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분단의 책임과 그 근거를 논술하시오.분단의 책임은 크게 주동적 책임과 부차적 책임으로 나눠진다. 먼저 주동적 책임은 국제형으로 미국과 소련 양국의 책임을 들 수 있다. 주동적 책임 중에서도 미국이 주동적, 소련이 부차적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다.미국이 신탁통치를 제안했고 이를 끝까지 고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스크바삼상협정에서 한반도에 대한 5년 신탁통치 후 독립을 보장하기로 해놓고 이를 파기해버렸다.소련은 주동적 책임 중에서도 부차적 책임이 있다. 소련은 처음부터 단독정부를 수립하였는데 이는 분단의 분명한 책임이라 할 수 있다. 또 UN임시위원단 입국을 거부했다. 그 이유는 남한의 인구가 북한의 2배정도가 되었기에 인구 비례로 총선거를 실시하게 되면 남한에 더 많은 의원이 선출되어 통일정부를 수립 했을 때 공산정권이 쇠퇴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보다는 책임이 작다.부차적 책임은 국내형으로 우리나라 한민족에게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이승만은 국제관계를 예리하게 본 지도자인데 현실적으로 분단되는 형편이라 해도 이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공포했기 때문에 책임이 있으며, 한국 민주당은 일제 강점기 때 국내의 민족지도자 세력이 책임져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김일성에게도 책임이 있는데 소련의 앞잡이 노릇을 했기 때문이다.그리고 이 밖에도 건국준비위원회와 임시정부의 지도력 부족, 현실적 판단력 부족 등이 있다.전통주의 학파의 한국전쟁기원론을 논술하시오.한국전쟁의 기원에 대한 여러 학설들 중 대표적으로 전통주의적 입장과 수정주의적 입장이 있다. 전통주의 학파에서 보는 견해로는 냉전의 책임이 소련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는 스탈린이 공산주의 세력 확대를 위해 냉전을 일으켰다는 것으로써 소련의 끊임없는 세계적화의 욕구로 인해 한국전쟁이 발발했다는 입장이다.이러한 주장은 Marx의 공산주의 이론이 집대성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그 내용이 전 세계가 공산주의가 될 때까지 공산혁명은 계속될 것이라는 주장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즉 Marx의 공산항구가 필요했다는 ‘부동항 추구설’이 있다.둘째로 스탈린과 중공과의 음모설이다. 한국전쟁을 아시아 적화를 위한 중국과 소련사이의 제1단계 공동 전략으로 본 입장으로 주창자로 달린, 힌턴, 바네트 등이 있다. 소련보다 중국의 역할을 강조한 공산중국 주도설의 입장도 있는데 주창자로 애틀리, 슐만이 있다. 이 주장은 한국전쟁 기원을 외부적인 요인에서만 추론한 것으로 입증되지 못한 정황들에 의거한 주장이다.셋째로 김일성 주도설이 있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객관적 증거로는 북한 노획문서, 1970년 간행된 흐루시초프 회고록이 있다. 이 회고록에 의하면 흐루시초프는 비록 소련이 북한에게 남침의 청신호를 준 것은 인정했지만, 남침은 원래 김일성의 생각이었고 공격을 위한 최종 계획안을 작성한 것도 북한이었다고 주장한다.김일성은 모스크바를 2번이나 방문하여 스탈린이 모택동의 허락을 받으라는 조건부 동의를 얻고 이후 모택동의 승낙을 받아서 미국 참전시 중공군을 파견하기로 약속을 얻어냈다. 이를 살펴보면 한국전쟁은 김일성이 계획하고 스탈린에게 동의를 구한 후, 모택동에게도 동의를 받아 김일성의 주도로 일어난 것이다.이상과 같은 전통주의자들의 주장을 분석해 보면 객관적 자료들이 공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그 정당성이 인정된다. 또한 김일성 개인의 한반도 적화야욕이 한국전쟁의 가장 근원적인 원인이 되었음을 알게 해준다.수정주의 학파의 한국전쟁기원론을 논술하시오.수정주의적 관점은 전통주의의 관점을 수정한다는, 즉 전통주의 시각의 기본골자인 전쟁의 원인을 소련으로 잡는 것을 반대로 미국과 남한 쪽으로 돌리는 학설이다. 수정주의라는 말은 1961년 플레밍 교수가 출판한 『냉전과 기원들』에서 비롯되었다.수정주의를 처음 주장한 사람은 스톤이다. 그는 한국전쟁의 원인에 대한 논문을 쓴 최초의 학자인데, 1952년 『한국전쟁 비사』 라는 책을 통해서 한국전쟁이 미국과 한국의 공모에 의해 발발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승만과 맥아더, 장개석의 침묵의 음모가 바로 한국전쟁의 원인이라고 규정하남침 유도설은 소련과 북한이 남침을 준지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충분히 사전에 막을 수 있었던 이승만과 맥아더가 오히려 전쟁을 통해 북한침공을 노리고 이를 묵인 또는 오히려 함정을 파서 유도했다는 주장이다. 전역 후 대통령의 꿈을 꾸고 있었던 맥아더에게는 국내정치에서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그리고 이승만에게는 총선패배로부터 정치적 약세를 만회할 수 있는 계기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전쟁발발과 함께 너무나도 신속하게 대처해온 미국의 반응 때문에 한동안 상당히 신빙성 있게 검토되었다.그러나 이러한 수정주의자 모두 한국전쟁을 미?소 관계에 집착한 나머지 국내의 요인들을 무시하고 있어, 한국전쟁의 기원을 국내적, 민족 내부에서 찾아야 한다는 수정주의 학파의 재수정이론인 후기수정주의가 나타나게 되었다. 대표적 학자로 시몬스, 할리데이, 커밍스 등이 있다.시몬스는 소련 불개입설을 제시하며 한국전쟁이 한반도의 내부적 요인들에 의해 일어난 내전임을 강조하였다. 그의 주장을 요약해보면 첫째, 남북한의 군비경쟁이 원인이 되었고, 둘째, 이승만의 북진 통일론이 북한의 대남도발을 촉진시켰다고 주장하고 있다. 셋째로 남한에 대한 미국의 군사공약의 강화가 북한을 자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통주의자인 최광녕은 시몬스의 주장에 대해 그의 석사논문에서 시몬스의 논리는 약하다고 밝힌바가 있다. 첫째 주장에 대해서는 오히려 북한이 군비ㆍ군사가 더 월등했기 때문에 북침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둘째 주장에서 북진통일론은 미국의 군사원조를 끌어내기 위한 공갈 정책이었다고 말한다. 세 번째 주장에 대해서는 침략에 대비한 원조약속이었다고 말하며 시몬스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또한 북한에 의한 남침으로 한국 전쟁이 일어났음이 명백해지면서 한국 전쟁은 기본적으로 ‘민족 해방 전쟁’ 이므로 누가 먼저 전쟁을 시작했느냐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민족해방전쟁’론이 전개되었는데 그 대표적 학자가 할리데이와 커밍스이다.이상의 수정주의자들의 주장은 신빙성 있는 공식문서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역적 분열에서 더 나아가 사상적ㆍ감정적으로도 완전히 분열시켰으며 이로 말미암아 서로 이질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둘째, 이승만 정권의 독재화가 진행되었다. 한국전쟁은 남한에서 반공적 국가질서를 강화시켜, 전후 반공을 국시로 하게 되었으며, 이승만을 선두로 하는 친미적 정치세력이 안정을 얻게 되었다. 또한 이승만 정권에 부담을 주어왔던 중간파와 일부우익 세력의 지도자들의 월북ㆍ납북ㆍ사망 등으로 인해 이승만에게는 정적이 사라진 셈이 되었다. 이승만은 이러한 국내적 상황과 전쟁이란 분위기를 이용하여 불법으로 정권을 연장하는 독재화를 시도한 것이었다.셋째, 김일성 독재체제가 가속화되었다. 김일성은 한국전쟁으로 완벽한 왕국체제를 구축할 수가 있었다. 그것은 김일성의 라이벌인 남로계 박헌영, 소련파 허가이 등을 모조리 숙청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박헌영과 허가이가 손을 잡자 김일성은 실각 위기에 처해 있었으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김일성은 재빨리 연안파와 중국직계파와 손을 잡고 중국군의 힘을 빌려 53년에 허가이와 박헌영을 미국의 스파이로 몰아, 박헌영은 재판 후 사형, 허가이는 자살로 내몰았다. 이로써 영구집권에 방해가 되는 정적을 제거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넷째, 남북한 군비경쟁이 가중되었다. 전후 남한군대는 60만 대군으로 늘어났으며, 북한에서는 전쟁 전에 이미 약 13만 5천명이었던 군대가 41만 명의 규모로 확대되었다. 또한 북한은 51년에 약 50만 명의 ‘노농적위대’라는 민병대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군사력 경쟁에 몰두하여 경제정책, 복지정책에는 투자가 빈약하였다.다섯째, 주한미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소련군이 미군과의 동시 철수를 요구했고, 한국 주민들도 이에 대한 요구가 깊었기 때문에, 주한미군은 49년 6월 말까지 철수했다. 그 뒤 1년도 되지 않아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미국에게는 자국의 군대를 한국에 영구히 주둔시킬 수 있는 구실이 되었다.여섯째, 한국군에 대한 미군통제가 강화되었다. 한국대통령 이승만과 유엔사령관(미군) 사이에 체결된 대전협정은 ‘한국군의다는 뜻을 명백히 밝혔다. 북한은 3월 25일 평양방송을 통해 김구와 김규식이 보낸 협상 제의 편지에 관한 이야기는 언급하지 않은 채 4월 14일 전조선 사회단체 협의회를 열겠다고 남한의 정당 사회단체에 초청장을 보내고, 3월 27일 밤에는 김구와 김규식에게 밀사를 보내는 이중정책을 펼쳤는데 이것은 남북통일을 주도권을 먼저 행사하기 위함이었고 김일성과 김두봉이 통일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음을 보이기 위함이었다.김구가 남북협상을 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하였고 김규식은 미군정의 만류로 방북을 주저하였는데, 그 때 그는 북행의 전제조건 5원칙을 제시하였는데, ① 독재정치를 배격하고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를 건립할 것, ② 독점자본주의 경제제도를 배격하는 동시에 사유재산제를 승인할 것, ③ 전국적 총선거를 통한 통일중앙정부를 수립할 것, ④ 외국 군사기지 제공을 금지할 것, ⑤ 미 ? 소 양군 철퇴 조건 ? 방법 ? 기일 협정 공포를 의논할 것 등이다. 김일성의 입장에서 ①과 ②는 수락하지 못할 조건이지만 협상을 하기 위해 일단 무조건적으로 수락하였다. 남북협상은 남한 대표가 도착하기 전인 19일에 이미 시작되었고 통일방안에 관해 토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준비된 원고를 낭독할 뿐이었다. 회의가 아무런 실질적 성과를 기대할 수 없게 됨에 따라, 김구 등은 별도로 요인회담을 요구하여 4김회담(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이 열렸으나 기대한 성과를 얻을 수가 없었고 김구 등은 귀환 공동 성명에서 북한으로부터 ① 남한에 대한 송전 계속, ② 연백평야 급수 계속, ③ 조만식 월남 허용, ④ 안중근 의사 유해를 서울에 모시도록 협조해달라는 공약을 받아왔다고 발표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지켜지지 않았다.남북협상을 평가하자면 부정적 측면으로 ① 남북 지도자들의 동기가 달랐다. 남한은 협상을 통해 통일정부를 수립하고자 했으나, 북한은 북한 정권 수립의 정당성 확보를 위한 명분 ? 수단으로 보았다. ② 한국 문제는 이미 국제적 문제로 민족 내부 논의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것이었다. ③
제6강 현대사회와 민주주의1. 대의제 민주주의 : 시장(Market) 민주주의라고도 함, 흥정과 협상 통해 의사결정1) 근대국가의 등장- 방대한 규모의 영토(직접 민주제 불가해짐), 이질적 시민들(공공선 확보의 어려움),직접적인 의사소통 불가능2) 대의제 민주주의의 등장- 간접민주주의 : 선거를 통해 대표 선출, 집단적 의사 확인, 집단적 의사 실현 대표자에게 위임- 선호집합적 민주주의 : 선거, 투표라는 과정 통해 일반의 의사를 모음3) 대의제 민주주의의 실현 가능성- 합리적인 집단적 의사를 표출한다는 전제- 사회적(집단적) 선택에 의한 연민의 의사가 표출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ㆍK. Arrow- 모든 시민의 선호가 고려대상이 되고- 집단적 복지를 극대화하는 점이 선택되고- 시민들의 선택은 자율적ㆍ독립적이고- 누구의 선호도 지배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공리적인 조건들을 충족하는 사회적 선택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표의 실패’문제를 극복하지 못함 : 책임의 소재, 즉 처벌과 보상의 애로(불분명)- 시민(주인)과 대표(대리인)간의 거리 확대 : 엘리트 민주주의 심화ㆍ그리스 아테네 : 피치자와 치자 동일ㆍ현대 : 소수의 엘리트 민주주의라고 불림, 다원주의와 상반됨⇒일반 민중의 정치참여 어려움- 특수 이익집단의 지배 가능성 : 여론조사와 언론의 역기능- 다수의 독재와 소수의 배제 현상 : 다수결의 폐해- 공동선 개념의 부족2. 참여민주주의 : 대의민주주의의 한계 극복하기 위해 등장, 국민들이 최대한 많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관건. 참여민주주의는 넓게 시민민주주의, 전자민주주의를 포함한다.1) 개념시민들의 직접적인 정치참여(공공정책의 형성과 집행에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활동)를 통해 현대 민주주의(대의제, 간접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함.2) 참여에 대한 2가지 입장(옹호론과 회의론)구 분옹호론회의론참여에 대한 기본 관점긍정적(참여의 순기능 강조)부정적(참여의 역기능 강조)시민에 대한 인식시민성의 신뢰시민성의 불신참여의 성격목적적 성격수단적 성격논리함.- 생활방식으로서의 민주주의 체득 : 경제적 보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참여가 생활자체가 되어야 함.- 공동체주의의 내실화 : 이익 ->개인의 이익과 공동의 이익이 有참여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서는 모든 사회 구성원 개개인들의 공동선을 위한 참여와 확보가 이루어 져야 한다. (참여는 개별적 이익이 아닌 공동선(=공동의 이익)을 위한 참여)공동선의 확보는 개개인의 이성적, 합리적 판단과 선택에 의해 이루어짐. 개인은 이기심을 가진 존 재. 이러한 개인의 이익을 공동의 이익과 맞추어 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절차적 규범의 존중 : 상대방 의견을 존중하는 자세 필요, 결과뿐만 아니라 과정도 중시,인권, 타인에 대한 존중3. 심의민주주의1) 등장 배경 : 심의민주주의는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로 인하여 등장- 영토, 주권, 국민의 3요소로 이루어진 근대국가가 경제 ·법 공동체를 지향하고 중앙집권적인 기구를 가지면서 등장하게 된다.- 그러면서 선거라는 수단을 통해 시민들이 그들의 의사를 대표를 통해 실현하려는 간접민주주의, 선호 집합적 민주주의로 대표되는 대의민주주의가 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대의제 민주주의는 대표가 시민의 대리인이 아닌 사익을 추구할 가능성이 높고, 다수결주의에 의거해 다수의 독재를 심화시키고 소수파의 배제를 초래할 가능성이 커서 그 실현가능성이 미비해진 것이다.2) 개념 : 시민들간의 대화, 토론, 의사소통을 통해 개인들이 자신의 선호를 계속 변화시켜 가면서 합의된 집단적 의사를 형성하려는 것이다.(평등한 사람들의 자유로운 공적 심의)3) 조건- 수평성, 평등성이 전제 되어야 함- 평등(참여의 평등), 자유(표현의 자유), 이성(시민들의 합리적 이성)- 평등한 위치에서 자유로운 토론이 필요하며 구성원들의 이성적, 합리적 선택이 필요4) 유용성-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 해결- 현대사회의 제 문제들에 대한 해결능력이 높다. ex) 실업- 토론을 통한 사회적 합의를 통해 집단적 의사를 형성함으로써 정책수행의 정당성 제공- 심의의 과정이 민주주의 교육의 장단적이고 무책임한 다수의 횡포(인터넷의 익명성에 따른 문제)- 지식정보의 편중, 불평등 심화 : 정보의 소유와 이용능력에 따른 문제제7강 한국의 정치문화와 민주주의1. 한국의 전통문화와 민주주의1) 전통문화의 특성(1) 공동체적 친화성과 인본주의- 가족주의적 공동체생활- 홍익인간, 경천애인, 소도정신, 고인돌 문화, 한얼사상, 민본적(위민적) 정치사상- 국시론 : 민심이 향하는 곳이 국시다.(2) (윤리적)권위주의의 전통 : 공경, 효도 등에서 시작- 정령사상에 기초한 샤머니즘적 신비주의의 전통- 중앙집권적 통치와 관인지배체제, 주자학적 천명덕치사상(3) 분파성향과 파벌주의 : 부정적 전통문화 특성(배타성)(4) 숙명주의와 계급주의- 숙명주의 : 지배와 복종에 대한 체념적 태도,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임- 계급주의 : 사회적 계층화의 익숙함(5)명분주의와 형식주의(6)결백성과 민족적 주체의식의 전통- 결백성은 저항의식, 청렴성, 정의감과 연결되기도 함.(7)정의정신과 진보주의(8)집단지향적 국가관- 국가를 가족, 집단의 연장이라고 봄.- 유교적 이념이 강함. 수신제가치국평천하 이 속에는 구조주의적 세계관(사대주의적 세계관)이 있음. 이는 서구의 인종차별과 다르지 않음2) 식민통치하 정치문화의 왜곡- 분열정책 - 체계적으로 교묘한 정책적 차원의 분열정책.ex) 일제의 차별 정책으로 좌파, 우파가 분열- 계층간, 계층내 불신, 왜곡- 권위주의적 문화 - 식민지 시기의 군국주의적인 면- 폭력주의 폐습, 인습- 관료주의적 문화정착3) 전통문화에 대한 민주주의적 시각(1) 긍정적 시각- 홍익인간(평등성이 담겨있음), 소도정신(국민의 저항권을 인정), 고인돌문화 등 ‘화’의 원리- 결백성과 친화성에 근거한 근본주의(자주)와 대동주의(진보)- 자주와 진보의 조화- 실학사상, 개화사상 : 자유주의의 측면을 담고 있음(2) 부정적 시각- 관존민비와 같은 계급에 기초한 권위주의의 전통- 가족주의의 전통문화 : 족벌주의, 분파성향, 학연, 지연, 혈연 등- 숙명주의, 운명주의 : 수 있는가?- 민주적 선거 절차 마련 : 선거가 일정기간 또는 일정조건하에서 실시될 수 있는 입법적인 조치가 마련되어 있는가?2) R. A. Dahl의 견해- 정부의 정책결정에 대한 통제권은 합법적으로 선출된 관리에게 부여- 선출된 관리는 비교적 강제력이 통용되지 않는 공명선거에 의해 충원- 모든 성인이 투표권을 가짐- 모든 성인은 선거에 출마할 권리를 가짐- 시민들은 광범위한 정치문제에 대해서 의견을 표명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짐- 시민들은 법률에 의해서 보호를 받는 대체정보원을 추구할 권리를 가짐- 시민들은 집회, 결사의 자유를 가짐3) 한승주의 견해-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종교, 여행 등의 자유는 물론 개인의 기본권과 행동의 자유를 국가가 임의로 박탈하지 못하는 사회- 자유로운 경쟁을 통한 정권교체의 가능성- 대표의 선택, 정책과 행정에 있어서 시민의 기회와 자유 마련2.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과제1) 권위주의 체계의 청산과 정치지도자의 리더십(1) 부정적 리더십- 민중을 억압하면서 자기 개인적 권력욕을 추구.- 자기만이 옳다고 믿고 행동하는 독선적 리더십.- 국민의 인기에 영합, 제대로 된 통치전략 없음(2) 바람직한 리더십- 국정과정에 대한 확고한 신념- 국민들에 확고한 신념 심어줄 수 있도록 노력- 국민의 적극적 참여위한 정책 마련- 정치적 효율성, 정통성2) 정치문화의 문제점 개선- 권리의 주장과 함께 의무의 이행- 절제와 중용의 정치- 권위주의적 정치정향의 지양과 민주적 정치의식의 제고가 필수적- 세대 간의 갈등과 가치관의 대립을 지양하기위한 정치사회화 필요3) 참여의 제도화- 관료적 권위주의 청산- 권력 좀 더 분산해야 함- 선거 제도의 개선 : 정통성 확보 가능하게- 민주적 국회 운영 : 전문성 확보, 모색- 지방자치의 제대로 된 실시 : 주민들이 제대로 참여하도록 제도의 개선도 필요(위로부터가 아닌 아래로부터의 정치과정)- 제대로 된 정당과 이익단체의 활동과 육성- 언론의 제대로 된 기능 : 언론의 다원화 필요제9강 국제사회와 민주주의1기도 함. 평등, 평화, 인권 존중2) 우치무라 간조의 기독교적 비전론3) 고토쿠 슈쓰이의 사회주의적 평화주의사회주의를 수단으로 해서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라고 할 수도 있다. 일본의 조선에 대한 지배에 대한 반발. 조선 독립에 대한 긍정. 일본 현 자유당의 사상적 아버지4) 근대 일본의 지역평화사상: 비전론- 우에키 에모리(자유민권론), 아사가와 간이치, 이시바시 단잔(천왕제 인정)3. 다자주의를 통한 국제적 민주주의의 실현 노력1) 다자주의의 개념- 정치체제, 이념, 국가적 이해관계가 상이한 3개국 이상의 다양한 국가들이 참여하여 평등성을 바탕으로 상호 간의 국가정책을 상호 조정하고 원칙과 규범의 형성을 바탕으로 제도적 국제질서를 추구하는 것2) 다자주의의 등장배경- 통합과 상호의존의 증가, 탈냉전후 개별국가의 자율성 확대, 소수주의의 한계, 다자주의의 장점 부각 : 제도적 관성, 적응력, 파급효과- 신자유주의적 제도주의3) 다자주의의 구성요소- 관련가치의 불가분성 : 이해관계(인식)의 공유 EX) 6자회담- 포괄적 호혜성 : 국내 사회의 민주주의 실현에서도 중요- 행위의 일반화된 원칙 : 제도화4) 다자주의의 효과(1) 장점- 예방외교에 기여 : 국제사회의 충돌과 갈등을 미연에 방지- 거래의 비용 절감(효율성)- 강대국의 일방적 횡포 방지- 조정과 타협의 장을 제공- 정보의 공유를 가능하게 함(2) 단점- 무임승차의 가능성 : ex) 6자회담에서 나오나마나한 러시아와 같은 경우- 방어적 협력의 가능성 : ex) 6자회담에서 마지못해 나오는 한국제10강 세계화와 민주주의1. 세계화의 의미- 자본, 노동, 상품, 기술, 정보, 이미지, 환경이 주권과 국경의 벽을 넘어 조직, 교환, 조정되고 있는 현상. (국제화와의 차이 : 초국적 행위자가 개인)- 범세계적인 경쟁과 협력을 통한 통합(조정) 과정2. 경제의 세계화1) 정보통신혁명 : 자본의 국제화- 글로벌 금융시장의 출현 : 통화에 대한 국가의 주권 약화- 전송혁명 : 국내적 통제 이루어 제공
[인간론]키에르케고르의 인간관1) 사상적 배경2) 세계에서의 인간의 위치3) 인간의 본성4) 인간과 사회5) 현대적 의의키에르케고르의 생애와 사상- 대지진(大地震)키에르케고르(Soren Aabye Kierkegaard)는 1813년에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서 부친 미카엘 키에르케고르(Michael Pedersen Kierkegaard)와 그의 두 번재 부인 안네(Anne) 사이에서 칠 남매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 미카엘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으며 유복한 모직물 상인이었다. 그가 원래는 황량한 윳트란드(Jutland)에서 가난한 소작인으로서 양을 치고 있었으나 그가 21세가 되었을 때 그 곳을 떠나 그의 삼촌이 살고 있었던 코펜하겐으로 이주하여 한 동안 삼촌의 모직물상에서 일을 돕다가 결국 부유한 모직물 도매상인으로 자수성가하게 되었다.키에르케고르가 아홉 살이 되기 전에 그의 한 형과 한 누나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다른 두 누나들과 다른 한 형, 그리고 그의 모친도 그가 21세가 되기 전에 불과 2년 반 사이에 다 사망했다. 키에르케고르는 자기 자신도 35세가 되기 전에 요절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42세가 되어서야 사망했다.키에르케고르가, 거의 농노에 가까운 신분에서 부유한 상인이 된 그의 부친으로부터 받은 신앙적 영향은 대단히 컸다. 그의 내성적이며 우울한 성격과 더불어 탁월한 사교력과 풍부한 상상력 및 표현력 역시 그의 부친으로부터 물려 받은 성품과 재질이었다. 부친 미카엘은 그의 아들을 어려서부터 신앙적으로 대단히 엄격하게 교육했다. 이 점에 대해서와 그의 부친의 성벽에 대해서 키에르케고르 자신이 그의 일기장 도처에서 세세히 묘사하고 있다.특히 그의 일기장에 스스로 ‘대지진’이라 부르는 사건이 있는데 그의 전기 저자들은 일반적으로 그의 부친이 1838년에 82세의 고령으로 사망하기 얼마 전에 그에게 자신의 소년 시절에 있었던 한 끔직한 사건에 대해서 고백하여 키에르케고르가 겪게 되었던 마음의 충격을 뜻한다고 해석한다 개인이 신 앞에 바로 서게 될 때 죄의 문제와 여타 문제들이 해결되어 마음의 평정을 되찾고 진정한 자신으로서의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그가 확신했기 때문이다.이 사건은 키에르케고르 인생 전체를 바꿔 놓았으며 첫눈에 사랑에 빠져 약혼까지 가게 된 레기네 올슨과의 관계로 파혼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의 파혼의 동기에 대한 해석도 구구하나 그 주원인 역시 자신의 부친의 끔찍한 과거사가 그에게 가져다준 심적·정신적 부담감에서 찾아볼 수 있을 듯하다. 그는 자신의 부친의 죄로 자기 자신을 포함한 그의 가족 전체에 신의 형벌이 과거에도 내렸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되리라고 믿고 있었다. 그와 같이 저주받았을 뿐 아니라 천성적으로 우울증으로 시달리고 있었던 자기 자신과 자기의 가족에게 그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자기 자신보다 “더 존경했던”한 여인, 게다가 한 명망이 높은 가정에서 태어났고 발랄하기 그지 없는 한 여인을 데리고 와서 함께 고통을 받게 할 수는 결코 없다고 판단하게 되었기 때문이다.파혼이후 그는 저술 활동에 전념하고 몇 년간의 단기간 내에 상술한 수많은 저서들을 익명 또는 본명으로 펴냈다. 그러던 중 당시 악명 높은 풍자 주간지, ‘코르사르’와 일대 사상적인 충돌을 그가 빚게 되었다. 이 주간지와 분쟁이 일어남으로 인해 ‘코르사르’는 매호에 온갖 독필과 케리커쳐로 그를 조롱하며 풍자했으며 이상한 걸음 거리로 거리를 절뚝거리며 지나다니는 코펜하겐의 소크라테스로 풍자했다. 그 결과 1846년 여름에 이르러서는 그는 완전히 대중들의 조롱거리로 화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정신 이상자로 취급했으며 짓궂은 아이들이 거리에서 그를 따라다니며 놀려대기까지 했다. 이후 그 당시 기성 덴마크 국교 신학자들을 맹렬히 공격하고 비난하는 내용의 글들도 썻으며 결국 극심한 심리적 부담감과 신체적 이상으로 거리에서 졸도하고 1855년 11월 11일에 세상을 떠났다.1) 사상적 배경현대의 실존주의의 주제들의 대부분은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 1813-1855)의 저서다. 이러한 이유에서 인간의 사유는 자신의 개인적 상황을 취급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곧이어 양자택일과 선택의 문제에 직면한다는 조건이 전제된다. 헤겔의 철학은 실제에 대한 인간의 이해를 망쳐 놓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관심을 구체적인 개체들로부터 보편자들의 개념에로 옮겨 놓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에게 존재하기보다 사유할 것을 요구한다. 결정과 실천에 둘러싸여 존재하기보다는 절대이성을 사유하라고 요구한다. 키에르케고르는 관객과 배우를 구분하면서 배우만이 실존 속에 포함된다고 주장했다. 확실히 관객도 존재한다고는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실존이라는 단어는 불활성의 사물들에는 적용될 수 없다. 관객이든 돌멩이든 마찬가지로 말이다. 키에르케고르는 한 마차에 타고 있는 두 종류의 인간들을 비교함으로써 이러한 구분의 실례를 보여 준다. 한 사람은 그의 두 손에 고삐를 쥐고 있으나 잠들어 있다. 다른 한 사람은 완전히 깨어 있는 상태이다. 이 경우에는 말은 자고 있는 사람으로부터의 제재를 받지 않고도 익숙한 길을 따라 달려간다. 그러므로 진정한 마부는 오히려 깨어 있는 사람이다. 확실히 어떤 의미에서는 두 사람 모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실존은 개인이 소유한 하나의 특성과 관련되어야 한다. 즉 한 행위에로의 개인의 의식적인 참여를 의미한다. 마부만이 실존하는 것처럼, 의지와 선택의 의식적 행위에 참여한 사람만이 실존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관객과 배우 모두가 존재하지만 배우만이 실존에 관계하는 것이다.)3) 인간의 본성이성적 지식에 대한 키에르케고르의 비판은 엄격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리스적 지혜는 이후의 철학과 기독교 신학에 깊이 침투해 있었다. 특히 그는 그리스 철학이 수학에 대한 높은 관심에 의해 지나치게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에게는 적절히 사용되는 수학이나 과학을 거부할 의사가 결코 없었다. 그러나 그는 과학적 사고방식을 사용하여 인간본성을 성공적으로 이해하려는 모든 시도를 거부했다. 수학이나 과유가 인간을 순수한 실존에로 인도할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진리는 주체성이다. 이 생소한 주장을 통해 그가 강조했던 바는 실존하며, 노력하며, 결정하는 개인들에게 유용한 진리란 단편적이라는 사실이었다. “진리는 의지의 행위에 의해 만들어 진다”고 주장했던 윌리암 제임스의 실용주의적 견해에 앞서, 키에르케고르는 이렇게 주장했다.“피안에 존재하는 것은 일종의 객관적인 불확실성이며, 실존하는 개인이 달성할 수 있는 최고의 진리는 단지 가장 격정적인 인격적 경험에서 고수되는 객관적인 불확실성일 뿐이다.”비록 그는 플라톤에 대해서는 비판을 가했지만, 소크라테스의 무지에 대한 요구에서 이러한 진리의 개념의 훌륭한 예를 발견했다. “소크라테스가 그의 인격적 경험에서 나온 모든 격정을 가지고 고수했던 소크라테스적 무지는 영원한 진리란 실존하는 개인과 관련된다는 원리를 표현해 주고 있다.” 이는 정신의 계발만이 삶에 있어서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인격의 발전과 성숙인 것이다.인간의 실존적 상황을 묘사하면서 키에르케고르는 실존의 세 종류를 인간이 지금 있는 그대로의 상황과 인간이 되어야 할 상황과, 인간의 본질적인 상황으로 구분했다.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인간의 삶에는 본질적인 조건으로부터 실존적인 조건에로의, 즉 본질로부터 실존에로의 운동이 존재한다. 전통적인 신학은 이러한 운동을 원죄론의 견지에서 설명한다. 키에르케고르는 이 원죄론을 심층적인 심리학적 분석에 적용했다. 그 분석에 의하면, 인간이 그의 본질로부터 소외되는 이유는 인간 자신의 유한성에 대한 인간의 불안이다.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과 불안정성을 감지할 때 이를 극복하기 위해 “어떤 것을 행하려” 한다. 그러나 그가 행하는 것들은 그의 불안에 죄의식과 절망감을 더해줌으로써 문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의 전체계를 관통하고 있는 것은 인간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이다. 인간의 본질적 속성은 무한자인 신과의 관계를 내포한다.의해 그것을 극복한다.4) 인간과 사회이 변증법적 과정의 제1단계는 미적 실존의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의 인간은 충동과 감정에 따라 행동한다. 물론 이 단계에서의 인간이 전적으로 감각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거의 감관들에 의해 지배된다. 이러한 이유에서 심미적 인간은 결코 보편적인 도덕 기준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는 특수한 종교적 믿음도 갖지 않는다. 그의 주요한 동기 유발은 매우 다양한 감각적 쾌락들을 향유하기 위한 갈망이다. 그의 삶에는 자기 자신의 쾌락을 제외하면 어떠한 제한의 원리도 없다. 즉 그는 자신의 다양한 선택의 자유를 제한하는 어떤 것도 거부하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 개인은 고의적으로 심미적 인간이 되기를 선택한 경우에 한해서 실존할 수 있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이 단계에서 실존이 이루어질 수 있다 해도 여기에는 어떤 특성이 주입되어야 한다―이후의 실존주의자들은 이 특성을 확실성의 견지에서 설명해 왔다. 즉 심미적 수준의 인간은 결국 자신의 다양한 감각 경험들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이 감정적이며 감각적인 경험들 이상의 어떤 것으로 이루어지며 또한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의 능력을 영적인 것과 미적인 것으로 구분하면서 전자를 건물에 후자를 방에 비유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방 안에 거주하기를 즐긴다.” 한편 방 안에 거주하는 사람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해 주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 각 개인들은 자기 자신의 내부에 이러한 두 가지 가능성에 대한 자각을 동시에 소유하며, 따라서 개인의 내부에는 변증법적 운동이 야기된다. 감각적 충동의 안티테제는 영혼의 인력(引力)이다. 자신이 방안에 거주하고 있음을 자각할 때 또한 이 단계에서는 자신의 확실한 자아를 발견할 수 없으며 따라서 참된 실존을 가질 수 없음을 자각할 때 개인의 내부에서는 불안과 절망이 야기된다. 이제 개인은 하나의 선택에 직면한다. 한계를 인식하면서도 매력에 끌려 미적 수준에 남아 있을 것인가 아니면 다음 단계로 나아갈 것인가? 키있다.
베트남의 통일사례- 목 차 -Ⅰ. 서론Ⅱ. 본론1. 베트남 분단의 역사적 배경2. 통일의 달성과 통일 요인3. 통일직후의 비상조치1) 군관위원회(Ban Quan quan)와 접수위원회(Ban Tiep Quan)2) 사상개조 수용소(재교육장 Trai cai tao)3) 사회정화와 신경제지구4. 통합의 달성과 딜레마1) 정치 통합2) 경제 통합5. 새로운 혁명: 도이모이6. 남북통합의 한계점7. 베트남의 통일이 한반도의 통일 과정에 주는 교훈1) 베트남의 통일방식과 통일 이후의 체제 및 사회통합과정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 훈2) 1986년 이후 베트남식 개혁/개방인 “도이모이”이후 베트남사회의 체제이행 과정 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Ⅲ. 결론Ⅰ. 서 론오늘날, 분단국가에서 통일을 이룬 대표적인 나라들로는 독일, 예멘, 베트남 등을 들 수 있다. 독일은 1990년 서독연방정부에 동독이 편입되면서 사실상의 흡수통일을 이룩한 사례이고, 베트남은 1975년 월맹에 의한 무력통일의 방식을, 예멘은 1990년 시도된 합의통일이 실패한 후 내전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북예멘이 승리하여 1994년 재통합을 이룬 복합적 사례에 속한다.) 이러한 국가들이 통일을 이룩한 과정이나 방법은 서로 다르다. 그러나 그들의 통일 경험은 우리가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실현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다.이 글에서는 민족분단을 경험하다가 통일을 성취한 근년의 사례들 중 특히, 베트남의 통일방법과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베트남 분단의 역사적 배경과 더불어 통일의 달성과정, 베트남의 통일이 한반도에 주는 교훈에 대해 알아보자.Ⅱ. 본 론베트남은 통일독립국가로서 3,000년의 역사를 가진 민족국가이다. 고대국가로서는 어우락국이 훙이라는 왕조에 의하여 기원전 690년에 성립되었다. 이후 기원전 111년부터 기원후 972년까지의 1,000년 동안 중국 봉건세력으로부터 계속 침략·지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통일국가로 존재해왔다. 18세기말부터 서방은 베트남에 대한 지 한 “반 디엠 반미”운동과 게릴라 활동이 벌어지고 이는 날로 확대되었다.6) 1960년 초 : 미국은 베트남에 대대적인 군사적 개입을 실시했으며, 북부베트남에 대한 폭격도 본격적으로 개시하여 전쟁은 확대되고 치열해짐7) 1973년 : 파리협정이 조인되어 미군은 베트남에서 철수하게 됨8) 1975년 4월 : 해방군은 전국지원으로 총공세를 위해 남부베트남 전역에서 사이공정권을 함락시켰음, 전쟁 종료됨.2. 통일의 달성과 통일 요인1975년 4월말 남베트남은 북베트남의 공격에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보다 며칠 앞서 캄보디아가 공산화되었으며 동년 12월 라오스까지 공산당 수중에 들어감으로써 인도차이나 전역은 공산화의 도미노 현상을 낳았다. 남베트남이 그렇게 쉽게 패망하리라고 예측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심지어 북부공산 베트남까지도 당황할 정도로 통일은 쉽게 이루어졌다.남베트남의 패배는 이미 1973년 1월 베트남 평화정착을 위한 파리평화회담의 타결로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왜냐하면 이 협정은 60일의 단기간 내에 미군의 베트남 철수를 규정했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이 남베트남을 버린 것과 다름이 없으며, 또한 베트남 전쟁이 남부인민들이 공산베트남과 대항한 것이 아니라 미군이 대신 싸워 준 전쟁임이 입증된 셈이다. 당시 전쟁 화력과 장비면에서 남베트남군은 공산군을 압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공산군에게 패배하였다. 이는 무엇보다 남부 인민과 군대가 전의를 잃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공산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은 외세를 배격하는 투철한 독립의지와 강인한 정신, 정교한 전략을 가진 지도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미국에 의해 조종되는 신 식민정권인 남베트남을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로부터 해방 시키겠다”는 북베트남의 민족해방논리는 통일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베트남의 통일 요인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베트남은 북베트남에 의해 무력으로 통일이 되었으므로 북베트남이 제2차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을 상대로 효과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던 이유가 베트남 통일의 요인이라 잃어 버렸다. 이에 반해 북베트남은 민중이 피해를 입을 경우 인민재판을 실시, 공개적으로 처형하여 민중의 지지를 얻었다.이 외에 호치민의 지도자로서의 영향력이 컸다는 점, 미군 철수 이후 남베트남의 전쟁 수행능력이 현저히 약화된 시기를 이용해 전면전을 벌였다는 점, 반정부 투쟁의 격화 등을 들 수 있다.3. 통일직후의 비상조치북베트남은 승전과 함께 비상조치를 통하여 남베트남을 접수하고 강온양면의 민심수습책을 통하여 대남 공산화를 강화해 나갔다.1) 군관위원회(Ban Quan quan)와 접수위원회(Ban Tiep Quan)75년 통일 직후 남베트남 임시 혁명정부의 통일 작업은 정치·행정·군사·경제·사회 제부분에 걸쳐 일차적으로는 군관위원회의 비상조치에 이어 역시 군인들이 맡고 있는 접수위원회가 후속조치를 취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제일 먼저 임시혁명정부는 10개항 훈령을 발표하고 구체제의 모든 제도와 법률을 폐지하고 정당과 단체를 해체 시켰다. 두 위원회는 지역에 따라 존속기간이 달랐으며 대체로 1년 정도 활동하였다.(1) 군관위원회(Ban Quan quan)사이공 군관위원회는 1975년 5월 초에 설치되어 1976년 1월 호치민시 인민위원회가 업무 인수를 할 때까지 전권을 가지고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남베트남 임시 혁명 정부가 자체권력 강화를 위해 주도적으로 통일 작업을 집행하였으나 실제적으로는 모두 중앙당의 지령에 의해 이루어졌다. 군관위원회는 남부에서 공권력의 장악과 국가질서 유지를 목적으로 군법에 따라 집행하였으며 무기회수, 치안 및 공안 사범 처치, 반란저항 세력 진압임무를 수행하였다.(2) 접수위원회(Ban Tiep Quan)접수위원회는 군관위원회 산하에 두고 군관위원회에 의해 해당지역이 안정되었다고 판단하면 접수위원회에 업무를 이양하였다. 접수위원회는 정상헌법과 법률의 규정에 따라 해당 지역 각급 단위별 선거를 실시하여 입법, 행정, 사법 등 정상적인 3권 체제를 구성하고 인적 충원을 단행하였다. 특히 행정부서 관할 임명직에 관해 국가 공공 복하면 반혁명분자로 처벌되었다. 1976년 12월 남부 각 도시에서 100만 명의 인민들이 신경제지구로 이주한 것으로 알려졌다.4. 통합의 달성과 딜레마1) 정치 통합1975년 11월 15~21일 남·북 정치통합을 위한 협상이 개최되었으며 남부임시 혁명정부 팜훙(Pham Hung)과 북부 트루옹 친(Truong chinh)이 각각 단장을 맡았다. 양측 대표 25명이 대규모로 참여한 협상이었지만 사실상 대외 전시용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팜훙은 중앙당 정치 국원으로서 트루옹 친의 휘하에 있었기 때문이다.)사이공 함락 후 남·북간에 정치통합을 둘러싸고 당초 북부 중앙당에서는 점진적인 통일 전략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점진주의적 남부통합 전략은 1975년 11월을 기점으로 방향전환을 하게 된다. 동년 11월 남·북 정치협상을 통해 1976년 4월 전국총선거 실시, 6월말~7월초 통일국회 개원,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의 출범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전략 수정의 배경은 공산당이 통합작업을 단기에 끝내지 못하면 남부뿐 아니라 북부마저 통제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1976년 사회주의 베트남공화국(SRV)으로 국호를 바꾼 베트남은 전국적인 국회와 정부의 통합에 이어 각급 중앙과 정부 조직을 통합하였으며 노동조합, 부녀회, 청년회, 조국전선, 우호단결협회 등 대중조직까지도 통합하였다.이와 같이 정치제도와 체제의 통합이 급진, 강제적으로 추진되었기 때문에 표면적인 안정에도 불구하고 내적인 갈등을 노출시켰다. 특히 남베트남의 각급 지도부 충원을 둘러싸고 북부에서 내려온 순수 북부파와 순수 남부 출신 공산 혁명 그룹과의 자리다툼 양상도 나타났다. 그 결과 남부 통일 직후, 점령군의 기세로 남부의 요직을 독점하였던 북화(北化)는 점점 퇴조하였다. 때문에 남베트남에서 남부출신이 최고위직을 맡으면 북부출신들이 차석의 직위에 배치되는 모습으로 바뀌었다.2) 경제 통합수십 년 동안 남북 베트남은 완전히 상이한 체제하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통일 후 남북 간 경제 통합은 점진적으로공황에 빠져버렸다. 결국 북쪽 사회주의 경제개혁만을 토대로 남부에 대한 공산화를 추진한 결과 경제 통합은 실패한 셈이다. 남부 인민들의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대한 경험은 사회주의 경제체제에 대한 거부로 나타남으로써 통일 베트남의 경제개혁을 실패로 몰아넣었다.)경제의 파탄은 중앙당 지도부 내에 심각한 위기로 다가왔으며 체제의 존립마저 위협받게 되었다. 한계 상황에 처한 공산당 지도부는 대남 공산화를 주목적으로 한 남북통합의 실패를 자인하고 새로운 돌파구를 찾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도이모이 정책 도입의 배경이 된 것이다. 경제 부문의 도이모이(쇄신)정책은 당 지도부가 결단한 새로운 생존의 선택인 것이다. 남북 경제통합의 실패가 통일 베트남의 체제전환의 분수령이 되었다는 것을 하나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5. 새로운 혁명: 도이모이도이모이 정책은 시장경제 체제로의 전환과 탈 이념적 대외개방을 주축으로 채택된 새로운 실험으로, 국민과 당 지도부의 공동 작품, 즉 아래에서 위로의 변화와 위에서부터 아래로의 변화라는 것이다. 개인의 이익개념과 사회모순 해결에 관한 신사고를 바탕으로 추진된 도이모이 정책은 베트남의 새로운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과거 베트남 공산당은 개인의 이익이 사회발전의 동력이 된다는 이론을 부정하고 개인의 이익은 사회주의와 공존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왜곡된 관념은 노동자의 노동에 대한 열정의 감퇴와 무관심의 한 요인이 되었으며 경제공황의 신호탄이었다. 통일 이후 대남 공산화 과정에서 이와 같은 현상은 실증적으로 나타났다.그러나 1980년대 초부터 공산당 내 실용주의자들은 종래의 편견과 오류를 극복하고 노동자의 노동 의욕 촉진방안으로서 이익의 중요성을 공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회모순 해결에 관한 사유의 변화 또한 도이모이의 근간이 되었다.1950년대 이후 특히 1960년 제3차 공산당 대회 이후 공산당 지도부와 북베트남 인민들은 사회주의 과도기에 처한 베트남의 모순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간의 모순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와 같은 모순을 .)
셸러의 인간관1) 사상적 배경셸러(Max Scheler, 1874-1928)는 후설 다음으로 비중이 큰 현상학자로서 프랑스와 스페인의 철학계에 현상학적 학설을 급속히 파급시킨 장본인이었다. 그의 활동은 세 단계로 나누어질 수 있다.) 초기 사상에서 그는 주로 철학적 방법론에 관심을 가졌고, 그의 사상적 배경은 스승인 오이켄의 정신론(noologie)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이 시기는 셸러가 후설(E. Husserl)의 현상학을 접하기 이전이므로, 주로 칸트주의의 인식문제와 오이켄의 영향 하에서 논문을 쓰게 된다. 이 시기 그는 초월적 방법을 형식적 논리적 조건으로 삼고, 심리학적 방법을 실재적이고 내용적 조건으로 설명하고 있다. 셸러는 이 두 방법이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보완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셸러의 중기 사상은 대부분 후설의 『논리 연구』의 객관주의 노선에 따르는 길이 참된 현상학이라고 주장하며, 나중의 후설의 추월론적 현상학에 반대 입장을 표명한다. 셸러의 이 시기는 활발한 현상학적 국면의 시기라 말할 수 있다. 이 기간을 슈테그뮐러는 셸러가 현상학을 수단으로, '세계에 대한 헌신'에 집중하고 있는 '응용 현상학'의 시기라 한다. 셸러는 이 때에 그의 윤리학의 주저라고 할 수 있는 『윤리학에 있어서 형식주의와 실질적 가치 윤리학』을 저술한다. 여기에는 그의 인간학에 있어서 중요한 '인격'개념이 인간의 본질로서 비교적 상세히 다루어지고 있다. 이어서 셸러의 최초의 인간학에 관한 논문이라 할 수 있는 「인간의 이념」이 발표되는데, 여기에서 그의 철학적 인간학에 관한 기본적인 윤곽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는 종교철학의 불후의 명저라고 할 수 있는 『인간에서 영원한 것에 관하여』를 출판한다. 이처럼 셸러의 중기 사상은 윤리학, 가치철학, 종교철학이 주류를 이루며, 카톨릭 사상에 깊이 관여한 시기이다. 그래서 솦스(H, Schoeps)는 이 시기를 가톨릭적 현상학적 단계로 구분한다. 이때까지의 셸러의 사상이 정통적 그리스도교적 사상에 근접하고 신을 좇아 스스로를 가꾸어 나가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 이후 그는 다윈주의, 베르그송주의, 그리고 프로이트주의의 편에 서서 유신론적 견해를 버리고 범신론적 견해를 취하였다.그의 주저인 『우주에 있어서의 인간의 위치』(Die Stellung des Menschen im Kosmos, 1928)에서 셸러는 인간의 특수한 위치를 종래와는 다른 방법으로 규정하려고 했다. 그는 정신적, 인격적 존재의 특징과 인간의 특수 위치를 세계와 삶의 전체 속에서 밝히려고 한다. 요컨대 그는 인간의 행동과 동물의 행동을 비교하고, 인간의 세계 개방성을 동물의 환경의 구속과 구별하며, 인간의 특수 위치의 근거를 정신에 둔다. 그는 정신적 인간을, 프로이트가 그랬던 것처럼, 단지 순화된 동물적 유기체로 기술한다. 이때 순화된 동물적 유기체로서 인간의 더욱 저차적이고 비천한 성격은 그의 더욱 고차적인 정신적 성격에 힘을 불어 넣어주는 역할을 한다. 한편 신은 생성의 과정 중에 있는 것이다. 인간은 신과 협력하여 신성을 발현하게 하고 그것을 완성으로 이끈다. 그 이전의 니체처럼 셸러도 “신은 죽었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신격화를 향해 돌진해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또한 그는 우주란 “신들을 만들어내는 기계”이며 이것이 인간의 일차적인 과제라는 점에 대해서 베르그송에 동의하였다.)2) 세계에서의 인간의 위치셸러는 먼저 두 가지의 인간개념을 말한다. 그 하나는 인간이 형태학적으로 척추동물 및 포유동물의 하위 종으로서 갖고 있는 특징들을 포함하고 있는 자연주의적 인간개념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이 다른 동물과 예리하게 구별되는 성질들의 총화를 가리키는 본질적 인간개념이다. 그리고 셸러는 이러한 두 가지 인간개념의 대립을 극복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인간에게 생명을 지닌 종의 어떠한 다른 지위와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의 특수지위를 부여하는 이러한 두 번째의 인간개념이 과연 정당하게 성립하는가의 여부를 검토하는 것이 셸러의 철학적 인간학의 주제가 된다.셸러는 먼저 인간의 특수지위를 제시하기 위해서 기계적인 구조에 가까워지고 있지만 식물은 그 생명기능이 아직 분화체계를 이루지 못하고 우주적인 전체적 생명현상에 직접 뿌리박고 있다는 점에서 기계주의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이러한 감각충동의 바로 상부구조인 두 번째의 본질형식은 본능이다. 이것은 합목적적인, 어떤 확고한 리듬에 따라 진행되는, 생득적이며 유전적인 태도 또는 행동의 능력이다. 본능은 비록 종적으로 자주 반복되기는 하나, 역시 어떤 특수한 환경적 요인에 향해져 있으므로, 막연하고 일반적인 감각충동이 특수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능력은 식물에게는 없고 동물에게서만 볼 수 있다.이러한 본능적 행동으로부터 생명의 제3의 형태로서의 세 번째 본질형식인 습관적 행동내지 연상적 기억이 구별된다. 이 능력 역시 분명 식물에게는 없다. 셸러는 이 능력을 그의 행동이 이전에 행한 같은 종류의 행동에 근거해서 시행착오의 원리에 따라 삶에 유용한, 따라서 합목적적인 방법으로 서서히 그리고 부단히 변경되기 때문에, 그의 행동이 합목적적으로 되어 가는 정도가 이른바 시행의 회수에 엄밀하게 의존하는, 그러한 생명체에 인정하고 있다. 말하자면 연상적 기억은 오랜 그리고 의미를 가진 본능의 움직임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연상적 기억의 원리에 의해서 그 생물의 전연 새롭고 특수한 상황에의 적응이 가능하게 된다.생명의 네 번째 본질형식은 실천적 지능이다. 이것은 돌연적인 반복회수에 의존하지 않는 의미를 가진 행동으로서 특수상황에 적응하는 유인원에게서 나타나는 본질형식이다. “한 생명체가 시행착오 없이 그 종에 전형적인 것도 아니고 그 개체에 전형적인 것도 아닌 새로운 상황에 대해, 그것도 갑자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충동적으로 규정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전에 행한 시행의 회수와 독립해서 합목적적인 행위를 수행할 때, 그것은 지능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라고 셸러는 말한다. 그리고 셸러는 동물의 행동이 모두 본능과 연상과정으로부터 도출될 수 없고, 오히려 어떤 경우에는 순수 지능적 행동이 나타인간'이라는 개념이 지니고 있는 이중적 구조의 분석을 통해, 인간은 생명적 존재로서의 특성을 지니고 있으나, 이러한 영역과 분리된 정신 세계를 지닌 존재라고 규정한다. 그는 인간의 본질과 인간의 특수 지위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지능과 선택능력 보다는 훨씬 높은 데에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구체적인 인간 속에서 정신의 작용을 살피고, 이것을 인간의 본질로 삼고 철학적 인간학의 정초를 확립하고자 한다.셸려에 따르면 인간을 인간이도록 하는 새로운 원리는 심리적 단계들에 속하는 감각 충동, 본능, 연상적 기억, 지능, 등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정신의 원리는 우리가 생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모든 것의 외부에 있다는 것이다. 동물과 구별되어 인간을 오로지 인간이도록 하는 것은 생명 세계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단계가 아니며, 더군다나 생명 즉, 심리적인 것의 현상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생명 현상 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의 생명과도 대립되는 원리로서, 셸러는 그것을 정신(Geist)이라고 하였다. 즉 "생명을 지닌 종의 어떤 다른 특수지위와도 비교될 수 없는 하나의 특수지위를 부여하는 인간에게 부여하는 정신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를 다루는 것이 셸러의 철학적 인간학의 근본 주제가 된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원리로서의 정신이란 과연 무엇일까? 셸러의 이러한 새로운 원리로서의 정신 그 자체는 엄밀히 규정할 수 없는 '미지수X'이지만, 포괄적으로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정신은 확실히 이성의 개념을 포함하며 '이념사유(Ideenden-ken)뿐만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직관'도 포함한다. 즉 근원현상, 본질적 내용들에 대한 직관, 더 나아가 호의, 사랑, 후회, 경외, 정신적 경탄, 축복, 절망, 자유로운 결단을 포괄하는 특정한 종류의 의지적이고 정서적인 작용을 포함하는 것이다.이와 같이 셸러에 있어서 정신은 분석하고 비판하는 능력과 사유 기능으로서의 이성적 요소뿐만 아니라, 사랑, 기쁨, 존경 등의 감정적 측면을 지닌 포괄적 작용을 를 본질적인 특성으로 지닌다. 정신의 본질은 명령, 압박, 유기적인 것에의 의존성, 생명에의 의존성, 그리고 생명에 필요한 모든 것에의 의존성으로부터 자유롭게 벗어나 있다. 그러나 셸러는 정신을 자체적인 힘과 에너지를 지닌 실체라고는 규정하지 않는다. 단지 정신은 이념적으로 생명세계와 독립적이며, 초월성을 지닌 존재이다. 자유는 정신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움직이는 중심체의 역할을 하며,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본질적 차이이기도 하다.또한 정신은 삶 또는 생명에 대립되는 원리이고 우리가 삶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일체의 것의 바깥에 있는 것이므로, 삶에 속하는 일체의 것을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정신은 그것으로부터 그의 외부에 있는 일체의 것을 현상학적 환원과 본질직관을 통하여 그 본질형식과 본질구조에 있어서 파악할 수 있는 선험적 점과도 같은 것이다. 그리하여 정신은 이념화의 능력을 가지는데, 이념화란 관찰의 규모나 횟수와는 독립적으로 그리고 경험이나 귀납추리와는 독립적으로 해당 본질 영역의 한 예에서 본질 속성과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 이념화로부터 학문이 형성된다. 이념화, 즉 본질 인식은 실증과학에서 공리나 최고 전제를 형성하는 반면에, 절대적 존재의 인식을 궁극 목적으로 하는 철학적 형이상학에서는 본질 인식은 절대자를 들여다보는 창이다.) 그리고 정신은 그것을 넘어서 또한 그렇게 파악된 순수 상재에 의해 스스로 규정될 수 있는 능력도 또한 가진다. 전자는 정신을 이론적 측면에서 본 것이라 한다면, 후자는 정신을 실천적 측면에서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정신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그의 충동적 삶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 고유의 권리를 갖고 있는 사태연관 내지 가치연관에 따라서 행위 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기 위해서 인간은 무엇보다도 일체의 충동적 삶을 부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바로 이것이 인간을 언제나 삶에 관련된 현실을 긍정하고 그것으로부터 거리를 취할 수 없는 동물로부터 구별시켜 주는 점이기도 하다. “인간은 그를 강력한 힘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