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도하가 연구의 허와 실9954126 양지령1. 공무도하가의 명칭 문제공무도하가 명칭에 대하여 공후인 으로 불러야 할 것인가, 아니면 공무도하가 라고 불러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대부분이 공감하는 견해는 공후인은 악곡상의 명칭이므로, 노래의 내용을 보아서는 공무도하가가 적당하다는 것이다. 이는 양재연의 견해다.이에 반해 서수생은 공후인이 음악의 조명인 동시에, 문학의 작품명이라 하여 어느 쪽으로 불러도 무방하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하지만 이에 대한 근거로서 공후인이 중국문학갈래인 악부에 속하며, 그 형식은 4언 4구로 짜여져 주악계통을 이어받은 시가라는 것을 들고 있다. 이것은 공무도하가가 중국문학갈래와 비슷하다고 해도, 이 노래의 국적을 중국이라고 보았을 때만 적용 가능할 것이다.2. 공무도하가의 형성시기 문제공무도하가가 언제 형성된 노래인가에 대한 문제는 대체로 2, 3세기 형성론, 한사군 때 형성론, 고조선 때 형성론 이렇게 세 가지 견해가 맞서 왔다.2, 3세기 형성론은 실증적 자료를 근거로 하여 나 보다 늦게 나왔다고 보는데, 이 노래가 3세기 전반에 이미 악부로 존재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사실이 아님이 드러난다.한사군 때 형성론은 특히 기원전 108년 한사군의 설치에서 기원 후 8년 전한의 멸망까지를 그 형성기로 본다. 그러나 이것 역시 노래의 형성과 한문 악부시로의 정착을 혼동하거나 동일시하는 문제점을 드러낸다. 이 노래가 중국에 전래된 시기가 한사군의 설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면, 구전되던 노래로서의 형성은 그보다 더 이전에 이루어졌을 것이다.그러므로 이 노래가 형성된 시기를 고조선 때, 특히 고조선 말기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3. 공무도하가의 국적 문제공무도하가가 우리나라 사람이 지은 작품이냐, 중국 사람이 지은 작품이냐 하는 문제가 있다.공무도하가를 중국 작품이라고 보는 사람은 최신호, 이상현이다. 그 근거로 작품의 배경인 조선(진) 이 중국의 직례성 안에 있던 조선현 이며, 3세기 진나라의 전통적 스타일로 만든 라는 점을 들고 있다. 그러나 직례성 안에 있었다는 조선현은 노래가 형성된 훨씬 이후인 5세기 전반에 북위 태무제가 발해 연한의 북연을 정벌하면서 조선 유이민을 이주시켜 설치한 군현이므로 설득력이 없다. 그리고 3세기 전반 진나라 무제 때 당시 채록자들의 전통적 스타일로 처음 만든 노래도 아니다. 그 전부터 , 등의 악부시가 있었다.김학성은 이 노래를 우리 작품으로 보고, 조선인 거류민에 의해 지어진 것이 중국인 손에 의해 채록되어 중국과 한국에 전파된 것이라고 했다. 또 조윤제, 이병기는 우리말 가사의 한역시라고, 임동권은 당시 유행했던 우리나라 민요라고 보았다. 이가원은 우리 노래로서 본래 한시였다, 고정옥은 후인의 의작이다, 라고 하여 역시 공무도하가를 우리 노래로 보았다.사실 이 노래의 국적에 대한 논의는 정확한 답을 얻기도 힘들뿐더러, 그 논의 자체가 그렇게 의미 있는 것도 아니다. 공무도하가 불려졌을 당시는 지금처럼 국경의식이 강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화적, 생활양식상의 동질상황 속에서 두 민족은 교류하였으며, 노래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4. 공무도하가의 배경설화의 해석 문제먼저 정병욱은 酒神과 樂神의 신화가 공후인이라는 악곡의 설화로 인용되었으며, 백수광부는 삶과 죽음을 구별하지 않는 인물, 곡 죽음이 두렵지 않은 비인간적 존재인 신이라고 보았다.조동일은 백수광부의 모습이나 거동이 예사롭지 않은 점을 보아 죽은 사람이 황홀경에 든 무당일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고조선이 국가적 체제를 확립하면서 나라 무당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하지 못하자 그 권위가 추락함을 한탄하며 자살한 것이라고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