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서론제1절 문제의 제기2004년은 한류관광의 해이다. 최근 3-4년간 한국의 주요 언론들이 내세운 가장 큰 이슈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한류이다. 한류열풍이 이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아시아 지역간의 대중문화의 흐름과 신세대 소비자, 그리고 문화산업시장에 대해 분석하고 논의하기 시작한 것이다. 2001년 하반기에는 한류가 국가의 중요한 정책적 의제 (agenda)로 까지 부상하였고, 문화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는 2004년을 한류관광의 해로 정하고 아시아 주요 관광객 유치 대상지에서 한류스타를 동한 TV광고와 한류 상품 개발 등 이부분에 집중 투자를 해왔다.중국에서 불기 시작한 한류형상은 동남아, 베트남으로 확산되었고 이제는 전 세계적으로 막강한 대중문화의 전파력을 가진 일본으로까지 확산되어 그 붐을 일으키고 있다. 초창기 한류열풍의 주역이었던 중국이나 대만의 열기가 다소 주춤해지자 최근 들어서는 일본의 한류형상을 다루는 기사나 프로그램이 늘고 있는 추세이다.한일 양국은 이번 2005년에 국교 정상화 40주년을 맞는다. 외형적으로는 지리적 위치만큼이나 정치, 경제, 역사, 사회, 문화 등에 있어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지만 그 내면으로 파고 들어가 보면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상호견제의 인식이 양 국민사이에 뿌리 깊게 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과 일본의 이러한 불행한 관계는 무엇보다도 상호문화에 대한 인식부족에서 기인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그간 일본의 대중문화는 공식적인 경로를 통하지 않고서도 한국사회에 깊숙이 스며들어 한국 대중문화의 전형이라고 할 만큼 각광 받아 왔으며 1998년 10월 수많은 논란을 뒤로 하고 처음 이루어진 일본대중문화 개방정책에 따른 2004년 1월 완전 개방을 정점으로 한국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최근 한류형상으로 인하여 좀 잠잠해지긴 했지만 그동안 언론은 일본대중문화 개방이 우리에게 미칠 파급효과에 집중하고 있었다.이와는 달리 한국의 대중문화는 일본 대중문화에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말하기도 어려울 만첫째는, 향후 예상되는 문화산업의 엄청난 규모의 잠재적 성장 가능성 때문이다. 현시점에서도 문화산업의 규모는 주요 제조업의 규모를 능가하고 있지만 지금까지의 성장률을 감안해 볼 때 앞으로 문화산업의 규모는 기존의 IT산업의 규모를 능가할 만큼 크게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실제로 1999년부터 2003년 동안 국내 경제의 연평균 성장률은 5.5%인데 비해 문화산업의 성장률은 무려 21.1%에 이르고 있다. )둘째, 일반적으로 문화상품은 그 특성상 많은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집적되어 나타나게 되므로 산업의 전후방 연관효과가 매우 크게 나타난다. 예컨대 한편의 영화에는 그 소재를 이루는 문학작품이나 희곡에서부터 수많은 종류의 세트와 소품, 케릭터, 디지털 영상산업 등 수많은 산업들이 연관되어 있다. 오늘날 한편의 대작 영화가 가져오는 효과가 수천억에 달하는 것도 바로 문화 산업의 문화 상품의 이 같은 집적효과와 전후방 산업연관효과에 기인한 것이다.셋째, 문화상품은 기본적으로 외부효과 (external effect)가 매우 크다는 특성을 갖는다. 다시 말해, 문화상품이 국가나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구성원 개개인이 그에 대해 가격을 지불한 것과는 별도로 폭 넓게 나타난다. 비틀즈의 음반과 같이 하나의 문화상품이 시대의 흐름을 바꾸어 놓거나 나아가 국가의 위상에 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막대한 파급효과 때문에 문화산업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정책적 지원과 보호의 대상이 된다.3.수용자 중심의 대중문화론대중문화란 대중매체를 중심으로 전파되는 대중적인 예술, 오락, 문화, 등과 그에 관련된 생산체계와 물질, 그리고 수용하는 대중들에 의해 공유되는 행위와 담론 등을 총칭하는 것이다. 오늘날 대중문화는 소위 대중매체와 문화산업에 의해 문화상품으로서 대량생산, 판매되고 있으며 그 수용과 소비형태가 계급적 기준뿐만 아니라 성, 연령, 직업, 학력, 등의 다양한 척도들에 따라 분화된 하위집단들에 의해 세분화 되고 있다.대중문화는 한마디로 이야기해 대중가요를 틀어 주며 ‘이 노래는 무슨 노래를 카피한 것일까요?' 라고 사회자가 묻고 출연자와 청중이 비아냥거리며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고 한다.2. 일본 대중문화 개방1) 일본대중문화 개방 과정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일본의 대중문화는 우리의 문화 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 대중문화가 정식으로 개방 과정을 거침으로써 그 양상이 달라지게 된다. 그렇다면 어떠한 과정을 과쳐 일본 문화를 공식적으로 개방하였는지 알아보자.일본 대중문화 개방은 1998년 10월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한 해 개방 방침을 천명 한 뒤, 1998년 10월, 1999년 9월, 2000년 6월 등 세차례에 걸쳐 단계적으로 시행되었다.1차 개방 당시에는 상당히 한정적인 부분만 허용이 되었다. 영화와 비디오만 개방 되었는데 그것도 4대 국제 영화제 수상작에 한 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짙은 예술성으로 인해 국내에서의 영향은 미미하였다. 하지만 2차 개방 때부터 영화와 공연, 출판물의 부문으로 개방폭을 확대하였고 3차 개방부터는 영화를 비롯하여 비디오, 공연, 게임, 방송 등 1, 2차에 비해 개방정도가 대폭 확대 되었다. 이후 일본 대중문화의 추가 개방이 2001년 7월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시정 거부에 대한 대응조치로 개방 일정이 잠시 중단되었으나 2004년 1월 1일 부로 전면 개방 되었다.2) 분야별 개방결과이렇게 단계적으로 일본 대중문화를 개방한 결과 우리의 대중문화의 각 부문에서 각각의 양상으로 어떠한 영향을 받았는지 각 분야별로 살펴보도록 하겠다.우선 음반시장은 산업구조의 변화 상황에 따라 일본음악의 영향이 크지 않았던 부분이다. 한국음반 시장의 점유율을 살펴보면 한국가요가 약 75%이며 팝 뮤직이 약 20%. 그리고 클래식이 약 5%이다. 일본음악은 일부 애호가들을 중심으로 소비되고 있으나 시장점유율은 매우 미약한 정도이다. 이처럼 일본 음반의 한국 진입이 수월하지 못한 이유는 일본 대중가요의 음반은 완전 개방 이전부터 이미 인터넷이나 비공식의 주인공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원빈은 마루이 백화점의 한국인 최초 전속 모델을 따내기도 했다. 과 영화 의 성공으로 인해 이병헌 역시 큰 인기를 얻고 있는데 NHK의 메인뉴스에 인터뷰를 할 정도였다. 의 장동건 역시 빼 놓을 수 없는데 이상에서 언급한 4명은 으로 불리며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제4장 일본에서의 한류의 원인 -드라마를 중심으로제1절 일본 내 경제적 배경현재 일본 진출의 교두보는 영화와 TV드라마 등이다. 특히 한국 연예인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한국 드라마는 진입 장벽이 높던 일본 안방극장에서 그 수를 키워가고 있다. 탈렌트 원빈이 출연한 와 가 괜찮은 반응을 얻은 데 이어 가 일본 열도를 완전히 흔들어났다. 과거 일본 드라마 베끼기에 경쟁했던 한국 드라마가 이제 일본 TV의 드라마부문을 주도할 정도가 된 것이다.그렇다면 한국 드라마의 무엇이 일본인들에게 크게 어필되었는지 그 요인들은 무엇인가? 일본 내 한류열풍의 원인은 중국과는 다르다. 많은 사람들은 그 원인을 일본경제의 장기불황과 이에 따른 사회적 침체를 들고 있다. 최근 일본의 문화컨텐츠 시장은 TV 시청률의 저하, 음반시장의 침체, 영화 관객의 감소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좋았던 시절'을 상징하는 '쇼와시대에 대한 향수'로 이어졌으며 이 중심에 욘사마 신드롬이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쇼와 향수'는 불황으로 지친 일본인들이 고도 성장기였던 1950-70년대를 그리워하는 현상을 말한다.) 이미 일본 음반계와 영화계는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불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편으로 삼았다. 퀸의 베스트 앨범이나 흘러간 명곡?팝송 편집앨범이 큰 성공을 거둔 바 있으며 영화계에서는 1970, 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제작 붐이 일고 있다. 여기에 '쇼와 시대'를 생각나게 하는 순수하고 열정적인 캐릭터와 순애보를 담고 있는 가 그 시대에 젊은 시절을 보냈던 3, 40대의 욕망과 맞아 떨어진 셈이다. 그리고 배용준이 인기상품으로 선정된 것에서도 볼 수 있듯이 불황을 타개하기 위한 업봅니다(61세 jyakute,배용준홈페이지 www.yongjoon.jp)한국 드라마의 가장 큰 특징인 혈연가족의 중요성은 이들을 감동시켰으며 가족들간의 사랑을 확인하는 방법 또한 일본과 큰 차이를 보인다는 점에 놀랐다고 한다. 일본의 부모로서는 성년이 된 자녀들이 자신들의 곁을 떠나면서 거리가 생기고 대화도 단절되는 현실을 받아드리고 있는데 한국의 경우는 성년이 된 자녀들도 부모의 말을 잘 듣는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한다.)한국 드라마 붐의 또 다른 특징은 겨울연가'의 배용준, '올인'의 이병헌 등 매력적 남자 탤런트의 인기가 절대적이라는 점이다. 여성 톱스타를 중심으로 제작되는 일본 드라마에 식상한 여성 시청자들이 남자 탤런트의 비중이 큰 한국 드라마를 선호하고 이들의 매력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한국드라마의 대부분 주인공들은 굉장히 좋은 외모를 갖고 있다”라고 말하며 일본 사람들이 한국드라마에 끌리는 주된 이유 중 하나라고 한다. '일본의 드라마는 사실성을 강조한 나머지 사람들에게 작품을 통한 대리만족, 대리경험적인 측면을 만족시켜주지 못하고 있다. 그에 반해 한국드라마에는 퍼펙트맨이 나와서 좋다. 비록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지만 터프하고 상냥하고 수려하고 마음 여린 캐릭터가 마음에 든다.' 앞서 든 특징 들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 드라마에서는 평범한 남자가 주인공인 드라마가 꽤 있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 드라마가 경쟁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배우의 외모가 한국드라마가 일본에서 한류열풍을 일으키는데 중요 원인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 외에도 한국 드라마와 일본드라마의 방송 형식이 다르다. 대부분 한국드라마는 일주일에 2번 방영하는 방식이지만 일본 드라마는 일주일에 1회 방영하는 방식을 갖고 있다. 2번 방영하는 것이 시청자가 드라마에 몰입하는 측면에서는 더욱 바람직하겠지만 드라마의 질적인 측면에서는 일주일에 한번 방영하는 일본 드라마에서 더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을 듯 하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 때문에 드라마의 총 횟수차이도 평균적으로 다.)
1. 시대적 배경.17-18세기의 조선시대 사상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먼저 정치적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조선에서의 유학 연구는 주로 16세기와 18세기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송시열과 윤휴가 살았던 17세기는 주로 당쟁이 격화되었던 시기로 성리학의 폐해가 심하였고 그로 인한 새로운 사상이 움트는 실학의 시대를 예고하는 시대이기도 하였다.다시 말해, 17세기는 조선조 5백 년 동안 내우외환이 가장 극심했던 시기로서 대외적으로는 서구의 문물이나 제도, 천주교 등이 유입되어 교역이 활발해졌으며, 중국은 명나라의 기운이 쇠하고 청의 세력이 강해졌던 때이다. 대내적으로는 임진왜란 7년을 비롯하여 광해군의 양다리 외교의 어려움이 증대 되었고, 뒤이은 인조 반정과 이괄의 난 등 숱한 참화를 겪어야만 했던 때이다. 연이어 정묘 · 병자호란으로 강화도 함락과 인조가 청 태종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삼전도의 수모를 겪었으며, 국론이 갈라져 갈등이 생겨났으며 2차에 걸친 예송논쟁으로 인하여 파당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민란이 자주 발생하였다.이렇듯 그들이 살던 17세기에 조선의 정치와 경제는 피폐해졌고 가뭄이나 역병 등 자연 재해까지 겹쳐 백성들은 곤궁해져 난민과 도적떼가 횡행하니 윤리는 땅에 떨어지고 민심은 흉흉하여 나라가 어지러웠다. 이러한 현실을 바로잡고자 하는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 새로운 학풍이 일어났으며, 이러한 혼돈의 시대에 살았던 그들은 예치확립(예로서 나라를 다스려야 함)이야 말로 시대적 사명이라 인식하게 되었다17세기 중후반 조선사회는 양란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국가재건에 총력을 기울여야하는 국가적 당위에 직면하였다. 양란의 결과 명 청이 교체되어 국제질서가 재편되고 강력한 군사대국인 청나라가 중원의 주인이 되니 그에 대한 대응도 주요 과제로 떠올랐다.이러한 국가의 위기상황을 타개하고 국민통합을 위한 강력한 국가지도이념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신념과 용기를 가진 인물이 요구되었다. 우암 송시열·(1607-1689), 백호 윤휴(1618-1680)는 있으면 솔직하고 용감하게 표현 하였다. 윤휴는 주자의 권위를 상회하는 어떤 권위를 믿고 있었는데, 그것은 천(天)이였다. 하늘이라는 절대적인 존재아래에서는 주자도 한 것 인간에 불과하다고 생각 한점이 주자에 대한 맹신을 없게 한 것 같다. 이렇게 송시열과 윤휸은 학문적에도 많이 틀렸다고 한다. 송시열은 40이 넘어서 부터는 윤휴를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윤휴에 대한 분노가 컸다. 1674년(현종15년) 갑인예송의 결과로 윤휴가 중용되자, 송시열에게 있어 윤휴는 이제 사문난적의 차원을 넘어 이적(夷狄)이며 국가의 사상체계를 위협하는 모반인 이였다. 잘 된일인지 안타까운 일인지, 자유적 학문 사상을 가진 윤휴에게 주어진 시각은 6년뿐이였다. 1680년(숙종6) 경신환국은 윤휴의 생명을 앗아갔다.(체찰부 설치에 따른 군권장악을 꾀했다는 죄. 대비를 조관(照管)이라 부른죄.) 사상의 불건전함으로 죽었다는 말은 없지만, 송시열과의 사상적 대립, 예송에서의 격돌은 죽음의 조건으로는 충분했다고 본다. 윤휴는 서인 노론들에 의해서 사상범으로 족쇄가 되어 영원히 매장되었다. 이제 남인들 마저 윤휴를 기피하였는데, 이것이 자유주의를 추구하여 교조적인 이념에 도전했던 한 사상가의 당시의 시대상 이였다. 윤휴의 죽음으로 주자학의 비판의 분위기는 전면적으로 차단되었다. 송시열은 윤휴만 제거하면 정적 숙청에 사상계도 순화될것이라고 믿었지만, 그러나 10년후에 일어난 기사환국은 또다시 남인정권이 세워지는 계기가 되었다.먼저 당을 번갈아가며 왕권을 강화시킨 숙종에게 칭찬을 해주고 싶다. 기사환국(1689)은 서인정권의 우두머리격인 송시열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그는 정읍에서 죽기전 이미 혼절을 거듭하였지만, 군왕이 내리는 사약을 받기도 전에 죽는다는 것은 신하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사약이 왜 이렇게 늦는가? 하고 말을 반복하였다고 한다. 그만큼 그는 주자학에 입각한 명분론을 맹신하고 있었던 것 같다. 본격적으로 남인정권의 성립과 몰락인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을 었다. 갑술환국으로 남인을 다시는 정계로 올수 없도록 몰락되어 갔다. 그런데 갑술환국에는 장씨와 장씨 일가에 대한 처벌 의견이 엇갈렸다. 이는 응징해야 한다는 노론파와, 그래도 세자의 어머니이고 장차 세자의 기반을 위해 용서해야 한다는 소론파로 나뉘였다. 이 주장에서 노론은 세자또한 폐세자 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다. 이에 숙종은 자신도 세자를 지킬 의무가 있다고 판단하여 소론의 편을 들어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씨의 저주적인 행동은 지병을 앓던 인현왕후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이를 숙빈 최씨를 통해 안 숙종은 소론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씨를 사사 시켰다.(1701) 세자의 지지기반이 완전히 꺽이는 순간 이였다. 또 이것은 숙종이 이제 더 이상의 세자를 지켜주지 않겠다는 의미 이였다. 이어 숙종은 소론과 세자에 대한 불만을 1716년 소론의 영수 윤증에게 선정(先正)이라고 부르지 못하게 하고, 유현으로 대우하지 말라는 전지를 내렸다. 이것은 일진 일퇴를 거듭하던 노론 소론과의 세력 균형이 깨어지는 순간 이였다. 윤증에 대한 폄하는 소론의 정치적인 위상과 즉결되었기에, 당시의 최석정등 많은 소론 인사들이 축출되었다. 세자의 정치적 기반 마져 무너져 버린 것이였다.다음해1717년 숙종은 병신처분의 상처가 가시지도 않은체, 세자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표현 하였다. 이것이 바로 정유독대인데 숙종이 연출한 정치극에 소론은 다시금 경악하였다. 숙종이 노론의 거두 이의명을 단독으로 불러 모종의 대화를 주고 받은 것으로, 그들의 대화에는 사관과 승지의 입시 원칙도 무시되었다. 대체 무슨 대화가 오갔던 것일까? 과정보다는 결과에 의한 추리만이 가능할 것이다. 숙종 43년부터 시작된 대리청정은 세자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것이 아니고, 당시 숙종이 있을 때 노론과 숙종이 세자의 문제점을 지적하여 폐 세자 시킨다는 것 이였다. (물론 대리청정 당시 문제 삼을 만한 것은 없었고 숙종이 일찍 세상을 뜬다.) 즉 추론하건데 숙종은 이의명에게 세자에 대한 회의를 표시하고 중요한 인물 이였음을 말해 준다.송시열(宋時烈 1607~1689 선조40~숙종15)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 서인-노론(老論)의 영수(領袖).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 화양동주(華陽洞主). 시호 문정(文正). 아명은 성뢰(聖賚)이다. 아버지는 사옹원 봉사를 했던 송갑조(宋甲祚)이고 어머니는 선산 곽씨인데, 충북 옥천군 구룡촌(九龍村)의 외가에서 태어나 26세(1632)까지 그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후에 회덕 (현재의 대전)의 송촌(宋村)동 비래(飛來)동 소제(蘇堤)동 등을 옮겨가면 살았기 때문에 회덕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기골이 뛰어나게 장대하여 체력이 매우 좋았다. 대전(懷德)에서 신독재 김집이 사는 연산까지는 50리나 떨어져 있었으나, 송시열은 매일같이 책과 도시락을 메고 다녔다고 한다. 본관 은진(恩津). 자 영보(英甫). 호 우암(尤庵)·화양동주(華陽洞主). 시호 문정(文正). 아명 성뢰(聖賚). 1633년(인조 11) 생원시(生員試)에 장원급제하여 최명길(崔鳴吉)의 천거로 경릉참봉(敬陵參奉)이 되었으나 곧 사직, 1635년 봉림대군(鳳林大君:孝宗)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이듬해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扈從)하여 남한산성으로 피란하였고, 1637년 화의가 성립되자 낙향, 1649년 효종이 보위에 오르자 장령(掌令)에 등용,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을 거쳐 집의(執義)가 되었으나 당시 집권당인 서인(西人)의 청서파(淸西派)에 속한 그는 공서파(功西派)의 김자점(金自點)이 영의정이 되자 사직하고 다시 낙향하였다. 이듬해 김자점이 파직된 뒤 진선에 재임명되었으나 1651년(효종 2) 그가 찬술한 《장릉지문(長陵誌文)》에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았다고 김자점이 청나라에 밀고함으로써 청의 압력을 받아 사직하고 또 낙향, 충주목사(忠州牧師)·집의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후진 양성에 전심하였다. 1658년(효종 9) 찬선에 등용, 이조판서로 승진,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이원류(家禮源流)》의 발문을 놓고, 노소론이 싸움을 벌여 증과 함께 관작이 추탈, 1622년(경종 2) 복구되었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였다. 영의정이 추증되고, 영춘(永春) 송파서원(松坡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노서유고》 《노서일기》, 저서에 《계갑록(癸甲錄)》 《우계연보후설(牛溪年譜後說)》, 글씨에 《김집묘갈(金集墓喝)》등이 있다.(4) 윤증.본관 파평(坡平). 자 자인(子仁). 호 명재(明齋) ·유봉(酉峯). 시호 문성(文成). 조부는 팔송 황(煌)이고, 우계 성혼(成渾)의 사위였다. 부 미촌 선거(宣擧)는 김집(金集)의 문인으로 일찍이 송시열(宋時烈) ·윤휴(尹 ) ·박세채(朴世采) 등 당대의 명유들과 함께 교유하였다. 그는 부사(父師)를 시작으로 유계(兪棨)와 송준길(宋浚吉), 송시열의 3대 사문(師門)에 들어가 주자학을 기본으로 하는 당대의 정통유학을 수학하면서 박세당(朴世堂) ·박세채 ·민이승(閔以升) 등과 교유하여 학문을 대성하였다. 특히 송시열의 문하에서는 많은 문인들 중 유독 뛰어나 고제(高弟)로 지목되었고, 서인계 정통으로서는 주자의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는 의리지학(義理之學)을 체득하였다.등과(登科)는 하지 않았지만, 학행이 사림 간에 뛰어나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내시교관(內侍敎官)에 발탁을 시작으로 공조좌랑 ·세자시강원진강(世子侍講院進講) ·대사헌 ·이조참판 ·이조판서 ·우의정의 임명을 받았으나, 이는 그의 학문적 ·정치적 위치를 반영할 뿐 일체 사양하고 실직에 나아간 일이 없다. 그러나 그의 정견은 정치적 중요문제가 생길 때마다 상소로 피력하였고, 또는 정치당국자나 학인과의 왕복서를 통하여 나타났다. 그러한 그의 정치적 성행이 노소분당과 그를 이은 당쟁에 큰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노론의 일방적인 정국 전횡을 견제하였다.그의 사상적 배경은 16세기 이래로 변화해온 조선사회 이해에 대한 시각의 차이에서 송시열과의 대립을 초래하였다. 그것은 밖으로는 병자호란 이후 야기된 국제관계의 변화에 따른 숭명의리(송시열)와 대청실리외교문제(다.
I. 서론조선왕조는 철저한 왕권 중심의 사회다. 임금은 유교(儒敎)적 원리에 입각하여 인(仁)과 덕(德)으로써 나라를 다스리고 신하는 이러한 왕의 명을 받들어 충성을 바치면서 백성을 살핀다. 이것이 보편적인 조선왕조 500년의 정치 원리이다.또한 한 임금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한 신하를 이른바 "충신(忠臣)"이라 일컫는다. 역사상의 충신으로는 고려 말 단심가(丹心歌)를 노래한 정몽주나 망부석(望夫石) 설화로도 유명한 신라 시대의 박재상 등이 대표적으로 손꼽히곤 한다.하지만 충신(忠臣)의 잣대는 시대에 따라 변화되어 왔다. 가령 사육신(死六臣)의 경우가 있다. 죽어서도 왕에게 충성을 다하겠다는 신념을 죽음으로써 증명해 보였던 조선시대 대표적인 충신으로 생각되어 오던 것이 지금까지의 보편적인 생각이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결과적으로 단종(端宗)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는 이유에서, 또 집현전(集賢殿) 학자 출신으로서 유교(儒敎)적 소양을 갖추고 있던 그들이 세조를 살해하여 뜻을 이루고자 했던 음모 자체가 반 유교적이라는 이유에서 비판적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등장하고 있는 것이 단적인 예로 보여진다.) 사육신, 충신인가 역적인가. (http://myjokbo.com.ne.kr/news_pajo_chungyok.html)이처럼 역사상의 해석은 역사가의 몫이며 그 해석의 잣대가 되는 역사가의 역사 의식은 역사가가 살아가는 시대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조광조와 한명회 역시 예외일 수 없다. 조광조는 사림파의 우두머리로 개혁 정치를 펼치던 중 무리한 개혁의 시도로 제거된 조선시대 유일무이(唯一無二)한 개혁 정치가이다. 한명회는 세조의 반정(反正)을 도와 공신(功臣)의 위치에 올라서면서 확고한 자신의 입지(立地)를 악용해 갖은 악행을 벌인 대표적인 간신(奸臣)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의 역사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두 인물에 대한 단편적인 평가에 갇혀 있었는지도 모른다.조광조가 이끄는 사림파(士林派)와 한명회로 대표되는 훈구(勳舊) 세력은 조선 초기, 예종, 성종에 이르기까지 절대 권력을 행사하던 한명회는 네 번이나 1등 공신에 추대, 많은 토지와 노비를 상으로 받아 엄청난 부를 누리다가 1487년(성종 18년) 73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그의 묘는 현재 충남 천안에 있다. 그 후 1504년(연산군 10년) 갑자사화 때 연산군의 생모 윤비 폐사(廢祀)에 관련했다 하여 부관참시 되었으나 뒤에 신원 되었다) 한명회 (http://www.ziwol.net/h/man/abgujeong.htm)2. 사회적 영향력조광조의 등장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중종 초의 정치적 상황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중종은 연산군을 폐위시킨 반정의 주역들에 의하여 옹립된 왕이다. 그러므로 그는 왕위에 오를 것에 대한 준비를 갖출 여유가 없었다. 이는 곧 그가 연산군에 이어 조선의 왕위에 올랐다 하더라도 자신의 정치적 구상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배경이 전혀 없었음을 의미한다. 더욱이 연산군을 무력으로 폐위시킨 반정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였기 때문에 중종의 왕권은 더욱 무력할 수 밖에 없었다. 실제로 중종의 치세가 10년도 넘기기도 전에 5차례 이상의 역모사건이 잇달아 발생하였다. 이 역모 사건의 원인은 한결같이 반정 이후의 논공행상에서 비롯된다. 즉, 반정 세력에 업혀 왕이 된 그는 제대로 정치력을 발휘 할 수 없었다. 실제 공신 문제를 둘러싼 논쟁에서도 왕은 늘 권력의 주변에 있는 인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그렇다고 해서 대신들의 권위 역시도 확고하지는 않았다. 연산군(燕山君)의 학정에 항거하고자 반정을 일으켰다는 대신들은 조정의 권력을 전부 장악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서로 공을 나눠 갖기에 바빴다. 고로 왕권도 신권도 미약한 상황에서 국가 권력에 생긴 공백은 그 누구도 국가를 끌어갈 권위를 가지지 못함으로써 사회에 엄청난 혼란을 가져오게 된다. 이 가운데 점차 국가를 이끌어 가는 유교적 명분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등장한 것이 바로 사림파다.사림파는 무오사화의 불씨가 되었던 "조의제문" 논쟁에서의 승리로 세조을 제대로 펼칠 수 없었다. 성종은 늙은 공신들이 세상 뜨기를 기다리면서 훈구파에 맞설 수 있는 신진세력을 양성했다. 홍문관은 바로 이런 신진 개혁세력을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 기구였다. 홍문관을 통해 배출된 인물들이 김종직을 영수로 하는 개혁 사림파를 형성한다. 성종의 의도적인 호의 속에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삼사로 통칭되는 언론기관에 진출한 사림파는 훈구파의 전횡에 거세게 반발했다. 대체적으로 사림파(士淋波)와 정치적 갈등을 빚어 여러 사화를 일으키기도 했다.이러한 갈등은 여러 면에서 지적되고 있지만, 대체로 향촌통치의 방법을 둘러싸고 관권중심의 지배체제를 확립하려는 훈구파와 사족 중심의 지배체제를 형성하고자 하는 사림파 사이에 나타났다. 흔히 훈구파는 사장(詞章)을, 사림파는 경술(經術)을 강조했다고 한다. 훈구파의 학문경향을 사장 중심이라고 하는 것은 조선 초기 국가체제의 정비과정에서 경술보다는 현실적으로 사장을 강조한 것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사실상 양 세력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그 둘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즉 훈구파나 사림파는 모두 동일하게 성리학을 배경으로 하는 지배계급으로 다만 성리학을 실천함에 있어서 서로 방법이 달랐던 것이다. 훈구파는 사림파에 비해 이른 시기에 군현 이족(吏族)에서 사족화했으며, 정치적으로 사림파와 대립하여 훈구파라는 정치세력으로 이해되기 전부터 조선의 국가체제 정비에 깊숙이 참여했다. 세조의 즉위가 선양(禪讓)이라는 합법적인 형식을 통해 이루어졌지만, 성리학의 의리와 명분이라는 기준에서는 크게 벗어나는 일이었다. 그 결과 세조와 공신이 권력의 중심이 되는 정계 개편이 이루어졌다. 이들은 중요한 관직을 독점하고 인사권과 병권을 장악했으며 각종 특권을 독차지하여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또한 토지를 강점하고 양인농민을 노비로 삼아 토지를 경작하게 하는 등 각종 경제적 이익을 독점했다.조선은 고려와 비교하여 지배층이 광범위하게 정치 운영에 참여할 수 있게 만들어진 정치체제였다. 그런데 대단위 농장을 경제기반으로 한 예절이 바르고 글읽기를 즐겼으며 서예에도 능했으나 병약했다. 1455년(세조 1년) 세자로 책봉된 그는 서원부원군 한확의 딸 소혜황후 한씨를 맞아 월산대군과 성종을 낳았다. 그러나 1457년(세조 3년) 병세가 악화돼 21명의 승려가 경회루에서 공작제를 베풀고 병의 치유를 빌었지만 20세로 요절했다. 의경세자의 동생인 해양대군은 형이 횡사하자 여덟 살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됐다. 그러나 한명회의 큰딸은 세자빈으로 책봉된 지 1년 7개월 만인 1461년(세조 7년) 11월 원손(인성대군)을 낳고, 산후병으로 그 해 12월 안기의 집에서 눈을 감았다. 겨우 17세 어린 나이였다.이시애가 함경도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한명회가 신숙주와 함께 반란을 꾀했다는 혐의로 신문을 당하다가 혐의가 없어 석방된 것은 1466년의 일이다. 정치적인 위협을 느낀 한명회는 또 한 명의 딸(공혜왕후)을, 세조의 손자이며 덕종의 둘째 아들인 혈(성종)과 결혼시켜(1467년) 세조와 겹사돈을 맺었다.그 후 해양대군은 1468년 9월 7일 세조로부터 왕위를 이어받아 수강궁에서 즉위하였다. 이 때 나이 19세였다. 세조 즉위로 승진을 거듭하던 한명회는 사위인 예종이 임금에 오르면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갖게 됐다. 좌의정으로 있다 물러나 있던 그는 영의정으로 복귀해 실질적으로 조정을 좌지우지했다. 그러나 평소 건강이 좋지 않던 예종은 14개월의 짧은 재위 기간을 마감하고 요절했다.예종의 요절로 한명회의 권세도 다하는 듯 싶었지만 그의 천운은 계속됐다. 예종이 죽던 날 세조비 윤씨는 자신의 장자인 의경세자(덕종)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성종)을 왕위에 앉혔다. 조선 역사상 왕이 죽는 날 곧바로 다음 왕을 앉힌 예는 없었다. 그러나 윤씨는 조정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거사를 강행했다. 그 배후에는 한명회, 신숙주 등의 권신들의 힘이 작용했다. 정희왕후로서도 13세의 어린 자을산군이 왕이 되었을 경우에 수렴청정으로 왕권을 안정시킬 수 있었기에 크게 손해될 것이 없었다. 왕권 안정을 위한 정희세도가로 출세한 만큼 앞서의 비범한 출생에 대한 설화는 이에 대한 미화 표현 소재를 끌어와 구성한 것으로 생각된다.) 김현룡, 2000, "한국 문헌설화", 서울: 건국대학교 출판부한편 한명회는 세조의 장자방이라 불렸던 명성에 걸맞게 지혜로움에 대한 설화도 전해지고 있었다. "海東野言"에서는 한명회와 신숙주가 세조와 술을 마시다가 신숙주가 세조에게 실수를 하자 한명회가 신숙주에게 그 날 밤은 불을 끄고 자도록 일러 신숙주의 위기를 벗어나게 해 준 이야기가 있다. 유명한 이야기로 자주 접해온 것이지만 한명회의 그 판단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그러나 한명회는 어디까지나 조카의 왕권을 찬탈한 세조의 참모였다. 그러므로 당시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하는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그의 앞잡이 노릇을 한 한명회가 누리는 부와 명예는 비난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이야기 속에서 한명회의 성격을 더욱 포악하게 규정짓는다. 대표적인 예가 "於干野譚"의 한명회가 전림을 얻었을 때의 이야기로 한명회에게 죄를 지은 전림이 포박을 풀고 도망치자 이를 지키라 명을 받은 여자 종을 기둥에 묶고 활을 쏘려고 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런 한명회의 지독한 성품은 "어우야담"에 실린 이야기에서도 다시 보여진다. 한명회가 다리에 병이 있어 아파 견딜 수가 없게 되자 스스로 종을 시켜 돌로 다리를 내려치게 하여 부서진 뼈 속을 더듬어 벌레를 잡아내었다는 이야기이다. 벌레를 기름가마에 삶자 벌레가 죽으면서 한명회도 죽었다는 기이한 결말을 가진 이 이야기는 한명회의 포악한 행동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그 성품의 잔악함을 부각시키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즉, 지탄받는 행위의 어떤 사건에서 그것을 지시한 사람, 세조 보다 과잉 충성하면서 행동으로 옮긴 사람이 더욱 미워하는 대중심리가 반영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김현룡, 2000, "한국 문헌설화", 서울: 건국대학교 출판부위의 조광조가 여자에 대하여 절제심을 가지고 여자를 계도하는 입장에 서있었다면 설화 속의 한명회는 법에 개의치 않.
서론민주사회를 논의하려면 시민사회의 성립을 언급 안 할 수 없다. 시민사회가 성립되므로 해서 그들의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하였으며 그로 인한 귀결로 민주사회의 토대가 되었기 때문이다.시민이라고 함은 고대그리스의 도시국가와 로마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 당시의 시민이라고 함은 하나의 특권계급이었다. 그리고 근대서구의 시민이라고 함은, 부르조아 계급으로써 유산계급, 즉 산업활동으로 돈을 벌어 사회적 지위를 얻었던 계급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16세기 산업혁명으로 인해 많은 돈을 벌어 사회적 지위를 얻게 된다. 돈을 많이 갖고 있었기 때문에 따라서 왕에게 내는 세금도 많았다. 물론 그만큼의 대우는 받기는 했지만 계급 상으로는 여전히 왕과 귀족 밑에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나중에는 절대 왕권에 도전하기에 이른다. 이들은 사유재산권의 보장과 상업활동의 자유를 원했다. 또한 자신들을 뒷받침해줄 사회제도도 필요했고 자기의 의견을 정치에 반영해 보고싶기도 했다. 따라서 이들과 집권세력간에는 충돌이 있을 수밖에 없었고 급기야는 시민혁명이라는 큰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시민혁명은 국가로부터 자신들의 자율성을 되찾고 나아가서 국가를 시민이 형성하고 운영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에 자리잡은 법에의한 통치라는 법치주의와 국민이 나라의 주인된권리를 지니는 국민주권시대 나아가 개개인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개인주의 및 개인의 자유를 존중한다는 자유주의는 오늘날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중요시 하는 이념과 일치한다.하지만 시민혁명당시 시민은 상공업 활동을 통해 부를 축적한 부르주아에게만 국한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시민혁명이후 시민들이 얻게 된 선거권이나 참정권등의 권리들이 노동자 농민 여성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다시말해 재산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 더욱 많은 시민으로서 의 권리를 누렸던 것이다. 이렇게 근대 시민혁명당시의 시민들은 전체 국민들중 일부에 국한된 특권계급이었던 것이다.이들은 무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요구해서 얻은 값진 결과이다. 이런 예로 노동자들의 조합ker, C.)는 "다수자에 의한 정치"를 민주주의라 하였으며, 브라이스(Bryce, J.)도 "사회 전체의 구성원들에게 합법적으로 주권이 부여되고 있는 정치 형태"를 민주주의라 하였다.그러나 한 통치자가 자의로 '민중을 위한다'고 생각한 정책을 표방하고 통치를 한다고 해서 그것을 민주 정치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민주 정치를 그 실현될 정책 목적만을 기준으로 정의한다면 국민 전체의 복지를 내건 독재 정치도 민주 정치라 할 수 있다.그러므로 일반적으로 민주주의를 정의할 때는 그것을 생활 양식과 정치 형태의 통합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듀이(Dewey, J.)에서도 볼 수 있는데, 그는 "민주주의란 단순한 정치 형태만은 아니며 그것은 공동 생활의 한 양식이며 또 서로 교섭하는 경험의 한 양식"이라고 하였으며, 매이오(Mayo, H.B.)도 민주주의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신념을 구현하기 위한 사회 생활의 원리와 정부 형태"라 하였다. 이와 같이 민주주의는 20세기에 와서 '정부 형태'라는 어원적 의미 규정에서 민주적 정부 형태를 밑받침하여 그것을 가능케 하는 '생활 방법과 행동 양식'까지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2. 서구의 민주주의1)서구민주주의의 특징유럽의 민주주의가 2,000년 이상 소요된 이유는 민주주의에 적합한 사회적 조건과 집체저 정신(collective mentality)이 성숙되는 데 그 만큼의 시간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1) 사회적 조건에 있어, 유럽은 강력한 봉건제도가 지속된 이후 귀족들은 군주에 저항하며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게 되는데 이 단계가 영국에서 Magna Carta에 해당한다. 그 이후 경제적 힘을 축적한 상업, 제조업의 중산계급이 귀족에 제한되었던 권리와 특혜를 획득하였고,봉건주의의 붕괴 이후 군주가 민주주의 대신 절대왕정체제를 수립하자 수차례의 시민혁명이 촉발하여 결국 권리와 특혜는 중산계층의 것이 되었으나, 확대된 산업프롤레타리아에 의한 노동조합과 혁명에 의해 도전을 받게 되었다.따라서 상어 프랑스의 몽테스키외는 1748년 《법의 정신》에서 행정·입법 2권에 제3의 사법의 독립을 추가시켜 삼권분립(三權分立)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그 후 1762년 제네바의 J.J.루소는 《사회계약론》을 통하여 국민주권론을 폈다. 모든 법은 국민의 총의(總意)를 대변하지 않는 한 적법성을 인정받을 수 없으며, 국민은 총의의 형성과정에 참여하지 않는 한 사회적 책임을 다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민주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책임을 강조한 대목이다.로크, 몽테스키외, 루소의 민주주의 사상은 미국의 독립혁명과 헌법제정, 그리고 프랑스혁명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은 본국이 부과하는 세금을 반대하고 나섰다. 미국의 대표들이 참석하지 않았는데 영국이 일방적으로 부과하는 세금은 미국인들이 납부할 수 없다는, 즉 "대표 없이 과세없다"는 논리였다. 1776년 7월 4일 채택된 미국의 독립선언문은 인간자유의 기본을 문서화하여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으며 조물주로부터 남에게 양도할 수 없는 일정한 권리가 부여되었고, 삶과 자유와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천부적으로 타고났다"고 역설하였다.그 밖에도 독립선언서는 모든 권력은 국민의 동의에서 나와야 하고, 정부가 정당성을 상실할 때는 새로 조직되어야 하며, 정부는 국민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효과적으로 도모하여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1787년 제정된 미국의 헌법은 인류 최초로 삼권분립을 명시하였으며 자유민주제도를 성문화하였다. 근대 민주주의 정치제도의 출발을 가져온 것이다. 그러나 노예제도는 그 당시 미국에서 번성하였고, 여성의 참정권도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여성의 참정권은 미국에서도 1848년에야 비로소 제기되기 시작하여 1920년에 이르러 완성을 보았고, 노예제도는 1863년 A.링컨이 노예해방령을 선포함으로써 비로소 폐지되었다.1789년 프랑스혁명은 봉건제도를 타파하고 자유·평등·박애 정신을 기초로 하려는 것이었다. 같은 해 8월 선포된 '인간 및 시민의 권리선언'은 유럽대륙 최초의 인권선언이다. 인다. 민주주의는 각 지역의 고유한 정치와 문화를 배경으로 하여 각기 독특한 형태로 나타났다3. 한국 민주주의의 전개과정1945년 해방후 한국 사회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분단, 전쟁, 경제의 급격한 발전 등의 사회적 배경하에서 한국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전개되었느냐에 대한 학계의 의견이 분분하다. 이러한 여러 의견중 가장 나에게 설득력을 지니는 의견은 최장집 교수가 해방후 나타난 세 가지 정치 균열에 따라서 한국 정치의 전개과정을 주장한 것이다. 그는 한국 사회의 정치 전개를 한국 권위주의 국가의 전개와 끊임없이 되풀이되어온 민주화와 정치 참여에 대한 민중들의 요구의 과정이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중심적으로 설정되는 것은 '국가 대 시민사회'의 관점이다. 물론 여기서의 시민사회란 전체 시민사회를 총괄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정치의식을 가지고 기존 정치의 전제적 지배를 극복하려는 피지배계급만으로 구성되어 있고 따라서 산업 노동자 계층과 중간제계층 내지 농민, 노동자, 중간제계층만이 시민사회의 구성부분이 된다. 해방후 나타난 다양한 정치 균열을 살펴보면 세 가지의 정치균열로 집약될 수 있다. 첫째가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의 대립이며, 둘째는 경제적 정의 대 발전, 그리고 세 번째는 민중주의적 통일 대 보수주의적 통일의 대립이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균열 중에서 어느 것을 따라 대립이 전개되는가는 국제정치적 맥락의 변화와 국가와 시민사회의 권력관계의 변화에 따라 규정되어 왔다. 세가지 수준의 균열은 뚜렷한 순서를 가지고 민주주의로부터 경제적 정의에로, 경제적 정의로부터 통일 문제로 즉 보다 덜 근본적인 균열로부터 가장 근본적인 균열로 이어지는 것이였다.우리는 해방 후 한국 정치를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데, 즉 식민통치의 폭압성, 태평양 전쟁의 종전, 일제 강압기구의 일시적 붕괴, 역사적 국면에서의 폭발적인 정치세력화 등의 전개가 바로 그것이다. 이 당시 보수주의자이건 공산주의자이건간에 민족주의 지도자라면 민족독립국가의 수립과 일제 식민 잔재의 청산이라 보수적 정치질서가 자리잡히도록 하였으며, 다음으로는 정신과 이념의 수준에서 반공이념에 확고한 정당성을 부여함으로써 반공의 보루로서 제 1공화국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을 다지게 하였다. 때문에 이미 1950년 대부터 한국의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는 국가의 과대성장과 시민사회의 유약한 발전이라는 극도의 불균형관계로 형성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4.19혁명은 한국전쟁이후 국가에 대항한 시민사회의 최초의 직접적 도전이였으며 시민사회의 첫 번째 승리로 기록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승리는 아니었으며 후에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남으로해서 혁명적 결과는 다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60년의 4.19혁명과 1961년의 군사 쿠데타는 한국전쟁 전후의 군부-관료집단의 과대성장과 시민사회의 간제적 탈정치화의 구조적 산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1961년 쿠데타에 의해 수립된 통치구조와 1972년의 유신체제는 고도의 강권력 사용을 통한 안정기반의 구축, 해외자본의 적극 유치를 통한 고도 산업화의 추진, 군부 엘리트를 중심으로 한 민간관료와 민간 테크노크라트간의 동맹등으로 보아 국가 주도의 권위주의적 발전유형이라 할 수 있다.군사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빠른 경제성장을 달성함으로써 정당성의 결여를 보상받으려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국가-자본 대 노동자간의 갈등이 경제적 정의 대 발전이라는 제 2의 정치 균열의 현상의 전개를 이끌어 갔다. 지속적인 도시화와 산업화의 결과로 우리 사회가 높은 수준의 사회변화를 수반하는 고도로 도시화된 산업사회로 전이하였다. 이 시기를 통하여, 강화되어온 정치의 권위주의화에 따라 정치적으로 활성화되고 강화될 수는 없었지만, 그것의 사회적 조건으로서 시민사회가 팽창되어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또 여기서 주목해야할 사실은 산업화의 결과로 우리 사회가 계급간 이해의 갈등이 깊숙히 진행된 매우 이질적인 사회구조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피라미드 계층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공화당 정권은 민주주의의 원리를 정것이다.
메이지 시대는 일반적으로 1868년부터 메이지 천황이 사망한 1912년 7월까지 약 44년 동안을 메이지 시대라고 한다. 이 시대는 무가정부인 에도막부체제의 정치형태가 무너지고 천황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부가 탄생하는 역사적 의의가 있다. 정치 형태는 무사가 출현하고 이후의 700년 간 지속되어 왔던 무가정치였다. 하지만 도쿠가와 막부의 쇄국 정치는 미국의 포함 외교로 막을 내리게 되고, 미?일 화친 조약을 계기로 일본은 개항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개항과 더불어 외국 상품의 범람으로 큰 타격을 받고 조약 역시 칙허 없이 처리한 막부의 독단적 처사였으므로 반막부세력이 일어나 반 막부 운동이 활발해졌다.이러는 가운데 유력한 번(藩) 세력들에 의해 막부가 타도되고 왕정 복고가 이루어져 국왕이 5개조의 어서문을 발표하고 개혁에 착수하였으니 이것이 메이지 유신이다.천황은 지속적으로 왕정복고의 의지를 표명하고자 했으나 전에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러나 메이지 천황에 이르러서 무가정부를 타파하고 천황의 친정을 이루었고 더불어 그간의 봉건적 제도를 벗어버리고 새로운 통일 국가를 이루었다. 이러한 일련의 대 개혁의 과정을 메이지 유신이라 한다.이는 전면적인 서구화?근대화 개혁이었으나, 국왕 절대주의를 표방함으로써 국수주의?군국주의로 나타나고 마침내는 제국주의적 침략 국가로 등장하여 주변 국가들에게 상당한 고통을 안겨주는 불행을 초래하였던 것이다1.배경메이지유신이 가능하게 된 것에는 많은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 큰 부류로 나누면 3가지로 나눌수 있을 것이다. 첫번째가 근대화정책이고 두 번째가 학문적인 근대화, 마지막으로 근대교육이 있었다. 이러한 3가지 요인이 일본의 근대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첫 번째. 근대화 정책은 260여년 동안 지속되던 에도 막부가 메이지 유신으로 그 종말을 고하고 일본은 새로운'나라 만들기' 작업을 하나하나 기획하고 실행에 옮겨갔다. 실권을 장악한 유신 지도자들은 천황을 앞세워 자신들의 부족한 권위를 보충하고, 부국강병의 대원칙을 세우고, 여러가지의 반발을 우려했던 신정부는 별다른 반발이 없자 그 기세를 몰아 6월 17일, 전국의 274개에 판적봉환을 명하고 며칠만에 종결시켜 버린다.그러나 판적봉환으로 신정부의 권위를 과시는 했지만, 번제의 유지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중앙집권의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이에 2년의 여유를 두고 1871년 사쓰마?조슈?도사의 3번에서 1만여 명의 군대를 조직하고서는 7월에 일제히 '폐번치현'을 단행하게 된다. 즉 번 대신에 '3부 302현'의 부현제를 실시하고 부에는 지사를,현에는 현령을 두고 그들을 정부에서 임명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사이고 다카모리는 정부의 명령에 불응하는 번은 즉시 군대를 동원하여 물리적으로 제압하겠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별다른 반발 없이 순조롭게 추진되었다. 부현제는 같은해 11월에 '3부 72현'으로 정비되고 1888년에는 '3부 43현'으로 조정되어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2) 사농공상의 신분제 폐지근세의 봉건적인 신분차별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근대국민국가의 근간을 이룰 국민의 대두를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에 사민평등의 조치가 내려진다. 즉 이미 판적봉환에 따라 번주와 번사의 신분 구별이 없어졌으므로, 정부는 번주를 상층 구게과 함께 화족으로, 번사를 사족으로 하여 봉건적인 주종 관계를 타파한다. 그와 동시에 농공상을 평민으로 만들고, 1871년에는 이전의 에타?히닌과 같은 천민의 칭호를 없애고 신분?직업을 평민과 같이하여 형식상으로는 사민평등을 이루게 된다.그리고 화족과 사족에게 지불되는 질록이 정부 재정의 30%를 차지하는 등 부담이 커지자, 1876년까지 공채를 대신 지불하고는 화족과 사족의 질록을 전폐하는 '질록처분'을 단행한다. 또한 폐도령을 내리고 칼을 차는 것을 금지시켜 신분상의 모든 특권을 없애버린다. 그러나 하급 사족이 받은 공채는 액수가 얼마되지 않아, 관리?순사?교원과 같은 안정된 직업을 갖지 못한 많은 사족은 생활이 궁핍해 지는데, 이것이 결국 불평사족들의 반란을 이어지게 된다.3) 지조개정막부를 무너뜨리고 권력을 근대 산업을 육성하고자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식산흥업이다. 정부는 외국인 기술자를 초청하고 공부성을 설치하는 등 서구의 근대 산업을 적극적으로 이식하고자 하였다. 또 군사?광산?철도?통신 산업 등은 관영화하고, 제사?방적 부문은 '관영모범공장'을 설립해서 기계 불하와 조성금 교부를 통해 민간기업을 육성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미쓰이?미쓰비시 등 이른바 정상으로 불리는 민간사업가가 정부로부터 특혜를 받아 금융?무역?해운 등의 분야에서 독점적인 이익을 올리게 된다.두 번째로 학문의 근대화를 들 수 있다.일본의 근대화는 신정부의 정책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추진되었는데, 여기서는 학문의 분야에서의 일본의 근대화에 대해서 알아보자.먼저 사상 분야에서의 근대화라면 무엇보다 계몽사상의 활약을 빼놓을 수 없다. 후쿠자와 유키치?니시 아마네?가토 히로유키 등의 서구파 지식인이 계몽사상의 선구자격 인물들이다. 대부분 막부의 기술관료였던 이들은 1873년 메이로쿠샤를 만들어 『메이로쿠 잡지』를 발간하면서, 연설과 저술?번역활동 등을 통해 사람들에게 서구사상에 대한 각성을 호소했다.그리고 학문 분야에서는 막말의 개항을 계기로 막부에서도 서양의 인문?사회과학을 도입하였으며, 기독교도 신구 각파의 외국인 선교사에 의해 포교활동이 재개되었다.즉 막번체제의 쇄국 하에서의 각종 제약이 해소됨으로써 외래 사상과 학문의 도입이 개시되고, 그것을 소수의 선각자들이 수용하여 각 분야의 연구가 발족하게 되었다.메이지 초기는 정부의 신학문 육성을 위한 전문학교?대학의 건설이 아직 본격적인 정착 단계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서양 학문의 소개와 계몽은 문부성, 민간학자의 계몽서?번역서 등에 의해 이루어졌다. 따라서 당연히 그 수준은 초보적인 소개를 넘지 못하는 것이었다. 니시 아마네의 철학연구, 가토 히로유키의 『국법범론』번역 등은 각각의 분야에서의 전문적이자 선구적인 개척이라는 의의를 지닌 것이었다.계몽적 도입을 대표하는 것은 문부성이 번역하고 편찬한 『백과전서』이며, 이는 인문?사회 각 방면에으로서는 무엇보다 지배층에게 독일식 법학?경제학의 「국가학」적 학풍이 환영을 받았던 것을 들 수 있다.세번째로는 근대 교육을 들 수 있다.에도 시대에 만들어진 서민 교육기관인 데라코야는 19세기가 되면 그 수가 급증하기 시작하여 막말에는 일본 전국에 그 숫자가 3만에서 4만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러한 데라코야에서는 글씨 쓰기와 한적 등등의 강독을 주로 교육시켰다. 그러나 메이지로 이양되면서 신정부가 폐번치현을 단행한 직후 문부성을 설치하여, 부현의 학교는 문부성의 관할 하에 놓이게 되었다. 문부성을 설치한 이듬해인 1872년 8월에는 일본 최초의 국민교육제도를 규정한 학제가 발령되기에 이르렀다.“마을에 학교에 다니지 않는 집이 없고, 집에는 학교에 다니지 않는 사람이 없도록 한다” 라는 근대적인 발상의 학제도 포함되어있다.2.전개1867년 12월에 신정부가 발포한 왕정 복고령은 새로운 통일 국가로 향한 방향을 제시하였다. 1868년 3월 14일에 국왕은 5개조의 고세이몬(御誓文)을 공포하여 신 정부의 기본 방침을 제시하였다.1)널리 회의를 일으키고 만사를 공론에 의해 결정한다2)상하마음을 하나로 하여 활발하게 경륜을 행한다3)문무백관이 하나가 되어 서민에 이르기까지 각자뜻을 세워 민심을 흔들리지 않 기를 요한다4)구례의 누습을 타파하고 천지의 공도에 기초한다5)지식을 세계에 구해 크게 황기를 떨친다*우리나라 미증유의 변혁을 이루고자하니 짐이 스스로 모두 앞장서서 천지 신명게세 맹세하여 크게 국시를 정하고 만민보전의 길을 세우고자 한다. 모두도 또한 이 취지에 따라 협심,노력할 지어다4월에는 관제의 기본을 정하였고 7월에는 에도를 도쿄로 개칭하였으며, 9월에는 메이지로 개원하였고 이듬 해 국왕이 도쿄로 이주하여 도쿄가 새로운 수도가 되었다. 신정부가 성립한 후에도 여러 번들은 존속했 는데 그것을 근대적인 중앙 집권 체제로 고칠 필요가 있었다. 그에 따라 1869년 6월에 여러 번주에게 토지 영유와 인민 지배의 권력을 국왕에게 양도하게 하고 번주를 번지사로 고쳐 과감한 투자를 하였다. 또 조세 제도를 개혁하여 세입?세출에 예산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세정 의 합리화를 기하고 각급 학교를 설치하여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일본은 이러한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와 불평등 조약의 폐기를 위한 교섭을 계속하였다. 불평등 조약으로 개항한 이래 일본이 식민지화 또는 반식민지화 되지 않고 독립된 근대 국가를 형성해 나갈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였다는 점에서 메이지 유신의 의의가 있다. 그러나 부국 강병을 목적으로 일본이 제국주의 국가나 파쇼적 군국주위 국가의 구조를 가지게 된 점이나, 전근대적인 절대주의 체제의 강화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메이지 유신을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당시 일본은 조선 등에 대한 식민지적 수탈과 지배없이는 서구의 압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이와 같이 메이지 유신으로 말미암아 일본은 강대국으로부터 자신의 나라의 이권을 지킬 수 있었으면 아시아의 맹주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다. 소극적인 개화가 아니라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적극적인 근대화로 일본의 국력은 비약적으로 신장하였다.개항 초기의 불평등 조약에서 벗어나려고 시작한 메이지 유신은 일본의 식민지화를 궁극적으로 막고 독립적인 근대화 국가 수립이라는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3.내용우선 구세력의 타파를 볼 수 있다. 구세력이 되어 버린 막부 측은 신정부에 반발하였다. 이로써 1868년 무진 년에 본격적인 내전이 발생하였고 이 전쟁을 무진전쟁이라 한다. 무진 전쟁에서 신 정부는 구미 각 국에 천황이 일본국의 원수임을 선언하면서 구미 세력의 중립을 약속 받았다. 이는 신 정부의 대외 정치적 기초를 다졌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전쟁에서 우위를 차지한 신 정부는 1년 5개월에 걸친 내전을 승리로 종결했다. 막부 정부가 멸망한 이후에도 간헐적으로 발생한 대항세력등은 무력으로 제압한 신 정부는 국내를 통일하게 되었다. 이 무진 정쟁을 통해서 강력한 중앙집권적 성격으로 세력을 강화한다.둘째, 봉건적 제도를 타파하였다. 메이지 정부는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각 번(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