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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니코마코스윤리학 요약 정리 감상 평가A+최고예요
    아리스토텔레스 - 니코마코스 윤리학-서론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무엇이 올바른 행복한 삶이고, 탁월한 올바른 행위인가와 같은 윤리적 문제에 대하여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답변을 전하고 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심사는 인간 행위의 궁극적 목적인‘행복’이다.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 누구나가 다 동의할 수 있는 행복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는 없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른 생물과 구별되는 인간만의 고유한 기능이 무엇인가를 탐구하고 그로부터 누구나 동의하는 보편적인 행복이 있음을 논증한다. 그리고 그 행복에는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지, 그 과정에서 필요한 앎은 무엇인지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다.본론1권 : 인간을 위한 선이란 무엇인가?처음시작은 지금부터 우리가 알고자하는 선이라는 주제가 무엇이며 이 선이란 어떤 것이고 어떤 성질을 가졌는지를 포괄적으로 설병하여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요점은 선중에 가장 으뜸인 것은 행복이라는 것이고 이 행복은 좋은 교육과 학습으로 인하여 얻어지는 것이 가장 좋다고 말하고 있다. 이 행복은 사람마다 추구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보편성을 띄지 않는다. 그리고 이 행복은 덕을 뛰어넘고 있다. 마지막 장에서는 행복의 요소가 되는 덕에 관하여 서문을 내면서 2권에서의 논제가 되는 덕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1장 : 모든 기술, 행동과 추구의 목표는 어떤 선을 목표 삼는 것이다. 모든 행동에는 목표가 있고, 그 목표가 바로 선이다.2장 : 선이란 모든 행동의 목표이기 때문에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이 선이 무엇인지 어느 것이 대상이 되는 지 파악해야 한다. 이에 대표적으로 인간의 가장 우위적인 기술인 정치학을 들 수 있다. 정치학은 한 국가에서 어떤 학문이 연구되어야 하는지 정하고 병법, 경제, 변론 같은 가장 높이 존대 받는 능력들이 정치학에 종속함을 보기 때문이다.3장 : 선에 대한 견해의 많은 차이와 변동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더욱 나쁘게 하거나 보다 좋은 것이 되게하는 것들과 상관하여 이것들에 관심을 두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나쁘게 되는 것은 쾌락과 고통 때문이다. 즉 이것들을 추구하고 회피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추구하거나 회피해서는 안되는 쾌락이나 고통을 추구하거나 회피하며, 혹은 추구와 회피의 때를 잘못잡고, 혹은 그릇된 방법으로 추구내지 회피하고, 혹은 이 밖에 이와 비슷한 잘못을 저지르기 때문이다.* 덕은 쾌락과 고통에 관하여 최선의 행위를 하기 마련이고 악덕은 이와 반대이다. (情意)* 우리들의 생활 속에 스며든 이 정의(쾌락의 파토스)를 떼어 버린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정치학의 온 관심사는 쾌락과 고통이다. 이것들을 잘 처리하는 사람은 선한 사람이 될 것이요. 이것들을 잘못 처리하는사람은 악한 사람이 될 것이다.4장* 올바른 행위를 함으로써 올바른 사람이 되고 절제적인 행위를 함으로써 절제있는 사람이 된다.* 행위자가 행위를 할 때 일정한 상태에 있지 않으면 안된다. 첫째로 그는 지식을 가져야 하며, 둘째로 그는 행위를 선택하되 그 행위 자체 때문에 선택해야 되며, 그리고 세째로 그의 행동이 확고하고 불변하는 성격에서 나오지 않으면 안된다.* 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의 조건으로서는 지식이란 거의 아무런 혹은 전혀 아무런 중요성도 없는 것이다.* 올바른 행위를 하지 않고, 이론에 도피하여 자기는 철학자요, 철학을 함으로써 선하게 되려니 생각하는 것은 잘못.5장 :덕이란 것은 선택의 양식. 덕은 곧 성품 즉 성격의 상태.6장* 무릇 덕이란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것을 좋은 상태에 이르게 하고 또 그것의 기능을 잘 전개시켜 주는 것. ...... 인간의 덕도 인간을 선하게 하며 그 자신의 일을 잘하게 하는 성품.* 중간은 대상 자체에 있어서의 중간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중간이다.* 도덕적 덕은 중간을 목표로 삼는 성질을 가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덕은 일종의 중용이다.)* 실패한다는 것은 여러 방면에서 가능한 데 성공한다는 것은 하는 것은 비겁한 자의 하는 짓.)* 그는 남을 경멸하는 까닭에 자유롭게 말하며, 또 속없는 사람들에게 비꼬아 말할 때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있는 대로의 사실을 말하기 때문이다.* 긍지있는 사람은 자기의 생활을 남 중심으로 맴돌게 할 수가 없다.* 그는 이익이 많고 유용한 것들보다는 오히려 이익이 없지만 고귀한 것들을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이다.5장* 악은 자기 자신도 파괴하는 것.* 복수하는 것이 보다 인간적.* 조금 밖에 정도를 벗어나지 않는 사람은 비난을 받지 않는다.6장* 자기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절대로 괴로움을 주지 않는 것.* 친구 : 될 수 있는대로 쾌락을 주려하며, 고통을 주는 것을 피하려 하겠지만, 결과를 더 중요시하여 명예와 유익의 면을 살펴 이것들을 살리는 방향으로 행동할 것이다. 또 그는 미래의 큰 쾌락을 위하여 적은 고통을 주는 것을 꺼리지 않을 것이다.7장* 과장은 역겨운 것.* 어떤 목적이 있어서 큰 소리를 친다고 하면 사정이 달라진다.* 허풍선이가 허풍선이 되는 까닭은 그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목적에 있다.* 비꼬기를 잘하는 사람들, 즉 모든 일을 사실보다 낮추어 말하는 사람들은 성격상 매력이 더 있어 보인다. 그들은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과시를 피하기 위해서 말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니 말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과 어떤 사람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함에 따라 또한 차이가 생길 것이다.* 사물의 우스운 측면이란 가까운 곳에 있는 것.8장 :점잖고 교양있는 사람은 이를테면 그 자신에 대한 법률이다.9장* 수치는 불명예에 대한 일종의 공포* 부끄러운 느낌을 가지게 할 일을 전혀 해서는 안되는 것. 왜냐하면 부끄러운 느낌은 좋지 못한 행위의 결과이기 때문에 좋은 사람에게는 속 할 수 없는 것.* 좋지못한 행위를 하고서 부끄럽다고 느끼는 체질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이러한 체질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자기 자신을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부조리한 일이다.*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것이 나쁜 일이라고 간에는 정의 외에 또한 친애고 필요하며, 또 정의의 가장 참된 형태는 친애의 성격을 띤 것으로 여겨진다.2장 - ‘사랑할 만한 것’은 선한 것이거나 즐거운 것이거나 유용한 것이기에 말이다. 그런데 유용한 것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어떤 선 혹은 쾌락이 생기는 것’이라 여겨지므로, 그 자신 목적으로서 사랑할만한 것은 선과 쾌락이다.선의가 서로 교환될 때에 친애가 되는 것이다.3장 - 완전한 친애는 선한 사람들의, 그리고 덕에 있어서 서로 닮은 사람들의 친애다. 왜냐하면 그들은 상대방이 선한 사람인 한에서 서로 상대방에게 좋은 것을 바라며, 또 그들 자신이 선한 사람인 때문이다. 그런데, 자기의 친구를 위해서 그에게 좋은 것을 바라는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참된 의미에서 친구라 하겠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은 그들의 본성이 그러해서 이렇게 하는 것이지 수반적으로 그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4장 -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해서는 분명히 오직 선한 사람들만이 친구일 수 있다. 왜냐하면 나쁜 사람들은 서로 사귐으로써 어떤 이익이 있지 않으면 피차간 상대방에게서 기쁨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5장 - 애정은 무생물에 대해서도 느낄 수 있는 것이로되 교호적(交互的)인 애정은 선택을 예상하며, 또 선택은 성품에서 솟아나는 것이기에 말이다. … ‘친애는 균등’이란 말이 있는데, 이것은 선한 사람들의 친애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6장 - 친애는 균등성을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친구들은 피차 상대방으로부터 동일한 것들을 얻으며, 피차 상대방을 위하여 동일한 것들을 얻으며, 피차 상대방을 위하여 동일한 것을 바라며, 혹은 피차간에 서로 다른 것을 교환하기 때문이다 - 가령 유용성과 쾌락을 교환한다. 하지만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유용성이나 쾌락을 위한 친애는 다 같이 참된 의미에서 친애도 아니고 그다지 영속하는 것도 아니다.7장 - 쌍방 사이에 불평등을 내포하는 친애 … 이것은 각자의 덕과 기능이 서로 다르며, 또 그들이 사랑하는 까닭도 다르며, 따라서 그 애정과 친애가 또한 서 우애는 좋은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서로 사귐으로써 이 선은 더욱 증가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여러 가지 활동에 의하여, 또 서로 상대방을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함으로써 더욱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피차 상대방으로부터 자기가 좋게 여기는 점을 본받기에 말이다. 그래서 “고귀한 사람에게서 고귀한 일”이란 속담이 생긴 것이다.1장 :쾌락의 윤리적 중요성과 쾌락과 고통에 대한 두 견해쾌락은 인간의 본성과 가장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쾌락과 고통은 생활 전체에 관계하며, 덕과 행복에 대해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들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쾌락을 선택하고 고통을 회피하기 때문이다.특별히 쾌락과 고통에 대한 많은 견해 차이가 있기에 이러한 중요한 주제를 논하지 않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쾌락을 좋음이라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와 반대로 쾌락이란 하찮은 것이라고 말한다. 후자 가운데 어떤 사람은 실제로 그렇다고 보며 또 어떤 이들은 비록 사실은 그렇지 않을지라도 쾌락을 하나의 하찮은 것으로 드러내어 보여주는 것이 우리의 생활에 더욱 좋은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쾌락에 기울어지기가 쉽고, 또 자기들이 여러 가지 쾌락의 노예가 되기 때문에 반대 방향으로 이끌어 가야만 중간의 상태에 이를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좋은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감정이나 행위에 대한 논의는 일보다 덜 신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들이 명백한 사실들과 일치하지 않을 때는 경멸을 불러일으키며 게다가 진리마저 파괴한다.2장 : 쾌락에 대한 에우독소스의 입장첫째, 이성적인 것이나 비이성적인 모든 것이 쾌락을 추구하고 모든 경우에 있어서 바람직한 것은 훌륭한 것이요, 가장 바람직한 것은 가장 큰 선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각각의 존재자는 자기나름의 선을 찾기 때문이다.둘째, 고통은 모든 것이 회피하는 것이기에, 따라서 그 반대가 되는 쾌락은 모든 것이 선택하는 것이다.셋째, 쾌락은 다른 어떤 것 때문에 다른 적 쾌락
    인문/어학| 2008.05.10| 22페이지| 5,900원| 조회(5,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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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전쟁의 영향(한국전쟁이 국내외에 끼친영향) 평가A+최고예요
    한국전쟁의 국내?국제적 영향◇목Ⅰ. 서론Ⅱ. 한국전쟁의 대내적 영향1. 경제적 영향2. 민족 분열의 고착화3. 군사적 영향4. 대외정책에 끼친 영향5. 국내정치에 끼친 영향6. 사회적 영향7. 주한미군의 주둔차◇Ⅲ. 한국전쟁의 대외적 영향1. 한국전쟁이 주변 4대강국에 미친 영향(1)미국(2)소련(3)일본(4)중국2. 한국전쟁이 국제정치에 미친 영향Ⅳ. 결론Ⅰ. 서 론벌써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반세기가 넘었다. 한국전쟁은 민족사적으로나 세계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다.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서 이 전쟁은 전국토를 폐허로 만들었고 3백여만 명의 인명손실을 초래했을 뿐 아니라, 남북한 사회의 각 분야에 너무나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그 영향은 여전히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구성원들의 삶의 조건과 구조, 그리고 그들의 인식까지도 지배하고 있다. 국제적 측면에서 보면 한국전쟁은 냉전을 더욱 가속화시켰으며, 이에 따라 동?서 진영 간의 대결체제는 더욱 경직되었다. 이와 함께 한국전쟁은 자유세계에서 미국의 지도적인 지위와 역할을 강화시킴으로써 국제질서의 흐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제2차 세계대전 후 분단된 남북한 사이의 열전을 계기로 심화된 냉전체제는 이제 와해되었다. 그러나 동?서독이 통일되고 과거 적대적인 두 진영의 맹주였던 미?소 정상이 함께 ‘냉전시대의 종식’을 선언한지 10여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남북한은 분단의 터널을 빠져나오지 못한 채 이념적으로는 물론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냉전적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세계적인 탈냉전의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에서 냉전적 대결상태가 계속되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전쟁의 영향에 관한 많은 글들은 그 주요 원인을 한국전쟁으로 인한 특수성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즉 한국전쟁이 남북한 상호간에 불신과 증오심을 고취시켰다는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문제의식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을 계기로 남북의 상호 적대감이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심화되었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부족한 것이 던 상호 적대감과 맞물리면서, 서로 다른 사회?경제 체제를 더욱 구조화시키는 과정이었다. 한국전쟁은 김일성과 박헌영이 ‘통일을 위해 선택한 전쟁’이었지만 그 결과는 통일이 아닌 분단의 고착화로 이어졌다. 1948년 두 개의 분단국가가 탄생했을 때만 해도 분단이 비교적 유동적이고 잠정적인 것이었지만 전쟁이 끝난 1953년에는 분단이 고정적이고 지속적인 것으로 바뀌어 버렸다.전쟁은 남과 북은 완전히 이질적인 사회로 바꾸어 놓았다. 정치?경제?사회?문화와 더불어 서로의 의식구조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런 분단 체제는 동족의식이나 민족의식마저 약화시켰고, 남북 모두에게 비정상적이고 왜곡된 형태의 발전을 가져다주었다.3. 군사적 영향(1) 남과 북의 군대를 거대한 집단으로 성장시킴전쟁이 끝난 후 남한 군대는 60만 대군으로 불어났고, 이와 더불어 경찰, 관료기구, 정보기관, 사법기구 등의 온갖 국가기관들도 국민의 통제를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메카니즘에 의해 굴러가면서 국민을 통제하는 사회적인 기구로 등장했다. 전쟁에서 비대해진 군부의 영향력은 5?16군사쿠데타로 나타났다.구체적으로 남한과 북한을 구분해서 살펴보면 우선 남한은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5만여 명으로부터 6만 5천여명 규모이던 한국육군은 휴전 직후 65만 5천여명 규모로 확대되었다.) 그 뒤로도 한국군은 약 60 만 명의 규모를 유지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약 53만 명이 육군이다.이와 더불어 국내정치에 대한 군부의 영향력이 커졌다. 군부의 성장은 대체로 미국의 지원 아래 이뤄졌다. 특히 1953년 10월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체결로써 두 나라의 군사동맹이 성립됨에 따라 한국군에 대한 미국의 지원은 체계화되었다. 한편 1950년 7월 한국 전쟁중에 체결된 한?미간의 대전협정은 한국군에 대한 작전 지휘권을 사실상 주한미군 사령관에게 이양함으로써 한국군에 대한 미군의 통제를 강화했다.또한 한국전쟁은 북한의 군사력을 급격히 팽창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전쟁을 일으키기 직전에 이미 약 13만 5천명의 병했는데, 이것은 한반도 문제에 관해 서방안과 공산권안을 동시 채택한 1970년대 중반 이후에는 중단되었다.(2) 북한은 반소반미정책, 친중, 비동맹외교에 치중한국전쟁은 북한의 대외 관계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북한 정권은 원래 소련의 적극적인 비호 아래 탄생했으며, 소련의 강력한 통제아래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기에 소련은 북한에 대해 많은 지원을 베풀지 않았고 이것은 북한 정권으로 하여금 소련에 대한 깊은 불신을 갖게 했다.그러나 소련에 비해 중공의 지원은 적극적이었다. 북한 정권이 붕괴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구출에 나선 쪽은 소련이 아니라 중공이었다. 따라서 북한은 점차 소련에 대한 불신감을 갖게 되었고 중공과도 우의를 두텁게 하게 되었다. 또한 그들은 반소반미정책을 기치로 내걸고 비동맹외교에 치중하게 되었다. 이로써 북한의 대외관계는 많은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5. 국내정치에 끼친 영향(1) 남한의 이승만 정권의 독재화한국전쟁은 우선 우익적이며 반공적인 국가 질서를 강화시켰다.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된 남한에는 좌우익 투쟁이 치열했다. 이 투쟁에서 좌익이 패배하고 이승만을 중심한 우익이 주축이 되어 남한에서의 정부수립을 준비해나갔다. 이 시점에서 우익의 주요한 일부가 민족주의의 이념아래 통일 정부의 수립을 강조하면서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을 추진했으나 좌절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승만이 주도하여 세우려는 정부를 단독정부라고 규정하고 그것에 참여하지 않았다.이러한 배경에서 이승만을 중심한 우익세력은 미국과 국제연합의 비호아래 1948년 8월 15일 대한 민국을 수립했다. 그러나 대부분 월북했거나 지하로 들어간 좌익은 논외로 한다고 해도 중간파와 일부 이익의 반발은 정치체제 밖에 그대로 남았으며 이승만 정권의 정통성에 부담을 주었다. 그러한 부담을 1950년 5월 30일에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 더욱 표면화되었다. 이 선거에서 대한민국수립을 추진한 중심적 정치세력이 약화되고 반면에 남북협상파를 비롯한 중도파가 두드러지게 전출하는 희생된 반면에 약 40만명의 새당원이 입당했기 때문이다. 1956년 초 현재 당원의 약 51.7%가 한국 전쟁 발발 이후에 입당한 사람들이었다고 한다.6. 사회적 영향(1) 남한에 끼친 사회적 영향한국전쟁은 민족의 대이동을 낳았다. 특히 북한에서 많은 사람들이 공산통치를 피해 남한으로 피난했는데 그들은 대체로 황해도와 강원도 및 함경남도와 같이 남한에 가까운 지역 출신이었다.한국 전쟁은 도시로의 인구집중을 낳았다. 농민들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농촌을 떠나 막노동과 품팔이가 쉬운 큰 행정도시로 몰려 들었고 역시 전쟁의 피해로 그 기능을 잃은 지방의 중소도시 주민들은 고용기회가 비교적 많은 대도시로 이동했다. 이런 요인들이 겹쳐 서울?인천?대전?광주?대구?부산등과 같은 도시들이 급격히 성장했다. 이와같은 도시로의 인구집중은 한국전쟁 발발 직전 5만 명 이상의 인구를 가진 도시의 전체인구가 남한 인구의 약 17%였음에 비해 1955년 24%로 증가한 사실에도 잘 나타나있다.이런 인구 이동으로 이산가족문제가 발생했다. 남북으로 흩어진 이산가족의 수를 정확히 밝히기란 어렵다. 그러나 사회학자들 사이에서는 남한에서 북한으로 넘어갔거나 납치된 사람의 수는 약 30만 명이고, 북한에서 남한으로 넘어온 사람은 45만 명에서 72만 명 사이인 것으로 추산된다. 이 숫자를 합치면 75만 명에서 1백만 명 사이의 인구가 이동한 셈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북으로부터 남으로 피난해 온 사람의 수는 약 3백만 명이고 이산가족의수는 1천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말해진다. 한국전쟁을 통해 대대적인 인구이동이 발생된 것이다.한국전쟁은 粗사망률을 증대시켰다. 한국전쟁 기간의 粗사망률은 약 3.6~4.7%로 추산되는데 이것은 한국전쟁 발발이전의 粗사망률 약 2%의 2배에 해당된다. 한국 전쟁기에 가장 많이 죽은 연령대는 15~34세인 것으로 추산된다. 한편 한국전쟁기의 출산율은 연평균 수준보다 약 10%정도 낮아진 것으로 추산된다.휴전이 성립되면서 정치상황이 비교적 안정되자 출산율이 높아져 195승만과 보수진영 일부는 남한에서 미군이 철수하는 것에 대해 반대했고, 철수를 저지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으나 미군은 철수했다. 그런 뒤 1년도 채 안되어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북한의 남침으로 일어난 전쟁의 결과 이승만과 보수진영 일부는 미군철수 반대론을 합리화시킬 수 있게 되었다. 즉 새로운 공식적인 무기가 생겨난 것이다. ‘미군이 있으면 김일성이 침략을 못하지만 미군이 없으면 곧 남침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한국 땅에 자국의 군대를 영구히 주둔시킬 수 있는 구실과 근거가 미국에서 주어졌던 것이다.Ⅲ. 한국전쟁의 국제적 영향1. 한국 전쟁이 강대국의 국내정치와 대외정책에 미친 영향(1) 미국에 미친 영향한마디로 말해 한국전쟁을 통해 미국은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이름과 실제 양면에서 세계 최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흔히 2차 대전이 끝나면서 미국이 그러한 지위를 얻은 것으로 말해지고 있으나, 미국의 군사력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크게 증강됐고 이것을 바탕으로 국제 정치에 대한 미국의 정치적 영향력은 훨씬 커졌다.1) 국내정치적 측면미국의 반공 반소 분위기를 크게 높였다. 전쟁 이전에도 2차 대전이 끝난 뒤 미 소 관계가 점점 악화되고 냉전이 전개되면서 그러한 분위기는 높아지고 있는 상태였다ex1) 1948년 8월에 미 연방하원의 ‘비 미국적 활동 조사 위원회“가 열었던 히스 청문회“이 사건은 민주당 행정부가 공산주의에 대해 약할 뿐만 아니라 민주당 행정부 아래서 뉴딜정책을 추진해 온 관리들의 일부가 공산주의자들과 연결되어 있다” 고 주장해온 공화당의 반공파를 기쁘게 만들었다. 같은 년도에 미 법무부는 미국공산당의 간부들을 ‘폭력적 혁명’을 추구한 혐의로 기소했고, 1951년 연방대법원은 그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한국전쟁이 일어나고, 그것이 소련의 '붉은 음모‘의 산물이라는 믿음이 확산되면서 ’적색공포증‘ 은 미국 사회를 지배하였다.“ex2)1950년 7월 로젠버그 부처의 ‘원폭 간첩사건“그리고 아이젠하워 행정부의다.
    인문/어학| 2007.12.05| 10페이지| 3,900원| 조회(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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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피노자의 윤리학에 대한 고찰
    1. 스피노자는 어떤 사람인가1) 일생네덜란드의 철학자. 암스테르담 출생. 포르투갈계 유대인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에 유대교단의 학교에서 헤브라이어와 성전(聖典)을 공부하였고, 카바라의 신비사상에도 접하였으나, 졸업 후에는 고전어를 공부하고 인문주의적인 교양을 쌓아 점차 이단적인 서구적 사상으로 기울어졌다. 수학·자연과학도 공부하였고, 데카르트 철학에서 결정적 영향을 받았으며, 이 학설에 의거하여 성전과 조상의 학문을 대담하게 비판하였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비위를 거슬려 1656년 끝내 파문선고를 받았다. 유대교 광신자 중에는 그의 암살을 기도하는 자까지 출현하였으므로, 그는 각지를 전전하면서 극도로 고립된 생활을 계속하였다. 그 때문에 오히려 한가한 시간이 생겨 연구생활에 몰두할 수 있게 되어 《신(神)·인간 및 인간의 행복에 관한 짤막한 논문》 《지성 개선론:Tractatus de intellectus emendatione》을 집필하였고, 《데카르트 철학 원리:Renati de Cartes principiorum philosophiae》(1663)를 출판하였다. 63년 폴부르크로 이사하였고, 70년 다시 헤이그로 이사하였다. 73년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철학 정교수로 초청하였으나, 사상의 자유와 《에티카(윤리학)》의 완성을 생각하여 이를 거절하였다. 이해에 《신학정치론:Tractatus Theologico-Politicus》을 익명으로 출판하였으나, 이것이 신을 모독하는 책이라고 비난당하는 고초를 겪었다. 이 때문에 그는 15년의 세월을 들여 완성한 주저 《에티카:Ethica in Ordine Geometrico Demonstrata》(75년 완성)를 생전에 출판하는 것이 불가능해졌을 뿐만 아니라, 스피노자 철학 그 자체가 사후 100년 동안 무용지물로 매장되었다. 그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명성과는 인연이 없는 생활을 하였으며, 여가에 렌즈를 갈아서 생활비를 조달하였다. 그는 《국가론:Tractatus politicus》(77)을 마지막 저작으로 남엄성에 관하여 라는 책에서 “자비로운 신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선택한 것을 갖도록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이 되도록 허락하셨다”고 말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런 현상들만으로는 그리스 사상이 주었던 높은 정신적 내용, 즉 ‘자유로운 근원적인 인간성’의 완전한 부활에까지 이르지는 못하였다. 심지어 이 운동이 가진 도덕성이 의심스러웠던 경우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문주의가 기울인 진지한 노력은 근세의 과학적 욕구의 근본형식을 선구적으로 규정했다. ‘근대자연과학은 휴머니즘의 딸이다’라는 표어는 이를 잘 말해 준다.2) 종교개혁16세기 신교의 종교개혁운동은 몇 가지 점에서 문예부흥과 그 영향이 비슷했으나, 한 가지 중요한 점에서 문예부흥과는 상반되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기본적인 의미에서 종교개혁운동의 본령은 종교적, 신학적, 교회사적인 것이었으며, 그 특징은 윤리적, 종교적 관심에 있다.종교개혁자들은 문예부흥의 개인주의를 조장하는 동시에, 사회의 제반사항에 대해서 르네상스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루터는 『기독교인의 자유』 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기독교인은 모든 사람의 자유로운 군왕이요, 어느 누구의 신하도 아니다. 그는 만인의 가장 충성된 하인이요, 모든 사람에게 종속된다.” 개인은 종교적 신앙의 기본적 문제를 자기의 양심에 비추어서 해결할 권리와 의무가 있는 것이다. 종교에 있어서 중요한 사실은 교회가 절대적으로 권위를 가진다는 교리가 아니라, 양심에 입각한 자기책임감이다. 이것이 도덕적 신생과 회심을 가져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루터는 교회가 권위적으로 요구했던 신앙에의 복종에 반대했고, 신앙의 경건, 즉 양심의 순수성과 내면성을 강조했다.종교개혁운동은 세속적인 활동의 중요성을 강조한 점에서 문예부흥운동과 비슷하다. 루터는 사람을 의롭게하는 것은 신앙이요, 의식이 아니라는 교리를 신봉했지만, 아울러서 “참된 신앙은 이웃 사람들에 대한 관용과 봉사의 실천을 통해서 가장 생생하게 그리고 틀림없이 표현된다”는 사도 바울의 주장을 받아들였 외적 세계를 어떻게 내적 세계로서의 의식이 인식할 수 있는가 하는 주관과 객관의 문제로 환원되었으며, 어떠한 방식에 의하여 진리가 인식되는가 하는 방법론의 문제와 어떠한 지식이 진리인가 하는 진리기준의 문제로 나누어졌다. 이와 같은 문제를 둘러싸고 근세철학은 점차 두 갈래의 방향으로 형성된다. 그 하나는 자연과학의 기계론적 자연관을 보다 근원적이며 궁극적인 제1원리로부터 연역해내려는 합리론이요, 다른 하나는 경험적으로 얻어질 수 있는 자연법칙에 준하여 정신적인 것을 설명하려는 경험론이다.3. 스피노자의 철학스피노자 철학은 세계관과 인생관에 관한 17세기 사상을 인상 깊게 요약한 것이다. 그의 주저 은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증명된” 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어서 사람들이 그의 철학을 순수한 이론적인 개념의 체계일 것이라고 예상함직 하지만 사실을 그렇지 않고 전체적인 인간의 관념들을 종교적-윤리적으로 구상해본 것이며, 하나이면서 모든 것인 존재를 바탕으로 하여 “신이 곧 실체요. 자연” 이라는 공식으로 일관되어있다. 스피노자는 이 공식에 나타나 있는 형이상학적인 통찰을 가지고서 출발하여 신에 대한 정신적인 사랑의 윤리학으로써 끝맺고 있다. 스피노자의 윤리설을 형이상학적 윤리설에 분류하는 데는 약간의 문제점이 없는 바는 아니다. 가치의 객관적 실재성을 부인하고 선악의 구별이 인간의 욕구와 감정에 관계된다고 보는 점, 그리하여 윤리학의 토대를 심리학에 두고 있는 그에게는 자연주의 윤리설과 상통하는 점이 매우 많다. 그러나 그의 윤리설의 바탕이 되고 있는 심리학은 과학적 방법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그의 형이상학의 연장이며 따라서 그의 윤리학적 방법이 자신의 형이상학을 출발점으로 삼은 연역의 방법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를 형이상학적 윤리설의 범주에 넣어도 무방할 것이라 생각된다.4. 자연은 실체이고 실체는 곧 신이다.우리는 스피노자의 윤리적 이상을 그의 에 나오는 다음의 구절에서 찾아 볼 수 있다.삶에 있어서 가장 값진 것은 지성 또는 이성을 가능한 한 최대로 완성하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만일 신 밖에 다른 실체가 있다고 하면, 신은 무한한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신이 갖지 않은 속성은 하나도 없기 때문에 그 실체도 또한 신이 갖고 있는 속성들 중에 어느 것을 갖지 않으면 안 되거니와 그렇게 되면 같은 속성을 갖는 두 실체가 있게 된다. 그런데 두 실체가 같은 속성을 갖는다고 한다면 그 두 실체는 결코 서로 독립적일 수가 없기 때문에 신밖에는 어떠한 실체도 있을 수 없게 된다. 실체는 스스로 어떤 것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다른 것이 의존하고 있는 본질이며 모든 다른 것의 원인이다. 세상에는 단 한가지의 실체만이 존재하는데 이 실체의 특성은 첫째, 유일하고 둘째, 무한하며 셋째, 독자적이다. 독자적이라는 말은 실체가 다른 어떤 것의 도움이 없이 그 자체로 존재하고 파악된다는 말이다. 완전히 독자적인 본질은 다른 것에 의하며 제한되지 않는다. 독자성으로부터 무한성이 나오고 무한성으로부터 유일성이 나온다고 할 수 있다. 실체인 신을 자기원인 혹은 제 1원인이라고 했다. 자기원인이란 그것의 원인을 다른 것으로부터 받지 않는 최후의 원인 즉 마지막 원인을 가리킨다. 모든 사물에는 그것이 있게 된 원인이 있다. 이를테면 A라는 사물의 원인은 B이고, B라는 사물의 원인은 C이고, C란 사물의 원인은 D이고.... 그러나 모든 사물의 원인을 끝까지 캐어 들어가면 마지막에 신이라는 궁극적 원인에 부딪치고 인과의 연쇄는 그 이상 나갈 수 없게 된다. 이와 같이 신의 원인은 다른 것에 있지 않고 바로 그 자신 속에 있으니 최후의 원인이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신을 자기 원인 혹은 제 1원인이라기보다 내재적 원인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하였다. 신이라는 최후의 원인은 모든 사물을 떠나 있는 원인이 아니라, 바로 여러 사물 속에 들어 있는 원인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신이 여러 사물 속에 있다면 자연을 곧 신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신은 자연이다” 고 말한 것이다. 그는 자연을 2가지 측면에서어내어서 인식하는 작용이다. 이것도 사물을 완전하게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직관적 인식은 결코 사물을 고립적으로 보지 않고 필연적인 관련 속에 있어서 보는 것이며 모든 사물을 ‘영원의 빛(모습) 아래서 (sub specie eternitatis)' 인식하는 것이다. 그것은 신과 정신과의결합 상태에 있어서의 인식이라 하겠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자기에 관한 완전하고 궁극적인 지식을 갖게 된다. 사물을 이러한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 즉 영원의 빛을 통하여 고찰함을 사물을 직각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것은 확실하고 완전한 인식이요, 인간 지식의 최고의 형태이다.7. 자유의지의 부정과 선악의 상대성스피노자는 비록 신의 존재를 철저하게 믿지만 그것은 유대교나 기독교의 신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의 신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처럼 초월적인 인격신이 아니며 인간에게 도덕적 계율을 제시하여 이것을 기준으로 하여 은총을 주거나 징벌을 내리는 신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신은 모두 인간의 상상력이나 원망의 소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유별나게 신의 사랑이나 구원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아우구스티누스와 마찬가지로 스피노자에게도 신의 사랑을 얻어내고 신으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이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 하는 가장 바람직한 삶이다. 그러나 이들의 신관이 서로 다른 만큼이나 이 ‘바람직한 삶’ 을 추구하는 방법도 상당한 차이를 보여준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모든 것은 인과율의 법칙에 의해 엄격히 규정되어 있다. 여기서 ‘모든 것’ 이란 단순히 하면 계절의 변화라든가 돌이 움직이는 것 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말하는 자연이나 신 혹은 실체 그 자체를 의미한다. 그는 “변화하는 모든 것은 영원한 질서와 자연의 법칙을 따라 변화 한다” 고 주장한다. 이 법칙이 인간의 심성 혹은 자유의지에까지 적용되는 것임은 물론이다. 그리고 윤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스피노자가 인간의 자유의지까지 자연의 법칙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고 주장하는말한다.
    인문/어학| 2007.12.05| 11페이지| 2,500원| 조회(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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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의주의 윤리설에 대한 비판적고찰
    정의주의 윤리설◆목 차◆1. 이모티비즘의 역사1)머리말2) 논리실증주의와 이모티비즘3)에이어와 극단적 이모티비즘4) 스티븐슨과 온건한 이모티비즘5) 이모티비즘에 대한 비판적 평가2. 스티븐슨의 이모티비즘1) 윤리적 판단과 태도 및 정의적 의미2) 태도와 가치판단 시인이론3) 설득적 정의4) 언어의 두 가지 목적5) 스티븐슨에 대한 평가1. 이모티비즘의 역사1)머리말20세기 초반에 와서 언어의 역할에 대한 철학적 관심이 부활하였다. 철학자들은 언어의 다양한 사용 방식을 고찰하기 시작하였다. 언어가 진술을 만드는 도구만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언어는 명령하고 요구하고 감정을 표현하고 의식을 행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다. 이러한 언어사용과 진술을 만들지 않는 언어사용이 심각한 철학적 사유의 주제가 된 것이다.언어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강조는 메타 윤리학의 영역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철학자들은 도덕적 문장은 단순히 도덕적 사실을 진술하기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한다는 가정으로부터 해방이 되었다. 그리하여 철학자들이 도덕적 문장의 다양한 쓰임새에 대한 세밀한 고찰을 통하여 얻게된 하나의 결론은 도덕적 문장은 일차적으로 감정을 표현하고 명령을 하는 데 쓰이며 사실을 진술하는 데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 전개된 가장 중요한 메타 윤리학적 입장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모티비즘(emotivism)이다. 이모티비스트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혹은 무엇이 선악인지에 관한 규범적 판단을 내리는 것보다는 규범적 판단의 언어적 특성을 해명하는 것이 철학의 역할이라고 이해하였다.흔히들 20세기의 윤리학의 과제는 윤리학적 회의론 혹은 비인지론을 극복하는 문제라고 말한다.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도덕원리 및 법칙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오늘날 비인지론자로 분류되는 메타 윤리학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전혀 학문적인 설득력을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는 이미 도덕판단이란 진위를 문제삼을 수 있는 판단이 아닐 뿐만 아니라 가치판단 자체의 학적 근거가 부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라도 무의미한 발언이며, 철학의 영역 밖으로 내쫓아야 한다.검증가능성이 있는 명제와 동의어반복을 제외한 모든 발언은 인식론적 견지에서 볼 때 무의미하다는 견해에 의하여 첫째로 철학의 울타리 밖으로 쫓겨나게 되는 것이 형이상학이다. 논리적 실증주의의 기준으로 볼 때, 형이상학의 명제들은 모두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의 여러 가지 주장들이 동의어반복이 분석판단도 아니요 검증가능성 있는 경험적 판단도 아니라는 것은 신의 존재, 영혼의 불멸, 우주의 목적 등 몇 가지 문제를 예로 들어 생각함으로써 알 수 있는 일이다.논리적 실증주의자들에 의하여 철학 밖으로 배척을 당하는 또 한 가지 분과는 윤리학 내지 가치론 일반이다. 이른바 ‘도덕판단’이 동의어반복, 즉 분석판단이 아님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그것이 학문적 연구의 대상이 되려면 검증의 가능성이 없다. 도덕적인 발언은 경험계의 현상을 서술하는 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약속은 지켜야 한다.”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은 악이다.” 따위의 발언이 어떠한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주는가? 논리적 실증론자들에 따르면 아무런 사실도 알려 주지 않는다. 그러한 발언들은 오직 발언자의 감정을 표명하거나 듣는이의 감정을 유발하는 구실을 할 뿐이다. 이른바 ‘도덕판단’이 감정을 표명하거나 환기하는 발언에 불과하다고 보는 논리적 실증주의자들의 윤리설을 ‘이모티비즘’이라고 부른다.3)에이어와 극단적 이모티비즘에이어에 따르면 철학의 임무는 전체로서의 실재의 세계를 규명하는 일이 아니라, 학문에 사용되는 언어를 논리적으로 분석하므로써 학문을 비판하는 일이다. 그런데 어떤 문장이 논리적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있으려면, 그것은 ‘의미가 있는’ 문장이 아니면 아니 된다. 어떤 문장이 의미가 가지려면 그 문장은 ① 그 문장에 사용된 술어의 정의에 의하여 그 진위를 밝힐 수 있는 비사실적?논리적 언명이거나, 또는 ② 경험적인 관찰을 통하여 그 진위를 확률적으로 밝힐 수 있는 사실적 언명이라야 한다. 그러나 이른바 ‘도덕판단’은 이상의로서의 구실을 할 수 없는 까닭에 부적당하다고 에이어는 일축해 버린다. 그것은 도덕적 발언의 타당성을 검증할 아무런 방도도 암시해 줌이 없기 때문이다.과거에 여러 모로 시도된 여러 가지 정의 가운데 하나도 쓸 만한 것이 없음은 평가적 언어의 정의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에이어는 단정한다. 평가적 언어에는 서술적 의미는 없고 오직 정의적 의미만이 있다. 다시 말하면, 평가적 발언은 그 발언자의 감정을 표명하거나 듣는 이로 하여금 어떤 감정을 느끼도록 유발하는 구실을 할 뿐, 사실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는다. 에이어의 요점은 그의 다음 구절 가운데 여실히 나타나 있다.내가 만약 누구에 “네가 그 돈을 훔친 것은 잘못이다.”이라고 말한다면, 그 말은 그저 “너는 돈을 훔쳤다.”는 말로써 전하는 바 이상의 사실을 알리지 않는다. 그 행동이 잘못이라고 덧붙임으로써 나는 그 행동에 관하여 조금도 더 알리는 바가 없다. 다만 나는 그 행도에 대한 나의 도덕적 비난의 감정을 표명할 뿐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미움에 가득찬 목소리로 “너는 그 돈을 훔쳤다!”고 외친 것이나 다름이 없다.4) 스티븐슨과 온건한 이모티비즘스티븐슨는 도덕적 평가란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모든 경우들에 타당하게 적용될 수 있는 단일한 설명을 제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대부분의 도덕적 평가의 근본 구조에 적용될 수 있는 두 가지의 일반적인 분석유형을 제시하고 있다.아무튼 스티븐슨의 일차적인 관심사는 왜 그렇게 많은 도덕적 불일치가 일어나며 그리고 이러한 불일치가 왜 그렇게 극복하기가 어려운가하는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만약 자연주의 도덕철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도덕적 용어들이 과학적 방법의 사용에 의하여 간파될 수 있는 자연적 속성들을 지칭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용어들을 포함하는 도덕판단들은 경험적인 검증이나 반증에 부쳐져야만 할 것이다. 만약 자연주의가 참이라면 과학적 탐구의 과정은 도덕적 명제의 진리치를 모든 합리적 정신의 소유자에게 신도 승인하시오’라는 것을 의미한다. ‘좋다’라는 말은 동시에 화자가 그 대상을 승인하고 있다는 것을 서술하며, 그 화자의 승인을 표현하며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승인하도록 강권하고 있는 것이다.스티븐슨은 의미의 개념에 관한 인과적이고 성향적인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우선 의미란 발언을 발생시킨 조건의 입장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그리고 또한 이러한 발언의 결과로 발생한 조건의 입장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종종 특정한 신념과 태도는 한 사람으로 하여금 특정한 말을 사용하게끔 인과적으로 인도하며, 그리고 이러한 말의 사용은 다시 그 말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동일한 신념과 태도를 가지게끔 야기 시킨다.결과적으로 ‘좋다’와 같은 단어의 의미는 특수한 태도와 신념의 집합과 관련된 성향에 의하여 규정될 수 있다. ‘좋다’라는 말이 가질 수 있는 한 가지 의미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한 대상을 승인하도록 야기하고 그리고 화자가 그 것을 승인하고 있다고 믿게끔 야기하는 성향이다. 이러한 경우에 있어서 이 말의 서술적 의미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화자가 그 대상을 승인하고 있다는 것을 믿게끔 야기하는 성향인 반면 그것의 정의적 의미는 그 대상의 승인을 표현하고 그리고 환기하는 성향이 된다.만약 도덕판단이 신념과 태도 양자의 함수라고 한다면 도덕의 영역에 있어서의 불일치의 이해는 이들 두 가지 요소가 어떻게 갈등을 일으킬 수 있으며 그리고 어떻게 상호 작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파악을 필요로 한다. 둘 또는 그 이상의 사람이 신념상의 불일치를 나타낼 수 있다. 태도상의 불일치의 경우 이것이 신념상의 불일치의 결과라는 것이 스티븐슨의 주장이다. 따라서 신념의 일치가 태도의 일치에로 인도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함수적 관계가 언제나 성립할 필요는 없다. 태도의 불일치는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신념의 불일치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그리고 신념의 일치를 발생시킴에 의하여 해소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신념의 불일치와 무관한 태도의 불일치가 있을 수 있다는간과했으며, 이로 말미암아 윤리학적 탐구에 많은 혼란이 초래되어 왔던 것이다.그러나 이모티비즘은 전통적인 사상을 부인하고 나온 새로운 학설들이 흔히 그렇듯이, 그 비판의 화살이 약간 지나치게 멀리 날았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첫째로, 평가적인 발언에는 정의적인 의미만이 있고, 서술적인 의미는 전혀 없다는 이모티비즘의 주장은 편협한 견해이다. 만약 정의적 의미밖에 없다는 이모티비즘의 주장이 옳다면, 도덕문제를 에워싼 사람들의 대립은 오직 욕구와 기호 내지 감정의 대립을 의미할 뿐, 거기에는 아무런 소견의 대립도 없다는 결론이 불가피하게 될 것이다. 도덕문제에 관한 대립에 소견의 대립이 포함되어 있다함은 도덕적 발언에 서술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음을 말함이요, 서술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음이 사실이라면 도덕적 발언도 일종의 판단으로 보아야 옳을 것이다.2. 스티븐슨의 이모티비즘1) 윤리적 판단과 태도 및 정의적 의미윤리적 판단은 단순히 태도를 표현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태도를 형성하고 바꾸기도 한다고 한 것이 스티븐슨의 견해이다. 윤리적 판단들은 과학적으로 뒷받침 할 수 없고 또 비자연적 성질들을 갖지도 않지만, 그러나 그것들이 지닌 두 가지 독특한 특징, 즉 정의적 의미와 태도에 있어서의 불일치로 인해서 확인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어떤 행위를 증언하고 평가할 때 그는 그것에 대한 어떤 감정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윤리적 판단의 정의적 의미인 것이다. 그는 그 행우에 대하여 찬성이나 불찬성의 태도를 취하게 도는데 이러한 태도는 그 상황의 사실에 의존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에 대한 견해를 같이 하는 사람들도 사실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 있어서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윤리적 논쟁은 태도의 불일치를 반영한다. 즉, 사랑이나 증오가 특수한 심리적 태도이듯이, 윤리적 논쟁도 이와 같은 특수한 심리적 태도에 있어서의 불일치를 반영한다. 윤리적 판단의 본질적 기능은 “사실을 지시하는 일이 아니라 영향을 창조하는 일” 말하자면 타인의 태도에 대해 다.
    인문/어학| 2007.06.16| 11페이지| 2,500원| 조회(5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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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문]밀의 도덕철학
    밀의 도덕철학윤리교육과 20021200 모승철Ⅰ.서론Ⅱ. 본론1. 생애 및 저술2. 공리주의에 영향을 준 학설3. 밀 : 질적 공리주의자4. 밀 이후의 공리주의론자5. 공리주의(결과론)와 의무론의 비교Ⅲ. 결론20021206 이민혁20040782 고종명20040185 박은영20040554 최윤정Ⅰ.서론공리주의가 천박한 돼지의 철학으로 타락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그것을 이상주의적인 것으로 변용시킨 사람은 벤담의 제자요 그의 지적인 계승자인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이었다. 벤담의 기본전제는 최대의 유일한 선은 쾌락이요, 쾌락은 질적인 차이로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양으로만 계산할 수 있는 “단일한 성질”(a single quality)의 것이라는 데 있다. 밀은 만약 이 같은 벤담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쾌락을 즐기고 있는 감각적인 주체가 사람이든 동물이든 상관하지 않는다는 중대한 문제점이 있음을 발견했다. 즉 그 주체가 불쌍한 사람이라면 오히려 배부른 돼지의 행복을 추구할 것이라는 사실 이외에는 최대한의 쾌락을 즐기는 한 그가 누구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그러나 밀은 돼지의 쾌락과 운명을 같이하기를 거부했다. 그는 만족한 돼지가 되기보다는 불쌍한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는 돼지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 이유를 쾌락은 양적으로만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구별된다는 질적인 쾌락주의(qualitative hedonism)로 설명했다. 요컨대 질적으로 높은 쾌락은 소량이라 하더라도 질적으로 낮은 다량의 쾌락보다 더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이 점은 1톤의 석탄과 1온스의 다이아몬드를 놓고 볼 때, 두 물질이 모두 탄소원자로 구성되어 있음에도 우리들은 다량의 석탄을 택하지 않고 극히 자그마한 다이아몬드를 택한다는 사실로 입증이 된다. “단 하나의 명확한 행동의 준칙, 혹은 도덕의 기준(standard of morality)은 최대행복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행복의 철학적인 평가가 요청된다. 행복의 양 못지않게 의하여 검증하는 역의 연역법도 널리 이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더 나아가 혁명운동이 유럽을 휩쓴 1848년에 출판된 《경제학원리》에서는 사유재산제도와 경쟁에 입각한 경제체제를 당연한 전제로 삼아 온 종래의 경제학에 대해서 분배형태는 인위적·역사적인 것이라는 등의 문제를 제기하였으며, 또한 경제적 진보에 국민성의 차이라는 요인을 도입하는 등 고전파경제학을 대담하게 수정하고자 하였다. 《자유론(1859)》은 모든 개인의 자유의 보장으로서 꿈꾸어진 민주주의가 결과적으로는 다수자의 전제를 가져오고, 모든 개인은 평균화하고 몰개성적이 되며 자유는 압박되고 인간성의 위기시대가 도래한다는 경세(警世)의 책이었다. 이렇듯 그는 인간정신의 자유와 개성에 최대의 가치를 부여하였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경제학원리》도 저술되었다. 이 책에서 그는 급속한 경제발전의 시기보다도 사람들이 여가를 향수할 수 있는 정지상태 쪽이 바람직하며, 또한 공산주의와 사유재산제도의 시비도 어느 쪽이 인간의 자유와 개성을 보장하는가에 의해 판정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다. 말년의 밀은 하원의원(1866∼68)으로서 선거권의 확장운동에 몰두하였으며 특히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참정권을 제안하였다. 의원직을 물러난 뒤 집필활동을 계속하며 남프랑스 아비뇽의 자연속에 살면서 곤충학자 J.H. 파브르와 교유하며 지내다가 그 곳에서 죽었다. 그 밖의 저서로 《대의정체론(1861)》 《공리주의론(1863)》 《콩트와 실증주의(1864)》 《사회주의론(유고, 1879)》 등이 있다.2. 공리주의에 영향을 준 학설(1)키레네학파의 쾌락주의 : 순간적 쾌락의 추구1)아리스티푸스:쾌락의 직접적인 희열(1435~356 B.C)쾌락주의의 창시자인 키레네의 아리스티푸스는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스토아 철학자들이나 견유학파의 철학자들과는 달리 덕 있는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행복의 요소를 강조한다. 아리스티푸스는 덕을 향락을 위한 능력으로 정의한다. 향락은 의지를 충족시킴으로써 나타나는 쾌락과 함께 그 만 그 행동이 무엇이건 간에 그것을 인정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원리"로서 정의하고있다. 이 저서의 후기 판에서 그는 효용성의 원리를 최대 행복의 또는 최대 경사의 원리로 부르고 있다.-양적 쾌락주의벤담의 쾌락주의는 쾌락은 오직 한가지뿐이며 양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을 뿐, 질적인 면에서는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는 이론인 양적 쾌락주의이다. "쾌락의 양이 동일하다면, 도박이나 시나 똑같이 좋은 것이다."-이기적 쾌락주의벤담에게 유일한 쾌락은 다른 사람에게 양보함으로써 생겨날 수 있는 조그마한 희생도 없이 각자가 자기 개인의 이익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벤담의 쾌락주의는 이기적 쾌락주의이다. 에어어(Ayer)와 같은 이들은 벤담이 사리사욕과 행복을 동일시하였다고 비판하고 있으나, "자선의 원리"가 타인의 행복에 관한 관심을 촉구하기 때문에 엄밀하게 이기적인 의미에서는 그렇지 않다.2) 카알라일(Carlyle,1795~1881) : 이타적 공리주의공리주의를 이타적으로 해석함으로써 공리주의의 명분을 옹호하고자 하는 여러 영국 철학자들로부터 벤담의 이기적 공리주의는 공격을 받게 된다. 벤담의 공리주의를 "돼지철학"이라고 비판한 토마스 카알라일은 벤담의 "최대 행복의 원리"를 "최대 숭고함의 원리"로 대체시켰는데, 이 원리는 우리에게 우리의 이상에 맞는 영웅을 쳐다보고 우리는 행복을 우리의 일 가운데에서 찾으라고 당부한다. 정신의 코락은 위장의 쾌락에 우선하며 교양은 호색이나 관능에 우선한다.3. 밀 : 질적 공리주의자(1) 질적 공리주의J.S. Mill은 그의 『공리주의』(Utilitarianism) 제 2장 첫머리에서, 그의 공리주의가 기본개념으로 삼는 ‘유용성’(Utility)이 다름 아닌 ‘쾌락’(pleasure)을 의미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따라서 어떤 행위가 옳으냐 그르냐 하는 문제는 그 행위가 쾌락 또는 고통을 어느 정도 조장하는가에 의하여 결정된다. 그리고 이 선악의 척도로서의 쾌락이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그것이라는 점까지 밀이 벤담을 이어받고 내적인 의무감인 반면에, 외적 제재는 자기에게 불리한 여론이나 신의 응벌(벤담의 도덕적이며 종교적인 제재)에 대한 두려움처럼 각 개개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독특한 강제력이다.(5) 행위 공리주의와 규칙 공리주의행위 공리주의는 각각의 개별적인 행위가 그들이 산출하는 쾌락과 고통의 전체 값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도덕 행위이다. 여기에서는 공리의 원리가 옳은 행위의 기준으로 제시된다. 이 입장은 각각의 대안적 행위들에 있어서 그 행위들이 산출하는 모든 쾌락의 양을 측정하고 계산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고 우리의 모든 행위에 있어 추구되는 도덕적 목적은 전체로서의 세계에 있어서 악을 뺀 가능한 최대의 선이라는 것이다. 밀은 쾌락의 평가에 있어 질을 도입하였다. 밀에 의하면 쾌락에는 질적으로 높은 것과 낮은 것이 있으며 높은 것을 추구하는 점에서 다른 동물과 인간이 차이가 나며 고귀한 것이라고 한다. 행위 공리주의에 있어서 우리는 어떤 행위의 결과 속에 그 행위가 미치게 될 영향이나 현행 규칙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복종에 미치게 될 영향을 포함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비록 그러한 행위들이 나의 행위가 갖는 간접적 영향이라 할지라도 나의 행위의 영향인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행위 공리주의가 갖는 이론적 난점은 행위를 경우에 따라 그때그때 평가하게 되면 일반화될 수 없는 모든 행위까지도 정당화된다는 것이다.이러한 이론적 난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제안된 것이 규칙 공리주의이다. 규칙 공리주의는 유용성의 평가 대상이 되는 것은 개별적인 행위들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행위를 요구하는 규칙 또는 관행이라고 주장하며, 가능한 여러 유형의 행위들 가운데서 그 일반적 수행이 관련된 모든 사람에게 최대의 행복을 결과하는 행위가 옳은 행위라고 주장한다. 도덕에 있어서 규칙의 중요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우리가 특정한 상황에서 행해야 할 바를 결정함에 있어서 어떤 특정 행위가 문제의 상황에서 최선의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를 묻는 것에 의거하지 않고서 나타난 철학적 사유의 한 학파이다. 그러나 엄격히 말해서 공리주의의 초기 의미에서 볼 때 이것을 공리주의라고 할 수는 없다. 이것은 토마스 힐 그린(Thomas Hill Green)의 이상주의와 시즈위크의 공리주의와의 종합이다. 이 이상적 공리주의는 주로 쾌락주의의 문제에 관해서는 공리주의와는 다르다. 즉 그것은 목적론이지만 쾌락주의적 방향으로 나가지 않는다. 이상적 공리주의라는 용어는 이 학파의 대표자인 해스팅스 라쉬달에 의해 사용되었다.(1). H. 라쉬달(Hastings Rashdall, 1858~1924) : 선한 결과의 최대 생산으로서의 윤리학라쉬달은 윤리철학의 주요 관심사는 어떤 행위가 옳은지 그릇된 것인지를 결정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옳음(right)과 그릇됨(wrong)이란 용어의 의미를 조사하고 평가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람들이 편견을 갖고 있지 않는 한, 이러한 조사를 함에 있어서 그들은 쉽게 쾌락의 추구라는 단일한 동기에서 인간행위의 유인을 찾고자 하는 쾌락주의적인 이론에 빠지기 쉽다. 이러한 결론은 다음과 같이 옳은 행위의 본질을 미리 결정한다. 즉 어떤 행위는 그것이 쾌락을 수반하면 도덕적으로 옳은 것이고 고통을 수반하거나 쾌락을 감소시키면 도덕적으로 그릇된 것이다. 이런 견해는 바로 인간이란 자연적 성향에 의해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한다는 이론인 심리적 쾌락주의에 의존한다.라쉬달의 이상적 공리주의는 직관적 이상주의와 공리주의라는 두 개의 대립되는 체계에 대한 절충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두 이론을 포섭하고 조화시킨 것으로서 이것들이 지닌 잘못된 점을 제거하고 또 그들이 빠지기 쉬운 극단을 피하고 있다. 옳은 행위뿐만 아니라 덕도 이러한 종합적인 입장에서 설명될 수 있다.이상적 공리주의자들에게 옳은 행위는 가장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행위이다. 선은 쾌락이나 행복과 분리된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인 결과의 의해 계산될 수 있다. 단순히 양적인 쾌락에 있어서만 차별을 두는 벤담의 쾌락계산이나 밀의 제안처럼 쾌락의 전문가들의 판단에 의존한다는 한다.
    인문/어학| 2007.05.30| 12페이지| 2,000원| 조회(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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