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파인만이라는 이름은 낯설었다.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라는 것, 인간이 만들어낸 최고의 살상무기라고 하는 원자폭탄을 만들어 미국에서 아인슈타인 못지않게 명성을 떨친 인물이라는 것을 이 책을 읽고 나서야 알았다.자연도서에 대해 막연하게 딱딱하고 교과서적인 내용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 ‘파인만씨, 농담도 정말 잘 하시네요’ 는 내가 가지고 있었던 그 이미지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책이었다. 자서전의 형식이어서인지 자연도서들이 가지는 딱딱함과 어려움과는 달리 파인만의 체험을 바탕으로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주가 되어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파인만은 어려서부터 남들과는 조금 다른 삶을 살았다. 남들이 무심코 그냥 지나칠만한 사소한 것들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끊임없이 호기심을 가졌다. 동네의 라디오를 고치고 경보기를 만들어 부모님을 깜짝 놀라게 한것도 다 그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파인만의 호기심어린 행동은 단지 어릴때로 끝나지않는다. 용어의 발음이 틀리더라도 열심히 생물학을 공부하고, 맨하튼 프로젝트에 참여할 때, 금고를 열기위해 책까지 사서 금고털이를 공부하는 파인만을 보면 그의 호기심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 수 있다.그는 물리학에 있어서 최고를 자랑하는 칭호와는 어울리지않게 물리학과 전혀 관계가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호기심이 생기면 무슨 일에든지 도전적이었고 모험심이 가득했다. 아무리 궁금한 것이 많아도 그것들에 도전해 볼 용기가 없거나 그 호기심을 자신의 직접 경험이 아닌 책이나 다른 사람의 말을 통한 간접경험을 통해 그대로 해소해버렸다면 지금의 그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했듯이 직접 경험해 본 일은 쉽게 잊혀지지않으므로 자신의 지식을 한층 더 쌓을수 있었기에 호기심을 직접 경험을 통한 적극적인 태도로 해소한 파인만의 지적 용기는 참으로 부러운 것이 아닐수 없다.‘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란 말이 있다. 사람이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아무런 시행착오와 실패없이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가 얼마나 힘든지는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문제는 그 실패후에 그대로 주저앉느냐 아니면 그 실패는 기회삼아 더욱더 앞으로 전진하느냐 하는 것이다. 늘 마음은 있지만 용기있게 어떤 일에 도전하고 실천해보지못하는 태도, 결과에 더 집착하며 또한 확실한 결과를 가져오는 도전이 아니라면 쉽게 포기해버리는 내 태도가 파인만의 그것과는 너무 다르기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파인만은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그 일을 처음 접해보는 것임에도 그가 가지고 있는 탐구정신과 도전정신으로 그가 마음먹은 일은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고 그로인해 더욱더 큰 자신감을 얻어갔다. 일을 시작하는데 있어서 방해요인은 다른 어느것에 있는것이 아니라 일이 또 실패하지않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이다. 하지만 이 책에도 쓰여있듯이 ‘무슨일이든 절대적으로 자신감을 가져라’ ‘그런 후에 자신감을 얻어서나는 내 능력을 더욱 발전시켜 나갔다’라는 말처럼 파인만이 가지고 있던 그런 자신감을 본받아야할것이다.그의 탐구정신과 도전정신은 비단 연구분야에서만은 아니였다. 그는 여러 가지 사회 현상에 이의를 제기했다. 공립학교에서 강의를 할 때 열 세 번째 서명에 대한 행정 편의주의에 젖어 있는 사람들을 괴롭혔고, 브라질의 과학 교육에 대해 비판했으며 엉터리 시 또한 그렇다.그가 이상할 정도로 돈에 집착을 보이지 않는 점은 그를 더욱 더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고 느끼게 하는 점이다. 거액의 연봉제안이 들어왔지만 그는 스스로가 정한 규칙을 지키기 위해서 고민할 것도 없이 거절한다. 돈이 가져올 행복보다 그 돈으로 빚어질 수 있는 불행을 위해서 그는 당당히 그 제안을 거절했다.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목적, 일하는 목적을 물질적인 풍요에 둔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쌓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고 많은 돈을 손에 쥐고 있는 것이 자신의 노동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파인만에게 있어서 물질적 부는 자신의 행복한 삶에 걸림돌이 된다고 여겨졌을 뿐이다.누구에게나 주어진 인생의 기회는 같다. 다만 그 기회를 잘 활용하느냐 그렇지 않은 가에 있어서 그 인생의 성공, 실패를 논할 수 있는게 아닌가 싶다. 파인만은 끊임없는 도전정신과 호기심으로 그의 인생을 흥미진진하게 만들었다. 또한 그는 반드시 직접 경험해 보려고 했다. 그는 도전적이고 모험적인 인생을 살기위해서 스스로 물질적 부를 거부하는 용기도 보여주었다. 이러한 그의 삶의 철학이 그를 노벨물리학상에 이르게 한 것이다. 파인만의 삶은 단순한 과학자로서의 그것을 뛰어넘어 인생의 길을 알려주는 철학자의 삶과 같다.
진리(지식) 대응설진리(지식) 대응설을 설명하기에 앞서 우리는 철학적 대상으로서의 지식을 인식하는 문제를 알아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우리는 지금 정보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홍수처럼 밀려오는 지식을 마치 필터맨과 같이 빨아들이기에 바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는 얼마만큼의 지식을 소유하느냐가 문제이다.그러나 철학적 대상으로서 지식의 문제는 지식을 얼마만큼 소유하는가 혹은 이미 완성된 지식을 어떻게 소유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지식이 근원적으로 어떻게 나에게 주어지며,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 얼마만큼 타당성을 가지는가 하는 것이다. 내가 그 속에 살고 있는 지식의 체계를 빠져나와 이 지식의 체계 자체를 문제시하고 대상화하여, 법정에 세워 그 정당성을 검증하는 보다 근원적인 문제가 우리에게 제시된다.파르메니데스가 지식(epistle)에 이르는 길과 억견(doxa)에 이르는 길을 구분했을 때부터 참된 지식 혹은 인식에 대한 문 탐은 계속되어 왔다. 플라톤은 ‘국가편’ 제5권에서 글라우콘은 지식과 억견을 같은 것이 아니라는 소크라테스의 이야기에 동조하면서. “틀림이 없는 것과 틀릴 수 있는 것을 같다고 보는 사람을 어떻게 지각 있는 사람이라고 말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한다.이처럼 지식은 철학적 인식문제에서 어떤 지식이 참된 지식이며 거짓된 지식인지 구분하는 기 기준들 중에서 진리(지식) 대응설에 대하여 알아 본다.어떤 지식이 진리성을 가진 지식이고 어떤 지식이 그렇지 못한 지식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의 기준들이 제시되어 왔다. 그런데 지식은 판단이나 진술의 형식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지식의 진리성 문제는 우리는 어떤 진술이나 판단이 참인가 하는 문제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판단이 참인가? 이에 대한 기준은 전통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 토대를 두고 마련되었다.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 다고 말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이요, 존재하는 것을 존재한다고 말하거나 존재혹은 구체적 사태 사이의 일치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기하학에서 두 삼각형이 합치하거나 두 손바닥이 합치된다는 의미와는 다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판단과 대상의 일치를 ‘대응’(correspondence)이라 부르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전통적인 진리설을 대응설로 부른다.대응설은 판단과 대상 사이의 대응관계를 참인 지식의 기준으로 설명한다. 그런데 이 대응설은 참인 지식을 거짓인 지식과 구분하기 위한 가장 통상적이고 일반화된 이론이긴 하지만 한계를 갖지 않을 수 없다. 사실이 구체적으로 혹은 경험적으로 확인될 수 없는 관념적 사태라고 한다면, 이 대응관계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그리고 ‘대응한다’는 말이 정확하게 적용될 수 있는 상황을 찾기가 그리 쉽지 않다. 판단과 대상 사이의 정확한 대응관계를 확인할 수 없는 상황들이 존재하는 한, 이 대응설은 결함을 갖지 않을 수 없다.이것이 판단자의 단순한 신념이나 지각에 근거한 판단일 경우에 그 판단이 사실과 대응관계를 가진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추구하는 진정한 지식이 인식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신념이나 지각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남김없이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상’ 역시 단순한 구체적 사실이 아니라 우리의 지각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대응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플라톤의 이상국가론플라톤에서 이성은 선의 이데아를 포착함으로써 감성을 벗어나 ‘고향’과 같은 이데아의 세계로 돌아간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얘기한 동굴의 비유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말해준다. 이데아계를 직관한 인간, 특히 선의 이데아를 직관한 인간은 플라톤에 의하면 삶의 최고목표를 달성한 셈이다.그러나 플라톤은 그것이 개인이나 어떤 집단의 행복이 될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국가의 시민으로서 가져야하는 최종 목표는 역시 국가 전체의 복지에 있다고 강조한다. 플라톤 철학의 궁극적인 목표는 선과 정의의 이데아를 국가 안에서 실현하는 것이다.그러므로 플라톤은 이데아를 아는 사람만이 이데아를지혜이고, 의지의 덕은 용기이고, 욕망의 덕은 절제이다. 이 세 가지 덕이 서로 조화를 이룰 때 정의의 덕이 발생한다. 즉, 이성에 해당하는 통치계급(철학자, 왕), 의지에 해당하는 수호계급(군인과 경찰) 그리고 욕망에 해당하는 생산계급(농민, 수공업자, 임금노동자)이 각각 구문되어 스스로 이 의무에 충실할 때 정의가 발생한다. 영혼의 세 부분처럼 국가의 세 계급도 서로 같은 관계에 있어야 한다. 즉 이성이 욕망을 지배하는 것처럼 통치계급이 생산계급을 지배해야 하고 의지가 이성과 우호관계에 있어야 하는 것처럼 군인과 경찰은 통치자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 태어난 신분에 의해서가 아니라 각자의 능력에 따라서 국가의 시민들은 세 계급으로 분리된다. 물론 노예는 여기서 제외된다.플라톤은 수호계급이 사유재산이나 가족을 갖지 않아야 된다고 강조함으로써 구체적으로 이들의 탈선은 억제하고 있다. 철학자들의 임무는 국가의 통치를 통하여 개인 스스로가 각자의 의무를 다하게 만드는데 있다. 플라톤은 재력을 갖는 소수의 사람이 국가를 지배하는 과두정치(Oligarchie)로부터 모든 사람이 정치에 참여하는 민주정치(Demokratie)를 거쳐 한 사람이 폭력으로 지배하는 폭군정치(Tyrannis)로 이행하는 세 가지의 정치형태를 예상하고 이 모두가 옳지 못하다고 비판한다. 정의에 대하여 올바른 개념을 갖지 못한 채 주관적인 의견만을 갖는 사람들이 정의를 기반으로 하는 통치에 참여하는 것은 국가라는 공동조직에 유해하다는 논리를 들어 그는 민주주의를 반박한다.반대로 스파르타의 귀족주의적이고 군주주의적인 정치형태가 민주적인 도시국가의 정치형태보다 우수하다고 판단하여 플라톤은 그쪽으로 더 기울어진다. 물론 플라톤이 자유시민으로부터 평등하게 통치자계급이 선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때 그의 이념은 완전히 민주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 그러나 그것도 노예가 제외되어 있다는 한계점을 갖고 있으며 선별의 기준이 너무나 귀족적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플라톤의 정의관은 시민들의 다양하고 상반되는 이해관계를 여기서 사유재산과 분업에 연관된 플라톤의 사상과 마르크스의 사상을 비교 검토할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의 이상은 사회적 분업, 계급, 착취 등이 소멸된 사회 속에서 개인의 모든 능력과 재능을 전면적으로 개발시키는 데 있었다면 플라톤의 이상은 세 계급을 가능한 한 잘 유지하여 모든 사람이 자기의 신분에 따라 자기의 의무를 다하게 하는 데 있었다. 즉 철학자는 통치자로, 수호자는 전사로, 그리고 나머지는 생산자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마르크스와 플라톤의 이상은 서로 상반된다고 말할 수 있다.인도 사상에서 많이 등장하는 브라만(Brahman)인도 사상에서 브라만은 객관적인 측면으로부터 궁극적인 실재를 정의한다.‘타잇티리야 우파니샤드’의 제3장에서, 아들이 아버지에게 다가가서 일체 만유가 흘러나오고 다시 귀입하는 궁극적 실재의 본질에 대한 가르침을 청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브라만의 대체적인 모습을 말해주고, 이러한 모습에 부합하는 개념의 내용을 발견하고 이른다. “이 존재들이 생겨나고, 그들이 살고, 그들이 죽어서 귀입하는 것, 그것이 브라만이다.” 세계의 모든 존재는 끊임없이 그 모습을 바꾸며, 따라서 그것은 궁극적인 의미에서 실재한다고 간주될 수 없다. 변화하는 사물들의 근저에서 놓여있는 항구불변한 어떤 것이 있는가?아들은 물질의 궁극적인 실재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외부세계에 있어서 현저한 측면이다. 이 견해는 로카야타(Lokayata), 즉 유물론자들에 의하여 견지된다. 아들은 잠시 후 물질의 생명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식물의 성장은 물질이외의 다른 어떤 설명을 요한다.마나스(Manas), 즉 지각적인 의식은 생명이나 물질간의 다른 차원의 산물이다. 그것은 생명진화의 절정인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아들은 마나스가 브라만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것조차도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단순한 지각적인 의식의 범위밖에 있는 지적인 사실들이 있기 때문이다.비갸나, 즉 지성이 브라만이라고 말한다. 곧 아들은 지적인 자의식조차도 불완기의 수승한 지식으로 모든 지복과 불멸로 빛나는 아트만을 본다.” 엄격히 말하여, 우리는 아난다의 궁극적인 실제성에 대하여 아무런 설명도 할 수 없다. 그것이 추상적인가 아니면 구체적인가하는 질문조차도 불합리한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적인 욕구는 우리가 아난다에 대한 어떤 설명을 내리도록 강요한다. 아난다는 추상적이라기보다는 구체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보다 진실에 가깝다 할 것이다. 차원 높은 원리는 저급한 것에 비하여 보다 구체적이고 포괄적이다. 그러므로, 브라만 그 자체인 아난다보다 더 포괄적인 있을 수 없다. 그것으로 인하여 모든 존재가 유지되며, 그것 속으로 모든 존재가 녹아든다. 광물계, 식물계, 동물계, 그리고 인간사회의 온갖 영역들이 궁극자와 어떤 추상적이고 기계적인 방식으로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스스로에 대하여 보편적인 것 속에서 하나로 동일하다.우주론적 논증(Cosmological argument)전통적인 신의 존재증명에 대한 논증 중에 우주론적 증명은 논증 형식면에서는 엄밀성이 적은 것으로서 세계에 관한 경험적인 사실로부터 시작해서 이 사실의 원인이나 설명을 찾아내려고 한다. 그리하여 무한한 인과조건들로는 적합한 설명을 제시할 수 없으므로 어떤 필연적인 존재나 제일 원인이나 인격적인 행위자가 존재해야한다고 결론짓는다. 우주론적 논증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우리는 그 중 칼람 논증에 대하여 알아본다. 칼람 논증은 알 킨디와 알 가잘리와 같은 아랍 철학자들이 제안했고 최근에는 크레이그가 옹호하고 나선 것으로서 시간상의 제 일 원인은 논증하는 방식을 취한다.칼람 논증은 다음과 같이 정식화 될 수 있다.1. 존재하기 시작한 모든 것은 그것의 존재원인을 갖는다.2. 우주는 존재하기 시작했다.3. 그러므로 우주는 그것의 존재원인을 갖는다.전제 1은 모든 우주론적 증명의 근저에 있는 인과율의 한 형태를 서술하는 것으로서 크레이그는 이 전제가 직관적으로 명백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어느 누구도 그것을 부인할 수 없다고 보는 것것이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사실 이 책을 처음 읽으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사실 이런 한국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류의 책이 여러 권 쏟아져 나왔었고 한국에 대해서 너무 안 좋은 점만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누구나 느끼고 있는 사실이지만 말할 기회가 없었던 독자들을 대신해 시원하게 풀어가려고 하는 의도는 좋았지만 너무 긁어대기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책을 읽어가면서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부분도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 대선진행과정들을 보면서 느끼게 되는 부분들과 맞물려 나름대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책은 한국인으로 사는 열 가지 괴로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일본이여 들어오라! 중국이여 기다려라!, 공부는 끝났다, 한국인을 넘어서라는 5가지 주제로 이루어져 있다.제 1 부 한국인으로 사는 열가지 괴로움에서는 맹목적인 '우리것' 추구에 대한 비판이 이었다. 저자는 '우리 사회의 신토불이에는 일종의 기피증과 문화적 폐쇄성이 교모하게 숨어 있다'며 우리 것에 대해 냉정해 질 필요를 강조하고 있다. 이미 오래전에 지구는 지구촌이라는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물론 이런 시대에 문을 닫는 다는 것도 우습지만 닫으려도 밀려오는 문화와 정보의 물살을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얼마나 유연성을 가지고 대처하느냐 하는 것이다. 무조건적인 폐쇄도 무섭지만 무조건적인 수용도 우리나라문화와의 충돌의 파장이 얼마나 클 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공짜를 너무 좋아하는 나라, 더치페이를 몰인정한 것으로 내모는 나라. 이런 말들에는 정말 다 공감한다. 더치페이를 몰인정하다고 얘기하며 아무도 누군가가 내기를 또는 회사나 단체에서 생긴 절대 공짜 돈이 아닌 공짜 돈으로 누가 먹여주기만 바라는 사람들. 무너진 다리의 부족한 철근들, 무너진 건물의 콘크리트들에서 나온 그 돈을 먹는 사람들. 참 어디서부터 얘기하고 고쳐야 할 지 막막한 일들이다. 아시아의 호랑이는 죽었고 클린국가만이 살아남을 것이라는 얘기는 대선을 앞두고 있는 정치 자들이 꼭 새겨두어야 할 말이다.제 2 부에서는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고려시대까지는 불교가 우리나라의 지배적인 사상이었다. 특히 고려시대때 불교는 호족들의 세력을 뒷받침했다. 새로 등장한 신진사대부가 자신들을 뒷받침하는 학문으로 유교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 유교이념으로 나라를 세웠고 유교이념에 의해서 자신들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그리고 이 유교 이념이 아직까지 한국사회의 부정할 수 없는 지배적인 사상이다. 조선건국세력들이 그랬던 것처럼 유교이념은 한국사회에서 여러 권위 앞에 무릎 꿇게 하고 불공평하게 타협하게 한다.너무 익숙해져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버리는 일들이 그렇다. 우선 남·여의 문제를 보면 고려시대까지는 조선시대만큼 남자, 여자의 차별 그리 심하지 않았다. 유교이념이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조선시대부터 남존여비사상이 활개를 치기 시작했고 이후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남자의 할 일, 여자의 할 일을 구분하고 여성에게 무조건적인 희생과 인내를 요구하는 이 사회는 머지않아 조금씩 조금씩 금이 생기게 될 것이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부모와 자식간의 문제도 그러하다. 한국사회에서 장남은 굉장한 재력과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부모님을 모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 외의 모든 일도 다 장남의 손을 거쳐야 한다. 한국사회에서 효사상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나마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이만큼이라도 지탱될 수 있었던데는 당연히 이 효사상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무조건적인 부담을 안기고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건 부모에게도, 자식에게도 서로 좋지 못한 일이 될 것이다. 최근에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그렇지 않은가? 한때는 한국인의 미덕으로 까지 일컬어졌던 효사상이 이렇게까지 추악하게 변해버린데에는 전통사상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과 수명연장사회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실패한 정책 때문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겠다. 최근에 한 텔레비젼연설에서 한 후보가 노인의 치매문제를 가족에게만 맡기지 않고 전문병원에서 싼 비용으로 전문가에 의해서 치료받을 수 있도록 병원을 늘리겠다는 공약을 들은 적이 있었다.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다. 무조건적인 희생을 강요하기 보다는 가족과 사회가 같이 공동으로 노인문제를 해결할 때 유교이념의 해악한 점을 해결하고 효사 상을 올바르게 다시 세울 수 있을 것이다.제 3 부 일본이여 들어오라! 중국이여 기다려라! 에서는 한중일 삼국의 문화를 아주 흥미 있게 비교하고 있다. 그 비교 대상이 바로 식칼인데 식칼의 형태로 한중일 삼국의 문화를 정의내리고 있다. 제일 깨끗하고 폭이 좁은 일본의 칼은 살아서 펄펄 뛰는 생선을 빠르게 제압하는 데 유용함과 동시에 흐물흐물한 생선의 살을 조각내고 다듬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칼을 통해 만들어지는 사시미나 쓰시는 일본인의 각자의 개인의 취향을 존중하는 일본의 문화를 이야기한다고 한다. 중국의 두툼하고 시커먼 사각형의 칼은 돼지비계나 갈비 등을 요리하는 데 쓰이는데 이렇게 만들어진 요리들은 중국인의 실용적이고 감각적인 특징을 잘 대변한다고 한다. 하지만 개인적인 기호를 고려하지 않으며 돼지기름으로 범벅이 된 이 요리는 둔탁하면서도 불투명한 중국문화의 정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두리뭉실한 우리나라의 칼은 배추나 무등을 썰기에 적합한데 이렇게 만들어진 한국인을 대표하는 요리가 김치이다. 그 요리는 시테크적인 측면에서 경쟁력이 없고 개인의 취향이나 입맛이 전혀 반영되지 않는 요리로서 중국의 요리와 비슷한 권위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요리에서 나타나는 모습들은 정치적인 면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사회에서 불투명하게 이리저리 채이는 중국사회와 사시미나 쓰시처럼 깨끗하고 살아있는 일본의 정치, 혼자 있을 때는 팔팔하고 여럿이 모이면 소금에 재워진 김치처럼 축 쳐져서 남의 눈치를 보는 한국사회에 대해서 저자는 식칼과 음식을 빌어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서로 눈치 보기 바쁘고 눈치 빠른 사람만이 살아남고 정직 같은 단어는 버려진지 오래라는 것을 생각할 때 저자의 비판이 매우 날카롭다고 느껴진다. 환경이 문화를 만들어내고 그 문화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문화속에서 자신의 의식을 세운다. 지금 우리가 처한 환경이 어떠한 가를 살피고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고 어떻게 세계의 흐름에 맞추어 살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하는 부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