이 뻗어 있으며 삼지연군과 백암군 경계에는 무봉, 관모봉, 장청산, 푸른봉이, 동쪽에는 삼봉, 삼태봉, 로평산이 솟아 있다. 대홍단군은 대륙성기후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연 평균기온은 1.6도℃, 1월 평균기온은 -17.6℃, 7월 평균기온은 18.2℃이며, 연 평균강수량 5733.7㎜이다. 군안에는 두만강본류와 그 지류인 소홍단수, 서두수, 무포천이 거의 동서방향으로 흐른다.산림축적이 좋기 때문에 강물변화량이 비교적 적으며 특히 봄철에는 해빙의 영향으로 물이 불어난다. 대홍단군은 북한지역에서 산림자원을 제일 많이 가진 군의 하나이다. 산림넓이는 군넓이의 90.9%이상을 차지한다. 여기에는 이깔나무, 분비나무, 가문비나무, 봇나무, 사스래나무들로 울창한 원시림을 이루고 있다.기반암은 마천령계 지치층과 화강암으로 되어 있으며, 그 위에는 현무암과 속돌이 덮여 있다. 군안에 널리 분포된 토양은 산악표백화산림갈색토양이다. 소홍단수 골짜기를 비롯한 여러 곳에는 진펄토양도 퍼져 있다.삼지연군광복후 이 지역의 풍부한 산림자원에 힘입어 임업이 발달하면서 주요 통나무 생산기지로 부상했다. 임업 이외에 지방공업인 식료, 일용품, 피복, 건재, 화학공업이 조금씩 발전하고 있으며, 농업도 일정부분 이루어지고 있는데 주요 작물은 밀이다.백두산 기슭 약 3만 정보의 밭에서 재배되고 있는 들쭉은 이 지방 특산물로 알려져 있으며 이곳에서 생산되는 들쭉은 술, 단묵(양갱), 잼 등으로 가공돼 상품화되고 있다.삼지연군은 우리 나라의 지붕으로 불리는 백두용암대지위에 놓여 있어 다른 지역과는 다른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다. 군의 북서부에는 백두산(장군봉 2750m)이 있고 백두산 주변에는 넓.우리 나라에서 기온이 제일 낮은 삼지연군의 연 평균기온은 0.2∼2℃,1월 평균기온은 -22.8℃(최저 -41.2℃), 8월 평균기온은 17℃이다. 연 평균강수량은 800㎜이다.한반도에서 가장 긴 강인 압록강과 두만강이 이 군의 서북쪽 백두산 남쪽과 무두봉(1931m) 동북쪽에서 흐르고 리명수, 포태천, 소홍단수 등이 이들 강으로 흘러든다. 또한 백두산 천지와 삼지연 등 30여개의 자연호수들이 있다.삼지연군은 우리 나라에서 산림자원을 제일 많이 가진 군의 하나이다. 산림 넓이는 군넓이의 90.9%를 차지한다. 주요 나무종류는 이깔나무, 분비나무, 가문비나무 등 침엽수가 84.3%를 차지하고 있으며, 백두산 아래에는 바다를 연상시키는 일망무제의 울창한 수림이 일대 장관을 이루며 아스라히 펼쳐져 있다. 토양은 주로 산악표백화산림갈색토양, 산악표백토양, 고산습초원 토양으로 되어 있다.백암군북한의 주요 임업기지의 하나이며, 제제공업과 목재화학공업도 큰 비중을 갖고 있다. 백암읍에는 연암임산사업소, 유평노동자구에는 유평임산사업소가 있으며 그 산하에 14개의 임산작업소들이 있다. 광업에서는 석탄, 마그네사이트, 곱돌, 이탄 등이 많이 생산된다. 양흥노동자구에는 마그네사이트와 활석을 채취하는 남계광산이 있으며, 대택지구에는 백암탄광이 있는데 여기서는 공업원료, 주민용연료를 생산·공급한다.경작지는 백암군 전체 면적의 약 4%로 주요 농작물로는 감자, 밀, 보리, 콩이 있다. 감자는 백암종합농장과 상담리, 서두리, 동계, 덕립, 유평 노동자구 일대에서 많이 재배되며 밀과 보리는 상담리, 동계, 덕립 노동자구에서, 보리콩은 백암군안의 모든 협동농장에서 많이 재배된다. 또 군안의 모든 지역에서 돼지, 소, 염소, 양, 닭, 오리, 토끼 같은 집짐승을 기른다.백암군은 북한에서 제일 높은 백무고원에 놓여있어 여느 지역과 다른 자연지리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군의 평균높이는 1550m로 높고 평탄하다. 가장 높은 곳은 궤상봉(2332m)이고 가장 낮은 곳은 양곡리(약 850m)이다.다.
    사회과학| 2007.12.26| 5페이지| 1,000원| 조회(1,0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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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스마르크 독일 통일과 한계
    1871년부터 1918년까지 약 반세기 가까이 존속한 독일 제국은 독일 역사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무엇보다도 제국은 독일 역사상 최초로 통일된 민족 국가였다. 민족의 오랜 분열을 극복하고 통일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제국의 출현은 독일사의 일대 전기였다. 특히 제국 창건의 주역이라 할 수 있는 비스마르크(1815-1898)는 독일 역사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의 융커 출신으로, 괴팅겐 대학과 베를린 대학에서 수학했고, 농촌의 지루한 삶에 지루해하기는 했지만 자신의 융커 신분을 자랑스러워하던 인물이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뒤 잠시 행정 관리로 일하다가 곧 외교관이 되었다. 그는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독일연방의회의 프로이센 대표로 일하면서 오스트리아에 대해 경쟁적인 입장을 확고히 했다. 그 후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거쳐 파리에서 공사로 근무하던 중, 프로이센이 심각한 국내 정치적 위기에 빠지자 본국으로 소환되어 총리에 임명되었다.비스마르크가 통치했던 프로이센은 경제적으로도 독일의 최대세력이었다. 1862년에 프로이센의 총리로 임명된 오트 비스마르크는 군주정체를 염두에 둔 보수적인 정치가였다. 그는 힘의 정치를 강행하여 헌법에 규정된 의회의 예산 승인 없이 통치했다. 그는 국내정치에 있어서는 비민주적이었으나 대외적으로는 일관된 평화정책과 동맹정책의 성공으로 유럽의 새로운 역학 관계 속에서 독일의 확고한 지위를 확립하였다. 그는 아마도 자신이 직면한 상황을 영리하게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그뿐 아니라 제국은 민족으로서 독일인들의 의식과 정체성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1990년 동 ? 서독의 통일은 민족 정체성의 원천으로서 제국의 영향력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계기였다. 1990년 통일 이후 독일에서는 동 ? 서 독일의 통합을 제국의 부활로 받아들이고, 제국을 다시금 역사적 토대로 삼으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이처럼 제국은 매우 특별한 역사적 의미를 갖지만, 제국의 역사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제국의년에 걸쳐서는 프랑스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1871년에는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재위1861~1888)가 스스로를 황제로 하여 독일 제국의 설립을 선언하였다. 1890년에 물러나기까지 비스마르크는 유럽의 평화를 제일로 하여 독일 제국의 힘을 강화하는 데 힘썼다. 프리드리히 빌헬름2세(재위1888~1918)는 즉위 즉시 비스마르크를 해임시키고 군비 강화와 해외 진출에 힘썼다. 그래서 발칸 반도나 아프리카에서 독일 제국은 영국. 프랑스와 충돌하는데, 이것이 제1차 대전의 원인이 되었다.비스마르크는 이제 오스트리아를 배제한 소독일 정신 속에서 독일의 통일을 추구했다. 독일은 스페인에서의 왕위계승을 둘러싼 외교적 갈등에 의해 야기된 독불 전쟁(1870~1871)에서 승리함으로써 엘사스-로렌 지방을 획득하고 많은 전쟁 보상금을 받았다.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생겨난 애국심으로 남부독일의 영방들이 북독일 연맹과 합세하여 독일 제국이 되었다. 1871년 1월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가 독일 황제가 되었으며, 비스마르크는 19년간 제국의 총리로 통치하였다. 제 2독일 제국은 1871년에서 1918년 까지 지속되었다.프로이센의 수상인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오스트리아의 이원 통치 구조에 종말을 고하고 1866년 독일연방에서 탈퇴하고 여러 개의 북부, 서부 독일 국가들을 편입시킨다. 독일 연방은 없어지고 북독일 연방이 오스트리아를 제외하고 남부 독일 국가들과 연맹을 맺은 것이다. 1870년 프랑스와의 전쟁(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남부 독일 국가들은 프로이센과 북부 독일 연방에 가입함으로써 승전 후 비스마르크와 함께 독일의 통일을 이루어 낸다. 1871년 1월 18일 프로이센의 왕 빌헬름 1세의 선언으로 독일 제국이 성립된다. 역사적으로 두 번째로 성립된 이 독일 제국은 1871~1918년까지 유지된다.실로 독일 제국은 ‘바람 잘 날이 없는 제국’이라고 일컬을 만하였다. 제국은 대내외적으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으며, 제국의 발전은 여러 다.제국이 통일 국가로서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무엇보다 제국이 거둔 성취와 업적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 제국은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이룩하였다. 제국 창건과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사이 제국은 석탄 생산은 7배를 넘어섰고, 강철 생산은 15배나 증가하였다. 그리하여 제국 시대 독일은 산업화의 시점에서 앞섰던 프랑스는 물론 화학, 전기 등 새로운 산업 분야에서 세계의 공장이었던 영국마저 추월하였다.높은 경제 성장 덕택에 제국 시대 국민 총 생산액은 약6배 정도 늘어났으며, 국민들의 소득과 생활수준이 전반적으로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 성장의 혜택은 노동자에게 돌아갔다. 1900년 이후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은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제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약1/4 정도 늘어났다. 실업률과 노동시간은 줄어드는 추세였으며, 극히 초보적인 수준이지만 사회보험제도가 선구적으로 도입되었다.교육 부문의 발전상도 주목할 만하다. 제국은 일반 교육과 더불어 실용적인 직업 교육이 연계된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교육제도를 갖추었다. 초등 교육의 경우 일찍부터 의무교육제도가 도입되고, 강화되어왔던 프로이센의 전통을 기반으로 유럽에서 가장 선진적인 발전상을 이룩하였다. 19세기 말 독일의 초등학교 취학률은 90퍼센트. 국민들의 문자 해득률은 80퍼센트를 넘어서 단연 수위를 차지하였다. 고등교육의 발전 역시 이에 못지않았다. 독일의 대학 제도는 전 세계적으로 하나의 모델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높은 명성을 누렸다. 특히 의학과 자연과학 등에서 독일의 대학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뛰어난 연구 수준을 자랑하였다.한편 제국의 발전에 밝은 면이 있다면, 어두운 면도 두드러진다. 우선 정치적 측면에서 제국은 내부적으로 많은 취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제국은 외형상 입헌 국가와 법치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으나 결코 민주적인 국가는 아니었다. 의회는 존재하였으나, 헌법상의 권한은 매우 제한된 것이었다. 제국의 통치에서 중추적 역할을 수행한 것은 황제가 임명하는 제국재상을 비롯한 관료들이었특히 사회 민주주의나 가톨릭 세력은 오히려 국가와 사회 질서를 위협하는 ‘제국의 적’으로 배척되고 억압받았다.이처럼 제국의 모습은 한편으로 과학 기술과 산업이 눈부시게 발전하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강력한 국가 권력의 통제와 억압 아래 정치적 사회적으로 갖가지 갈등과 위기가 끊이지 않는 복합적인 면모를 지닌 것이다. 제국의 발전에 모순과 명암이 엇갈렸기 때문에 제국이 끊임없이 역사가들의 관심을 끌어 왔으며, 동시에 역사가들의 평가에서 지속적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민족의 영광과 위대함을 중요시하는 사람과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 사이에 제국에 대한 평가가 동일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기술 발전이나 물질적 부를 척도로 하는 사람과 사회 정의 혹은 사회적 불평등을 잣대로 하는 사람 사이에 대한 평가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기술발전과 물질적인 발전을 이루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 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에 씁쓸하기만 할 따름이다.독일 제국을 지배한 것은 산업화 이전 전통사회의 엘리트들이었다. 독일에서는 부르주아계급이 권력을 쟁취하지 못하고 혁명이 실패하였다. 그리하여 이미 산업화 이전에 부르주아 시민 혁명이 성공한 영국이나 프랑스와는 달리 전통적인 지배계급이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제국의 권력 엘리트들은 주로 대토지를 소유한 프로이센 귀족 집단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비스마르크를 비롯한 제국의 고위 정치 지도자들을 배출하였고, 제국의 핵심 관직과 군 장교직을 거의 독점하였다. 정치적으로 그들은 대부분 전통 지향적이고 보수적 성향이었으며,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적대적이었다. 또한 그들은 산업화로 인한 새로운 사회 경제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전통적 특권과 지위를 유지하는데 집착하였다.제국의 부르주아계급은 정치적으로 허약하였다. 1848~1849년 혁명이 실패한 뒤 부르주아계급은 권력에 도전하려 하지 않았고, 전통 엘리트들의 정치적 사회적 헤게모니를 수용하였다. 그들은 성장하는 노동계급과 혁명을 두려워한 반면 지배계급들의 대의기구인 제국의회는 입법권이 없었다. 제국 정부의 수상과 고위 관리는 제국의회에 책임이 없었으며, 군도 의회의 통제로부터 자유로웠다. 입법권을 가진 연방 참의원은 대의기구가 아니라 프로이센 정부가 지배하는 지방 정부들의 협의기구였다. 대의제의 기반 자체가 매우 불완전한 측면도 있었다. 프로이센에서는 악명 높은 ‘3계급 선거제도’가 정치적 불평등을 제도화하였다.헌정상 의회의 지위와 권한이 정당 정치의 수준을 결정하였다. 제국에는 보수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등 다양한 이념을 추구하는 여러 정당이 존재하였지만 정당 본연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였다. 의회가 국정의 중심에 서지 못함에 따라 정당은 정치적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자신들을 지지하는 사회 계층이나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데 치중하였다. 그 결과 제국 시대 정당들은 정치적 목표를 추구하는 결사체보다는 경제적 압력 단체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기능과 성격이 변질된 제국의 정당들에서 정당 정치의 이상적인 정치 행태를 기대하기란 어려웠다. 계급이나 종교 혹은 지역에 기반을 둔 제국의 정당들은 사회적 지지기반의 제약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고, 이에 따라 이해관계의 대립을 조종하고 갈등을 타협으로 풀어 가는 유연성을 보여주지 못하였다.제국을 움직인 것은 의회와 정당이 아니라 관료제였다. 제국의 통치에서 중추적 역할을 수행한 것은 관료들이었으며, 정치적 의사 결정 과정은 소수의 고위 핵심 관료들이 독점하였다. 관료가 통치하는 관치 국가에서의 측면에서는 취약하였다. 따라서 제국의 통치 엘리트들은 권력을 유지하고 체제를 지탱하는 여러 방안을 고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힘에 의한 통제와 억압이 그 하나였다. 제국 창건 이래 거의 20여 명 가까이 제국을 이끌었던 비스마르크는 강압적인 제국 통치의 상징이었다. 그는 ‘사회주의자법’과 ‘문화투쟁’을 통하여 사회 민주주의 세력과 가톨릭 세력을 탄압하고, 폴란드 등 소수 민족 세력을 억압하는 등 철권통치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1890년 비스마르크 퇴임 이.
    사회과학| 2007.12.26| 6페이지| 1,000원| 조회(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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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산주의란 무엇인가? 평가A좋아요
    공산주의란 무엇인가?1. 공산주의의 개념'코뮤니즘(communism)'은 본래 공유재산을 뜻하는 '코뮤네(commune)'라는 라틴어의 조어(造語)로서, 사유재산제를 철폐하고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재산을 공동소유하는 사회제도를 의미하였다. 사유재산제로부터 발생하는 사회적 타락과 도덕적 부정을 간파하고, 재산의 공동소유를 기초로 하여 더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공동사회를 실현하고자 한 공산주의의 이상은 인간의 정치적?사회적 사색이 시작된 때부터 싹튼 것으로 볼 수 있다.기원은 멀리 고대 유대인들의 에세네파교도(Essenes), 플라톤의 《국가론》, 원시 그리스도교의 교리, 중세 말 T.모어의 《유토피아 Utopia》, 근세 초 T.캄파넬라의 《태양의 나라 Civitassolis》(1623) 등에까지 소급된다.그러나 오늘날 공산주의라고 할 때는 문헌에만 남아 있는 죽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고 있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킨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1840년대 이후 서유럽에서 K.마르크스와 F.엥겔스에 의하여 창시된 마르크스주의를, 레닌이 20세기 초 러시아의 특수한 조건하에서 발전시킨 사상 및 이론의 체계와 실천운동으로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 즉 공산당(共産黨)이 수립한 과거 소련?동유럽?중국대륙?북한?인도차이나반도 등지의 정치체제를 가리키는 말이었다.마르크스주의는 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産業革命)의 여파가 유럽의 정치와 사회에 격심한 파동을 일으킨 격동의 시대 산물이었다. 프랑스혁명은 자유?평등?박애의 3대 이념(理念)을 목표로 내세운 민주주의혁명으로, 불멸의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프랑스혁명은 반(半)봉건적 전제군주제를 전복하고 시민적 자유와 인권을 천명하는 데는 일단 성공을 거두었다.그러나 천명한 자유와 인권은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제도화되지 못하고, 우여곡절을 거친 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제정(帝政)을 초래하고 말았다. 더욱이 평등의 이념은 법률 앞의 평등에 그쳤을 뿐, 사회의 실질적 평등을 실현하지 못하였으제시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것을 제시하기 위하여 마르크스가 심혈을 기울여 쓴 것이 《자본론(資本論)》이다. 여기에서 그의 소외론(疎外論)은 계승되고 있다. 마르크스는 2월혁명이 좌절된 후 영국으로 망명, 경제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는 영국 고전경제학의 여러 범주(範疇)를 비판하는 한편, 그 노동가치설(勞動價値說)을 기초로 잉여가치(剩餘價値)의 이론을 도출하였다. 거기에 따르면 자본주의사회에서의 노동자는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자본가에게 고용되어 노동력을 상품으로 팔고 그 대가를 임금으로 받아서 생활한다.그런데 노동자는 약자의 입장에 있으므로 자기의 노동력을 재생산(再生産)하는 데 필요한 시간 이상의 노동을 한다. 이 지불받지 못하는 잉여노동시간에 창조한 가치, 즉 잉여가치는 당연히 노동자에게 돌아와야 하는데도 자본가의 수중으로 들어가 이윤이 된다. 이윤은 곧 자본가의 노동자에 대한 착취의 결과라고 한다. 그런데 자유경쟁하의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더욱 착취하지 않고서는 경쟁에 이길 수도, 살아 남을 수도 없는 것이 자본주의의 발전법칙이다.여기서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는 이해의 근본적인 대립으로 계급투쟁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숫적으로 점점 늘어나고 계급의식으로 단결된 프롤레타리아트는 혁명을 일으켜 부르주아지의 정치권력을 타도하고 자신의 새로운 권력을 수립하여, 그 힘으로 부르주아지가 사유하였던 생산수단을 사회 전체의 공유로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을 전면적으로 전개한 것이 1867년에 출간된 《자본론》 제1권이다.마르크스는 그의 생전에 《자본론》 제2권과 제3권의 출간을 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엥겔스가 그의 원고를 정리하여 뒤에 출판하였다. 엥겔스는 사적 유물론과 잉여가치론으로 말미암아 사회주의는 하나의 과학이 되었다고 자부하였으며, 70년대부터는 마르크스주의를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하고, 생시몽, 푸리에, 오언 등의 선구적인 사회주의에는 과학적 이론이 없다고 하여 '공상적 사회주의'라 불렀다.19세기 중엽에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말은 임무로 규정하고 있으며 다만 그들이 광범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대중과 결합할 때만이 혁명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는 블랑키스트들과는 달리 혁명 이후의 권력형태가 프롤레타리아 자신의 독재임을 강조한다. 이 독재는 프롤레타리아의 권력으로서 자본주의의 계급적 잔재를 청산하고 새로운 공산주의 사회를 준비하여 공산주의 사회의 도래와 더불어 소멸한다는 것이다.마르크스주의는 또한 국가를 계급지배의 도구로 간주하고 국가의 전면적 폐지를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부르주아 국가권력의 파괴가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은 국가권력에 대한 끊임없는 정치투쟁으로 고양될 수밖에 없고, 노동자계급의 전략, 전술에 있어서는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타계급과의 동맹이 중요한데 이것 역시 무원칙한 동맹은 아니며 정확히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 하에서 가능하다 보고 가장 견실한 동맹세력으로서 농민을 들고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일체의 개량투쟁을 거부하는 블랑키주의나 지나친 체제내적 개량투쟁을 옹호하는 프루동주의와는 달리 계급투쟁에서의 노동조합이나 총파업이 갖는 의의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마르크스는 생산과 경제의 중요성을 구조적인 성격을 갖는 특정한 양식, 관계의 문제로 제기하며 경제적 구조가 사회적 총체를 이룬다고 보았고, 또 그것이 국가 등의 특정한 형태를 형성하고 규정한다는 뜻이자 그 형태의 성격을 규정한다고 보았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가 계급이 없는 새로운 사회가 형성될 수 있는 물질적 사회적 조건을 창출한다고 보았고, 자본주의 사회의 소유형태는 생산수단이 이미 공동 점유된 형태로서 극소수인들의 사적 소유제이면서 계급적 소유제라고 주장하며 공동소유제에 대해선 공동 점유된 생산에 대한 공적통제를 통해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를 한층 실질화 시킨다고 보았다.그는 근대사회를 객관적인 힘과 압도적인 대상들의 형태를 띠는 사회적 조건들 아래 개성이 완벽하게 종속되는 사회로 이해했는데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을 통해 결국 낯선 사회적 관계가 다수 개인들을 억누른다고 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계급투쟁 사상의 광기(狂氣), 또한 거친 물리적인 방법에다 강압적인 힘으로 세계를 개조하겠다고 덤비는 광기이다.계급투쟁은 공산주의 이론에서 명백한 정의(正義)의 기초로서 믿어지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사회를,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모든 것을 사살할 권리를 부여받은 사냥꾼의 전용 사냥터로 생각하고 있다. 즉 끊임없는 계급투쟁, 볼셰비키에 의한 항구적인 혁명이 그것이다.최초의 러시아 혁명의 바리케이트에 나선 이후 이들은 계속해서 투쟁하였다. 처음에는 러시아 제정(帝政)과 다음에는 자유·부르주아 임시정부와 또 그 다음에는 국민과 투쟁하였다. 그 결과는 무서웠다. 우리에게 이르기까지의 여러 세대들은 밭을 갈고 써레질을 하듯이 파괴되었다.마르크스에 의하면 계급은 다른 계급과 적대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착취하는 계급과 착취당하는 계급이 있을 뿐이며 이들 계급은 대립되거나 충돌적인 이해관계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바로 이 테제 속에 오류가 있는 것이다. 대립이 반드시 충돌이거나 모순이 아니다. 대립의 조화가 존재하는 것이다. 계급간의 협력, 계급간의 단결이 있으며 오직 이것이 있기 때문에 사회는 살아나고 발전하는 것이다. 모든 조직에는 조화된 협력이 있으며 모든 분업에는 서로 다르고 대립되는 기능의 상호 보완이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였다.악명 높은 계급투쟁의 격화이론은 사실에 입각한 논리, 건전한 사고를 압살하였다.계급적인 혁명에 의한 방법으로, 패자에 대한 승자의 물리적인 압박과 파괴의 방법으로 어떤 한 사회로부터 질적으로 다른 사회로 이행하는 것은 정상이 아니었다.마르크스주의는 결국 우리를 파멸, 낙후, 양심의 파괴로 인도하였다. 환상적인 미래가 인간성보다 우윌하다는 생각은 마르크스주의자들로 하여금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하였다. 그것이 권력, 폭력적인 행위, 탄압 등에 이르러서는 선과 악을 가리지 않았다. 긍정적인 가치 - 선(善), 양심, 사랑, 협력, 단결, 권리, 자유, 법의 지배 - 등은 계급의 대립을 약화기와 그에 상응하는 의식 형태들은 더 이상 자립성의 가상을 지니지 않는다. 그것들은 아무런 역사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어떠한 자립적 발전도 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물질적 생산과 자신들의 물질적 교류를 발전시키는 인간들이 이러한 자신들의 현실과 함께 또는 그들의 사유 및 그 사유의 산물들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의식이 생활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의식을 규정한다.”마르크스는 의식과 물질은 분리하며 생각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상·하부구조론에서 다시보자.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기를 “생활의 물질적 조건 속에 뿌리박은 것이다.”라고 하지만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단선적인 기초가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즉 포이에르바하의 비판을 통해 관념은 사회적 산물이자, 사회가 관념을 일방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 스스로 생성될 수도 없고, 사회적 산물 역시 인간의 창조력이라는 관념없이 생성될 수 없다는 것이다.마르크스의 토대와 상부구조 사이에는 ‘계급’이 존재한다. 이 계급은 무엇인가? 사회의 계급구조는 그 사회의 지배관념들에 대해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 마찬가지로 지배질서에 대항하는 관념 역시 이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구조적 토대를 낳는 계급관계의 형성에 달려있다. 쉽게말해 어떤 노동자는 자신이 사회관계 속에서 노동자임을 ‘인식/의식’하게되고(이러한 면에서 그의 존재가 그의 의식을 규정한다.) 이 인식을 통해 자신의 처지에 대해 자각하게 되며 이 자각이 정신적 위안으로 결론 지어지는 것은 ‘종교’이며 혹은 실천성를 띠게되면 혁명적 계급으로 구성된다는 것이다.(의식이 다시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다.)즉 주체와 객체간의 활발한 상호작용으로의 변증법을 이해한다면, 이데올로기나 ‘의식’은 개인과 세계가 서로에게 대해 행위할 수 있도록 해주는 필수적인 의미를 제공한다. 현실은 단순히 인간에 외재하면서 그 의식을 모습지어주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능동적 적용과 기존환경의 수정을 통하여 인간 목적에 적응되어지는 것이다.결론적으로, 이데올로기는 결.”
    사회과학| 2007.12.26| 18페이지| 1,000원| 조회(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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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의 언어Ⅰ. 서론Ⅱ. 본론? 북한의 언어 정책? 김일성 교시와 김정일의 언어 이론? 문화어? 남북한의 언어 규범 비교? 북한의 어휘정리Ⅲ. 결론Ⅰ. 서론한반도가 분단 된지도 5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 남북간에는 서로 다른 체제를 유지해옴으로써 생활환경뿐만 아니라 의식 구조에도 많은 이질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민족정신의 바탕이 되는 언어까지도 그 용어의 개념이나 표현 방식이 크게 달라지고 있다는 것은 또 하나의 민족적 불행으로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번 기회를 통해 북한 언어 실상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남북통일은 우리의 숙원이자 필연이다. 그러나 남북통일을 바라는 마음만으로는 앞으로 다가올 남북통일에 대비할 수 없다. 남북이 통일되었을 때에 남북의 주민들은 대부분 큰 지장을 받지 않고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남북의 언어는 방언 차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북 분단의 장기화로 인하여 그 동안 남과 북은 서로의 언어정책을 달리하였으며 각각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내었다. 또한 문화 배경이 다른 외래어를 각각 받아들임으로써 남북의 국어는 일상생활 에서 사용하는 어휘들조차도 부분적으로 많은 차이를 가져오게 되었다. 방언차로 인한 의사소통의 장애 요소를 없애기 위하여 표준어를 설정하여 놓듯이, 남북의 언어 차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의사소통의 저해 요소를 찾아 이를 통일시키는 작업은 각각 남북이 표준어 규범을 설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구체적인 방법이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남북통일 이후의 언어 문제 가운데에서도 국어 정책과 국어 교육부문은 특히 첨예하고 절실한 현실 과제로 두드러지게 나타날 것이다. 국어 정책면에서는 우선 남북 주민들의 일상적인 언어생활에서 불편과 이질감을 느끼지 않도록 국어 생활 규범을 만들어야 하며, 국어 교육면에서는 학생과 일반 주민에게 가르쳐야 할 국어 내용에서부터 이를 가르칠 국어 교사의 재교육 및 교육 방법에 이르기까극히 교조적이며 통제적인 방법으로 진행되어 왔다. 북한의 언어 정책의 기본 흐름은 김일성의 절대적인 교조주의적 통제 아래 한편으로는 체제를 옹호하고 또 한편으로는 민족어의 발전을 꾀한다는 이중 구조를 가진 것이다.1. 김일성 중심의 언어 정책북한의 언어 정책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는 북한에 있어서의 다를 모든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거의 김일성 한 사람의 교시 내지는 지시, 방침에 의하여 기획되고 시행되고 통제된다는 점이다. 김일성은 언어 정책에 대한 관여는 물론이고 때로는 낱말의 의미를 정의하고 고장 이름이나 사물의 명칭을 직접 바꾸거나 새로 짓기도 하는 등 거의 무소불위에 가까운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따라서 그 영향 아래서 나타난 언어 상황 역시 그들의 권력 구조의 특성상 김일성과 당에 대한 충성심이 기초가 되는 것이다.1) 김일성에 의한 것독재 [명]--《김일성저작선집》 5권, 제2판:169--2)김일성을 위한 것저쪽 산굽이에서 꽃 속에 묻힌 통학렬차가 미끄러지듯 달려왔습니다. 순간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원수님 만세!》 소리가 하늘땅을 뒤흔들었습니다. 옥이네 동무들은 너무 기뻐 발을 동동 구르며 꽃다발을 흔들고 또 흔들었습니다.--인민학교 3학년「국어」제17과 “통학렬차를 맞는 날”에서--3) 언어예절① 토의 사용 문제인데 김일성과 그 가계에 관한 언급에는 반드시 존경 토 ‘-시-’ ‘-께서-'를 써야 한다.예) 김일성수령님께서는 인민의 자애로운 어버이시다.② 존경의 뜻을 가진 단어를 써야한다.예)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③ 김일성을 정중히 일러 모시는 말을 써야 한다.예) 위대하신 최고 사령관동지④ 김일성에 대한 표현은 문장의 제일 앞에 내세운다.예)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를 모시고 회의가 개막되었다.2. 체제 반영의 언어 정책북한의 언어 정책에서 빠뜨릴 수 없는 특색의 하나는 언어가 그들 체제 유지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도록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정치사상 교양을 위해 많은 새 말들이 만들어 지고 있으며 그들 체제에 없었더라면 오늘 우리의 글이 전체 인민에게 널리 보급되지 못하고 따라서 근로자들의 사상의식과 기술문화수준을 빨리 높이지 못하였더라면 우리는 사회주의 건설에서 천리마를 탄 기세로 빨리 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문화어학습》, 1968. 2호 : 1~7) - 언어도구관◎ 다음으로 사상적으로 동원하고 사회적 운동을 벌려 모든 사람들이 우리말을 올바르게 쓰는 기풍을 세워야 하겠습니다. 힘든 한자어를 쓰지 말고 군중이 알 수 있는 수운 우리말을 써야 한다는 것을 당적으로 널리 선전해야 하겠습니다... 원래 맑스-레닌주의에 정통한 사람들은 어려운 말을 쓰지 않고도 모든 리론을 알기 쉽게 잘 해설합니다. 그런데 리론을 깊이 알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책에서 문구를 따기 좋아하며 힘든 말을 늘어놓아 남이 알아들을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문화어학습》, 1968. 2호 : 1~7) - 언어의 비계급성(2)김일성의 1차, 2차 교시 비교1) 문자 개혁1차 교시에는 어떤 사람들은 문자 개혁을 곧 실시하자고 하였으나 그것을 반대하였다고 1차 교시에서 말하고 있는데 이는 김두봉 일파의 주장에 대한 견해를 밝힌 것이다. 문자 개혁을 반대한 이유는① 언어 문제를 민족 문제화 관련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반대한다.② 문자 개혁은 과학과 문화의 발전에 큰 지장을 준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③ 문자 개혁은 국제적인 방향도 고려되지 않은 단견이다.2차 교시에는 우리 글자가 네모난 글자이므로 인쇄의 기계화와 타자에 어려움이 많으므로 글자를 가로풀어써서 타자하기도 쉽게, 알아보기도 쉽게 하는 연구 작업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다만 통일이전에 북한만의 문자 개혁을 반대한다는 것이다.2)한자어, 외래어1차 교시에는 무엇보다도 먼저 한자어에 대한 태도를 옳게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새로 나오는 말들을 우리 말 어근에 따라 만드는 것을 원칙적으로 하여야 하고 고유어와 한자어의 두 체계로 복잡하게 할 필요가 없으며 학자들은 우리말 어근이 얼마나 되고 한자어어근이 얼마나 되는가를 통계 낼 필 쓰지 않고 다른 나라 말을 망탕 쓰는 것은 민족적 자존심이 없는 표현입니다.” (김정일)3) 우리식 언어생활① 노동 계급은 말과 글에서 당 정책적 선을 철저히 세우고 당성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② 언어생활에서 노동 계급적 선을 세워야 한다.③ 건전한 언어생활을 하도록 하여야 한다.④ 말과 글에서 인민들의 정치 도덕적 사상 감정을 옳게 반영하도록 하여야 한다.(4) 언어 사용 규범의 준수와 말과 글의 표현적 질제고언어 사용 규범의 준수는 말과 글의 기능을 높이기 위해서도 필요하고 언어생활의 통일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도 중요한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어 규범을 잘 알고 이에 따라 언어활동이 이루어져야 한다. 말과 글의 표현적 질을 제고하기 위해서는 간결성, 명료성, 정확성을 보장하여야 한다.? 문화어1. 문화어의 성립광복 이후 북한의 언어 정책은 김두봉 ? 이극로 ? 정렬모 ? 홍기문 등 여러 언어학자들에 의해 언어학적인 지반을 다지고 소련의 사회주의적 언어관과 언어 정책을 바탕으로 독자적 개혁 방향을 모색하다가 60년대 후반에 와서 일대 개혁을 이룬다. 김일성은 언어에 대한 많은 문제들에 대해 1964년과 1966년 두 차례에 걸쳐 고시를 발표한다. 북한은 이후부터 언어학의 모든 문제들도 다른 모든 분야와 마찬가지로 이 두 교시에 의거하여 문제의 방향을 잡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취한다. 1964년과 1966년의 두 교시에는 북한의 언어관, 언어 정책, 언어학의 모든 세부항목들의 방향이 제시되어 있어 이후 모든 언어 정책의 바탕이 되고 있다. 문화어도 김일성의 1966년 교시에서 처음 사용된 말이다.서울말은 남존여비사상 썩어빠진 부르주아적 생활이 지배하는 말로서... 오늘 남조선방송에서는 여자들이 남자에게 아양을 떠는 코맹맹이 소리를 그대로 쓰고 있으며... 그것마저 고유한 우리말은 얼마 없고 영어 일본말 한자어가 반절이나 섞인 잡탕말이다... 우리는 우리 혁명의 참모부가 있고 정치 경제 문화 군사의 모든 방면에 걸치는 우리 혁명의 전반적 전략과 전술이 세워지는는 원칙을 기본으로 하면서 일부 경우 소리 나는 대로 적거나 관습을 따르는 것을 허용한다.2) 자모의 차례와 그 이름남북한의 자모의 차례와 이름이 크게 차이가 난다. 자모의 수에 있어서 북한에서는 복합자 16자를 합해 40자를 택하고 있는 반면 남한에서는 자모의 수를 24자로 하고 있다. 그리고 자모의 이름도 남북한의 차이가 있다.ㄱ(기윽) ㄴ(니은) ㄷ(디읃) ㄹ(리을) ㅁ(미음) ㅂ(비읍) ㅅ(시읏) ㅇ(이응) ㅈ(지읒) ㅊ(치읓) ㅋ(키읔) ㅌ(티읕) ㅍ(피읖) ㅎ(히읗) ㄲ(된기윽) ㄸ(된디읃) ㅃ(된비읍) ㅆ(된시읏) ㅉ(된지읒)ㅏ(아) ㅑ(야) ㅓ(어) ㅕ(여) ㅗ(오) ㅛ(요) ㅜ(우) ㅠ(유) ㅡ(으) l(이) ㅐ(애) ㅒ(얘) ㅔ(에) ㅖ(예)ㅚ(외) ㅟ(위) ㅢ(의) ㅘ(와) ㅝ(워) ㅙ(왜) ㅞ(웨)(그) (느) (드) (르) (므) (브) (스) (응) (즈) (츠) (크) (트) (프) (흐) (끄) (뜨) (쁘) (쓰) (쯔)3) 토 적기북한에서는 조사를 하나의 품사로 인정하지 않고 하나의 접미사로 처리하여 어미와 함께 ‘토’라고 부르고 있다.4) 합친말(합성어) 적기북한에서 합성어는 어근의 본래 형태를 각각 밝혀 적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러나 다음의 경우는 소리대로 적는다.5) 앞붙이(접두사)와 말뿌리(어근) 적기접두사와 어근이 어울릴 때에는 각각 그 본래 형태를 밝혀 적도록 한다. 이것은 남한과 차이가 없다. (갖풀, 덧신, 맏누이, 아랫집, 웃집, 짓밟다, 헛디디다)6) 한자말 적기북한은 한자어를 음절마다 해당 한자음대로 적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즉, 한자어의 음절 각각을 하나의 형태부로 인정하여 어느 위치에서나 같게 적는 형태주의 원칙을 지킨다. 그러나 일부 한자어에서는 변한 소리로 적는다. (궁냥, 나사, 나팔, 류월, 시월, 오뉴월, 요기)반면 남한에서는 의존명사나 외래어를 제외하고는 어두의 ‘ㄹ,ㄴ’ 소리를 인정하지 않고 두음법칙에 따라 소리나는 대로 적는다. 또 모음이나 ‘ㄴ’ 받침 뒤에 이어지는 ‘렬, 률’은 ‘열)
    사회과학| 2007.12.26| 21페이지| 1,000원| 조회(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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