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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문화] 중국 명청시대의 가족과 개인
    Ⅰ. 가족중국의 가족은 소가족과 직계가족, 대가족으로 분류 할 수 있다. 소가족은 부부가족이라고도 하는데 전형적인 소가족은 부모와 미혼의 자녀로 이루어지며 보통 3명~6명 정도의 구성원을 갖는다. 직계가족은 부모와 미혼의 자식, 거기에 결혼한 아들과 그 처자식이 구성원을 이루는 형태이다. 대가족은 합동가족이라고도 하는데 한 집에 사는 부부와 미혼의 자식, 그리고 두 명 이상의 결혼한 아들 및 그 처자식들이 가계를 꾸려나가는 형태를 말한다. 그리고 여기에다 손자와 그 처자식이 더해지는 겨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족의 형태는 처음부터 고정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소가족이 되었다가 그 집안의 장남이 결혼하여 같이 살면 직계가족이 되고 또 시간이 지나 차남이 결혼하여 같이 살면 대가족의 형태가 된다. 이렇듯 가족의 형태는 매우 유동적이며 언제라도 팽창될 준비가 되어있는 것이다. 중국인의 가족은 같이 소비하고 생산하는 경제단위이고 나아가 가족 구성원 중에 빈곤한 자나 노령자를 돕는 사회 보장조직으로써의 역할을 한다. 따라서 중국인은 아들이 장차 노령이 될 자신을 봉양하며 자손의 계보를 끊지 않고 혈통을 이어가도록 하기 위해 아들을 양육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중국인의 머리에는 아들을 꼭 낳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렇게 아들을 낳아서 여러 아들과 같이 살며 가계를 꾸려나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오세동당(五世同堂) 이라는 말이 생겼다. 그러나 평균 수명이 30세 정도였기 때문에 오세동당을 실현하는 가족의 비율은 극히 적었다. 그리고 상속제에 있어서도 경제적 장자 상속제가 아니라 제례적 장자 상속제가 행해졌기 때문에 합동가족의 형태는 이상적 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합동가족이 지속될 수 없었던 이유는 만약 아버지가 강권으로 그 아들들을 한지붕 밑에서 같이 살아가게 하더라도 아버지가 죽으면 형제들만이 남아 있는 합동가족내의 형제들은 보통 사이가 나빴기 때문에 가족의 형태가 지속될 수 없었고 형제들 뿐 아니라 그 처들도 서로의요인으로 작용했다. 위에서 말한 가족의 분열 경향을 막기 위해 '종족'이라는 것이 형성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종족들은 중국의 남부에서 특히 우세했으며 강력한 종족들은 집단내의 결속을 다지고 위신을 유지하고 제사나 족인(族人)에 대한 처벌 등 협동기능을 행하기 위한 수단으로 족보를 편찬하였다 이러한 족보의 편찬은 종족 내부의 서열을 정하는데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했다. 또 종족들은 몇 가지 형태의 공동 재산을 보유하여 이 재산으로 종사(宗嗣)를 세우거나 족인들을 교육시키는데 이용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종족의 분열을 막고 하향이동의 경향성을 막을 수 있었으며, 때문에 가족주의의 가치관을 지탱하는 버팀목의 역할도 할 수 있었다.Ⅱ. 여성 지위의 변화왕조시대 전(全)기간에 걸쳐 여성은 태어날 때부터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 서지 못했다. 유교라는 엄격한 규율에 묶인 여성들은 항상 겸손과 순종, 공손함, 정중함을 강요당했다. 그러나 왕조시대 초기 몇 세기 동안 여성의 지위는 명청시대보다 현저히 높았다. 예들 들어 한 대부터 당대까지 여성은 꽤 자유로이 남성과 교제했고 여성의 이혼이 사회적으로 흠 잡히는 일이 아니었으며정절에 대한 태도도 결혼전이나 후나 비교적 느슨했다. 송대에도 형제가 없을 경우 상류계급의 여성은 부친의 재산을 상속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여성의 지위는 송말 신유학의 유입으로 낮아진다. 이후 여서의 순결은 숭배받는 덕목이 되었고 과부의 재혼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인식이 명청시대에도 정통적 이상으로 여겨졌지만 어느 사회에나 현실은 이상을 따라가지 못하듯이 명청시대의 과부 중에는 재혼한 사람이 많았으며 시댁 식구들이 지참금이나 죽은 남편의 재산을 노리고 강제로 재혼을 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경우에서 말해주듯 경제적인 이유가 재혼의 이유가 되었으며 가난한 계층에서는 여성의 정절을 중요한 덕목으로 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명청시대에도 지위를 향상시킨 여성들이 나타났는데 이는 16세기 후반부터 교육시설이 널리 세워지고 서적 출판이 일반화되연할 정도였다. 이러한 인식은 가난한 집안일수록 더욱 심했는데 심지어 유아의 사망을 방치한다는 얘기가 돌 정도였다. 첫 딸일 경우에는 그래도 약간은 위로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 딸은 후에 동생들을 돌보는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하여튼 딸을 낳는다는 것은 집안의 저주로 생각했다.중국의 아이들은 어릴 때는 자유롭게 길러진다. 2, 3세가 지나도 오줌을 싸는 것에 대해 관용을 베풀었으며 투정을 부리거나 말을 듣지 안아도 부모는 아이에게 관대함을 베푼다. 그러다가 6세를 전후한 1년 정도 사이에 관용의 시기가 끝이 나는데 이 시기가 되면 부모들은 그 전에 아이에게 베풀었던 관용을 모두 걷어버리고 그 전에 했던 투정부리는 행동 같은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 이런 부모의 반응에 대해 이미 동생을 돌볼 책임과 압박을 받아왔던 딸은 비교적 정신적 충격이 덜하나 그 반대인 아들은 정신적 충격은 많이 받는다. 그 전까지 자기와 많이 놀아주던 아버지는 이제 엄한 교육자가 되고 엄하게 벌을 주기도 한다. 체벌은 아이들의 성장기에 있어서 한 부분으로 자리를 잡는다. 체벌이 교육에 있어서 최고의 효과를 거둔다고 부모들은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체벌이 항상 교육의 견지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어떤 부모들은 일상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아이에게 체벌을 가함으로써 해소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이럴 경우 아이들의 몸에는 피가 나고 상처가 났다.여자아이들이 성장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고통스러운 첫 단계는 어머니에게 발을 묶이는, 이른바 전족(纏足)이었다. 전족은 당말, 오대의 궁정 무희들로부터 유래되었다고 한다. 무희들은 예술적 효과를 노려 발을 가볍게 묶었으나 이것이 민중에게까지 전파되어 전족을 하지 않아 발이 큰 여자들은 명초에 이르면 조소의 대상이 되었다. 전족을 하면 발이 작아져서 걸을 때 자연히 엉덩이가 올라가고 작은 발에 남자들이 성적으로 열광을 하여 전족을 한 여자가 좋은 남편을 얻기가 쉬웠다. 이것을 하지 않으면 사회적 지위나 교양이 낮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의 인생에 있어서 중대사 중에 하나였다 그러나 정작 결혼을 하는 당사자들은 서로에 대하여 알지 못했다. 서로의 얼굴을 보는 것은 비로소 혼례가 끝나고 신방 안에서나 가능했다. 그럼 왜 이렇게 서로에 대해서 몰랐을까? 그것은 뒤에서도 언급을 하겠지만 만약 결혼 전에 서로에 대해 알게되면 그 당시 사회에서 보았을 때 결혼에서는 불필요한 애정이라는 것이 싹틀 것이며 이것은 결혼의 근본적인 목적을 훼손할 수 있는 위험성을 가진 것이라고 그 당시 사람들은 인식했다. 아무튼 이렇게 결혼의 당사자들이 서로에 대하여 몰랐다는 것은 그 만큼 그들이 결혼의 중심이 아니라 집안과 집안이 결혼의 중심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신랑측에서 보면 결혼의 근본 목적은 신랑과 함께 집안의 계보를 이을 아들을 출산하는 여성을 얻는데 있었다. 그러나 단순히 출산만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신부의 태만함이나 게으름 등을 고려하여 결혼을 시켰다. 상대에 대한 조건을 따지는 것은 여자 쪽보다 여자를 자기의 집에 데리고 살아야 하는 이유 때문에 남자 쪽에서 더 심했다. 여자는 결혼을 하면 전혀 새로운 환경에서 전혀 새로운 사람들과 나머지 인생을 살아야 했기 때문에 정신적 충격이 남자보다 컸으며 이 과정에서 가장 여자와 많이 부딪히는 사람이 다름 아닌 시어머니였다. 특히 여자가 전에 친정에서 결혼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 것들을 배웠을 지라도 시댁에서 그것들은 바르지 않은 것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자연히 시어머니와 갈등을 빚게 된다. 이 두 여인의 갈등에 대하여 신랑과 시아버지는 끼어들려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여자는 시어머니에게 구박을 받거나 매를 맞는 일도 어쩔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여자가 이런 상황을 벗어나는 길은 자살하는 길밖에 없었다. 친정으로 가는 방법도 있었으나 그런 경우 대부분 친정에서도 여자를 귀찮은 존재로 여겼기 때문에 좋은 해결방법이 아니었다. 자살을 함으로써 시어머니가 고통과 죄책감을 느끼고 친정이 고소를 할 경우 신랑의 집안은 파멸을 당하고 체면도 잃게 된다. 실제로 하면서 모계가족이라는 관념이 점차적으로 부계적 가족관념과 중첩되어간다. 세월이지나 시어머니가 죽으면 여자는 그 집안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되고 주위사람들과도 친분관계가 쌓아왔기 때문에 어느덧 여자는 외부인이 아니라 집안의 여가장이 된다.Ⅴ. 결혼의 여러 가지 형태이제까지 다루어온 결혼의 형태말고도 두 가지 형태의 결혼이 더 있다. 첫 번째는 동양식(童養 )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우리 나라의 민며느리제와 비슷한 형태지만 그보다 더 어린 여자아이가 유아기에 약속한 남자의 집안에 보내져서 거기에서 양육되어 나이가 차면 그 집안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말한다. 어린 여자아이는 미래의 시어머니 밑에서 딸처럼 키워지고 미래의 남편과는 남매처럼 지내면서 성장을 한다. 이렇게 지내 오던 두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부부가 된다면 심리적으로 두 사람에게는 엄청난 혼란이 될 것이다. 성관계를 맺는데 있어서도 혐오감이 들었을 것이며 서로에 대한 감정이나 만족도 일반적인 결혼보다 훨씬 덜 할 것이다. 그래서 강제로 잠자리에 들게 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렇게 동양식이라는 것이 두 사람한테는 좋은 방식이 아니었지만 시어머니한테는 여러모로 좋은 방식이었다. 우선 경제적인 측면에서 동양식이 일반적인 결혼방식보다 돈이 덜 들었고 며느리가 어려서부터 신랑의 집에서 자랐기 때문에 신랑집안의 가풍에 익숙해져 있고 시어머니가 바라는 대로 순응하기 때문에 고부간의 갈등이 비교적 적었다. 이런 이유로 동양식을 선호하는 경우가 많았다. 두 번째는 서입혼( 入婚)이라는 결혼 형태이다. 서입혼은 성인 남자가 결혼을 해서 여자 집에 들어가는 형태이다. 이 혼인의 형태는 일반적으로 아들이 없는 부부에 의해서 이루어 졌다. 그러나 이 경우 남자 집안의 대가 끊길 문제가 있기 때문에 양자를 사오는 경우가 있었고 딸이 있는 부부는 처가에 들어와 살 의향이 있는 남자를 찾는 방법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서입혼의 경우 남자가 자기의 성을 버리고 여자의 성을 따르는 경우도 있었으며 아니면 자기의 성은 지닌 채 자식
    인문/어학| 2002.05.24| 4페이지| 1,000원| 조회(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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