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正祖)이름은 산(姦)이며 자는 형운(亨運)이다. 호는 홍재(弘齋)로서 영조의 손자로 아버지는 장헌세자(莊獻世子:思悼世子), 어머니는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惠嬪)이다. 1759년(영조 35) 세손에 책봉되고, 1762년 2월에 좌참찬 김시묵(金時默)의 딸 효의왕후(孝懿王后)를 맞아 가례를 치렀다. 이 해 5월에 아버지가 뒤주 속에 갇혀 죽는 광경을 목도해야 했다. 1764년 2월 영조가 일찍 죽은 맏아들 효장(孝章)세자의 뒤를 이어 종통을 잇게 하였다.1775년(영조 51) 12월 노병이 깊어진 국왕이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명령하자 좌의정 홍인한(洪麟漢)이 이를 방해하여 조정이 한때 크게 긴장하였다. 홍인한은 세손의 외척으로 기대를 모을 위치였으나, 탐포하고 무지한 그를 세손이 비천하게 여겨 멀리하자, 이에 원한을 품고 화완옹주(和緩翁主)의 소생으로 어미와 함께 권세를 부리던 정후겸(鄭厚謙)에게 붙어 세손의 적당이 되었다. 그는 세손을 고립시키기 위해 시강원(侍講院)의 궁료 홍국영(洪國榮) ·정민시(鄭民始) 등을 참소하기까지 했으나 세손이 이를 듣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세손이 대청(代聽)의 명을 받게 되었을 때는 이를 극력 반대하면서 대청을 명하는 왕의 하교를 받아쓰려는 승지를 몸으로 가로막기까지 했다.1776년 3월 영조의 승하로 왕위에 오른 정조는 곧 왕비를 왕대비로 올리면서 어머니 혜빈(惠嬪)을 혜경궁으로 높이는 한편, 영조의 유지에 따라 효장세자도 진종(眞宗)대왕으로 추숭하고, 효장묘도 영릉(永陵)으로 격을 높였다. 그 다음에 생부의 존호도 장헌세자로 높이고, 묘소도 수은묘(垂恩墓)에서 영우원(永祐園)으로 격상하고 경모궁(慶慕宮)이라는 묘호(廟號)를 내렸다. 자신의 왕통에 관한 정리를 이렇게 마친 다음 곧 홍인한 ·정후겸 등을 사사(賜死)하고 그 무리 70여 명을 처벌하면서 《명의록(明義錄)》을 지어 그들의 죄상을 하나하나 밝혔다. 즉위와 동시에 본궁을 경희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기고 규장각(奎章閣) 제도를 시행하여 은 각 붕당 안에 군자 ·소인이 뒤섞여 오히려 붕당을 깨서 군자들을 당에서 끌어내어 왕정을 직접 보필하는 신하로 만드는 것이 나라를 위해 더 필요하다고 논파하였으며, 편전의 이름을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고 하여 이를 실현시킬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재위 21년째인 1797년에 쓴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에서 백성을 만천에 비유하고, 그 위에 하나씩 담겨 비치는 명월을 ‘태극이요, 군주인 나’라고 하여 모든 백성들에게 직접 닿는 지공지순한 왕정이 자신이 추구하고 실현시킬 목표라는 것을 정리해 보였다.그는 만천에 비치는 밝은 달이 되기 위해 선왕 영조 때부터 시작된 궁성 밖 행차뿐만 아니라 역대 왕릉 참배를 구실로 도성 밖으로 나와 많은 백성들을 직접 만나는 기회를 만들었다. 100회 이상을 기록한 행차는 단순한 참배만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의 민원을 접수하는 기회로도 활용하였다. 그는 재위 3년째에 상언(上言) ·격쟁(擊錚)의 제도에 붙어 있던 모든 신분적 차별의 단서들을 철폐하여 누구든 억울한 일은 무엇이나 왕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도록 하여 능행(陵行) 중에 그것들을 접수하도록 하였다. 《일성록(日省錄)》과 실록에 실린 상언 ·격쟁의 건수만도 5,000건을 넘는다. 재위 13년째인 1789년에 아버지 장헌세자의 원소(園所)를 수원으로 옮긴 뒤로는 능행의 범위가 한강 남쪽으로 크게 확대되었다.그는 수원도호부 자리에 새 원소를 만들어 현륭원(顯隆園)이라 하고 수원부는 화성(華城)을 새로 쌓아 옮기고, 이곳에 행궁과 장용영 외영을 두었다. 화성 현륭원으로 행차할 때는 한강에 배다리[舟橋]를 만들었는데 그 횟수가 10회를 넘었다. 재위 9년에 경강(京江), 즉 한강의 상인들 소유의 배를 편대하여 각 창(倉)별로 분속시켰는데 14년에 주교사(舟橋司)를 세워 그 배들을 이에 소속시켜 전라도 조세 운송권의 일부를 주면서 행차 때 배다리를 만들게 했다.정조는 재위 2년째인 1777년에 대고(大誥)의 형식으로 자신이 펼 왕정의 중요 분야를 민산(民産) ·인 특권을 없애 상업활동의 기회를 균등히 했다.백성들이 부당한 형벌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영조 때 시작된 형정의 쇄신을 계승하여 재위 2년째에 형방승지를 의금부 형조 등에 급파하여 기준을 어긴 형구(刑具)의 실태를 조사해 이를 고치게 하고, 그 기준을 《흠휼전칙(欽恤典則)》에 실어 각도에 배포하였다. 책에 실은 자의 길이와 같은 유척(鍮尺)을 만들어 함께 보내면서 준수를 엄명하고 어사들로 하여금 이를 자주 확인하게 하였다. 재위 7년부터는 의금부와 형조 등의 결옥안(決獄案)을 초록하여 매월 말에 보고하게 하고, 4분기마다 책자를 만들어 왕에게 올리도록 하였다. 사형수의 결옥안은 밤을 새워가면서 10번이나 확인하여 억울함이 없도록 힘썼다. 그 심의 기록이 《심리록(審理錄)》이라는 책자로 전한다. 9년째 되던 해에는 역대 법전들을 모아 《대전통편(大典通編)》을 편찬하여 법치의 기반을 다졌다.인재의 양성을 위해서는 초계문신 문강(文講), 선전관 무강(武講) 제도를 시행하는 한편, 성균관 월과(月課:월별 수강과목 지정)제도를 시행하고, 유생들이 관내에 상주하면서 공부하도록 하기 위해 사찰 승려들의 회식제도를 도입하여 식당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과거제도 개선을 위해 대과(大科)는 규장각을 통해 국왕이 직접 관장하여 많은 과폐를 없앴으며, 만년에는 각도에서 행해지는 소과(小科:흔히 道科라고 불렸다)도 혁신하고자 주나라의 고사를 빌려 빈흥과(賓興科)로 이름을 고쳐 시행했다. 빈흥과는 국왕이 직접 출제하여 이것을 규장각신이 가지고 현지에 내려가 과장에서 개봉 ·게시하고 답안지를 거두어 규장각에 가지고 와서 국왕의 주관 아래 채점하여 합격자를 발표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규장각에 검서관(檢書官) 제도를 신설하고 북학파의 종장(宗匠)인 박지원(朴趾源)의 제자들, 즉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박제가(朴齊家) 등을 등용함으로써 그 사상의 수용을 기도하였다. 그런데 이 검서관들은 신분이 서얼로서 영조 때부터 탕평책의 이념에 편승하여 [서얼통청운동(庶孼通淸運動)]이라는 신한 것으로 《사원영화(詞苑英華)》 《시악화성(詩樂和聲)》 《팔자백선(八子百選)》 등 다수, 경학에 관한 것으로 《경서정문(經書正文)》 《역학계몽집전(易學啓蒙集箋)》 등, 사서로 《송사전(宋史筌:72)》 《사기영선(史記英選:95)》 등, 유가서로 《주서백선(朱書百選)》, 불서로 《범우고(梵宇考)》, 지리서로 《도리총고(道里摠攷)》, 축성서로 《성제도설(城制圖設)》, 왕조의 의례관계로 《속오례의(續五禮儀)》 등 수다한 저술이 이루어졌다.선왕 영조 때 한국의 제도문물의 내력을 쉽게 알아보기 위해 편찬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를 크게 증보하여 《증보동국문헌비고(增補東國文獻備考)》를 만들고, 1782년에는 역대 선왕들의 치적을 담은 《국조보감(國朝寶鑑)》을 보완하였다. 보감은 세조 때 태조 ·태종 ·세종 ·문종 4조의 것을 편찬한 이후 숙종 때 《선조보감》, 영조 때 《숙묘보감》을 편찬하는 데 그쳐 그 사이에 12조의 보감이 궐문이었는데 이를 보충하고 《영조보감》을 새로 만들어 합쳐 1768권으로 완성시켰다. 1784년에는 보감을 종류별로 재편집하여 《갱장록》이라고 하였다. 1781년에 강화도 외규장각을 설치하여 역대 왕실의 의궤들의 원본을 안치하여 영구보전을 꾀하였다.비단 조선왕조의 역대 왕들의 치적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단군 ·기자 ·삼국 ·고려의 시조 등의 왕릉을 수리하고 수로왕릉과 신라의 제 왕릉에 두루 제사지냈으며, 삼성사(三聖祠) 제의를 바로하고, 온조왕묘를 숭열전(崇烈殿)으로 이름붙이고, 고려 4태사묘에 사액하였다. 외적 격퇴에 공이 큰 인물들의 전기 편찬에도 힘써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를 비롯해 《김충장유사(金忠壯遺事)》 《임충민실기(林忠愍實記)》 《양대사마실기(梁大司馬實記)》 등을 편찬 ·간행하였다. 왕조 전기에 만들어진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를 합쳐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로 편찬 간행하고 향촌질서 유지에 필요한 각종 의례들을 종합 정리하여 《향례합편(鄕禮合編)》을 펴내게 했다.이 많은 저술들의 출판을 위해 임진자(壬辰字) ·정수부에서 열어 전국의 노인들에게 두루 혜택이 돌아가는 조치를 내리기도 하였다. 즉 이 행사를 기념해 조관(朝官)은 70세 이상, 일반 사서(士庶)는 80세 이상, 80세 전이라도 해로한 자 등에게 1계를 가자(加資)하여 모두 75,145인이 혜택을 보았는데 《인서록(人瑞錄)》이라는 책으로 이 사실의 자세한 내용을 남겼다. 1793년의 현륭원 참배를 계기로 비변사로 하여금 원행정례(園行定例)를 저술하게 하여 원행의 절차, 행렬 규모와 의식 등을 정례화하고, 1795년 잔치의 모든 사실은 《정리의궤통편(整理儀軌通編)》으로 남겼다. 재위 10년째에 효의왕후 몸에서 난 문효세자(文孝世子)가 죽자 24년째 정월에 수빈(綏嬪) 박씨 몸에서 난 아들을 세자로 책봉했다. 재위 18년째인 1794년에 발병한 절후(癤候), 즉 부스럼이 피부를 파고드는 병이 격무와 과로로 아주 심해져 1800년 6월 28일에 49세로 일생을 마쳤다.타계하기 한 해 전에 아버지 장헌세자의 저술을 손수 편집하여 예제(睿製) 3책을 남겼고 자신의 저술 ·강론 등도 수년 전부터 각신들에게 편집을 명하여 생전에 《홍재전서(弘齋全書)》 100권으로 정리된 것을 보았으며, 1814년에 순조가 규장각에 명하여 이를 간행하였다. 유언에 따라 현륭원 옆에 묻고 건릉(健陵)이라 했다. 시호를 문성무열성인장효(文成武烈聖仁莊孝)라고 하였으며, 왕조가 대한제국으로 바뀐 뒤 1900년에 선황제(宣皇帝)로 추존되었다.*정조의 업적중에서도 도성을 화성으로 옮기는 거대한 사업을 추진내정의 개혁에 박차를 가했고, 백성의 고통을 말할 때마다 눈물을 글썽거렸다 한다.먼저 수령권의 강화를 도모했다.다시 말해 지방관의 권력을 확대해준 것이다. 지방관들은 왕권을 대행하면서 많은 부정을 저질렀다. 하지만 지방 사대부와 토호의 위세에 눌려 소신껏 행정을 펼 수 없는 처지에 늘 몰렸다. 정조는 “나의 생각은 오직 백성들이 평안하게 사느냐, 근심에 찌들어 사느냐에 모아 있다. 이는 수령의 손에 달려 있다”(‘홍재전서’)고 했다.정조는 아무리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