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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정]제2공화국
    제 2공화국의 행정조직과 의회1. 제 2공화국의 성립과정(1) 이승만 정부의 붕괴제 1공화국의 붕괴의 직접적 계기는 1960년에 있었던 3?15 부정선거 때문이었다. 제 1공화국정부의 집권 여당이었던 자유당은 이반되어 가는 민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국회를 장악하면 국정을 마음대로 이끌어 갈 수 있다는 생각에서 의원을 선출하는 총선거에서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감행하였다.제 1공화국의 붕괴는 이미 1958년에 있었던 몇 가지 사건들에서 잘 감지될 수 있었다. 1958년 1월 정부여당은 조봉암이 이끌었던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을 국시위반으로 규정하여 52년, 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의 대통령 후보로서 이승만 대통령과 맞써 싸웠던 조봉암을 사형에 처하였다. 그런가하면, 1958년에 5월에 치뤄진 총선거에서도 유례없는 폭력과 부정선거가 집권여당인 자유당에 의해 실시되었다. 그리고 자유당은 1960년의 정,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심의 이반을 막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야당과 언론을 강력하게 규제하기 위하여 1958년 8월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이 개정안은 1948년에 제정된 국가보안법에 대하여 이적행위 개념과 적용대상을 확대하고, 위반자에 대한 처벌규정을 강화한 것이었다.1958년 12월 자유당은 국회 법사위에서 야당의원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보안법 개정안을 날치기로 통과시킨데 이어, 본회의에서도 무장경관들이 에워싼 가운데 경위권 발동을 통하여 농성 중인 80여명의 야당 의원들을 끌어내고 국가보안법 개정안뿐만 아니라 지방자치법 개정안과 예산안까지 무더기로 통과시켰다. 1959년 4월에는 당시 일간지 가운데 두 번째로 많은 발행부수를 기록하면서 정부여당에 대하여 가장 비판적 논조를 펼쳐 오던 경향신문을 폐간 조치하기도 하였다.4월 시민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3?15 부정선거는 정부여당이 행정공무원 뿐 만 아니라 경찰과 군부까지 동원하여 사전에 철저히 준비한 대대적인 부정선거였다. 투표 당일인 3월 15일 마산에서의 학생 및 군중데모로 시작된 부정선거 규결과를 성명으로 공표하였다. 성명 내용은 대통령직을 하야하고, 부정선거의 책임자를 모두 문책하겠으며, 재선거를 실시하고, 필요하다면 내각책임제로 개헌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사임결심과정에서는 미국의 회유와 압력도 컸던 것으로 밝혀졌다.4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은 사직서를 국회에 제출하고, 마침내 하야성명을 발표하였다.(2) 제 2공화국의 수립학생들이 주도한 4.19의거로 1공화국이 붕괴되고 약 4개월간의 과도기를 거쳐 등장한 체제가 2공화국이다. 1960년 4월 26일 국회는 허정 외무장관에게 과도내각의 조각을 요청하고, 27일 이승만 대통령의 사임서를 즉시 수리하고 허정 장관에게 대통령직 권한대행을 위촉하였다. 그리고 28일 과도내각회의가 개최되어 허정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정부가 들어섰다. 과도정부 아래서는 제 2공화국의 기틀을 마련할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국회에 제출되고 본회의에 상정되어 6월 15일 압도적 지지로 통과됨에 따라, 과도정부는 7월 총선거를 실시한다고 확정 공고하였다.내각책임제를 중심으로 개정된 헌법에 따라 1960년 7월 29일에 이루어진 총선거에서 민주당이 민의원 총 의석수 233석 가운데 175석(75.1%), 참의원 총 의석수 58석 가운데 30석 (51.7%)을 각각 차지함으로써 국정의 원활한 수행에 충분한 의석 수를 확보하였다. 이어 동 8월 12일 양원합동회의가 소집되어 재석 의원 259인 중 208표의 절대다수로 민주당 구파 출신의 윤보선 의원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며, 즉시 윤대통령은 동 17일에 김도연 의원이 국무총리인준이 부결되자 동 19일 신파인 장면의원을 국무총리로 지명하여 민의원의 인준을 받게 되어 그에게 제 2공화국의 조각을 맡기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참의원과 민의원의 양원으로 구성된 내각책임제의 정부형태를 띤 장면정권인 제2공화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제 2공화국 정부하에서는 신파와 구파간의 정치적 파쟁이 첨예하게 이루어졌고, 이러한 파쟁은 제 2공화국의 구명을 단추기킨 결정적 계기가 되기도 하였5명 이내로 구성하되 과반수를 국회의원으로 채우도록 규정했다. 국무원은 민의원 해산권을 갖는 대신, 민의원에 대하여 연대책임을 지도록 규정하여 권력의 균형을 도모하였다. 그리고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의 법률안 제출권과 국회 출석?발언권은 계속 유지되었다.(3) 국회국회는 민의원과 참의원의 양원제로 구성되었다. 민의원이 국무원 불신임권을 갖는 반면, 국무원도 민의원 해산권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국무원의 민의원 해산권이 엄격하게 제한되었다고 하더라도, 국회의 정부에 대한 불신임은 정부의 국회 해산권 발동을 의미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국무원의 민의원 해산권은 국회의 불신임으로부터 정부의 안정성을 보장하기 위한 장치라고 할 수 있다.(4) 법원제 1공화국에서 경험했던 법관임명제의 정치적 남용을 방지하고 사법권의 독립을 보장하기 위하여, 법관의 선거제를 도입하였다. 이에 따라 대법원장과 대법관은 법관의 자격이 있는 자로 구성되는 선거인단에서 선출하도록 하고, 그 밖의 법관은 대법관회의의 결의에 따라 대법원장이 임명하도록 하였다.(5) 헌법재판소헌법질서의 위협에 대한 사법부의 통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헌법재판소를 설치하고, 법률의 위헌심사와 헌법의 해석을 통한 헌법보장 기능뿐만 아니라 탄핵심판권과 정당해산에 대한 재판권도 부여하였다.3. 제 2공화국의 정부제도와 정책(1) 의원내각제제 2공화국 정부는 고전적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다. 입법부와 행정부 사이에는 의회의 다수당이 행정부를 장악하는 권력의 융합이 이루어졌다. 헌법상으로는 국회는 내각에 대하여 불신임권을 행사할 수 있었고, 행정부 역시 국회를 해산할 수 있었다.(2) 정당제 2공화국 헌법의 주요 내용을 보면, 제 1공화국에서와 같이 권력에 의한 정당의 자의적 해산을 막기 위해 정당 조항을 신설하였다. 정당은 국가적 보호를 받게 되어 있었고, 그 목적이나 활동이 민주적 헌법의 기본질서에 위배되는 경우에 한하여 정부가 대통령의 승인을 얻어 소추하고 헌법재판소의 판결로 해산이 가능하게 제한하였다. 제 1공화국 부정선거의생하였다. 민주주의가 제 2공화국 정부의 최고의 정치적 정당성의 근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민주당 정부는 출범과 함께 민주적 원칙과 절차를 강조하면서도, 국토개발과 경제부흥을 위한 경제제일주의를 국정의 주요 목표로 표방하였다. 민주당 정부는 경제 분야에서 자유당 정부 말기에 입안한 경제개발계획을 재수립하였고, 농민과 근로자 생활수준의 향상, 특히 실업자 문제를 해결하는데서 경제문제의 실마리를 풀어가고자 하였다. 1960년대의 한국 농촌의 절량농가의 문제와 만성적인 도시의 실업사태를 우선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국토건설사업’을 착수하는데, 이 사업은 절량농민과 노시 실업자들에게 일감과 생활물자를 제공하는 동시에, 그들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별도로 수립되는 종합적인 경제개발계획의 토대가 될 기초공사를 완성한다는 양면적인 효과를 노린 것이다.그러나 장면정부의 경제건설에 대한 이러한 의욕과 계획성에도 불구하고 실현가능성은 시작부터 여러 가지 문제점을 지닌 것으로 지적되었다. 즉 국토건설사업만 하더라도 재원은 한국군을 10만으로 감군하여 국방비를 절감함으로써 확보하고,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원조나 차관을 도입하여 조달한다는 것이었는데, 이 정책은 당시 국내외의 여건으로 보아 매우 힘든 재원조달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일본정부가 한국의 내정이 불안하다고 판단, 장면정부와 협상하기를 주저함에 따라 모든 것은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5) 통일정책제 2공화국의 민주당 정부가 시행하거나 표방한 정부시책 가운데 제 1공화국의 자유당 정부와 가장 큰 차이가 나는 것은 통일정책이었다. 이승만 정부는 공식적으로 북진통일과 무력통일을 표방하였다. 이는 북한이 표방한 남조선인민해방에 대한 정치적, 수사학적 대응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북진통일정책은 허정의 과도정부가 출범하면서 공식으로 포기되었고, 장면의 민주당 정부 역시 이러한 정책을 기조로 유엔 감시하에 총선거를 통한 통일 정책을 표방하였다. 당시 학생과 진보적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주장한 남북한 교류와 평화통일 그리고 자주, 평화, 민 일각에서 관련피고들의 ‘면소론’을 들고 나오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 면소론을 둘러싼 논쟁은 재판과정을 지연시키는 가운데 민주당 정부가 들어선 9월 이후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 문제는 민주당 정부가 당면한 가장 시급하고도 까다로운 정치적 현안이었다고 볼 수 있다.결국 그 해 10월 8일 있었던 선거공판은 검찰 측의 구형보다는 훨씬 가벼운 형량의 판결이 내려지게 되었고, 이는 격렬한 규탄데모를 촉발시켰다. 각종 사회단체가 경악과 분노를 금하지 못한다는 반응과 더불어 부정선거원흉들과 발포책임자들을 엄벌할 수 있는 특별법의 제정을 당장 서두를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10월 8일부터 가두시위로 시작한 일부 학생들과 시민들의 데모는 마산, 대구 등 대도시로도 번져나갔으며, 규탄의 표적은 당초 재판부였으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행정부와 국회 쪽으로 그 화살이 옮겨갔다.10월 11일에는 국회의사당 앞에서 데모를 벌이던 4.19 부상학생들과 유족들, 이에 합세한 시민, 학생들이 의사당에 난입하여 의사당을 점거하는 불행한 사태까지 발생, 결국 민의원의 개헌작업이 급속도로 추진되었다. 이로써 구체적인 실정법의 제정을 위하여 부정선거 관련자처벌법, 부정축재자특별처리법, 특별재판소 및 특별 검찰부 설치법, 공민권제한법의 4가지 법안의 작성을 추진하였다. 소급입법의 개헌안은 11월 23일 가결, 공포와 동시에 시행되었다.4. 제 2공화국의 정당정치제 2공화국은 4?19민주화혁명으로 자유당정권이 퇴진하고 제1야당이던 민주당에 의해서 정국이 운영되던 공화체제였다. 4?19혁명 후 과도국회에서 헌법을 개정하기 이전부터 그 주도세력인 민주당은 의원내각제로의 개헌을 주장해왔으며 결국 영국식 의원내각제를 모방한 헌법 개정안이 6월 15일 압도적 다수로 가결되어 그 날로 공포되었다. 이는 4?19혁명의 이념과 기본정신인 가장 풍요로운 자유와 민의와 민권이 존중되는 민주정치의 구현 및 그것을 통한 부정부패가 없는 정의사회의 실현이 보장되는 참다운 민주주의의 정착을 충실하게 반영하는 체제를 정치권에서 된다.
    사회과학| 2005.10.11| 7페이지| 2,000원| 조회(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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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정]전자민주주의에 있어서 정보격차와 그 해소방안 평가D별로예요
    -전자민주주의에 있어서정보격차와 그 해소방안-1. 서론1995년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정보고속도로의 구축을 강력히 추진하고 있음은 물론 정보화 사회의 실현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온라인 서비스나 인터넷에 연결되어 사용할 수 있는 개인용 컴퓨터의 보급으로, 대중은 국내와 국외 정보를 대량으로 얻고 있다. 정보 기술의 발달은 세계인들과의 정보교환은 물론 사상과 경험의 교환 및 새로운 정보에 대한 호기심의 충족을 가능하게 하였다. 또한 정보 기술의 발달로 사람들은 보다 나은 서비스와 높은 생활수준 그리고 표현의 자유까지 영위하게 되었다.정보 기술과 서비스는 정치 과정에 있어서의 공공의 참여와 인식을 증대시키는 역할도 수행한다. 온라인 서비스들은 정부의 개방화에 이바지하였다. 전국적 정보기반을 바탕으로 한국정부는 문화적으로나 각 지방에 따라 시민들의 정부정책에 반응이나 의견, 사회적 여론을 파악하기 위하여 전자민주주의를 실험하였다. 또한 기초단계에 있기는 하지만 여러 사회 조직들은 전자민주주의를 시행하고 있는 실정이다.2. 전자민주주의(1) 전자민주주의 개념전자민주주의는 정보화와 민주주의가 결합되면서 형성되는 민주주의의 새로운 형태로서 정보통신기반의 이용을 통하여 정치과정에 대한 시민의 참여가 이루어지는 정보사회의 민주주의로 개념 지울 수 있다. 즉, 국민과 정책결정자 사이의 정책결정 관련 정보와 의견의 전달을 돕는 의사소통 기술의 운용을 의미한다. 전자민주주의가 직접민주주의로 간주되는 경우도 있으나 전자민주주의가 지금의 대의민주주의를 대체하는 직접민주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정보통신기반의 변화로 인해 기존의 민주주의가 ‘정보화’되면서 변화를 겪게 되는데, 기존 민주주의의 변화된 모습 혹은 부분을 전자민주주의로 표현하는 것일 뿐이다. 기존의 민주주의와 전자민주주의가 뚜렷이 구분되는 것은 아니며, 정보화가 계속 진행 중인 것과 같이 전자민주주의도 계속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2) 정부의 전자민주주의 사례① 알림마당이 서비스는 시민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44개의 중앙 정부 부서들의 정보를 전자적으로 관리하게 위해 1995년에 설치되었다. 이 서비스의 두 가지 목표는 첫째, 정부활동과 정책을 국민들에게 홍보하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국민의 여론을 파악하기 위해서이다. 총무처는 국민들에게 직접 정부 정책을 홍보할 수 있는 열린 정부라는 프로젝트를 실시하였으며, 일반 국민들이 자유로이 자신의 의견을 게재할 수 있는 방법도 구상하고 있다. 이 서비스에서는 일일주요뉴스, 주간주요뉴스, 데이터검색, 토론과 정책에 관련된 질문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② 사이버 파티이 웹 사이트는 국회의 특수한 전자민주주의 포럼이다. 사이버파티는 국민들과 관련 분야 전문가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피력하고, 입법 활동에 관해 비판적 시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데 그 목표를 두었다. 또한 직접민주주의의 효율성을 반영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 서비스에서는 대선 후보의 신상 관련 정보, 정치 의견, 열린 포럼과 소식지를 포함하고 있다.③ 열린 정부이 PC 온라인 서비스는 정부와 국민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 정부의 중요 정책을 홍보하며, 여론의 파악, 정책 결정의 국민 참여 등을 도모하기 위하여 구축되었다. 열린 정부 사이트는 정부 문서와 경제 ? 법률 정보를 수록하고 있는 공공 데이터베이스, 국민들이 사회 복지 정책 ? 주택 문제 ? 법률 문제 ? 세금 등과 같은 문제를 정부 공무원과 함께 상담, 그리고 정부 정책 활동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대화실도 개설하였다.3. 전자민주주의에 있어서 정보격차(1) 우리나라 정보격차의 현황우리나라 소외계층의 정보격차는 예상보다 심각하다. 한국전산원이 농어민·전업주부·고령인구 등 일반인과 장애인을 대상으로 2000년 8월 한달동안 조사 분석한 「소외계층 정보화를 위한 정보격차 실태조사」에 따르면 일반인 정보취약집단과 장애인 정보취약집단 응답자의 48%인 절반가량이 인터넷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거나 들어본 적이 있더라도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30% 이상의 응답자가 인터넷을 한번 이상 들어봤으나 내용을 조금밖에 모른다고 답한 것으로 조사됐다.컴퓨터 보유 여부를 조사한 결과 일반인 정보취약집단의 경우 이미 56.3%가 컴퓨터를 보유하고 있으며 장애인 정보취약집단도 응답자의 42.8%가 컴퓨터를 소유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또 컴퓨터를 현재 보유하고 있지 않으나 컴퓨터를 구입할 의사가 있다고 응답한 사람이 49.4%에 달해 기반 인프라는 어느 정도 구비됐거나 구비할 의사가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정부의 정보격차 해소 정책에 대한 인지도도 대체로 낮아 일반인 응답자의 46.0%만이 「주부인터넷교육사업」에 대해 알고 있었으며 「인터넷 컴퓨터 보급사업」은 47.9%,「무료인터넷교육장 운영사업」은 33.0%만이 인지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장애인 응답자의 경우는 더욱 낮아 「주부인터넷교육사업」은 24.1%,「인터넷 컴퓨터 보급사업」은 23.9%,「무료컴퓨터교육장 운영사업」은 29.7%만이 인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또 인터넷을 이용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사용할 줄 모른다」는 응답이 일반인은 47.2%, 장애인은 27.3%로 나타났다. 그 다음 이유로는 일반인 정보취약집단의 경우 「이용할 필요가 없다」였으나 장애인 정보취약집단은 「신체적 조건 때문」이라는 의견이 비교적 많았다. 따라서 장애인을 위한 정보화시설 보강과 정보화취약집단을 대상으로 한 정보화교육의 확대가 시급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정보화와 관련한 지역접근센터에 대해서는 일반 및 장애인 정보화취약집단이 각각 59.9%, 69.0%로 비교적 선호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정보화교육의 기회가 주어지면 참여하겠다고 응답한 사람도 일반 및 장애인 정보화취약집단이 각각 62.5%와 70.3%로 높은 수치를 보였다.(2) 정보격차의 중요성많은 사람들이 ‘정보가 돈’이라고 말한다. 정보와 지식에 의해 부가 결정되는 지식정보시대가 되면서 그것은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거나 정보접근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부를 독점할 수 있고, 반대로 그렇지 못한 사람은 가난을 면하기 어렵다. 이러한 점에 비춰보면 앞으로는 정보격차는 곧 소득격차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특히 인터넷의 이용이 확대되면서 정보격차에 따른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사회통합 면에서도 정보격차 해소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국가적인 과제다. 디지털 정보이용이 능숙한 신세대와 그렇지 못한 구세대간에는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또 초고속망이 구축된 지역과 일반 전화망을 통해 정보접근을 시도해야 하는 지역간에도 장벽이 생기게 마련이다. 이러한 상황에선 사회 전반적인 통합은 기대하기 어렵다. 정보화 취약계층이 경제적, 신체적, 지역적 조건에 제약을 받지 않고 보다 많은 정보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지 않고선 계층간, 지역간 사회적 통합을 실현할 수 없다. 이뿐 아니라 정보취약계층의 존재는 정보사회 구현의 걸림돌이 되고, 국가의 효율성을 저해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이러한 정보격차가 일어나는 이유에는 경제적인 면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며, 사회·문화적인 요소도 빼놓을 수 없다. 컴퓨터를 사용할 줄 모르거나 인터넷을 통한 정보접근의 필요성이나 중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정보격차는 생기게 마련이고, 이들은 정보소외계층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노인, 주부, 농어민, 장애인 등과 같은 사람들이 정보소외계층에 속한다.사실 지역이나 학력, 성별, 나이, 소득수준에 따른 정보격차는 분명히 존재한다. 정보기술이 없어지지 않는 한 앞으로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이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 정보격차 해소가 국가경쟁력을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가 되기 때문이다.4. 정보격차 해소방안① 컴퓨터의 보급과 인터넷 케이블 사용료 지급 확대정보소외계층들이 정부의 전자민주주의를 따라 가지 못하고, 정보를 제대로 얻지 못해 정보격차가 생기는 이유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부분이 경제적인 면이다. 농어민, 장애인, 노인, 주부들은 인터넷을 활용하고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얻고 싶어도 컴퓨터를 살 능력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인터넷이 있다고 하더라도 인터넷을 사용하기 위해 케이블을 설치해야 하는데 한달에 몇 만원씩 인터넷 케이블 사용료를 낼 여건이 되지 못한다.현재 정부가 인터넷을 보급하기 위해 컴퓨터가 없는 소외가정에게 컴퓨터를 보급하고 있지만, 그 물량이 너무 적을 뿐만 아니라 몇 %의 비용을 지급해야 하기 때문에 경제적 여건이 부족한 소외가정에서는 정부가 제공하는 컴퓨터를 거절하기도 한다. 또한 장애인에게는 인터넷 케이블 사용료를 30% 할인해 주기는 하지만 할인을 받은 사용료의 금액도 정부보조금으로 생활하고 있는 장애인들에게는 많은 부담이 된다.따라서 정부는 소외계층들에게 보급하는 컴퓨터의 물량을 보다 많이 늘리고, 소외계층들이 경제적 부담 없이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도록 인터넷 사용료의 지급을 확대해야 할 것이다. 즉 정보격차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보다 많은 재정적 지원이 있어야 할 것이다.② 컴퓨터 및 인터넷 교육 실시 및 홍보주부 ? 장애인 ? 노인 ? 농어민 즉, 정보소외계층들은 인터넷을 이용하고 싶어도 컴퓨터를 어떻게 사용할지 몰라 인터넷을 활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인터넷에 대해서 들어본 적은 있지만 주위에 컴퓨터 사용법과 인터넷 이용법에 대해서 가르쳐 주는 사람도 거의 없을 뿐 더러, 컴퓨터 및 인터넷에 대한 일반적인 기초 지식이 없기 때문에 정보격차는 더욱 커지게 된다.
    사회과학| 2005.10.11| 5페이지| 1,500원| 조회(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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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정]CI의 전략과 내용
    -CI(Corporate Identity)의 전략과 내용-1. CI의 유래와 개념CI란 용어는 Corporate Image의 약자로 Corporate Identity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뉴욕의 CI 전문회사 L&M의 월터 머큘리즈로부터 출발하였다. CI는 1930년대 미국에서 기업이미지 도입으로 시작되었고, 1950년대에는 경영확대의 개념으로 코카콜라, IBM에서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인식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70년에 대기업과 은행 등에서 CI가 도입되어, 1980년대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CI의 작업이 활발해 지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CI란 기업 정체성 확립을 목적으로 기업의 모습을 전략적 ? 체계적으로 통일하는 작업으로,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통일시키는 기업 전략을 말한다. 즉, CI란 기업이 지향하는 가치를 표현하고 공유하기 위한 작업인 동시에, 기업이 환경 변화에 적절히 대응해 가기 위한 전략적 경영으로서, 기업이미지 통합작업 ? 적극적 마케팅 활동 ? 경영환경을 개선을 위한 커뮤니케이션 활동이다. 또한, CI는 정보화 시대에 대응하여 기업의 존립기반을 확립하는 동시에 기업의 미래전략을 구축하고 수행해 가는 경영전략으로서, 그리고 기업을 하나의 살아있는 인격체로 보아 고유의 문화 풍토를 창조하면서 미적인 경영을 지향하는 정보화시대의 경영전략으로 인식되고 있다.2. CI와 기업이미지기업이미지는 '사람들이 그 기업을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그런데 기업에 대한 인식과 평가는 사실과 다를 수 있다. 뛰어난 실력을 갖추었는데도 불구하고 부정적인 기업이미지 때문에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생긴다. 그렇기 때문에 CI의 궁극적 목적 중 하나는 대중으로 하여금 기업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갖도록 하는 것이다.'좋은 이미지'가 가져오는 효과는 상당히 크다. 먼저, 좋은 이미지를 가진 기업은 소비자에게 우선적으로 선택된다. 느낌이 좋은 기업의 제품이나 서비스에 대해서는 다소 비싸더라도 흔쾌히 비용을 쓰는 것이 요즘 소비자이다. 따라서 좋은 이미가진 기업은 높은 설득력을 가진다. 평소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기업이 던지는 메시지에 대해서 소비자는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이게 되며, '과연'이라는 평가를 한다. 좋은 이미지를 가진 기업의 제품과 서비스는 실제 사실보다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가 쉬워진다. 셋째로, 좋은 이미지를 가진 기업은 실수에 대해서도 관대하게 용서받을 수 있다. 한번 확보한 소비자의 호의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이다.따라서 기업의 이미지는 단지 추상적이고 막연한 대상이 아니라, 기업의 실제 매출을 결정짓는 중요한 에너지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기업이미지를 키우고 또 유지하는 데 CI전략은 필수적이다. CI는 곧 기업의 모든 역량을 하나로 통합하여 외부와 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도록 시각화한, '기업의 얼굴'이기 때문이다.3. CI 기본 시스템(1) 기업명(Corporate Name)기업명은 CI의 가장 핵심요소로, 기업이념·사업방향·미래에 대한 전망이 응축되어 있고, 부르기 쉽고 기억에 남으며, 현대감각과 친근감이 들어야 하고, 타사와 혼동되지 않으며, 모든 언어로 부르고 표기할 수 있으며, 짧을 것 등을 요소로 한다.(2) 코퍼레이트 심볼 마크(Corporate Symbol mark)심볼 마크는 기업의 이념과 비전이 함축적으로 담겨져 있는 기업의 얼굴이라 할 수 있다. 모든 디자인 요소 중에 기준이 되는 것으로 기업의 이름이 아닌 심볼의 형태만으로도 기업임을 알 수 있다.(3) 코퍼레이트 로고타입(Corporate Logotype)기업의 정식 명칭을 시각화 한 것으로 독창적이고 잊혀지지 않는 형태여야 한다. 보통 영문 로고타입과 국문 로고타입의 두 종류로 디자인을 하게 되며 최근에는 심볼 마크가 없는 로고타입으로만 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 워드마크(Wordmark)라고 한다.(4) 코퍼레이트 색상체계(Corporate Color)이것은 기업의 이미지를 나타내는 전용색상을 체계적으로 확립하는 것으로서, 코퍼레이트 심볼과 로고타입을 중심으로 많은 응용디자인에 적용된다. 이것은 규정에시그니춰(Corporate Signature)심볼마크와 로고타입 등 기본 시스템의 각종 요소를 상하조합, 좌우조합, 변형조합 등의 방법으로 효과적으로 조합한 것으로, 이를 이용하여 각종 서식류나 시각매체에 적용시킨다.(6) 코퍼레이트 전용서체(Corporate Typographic)기업에서 사용되는 문건이나 양식에 들어가는 모든 서체를 동일화하는 작업으로, 국문과 영문전용서체를 만들어 사용한다.(7) 코퍼레이트 마스코트(Corporate Mascot)마스코트는 기업의 홍보에 있어서 대리인으로 내세워 소비자로 하여금 좀더 친숙하게 접근하여 기업의 인지도를 높이는 역할을 한다. 모든 행사와 이벤트 등에 다양한 방법으로 사용되며 일반적으로 캐릭터라고도 알려져 있다.(8) 코퍼이레트 슬로건(Corporate Slogan)슬로건은 기업, 제품, 캠페인을 대표하거나 수식하는 메시지라고 말할 수 있다.4. CI의 필요성CI는 보이지 않는 기업의 이미지를 구체화시키는 기업의 얼굴이다. 즉, 소비자에게 통일된 이미지로 바로 떠오를 수 있게 하는 전략인 것이다. 소비자에게 좋고 친근한 이미지나 브랜드는 기업 이미지를 우호적으로 인식시킬 수 있고 그럼으로써 기업의 매출로 쉽게 연결될 수 있다.CI의 필요성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첫째, 기업 활동의 다각화로 기업 규모가 확대되면서 기업의 관점에서 기업 전체를 컨트롤하는 전략적 계획으로 기업 이미지 확립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둘째, 제품의 라이프 사이클이 짧아지면서 단일 품목에 따른 브랜드 아이덴티티 차원을 넘어 기업 차원에서 전제품을 경영 관리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CI가 필요하게 된다. 셋째, 경쟁력의 심화로 상품을 구입할 때 배후에 존재하는 기업 이미지가 구매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기업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한 CI가 필요하다. 넷째, 기업 구성원의 의식 구조의 변화에 따른 근무 환경의 개선 및 경영 방법의 혁신이 필요하면서 계획과 조직의 활성화를 위한 방안으로 CI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기업의 미래에 대한로 전달하기 때문에 기업과 제품에 대한 인지도를 증대 시킬 수 있다. 이러한 인지도는 그룹을 기억하게 하는 효과와 함께 장기적으로 영업 기반을 구축하는데 용이하게 작용할 수 있고, 경쟁업체와의 차별화를 가질 수 있다. 또한, CI는 기업에 대하여 갖는 의견과 태도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유도 시킬 수 있어서, 기업 내적으로는 새로운 기업문화를 창출하고 전사원의 단결심과 근무의욕을 고취 시킬 수 있고, 기업 외적으로는 차별화를 통한 고객의 신뢰감 및 인지도 상승으로 신규고객 확보 및 매출이 증대됨은 물론, 사업 부문의 체계화로 미래 사업으로의 전개가 용이하다.하지만, 이러한 CI가 단순히 로고나 브랜드명만 바꾼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상당 부분의 시간과 전문 인력의 노력이 필요한 작업으로 많은 비용이 들 수 도 있다. 단순히 기업의 이미지를 쇄신해 보고자 CI 전략을 섣불리 선택했다가는 기업의 이미지도 제대로 구축 못하고, 비용만 허비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따라서 기업의 발전 단계에 맞추어 CI의 적용과 그 전략 구축 범위를 단계적으로 확장하는 것이 실패를 줄 일 수 있는 방편이 될 것이다.6. 국내 기업의 CI 사례(1) KT① CI개편한국통신 CI개편은 사명체계, 디자인요소, 기업문화 등 3가지 요소를 중심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사명에 해당하는 법인명과 기업브랜드는 국가명 Korea와 Telecom의 약칭 형태인 ‘KT’로 통일하였다.KT의 시각적 요소도 획기적으로 개선하였다. 지금까지 심볼과 로고가 분리되었던 관례에서 벗어나, 기교를 배제하고 신뢰감과 전문성을 부각시킨 심플한 디자인 형태인 KT 워드마크를 심볼과 로고로 사용하였다.② KT 워드마크KT 워드마크는 KT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정보통 신 전문기업으로서 21C에는 세계통신시장을 선도해 나가고자 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강한 직선과 유연한 곡선을 활용하여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K’와 통신을 상징하는 ‘T’를 하나의 형태 로 묶음으로써 과거와 현재의 조화, 전문성과 친근 감을 강조하였다. 또고 창의적인 이미지를 표현하였다.③ Corporate ColorKT 워드마크에 사용되는 Royal Blue는 신뢰감과 함께 강렬하면서도 친근한 KT 이미지를 담고 있으며, 여러 색상과 잘 어울려 다양한 이미지를 표현할 수 있는 KT만의 Corporate Color이다④ 심볼릭 모티브심볼릭 모티프는 심볼의 상징성과 모티프의 유연성을 동시에 포함하는, 혁신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개념의 디 자인 요소로서 , 다양한 매체 환경 속에서 보다 유연하 게 대응하며, 소비자 접점에서 화려하고 차별화된 Identity를 전달하는 기능을 수행한다.KT의 심볼릭 모티프는 희망을 상징하는 오렌지 빛과 첨단기술을 상징하는 푸른빛이 서로 만나 교차하면서 더 밝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한 두개의 빛이 만나 이루어진 형상은 ‘K’와 ‘T’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미래를 밝히는 빛,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빛의 이미지를 보다 시각적으로 형상화하기 위해 입체적인 형태의 표현 방식을 도입, 지금까지 어떤 기업에서도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차원의 CI 이미지 패턴을 창출하였다.(2) 쌍용① 쌍용그룹의 CI 변천→ →쌍용그룹은 이미 1978년 그룹 창업 39주년을 맞아 우리나라 그룹 기업 중에서는 처음으로 CI를 도입하여 11년 동안 사용해 왔다. 처음에는 쌍용 양회의 시멘트 포대에 사용하던 상표를 변형하여, 좌우에 쌍자와 용자를 넣고 영문으로 그룹 이름을 표기하여 심벌마크로 사용했다. 그러나 그룹의 사업 영역이 다양해지고, 해외시장에 진출할 기회가 확대되면서 새로운 기업이미지 정립이 절실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쌍용은 국내 그룹 차원에서는 처음으로 CI를 도입하고 새로운 심벌마크와 로고 타입을 선보였다. 1978년 3월부터 쌍용그룹 전 계열사가 공통으로 사용한 새 심벌마크는 용의 몸체 일부분을 현대적인 감각에 맞게 디자인한 것으로, 특히 용의 비늘에서 유추한 10개의 유니트를 강조해 중후한 느낌을 주었다. 그 후 기업 환경의 변화에 따라, 1989년 창업 50주년을있다.
    사회과학| 2005.10.11| 6페이지| 2,000원| 조회(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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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공관계론]한국 지방정부의 PR론의 변천과정
    1. 지방자치단체와 PR지방자치단체가 주민에게 자치단체의 시책과 그 의도하는 바를 알림으로써 자치행정시책에 대한 주민들의 이해와 협력을 구할 수 있다. 이러한 행정활동을 행정PR, 행정공보, 행정홍보 등 다양한 용어를 사용해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자치단체 PR은 그 주체가 자치단체이고 그 수용자가 주민이니만큼 일반적인 PR 개념과는 약간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다.지방자치단체 PR은 공공의 이익과 그 영향력을 고려해 볼 때, 일방적이고 수직적인 정보 제공이 아니라 수용자인 주민과의 상호 커뮤니케이션을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진실된 행정 정보의 제공과 함께 주민에 대한 계몽과 교육적 성격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지방자치단체의 행정 PR이란 자치단체나 행정기관이 정책을 이행해 나가는데 있어 소기의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주민들에게 그 내용을 이해시키고 협조를 구하는 과정 또는 자치단체와 주민과의 쌍방 커뮤니케이션을 이끌어내기 위한 노력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2. 지방자치단체 PR활동 초기과거에는 행정기관의 정책 결정과 집행은 지역 주민의 의사와 거리가 먼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행정부의 기득권과 절대 권한을 어느 누구도 침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지역자치 시대가 열렸고, 언론의 활발한 보도와 교육 수준의 증대에 힘입어 주민들의 권리 의식이 상당히 향상되었다. 이제 지역 주민들은 행정 기관의 행태가 자신들의 생활에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의 행정정책에 대한 불만과 요구는 증대되고 있는 것이다.1998년 6월 4일 지방선거의 실시로 제 2기 지방자치화 시대가 열리고 중앙정부의 많은 기능이 지방자치단체로 이관됨에 따라, 각 지방자치단체는 예산과 행정력을 지닌 '작은 정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위해 각 지역의 자기 얼굴 만들기, 자기 지역 알리기 등을 시작하였다 또한 각 자치 단체는 나름대로 생존과 발전을 꾀하기 위해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홍보 전략을 펼쳐야 했다. 오늘날 국민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기 위해서 쓰여지는 PR 방법은 다양하게 발달되었다. 하지만 지방자치단체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도입하지 않은 결과 그들이 행하는 공공정책이 국민적 지지를 받지 못하고 대부분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1995년 6월 27일 역사적인 지방자치제가 본격적으로 출범한 이래 지방자치단체는 정책 발표 후 일정변경 소동, 각종 이벤트 행사의 부실, 지역 주민 반발로 쓰레기 처리장 설치 무산, 나 홀로 행정이 빚은 대소동, 지방의회와의 대립 등 홍보의 문제들을 노출시켜왔다. 또한 당산제를 연 군청의 전시행정, 민원처리 늦장으로 시 행정 비효율 극치, 주먹구구식 경영으로 지자체 수익사업 부실, 자기 고장 알리기 위해 만든 지자체 홈페이지가 단체장 개인을 위한 수단화, 그리고 북한산의 호화건축 형질변경 허가에 대한 비판과 구청 공무원들의 무감각증 등 지방자치단체의 홍보 문제가 자주 언론에 보도되었다.지방자치단체의 PR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현재에도 행정 PR에 있어서 많은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요즘 지방차지단체들은 이러한 문제점들을 개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으며, 지방행정 PR을 위해 다양한 홍보활동을 하고 있다.3. 현재 지방자치단체 PR활동우리나라에서 지방 자치제가 시작된 지 10년이 넘었고, 그동안 중앙행정부 중심에서 많은 지방자치단체에 반영되는 폭이 넓어졌을 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들의 행정 참여기회는 크게 늘어났다. 지방자치단체는 지역민에 봉사하는 행정으로서 새롭게 변신을 하려고 하고 있으며 지역 주민의 여론을 이전에 비해 훨씬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또한 행정에 대한 지역민의 만족도를 높이고 행정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행정에도 시장원리에 따른 경영과 마케팅 개념을 받아들이고 있는 추세다.요즘 지방자치단체의 PR활동은 다양하게 이뤄지고 있으며, PR활동의 역할과 비중도 날로 높아지고 있다. 행정기관들은 홍보지나 소식지 등의 정기 간행물을 창간하기도 하고 행정 책임자가 언론기관과 적극적으로 접촉하여 지역주민들과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하기도 한다. 또한 홍보부서의 인원이 늘어났으며 각종 홍보 이벤트를 개최하기도 한다.(1) 지역 이벤트요즘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지역의 특성을 살린 지역 이벤트가 활성화되고 있다. 물론 지역자치시대라는 정치적인 변화도 그 한 몫을 했지만 그와 더불어 사회구조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지역 주민의 가치관이 다양해지고 각 지역마다 문화행정, 여가행정, 쾌적한 행정을 요구하는 목소리들이 높아지고 있는 데도 영향을 받았다.최근 몇 년 동안 개최되었던 지역 이벤트를 보면 대표적 지방 문화축제라 할 수 있는 강릉단오제, 진해군항제, 백제문화제, 경주신라문화제, 충주우륵문화제, 제주한라문화제, 온양문화제, 금산 인삼제, 진주개천예술제, 진도연등제, 한산대첩 기념 축제 등이 있으며 대도시 단위 상권의 홍보 판촉성 이벤트로 명동 축제, 이태원 축제, 신촌 축제를 꼽을 수 있다. 현재 국내 지역문화 이벤트를 살펴보면 무속을 바탕으로 한 각 지방의 동제(서해안 풍어제, 동해안 별신굿 등)가 농어촌 지역을 중심으로 전통을 계승한 채 일부 남아 있으며, 기타 대부분 지역은 관주도의 획일화된 문화제, 시민의 날, 군민의 날 행사가 시, 군 단위로 실시되고 있다.(2) 주민 참여 통로 마련지방자치단체의 행정 PR은 쌍방적이고 상호적인 커뮤니케이션으로 급속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즉 주민이 설득의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커뮤니케이션 참여자가 된 것이다. 지방자치단체들은 지역주민과의 대화, 설명회 등 간담회를 열어 지역주민이 지방행정에 참여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하고 있다.(3) 홍보물 활용지방자치단체들은 화보, 소식지, 팸플릿, 사진첩, 홍보 비디오 등의 홍보물을 통해 지역주민의 관심과 참여를 유도하고, 다른 지역 주민들에게는 자기 지역을 알리고 있다. 특히 요즘 많은 지역들은 홍보물 중 주로 홍보비디오를 많이 활용하고 있으며, 자기 지역 출신의 연예인들이나 지방의 특산물과 이미지가 맞는 연예인들을 홍보대사로 위촉해 홍보비디오를 만들어 PR을 하고 있다.(4) 매체 활용지방자치단체의 행정 PR활동으로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텔레비전, 잡지, 신문 등의 매체를 활용하는 것이다. 지방자치단체는 때로는 보도자료 형태로, 때로는 간담회나 인터뷰형태로 매체를 통해 행정 PR을 한다.경기도를 예를 들어보면, 경기도에서 자체 발행하는 통제매체로는 경기뉴스, 경기도보, 주간경기 등이 있고, 비통제매체로는 경기일보, 경인매일, 경인일보, 중부일보 등 일간지가 9개, 주간지가 199개 있다. 또한 방송으로는 경기방송(KFM), HBO·HBO PL- US, MTV, 바둑TV, 오리온시네마네트워크(OCN·OCN ACTION), 온게임넷, 재능스스로방송, 투니버스(Tooni- verse) 등의 본사 소재지가 있고, 드림씨티방송(부천시), 아름방송네트워크(성남시), 한국케이블TV경기방송(고양시), 한국케이블TV경동방송(남양주시), 한국케이블TV기남방송(평택시), 한국케이블TV나라방송(의정부시), 한국케이블TV수원방송(수원시), 한국케이블TV안양방송(안양시), 한빛아이앤비(안산시) 등이 있다.(5) 인터넷 홈페이지 활용최근 인터넷의 활용이 활발해지고 인터넷을 통한 주민들의 참여가 높아짐에 따라 많은 지방자치단체들은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PR 활동을 하고 있다. 또한 인터넷 홈페이지는 지역주민과의 쌍방 커뮤니케이션 매체로서의 특성이 있기 때문에 최근 자치단체에서 상당한 투자와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인터넷 홈페이지 PR활동을 수원시를 예를 들어보면, 수원시의 경우 열린 시장실(‘시민의 소리! 열린 시장실’, ‘시장님만 보세요’, ‘시민 발언방’ 등), 시정정보(수원뉴스, 공고·고시 등), 사이버민원(재택민원, 온라인민원신청, 법률상담 등), 생활정보(구인·구직, 홍보마당, 부동산정보 등), 수원시 통계 등을 아주 다양하게 개설해두고 있다. 그러나 이 중 사이버민원, 시민게시판은 활발히 운영되나 여론조사, 시민토론방은 한 건도 게시된 것이 없어 유명무실한 상황이다. 그러나 수원시의 인터넷상의 홍보매체인 ‘수원소식’(시정 소식 게재), ‘화상소식’(주요 행사 등에 관한 화면제공), ‘인터넷방송’, ‘동영상 시정홍보’, ‘늘푸른 수원’, ‘Suwon Update’ 등은 매우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4. 지방자치단체 PR의 문제점지방자치단체 PR의 문제점으로 단기적이고 간헐적인 홍보, 행정 비밀주의, 매스컴 기능에 대한 그릇된 개념, 비전문적 홍보 등을 들 수 있다.지방자치단체 PR의 문제점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첫째, 보도자료 작성업무와 기사 스크랩 정리 및 분석 업무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나, 각종 행사, 오픈 하우스 등 이벤트의 주관에 대해서는 비중이 낮다. 둘째, 지역사회기관 및 국민관계 증진을 위한 접촉업무와 각종 이해관계 집단과의 접촉도 매우 낮다. 셋째, 대내 구성원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업무에 있어서는 구내방송 등 고지활동에 치우쳐 낙후된 편이다. 넷째, 언론과의 관계에 있어선 조직 이미지 손상을 우려한 정보의 언론노출거부의 정도가 높으며, 기자에 대한 접대업무의 비중이 높다. 다섯째, 지방자치단체 공보실 근무자의 업무만족도가 다른 조직들에 비해서 가장 낮다. 그 이유는 근무환경이 열악하고 잡일이 많고 가시적인 효과도 떨어지며 홍보업무에 대한 대내 이해성과 선호성이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지방에는 소규모 광고대행사 이외에는 홍보전문대행사 등 전문회사가 없어 더욱 열악한 실정이다. 마지막으로, 위기관리에 대한 마인드가 매우 약해 위기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프로그램이나 매뉴얼을 제대로 가지고 있지 않으며 대처훈련도 부진하다.
    사회과학| 2005.10.11| 6페이지| 2,000원| 조회(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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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과학]조선시대 조형의식
    [목차]1. 머리말............12. 조선시대의 건축역사.............1~51) 조선 전기2) 조선 후기3. 조선시대의 사회의식 구조와 건축...............5~61) 사회지배세력이 변화와 건축2) 건축에 영향을 끼친 정신적 요소들4. 조선시대 건축의 조형의식.......6~131) 궁궐2) 사직단과 종묘3) 서원4) 불사 건축5) 유교와 한양5. 맺음말............13『조선시대의 조형의식』1. 머리말조선시대라고 가볍게 떠올리면 몇 가지 단어들이 떠오른다. 이성계, 한글, 일제시대, 조선백자, 경복궁 등.. 이런 것들은 조선시대를 나타내는 사회상이자 문화, 역사다. 지금은 옛것이 되어서 박물관이나 고궁으로 찾아가지 않으면 특별하게 접할 수 없는 것들이 되어버렸지만 지금 우리가 생활하는 아파트처럼 이런 조형물과 문화들은 그 당시에는 실생활에 사용되었던 중요한 것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마치 핸드폰과 컴퓨터처럼.. 우리가 현재 기계와 공존하는 것이 하나의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고, 그 흐름이 역사가 되는 것처럼 조선시대에 지어진 궁궐이나 그림들은 그 시대를 알 수 있는 하나의 증거물이자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역사다.‘유행은 돌고 돈다.’라는 말처럼 사람의 심리 변화는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있다. 이런 사람의 심리는 문화를 창조하고 그 문화는 현재에서 과거가 되어 하나의 예언서처럼 우리가 나아가야 할 지표가 되어주기도 하고, 지침서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를 연구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지금 남아있는 유물들을 통해서 추측하는 것이 가장 좋은 연구일 것이다.우리 조는 조선시대의 조형물을 통한 조선시대 사람들의 의식을 알아보려고 한다. 조선시대의 유물들을 통해서 조선시대의 시대상과 문화, 사람들의 가치관을의 사리전 짓는 일이 시작되었다. 윤5월에는 도평의사사의 새 아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6월에는 동서요를 두어 기와 공급을 원활하게 하였고 반송정에 태조가 나가 사신을 맞이하였다. 7월에 태조는 청화루에 간다.대략의 내용이지만 태조 때의 경영으로 도성과 도성내의 요긴한 건축물은 거의 구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앙의 관서들이 경복궁 주변에 즐비하게 경영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방 관아라고 할 수 있는 한성부와 그 산하의 각 관아 소속의 아사들도 대부분 구비되었다고 할 수 있다.정종이 사세에 몰려 개성으로의 환도가 감행되자, 한성의 시설은 일시 폐기되는 상태가 되나 한성부의 능력만으로는 그 관리가 어려웠다. 따라서 태종이 다시 한양으로 재천도하였을 때엔 백성들에 의하여 잠식된 도로가 꾸불꾸불해져서 곧바로 열었던 태조 때의 평직한 대로와는 달라져 있었다. 이것을 바로잡는 일이 큰일이었고 이미 없어진 방명, 교명, 가명표를 세우는 작업도 수월치가 않았다. 개경이 중심이었던 시절의 경제권의 이동은 한양 성내의 백성의 집들이 초가집으로 초라하게 바뀌어 가는 경향이 되었다. 환도하였을 때 이들의 집을 다시 기와집으로 바꾸어 가야 하는 일도 대단한 과업으로 등장하였다.경제 회복이 이런 퇴폐된 시설들을 재생하는 데 첩경이 된다는 정책을 세우고 저자의 활성화를 꾀하였다. 큰 저자를 장통방과 경행방에 열었다. 동부의 연화동 어구와 남부의 훈도방, 서부의 혜정교, 북부의 안국방, 중부의 광통교에 작은 저자를 열도록 하고 우마 등의 가축 거래는 장통방의 개울가를 이용하게 하였다.태종 10년에 큰비가 내렸다. 청계천이 넘쳐 광통교가 떠내려가 버렸다. 신덕왕후의 정릉을 도성 밖으로 천장시키고 거기의 석재들을 옮겨다 광통교를 석조하였다. 청계천의 범람은 큰일이었다. 태종은 11년에 준설할 것을 지시하였고 52,800명을 동원하여 완성하였다. 이 때의 공사 내역은 청계천의 양쪽 둑을 정리하여, 장의동에서 종묘 동구까지와 문소전에서 창덕궁 문 앞까지는 양안을 무사석으로 석축하고 종묘 동구로부터 건축물로 거의 유일하게 존재하던 숭례문과 진배없는 당당한 권위를 지니게 되었지만 침전을 비롯한 궁내의 대부분의 전각들은 익공계의 법식에 따라 조영되었다. 난전에도 침전은 다포계의 법식에 따르지 않았다. 공아계라고 화공을 쓰는 이른바 주심포계의 법식에 따라서 지었던 것이다. 익공계는 이 주심포계보다 목재가 약 20∼30% 가량 절약될 수 있었으므로 궁궐 전체의 수많은 전각들을 짓는 일에서 이만한 절약은 대단한 도움이 되었다. 궁궐에서의 이러한 경향은 다른 왕실 건축물에도 적용되었고 사묘나 관아 경영에도 파급되었다.난 후에 복구되는 건축물 중에서 우선순위는 종묘와 함께 문묘가 있었다. 문묘는 공자를 비롯하여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하는 곳으로 주 건물은 대성전인데 조선조의 국 · 공립학교라 할 성균관과 향교에는 반드시 문묘를 병설하도록 하였다. 전재를 당한 성균관의 복구를 위해 전국의 뜻있는 유림들이 공사비를 갹출하여 문묘와 성균관의 중건에 진력하였다. 이 공역에서도 문묘 대성전과 학교의 강당인 명륜당만은 다포계의 건축물로 지었지만 나머지 건물들은 익공계에 속하는 집으로 중건하였다.목조건물은 관리능력에 따라 그 수명이 천여 년이 계속될 수 있지만 누수 등이 방치되면 반백 년에 벌써 폐하게 되는 수도 생기게 된다. 공공의 시설물들은 아무래도 관리에 소홀하기 쉽다. 난 후에 중건된 관아들이 대한제국 말엽까지 계속되지 못하고 대부분 영 · 정조 때에 중창되었다.영 · 정조시대는 비교적 안정되어서 경제적인 회복도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전국의 중요 건물들이 이 때 많이 중창된 것으로 보아 이 시대의 능력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정조의 화성 경영은 정부의 자금 사정을 다시 악화시키는데 외척의 대두와 전횡은 왕실의 경제 능력마저 저하시켰다. 경제 능력의 저하는 곧 공공건물들의 관리 능력을 저조하게 하는 요인이 되어 고종이 이 때의 경제 부담을 지게 되었다.부진한 사회 능력의 타파와 추락된 왕권의 회복을 정책 목표로 삼고 흥선대원군은 경복궁 중건 공사에 착수한 끝나기도 전에 정종에게 양위하고 물러나야 했고 정종은 민심 수습의 수단으로 개성으로 환도하여야만 하였다. 고종이 이 전철을 밟아 그 결과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만다.대한제국의 멸망은 외국인의 통치를 받는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고 도성내의 궁실을 비롯한 모든 건축물들 중 중요한 것들은 훼손되어 버리는 비운을 맞는다. 도성 경영 이래 축적되어 온 건축 사회는 이로써 종언을 고하게 되었고 조선조 건축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3. 조선시대의 사회의식 구조와 건축1) 사회 지배 세력의 변화와 건축조선시대 건축계 전반의 경향은 사회지배세력의 추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전개되었다. 15세기는 국왕을 정점에 둔 양반관료사회 성립기로 잡고 주로 도성의 건설이나 궁궐 및 도시 내 각종 제사 시설이 이루어진 시기이며, 16세기에서 17세기 전반은 사림세력에 의해 서원이나 선비들의 정자가 지어지고 농촌에 양반들에 의해 성리학에 입각한 새로운 주택이 지어진 시기이다. 17세기 후반 이후 19세기까지는 광작 농민이나 도고 상인이 나타나고 양반신분체제에 동요가 생기면서 불교 사찰이 활기를 찾고 양반의 씨족마을이나 대저택이 조성되고 서민층의 주거가 대두된 시기이다.2) 건축에 영향을 끼친 정신적 요소들조선 초기 양반관료들이 추구한 것은 유교 이념의 회복이었다. 오랫동안 젖어 있던 불교의 관습을 버리고 유교 경전에 입각한 새로운 사회 질서를 수립하는 것이 신왕조의 목표였다. 도성의 건설이나 경복궁 창건을 주도하여 유교 이념에 입각한 새 도성의 건설과 궁궐 조성에 노력하였다.조선 중기에 오면 성리학이 최고의 정신적 가치로 인정받게 된다. 특히 중국에서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의 행적은 그대로 조선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주자는 만년에 무이산에 들어가 무이정사를 짓고 후학들을 가르치며 자연을 벗삼아 은거했다. 조선의 많은 선비들이 이를 본받아 정사나 서당, 정자 등을 고향 근처 경승지에 짓고 학문 생활과 후진 양성에 몰두했으며, 이때 선비들이 지은 건물들은 자연 속에 파묻힌 소박하고 검소한 한 쌍이 조각되어 왕을 상징해 준다. 건물은 월대 북쪽에 따로 낮은 기단을 두고 세워져 있다. 정면 5간, 측면 4간으로 정면 간수는 창건시의 간수 기록과 일치한다. 외형은 2층으로 되어 있고 내부는 상하층이 하나로 개방되어 있다. 이 개방된 높은 실내를 만들기 위해 기둥들이 건물 바닥에서 2층 대들보까지 뻗어 있다. 1층과 2층 외벽 기둥 위에는 각각 다포식의 정교하고 복잡한 공포가 짜여져 있다. 밖으로 돌출한 살미의 끝부분인 쇠서가 크고 날카로운 곡선을 그리면서 위로 치켜 올라가 있고 내부의 살미는 한덩어리가 되어 화려한 곡선 조각으로 꾸며져 있다.실내는 전돌로 바닥이 채워져 있으며 북쪽 중앙에 어좌가 마련되어 있다. 어좌 위에는 화려한 장식이 가미된 보개 천장이 가미되어 있고 다시 건물 전체 천장에도 왕을 상징하는 그림이 치장되어 있다. 이 천장 그림은 본래는 봉황이 그려져 있었으나 1897년 대한 제국 선포 후 용으로 바꾸었다. 천장의 용 그림은 천자에 한정된 것이어서 고종 때에는 봉황으로 채웠던 것인데 고종이 황제로 등극하면서 그림을 용으로 한 것이다, 근정전은 비록 건물이 지어진 시기는 19세기 중엽으로 비교적 늦은 때지만 궁궐 정전이 갖추어야 할 격식을 가장 충실하게 또 최고의 격식으로 조성한 점에서 궁궐 건축의 정점을 보여주는 건물이라고 평가된다.② 경복궁 경회루궁궐 건물 중 한 가지 빼 놓을 수 없는 특별한 건물로 경복궁 경회루를 들 수 있다. 경회루는 조선 초기부터 외국의 사신을 접대하는 중요한 건물이었고 과거 급제나 특별히 궁중에서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 때 자주 이용되던 건물이었다. 경회루는 단일 누각으로 국내 최대규모의 웅장함을 자랑하지만, 그 건축적 특성 면에서 심오한 우주의 원리를 담고 있다.『경복궁 경회루』이는 고종 2년(1865) 경회루 재건공사가 시작될 무렵 경회루의 평면과 세부형태를 주역의 원리로 설명한 정학순의 에 잘 나타나 있다. 정학순은 를 통해 경회루의 원리를 밝히는 가운데 경회루는 불을 억제하기 위해 지어졌다고 밝히면있다.
    사회과학| 2005.10.11| 14페이지| 1,500원| 조회(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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