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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서평]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공통분모를 만들어가는 과정 - 아메리칸 뷰티 영화평
    [결혼과 부부관계]진정한 아름다움이란...공통분모를만들어 가는 과정― 샘 멘데스 감독의 〈아메리칸 뷰티〉를 보고...과 목 : 남녀평등과 인간화담 당 : 김 찬 호 교수님제 출 일 : 2001년 5월 8일소 속 : 학부대학 (인문계열)이 름 : 김 진 성 (0010319)들어가며...사람은 일생을 사는 데 있어서 아름다움이란 것을 한 번 이상은 느끼며 산다. 자기가 바라던 것을 먹는 것, 입고 싶은 것을 입는 것, 가고 싶은 곳에 놀러 가는 것 등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일련의 사건들을 통하여 우리는 일종의 아름다움을 느낀다. 물론 우리는 그 아름다움이 어떠한 종류인지는 개개인마다 다르다. 내가 이것을 겪으면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반면, 상대방은 다른 것을 할 때 아름다움을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인생에서 아름다움이라고 여길 수 있는 일들이 있다. 예를 들면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을 함으로써 사는 것 같은 것이다.결혼을 한 후, 부부는 서로 같이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행복감을 느끼고, 아름답고 달콤한 시간들은 보낸다. 하지만 현실상 이런 부부간의 애틋한 사랑은 지속되기 힘들다. 같이 살게 되면서 결혼하기 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상대방의 행동에 실망하게 된다. 그러한 실망이 원망, 그 원망이 부부 파산까지 전이되기도 하는 경우를 종종 매스컴이나 우리 주변에서 많이 접해볼 수 있다. 게다가 부부사이에 자식이 생기게 되면 일은 좀 더 복잡해진다. 부부싸움에 아이들은 합세하여 싸움이 커지게 되면서 그 가족은 불화로 얼룩지게 되기도 한다.결혼하는 순간만큼은 누구나 인생의 아름다움 중 하나라고 여기고, 그 속에서 행복을 느낀다. 확실히 이것은 아름다움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후에 부부간의 불화로 생기는 일들도 우리는 인생의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초두효과의 하나로 결혼의 시작이 아름다움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결혼생활이 전반적으로 아름답다고 여길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결국 개개인이 생각하는 아름다움, 에 리키로 밝혀짐)에게 아버지를 죽여달라고 할 정도로 아버지를 싫어한다.카메라는 그가 사는 동네 하늘을 비추어 주고, 레스터는 자신과 자신의 가족, 그리고 이웃에 대해 소개한다(이 부분은 목소리 상으로만).평범한 회사원 레스터 버냄은 아내 캐롤린과 딸 제인과 함께 살고 있다. 하루의 가장 짜릿한 순간이 고작 아침 샤워 중의 자위행위인 레스터는 걸어다니는 주검처럼 무력하고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그저 그런 보통사람이다. 자위행위를 제외한 모든 것은 지루하다고 느낀다. 그가 바라보는 동네는 물론, 동성애자인 짐과 반갑게 이야기하는 자신의 아내 캐롤린, 그는 이제 이런 것들조차 지켜보는 것이 지겹다고 한다. 그의 하나뿐인 딸 제인을 레스터는 평범한 십대라 생각한다.깔끔한 정원이 있는 그림 같은 집들이 늘어선 교외마을에 사는 그의 일상도 그야말로 무기력함의 반복에 불과하다. 그는 아내와 딸을 두고 단촐한 핵가족을 이루고 있지만 가정에서는 물론 직장에서도 번듯하게 권위를 지키지 못하고 무시당하는 존재이다. 항상 캐롤린과 제인은 레스터를 패배자라고 여긴다.레스터는 그 날 회사에 들어온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브래드에게 회사긴축설에 대해 듣고, 사업계획서를 작성하라고 요구받는다.회사에서 돌아온 레스터는 가족과 함께 저녁에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한다. 우리는 레스터 가족의 화목한 가족사진을 볼 수 있다. 겉으로 보기에 항상 감미로운 음악을 감상하며 촛불과 함께 낭만적인 저녁식사를 하는 화목해 보이는 가정이다. 그러나 그들의 대화는 화목하기는커녕 서로 증오가 섞인 형식적인 대화만 있는 듯 하다. 그런 레스터의 가족을 옆집의 리키는 자신의 캠코더에 그 장면을 담고 있다.부동산 중개업자인 캐롤린은 어느 집을 벌써 6개월이나 팔지 못하고 있다. 캐롤린은 그 집을 반드시 오늘 팔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지만 찾아오는 사람들은 그녀를 냉대하게 대한다. 결국은 실패하고 만다. 자신의 무능력함을 한탄하는 캐롤린은 자신의 뺨을 치며 운다. 이렇게 열정은 어느 정도 있어 보이지만, 그에 맞출터를 붉은 장미 꽃잎으로 유혹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레스터의 옆집에 살고 있는 리키의 집안을 살펴보자. 리키는 어머니와 미국 해병대 대령인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다. 어느 날 그들에게 이웃에 살고 있는 동성연애자들(1쌍)이 방문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동성연애자인 것을 당당하게 밝히고 리키의 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리지만, 리키의 아버지는 웬지 껄끄럽게 여기는 듯이 보인다.안젤라는 학교에서 제인과 담배를 피며 자신의 성관계를 친구들에게 서슴없이 얘기하는 그런 아이이다. 리키가 그들을 찾아와 인사하고 제인에게 좋아한다고 말한다. 안젤라가 말하는 리키란. 그는 정신과 치료도 받은 적 있는 정신병자이다. 안젤라는 자신을 단 한번도 바라보지 않는 리키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이럴 때마다 안젤라는 이야기한다. 평범한 것보다 슬픈 것은 없다. 라고... 즉, 타인으로부터 자신이 특별히 주목을 받지 않음에 불만이 많은 아이로 비춰지고 있다.# 3. 버디의 등장 ― 레스터 가족의 파산계기 마련(아내 캐롤린)안젤라의 유혹에 깊이 빠짐 ― 레스터어느 날, 레스터와 캐롤린은 파티에 간다. 그 파티장에서 캐롤린은 자신의 이미지를 좋게 그릴 수 있도록 레스터에게 요구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캐롤린은 부동산 최고판매기록 실적을 가진 버디를 만난다. 그 앞에서 레스터는 캐롤린과 진한 키스를 함으로써 사랑을 과시하지만, 여전히 정은 없고 가식적으로만 느껴진다. 캐롤린은 버디 앞에서 술에 취해 정신 없는 행동을 한다.우연히 파티장에서 만난 리키와 레스터는 대마초를 피운다. 파티에서 돌아온 집에는 안젤라가 제인과 있다. 안젤라와 만난 레스터는 안젤라와 키스를 상상하고 다시 붉은 장미 꽃잎을 본다. 레스터는 몰래 제인 방문 앞에서 제인과 안젤라가 하는 이야기를 엿듣는다. 레스터는 안젤라가 자신이 멋진 몸매를 가지게 된다면 자신과 성관계를 할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 후에 그는 바로 운동을 시작한다.이 때 안젤라는 창 밖에서 리키가 제인의 이름이 잔디 위에 쓰여진 것을 보며 웃는다. 바로시한 리키가 마음에 들지 않아 제인과 함께 돌아가자고 하지만, 제인은 1마일이나 넘는 집으로 가는 거리를 리키와 함께 가기로 한다. 리키의 집에서 제인은 그의 아버지의 수집품인 총들과 나치문장이 새겨진 접시를 보여준다. 리키는 자신이 마약판매상인 것과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것을 솔직히 제인에게 말한다. 그리고 리키는 자기가 촬영한 가장 아름다운 것을 보여준다고 제인에게 말한다. 그것은 낙엽 속에서 아무렇게나 뒹구는 비닐봉투이다. 제인은 리키로부터 공감대를 발견하게 되고 점점 리키에게 빠지게 된다.그 날 밤 저녁식사에는 요전과 달랐다. 평상시의 재즈가 아닌 발랄한 음악을 들으며 레스터는 회사에서 나온 이야기를 가족들에게 즐겁게(?) 이야기한다. 그런 레스터는 음식이 들어 있는 접시를 던지며 더 이상 자신이 없는 것처럼 취급당하고 싶지 않다고 당당히 말한다.# 5. 아버지(레스터)에 대한 증오가 극적으로 표현다음날 캐롤린은 사격을 하고 기분 좋게 집에 들어온다. 집에 온 캐롤린은 이상한 차를 보게되고 레스터는 그 차가 자신의 것이라고 말한다. 오랜만에 멋진 무드를 잡던 레스터에게 캐롤린은 4000불 짜리 소파만 걱정하고 레스터는 그런 캐롤린에게 화낸다. 그시간 제인은 리키와 함께 있다. 발가벗은 리키는 여전히 제인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여기가 바로 첫 장면에 나왔던 장면이다. 제인은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리키에게 자신의 아버지를 죽여달라고 한다.# 6. 레스터의 죽음다음날 레스터는 아침 운동을 한다. 그는 오늘이 자신이 죽는 날이라고 한다. 리키는 제인과 캐롤린과 함께 등교한다. 리키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그의 아버지는 리키의 방을 뒤지고 카메라에서 레스터의 벗은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레스터가 동성연애자인 것을 확신한다. 마침 레스터가 일하는 햄버거 가게에 간 캐롤린과 버디는 키스하려는 장면을 레스터에게 들키고 버디는 캐롤린에게 자신의 이혼소송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만 헤어지자고 한다. 이 때 캐롤린은 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소리지르며해를 확신한다. 바람피는 것을 들킨 캐롤린은 총을 들고 집으로 간다. 혼자 있던 안젤라에게 레스터는 다가가고 안젤라에게 하고 싶다 라고 하며 관계를 요구한다. 안젤라는 사실 자신은 지금 하려고 하는 성관계가 처음임을 밝힌다. 그러면서 안젤라는 레스터에게 미안하다고 한다.이 때 모든 것을 깨닫게 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레스터, 그리고 안젤라. 레스터는 안젤라에게 샌드위치를 만들어 주며 안젤라에게 가장 특별한 사람 이라고 말한다. 안젤라가 화장실에 간 사이에 레스터는 식탁에서 사진을 보며 이렇게 말한다. 내가 미쳤지, 이런 가족을 두고... 그 순간 레스터는 총소리와 함께 죽음을 맞는다.영화 살펴보기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미국 도시 중산층 가족의 삶의 해체 과정을 비극적으로 그리고 있다. 사랑과 성공, 명예와 안정에 집착하며 가족 구성원 각각이 `아름다움'을 꿈꾸며 살아가는 인간의 내면에 감춰진 이중적인 속성을 코믹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표면적으로는 행복하게 비치는 가정도 울타리 안에서는 불안정하고 불완전한, 무기력한 인간들의 집합일 뿐이고 카메라는 이 것을 냉철하게 잡아내고 있다. 또 카메라는 하루하루 일상이 무기력하고 측은한, 그야말로 중년의 위기를 맞은 레스터 버냄의 희노애락을 집요하게 따라가기도 한다. 이 영화는 이렇게 오늘을 살아가는 중산층 중년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물론 이 영화는 미국 사회의 중산층을 그리고 있긴 하지만, 지금 이러한 현실이 우리나라 사회에서도 서서히 나타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틀(=가족)을 벗음으로써 자기 자신 찾기이 영화 속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억압적인 가족이라는 틀을 깨고 무력한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름대로의 자기 자신 찾기에 집착하고 있다. 잃어버린 자기를 되찾기라도 하려는 듯 회사에 사표를 내고 멋진 스포츠카를 뽑고, 젊은 시절 피운 대마초에 다시 빠져들며 안젤라가 원하는 멋진 근육질의 몸매를 만들기 위해 운동에 몰두하는 레스터. 최고급 장미를 키우며 아무런 걱정 없이 생활하다 뒤늦게 삶의 공 있다.
    인문/어학| 2004.10.04| 9페이지| 1,000원| 조회(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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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영학/조직행동론] 막스 베버와의 만남 - 자본주의화, 계급, 합리화 과정을 통해 현실 사회와 연결점을 찾을 수 있을까?
    막스 베버와의 만남자본주의화, 계급, 합리화 과정을 통해현실 사회와 연결점을 찾을 수 있을까?...<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들어가며 - 베버와의 만남1960년대 이래로 우리나라는 고속 경제성장과 더불어 산업구조의 변화를 포함한 전반적인 사회구조의 재편성을 경험하여 왔다. 농업 등 1차 산업 종사 인구는 급속히 감소하여 왔으며 국내총생산(GDP) 중 농업이 차지하는 비율도 1970년에 25%였던 것이 1995년에는 7%수준으로 감소하였다. 이 과정에서 우리나라가 보여준 고도 경제 성장은 불평등의 심화와 이에 따른 계층간 위화감의 문제를 초래하였다. 우리나라의 소득분포 상황은 브라질, 칠레, 멕시코, 등 중남미국가들에 비해 결코 심한 정도는 아니지만 선진공업국이나 사회주의 국가보다는 불평등의 정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사회적 불평등은 각 사회마다 그 양상이 상이할 뿐만 아니라 사회성원들에 의해 주관적으로 인지되고 수용되는 범위 또한 다르다. 다만 일반적으로 불평등구조가 정형화되고 재생산되어 나가는 정도가 높을수록 경직된 사회로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사회에서는 많은 경우 구조적 경직성이 사회적 갈등과 불안의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사회학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주제 중 하나가 ‘불평등’에 관한 것이다. 우리 학교 사회학과에서 교양으로 개설하고 있는 과목의 커리큘럼만 보더라도 불평등은 꼭 다루어지고 있을만큼 중요하다. 특히 내가 대학에 들어와서 교양으로 사회학입문을 바로 수강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불평등에 대해 깊게 공부한 적은 없었다. 그 수업시간에 ‘교육을 통한 계급의 재생산’이란 주제로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불평등에 대해 비로소 많은 것을 생각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 프로젝트는 ‘구별짓기(Distinction) :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삐에르 부르디외 지음)’을 기본 지식으로 삼아 자기 주변에 각 계급을 대표하는 친구들을 인터뷰하여 그 내용을 분석하여 보고서로 작성하는 것이었다. 결론은 교육자본을 통해 계급의 재생산이 가능하다고 내렸다. 그리고것이 아니라 그 기원은 프로테스탄트의 정신, 특히 캘비니즘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근대 자본주의는 이기심에 의한 욕망의 확대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근면?성실?금욕?절약?경건이라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에 바탕을 둔 직업관과 생활 태도에서 창출되었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근대 시민 계층은 종교적 성실성과 근면성을 통해 재화를 획득했고 종교적 금욕으로 불합리한 소비를 억제함으로써 자본을 축적하였다는 것이다.이러한 베버의 입장은 ‘자본주의’에 대한 일반인들의 상식을 단번에 깨트리고 있다. 일반인들은 자본주의 경제가 토대로 하고 있는 원칙은 영리, 즉 이윤추구라고 믿고 있다. 자본주의는 이윤 추구를 인정하는 경제이며 그러한 자본주의를 만들어온 사람들이 자본가이다. 따라서 자본가들이 마음 속에 품고 있는 것은 영리욕이며 이것이야말로 자본주의 정신의 본질이라고 일반인들은 생각한다.그렇기 때문에 일반인들의 상식에서 볼 때 그러한 자본주의 정신이 프로테스탄티즘이라는 종교에서 유래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다. 다시 말해 기독교가 영리욕을 고무하였다거나 돈을 벌라거나 욕심을 부리라거나 하는 따위를 가르쳤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중세의 카톨릭 교회는 이자를 받거나 폭리를 취하는 행위를 금지하거나 단속하였다. 중세가 끝나고, 영리욕이 그러한 종교적 속박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되었다. 이렇게 해방된 영리욕이 자본주의 정신이며 그것이 자본주의를 만들어내었다. 일반인들은 대체로 이와 같이 생각한다.자본주의 정신과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윤리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제 1부에서 자본주의 정신을 설명하고 있다. 일반인들이 생각할 때 자본주의 정신의 담당자는 자본가뿐이다. 그러나 베버가 말하는 자본주의 정신의 담당자들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현대의’ 자본가가 아니라 ‘자본주의 성립 초기의’ 소생산자층)이다. 베버에 따르면 자본가도 노동자도 역사적으로 볼 때 본래 소생산자의 양극 분해 속에서 나오게 된 것이다. 베버는 자본주의 성립되어 있는지 어쩐지는 전연 알 수가 없다. 구원은 신이 예정해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이러한 심리 상태 속에서 그들은 이웃 사랑의 실천을 통해 신의 영광을 더하는 일이야말로 구원의 가장 좋은 확증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개개인이 이 세상에서 성공한다면 그는 신으로부터 축복받고 선택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의 성공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구원을 확신하는 징표이다. 그래서 프로테스탄트들은 세속적 직업을 신이 부여한 소명으로 받아들여 전심 전력하게 되면 자신이 신의 선택을 받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세속적 금욕과 소명 사상은 이와 같은 캘빈주의의 예정설에 바탕을 두고 성립한 것이다.신과 부(富)를 동시에 섬길 수는 없다이제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초기 자본주의를 담당했던 소생산자층은 신의 영광을 위하고 구원 받기 위한 보증으로 이웃 사람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성실하게 만들어서 그것을 적정 가격으로 공급하여 응분의 이윤을 획득하였다. 따라서 그들에게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일 자체에 전심 전력하는 것과 이윤의 획득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오늘날에는 이상하게 들리는 말이지만 돈벌이는 그들의 신앙에 대한 징표였다. 돈벌이와 이웃 사랑은 그들의 사고 속에서는 분리될 수 없는 두 개의 중심이었다.그러나 “하느님과 부는 함께 섬기지 못한다.”는 예수의 말이 있듯이 돈벌이와 이웃 사랑의 실천은 떨어져 나갈 운명에 있었다. 막스 베버는 자신이 살고 있던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이러한 운명, 자본주의 정신의 소멸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막스베버는 자신이 살고 있던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이러한 운명, 자본주의 정신의 소멸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일요일만 엄격한 퓨리탄이고 나머지 6일은 아무런 구애도 받지 않고 이윤을 추구하는 세속적 경향이 점차 생겨났다. 이웃 사랑의 정신에서 이윤 추구의 정신으로 중심 이동이 이루어진 것이다. 신의 선택에 대한 확산을 얻으려고 하는 열성이 프로테스탄티즘 윤리를 뒷받〈공동체 내에서의 권력분배 : 계급, 신분집단, 파당〉에서 “계급, 신분집단, 그리고 파당은 공동체 내에서의 권력 분배로 인한 현상들”임을 밝히고 있다. 다시 말해서 베버에게 있어서 권력이란 계급, 신분집단 및 파당의 기저에 깔려 있는 공통된 축이라는 말이다.그들의 행위는 사회적 권력의 획득, 즉 그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사회적 행위에 대한 영향력의 확보를 지향한다. 원칙상으로 파당은 국가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적 클럽의 수준에서도 존재할 수 있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계급과 신분집단의 행위와는 달리, 파당의 사회적 행위는 언제나 결사체의 형성을 수반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언제나 계획된 방식으로 추구되는 어떤 목표를 지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목표는 대의명분(파당이 이념적 또는 물질적인 목적들을 위한 강령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일 수도 있고 또는 개인적인 것(명예직, 권력 및 여기서 비롯되는 파당의 지도자 및 추종자들을 위한 명성)일 수도 있다. 대개 파당은 이러한 모든 것들을 동시에 목표를 한다. … 개별적인 각 경우에 따라서 파당은 계급상황을 통해 결정된 이해들을 대표할 수도 있고, 또는 신분상황을 통해 결정된 이해들을 대표할 수도 있다. …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순수한 계급적 파당(class perties)이거나 순수한 신분적 파당(status parties)일 필요는 없다. 사실상 그 파당들은 부분적으로는 계급적 파당이고 부분적으로는 신분적 파당일 경우가 많고 때로는 그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을 수도 있다. 또 이 파당들은 일시적인 구조를 나타낼 수도 있고 지속적인 구조를 나타낼 수도 있다. … 우리는 또한 고대와 중세의 파당들이 근대의 파당들과는 달리 기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것들도 여기서는 파당이라고 명명하고자 한다.)결국 파당이란 자신들의 다양한 이해를 실현하기 위해 결합된 이해결속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정치적 정당뿐만 아니라 신분집단, 계급 등을 포함한 여러 원천에서 비롯된 각종의 자발적 결 분리된 경제적 이해관계가 행위자들의 유일한 관심사로 등장한 것이다. 즉 영리추구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림으로 인해서 행위자들은 자신들의 사적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각자 시장을 중심으로 한 목적 합리적 행위를 연출하기에 이른 것이다. 결국 베버의 계급은 그의 이해사회학적 입장에 기초한 바로 이 목적 합리적 행위와 관련하여 설정된 이상형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새로운 예속의 틀)막스 베버 사회학의 두 개념은 ‘합리성’과 ‘인간의 자율성’이다. 전자는 분석적 개념으로서 베버의 사회학적 그리고 역사적 실질연구의 전반을 관통하고 있으며, 후자는 규범적 가치개념으로 베버의 ‘실천철학’의 근간을 이룬다. 크게 볼 때, 합리성은 형식(목적)합리성과 가치합리성으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이는 인간의 자율성과 연관된다.형식합리성이란 규범적 가치를 배제한 채 순수히 객관적 이해관계의 실현과 기술적 효율성만을 지향하는 대인적 대물적 행위원칙과 조직원리를 뜻한다. 이러한 행위원칙이 가장 순수하게 실현되는 곳은 자본계산에 바탕한 시장영리행위이며, 형식합리적 조직원리의 전형적 실현형태는 전문관료제이다. 이에 반해 가치합리성이란, 그 자체 의문의 여지가 없이 타당하다고 믿어지는 규범적 절대가치의 실현을 지향하는 행위에 내제하는 성향을 뜻한다.)베버의 규범적 이념인 인간의 자율성은 ‘외적’자율, 즉 정치?사회적 자율과 동시에 ‘내적’자율 즉 가치선택 및 실현의 자율을 포괄한다. 전자는 형식적?객관적 성격의 자유이며 후자는 실질적?주관적 자유인 바, 이런 의미에서의 자율은 합리성실현의 전제조건이다. 다시 말하여, 내?외적 자율성을 지닌 인간 내지 집단만이 합리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막스 베버는 근대서구문명의 발전사를 ‘합리화’과정, 더 정확히는 ‘형식합리화’의 과정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현대사회는 자본주의적 ‘계급분화’의 사회라고 본다.) 계급분화에 바탕한 근대 자본주의사회의 구조적 특성을 베버는 한마디로, 최고도의 형식합리성과 극도의 실질적 불합리성이 서로 조화 불가능한 갈등관계에 놓여
    경영/경제| 2004.12.04| 17페이지| 2,000원| 조회(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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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근현대사]현실상황과 개인적 지조 - 지도자로서 이광수 평가A+최고예요
    현실상황과 개인적 지조 나는 민족을 위해 친일했소.내가 걸은 길은 정경재로는 아니오마는그런 길을 걸어 민족을 위하는 일도 있다는 것을 알아주오.들어가며사람은 누구나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떤 방식으로 살아갈지에 대해 자신만의 가치관이나 시각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다. 어떤 공통된 현상을 가지고 나는 긍정적인 관점에서 보지만 다른 사람은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자신의 삶을 드러내는 지조는 사람마다 일관성 있게 보이거나 주변 상황에 의해 달리 표출될 수도 있다. 지금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데, 서로 상반된 A와 B의 가치 중 하나를 택하여 그 상황에 대처해야 한다고 가정해보자. 단, 자신이 여태껏 믿고 있던 신념이나 지조에 따를 경우 A를 택해야 한다. 경제학적 관점에서는 자신의 관점이나 지조에서 벗어났는가의 유무보다는 어느 것을 택해야 효율성을 달성할 수 있는가의 중점을 둔다. 그래서 기회비용)의 측면에서 문제 해결의 열쇠를 선택한다. A와 B 중에 어느 것이 열쇠가 될 지는 자신에게 얼마나 이익이 될지가 결정한다는 말이다.하지만 사람은 항상 경제적 입장에서 문제를 택하면서 살 수는 없다. 일정한 금액으로 물건을 살 때에는 기회비용의 문제가 크게 작용하지만, 어떤 사태에 대해 문제를 해결하는 가치는 수량화하기가 힘들뿐더러 사람과 사람, 사람과 상황간의 문제에서는 그 인물의 인격이 반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인격은 그 사람의 지조로 나타나고 그 지조는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을 판별하는 기준이 된다. 특히, 대다수의 사람들이 큰 기대하고 있는 인물이 지니고 있는 지조는 그 대중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한 국가의 지도자로 추앙될 만큼 기대되는 인물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 뜻 등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을 설정해 주기 때문이다.사회에서 모래알갱이만큼의 지위를 지닌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지조가 현실상황에 따라 자주 바뀜을 자주 느낀다. 그런 대처 변화에는 개개인의 이익이 항상 작용하는 법이다. 그리고 자기가 어떤 뜻을 택함에 분열되는 등 혼란을 겪게 된다. 이광수는 동학에서 이러한 손병희의 사상을 접하고 이 사상을 그의 일생의 진리로 여기게 되었을 것이라 예상한다.이광수는 그의 자서전에서 정신적 지주라고 밝힌 안창호를 만나게 된다. 이광수는 안창호를 매우 좋아했으며 그를 존경했다. 이광수가 안창호를 존경할 수 있었던 배경은 도산의 홍사단 사상이 이광수의 사상과 가장 잘 맞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이광수는 본래 독립 운동을 정해진 범위 내에서 합법적으로 하기를 원했다. 안창호의 사상이 이와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지만 이광수의 사상의 바탕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나중에 이광수는 안창호에게서 준비론을 배우게 된다. 안창호의 준비론이란 한마디로 요약하면 “지금 당장은 힘이 없어 독립을 할 수 없으니 인격을 도야하고 무실역행으로 힘을 기르자!!”이다.이광수는 자신의 인생을 살아오면서 받아온 영향들이 반영된 새로운 민족운동방법을 제시하였다. 그것이 바로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이다. 민족개조론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① 거짓말과 속이는 행실이 없게.② 공상과 공론은 버리고 옳다고 생각하는바, 의무라고 생각하는 바를 부지런히 실행하게.③ 표리부동과 반복함이 없이 의리와 허락을 철석같이 지키는 충성되는 신의 있는 자가 되게.④ 고식, 준순 등의 겁나를 버리고 옳은 일, 작정한 일이어든 만난을 무릅쓰고 나가는 자가 되게.⑤ 개인보다 단체를, 즉 사보다 공을 중히 여겨, 사회에 대한 봉사를 생명으로 알게.⑥ 보통 상식을 가지고 일종 이하의 전문 학술이나 기예를 배워 반드시 일종 이상의 직업을 가지게.⑦ 근검저축을 상(尙)하여 생활의 경제적 독립을 가지게.⑧ 가옥, 의식, 도로 등의 청결 등 위생의 법칙에 합치하는 생활과 일정한 운동으로 건강한 체격을 소유한 자가 되게, 함이니 이곳을 다시 줄여 말하면 덕?체?지의 3육과 부의 축적, 사회 봉사심의 함양이라 할 수 있읍니다. 조선 민족 중에 이러한 사람이 많게 하여 마침내는 조선민족으로 하여금 참되고, 부지런하고, 신의 있고, 용기 있고, 사회틀이 되었다. 그래서 이광수는 조선의 전통문화를 개혁되어야 할 문화로 인식하고 그 반작용으로 일본의 근대 문화를 이상화했다.원래 근대 문물이 발달한 사회는 서구였다. 그러나 이광수는 이를 자신이 체험한 일본으로 치환했다. 서구가 아니라 일본과의 접촉을 통해 일본화된 근대를 인식했던 것이다. 명치유신 이후 문명개화, 식산흥업에 성공한 일본은 하나의 훌륭한 모델이었다. 이 시기 이광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문명개화였다. 그리고 그 표준은 일본이었다.일본은 근대 사회로의 이행에 실패한 민족이 무엇인가 배워야 할 것을 갖고 있는 나라로 간주되었다. 곧 일본을 통해 서구 근대를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당시 우승열패의 무한 경쟁 시대에서 살아남으려면 일본을 통해 근대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은 비단 이광수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지만 이러한 생각을 가장 확실한 목소리로 그리고 일관되게 표현한 것은 이광수였다.이광수는 제시한 근대의 표상)은 일제 강점기이라는 상황에서 이들은 대부분 일제에 의해 이식된 것이었다. 따라서 이광수가 식민지 지배도 근대화의 과정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이광수는 당시 민중에게는 억압과 수탈의 주체로 간주되던 각종 식민지 통치 기구조차 근대화의 추진 주체로 찬양했다.여기에는 민족의 독립과 번영이 사실상 불가능한 것으로 보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하지만 이 시기 이광수는 조선 민족이 강한 민족이 되는 것을 꿈꾸고 있었다. 그런데 강한 민족의 전형은 다른 민족을 힘으로 지배한 몽고와 로마였다. 이는 이광수에게 약육강식의 진화론으로 치장된 제국주의의 논리가 침윤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조선 민족으로서는 당장의 독립을 이루는 것조차 힘들다고 보았을 때 남은 길은 실력양성하는 것으로 설정될 수밖에 없었다.▷ 1920년대 : 민족개조와 실력양성1910년대 말과 1020년대의 초의 짧은 시기에 이광수는 적극적으로 민족운동에 관여한 바가 있었다. 여기에는 동아시아를 둘러싼 국제 정세의 변화가 조선의 독립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 중요한 계기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 이광수가 생각한 조선 공업의 활성화 방안에는 만주뿐만 아니라 중국, 나아가 시베라아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결국 이광수가 말하는 조선 공업화가 일제의 침략 정책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이광수는 조선을 일본과 중국의 연결 고리로 간주하던 일제의 대륙 침략 정책을 조선 민족의 활로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러면서도 193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조선을 일본호해야 한다는 공공연한 언설은 등장하지 않았다. 1930년대 중반까지는 민족의 독자성 자체는 부정되지 않았다. 여전히 “조선인이라고 하기를 영광으로 아는 날”이 기대되고 있었으며 부분적으로나마 조선적인 것의 가치, 조선 민족의 이익이 강조되고 있었다. 물론 그러한 가치와 이익의 실현은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과 유기적 관계를 맺는 것이었지만 일본은 어디까지나 아시아의 ‘맹주’로 인식되고 있었다. 아직 조선=일본이라는 인식이 노골화된 것은 아니었다.▷ 중일전쟁 이후 : 황도주의로의 경사1937년 중일전쟁은 ‘조선=일본’이라는 등식이 전면화되는 결정적 계기였다.) 이광수가 중일전쟁 이후 민족주의를 고수하는 것을 포기하고 본격적으로 친일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유는 일제가 전쟁 수행을 위해 조선인에게 제시한 내선일체의 논리였다. 이광수는 파시즘의 승리가 눈앞으로 보이는 상황에서 조선인에게 중요한 것은 단지 일본이라는 나라의 국민이 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야마토 민족” 곧 일본 민족의 일원이 되는 데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럴 때 조선인은 “식민지인”도 “약소민족”도 “패전 국민”도 아니고 “대일본제국의 신민”이 된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민족을 해소한다는 것을 전제했을 때 중국과의 전쟁 그리고 뒤이은 서구와의 전면적은 다음과 같은 일본 제국주의를 재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그 하나는 서구 제국주의와 일본 황도주의가 다르다고 인식한 것이다. 서구에 대한 아시아의 해방이 실현되는 상황에서 서구적 근대는 전면적으로 부정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서구적 근간과하고 넘어 갈 수 없다. 곧, 당시의 일본 제국이 이광수를 선택했을 때의 시각, 말하자면 일본의 입장에서 평가한 춘원 이광수를 짚어보아야 할 것이다.먼저 일본의 입장을 정리해보자. 일본 제국은 타 제국주의 국가와의 대등한 지위를 노려 한국을 식민지로 요구했지만 한국을 얻은 후,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였다. 조선 총독부에 의하여 이루어졌던 일련의 사업들은 (1910년대의 토지 조사 사업, 1920년대의 농업 개발, 1930년대의 광공업 개발) 한국에서 잉여를 최대한 끌어내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식민 본국이 식민지에 관하여 갖고 있는 예산은 제한이 있으므로, 정책 시행에 비용이 들수록 정책의 효율은 떨어졌다. 그 때문에 제국의 지배 정책은 식민지의 자연, 사회적 조건에 따라 그 성과가 달라졌고 제국은 식민지의 자연, 사회, 문화를 잘 이해하고 있는 협력자가 필요하였다. 그래서 1920년대 사이토 조선 총독은 친일 세력의 육성, 보호, 이용을 4대 정책의 하나로 보았고, 이광수와 최남선 등에게 협력을 구하였다. 특히 춘원은 이미 약관의 나이에 최초의 한국 근대 소설인 ‘무정’을 씀으로써 천재의 이름을 날렸고, 다양한 장르를 오가며 방대한 작품을 남겼다. 이러한 이광수의 재능과 명성은 일본의 조선 통치에 대단히 유용한 것이었다. 이광수는 민족 개량주의를 식민지 현실에 접목시킨 민족 개조론을 주장하였고, 이 이론은 조선 식민지화의 책임을 조선인에게 돌림으로써, 민중의 저항 의지를 저하시켰다. 또한 중일 전쟁 발발이후, 이광수는 조선 총독부의 동화 정책에 열광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국민 운동’ 차원의 활동을 전개하였다.그렇다면 이광수가 조선 총독부에게 협력한 이유는 무엇인가. 크게는 이광수 자신의 개인적 문제와 조선 총독부의 회유로 나뉘어 진다. 개인적 문제는 이광수가 인격이 성숙하지 못한 나이에 일본 문화에 노출되었다는 점, 안창호의 외세 의존적 개화론에 영향을 받았다는 점, 다이쇼 데모크라시에 대한 기대감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있다고 볼 수 있다. 그 외 조선 총독부의다.
    인문/어학| 2004.12.04| 17페이지| 2,000원| 조회(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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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랑스문화]올바른 언론문화를 만드는 힘 - 프랑스 언론과 한국 언론 실태 비교 평가A좋아요
    올바른언론문화를 만드는 힘- 프랑스 언론과 한국 언론 실태 비교 -들어가며2001년 9월 11일. 미국의 심장부인 워싱턴과 뉴욕에서 두 대의 비행기가 각각 뉴욕 무역센터의 북쪽과 남쪽을 강타했고, 워싱턴 국방부 청사에 구멍을 내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는 엄청난 인명피해를 일으킨 대참사임은 물론, 최강국이라 자부하던 미국의 자존심에 구멍을 낸 일대의 사건이었다. 9·11테러가 미친 영향은 단지 미국만이 아니었다. 전세계가 경악했고, 더불어 수탈과 착취 역사를 가진 많은 나라가 공포에 떨었다. 일대 전쟁을 방불케 하는 이번 9·11테러는 미국의 길고도 질긴 제국주의에 대한 엄중한 경고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국 부시대통령은 테러의 주범으로 아프가니스탄을 지목하고 보복을 강행하였다.내가 이 사건을 접할 때 뉴욕 쌍둥이 빌딩이 폭파되어 산산조각이 되고 많은 인명피해가 있었다는 점에 안타까움과 동정을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동병상련의 감정은 오래 가지 않았다. 몇 가지 이상한 점들이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였기 때문이었다.왜 우리나라 언론사들은 미국에서 보도한 것을 아무 여과 없이 그대로 보여주는 것일까? 9·11테러 사건 보도도 몇몇 전문 통역사들이 영어로 방송되는 것을 우리말로 해석하여 알려주는 수준이었다. 그 속에 우리나라 언론사들이 테러 사건을 보는 독자적인 시각은 보이지 않았다. 미국 언론이 테러사건을 보는 입장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었다. 이를 아무런 비판 없이 그대로 수용하는 대다수 국민들은 미국에 대해 동정하고 친미적인 감정만 갖게 된다. 물론 일부 특정 진보적 지식인들은 '미국 편파 주의'를 크게 문제삼아 이에 대해 비판을 하겠지만 이미 미국입장에 익숙해진 우리나라 언론은 동일한 사건을 다양한 시각으로 볼 수 있는 관점을 내세우지 못하고 있다. 아니, 오히려 우리나라 언론사는 정부의 입김을 강하게 받곤 했다. 게다가 국가 안보부터 경제까지 미국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우리 정부는 미국에게 불편한 감정을 줘 국제협상(정치, 경제 등)에 있어 불이익 수 없다”고 덧붙였다.이를 이유로 나는 우리나라 언론사가, 그 중에서도 신문사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프랑스 언론에서 찾고자 한다. 물론, 프랑스든 미국이든 이상형이거나 완벽할 수는 없다. 분명한 사실 한 가지, 역사에 천년왕국의 절대강자가 없다는 점이다. 정점에 설수록 다음을 보는 지혜, 인류 역사가 전해주는 소중한 가르침이다. 그동안 미국 언론의 장점은 많이 소개됐다. 우리 언론이 너무 미국 위주의 철학과 제도, 운영만 쫓아다닌 것은 아닌지 한 번쯤은 되돌아봐도 크게 손해 볼 것은 없다.) 우리는 작은 나라다. 자원, 기술, 문화적인 역량... 모든 게 부족하다. 미국보다 작지만 독립적으로 생존의 길을 모색하려는 프랑스 언론을 천착해 앞길을 비춰볼 시점에 이르렀다는 생각이다. 정론을 걷는 유럽, 특히 프랑스의 언론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우리 언론의 앞날을 밝혀본다면 실보다 득이 많지 않을까 싶다.프랑스 신문 성격프랑스는 신문의 성격 구분이 명확하다.) ‘나는 정론지’, 나는 대중지‘의 노선을 정확히 설정한다. 자신의 노선에 맞게 신문을 만든다. 다시 말해 무슨 일이 있어도 쓸 말 쓰겠다는 주의와 대중이 그때그때 알고 싶어 하는 다소 가벼운 소재의 터치로 가겠다는 주의로 명확하게 가를 수 있다. 전자를 취할 경우 독자 수가 적어지더라도 대중의 관심사에 당장 연연하지 않는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 후자를 택할 경우 독자 수를 늘릴 수도 잇다. 그러나 자신이 언론의 정도를 향해 걸으며 여론을 주도한다는 망상은 버려야 한다. 그런 무거운 역할은 다른 신문에 맡길 수밖에 없다. 한국의 신문들은 저마다 정론지임을 내세운다. 정론이 아니라고 하면 10여 종이 넘는 대부분의 중앙 일간지들은 안 좋은 표정을 짓는다. 대중지도 지향하면서 정론지를 함께 추구하려는 경향이 크다. 모순이다. 시류에 영합하는 가벼운 소재와 여론을 선도하는 정론의 역할은 분명 거리가 있는데 말이다.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노선을 바꾸면서 이를 민의(民意)라고 강변하는 것은 아닌지, 따져볼 일이다.프랑스광고에 의존하면 그만큼 광고주 등 외부의 압력에 취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신문이 국가로부터 독립되어 있고 국가로부터 보조금을 받음으로써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국가 지원을 받는다고 할 말이 있으면 못하지는 않는다고 앞에서 밝혔다.우리나라 신문사들이 재정수입을 지나치게 광고에 의존하다 보니 기사와 광고 비율 면에서도 프랑스 신문과 뚜렷한 대조를 보인다. 예를 들면, ‘르몽드’는 철저하게 기사 우선 원칙이다. 광고가 무엇이 들어 왔는지는 의미가 없다. 기사를 정하고 광고를 받아들인다. 우리와는 정반대다. 우리는 광고를 정하고 거기에 맞춰 기사를 줄이거나 늘린다. 기사거리가 많은 날은 기사가 많고 광고가 많은 날은 다소 광고가 늘 수 있다. 한국은 광고 적은 날은 기사가 많고 광고가 많은 날은 거꾸로 기사가 줄어든다. ‘르몽드’는 무슨 기사가 어떤 분량으로 정해 놓은 뒤 여백을 이용해 광고를 받아들이는 구조다.최근 인터넷이란 뉴미디어가 발달함에 따라 모든 신문사들이 자사의 신문을 볼 수 있도록 웹사이트를 만들어 네티즌에게 제공하고 있다. 웹사이트 첫 화면만 보더라도 이게 신문인지, 광고인지 구분 못할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르몽드(http://www.lemonde.fr)’와 ‘동아일보(http://www.donga.com)’를 비교해 보자. ‘르몽드’ 웹사이트를 들어가 보면 첫 화면에 온통 뉴스거리 밖에 없다. ‘르몽드’를 홍보하는 배너광고 하나를 제외하고 복잡한 플래쉬 상업 광고나, 일반 그래픽 배너광고를 하나도 찾아 볼 수가 없다. 웹페이지 전체가 기사와 그것과 관련된 사진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반면에 동아일보 웹사이트 첫 화면만 보더라도 배너광고가 10개 이상 있다. 그리고 각 기사 웹페이지를 클릭해도 기사 중간에 복잡하고 소리나오는 플래쉬 광고가 있어 기사를 읽는 네티즌으로 하여금 짜증을 나게 만든다. 이렇게 해서라도 광고 수입을 올리고 싶은지, 아니 그것보다 광고 효과가 충분히 기대치만큼 나올지 의문스럽다.이렇게 우리나라 신문사들은 재정 프랑스에서는 누구나 각 신문사의 발행부수나 신문을 읽는 독자 수, 신문사의 경영에 관한 내용들을 쉽게 알 수 있다. 정부의 공식 통계 자료로 투명하게 남는다. 한국에서는 굉장한 비밀로 되어 있는 것들, 예를 들어 발행한 뒤 팔리지 않아 재고로 남는 신문의 숫자까지 정확히 알 수 있다. 무가지)는 프랑스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거짓 발표나, 신고가 있을 수는 있지만, 결국 밝혀진다. 참고로 프랑스에서는 세무 당국이 사기업이든 개인이든 언로사든 가릴 것 없이 무작위로 또는 탈세의 의혹이 있을 경우 꼭 집어 가혹하게 세무 조사를 벌일 수 있다. 프랑스는 국가의 권한이 막강하다. 국가가 국민의 삶을 거의 무료로 책임지는 복지국가다. 서유럽의 많은 국가들이 그렇지만, 재원은 소득의 50% 이상 거둬들이는 세금이다. 이런 나라에서 조세 정의의 붕괴는 국가의 붕괴다. 언론사라고 예외일 수 없다.최고의 권위지『르몽드』의 예를 들어보자. 매년 4월『르몽드』는 자신의 옷을 벗는다.『르몽드』가 어떤 신문이란 것을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우리 신문 기자들이 훌륭하고, 잘 팔리며, 정론을 펴고, 어쩌고 하는 소리는 물론 없다. 정론은 남이 인정하는 것이지 자기 스스로 외쳐봐야 큰 방향을 갖기 어렵다.『르 뽀르트레덩 꽈따디엥(Le Portrait d'un Quotidien)』, 다시 말해 ‘신문의 좌화상’이라는 제목으로 16면짜리 특집면을 발행해 독자에게 제공한다. 이 특별면은『르몽드』가 어떤 과정을 거쳐 제작되는지 소상히 알려준다.『르몽드』가 걸어온 길과 전세계의 취재망, 배급망 등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것보다 정작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프랑스에서도 르몽드만이 갖고 있는, 최고의 신문만이 갖고 있는 특색에 절로 머리가 끄덕여진다. 바로 자신의 회계 상태에 대해 하나도 빠짐없이 낱낱이 공개하는 것이다. 주식의 소유 구조, 발행부수, 매출액, 순익…. 한 부 가격이 7.5프랑인데 왜 이 가격을 받아야 하는 지까지 상세하게 설명해준다.절대『르몽드』가 많이 팔고 많이 감시하고 건전한 여론을 조성하는 것이 아니라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따라 권력과 유착하고 여론을 조작하고 지배하려든다. 게다가 개혁에 저항하는 선봉장 구실까지 하면서 보수 기득권 세력의 대변인 노릇을 하고 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근본적인 원인이 주식의 독점적 소유구조에 있으며 그 연장선상에서 경영의 투명성이 확보되지 못한 가운데 ‘안개경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3대 메이저 신문사들은 영향력의 확대 재생산을 위하여 무리한 투자와 경품 세례와 무가지 공세를 퍼부으며 독자 확보에 혈안이 되고 있다. 한 조사에 의하면, 신문 1부당 단위원가와 수익을 비교해본 결과 신문 한 부를 제작하여 팔게 되면 한달 평균 211원의 적자를 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적자를 보면서도 무리하게 발행부수를 늘려나가는 까닭은 무엇인가? 경영이 투명하지 않은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감추기의 근원을 찾아서...신문사마다 신문 한 부당 한달 평균 211원의 적자를 보면서 빚더미 경영을 강행하는 것은 발행부수를 늘려 광고수입을 올리려는 데 있다. 이는 발행 부수라는 양적인 잣대로만 광고 요금을 산정하는 불합리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조선 동아 중앙 등 3개 신문의 발행 부수 합계는 98년 2월 현재 641만 부로 상당수의 무가지를 포함하여 평균 200만 부 이상씩 발행하고 있다(한겨레신문, 1998년 4월 28일자). 이중 유가지가 몇 만 부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세계적인 권위지로서 인정받는 미국의 뉴욕 타임즈가 111만 부, 워싱턴 포스트가 82만 부 수준에 머물고 있는 점과 비교해볼 때 대단한 거품이 아닐 수 없다.정확한 발행부수의 공개는 경영의 투명성 확보를 위한 필수불가결의 제도다. 발행부수를 공개하지 않으면 광고료 책정의 원칙이 서지 않고 나아가서 매출액 통계의 신뢰를 얻지 못한다. 심지어는 탈세의 가능성까지 내포하고 있으며 이는 권언유착의 빌미가 되기도 한다.현재 한국 ABC협회)에 가입한 언론사는 일간지 34개 사와 경제지 4개 사, 주간지 7개 사
    인문/어학| 2004.11.22| 10페이지| 2,000원| 조회(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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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화] 세계화로 각국가간 문화적 차이는 감소할 것인가? 평가A좋아요
    [세계화(Globalization)]세계화가 진전되면각 국가간의 문화적 차이는감소할 것인가?여전히 유지될 것인가?들어가며1842년 난징(南京)조약으로 상하이(上海)등 5개 도시를 개항하면서 세계를 향해 빗장을 풀었던 중국. 지난 11월 10일 세계무역기구(WTO)가입을 계기로 다시 한번 외부에 문을 연 중국은 그러나 1백50년 전과는 다른 자세로 세계를 불러들이고 있다.WTO 가입을 계기로 중국인들 사이에 불고 있는 세계화 바람은 정말 놀랄 정도다. 단적인 예가 광풍(狂風)으로까지 불리는 영어 학습 열기. 한 번에 2만 명의 수강생을 불러 모으는 베이징의 ‘리양(李陽)’이라는 영어 강사의 강의는 대규모 종교집회를 연상시킨다. 이곳에선 영어가 ‘신’의 말씀처럼 군림한다. 그런가하면 베이징 인민대의 분수대 앞에서는 매주 금요일 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수백 명이 모여 영어로 토론을 벌이기도 한다.개방은 인력 구조도 변화시키고 있다. 활기를 띠고 있는 상하이의 직업 알선 센터에서는 금융, 정보기술(IT), 국제변호사 등의 직종을 선호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중국의 기업들은 세계화 시대에 걸맞도록 구조조정과 인수, 합병을 하는가 하면 지식 산업 면에서도 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렇게 ‘WTO 가입’이란 호기를 놓치지 않겠다는 중국인들의 의지가 경제, 사회, 문화 분야 곳곳에 녹아 있는 것이다.이는 지난 11월 18일에 KBS 일요스페셜에서 WTO 가입 후, 경제대국을 향해 초고속으로 달려가는 중국의 변화를 방영한 내용이다. 이렇게 세계적 커뮤니케이션 및 매체 네트워크의 출현, 세계적 생산 및 지식의 확산, 금융체계의 세계화 등의 결과로 이제 갈등의 시대는 지나갔고 머지않아 평화의 시대가 도래 할 것이라는 밝은 미래를 자유주의자들은 제시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적 갈등이 해소되고 따라서 인류는 이데올로기의 속박에서 벗어나 화합과 번영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는 주장이다. 벌써 지구촌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는 말이다.그러나 이러한 말들은 거센 반발을 . 멀리서 찾을 것도 없이 우리의 일상생활만 보더라도 외국 상품의 비중은 매우 크다. 일제 필기구로 공부를 하고, 햄버거나 피자, 콜라를 먹으며, 위성 방송망을 통해 외국의 뉴스나 쇼프로를 즐긴다. 이런 물건, 문화의 교류뿐만 아니라 노동의 교류도 활발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중국 동포를 포함한 동남아시아의 노동자가 일자리를 찾아 우리나라로 들어오고 수많은 사람들이 유학이나 여행 등을 목적으로 해외로 나가기도 한다.사람들이 이처럼 물건과 문화, 사람이 국경을 넘나들고 있는 현상을 일컬어 흔히 ‘지구촌화’나 '세계화(Globalization)'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들을 세계화라 부른다.’라는 말만 있을 뿐, 세계화의 실체(본질)가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Chae-bol(재벌)’을 ‘한국의 전근대적 소유 구조’라고 설명하고 있는 브리태니카 백과사전에서조차, ‘세계화’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그리고 세계화는 상반된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개인과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개인, 개인과 집단, 나라와 나라 간에 발생할 수 있는 갈등을 해소하고 모두가 ‘하나의 테두리’ 안에서 도약을 약속하는 코스모폴리탄적 유토피아가 존재한다. 다른 하나는 초강대국이 약소국을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리바이어던의 모습을 띠고 있다. 세계화는 19세기 초 국민국가를 단위로 하는 세계체제가 형성된 이후 잠시도 그치지 않고 진행되어 왔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그 속도는 급격히 빨라지기 시작하였으며, 그것이 드러내는 모습 또한 보다 격렬해지고 있었다. 이 시기에 많은 국가들은 세계화의 무대에 출연하도록 호출 받았으나, 그것은 성공과 희망을 약속하는 것 이상으로 비극과 고통을 잉태하고 있었다. 마침내 1997년 동아시아 국가들 또한 그 호출을 받기에 이르렀다. 보는 시각에 따라서 호출의 주체는 리바이어던이 아니라, 기존의 모순을 해 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서의 코스모폴리타니즘일 수 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이것은 숱한 고통을 요구상과 가치관에 고무되어 월남전에 항의하는 반전운동을 벌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반미주의라는 것은 적절한 용어가 아니었다. 그들이 반미주의라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 반체제주의였다. 미국의 흑인운동과 연대하고 캘리포니아의 히피운동에 동참했던 유럽인들은 펜타곤이나 백악관이 아닌 또 다른 아메리카를 지향했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반미주의라는 개념은 미국문화가 단일문화라는 가정에서 비롯된 오류였으며, 자신들을 반미주의자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국적 라이프스타일과도 모순되는 것이었다.위의 인용은 흔히 미국문화를 단일하게 정의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미국문화의 다양성 ― 또는 양면성 ― 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충고가 되며, 미국문화를 단순하게 저질 대중문화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에게도 필요한 깨우침이 된다. 미국은 전형적인 우파 국가이면서도 좌파주의에 입각한 대중주의 전통이 강한 나라이며, 대단히 법과 질서를 존중하면서도 반체제/반문화 전통이 면면히 흐르는 나라이기도 하다. 예컨대 헐리우드가 지배이데올로기를 대변하는 영화도 만들면서 동시에 반체제 영화도 만드는 이유도 바로 그와 같은 미국문화의 양면성과 다양성에 있다.세계화와 문화전망21세기 문화의 전망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우선 새로운 세기가 문화의 밀레니엄이라는 것, 그래서 문화가 모든 것의 중심에 자리 잡는 문화의 황금시대라는 말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가 문화와 정보의 시대라는 것은 이미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니면 우파들이 주장하는 문화전쟁과 좌파들이 주장하는 문화상품에 대한 이야기나. 그 결과로 생겨나는 ‘문화제국주의’에 대한 논의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새뮤얼 헌팅턴 같은 우파 보수주의자의 문명충돌론이나, 프레드릭 제임슨 같은 좌파 진보주의자의 후기자본주의 문화상품론이 이 포스트 모던 시대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문화의 세계화에 대해서 시작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과연 1960년대를 풍미하던 문화교류와 문화이해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최근 우리1세기 문화는 세계화를 지향하면서도 동시에 지역적이 될 것이고, 탈이념적이면서도 정치적이 될 것이며, 과학기술의 발전을 환영하면서도 그것의 오용과 남용을 경계하는 환경생태적 특징을 띠게 될 것이다. 즉 그것은 그 동안 침묵 당해 온 주변문화에 목소리를 되돌려주고, 지배문화의 헤게모니를 비판하며, 테크놀로지의 자연생태계 파괴를 경계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세계인의 공존을 지향하는 ‘지구촌’(global village) 의식은 21세기에 우주의 공존을 주창하는 ‘태양계 문화’(planetary culture)로 확대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21세기 문화의 전망은 결코 어둡지만은 않다. 비록 해결해 나가야 할 문제들은 여전히 산적해 있지만, 그리고 시간적으로 세상의 종말에 한 걸음 더 다가간 셈이지만, 21세기는 인류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밝은 희망과 가능성을 예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다양성을 향한 21세기 문화의 키워드 : 퓨전(Fusion)최근 우리 곁에 가장 친근하게 다가와 있는 용어 중 하나가 단연 '퓨전(Fusion)' 이라는 단어를 들 수 있다. 퓨전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는 지금의 문화를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하는 착각이 생길 정도로 퓨전이라는 단어는 매우 많이 사용되고 쓰이고 있는 실정이다. 가장 흔한 예로 모 회사의 휴대폰 광고만 보더라도, 또 자동차광고에도, 초코렛 광고등 대중매체인 TV광고에서도 퓨전은 많이 사용되고 있고 영화배우이면서 가수로서도 활발하게 활동한 이정현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정현은 강렬한 테크노 풍의 곡에 동양적인 의상으로 최고의 주가를 올리는 연예인중의 하나이다.이렇듯 광고, 음식, 영화, 패션, 연예 등 모든 생활에 이르기까지, 또한 길거리에서 보는 모든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밤늦게 잠들 때까지 퓨전이라는 그 단어에 온몸을 휘감긴 채로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결국 퓨전과는 떨어져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우리와 너무나도 많이 밀접하게 맺어져있는 실정이다. 우리는 퓨전을 입고 먹고 마시면서 퓨전스타일(Fusi리음악 중에서는 트로트, 혹은 발라드 풍의 노래가 유행했었다. 하지만 세계화가 진행됨에 따라 외국의 새로운 음악 장르가 국내로 유입하게 되었다. 그래서 음악에서도 획일화가 아닌 다양한 시각으로 음악에 접근하는 시도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시도는 우리음악과 다른 ‘타장르’로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계화가 진전으로 유입되는 타 장르와의 퓨전 속에서 새로운 음악을 양상하고 있다. 그 예로 서태지와 아이들 2집에 있는 ‘하여가(何如歌)’ 노래를 들어보자. 힙합이라고만 할 수 없는 독특한 사운드가 결합되어 있는 곡이다. 멜탈틱한 기타와 드럼 플레이와 테크노적인 신시사이저와 프로그래밍, 다이나믹한 랩핑, 거기에 획기적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태평소 솔로, 그리고 마지막을 장식하는 변조의 메탈틱 보컬, 이는 이제껏 어떤 곡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곡 짜임이었다. 힙합이 아닌 힙합을 넘어선 새로운 사운드의 창출이었다.) 또, 박상민은 트로트의 멜로디와 정서에 록의 강렬함을 융합해 일명 '록뽕 -록 앤 뽕짝' 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기도 했다.그리고 우리의 전통 리듬을 이어 받으면서도 세계민속음악은 물론 대중음악의 다양한 리듬을 받아들여 새로운 ‘우리음악’을 만들어가고 있는 창작 타악 그룹 ‘푸리’가 있다.) 이들의 앨범에 있는 다드리, 길군악, 길소리 등을 들어보면 우리가 흔히 자주 들어온 풍물놀이가 아닌 것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이들은 우리나라보다 해외에서 지명도가 높고 각 나라의 매스컴으로부터 좋은 평을 받고 있다고 한다.최근일로 퓨전 음악을 예로 들자면, 2002년 월드컵축구대회의 ‘공식 노래(official song)’가 그리스 출신의 세계적인 작곡가 반젤리스(58)에 의해 완성되어 12월 1일 부산에서 열리는 월드컵 본선 조 추첨식에서 처음으로 공개된다. 그리고 공식 ‘월드컵 송’의 타이틀인 ‘붐(Boom)’은 공동 개최국인 한국과 일본의 동양적 정서에다 서구의 음악이 어우러진 수작이라고 한다. 다국적기업인 소니뮤직의 의뢰로 만들어진 2002월드컵송은 조 있다.
    사회과학| 2004.11.22| 16페이지| 2,000원| 조회(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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