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독일의 수도.위치 : 독일 동부면적 : 891㎢인구 : 347만 1418명독일 동부, 바르샤바-베를린 주곡(主谷)의 저지(低地)에 있다. 가항하천(可航河川)인 슈프레강(江)이 사행(蛇行)하면서 시가지를 관류(貫流)하다가 시가지 서부에서 하펠강과 합류한다. 최고봉(最高峰)은 뮈겔베르크산(115m)이며, 셰퍼베르크산(103m), 하펠베르크산(97m), 크로이츠베르크산(66m) 등 모두 말단퇴석(末端堆石)의 사력구(砂礫丘)이다.넓은 숲과 많은 호수를 안고 있어 도시 미관이 뛰어나고, 또 ‘베를리너 루프트(베를린의 공기)’라고 노래로 부를 정도로 공기가 맑다. 북위 52.5°에 있어 겨울은 몹시 춥고, 여름도 서늘하다. 하펠강은 엘베강에 흘러들어 북해와 연결되고, 오데르-슈프레 운하에 의해 발트해(海)와도 연결되어, 제2차 세계대전 전에는 1,000t 급의 화물선이 빈번히 드나들면서 독일 제3의 내륙항 구실을 하였다.베를린은 본래 하펠강의 지류인 슈프레강 북안에 있는 옛 시가지의 명칭으로, 처음에는 어촌인 것이, 1244년 도시법(都市法)이 시행됨에 따라 도시가 되었다. 한편 슈프레강 남안의 구역은 쾰른이라고 부른 또 하나의 어촌인 것이, 1237년 도시가 되었고, 뒤에 두 도시가 합쳐서 베를린이라는 도시명을 가졌다. 베를린이 있는 브란덴부르크 지방은 원래 슬라브계 벤드족의 거주지역이었으나, 12세기에 변경백(邊境伯) 알브레히트 곰(Bear)백작이 이 지역에 식민(植民)하여 독일화하는 데 공이 컸고, 따라서 베를린이라는 도시명도 그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베를린의 어의(語義)는 ‘새끼곰’을 뜻하고, 베를린의 시장(市章)도 새끼곰을 문양화(紋樣化)한 것이다. 베를린은 그뒤 한자동맹에 가입하여 상업도시로 발전하였고, 다른 한자동맹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상거래의 자유, 도시자치를 위해 영주와 싸우면서 14세기에는 브란덴부르크의 중심도시가 되었다.그러나 1410년에 호엔촐레른가(家)의 지배에 들어갔고, 1442년에는 도시자치권이 박탈되었다. 다시 1482년에는 호엔촐레른가의 브란덴부르크 선거후(選擧侯)의 거성(居城)이 이곳에 옮겨옴으로써 궁정도시가 되었고, 따라서 관청도시(官廳都市)가 된 베를린은 호엔촐레른가와 운명을 함께하였다. 종교분쟁시대에 선수를 써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영주(선거후)는 가톨릭교의 억압을 받던 프랑스의 위그노, 서부독일의 그리스도교도 및 유대인 등을 받아들였다. 우수한 새로운 시민을 합친 베를린은 상업·공업이 급속히 발전하여, 동부독일의 지도적인 도시가 되었고, 문화적으로도 개화의 기운이 넘치는 신흥도시가 되었다. 또 시역도 확장되어, 대선거후(大選擧侯) 시대인 1662년에는 서쪽 교외의 거리가 시역에 병합되고, 그것을 포함한 시가지 전역을 둘러싸는 성벽이 구축되었다. 인구도 호엔촐레른가의 지배가 시작된 15세기 중엽에는 약 6,000명이었으나, 17세기 말에는 5만 6000명에 이르렀다.1701년 브란덴부르크 선거후가 프로이센 왕으로 승격되자, 베를린은 프로이센의 수도로서 순조로운 발전을 지속하여 나갔다. 장대한 왕궁, 귀족들의 저택 등이 건설됨으로써 고전주의 양식의 도시경관이 갖추어지고, 또 중상주의(重商主義) 정책에 입각한 국왕의 산업보호에 힘입어 모직·면직·견직 등의 직물업과 은행업이 크게 일어났다. 상업거래도 17세기 후반에 프리드리히 빌헬름 운하가 개통되어, 함부르크·브레슬라우(폴란드의 브로츠와프) 등 상업도시와의 사이에 수송로가 열리는 등 여건 조성에도 힘을 입어 급속히 발전하였다.문화면에서도, 1700년에 창설되어 프리드리히 대왕에 의해 프랑스식으로 개조된 프로이센 학사원(學士院)이 자리잡게 되었고, 1810년에 훔볼트 남작 등의 노력으로 창설된 베를린대학이 당대의 일류 석학들을 모아 신설 대학인데도 독일 각지의 역사깊은 대학들을 능가하는 명성을 얻음으로써 독일의 학문·예술의 중심지로 인정받게 되었다. 18세기의 베를린 문화의 특색은 프랑스류(流)의 계몽주의적인 경향이다. 계몽주의는 원래 프리드리히 대왕의 개인적인 취향에 의한 궁정문화로 시작되어, 극작가 레싱 등의 활약으로 시민 사이에 뿌리를 내렸는데, 그 새로운 문화경향은 가톨릭적이고 복고적인 경향이 짙은 남부 및 서부 독일의 문화에 비해 이채로운 것이었다.한편, 베를린은 전쟁에 의한 피해를 여러 차례 받았다. 7년전쟁 때에는 1757년 오스트리아군, 1760년 러시아군에 의해 파괴되었고, 나폴레옹전쟁 때에는 1806∼1810년에 프랑스군에 의해 점령되어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해방전쟁 뒤에는 짧은 기간에 부흥을 이룩하였다.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한 관세동맹이 성립된 사실과 1848년에 베를린·포츠담 사이에 철도가 개설된 것을 효시로 단기간에 철도망의 중심이 된 사실이 부흥에 기여하였다. 인구도 급속히 증가하여, 해방전쟁 당시 약 20만인 것이 1861년에는 약 55만이 되어, 반세기 사이에 3배가 되었다. 인구증가에 따라 근대적인 도시 개조가 불가피해져서, 17세기 말에 구축된 성벽이 1861년에 철거되고, 또 교외의 거리가 시역에 흡수되었다. 1871년에 이룩된 독일제국(獨逸帝國)의 창건은 베를린이 한층 발전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베를린은 제국의 수도로서 전독일의 정치적 중심지가 되고, 보르지크·지멘스 등 대기업도 베를린을 본거지로 하였기 때문에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따라서 도시행정 구역도 재편성이 이루어져, 1920년 샤를로텐부르크·노이쾰른·슈판다우·빌머스도르프 등 주변 도시들과의 대합동이 실현되어 대(大)베를린이 성립됨으로써, 인구 400만의 세계적인 대도시가 되었다.제2차 세계대전 때 베를린은 연합군의 폭격으로 시가지가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1945년 패전과 더불어 미국·영국·프랑스·소련 4개국의 공동점령지구가 되어, 서반부·중북부를 프랑스, 중앙부를 영국, 남부를 미국, 동반부를 소련이 관리하였다. 1948년 소련과 서방 3국의 행정상의 의견 차이가 극도로 벌어져, 3월 소련은 공동관리위원회(共同管理委員會)에서 탈퇴하고, 6월에는 서방 3개국의 점령 아래 있는 서부독일 지구와 서베를린을 잇는 모든 육상 및 수상의 교통로를 완전히 차단함으로써, ‘서베를린 대륙봉쇄’가 시작되었다. 이에 대항하여 서방 3국은 3개의 공로(空路)를 이용하여, 베를린의 템펠호프·가토·테겔의 3개 공항에 생활필수품을 실어나름으로써 ‘서베를린 대공수작전’을 폈다. 봉쇄는 1949년 5월에 해제되었으나, 이 봉쇄로 베를린의 동·서 분할이 결정되었고, 서베를린은 ‘붉은 바다에 뜬 뭍의 고도(孤島)’가 되었다. 1961년 8월 동독은 베를린장벽을 구축하였으나 1989년 동유럽에 불어닥친 개방화 바람과 함께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이어 1990년 12월 3일에는 서독이 동독을 흡수 통합함으로써 베를린은 냉전과 분단의 시대를 마감하고 하나가 되었다. 1991년 7월 새로 구성된 전독일의회는 베를린을 통일독일의 수도로 의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