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술은 잠든다. 새로운 예술의 탄생을 위해- 다다미술을 중심으로 살펴본 현대미술의 정신적 상황과 그 대표적 사례-.우리들이 예술가에 대해 진실로 감사해야 할 것은 우리들 자신이 볼 수 있는하나의 세계를 넘어서 세상에 존재하는 예술가의 수만큼 세계를 볼 수 있다는 그 점에 있다 { 金海成, 現代美術을 보는 눈 (열화당, 1993) p.19위의 말은 마르셀 프루스트(M. Proust)가 한 말로서, 과거의 모든 예술에 해당될 수 있는 말이긴 하지만, 특히 20세기 이후의 현대미술을 이해하는데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즉, 프랑스 혁명 이후 그리고 20세기로 들어선 이래, 예술이 처한 국면은 어떤 사회 단체나 종교적인 집단의 요구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로이 작품은 제작할 수 있는 상대적인 자유를 획득한 것으로 특징 지을 수 있을때, 이러한 연유로 오늘날에 와서는 작품의 주제를 선택하고 문제를 발견하며, 주제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예술가 자신인 것이다. 나아가 자본주의 생산력의 급증과 함께 대단히 복잡한 양상을 띠고 전개되었던 서양의 현대미술에 있어, 모방 의 개념에 입각한 자연주의의 미학 원리를 거부한 극단적인 주관주의를 그 주요한 특색이라고 보았을때, 각 예술가들의 시각은 그만큼 더 비중을 갖게 되는 것이다. 주관적 생각, 감정과 느낌에 충실하려는 주관주의는 대상 세계와의 통일성을 상실함에 따라 점차 인간의 자아 분열을 초래하였고, 이에 따라 현대 미술에서는 과거 미술과는 달리 소외된 인간, 분열된 인간 등이 빈번히 작품의 주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는 20세기를 1, 2차 대전이라는 전쟁으로 막을 연 우리 시대의 상황과 무관할 수 없는 것이며, 우리는 여기서 예술을 그 시대를 반영한다 는 고전적인 명제를 다시금 음미해보게 된다.이러한 전제 하에 이 글에서는 1차 대전을 전후하여 등장했던 다다 미술을 현대 미술의 정신적 상황과 관련지어 살펴보고자 한다. 물론 다다 이전 20세기 회화의 혁명을 통해 조각과 건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야수파, 표현주의, 말해 인간 이성의 독립과 세계에 대한 합리적인 관조를 통해 무지와 미신에서 해방된 새롭고 좀 더 평등한 자유인들의 세상을 세우려는 의지의 역사적 과정을 현대화라고 불렀을때,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 이성에 기초를 둔 합리화 과정은 인간 해방과 유토피아적 사회 건설을 향한 인간중심의, 인간만을 위한, 인문철학의 구체적인 실현이라고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자연이라는 것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 얼마든지 착취, 변형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으며 역사는 계속 발전해나가는 것이라고 믿었다.그러나 그런 합리화가 증가, 발전될수록 지식의 체계나 사회의 질서, 또는 경제나 효율성 자체가 목적이 되어, 누구를 위한 지식이며, 질서며, 효율인가 하는 질문을 망각함으로써 도리어 이러한 합리성 자체의 추구는 인간을 전대미문의 극도의 관료, 행정적 질서와 논리 속에 노예처럼 예속시켜 버리게 되었다. 즉 합리화의 가장 빛나는 실현인 과학, 공업, 기술의 발전을 통한 자연의 정복은 결국 인간을 자멸로 이끌어, 자연 환경은 파괴되고, 인간 자신을 멸종시킬 수 있는 수단까지 등장하여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또한 대량 생산의 경제 체제는 새로운 시장 경제의 논리를 창출하여, 심지어는 인간의 취미, 성향까지도 조절하여 인간 본연의 필요나 인간의 정신성 추구와는 전혀 상관 없는 삶의 양식을 밖으로부터 강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합리화의 부정적인 측면은 낙관적으로만 보이던 세계의 예술을 그 낙관성에서 눈을 돌려 부정적인 회의적 측면을 자각하게끔 하였으며 이런 상황에서 서양의 전통 예술 양식은 붕괴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1914년에 시작, 1918년까지 계속되었던 전쟁은 많은 사람들에게 지적, 문화적, 사회적 체제가 드디어 완전히 붕괴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새로운 세기가 출현한 그 시점에서 기계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현대 문명이 약속했던 모든 낙관주의는 바로 그 기계에 의해 파괴되어버리고 말았으며 1차 대전의 결과가 예술 언어의 성격을 변화시킨 정도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종교, 합리적인 사고직접적으로 전통에 대항해서 야수들 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야수파의 미술과 인간을 정상적으로 순수하게 형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극도로 단편화시켰던 입체파의 미술은 미래파와 더불어 다다에 큰 영향을 미쳤다..1914년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중립국이었던 스위스는 도피가 가능했던 사람들에게 피난처가 되었다. 쮜리히는 독일어권 이민자들의 집결지가 되었으며 그곳에서 1916년 2월, 휴고 발(Hugo Ball)은 카바레 볼테르(Cabaret Voltaire) 라는 나이트 클럽을 열었다. 여기에 처음부터 참여했던 주요 인물로는 마르셀 장코(Marcel Janco), 한스 아르프(Hans Arp), 트리스탄 짜라(Tristan Tzara) 등을 들 수 있으며, 얼마 뒤 휠젠벡(Richard Huelsenbeck)이 동참하게 된다. 이들의 공연은 서구문화 전체에 반발하는 행동과 작품에 의해서 그런 세계로부터 분리되고자 하는 떠들썩한 대중적인 행위가 되었다. 모든 미술이, 그 이전의 전위미술, 특히 표현주의까지도, 전쟁을 만드는 기계의 부속품으로서 배척되었다. 이 공연에는 에릭 사티와 쇤베르그의 최신 음악이 연주되었으며 악기가 아닌 도구로 만들어진 소음주의 음악도 포함되었다. 문학에 있어서는 아프리카 부족의 시와 이 그룹의 작가들이 만든 무의미한 시가 낭송되었다. 단어를 우연적인 순서로 나열한 시, 의미 없는 음으로 이루어진 음성시, 둘 또는 그 이상의 시를 동시에 낭송하는 동시시 등이 그 예이다.1917년에 이르러 다다는 미술관을 열고, 잡지를 발간하며, 같은 생각을 가진 문학가나 미술가들과 개인적인 접촉을 가지면서 점차 국제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다다 라는 말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으나{ 목마 라는 뜻의 어린이말, 루마니아어로는 그래, 그래 의 뜻, Kru African에게는 암소의 꼬리를 의미하는 등 여러 의미가 있다. C.W.E.Bigsby, Dada and Surrealism(`朴熙鎭 譯, 서울大學校 出版部, 1979) p. 25 참고이 역사적으로 다다라는자본주의를 표현주의적 서사에 의한 풍자로 맹렬하게 고발하였으며, 이 밖에 존 하트필드(John Heartfield)는 포토몽타쥬 기법을 적극적으로 개발하여 다다가 베를린에 뿌리 내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다다의 활동은 점차 상승 기류를 타고 불어나, 점점 더 격렬해지다가 1920년 말을 고비로 갑작스런 활동이 부진해진다. 한편 1919년 쮜리히에서 쾰른으로 온 한스 아르프는 막스 에른스트(Max Ernst)와 바르겔트(Johannes Baargeld)와 함께 뛰어난 조형작품을 남겼다. 그들은 서로 다른 재능들을 일련의 집단적인 작품으로 융합시켜 익명으로 발표하고, 초현실주의 기법을 예고해주는 집단적인 콜라쥬 회사를 차리기도 한다. 이들 역시 1920년, 4월에 개최했던 전시회가 대중들의 반감을 사고 경찰의 개입을 야기시킴으로서 막을 내리게 된다.베를린에서의 다다가 실제로 혁명이 일어나고 사회적인 혼란이 있을때 때맞추어 나타난 반면, 파리에서의 다다는 전쟁 말기에 이르러 자리 잡게 되었는데, 주로 문학적인 본질을 갖고 있었다. 즉, 회화나 조각에서의 다다는 주로 외부에서 유입된 것이었던 반면, 시와 연극에서는 보들레르, 랭보, 말라베르를 비롯, 알프레드 자리, 레이몽 루셀, 아폴리네르, 콕토에 이르는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한 것에 관한 전통 속에서 존재하고 있었다. 파리 다다에서는 과거 그 어느때보다 격렬하고 신경질적인 선언서, 발표회, 간행물, 이벤트, 해프닝 등이 빈번히 이루어졌다. 그러나 아르프, 에른스트, 피카비아 같은 작가들은 --비록 피카비아가 독자적으로 선언문을 발표하기는 했어도-- 비교적 비활동적이었다. 초기 다다이스트들은 무정부 상태를 유지하려고 했으나, 브르통이 이끄는 새로운 세력은 다다에 기초한 보다 혁명적인 계획을 추구하고 있었으며 1922년 파리 회합에서 격심한 혼란으로 원래적인 형태의 다다이즘이 끝이 난후, 이들 새로운 세력은 1924년 초현실주의라는 이름 아래 결속하게 된다. 이미 이 때에 이르면 다다는 대중의 의식에 대한 조직화된 발견된 오브제였다. 물론 이러한 개념들은 일찌기 존재해왔던 것이었지만 뒤샹은 바로 이 특정한 시점에서 그것들은 도입함으로써 이후의 여러 미술 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그는 시각적 무관심 상태에서 기존의 사물들을 예술로서 간주하는 미술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으며 여기서 작가의 통제력은 보다 완벽하게 배제될 수 있었다. 그의 유명한 작품인 (1917년)은 남자의 소변기에 R.Mutt'라는 서명을 하여 샘 이라 명명한 것으로서, 그 명칭과 그것이 놓인 위치는 그 사물의 원래 기능을 전도시킨다는 의도를 드러낸다.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뒤샹이 미술가 - 미술작품 - 대중 의 관계를 전도시킬 것을 제안하였다는 사실이다. 외적인 혹은 내적인 동기에 의해서 작품을 구상하거나 특정한 의미를 지닌 사물로서의 작품을 제작하기 위하여 자신의 창작력을 동원하는 대신, 미술가는 단지 선택만 하는 것이다. 뒤샹에 의하면 그것도 무관심하게 선택하는 것이다. 즉 이 세상은 흥미로운 물건들로 이미 가득차 있기 때문에 예술가들은 더 이상 그런 상태를 가중시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다다이스트들은 이러한 아이러니한 선택의 행위가 진정한 창조 행위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즉, 하나의 예술품을 만들어내는 것은 발견이라는 개념이지 그 대상의 유일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중은 자신이 미술작품에 대하여 어떤 만족감을 기대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왔는데, 이제 뒤샹의 작품 앞에서는 미술 작품을 수용하느냐 거부하느냐 하는 선택이 아니라, 전시된 것이 미술 작품인가 아닌가, 그렇다면 미술 작품이란 무엇인가를 자문하게 되었다. 그것이 도대체 예술 작품인가 하는 문제는 오늘날까지 논란이 되고 있지만 그의 반심비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가 경고했듯이 기성품들은 결국 미술 작품이 되어버렸고, 그것들 나름대로의 전도된 아름다움을 가지게 되었다.한편 그의 대표적인 역작인 (The Bride Stripped Bare by her Bachelors, Even) 혹은 간단하게 (Large Glass)라 있다.
1884년 이탈리아 리보르노에서 출생한 모딜리아니는 유대계 명문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피렌체와 베네치아의 미술학교를 다닌 뒤, 1906년 이후에는 파리에서 살았다.1908년 처음으로 앙데팡당전에 출품하였고 그 다음해에는 조각가 브랑쿠시의 권유로 조각을 시도하여, 니그로 조각과 브랑쿠시 식의 사실을 떠난 간결한 조형양식을 흡수 발전시킨 독자적 조각 작품을 만들었다. 그 이후 다시 회화로 돌아가 피카소와 세잔의 작품에서 깊은 감동을 받은 그는 이 때부터 자신 특유의 독창적인 작풍을 수립한다.그리하여 1910년 등 6점의 유화를 앙데팡당전에 출품하였으며, 1913년 몽파르나스로 거처를 옮기고 그곳에서 키슬링, 수틴 등의 작가들과 친교를 맺는다.에콜 드 파리의 뛰어난 작가로서 제 1차 세계대전 중에 많은 걸작을 남겼는데, 탁월한 데생력을 반영하는 리드미컬하고 힘찬 선의 구성, 미묘한 색조와 중후한 마티에르 등이 특색이다. 1917년 베르트 베유 화랑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열었다.초기에는 풍경화도 몇점 그렸으나 파리로 온 후 부터는 대부분 초상화와 누드화를 그렸다. 특히 긴 목을 가진 단순화 된 형태의 여인상은 독특하며 무한한 애수와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으며, 보티첼리나 베네치아파의 작풍과도 이어지는 섬세하고 우아한 이탈리아식 개성을 보여준다.그는 문학적 교양과 시인적 자질이 풍부하고 미남이기까지 했지만,방탕한 생활과 음주 아편등으로 인해 건강이 좋지 못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만 했으며, 가난과 방랑속에 1920년 초 파리의 자선병원에서 36세로 짧은 인생을 마감한다.{보통의 화가들과는 달리 모딜리아니는 자화상을 거의 그리지 않았다. 그가 "나를 향해 마주보고 있는 살아있는 인간을 봐야만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한 것처럼 '만남의 화가'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1919년 작인 이 그림은 그의 유일한 자화상이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림안에 나타나는 그의 인상은 그의 인생의 마감의 날이 머지않음을 보여주는 듯 하다.{앙데팡당전에 출품했던 작품으로 모딜리아니의 과도기적 성향을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처음 파리로 왔을 때, 그는 조각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으므로 조각과 회화 사이인 입체와 평면에 대한 갈등이 이작품에서 풍기는 표현주의적인 어두운 분위기에서 잘 반영되어있다고 할 수 있다.{1912~14년 사이에 제작된 조각상으로 당시 모딜리아니는 조각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의 조각은 브랑쿠시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폐가 좋지 못했던 모딜리아니는 다시 회화의 길로 접어들고서도 나중까지 조각에 대한 열의를 접지 못했었다.이 조각은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며, 수직으로 길쭉한 코의 선과 원통형의 목줄기가 신선한 조형미를 유발시키고, 당시 파리 미술가들이 심취하기 시작하던 아프리카 미술또한 연상시킨다.{모딜리아니가 나부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1916년 경 부터이며 죽기까지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가 개인전을 열었을 때, 그의 나부그림중 다섯점이 너무 관능적이라는 이유로 경찰에 의해 강제 철거 당하는 사건이 있었다.이 작품은 다른 나부 그림들과는 달리 검은 배경위로 무겁게 흐르는 곡선이 삶의 애환을 짙게 풍기고 있다.{이 서있는 나부는 다른 나부들과 비교해 잔잔한 정감이 느껴진다.그것은 여체만이 가진 생명의 여성미 때문일 것이다. 금세 없어질 듯한 아쉬운 청순미가 있는 작품이다.모딜리아니에게 있어 여성의 나체란 관능의 외모도 아니며, 여러가지 기복으로 무겁게 덩어리 짓는 복잡한 조형도 아니며, 다만 그것을 통해서 감지하게 되는 생의 풍요 혹은 찬미였는지도 모른다{한눈에 보아도 세잔의 영향이 두드러지는 작품이다.첼로를 연주하는 인물의 내면의 깊이가 느껴지며 짙은 인간애의 색조를 띄고 있다. 이 작품의 뒷면에는 브랑쿠시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이 첼리스트의 모습이 뒷면에 그려진 브랑쿠시의 옆모습과 신기하게도 일치하고 있다.미술은 문화적 유산이며, 세잔의 유산을 모딜리아니가 상속한다는 역사를 이작품은 증명해주고 있다.{르네라는 이름은 흔한 프랑스 여성의 이름이며, 파리의 여기저기에 르네가 살고 있다. 이 작품은 그러한 한 프랑스 여성의 초상화이면서 모든 르네의 초상화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점차로 무르익어가는 모딜리아니의 원숙한 기량을 보여주고 있으며, 모델을 포근하게 포용하는 표현력이 넘쳐흐르고 있다.이 작품의 모델인 르네는 키슬링의 부인이며, 모딜리아니의 미술을 순수한 마음으로 이해했던 모델중의 한 사람이었다{이 작품은 모딜리아니와 그의 부인 쟌느 사이에 여자아이가 생기기 얼마전에 그려진 것이다. 그는 몽파르나스에서 그의 이웃에 사는 하층 계급의 어린 아이들을 좋아했으며 아이들을 많이 그렸다고 한다. 그림속의 소녀의 얼굴은 밝지도 않고 표정은 훨씬 연상의 다른 모델들의 경우처럼 조용히 가라앉아 있다. 모딜리아니가 그린 어린이 그림은 참다운 자애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 소녀는 천진무구하지만 애처러움이 흐르고 있어, 우리는 모딜리아니의 진심어린 마음을 엿볼 수 있다.
동기내가 랩에 처음으로 흥미를 가진 것은 중학교 3학년 때이다. 친구들이 듣고있던 노란 색 테이프의 아티스트 이름을 보고 옛날 애들이지? 라고 물어봤다가 망신당한 것이 우리 나라에 랩을 유행시킨 서태지와 아이들 과의 첫 만남이었다. 그 당시에 나의 흥미를 끈 것은 그들의 랩과 춤이었다. 사실 그들은 춤에 더 치중했다고 생각된다. 그 후에도 랩에 관심을 갖고 있었으나 국내의 랩만을 조금 듣고, 어쩌다가 우리 나라에 라이센스로 들어온 M.C. Hammer나 Snow의 앨범을 듣는 것이 고작이었다.그러다가 본격적으로 랩을 접하게 된 것은 대학교에 들어와서 통신의 댄스 동아리에 들면서부터이다. 그들의 연습실에 가보았더니 국내 댄스 가요는 거의 듣지 않고 강한 비트와 흑인 필(?)의 랩과 힙합만 트는 것이었다. 처음엔 어색하기도 하고 귀에 거슬렸으나 많이 듣고 익숙해 지니 다른 어떤 장르보다도 매력적으로 들려왔다.랩이나 힙합은 요즘 대중화되는 추세이긴 하지만 매니아들만이 이해하고 즐기는 매니아적 요소가 상당히 많았다. 그것은 대부분의 랩이 폭력적,직설적, 선정적인 가사로서 라이센스 음반이 발매가 안되고 따라서 음반 구하기가 힘들어서 즐기는 층이 상당히 얇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상황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의 음반이 몇 안되는 수입상에서 비싸게 거래되고 있는 실정이다. 나의 경우도 사서 듣는 음악보다는 연습실에서 듣는 음악이 훨씬 많다.정보도 다른 장르(클레식,재즈 등)에 비해 공식적인 자료를 찾기 힘들었다. 이번 페이퍼를 준비하면서 랩의 성립과 역사, 장르와 여러 아티스트에 대해 조사했다. 이 조사는 통신에 있는 흑인 음악 동호회의 게시판의 자료를 참조했다. 또한 페이퍼의 마지막에는 랩단어 사전을 실었는데 이것은 인터넷 뉴스그룹 alt.rap에서 여러 사람이 만든 랩단어 사전(용량이 매우 방대)에서 가사에 많이 나오거나 중요한 단어만을 주관적으로 골라 번역한 것이다.2. 힙합 어원과 의미힙합과 랩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랩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조사했지만 EASE HAMMER DON'T HURT'EM"이 미국 내에서만 천만 장이 넘게 팔리는 대기록을 세우며 앨범차트를 장식했다. 랩음악 앨범이 이렇게 많이 팔린적도 없었고 지금의 아티스트들도 MC HAMMER의 기록을 깨지 못하고 있다. 지금에서 해머의 랩이 좋다니 안 좋다니 하지만 역시 해머는 랩의 대중화에 크게 공헌한 인물로 역사에 남게 될 것이다. 후에 또 다른 폭풍은 바닐라 아이스(VANILLA ICE)였다. 얼핏 들으면 무슨 그룹명 같은 느낌을 주는 이 청년은 가장 큰 특징이 백인 랩퍼라는 점이었다. 여태껏 백인이 랩을 한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백인도 랩하지롱- 하는 강한 이미지를 심어준게 바닐라 아이스였다. 그의 데뷔앨범 "TO THE EXTREME"은 700 만장이 넘는 MC HAMMER못지 않은 엄청난 판매고를 올리며 떼부자가 됐다. 그 뒤로 후속타가 없는게 단점이긴 하다. 바닐라 아이스의 출현으로 후에 MARKY MARK & THE FUNKY BUNCH, SNOW등의 백인 랩퍼가 속속 나올 수 있었다.90년대 들면서 무엇보다도 인기있는 장르로 랩이 정착이 되면서 이제 본격 세포 분열로 들어가 랩안에도 장르가 무척이나 많게 되었다. 요즘에 폭발적 인기를 얻고있는 GANGSTA RAP(또는 GANGSTAR RAP), 마약을 노골 적으로 찬양 하는 DOPE RAP, 재즈와의 접목으로 의식 있는 랩을 들려주는 NEW JAZZ SWING, 부드럽고 달콤한 랩종류인 SOFT RAP...등등 여러 가지의 랩장르가 빠르게 세분화 되어가고 있다. 또 랩은 ROCK음악과 잘 융합되는 특성 아닌 특성이 있어서 그것을 대폭 수용한 곡들이 인기를 끌기도 했다 (EX. FAITH NO MORE - EPIC)4. 랩의 여러 장르1) Gangsta Rap갱스터랩은 원래 그렇게 나누어진 부류가 아니었다. 랩은 흑인 거리의 음악이다. 그러므로 흑인들이 사는 곳의 거리에서 갱스터들이 랩을 즐긴다는 것은 어찌 보면 상당히 자연스런 일이다. 그런 부류에서 거의 갱스터 랩이 된다. 무척이나 우리들로서는 반감이나 거부감이 있겠지만, 외국의 마약문화를 볼 때 그럴만도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외국에서 마약의 합법화를 놓고도 말이 많은데, 이런 랩이라는 음악을 가지고 하는 것은 예사라는 생각이 든다.이 도프랩의 대표적 주자는 탄탄한 DJ , DJ MUGGS가 버티고 있는 사이프러스 힐 (CYPRESS HILL)이다. 이들의 믹스 실력은 HOUSE OF PAIN의 앨범에서도 정평이 나있고 그들의 두 개의 앨범에서도 그 실력이 나오고있다. 이들은 노골적인 친 마약주의자 들이다 . 그것들이 데뷔앨범 "CYPRESS HILL"같은 것을 들어도 여실히 증명된다. 그러나 사이프러스 힐의 데뷔앨범은 라이센스화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접어두고 가장 극명하게 볼 수 있는 음반은 바로 영화 사운드 트랙 "JUDGMENT NIGHT"이다. 이 영화에서 쓰이는 음악들은 얼터너티브 록 그룹과 랩퍼들의 만남으로 이루어졌다. 뉴욕펑크씬의 대부 소닉 유스 (SONIC YOUTH)와 사이프러스 힐이 같이 한 "I LOVE YOU MARY JANE"은 소닉 유스의 성격보다는 사이프러스 힐의 성격이 한층 두드러져 있는 곡이다. (여기서 MARY JANE = 마리화나의 속어) 이 마리화나를 사랑한다는 자기들의 분위기는 이 곡 안에 줄기차게 진행되어지고 있다. 요즘은 마리화나 정도는 보편화 되어가지구.. 이 마리화나의 합법화를 위해 많은 사람이 애를 쓰고(?)있다 한다. 역시 이런 것에 대한 우리의 기분은 좀 이상한 사람들이 라고 얘기할 수 있겠지만, 외국에서의 친마약분위기가 스물 스물 피어오르고 하여튼 사이프러스 힐에게는 이것이 프러스 요인으로 작용해서 데뷔앨범이 100만장(신인 치곤 아주 좋은 성적)이 나갔고 두번째 앨범인 "BLACK SUNDAY" 앨범은 발매 첫 주만에 앨범차트 1위로 뛰어오르고 싱글차트에서도 "INSANE IN THE BRAIN"이 TOP20에 드는 등 아주 좋은 판매고, 인기도를 보여주고 있다. 물론 아쉽게도 "BLACK SUNDAY" 사운드를 넣을 수 있었다. 크로스오버적인 혁신적인 시도로 비춰지고 있는 이 앨범은 마일스 데이비스의 프로듀스가 아닌 EASY MO BEE의 프로듀싱으로 더욱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 (그래서 힙합적 색깔이 많이 표출되는 것일까...) 마일스의 그 뛰어난 음악성으로 랩/힙합 부분까지 죽기 전에 손을 대었다는데에 대해 그에게 존경심을 표한다. 그런 것을 떠나서도 이 "DOO-BOP"앨범은 상당히 훌륭하다. 이 앨범에서 트럼펫이 유일하게 재즈에서 쓰이는 악기이다. 그런데도 트럼펫하나로 그런 재즈적 필을 물씬 풍겼다는 게 참 멋있다. 타이틀 트랙 "THE DOO BOP SONG"은 더욱 더 그런면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EASY MO BEE의 랩도 멋있다. 이런 수작 역시 라이센스화 되지 않은 것이 참으로 아까울 뿐이다. 그는 여타 다른 NEW JAZZ SWING 아티스트와는 달리 RAP/HIPHOP적 색채가 짙다는 면에서 다른 면으로 봐야할 것이다.어스티드 디벨롭먼트(ARRESTED DEVELOPMENT)또한 진보적인 힙합/랩을 구사하는 그룹으로 보여진다. 그들의 기본은 재즈적인 것과 레게, 그리고 블루스이다. 이들도 데뷔앨범을 발표한 뒤 세 곡의 TOP10 곡 등 많은 판매고와 더불어 그 여세로 그래미 랩부분을 수상했다. 그들은 랩과 레게적인 면이 많이 들어가서 좀 이런 NEW JAZZ SWING으로 분류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그들에게도 재즈적인 면모가 많이 보이기 때문에 언급을 안할 수가 없었다.이외에 KEITH SWEAT과, WRECKX-N-EFFECT가 있다. 이들은 재즈적인 사운드가 요소요소에 샘플링으로 쓰일 뿐이어서 NEW JACK SWING이라는 따른 장르분류가 된다. 더군다나 KEITH SWEAT는 R&B 아티스트여서 여기에서 언급하는 것이 좀 그렇지만 KEITH SWEAT 이 거의 NEW JACK SWING의 시발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에 언급할 수 밖에 없었다.랩의 고급화를 쫓는 몇 아티스트를 보았다. 그들의 음악은 상당히 절제되었으며, 정갈하다인물이 이끌고 있는 이 그룹은 레게 랩뿐만 아니라 토속적 아프리칸 리듬, 리듬앤 블루스, 재즈등 여러 가지 장르가 이상적으로 섞인 그런 음악을 들려준다. 이들의 재능은 데뷔앨범과 두번째 앨범등 그들의 레코드마다 확연히 드러난다. 데뷔앨범을 발매후 3곡의 TOP10히트 곡과 그래미 랩 대상 수상까지 하는 등 바쁜 나날을 보냈던 이들이 이제 2번째 앨범으로 승부를 걸고있다. 기대해 볼만하다. 이외에 HEAVY D & THE BOYS는 중간에 양념으로 레게랩을 섞고 있다.우리 나라에서 구할 수 있는 앨범ARRESTED DEVELOPMENT앨범 모두 [EMI/계몽사]SNOW - 12INCH OF SNOW(금지곡있음)REMIX앨범 [WARNER MUSIC]EDDIE MURPHY의 앨범의 일부 [MOTOWN/POLYGRAM]6) Rock 음악과 Rap록과 랩의 접목은 이미 옛날에 시작되었고 많은 좋은 곡들이 쏟아지고 있다. 무지막지하게 씨끄러운음악 록, 그리고 재잘대는 랩의 조화... 예전에 아주 충격으로 다가오던 Anthrax의 "I'm the man"이 나오기도 전에 1984년 Red Hot Chili Peppers는 그때부터 랩과 록의 접목을 시도했고 그 결과도 괜찮았던 것으로 안다.(음악적 면에서...) . 충격의 곡 "I'm the man"과 "Bring the noise"(With Public Enemy) 를 발표해서 록씬을 시끄럽게 했던 이 그룹은 아시는 분은 잘 알다시피 스래쉬 메틀(Thrash Metal)을 하는 그룹으로 알려져 있다. Metallica, Megadeth, Slayer와 함께 스래쉬의 거물그룹인 이 그룹이 1987년 내놓은 "I'm the man EP"는 상당히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록씬의 파괴가 우려된다는 사람이 가장 많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우려가 맞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통메틀은 살아있고, 모든 장르들이 한 음악에 공존하는 음악이 있기도 한 복잡한 상황으로 전개되고있다.이러한 상황을 주도한 주동자중 하나가 바로 An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