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상품의 개념 상품학상의 상품(협의의 상품)의 개념재화가 상업의 객체가 될 때 이것을 상품이라 한다. 상업의 객체가 되는 이들 재화는 그 환경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불리게 된다. 즉, 상품은 효용가치나 교환가치의 필요성 때문에 인간에 의하여 채취했거나 생산한 자연생산물과 이 자연생산물을 원료나 재료로 하여 인간이 일상생활에서 잠재적으로 희구하는 욕구나 필요성을 충족시켜 줄 수 있도록 인간의 기술에 의해서 가공생산된 제조품(기술생산품)이 상업의 객체가 될 때 상품이라 한다.협의의 상품이란 실체적·가동적·거래적·실질적인 경제 재화로 한전된다. 즉, 경제재화로서 실체적인 물적 재화이며 운반성이 수반되는 가동적이어야 하고, 시장에서 거래되는 실질적인 경제재화이다. 광의의 상품의 개념광의의 상품이란 경제사회에 있어서 시장에서의 교환을 목적으로 물질에 어떤 기능과 효용가치를 부여하여 생산하고 그 생산된 재화가 유통기구를 통하여 최종 소비자의 손에 들어갈 때까지의 그 과정에 있는 것을 말한다. 서비스 상품의 개념일반적으로 서비스상품에 대해 생각해 보면 그것은 무형의 부분과 유형의 부분 즉, 두 개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명칭이 무엇이든 제품이나 서비스를 포함하며 부분의 상품은 유형재와 무형재의 쌍방을 포함하고 있어 무형부분이 큰것에서부터 작은 것까지 그 비율이 다른 여러 가지 상품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이론적인 연구를 보면 goods에 대해서는 재화, 재, 제품, 유형재, 물질재, 물재, 물건 등의 용어가 사용되고 service에 대해서는 용역, 서비스, 서비스재 등의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그런데 제조업에서 판매되는 상품(product)은 제품과 서비스가 어떠한 특정 비율로 결합된다. 물론 제품이 주요한 판매물이고 거기에 서비스가 부수된다. 반면 서비스업에서 판매되는 상품으로서 서비스 상품 또한 제품과 서비스가 모종의 비율로 결합된다. 여기에서는 서비스가 주요한 판매물이고 거기에 제품이 부수되는 셈이다.2. 관광 상품의 정의관광상품은 관광객의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관광에 관련된 제품과 서비스가 조합된 상품을 의미하는 것으로, 관광상품을 구매하는 경우에는 많은 부분의 서비스를 구매하는 것이다.일반유형상품의 경우 상품력은 그 관광상품이 가지는 고객의 욕구충족력(가치, 효용)과 이를 얻기 위해 고객이 지출해야 하는 가격에 따라 달라진다. 고객의 욕구 충족력인 효용이나 가치는 품질 이외에도공급자의 지명도, 영업장에 대한 이미지나 충성도, 공급자가 제공하는 애프터서비스나 품질 보증과 영업장이 제공하는 서비스 등에 따라서도 달라지는 것이다.3. 관광상품의 차원 관광상품의 4가지 유형관광 기업 경영자는 제품을 다음 4가지 유형으로 분류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다. 즉, 중추적 상품, 촉진적 상품, 부가적 상품 및 확대 상품이다.① Core Products (중추적/핵심 상품)가장 기본적인 형은 중추적 상품(core products)인데, 이는 구매자가 현실적으로 무엇을 구입하는가 라는 물음에 응답해 준다. 모든 상품은 문제해결 서비스의 패키지이다. 다시 말하면, 고객이 상품을 구매할 때 그들이 획득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이점이나 당면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주는 서비스로 구성되는 것이다.예를 들어 고객이 항공기를 이용하여 유럽여행을 할 경우 고객은 항공기가 정시에 출발하고 정시에 도착하면서 안전한 기내 서비스(in flight service)를 구매하는 것이 핵심편익인 것이다. 또한 호텔에서 숙박을 하는 고객은 안전한 객실에서 편안하게 숙박할 수 있는 호텔의 객실을 구매하는 것이다.② Facilitating Products (촉진적 상품)촉진적 상품은 고객이 그 중추적 상품을 사용함에 있어서 제공되지 않으면 안될 서비스 내지 상품이다. 일류호텔이라면, 예를 들어서 체크인, 체크아웃 서비스와 전화, 레스토랑, 직원에 의한 서비스가 빠져서는 안된다. 한정 서비스를 제공하는 이코노미 호텔에서의 촉진적 서비스란 체크인·체크아웃 서비스와 호텔 내의 공중전화 정도일지 모른다. 제품 디자인에는 표적시장과 그 곳에서 필요한 촉진적 서비스를 이해해 두는 것이 필요하다.③ Supporting Products (부가적 상품)중추적 상품은 촉진적 상품을 필요로 하나, 부가적 상품(supporting products)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부가적 상품은 중추적 상품에 가치를 부가하여 그것을 경쟁에서 차별화하기 위하여 제공되는 추가적인 상품이다.호텔에 설치된 비즈니스 센터와 풀서비스의 건강온천은 부가적 상품으로서 고객을 그 호텔에 유치하는 데 기여하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촉진적 상품과 부가적 상품의 구별은 항상 명확하지가 않다. 1개 세분시장을 위한 촉진적 상품은 다른 세분시장을 위한 부가적 상품일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호텔 체재 중 가족고객은 레스토랑과 직원의 서비스를 필요로 하지 않을지도 모르나, 비즈니스 고객은 이러한 것이 필요하다. 하얏트 호텔은 욕실의 비품으로서 샴푸와 스킨 로션, 몇 종류의 비누를 선택할 수 있게 한 최초의 체인 가운데 하나였다. 하얏트는 이러한 쾌적성(amenities)을 도입하였을 때, 그것은 객실이라는 중추적 상품을 뒷받침하는 부가 상품이었다.오늘날 하얏트와 동급의 호텔에서는 쾌적성이 촉진적 상품이 되었다, 다른 호텔은 하얏트의 아메니티 패키지에 대항하기 시작하였고, 그러는 가운데서 여행자는 그것을 그런 급의 호텔에서는 당연한 서비스로 기대하게 되었다. 힐튼 호텔은 매년 평균 22만 5000달러가 드는 아메니티 패키지(amenities package)를 개발하기에 앞서서 소비자 취양 분석을 하는데 2년이 걸렸다.리젠트 인터내셔날 호텔(Regent Internation Hotel)의 창업자 봅 본즈(Bob Burns)는 체인의 호화스러운 이미지를 강화하여 차별화를 낳게 한다고 생각하는 제품을 자신이 직접 선택하였다. 이렇게 하여 홍콩 리젠트 호텔의 욕실에 풀 사이즈의 용기의 고급샴푸가 비치되었다. 오렌지 쥬스는 전세계의 호텔과 레스토랑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메뉴 품목 중에 하나인데, 봅 번즈는 호화스러운 서비스라는 자기들의 개념과 조화시키기 위하여 리젠트 호텔은 막 짜낸 신선한 오렌지 쥬스를 제공하도록 엄하게 지시하였다.번즈는 오랜 동안 호텔 업계에서 일을 하면 연구해 왔다. 이 가운데는 하와이의 고급호텔인 카할라 힐튼 리젠트(Kahala Hilton Regent)의 총지배인으로서의 경력이 포함되어 있다. 그는 수년에 걸쳐서 몇 천명의 고객과 대화하는 가운데서 그들이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를 알게 되었다.경쟁에 의하여 간단하게 추수(追隨)되지 않는 부가적 제품을 선정하는 것이 회사로서는 이상(理想)이다. 또한 전문가적인 태도로 보조적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지 않으면 안된다. 예를 들면, 어느 중규모 호텔이 비즈니스객을 유치하는 데 있어서 경쟁 우위성에 연결된다고 판단하여 룸서비스를 제공한다고 치자. 그러나 부가적 제품을 함부로 제공하는 것은 차라리 없는 쪽이 낫다. 룸서비스 전속직원(coordinator)도 없다. 또한 전해진 룸서비스 웨이터도 없다. 필요한 도구와 인원은 주문이 있을 시점에서 모은다. 따라서 용이하게 상상할 수 있는 바와 같이 때로는 비참한 결과를 가져다준다.전화 응대에 나오는 직원 가운데는, 예를 들면 스테이크를 어떻게 요리하는가, 고객이 원하는 샐러드 드레싱은 어떤 것인가, 감자는 어떻게 요리하는 것이 좋은가와 같은 것에 대하여 정확하게 질문하는 훈련이 결여되어 있다.주문은 받은 후 다음단계는 카드를 준비하여 그 주문품을 객실로 가지고 갈 직원을 찾는 것이다. 생각에 떠올릴 수 있는 직원은 벨맨이든가, 웨이터 보조원(bus person), 또는 다이닝룸에서 지원 나온 웨이터 등이다.앞쪽의 두 명의 직원은 올바른 훈련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팁이 욕심나서 약삭 빠르게 이런 기회에 뛰어들지도 모른다. 그들은 훈련을 받은 일이 없기 때문에 카드를 준비할 때, 소금 후추와 설탕·포크·넵킨과 같은 기본적인 품목을 잊을 지도 모른다. 식사를 마친 후에 고객은 복도에 트래이(tray)를 내놓는다. 이 트래이는 룸메이드가 다음날 아침에 치울 때까지 복도에 놓여져 있는 채로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 호텔의 이미지는 큰 손상을 입게 된다.요약해서 만약 이런 일들이 올바로 계획되지 않은 채 실행된다면 부가적 제품은 경쟁우위성을 확보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일들은 고객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든가, 그것을 뛰어 넘는 것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1. 日本에 있어서 詩의 구분近代詩와 現代詩라는 용어를 넓게는 동의 어로서 사용하는 경우도 있고, 좁게는 구별하는 경우도 있다. 구별한다 하더라도, 新體詩·近代詩·現代詩의 호칭경계를 어디에 둘 것인가에 대하여서는 무척 어려운 문제가 내포되어 있다. 또 文語詩에서 口語詩로 定型律에서 自由律에, 부르는 歌에서 생각하는 歌로 등의 推移 과정을 생각해봐도 용이하지 않고, 明治에서 大正에, 大正에서 昭和에, 戰前에서 戰後에 활약한 개개인의 시인들의 足跡 검사와 詩史的 전망등도 어려운 것이다. 허나, 일반적으로 일본에서는 근대를 프랑스의 혁명 이후 사회와 마찬가지인 明治 維新 이후라고 규정하는 견해가 압도적이므로 明治·大正의 시를 近代詩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즉, 和歌·俳諧·漢詩·歌謠와는 달리 나타내진 新詩 이후를 가르키는 것이다. 이에 現代的 詩題를 現代의 意識을 가지고 현대어로 써 나온 昭和詩를 現代詩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2. 근대시의 흐름1) 近代詩와 『身體詩抄』에도시대까지의 단가, 하이쿠, 한시 등 전통적인 시에 대해, 서구시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시대의 사상이나 감정을 담는데 적합한 시형을 창조하려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와 같은 근대시 창조의 움직임은, 1882년의 『身體詩抄』의 발간으로 본격화했다. 1890∼1900년 사이에 서구시의 영향을 받은 낭만적인 시가 일어났는데 그 중에서도 전통적인 것과 새로운 시 내용과를 융합한 신체시의 제일보를 작품으로 구현한 것은 이다.그 뒤 1900년을 전후하여 , 永井荷風 등에 의해 상징시(象徵詩)가 소개되고, 그로부터 약 10년 뒤에 와 등의 탐미파의 시가 출현했다. 1910년이 지나 자연주의의 영향을 받아 구어자유시가 일어나고 大正기에 들어와 등의 이상주의 시와 민중시파가 일어났으며, 등에 의새 구어자유시가 완성을 보기에 이르면서 근대시가 확립된다.『身體詩抄』는 (1848∼1900), , (1855∼1944) 등에 의해 쓰여졌다. 이는 서양풍의 신시를 만들려는 의도한 것이기는 하나 영시의 번역이 많고, 7·5조의 文語定型試로서 新詩의 감정이 풍부한 것은 되지 못했다.2) 浪漫詩와이와 같은 새로운 시는, 1880년 후반에 가서 겨우 새로운 내용과 서정이 싹트기 시작한다. 그 계기는 독일유학에서 돌아온 森鷗外가 그의 여동생 小金井きみ子 등과 같이 역시집 『 』(1889)를 펴낸 데에 있다. 이것은 바이런·하이네·괴테 등 영·독 낭만파의 시를 아름다운 가락과 품위있는 어구로 번역해 낸 것으로서, 그 세련된 문학적 향기는 을 비롯하여 당시의 젊은 세대의 인기를 끌었다.낭만파의 문학지『文學界』의 동인이던 北村透谷는, 『 』의 낭만적인 시정을 이어받아 자유율의 장시와 정열적인 극시를 발표했다. 그리고 같은 『文學界』의 동인 은 7·5조의 전통적 표현을 바탕으로 한 시에 서구적 낭만시의 정신을 결집시키니, 여기에 일본의 근대서정시의 비로서 구체적인 발걸음을 내디디게 된다. 島村은 1897년에 낭만적 시정을 청춘의 서정으로써 개회시킨 첫째 시집 『 』을 냈고, 이어서 『一葉주』(1898), 『 』(1898), 『 』(1901)를 내었으며, 1904년에는 합본 『藤村詩集』(1904)도 편집했다.藤村과 나란히 근대시사의 앞머리를 장식한 (1871∼1946)는, 藤村이 연애와 청춘의 애수를 노래한 여성적인 정서를 간직하고 있었는데 대해, 민족의 이상을 남성적인 서사시로써 표현한 작가이다.3) 象徵詩와 『海潮音』상징시는 (1874∼1916)에 의해 소개되어 1905년경에 특히 성행하였는대, 그의 역시집 『海潮音』(1905)이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상징시 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한 은 일찍부터 베를레에르 등을 소개하면서 프랑스 상징파의 역시를 해왔다. 『海潮音』에 실린 것은 창작시라고 보일 만큼 우수한 역시로서, 역시사상에서 최고봉을 자랑할만 하다.藤村과 晩翠 이후, 1905년을 전후하여 시단을 맡은 것은 (1877∼1945)과 (1876∼1952)이다. 泣菫의 낭만시집 『 』(1900)는 많은 애창자를 가졌던 작품이며, 그에게는 또 전아한 시어를 구사하여 예술지상주의에 입각해서 만든 『二十五弦』(1905), 『 』(1906) 등의 시집이 있다. 『 』에는 그의 절창인 그 유명한 「ああ大和にしあらましかば」와 「 の歌」가 실려 있다. 한국 有明는 영국의 시인 로세더의 심리적 수법을 도입하여 상징시를 확립하고, 환상적인 「 」를 노래하면서 사상적인 내면의 상징을 심화시켰다.4) 自由詩 운동明治 말기에는 大正기에 걸쳐 발전해 온 자연주의 문학운동은 시단에도 영향을 주어, 자유로운 리듬으로 시정신의 신장을 추구하는 소리가 높아졌다. (1888∼1959), , (1883∼1950) 등은 7·5 조에 구애를 받지 않고 平明한 구어를 사용해서 일상생활에서 얻어진 실감을 자우로이 표현해 보려고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러한 시도에 성공한 것은 白秋·露風·高村光太郞 등에 의한 문어자유시였다. 이리하여 근대시는 7·5나 5·7이란 정형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리듬을 획득하여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된다.5) 眈美派의 詩와, 永井荷風 등의 영향을 받은 (1885∼1942)는, 1909년에 시집 『 』을 출간하면서 문단에 등장하여 근대시단에서 크게 활약한 사람이다. 그는 탐미파의 잡지 『ズバル』의 동인을 대표하는 시인이며, 풍부한 어휘로 이국정서나 퇴폐적인 관능을 노래했다. 이와 같은 아름다운 세계는 위의 시집에서 시작하여 『思い出』(1911), 『東京景物誌』(1913) 등에로 발전되어, 시단을 대표하는 지위를 확보했다. 그는 또 후년에 가서는 동요나 민요 등에도 뛰어난 작품을 많이 남겼다.白秋가 화려한 시풍을 가졌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1889∼1964)눈 상징적이며 종교적인 조용하고 침착한 시풍을 가졌었다. 露風는 白秋와 더불어 이른바 白·路 시대를 이룩했는데, 그의 시집에는 『廢園』(1909), 『白き手の獵人』(1913) 등이 있다.6) 理想主義의 詩와大正 초기의 시단은 永井荷風룰 맞아, 그의 역시집 『珊瑚集』(1913)의 출판으로 露風을 비롯하여 많은 청년시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게 된다. 이윽고 高村光太郞(1883∼1956)가 시집 『 』(1914)를 내어, 인도주의 적인 격렬한 정열과 힘찬 가락의 독자적인 시풍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光太郞는 白秋와 같이 『 』, 『ズバル』에서 나왔으나, 白樺派에 접근하면서부터는 퇴폐적이고 허무적이던 경향이 인도주의적, 이상주의적으로 변했다. 그는 또 와 더불어 구어자유시를 확립시켰다.(1888∼1948)는 光太郞의 구어자유시의 흐름을 딴 白樺派의 시인으로서 시집 『自分は見た』(1918)등을 통해 일상생활의 인상을 밝은 이미지로 표현했다. 또 민중파 시인이라고 불린, (1884∼1924)는 『風は草にささやいた』를 室生犀星는 『愛の詩集』(1918), 『抒情小曲集』(1918) 등 시집을 냈는데, 상징파에서 전환한 이들은 이상주의적 시풍을 가지고 있었다.光太郞에 의해 추진된 구어자유시는, 大正 민주주의의 사조를 배경으로 민중파시인인 등에 이어져 갔으며, 元 과 犀星도 이에 동조했다. 그러나 그들의 시는, 산문적인 경향이 짙어 대중에 접근하기는 쉬웠으나 주제와 표현은 평속한 것이었다. 이러한 민중파에 대해 예술파·상징시파 시인이 나왔는데, 『 』를 낸 (1890∼1971)와 『砂金』(1899)의 (1892∼1970), 그리고 유명한 『殉情詩集』(1921)을 낸 등이 이에 해당한다. 春夫는 구어자우시가 산문화한 데 대해, 독자의 개성을 지켜 고전적인 문어정형으로 신선한 서정을 노래했다.3. 현대시의 흐름1) 現代詩의 動向먼저 현대 시단의 움직임을 보면,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大正말에서 昭和 초기에 걸쳐 전통적인 서정시나 상징시에 대해 전위적인 예술이 이입되어 좌익시와 주지적인 모더니즘의 시가 서로 대립되면서 나타난다. 1930년대 후반에 이르러 주지적인 생활방식과 서정적인 것을 조화시키는 경향이 생겨났으나 전쟁이 시작되자 시단은 거의 불모의 시대에 들어갔다. 그러나 전후에는 황폐한 현실에서 문명비판적인 시가 나타나기에 이르렀다.2) 革命的 詩運動좌익운동이 전개됨에 따라 혁명적 문학이 왕성해짐과 동시에 시단에 있어서도 혁명적 시운동이 일어났다. 그들은 현실의생활에 대한 과학적인 인식에 입각하여, 종래의 서정·낭만성을 부정하고 농민이나 노동자의 생활을 노래하여 노동운동의 이익을 담당하려고 시도했다. 이와 같은 뜻에서 만들어진 시이기에 거기에는 외침이나 소화안된 사상·용어 등이 쓰여져 딱딱하고 예술성이 모자랐다.그 가운데에서도 잡지『戰旗』에 의거하여, 생활의 실감에 넘치고 예리한 감수성으로부터 우러난 운율의 미를 담은 시를 만든 는 주목할 만한 존재이다. 그에게는 『中野重治詩集』가 있다.3) 모더니즘의 詩프랑스의 초현실주의 운동이 소개되어, 산문에 있어서의 예술적 근대파의 대두와 때를 같이 하여 모더니즘의 시도 그 빛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움직임에 크게 영향을 끼친 것이 堀口大學(1892∼1981)의 역시집 『 の 』(1925)이다. 이 역시집에 나타난 그 감각의 신선함과 지적인 수법 및 구성의 재치는 현대의 단가나 산문시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와 같은 초현실주의의 시의 전개는 1928년에 창간된 詩誌 『詩と詩論』에 의거했는데, 그 중심이 되는 작가는 , , 등이었다. 거기서는 다다이즘의 시에 이어 지적인 수법이나 새로운 감각의 시가 실험되었는데, 그들의 생각에 의하면 시란 재래의 시와 같이 현실적인 의미나 상장을 가지는 것이 아니고 꿈·이미지의 세계가 시 그 자체이며, 거기에는 현실보다 오히려 참다운 경험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수법적으로도 지금까지의 시가 가졌던 서정성이나 음악성을 배제하고, 지적 이미지에 의한 의식적인 구성을 지향하며, 산문시로써 내면적 시정을 표현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百人一首뛰어난 和歌 중에서 하나의 형태이다. 백명의 가인들이 한수씩 뛰어난 和歌를 선택한 것이다.【발생】藤原定家(ふじわらのていか)가 74세때 鎌倉1235년 지금 동경의 小倉山(おぐろやま) 산장에서 百人一首를 맹장지에 썼다고 전해진다.歌仙歌台·歌仙秀歌를 택한 藤原定家의 『前十五番歌合』을 시작으로 같은 公任의 『三十六人撰』이후 36명의 和歌인들을 단위로 한 歌仙歌合이 성행했다. 그러나 시대가 하강함에 따라서 選人되야할 和歌인도 늘어나고, 후에 鳥羽院撰의 『時代不同歌合』은 한명당 3편의 시, 백오십편의 시가 실려져 있다.定家가 『小倉百人一首』에서 백명을 단위로 해서 노래를 택하고 있는 것도 『時代不同歌合』에 맞추기 위해 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時代不同歌合』과를 틀린 歌仙歌合에서 탈피한 歌仙秀歌選으로 편찬되었다.【異種의 百人一首】定家의 손자까지 이르는 그 문류가 중세·근세의 가인들의 사회에서 지도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도 있고 후세, 定家의 영향력은 절대적으로 『小倉百人一首』을 모방해서 『小倉百人一首』와 구별하기 위해서 그런 종류의 책들을 『異種百人一首』라든지 『 り百人一首』라고 부르고 있다. 범위는 和歌는 물론 (역주:통속적인 표현으로 해학·익살을 주로 읊은 和歌), (역주:일본고유의 짧은 시. 5·7·5의 17음절로 이루어짐), 川歌, 道歌, 그외 및 또 『小倉百人一首』의 노래를 本歌 한것과 戱作歌로한 「どうけ」 「もじり」라도 불려지는 것도 포함되어있지만 시조의 『小倉百人一首』을 넘어선 긴 생명력을 가진 종류의 책은 존재하지 않는다.【내용】사랑, 춘하추동의 4계절, 여행, 이별, 그 외의 것이 있다.88.皇嘉門院別當(こうかもんいんのべっとう)難波江の 葦のかりねの ひとよゆえ みをつくしてや 戀わたるべき(なにわえの あしのかりねの ひとよゆえ みをつくしてや こいわたるべき)絹の戀(きぬのこい)A Silky Love☞ 旅先で思いもかけず枕をともにした人よほんの短い戀なのにあなたを一生思いつづけることになるのでしょうか40.平兼盛(たいらのかねもり)しのぶれど 色に出でにけり わが戀は ものや思ふと 人の問ふまで(しのぶれど いろにいでにけり わがこいは ものやおもうと ひとのとうまで)水戀(すいれん)Reflected in the Water☞「戀をしているのですか?」と人に言われるようになってしまいましたあふれる戀しさをおさえて心の中にかくしていたのに惱みある戀だと知られてしまった56.和泉式部(いずみしきぶ)あらざらむ この世のほかの 思ひ出に 今ひとたびの 逢ふこともがな(あらざらん このよのほかの おもいでに いまひとたびの あうこともがな)來世の戀(らいせのこい)Love towards the Other World
1.【 作 者 】『土佐日記』의 作者는 이다. 貞觀10年(868)전후에 태어났다고 전해지며 그 집안은 武家집안이었지만 헤이안 시대에 들어 무공을 내세울 기회도 없어져 그 전통의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藤原씨의 세력에 압도되간다. 紀貫之는 『古今集』의 선자의 한사람이고, 또는 그 「かな書」의 집필자이고, 『古今集』 선진사업을 중심으로 和歌의 궁정문학적 기능을 확립한 가장 중요한 존재이다. 특히 醍 朝, 廷喜, 廷長의 시대에 수많은 屛風歌를 짓는 등 활약이 대단하였고 그 중에서도 천황의 칙명에 따른 것도 현저히 많아 제왕의 紀貫之에 대한 신망이 두터웠음을 알게해 준다. 또한 여러 귀족들의 비호를 받으며 수령층 가인들이 모여 하나의 살롱을 형성해 그 중심멤버로 그 속에서 마음껏 인간적 연대감과 미적 충실감을 맛봤을 것이다.그런 紀貫之가 만년에 이르러 廷長8년(930) 가을에 醍 천황으로부터 土佐守에 임명되어 그해 가을 서울을 떠나 임지로 향하게 된다. 당시 남해에 자주 출몰하던 해적과 國守로서의 정무의 고뇌도 있었겠지만, 5년간의 임기를 무사히 마치고 承平4, 5年(934,5)에 걸쳐 귀경한다. 당시 紀貫之의 정확한 나이는 모르지만, 60대 후반의 나이에 이르러 있었으므로, 만년의 土佐守의 임무는 결코 편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무엇보다 이 시기의 紀貫之에게 있어서의 큰 충격은 廷長 8年 그의 土佐守 임명과 같은해 비호자로서 많은 신망과 도움을 주었던 醍 천황과 이어 定方이 죽는 등 紀貫之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는 서울에 돌아와 藤原忠平의 일가의 의뢰를 받아 屛風歌를 짓는 등 변함없이 가인으로서의 활동은 하지만 그의 가슴속은 일찍이 맛본적 없는 인생의 공허함으로 가득차게 된다.그는 귀경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가인 학자로써 큰 흔적을 남기지만 그다지 높은 관직에 까지는 오르지 못하고 天慶8年(945) 가을 80세 가까운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작품형성 】『土佐日記』는 土佐守의 임무를 마친 紀貫之 일행이 承平 4년 11월 21일. 하지만 주제는 가론만은 아닌 듯하다. 이전의 土佐守였던 전임자에대한 사람들의 태도, 항해중의 주도권을 쥔 船頭의 태도, 그의 귀경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태도, 집을 맡겨두었던 이웃들에 태도등 변하기 쉬운 인간의 공리적인 마음을 부정하는 한편으로 土佐에서 잃은 어린 딸에 대한 변하지 않는 부모의 정을 발견해 그것을 주제의 중심에 두고 있다. 하지만 역시 이러한 입장은 작품 전체를 통해서는 인정되지 않는다.이 점에 대해 차라리 특정의 주제에 묶이지 않고 여러 가지 의식이나 발상이 계기적으로 이어지거나 모순에 부딪히는 등의 과정 속에서 총체로서의 작품자체를 기관지의 복잡한 내면상으로 이루어가는 것이 『土佐日記』의 본질로 보는 입장이 있다. 즉 이 작품의 주제를 작가가 쓰려는 의도가 무엇인가 하는 점에서는 죽은 아이에 대한 추모나 土佐에서 헤어진 사람, 서울에 두고온 사람들에 대한 비평, 여행중의 풍경에 대한 감상등으로 볼 수 있지만 이는 주제라기보다 소재적인 성격으로 보여지며, 작자의 의도와는 달리 결과로서 작품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하는 점에서의 주제는 이 시기의 紀貫之의 상태, 인간이나 풍경이나 和歌등의 자기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심경의 표출에 있다라고 할 수 있다. 즉 土佐에 있는 동안 서울에서의 醍 천황과 定方등의 죽음을 접하게 되고, 더욱이 60을 넘긴 노인의 몸으로 서울을 떠나 먼 곳으로 부임하게된 자신의 처지등이 어린 딸의 죽음이라는 모티브 안에서 발현되고 있으며 이러한 紀貫之의 처량한 심정은 일기 전반에걸쳐 흐르고 있다.【 의 의 】『土佐日記』의 의의는 먼저 일기에서 일기문학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土佐日記』는『入唐求法巡 行記』(承和14年)와 같은 한문일기의 전통을 이으면서 성립했다고 볼 수 있지만 이러한 여행기나 그외에 관정기록적인 일기와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비약을 이루고 있다. 즉 『土佐日記』는 여러 가지 장면이나 요인을 종합하면서 총체로서 작자 紀貫之의 인간상의 형상이라는 주제에 집약해 가는 구성을 가진다. 그 점에서 한문일기와 身上을 上·中·下의 3권으로 써내려간 것이 『 日記』이다.道網母의 和歌는 『拾遺集』이하의 칙선집에 38수가 들어가고 또한 安和2年(969) 藤原師尹에게 屛風歌를 의뢰받아 노래를 짓는 등 이후에도 그 역량이 여러곳에서 엿보인다.なげきつつひとりぬる夜のあくるまはいかに久しきものとかは知る.(한탄해가며 혼자 잠자리에 든 밤, 날이 새기까지가 얼마나 길고 괴로운 것인지 아시나요.)는 『拾遺集』에 들어가는 노래 중 하나로 꽤 유명한 그녀의 대표작이며, 또한『 日記』의 한 장면에서도 보여지는 노래이지만 원래 가인으로서 평가받아온 道網母가 『 日記』의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지금에서는 그 작자로서 재인식되어, 헤이안문학사상 극히 중요한 위치를 부여받게 된다.【 당시 사회상과 결혼생활 】道網母는 倫寧의 딸로 태어나며 그 가정은 당시 귀족사회하에서 스스로 중류계층의 수령집안으로 위치 지어진다. 하지만 이 시대에는 기회를 잘 잡으면 딸이 사회적으로 유력한 상류귀족 권세가의 부인이 되고, 또 그 자식이 자애 고위고관에 오르면 사회적으로 출세할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었다. 따라서 아버지 倫寧은 딸의 결혼으로 자신의 앞날에 대해 큰 희망을 품었을 것이며 자신도 신분차를 뛰어 넘은 결혼을 통해 품은 희망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혼과 함께 깨져가는 꿈 때문에 고뇌와 비애를 심각하게 맛보게 한다.兼家가 당시 19세이던 작자에게 구혼해와 그 결혼이 성립된 것은 天曆8年이다. 그때의 兼家의 나이는 26세였으며 右兵衛佐로 그리 높은 관직에 있지 않았다.작자가 兼家와 결혼했을 때 그에게는 이미 時姬라는 부인이 있어 아이도 낳았었다. 그외에도 兼家의 처첩은 몇가지 기록에 남아있는 것만으로도 7명이어서 작자와 본처를 포함해 9명이 된다. 이 兼家의 여자들은 실제적으로는 작자와 거의 관계없었다고 해도 본질적인 의미에서는 역시 그녀들을 포함해 時姬이하 많은 수의 여성들이 한결같이 兼家의 처로서 존재할 수 있었던 一夫多妻제의 사회구조 속에서 道網母의 인생을 생각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다.당시 사회는 남안 직후 방문한 남편을 들이지 않고 다음날 아침 걱정스런 마음을 담아 지어 보낸 노래인데, 남편에게서 온 답장이 그 응답의 미묘함과 수사적인 묘미에 주안을 옮겨버림으로써 그녀의 절실한 감정은 어이없이 묵살당하고, 그녀는 혼자 우수에 젓을 수밖에 없었다. 「なげきつつ」의 노래는 이러한 장면에 놓여져 和歌적 정서의 극한에 달해, 이미 그 정서의 경계에만 머무르지 않고, 심각한 인생표현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兼家의 사랑을 빼앗은 小路의 여자 때문에 道網母는 수년가 고뇌하지만 결국 兼家와 이 여자의 사이는 잘 안되어 여자는 곧 몰락하게된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道網母의 행복으로 이어지지않고 오히려 기대가 좌절되어 실망감에 기운을 잃게된다.그래도 兼家가 사회적으로 출세하지 못했던 시기에는 부부의 사이도 비교적 온화하고 둘이 노래의 贈答을 즐기거나 하는 시기도 있지만 兼家가 사회적으로 눈부신 榮達을 이루자 부인으로서 기뻐하는 반면 그 때문에 兼家의 마음이 자신에게서 한층 멀어져가는 슬픔을 못보게 된다. 그 외에 어머니의 죽음(康保元年), 병후의 兼家를 그의 집에까지 병문안을 하러 경험등이 기록되어있다.② 중 권중권은 安和2年(969)부터 天祿2年(971)까지의 3년간의 일기이다. 이 시기에 작자와 兼家와의 사이는 점차 험악해져 결국 그 극에 달한다. 거기에는 兼家와의 부부생활을 매개로 하면서도 그 외면적인 관계를 투과하여 점점 작자자신의 내부에 깊숙해져오는 절망적인 고독감이 보여지는 것에 자연히 상권과는 다른 중권의 구조적인 특징이 보여진다.변함없이 兼家의 아내인 이상 그녀에게 삶의 장이라는 것은 없지만 이미 그 때문에 흔들리지 않고 보다 깊이 인간존재의 슬픔을 음미하며 살아가려는 경지가 겨우 내적으로 확립되어, 중권말부에는 훌륭하게 펼쳐진다. 즉 鳴瀧에 이은 初瀨唐에의 여행을 기술하는 말미를 보면 지금까지의 고뇌를 스스로 극복하고 차분하게 자연을 바라보는 인생관조의 경지가 엿보이게 된다.③ 하 권하권은 天祿3年(972)부터 天延2年(974)까지의 3년간의 일기이다 내면에 빛을 비추어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자조 문학의 첫 작품이라고 할 수 있으며, 물어가 당시의 사건 본위로 꾸며낸 이야기였던 것과는 달리 개인의 심리를 그려내는 산문문학으로서의 시초가 되기도 하여 平安시대 여류 일기의 대표적 작품으로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본 질 】『 日記』의 본질로서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사실과의 관계이다. 이전부터『 日記』의 내용과 객관적 사실과의 사이에는 꽤 차이가 있음이 지적되고 있다. 확실히 道網母의 결혼의 실태가 『 日記』에서 보이는 것처럼 불행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특히 상권에 상당하는 시대에는 당연히 그녀에게도 결혼생활의 행복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사실은 『 日記』에서도 그 행복의 한 부분이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행복한 시절의 기사에 대해서 작자의 허무한 생활을 그려내는데 밝은 기사를 더해 兼家에 대한 불만과 교착시켜 그에 대한 집착을 의도적으로 표현하려고 했다고 보는 설도 있다.이렇게 생각하면 이러한 밝은 소재의 잔존이라는 것은 『 日記』의 작품형성의 눈부신 고독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기사들이 兼家에 대한 집착을 표현한다면 그것은 잃어버린 것에 대한 회상의 희구이다. 또는 구조론적으로 그것 자체로서는 행복하고 밝은 기사도 『 日記』의 속에 위치하면서 그 행복이 얼마나 비항상적인 것이었는가를 조명하여 그녀의 인생의 근저에 있는 덧없음이 입체화된다고 받아들여진다. 어쨌든 사실과 대결하고, 또는 사실을 순화하고, 내재화하면서 작품의 세계에 진실한 인생을 재현하려는 것에 『 日記』의 본질이 있다고 봐야한다.다음으로 작자에게 있어 『 日記』는 어떠한 존재 의의를 가지는가 하는 점에서 그 본질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중권의 후반에서 작자는 극한적인 고뇌에서 겨우 그것을 뛰어 넘어 길을 구해 곧 중권 말부에 훌륭한 자기극복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존재상실감에서의 탈거가 사실을 『 日記』의 제작에 의해, 즉 거기에서 일구어진 자신의 인생의 덧없음의 자각에 의해 비로서 가능하게 됐다는 것 兼家와
한국 문학사의 시대구분1. 고대의 문학1. 시대 개관이 시기의 문학은 발생기로부터 통일 신라 시대까지의 문학을 가리킨다. 이 시기는 한국 문학이 태동하여 형성된 시기인 상고 시대 문학과 삼국 시대의 문학으로 세분할 수 있다. 고대 문학은 제천 의식에서 태동하였는데, 원시 종합 예술의 성격을 지녔다. 한문을 사용하고 유학과 불교를 받아들인 삼국 시대는 우리 문학사의 큰 전환점이 된 시기였다.2. 서정 문학(1) 고대 가요대부분 설화 속에 삽입된 형태로 정착되어 설화와 가요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잡단적인 원시 종합 예술이 분화, 발전되면서 집단적인 요소로부터 개인의 감정을 노래하는 서정시가 나타났다. '구지가'는 짐단적 의식요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나 '황조가', '공무도하가' 등은 개인의 감정을 노래한 서정 시가로 발전한 작품들이다.(2) 향가향찰로 표기된 신라의 가요로, 본격적인 기록 문학의 시작이라는 의의를 지닌다. '삼국유사'와 '균여전'에 총 25수가 전해지고 있는데, 4구체, 8구체, 그리고 가장 정제된 형식인 10구체가 있다. 작가층으로는 승려와 화랑이 가장 많으며, 신라인의 숭고한 정신 세계를 표현한 작품이 많다. 888년에 위홍과 대구가 향가집 '삼대목'을 편판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전하지 않는다. '제망매가', '찬기파랑가' 등이 뛰어난 문학성을 보이는 작품들이다.(3) 한시이 시기에는 한자가 전래되어 한문학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을지문덕의 '여수장우중문' 시와 최치원의 한시 등이 있다.3. 서사 문학(1) 설화이 시기의 서사 문학의 주된 형태는 설화이다. 설화로는 신의 위업과 신이한 능력을 찬양하는 신화와 교훈적 내용을 담고 있는 민담으로 나누어지는데, 모두 후대의 소설의 모태가 된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최초의 건국 신화인 단군 신화를 비롯하여 동명왕 신화, 김수로왕 신화 등이 있으며, 민담으로는 '조신몽', '구토지설', '도미 설화', '김현감호', '효녀 지은 설화' 등이 있다.2. 고려 시대의 문학1. 시대 개관고려 시 속화된 자연을 아름다운 언어로 승화시켰다.(2) 가사가사 문학은 박인로에 의해 계승되었으나, 그 수준은 전대의 정철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이 시기의 가사는 산문화 경향으로 길이가 길어지고 자수와 음보의 변화가 생겼으며, 내용면에서도 현실성을 띠게 되어 다분히 수필적인 경향을 보였다. 양반 가사와 함께 평민 가사와 내방 가사가 등장하였다. 박인로의 '성산탄', '태평사', 홍순학의 '연행가', 김인겸의 '일동장유가', 김진형의 '북천가' 등이 있다.(3) 한문학순정 문학이 제창되었으나, 영.정조 무렵 박지원을 비롯한 실학파는 순정 문학이 현실과 유리되었음을 비판하였다.3. 서사 문학(1) 설화한글 소설의 효시로 사회성을 띤 허균의 '홍길동전'을 비롯하여 많은 소설들이 창작되었다. 김만중은 몽자류 소설의 효시인 '구운몽'과가정 소설인 '사씨남정기' 등의 작품을 남겼다. 영. 정조 무렵의 소설에는 평범한 인물이 주인고으로 등장하고 보다 현실성 있는 사건을 담았다. 박지원의 '허생전', '양반전', '호질', 판소리계 소설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 군담 소설인 '임진록' 등이 창작되었다. 장편 대하 소설이 등장한 것도 이 시기의 특기할 사항이다.(2) 판소리순종~영조 무렵에 열 두 마당이 형성되었는데, 고종 때 신재효가 여섯 마당으로 정리하였다.(3) 민속극인형극과 가면극이 있다. 인형극은 남사당패가 공연하였고, 가면극은 상업 도시를 중심으로 상인들과 지방 관아의 이속들의 후원으로 공연되었다. 판소리와 민속극은 서민 의식이 강하게 반영된 민중의 오락으로 풍자성을 띤 구비 문학이었다.5. 개화기의 문학1. 시대 개관개화기의 문학은 갑오 개혁으로부터 일제 강점기까지의 문학을 말한다. 역사사응로 우리 나라가 서구의 근대 문명을 받아들인 개화기였고, 동시에 열강의 세력 다툼 속에서 국권을 상실해 가는 과정에 있던 격동기였다.2. 서정 문학(1) 개화 가사전대의 가사 문학에 개화 의식을 담은 가사로 4.4조 2행의 대구에 짧은 후렴구를 붙인 형식이다.(2) 창가內鮮一體)라는 미명 아래, 일제는 창씨 개명(創氏改名), 신사 참배(神社參拜)를 강요하고, 우리 말과 글의 사용을 금하는 등 황국 신민화(皇國神民化) 정책을 폄으로써, 우리 민족의 정신적인 지주를 파괴하려 하였다. 이에 따라, 동아 일보, 조선 일보 등의 일간지가 폐간되고, 「문장」, 「인문 평론」 등의 문예지도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이러한 암담한 상황에서, 일부 문인들은 일제의 강압과 회유에 못 이겨 친일적 행각을 하거나 혹은 소극적 저항꼭 표시로 붓을 꺾고 숨어 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과는 달리, 적극적인 투쟁을 감행하여 끝까지 기개를 굽히지 않은 이들이 있었으니, 이육사, 윤동주 등이 그들이다.2. 특징1. 민족 문학의 암흑기였다.중 일 전쟁(1937) 이후 완전히 전시 체제에 돌입한 일제는 우리의 말과 글을 못 쓰게 하고, 민족혼을 일깨울 문자 행위를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우리 문학계는 공백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2. 암흑기에도 횃불은 타오르고 있었다.일제의 탄압으로 일부 문인들은 일본의 국책에 부응하여 안일을 도모하였고, 일부는 붓을 꺾고 은거하였으나 일부는 끝까지 기개를 굽히지 않고 작품을 통하며 적극적인 저항 활동을 폈다.8. 민족 수난기의 문학1. 시대 개관1910년대는 주권이 상실된 시기로 계몽적 성격의 문학으로 출발하여 후반기에는 순수 문학이 등장하였다. 20년대 들어 일제의 문화 정책에 편승, 동인지를 중심으로 시 제작이 활발하였으며, 계급 문학과 국민 문학의 대립으로 문학과 개인과 사회의 갈등이 두드러졌다. 30년대와 40년대 초는 일제의 사상적 통제가 강화되어 사회 의식 대신 자연이나 현실 풍자적인 문학 경향을 띠었다.2. 갈래별 개관(1) 현대시김억과, '불놀이'의 주요한으로부터 1910년대의 현대시가 출발하여 1920년대는 홍사용, 이상화 등의 감상적 낭만시와 황석우, 오상순의 상징시, 김동환의 장편 서사시인 '국경의 밤', 한용운의 불교적 연가풍의 '님의 침묵', 전통적 정서를 계승한 김소월의 민요시 등이 발표되었다. 1930년대존을 중시하려는 사상이 실존주의이다. 기독교적 실존주의, 무신론적 실존주의, 행동적 실존주의가 있다. 이는 사르트르(J. P. Sartre), 카뮈(A. Camus)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 사조는 1950년대 전후의 한국 작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11. 분단과 산업화 시대의 문학1. 시대 개관해방과 한국 전쟁, 그리고 산업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른 이 시기는 한 마디로 격변의 시기였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한민족은 본격적으로 세계사에 편입하게 되었다.2. 갈래별 개관(1) 현대시해방으로 새로운 시의 가능성을 열었지만, 한국 전쟁이라는 비극적 상황의 전개는 시인으로 하여금, 고독, 체념을 말하거나 인간 존재의 가치에 대해 캐묻게 만들었다. 60년대 이후는 전통에 대한 접근과 실험적 작품 활동, 삶의 진실한 가치에 대한 추구 등이 경향을 이루었다. 50년대는 서정주, 유치환, 청록파 시인 3인들이 두드러졌으며, 60년대에는 황동규, 정현종, 신동엽 등이 주목을 받았다.(2) 시조50년대 이호우, 김상옥, 조종현, 이태극 등이 우리 삶에 내재한 정신적 가치를 승화시키는 작품을 발표했으며, 60년대에는 이영도, 정완영, 이상범 등이 전통적 서정 세계를 노래했으며, 장순하는 실험적 경향을 보였다.(3) 현대 소설이 시기의 소설 문학은 한국 전쟁의 비극을 보여 주면서 동시에 그 고통을 극복하고자 하는 점이 두드러졌다. 그리고 분단 문제에 대해 새로운 인식이 나타났으며, 산업화 과정 속에서 드러난 사회적 모순에 대한 비판 등 살므이 가치를 생각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60년대까지는 오영수, 장용학, 김성한, 손창섭, 최인훈, 이호철 등이, 그 이후는 김승옥, 이청준, 김원일, 전상국, 최인호 등이 작품 활동을 하였다.(4) 현대 희곡유치진, 차범석, 이근삼 등이 한국 전쟁을 전후하여 활동하였으며, 60년대에 접어들어 오태석이 새로운 기법을 보이며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차범석의 '불모지', '산불' 그리고 임희재의 '고래', 이근삼의 '원고지', 천승세의 '만 10구체의 향가는 격조 높은 서정시로서 세련된 수사와 트청한 시 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제망매가'와 '찬기파랑가'는 표현 기교와 서정성이 빼어나 향가의 백미로 일컬어진다.② 내용향가의 내용은 민요, 동요, 토속 신앙에 대한 것, 임금을 그리워하는 노래, 나라를 다스리는 노래 등 다양하나, 부처님의 찬양과 신앙심을 표현한 불교적인 노래가 많다.(각각의 향가 작품은 그 배경이 되는 설화를 가지고 있는 것이 두드러진 특징이다.)(5) 작가향가의 작가는 승려, 화랑, 여류, 무명씨 등 여러 계층이나, 현전하는 향가의 작가는 대부분이 승려와 화랑이다.(6) 국문학상의 의의향가는 우리 문학사상 최초의 정형화된 서정시란 점에 중요한 의의가 있다. 또한, 그 가사는 신라어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그 표기법은 외래 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용 발전시킨 좋은 예가 된다.그리고 숭소한 이상 추구를 주된 내용으로 했던 이 문학 양식은 소박하면서도 깊이 있는 수사로원만하고 차원 높은 신라인의 정신 세계를 잘 반영했다.향가는 우리 문학의 주체성으로 보여 주면서 민족 정신과 정서를 바탕으로 하여 꽃피운 민족 문학의 유산이라 할 만하다.4. 고려 속요(俗謠)의 이해(1) 개념향가가 쇠퇴하면서 그 명맥을 유지하던 향가계의 노래까지 자취를 감추면서 크게 유행한 갈래로 고려 시대 평민들이 부르던 민요적 시가인 속요이다. '고려가요', '장가(長歌)'라고도 부른다.(2) 특징고려 속요는 민요에서 형성되었으므로 운율이 무척 아름답고 표현이 소박하면서도 진솔하며, 오랜 시일 전승되는 동안 첨삭되는 과정을 거쳐 세련미까지 갖추게 되었다. 당시의 사회상이 반영되어 있으며 평민들의 진솔한 감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3) 정착 시기고려 속요는 원래 민간에서 유포 전승되던 민요가 궁중의 속악 가사로 수용되고 개편되었다가, 한글 창제 이후 , , 등에 채록되어 전하고 있다.5. 경기체가(景機體歌)의 이해(1). 개념① 경기체가는 13세기 초에 '한림별곡'을 시작으로 출현하여 조선시대까지 그 명맥이 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