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의 교육에 대한 필요성에 대해 살펴보기 전에 장애인에 대한 의미를 먼저 살펴보자. 장애인복지법에 "장애인은 신체적·정신적 장애로 인하여 장기간에 걸쳐 일상생활 또는 사회생활에 상당한 제약을 받는 자"를 말한다. 여기서 신체적 장애는 주요 외부신체기능의 장애, 내부기관의 장애 등을 말하며, 정신적 장애는 정신지체 또는 정신적 질환으로 발생하는 장애를 말한다.장애의 과정을 보면, 질병·사고·노화·선천적 요인 등으로 인한 손상(기능장애)이 기능제약(능력장애)으로 다음 사회적 불리(불이익, 장애)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손상은 신체적, 정신적 결함 그 자체를 의미하며 1차적 장애라고 한다. 기능제약(능력장애)은 손상으로 인하여 행동이 제약되거나 불가능해진 상태로 2차적 장애에 해당한다. 사회적 불리(장애)는 손상과 기능장애로 인하여 사회적으로 불이익을 받는 상태 즉, 장애로 인하여 그 시대 동년배의 시민들과 다른 부당한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사회에서 장애인을 얼마만큼 받아들일 수 있는 환경이 되어 있느냐의 여부에 따라 사회적 불리의 내용과 수준이 좌우되며, 3차적 장애라고 한다.다시 말해 장애인은 신체적, 정신적 결함이나 손상으로 일상생활 속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표현하고, 판단하고, 움직이는 등에 많은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장애인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불편한 것을 하나 또는 그 이상 달고 다니는 사람, 장애인이 아니라 장애를 가진 사람이다" 그러므로 장애인이라고 해서 자신의 주체성에 대해서 까지 회의를 가질 필요는 없다. 장애인. 틀림없이 그 말의 의미는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말 일 것이다. 그러나 이 장애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장애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진짜 장애인처럼 생활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장애인이란 말은 다시 구분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겉보기장애인과 완전장애인으로 말이다. 겉보기장애인이란 일단 신체적인 장애를 입어서 눈으로 보기에는 외형적인 장애를 갖고 있지만, 실제적으로 자신의 신체장애를 벗어나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내적으로는 장애를 전혀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을 겉보기장애인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겉보기장애인은 겉으로 보기에는 신체적인 장애를 가지고 있으니 장애인이 틀림없으나, 그의 생각이나 그의 행동은 더 이상 장애인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일상 생활을 하는데도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으며 일처리를 함에 있어서도 성취의욕을 가지고 일을 하게 된다. 사회 적응면에 있어서도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본인이 이 사회에 꼭 필요한 구성요소임을 느끼고 있으며 비장애인 속에서 함께 있기를 거부하지 않는다. 반면에 완전장애인은 겉으로 보기에도 장애인이 틀림 없고, 또 하는 행동이나 생각까지도 모두 완벽한 장애인의 모습과 장애를 벗어나지 못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완전장애인이라고 하자. 한 가지 예를 들어, 본인이 얼마든지 숟가락질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늘 남이 떠주는 밥을 먹는다면 그는 완전장애인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본인의 장애를 인정하고 그것을 극복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서 겉보기장애인이 되느냐 완전장애인이 되느냐가 결정된다고 생각한다.비장애인과 장애인 사이의 폭은 겉보기장애인과 완전장애인이 가져야 하는 폭에 비하면 훨씬 좁은 것이다. 달리 말해서 겉보기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의 차이는 거의 없으나 겉보기장애인과 완전장애인 사이의 차이는 매우 크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장애인이 된 후 그 신체장애를 고치기 위해 온갖 노력과 고생을 다한 것보다도 더 완전장애로부터 겉보기장애인으로 탈바꿈하기 위해 본인이나 보호자가 함께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겉보기 장애인은 겉보기와 달리 내실은 일반인과 다름없음으로 일반인과 같은 교육이 필요하며, 완전장애인에게는 교육을 통해 자신의 부정적 사고방식을 바로 잡아주고 성취의식을 고취시켜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장애인이라는 말이 무능력자라는 말과 동일하다고 여긴다. 번듯한 직업마저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부모가 살아있을 때는 부모에게 의지하여 살고 부모가 돌아가시고 나면 형제 등 친지들에게 얹혀서 살고 그것마저 불가능한 경우에는 수용 시설로 들어가 평생을 살 수 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 한 예로 장애인 고용 촉진법에 기업체에서는 고용인력 내 장애인 고용비율이 일정 비율이 되도록 법적으로 정하고 있다. 이는 그 업무가 장애와는 무관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법이 정해져 있지 않다면 장애인을 고용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역설적으로 포함한다. 여기에서에도 우리는 단편적으로 장애인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을 찾아볼 수 있다. 지체장애인의 경우 그것을 회복하려고 해도 완전히 회복될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상태에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만들고, 언어장애인일 경우 의사소통이 가능하도록 만들고, 정신장애인도 같은 맥락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요구된다. 이러한 장애의 상태는 개인에 따라 각각 다르며 그 원인도 다양하며 다루기가 매우 어렵다. 그리고 상당수는 이러한 사회의 시선 때문에 부모들이 숨기기도 하고 자기 집에 오랫동안 거의 감금 상태에 있다가 내놓기도 한다. 부모가 살아 있을 때에는 그래도 장애인을 돌보다가 부모가 죽고 형제들이나 친지들이 맡게 되면 말할 수 없이 어려운 경지에 들어가기도 한다.여기서 장애인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을 법적, 사회적 관점에서 한번 살펴보자. 첫째로 법적인 관점에서 장애인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을 살펴보자. 헌법에서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고 하여 민주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평등권을 보장하고 있다. 또한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고 하였고, 국가는 사회보장·사회복지의 증진에 노력할 의무를 지며, 또 모든 국민은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보유하고, 초등교육과 법률이 정하는 교육은 의무적이고 무상으로 하게 되어 있음이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 그러므로 장애인이라고 해서 교육에 있어 부당한 차별을 받은 이유가 없으며, 법이 말하는 차별을 받지 아니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정상인보다는 더 고려되어져야 하고 그래야만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사회복지는 교육과 그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사회구성원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해 사회문제나 사회적 욕구에 있어 국가가 나서야 하는 것이다. 물론 각각의 나라마다 정치, 경제, 역사, 문화, 이데올로기 등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사회복지의 실현방법이나 발전정도는 다르다. 그러나 장애인 복지의 기본 이념이 장애인은 인권을 가진 주체요, 복지서비스를 받을 권리 주체라는 점, 기회 평등, 사회에 통합된 상태에서 이웃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같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둘째 사회적 관점에서 장애인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을 한번 보자. 인간은 일하는 존재다. 인간은 누구나 일을 통해 진정한 자아실현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존재로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 보이게 된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일을 통해 인간으로서 기본적 생존권과 더불어 행복권을 향유할 수 있다.
1.老子♤노자의 전기와 저서 『노자』공자가 유가의 시조라면, 도가의 시조는 노자이다. 그러나 노자만큼 전기가 불분명한 인물은 없으며, 그 실재를 의심하는 설조차 있을 정도라고 한다. 노자의 전기로는 한나라 사마천(司馬遷)의 『사기』 노자전이 가장 오래되었다. 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노자는 초나라 고현(苦縣)사람으로 성은 이(李), 이름은 이(耳), 자는 백양(伯陽), 시호는 담(聃)이라고 한다. 주나라 왕실 수장실의 사서(司書)를 맡았는데, 어느 날 공자가 와 노자에게 질문을 하였다. 그러자 노자는 공자의 위선을 매도하고 곧 내쫓지만, 그래도 공자는 노자가 용처럼 뛰어난 인물이라고 감복하였다. 그런데 노자와 공자를 동시대인으로 다루고 있는 『사기』 의 내용에는 문제가 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노자』의 내용이 이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자』는 항상 대립자를 의식하면서 사리를 말하고 있다. 그 대립자란 세간 적인 상식의 도덕, 즉 유가의 도덕이다. 어떤 사상에 대해 반대 사상이 생겨난다는 것은 그 사상이 융성하게 된 후에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자의 사상은 공자의 그것보다도 후에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유교도덕이 이미 세간에 유력하게 되었던 시기에 『노자』가 출현하였던 것이므로 그것은 공자가 죽은 후, 상당한 세월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노자라는 인물이 실재(實在)하였다고 한다면, 공자보다도 후에, 그것도 훨씬 후의 사람이었다고 하는 것이 된다. 이와 함께 중요한 문제는 『노자』의 저자가 한 사람 이상이라는 점이다. 『노자』의 문자 중에는 전국시대에 광범위하게 행하여졌던 격언이나 속담이라고 생각되어지는 것이 적지 않게 포함되어 극단적으로 말하면 한사람의 자작이 아니고, 일종의 격언 집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현재의 『노자』는 도가 학파의 사이에 축재된 명언을 모은 것이고, 그 저자는 ‘무수한 노자들’이었다고 하는 것이 된다.그러나 반대로 『노자』에 대해서 보면설하는 것에 있었다. 따라서 국가는 이 농촌의 자연 상태를 지키도록 세심한 배려를 해야한다. 그러므로 노자는 소국과민(小國寡民)을 이상적인 단위로 생각하였다.“소수의 인민이 거주하고 있는 약소 국가에서는 병기(兵器)가 있어도 사용하지 못하세 한다. 백성들에게는 죽는 것을 큰 일로 생각게 하여 다른 지방으로 이사가지 않게 한다. 비록 군대를 가지고 있더라도 전쟁마당에 나아가지 않게 한다. 백성들은 다시 유사이전의 시대로 돌아가게 한다, 백성들에게 자기네들이 밭 갈아 지은 곡식을 달게 먹게 한다. 자기네들이 짜서 입은 의복을 훌륭하게 생각게 한다. 자기네들이 지은 집에서 편안하게 살게 한다, 자기네들의 풍속을 즐겁게 지내게 한다. 이웃나라끼리 서로 바라보고 닭이 울고 개가 짖는 소리가 서로 들려와도 백성들이 늙어 죽을 때까지 왕래하지 않는다.”이것이 노자의 자연주의 사상의 출발점으로 된 것이다. 그가 주장한 무지무욕(無知無慾), 그리고 무도덕(無道德), 무예의(無禮義),와 같은 것들은 이와 같은 소국과민의 이상향을 배경으로 해서 생긴 것이다. 그러한 생각은 중국의 전통적인 촌락공동체를 기본으로 해서 생겨난 것이다.②지식의 부정-체험적 가치의 존중노자는 지식, 욕망, 기술, 도덕 법률 등 모든 문화의 내용을 부정해서 태고 자연 그대로의 농촌 생활로 돌아가자고 주장한다. 그러면 왜 지식이나 욕망 등이 부자연한 것일까? 우선 지식에 대해서 보면 ‘안다’는 것의 본질은 物을 ‘나눈다’하는 것에 있다. 판단은 사물을 반으로 분단하는 것이고, 분 것은 사물을 나누어 쪼개는 것이고, 이해는 사물을 사리 있게 분해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의 것을 그대로 ‘안다’는 것이 불가능해서 반드시 이것을 둘로 나누는 것에 의해서 비로소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노자는 만물의 근본이 되는 진리를 ‘도(道)’라고 부르는데 이 도는 ‘一’이라고 명명한 것이 많다. ‘하나’는 분할을 허락하지 않는 전체이고, 분할을 본질로 하는 지식으로는 포착 할 수 없는 것이다. 노자는 지식에 의해 포착되지 않는가기 위해 노자는 不自然의 근원인 인위의 제거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노자의 책에 무지무욕을 비롯해서, 무극(무극), 무명(무명), 무물(무물)등의 무가 계속해서 많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줄어가서 또 줄어간다."라 하는 부정의 끝에 도달하면 그것은 무가 된다.보통 '무'라고 하면 아무 것도 없는 상태이고 그로부터는 어떠한 적극적인 움직임도 나오지 낳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곧 무위이다. 그런데 노자는 "無爲而無不爲"라 하여 무위이면서 만능의 작용을 한다고 한다."천하의 만물은 유에서 생기고, 우는 무에서 생긴다.""하늘과 땅 사이에는 공허하며, 마치 대장간에 있는 풀무와 같다. 그 속이 텅 비어도 끊임없이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한없이 바람이 나온다."천하의 만물은 천지라고 하는 유에서 생긴다. 그러나 천지라고 하는 유, 그것은 무에서 생긴다. 그렇다면 무야말로 만물의 시작이고, 만물을 낳는 근원이가. 만약 무에서 유가 생기는 것을 의심하는 자가 있으며, 저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무한한 공간을 보라. 하늘과 땅 상이는 무인 것이, 마치 대장간에 있는 풀무가 공간에서 무한의 공기를 보내는 것처럼 무한의 만물을 낳지 않는가? 그렇게 보면 무가 만유를 낳는 위대한 힘의 원천인 것을 알 수 있다.2.荀子♤순자의 전기유가의 순자(B. C 300∼B. C.255)는 성은 순(荀) 이름을 황(況)이라 한다. 후대의 문헌에는 순경(巡更)이나 순경(孫卿)이라고 쓰여진 것도 있는데 이것은 荀과 孫, 況과 卿이 음이 통하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순자의 생존시대는 맹자의 만년 혹은 죽은 직후에 시작하고 진나라 시황제의 즉위 직전에까지 걸친다고 추정된다. 그는 조국(趙國) 출신인데 각지를 유세해 만년에는 초국(楚國)의 난릉현의 장관이 되었다가 이윽고 물러나서 생애를 끝마쳤다.♤순자의 사상①예치주의-유가의 한계선상에 선 순자순자의 정치설(政治說)의 중심은 무엇보다도 禮를 중시하는 것이었고 예치주의를 제창한 것에 있다. 공자는 도덕에 의한 정치를 강조하여 덕치주의를 제창하지만 그러나대해 爲 즉, 人爲는 이 소재를 가공해서 아름답게 사물을 조작하는 것이다. 만약 인위의 가공이 없다면, 자연의 性은 아름다운 물건으로 될 수 없지만 그러나 소재가 될 性이 없다면 人爲도 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성과 인위가 합해지는 것에 의해서 비로소 聖人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이 설(說)에 의하면 성(性)은 악(惡)이 아니고 가치 중립적인 것이다. 더욱 人爲를 실시하기 위해서는 필수 불가결한 소재가 된다.또「正名篇」에는 다음처럼 말한다. 세상에는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무욕이나 과욕(寡欲)이 필요하다고 설명하는 노자가 있다. 그러나 욕망은 천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고 없거나 적다고 하는 것이 가능하다 해도 도리어 다욕(多欲)에 빠질 위험이 있다 대개 욕망의 다소는 개인의 성격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국가의 치란(治亂)과는 관계가 없다. 정치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욕망을 없앤다거나 적게 하는 것이 아니고 욕망을 조절하는 것, 요컨대 절욕(節欲)에 있다라고 한다 여기에서도 자연의 욕망은 악한 것이 아니고 가치 중립적인 것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따라서 순자의 성악설은 이것을 문자그대로 해석해서는 안 되고 그 진의는 자연의 性이 선한 것이 아니고 가치 중립적이 것이고 이것을 조절하고 수식하는 人爲의 禮에 높은 가치를 인정한 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③天은 人을 다스릴 수 없다-天에 대한 人의 우위이처럼 순자의 성악설은 인간의 본성이 가치 중립적이라고 주장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러나 성선설이 아니었던 점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여기에 또 새로운 문제가 발생한다. 앞서 맹자의 성선설이 그 범신론적인 세계 요컨대 천이 인간의 내부에 존재하여 천성으로 된다는 견해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고 서술했었다. 범신론적인 천에 의하는 한 선은 인간내부에 있는 천이고 선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자가 性善說을 부정하는 것은 그의 天에 대한 견해가 전통적 견해와 다르기 때문은 아닐까?한마디로 말하면 天은 자연이고 인위를 본질로 하는 인간과는 명확히 구별되어야 하는 것이다. 순자도 전제로 한비자를 빼앗았다. 시황제는 크게 기뻐하였지만, 이것을 본 이사는 "한비자는 한나라의 공자이므로 결국은 진나라를 위해서는 움직이지 않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한비자를 죽여버리는 것이 상책입니다"라고 전하여서 시황제는 부득이 한비자를 투옥하였다 후에 시황제는 생각을 고쳐 사면하고자 하였지만 그때는 이미 이사가 한비자에게 독약을 주어서 죽여버렸다고 한다.♠ 한비자의 사상①도덕에 대한 법의 우위한비자가 배움을 받은 순자는 예에 중심을 두었다고 하지만 유가의 사람이었을 뿐 도덕을 부정할 정도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한비자에 이르러 여러 가지 각도에서 법의 도덕에 대한 절대적 우월성이 강조된다. 첫째로 유가의 주장처럼 도덕에 의한 정치라고 하는 것은 인구가 적고 생활이 편안하였던 고대에서만 효과를 거두는 것이고 인구가 증가해서 생존경쟁이 치열한 시대에는 통용되지 않는다. 옛날의 사람들에게 도덕심이 강하였다고 하는 것은 재산이 풍부하였기 때문이고 현재의 사람들이 재산을 다투는 것은 도덕심이 저하되었기 때문이 아니고 재산이 결핍된 결과이다. 이처럼 경쟁이 격심한 시대에는 더덕은 쓸모 없고 오로지 법에 의해 다스릴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가에 나오는 고대의 堯舜처럼 성왕의 시대에 유효했다고 하는 이유에서 지금까지도 도덕정치의 필요를 고집하는 것은 시대의 변화를 알지 못하는 처사이다.둘째로 도덕은 소수에게만 통용되는 원리이어서 다수에게 적용할 수는 없다. 본디 도덕을 지키는 사람은 한나라에서 10사람 있으면 좋은 정도에 지나지 않는데 이 같은 소수자의 원리를 한나라라는 다수 자에게 적용하고자 하는 것에 근본적인 무리가 있다.본디 다수 자에게 착한 일을 행하게 하고자 할 경우에는 절망적이 곤란을 수반하지만 악한 일을 못하게 하는 것은 쉽다. 예컨대 길에 떨어져 있는 물건을 주우면 사형에 처한다는 법률을 만들면, 길에 백냥의 금이 떨어져도 이것을 줍는 것은 붉게 달은 철을 손으로 잡는 거소가 똑같으므로 대도라 할지라도 손을 내밀지는 않을 것이다.도덕은 인정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