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학말죽거리 잔혹사에서 본 여성학...제가 본 말죽거리.. 영화 에서본 은주라는 역할에서의 여성학점으로 본다면 우식과 현수라는 두 남자 사이에 우식에서의 관점에서 본다면 과거의 절대적인 남자가 지배층인 시대의 남성지배적 사회 에서본 여성과 현수에서의 관점에서 본다면 지금사회의 성차별이 점점 없어지는 현대시대의 남성사회의 여성으로 보여 진다.우식에게 은주는 그저 성적 수단으로서의 한 방법으로 도구일 뿐이다. 그 관점에서 남자는 한 조직에서 남성의 권력과 힘이라는 수단으로서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 끈임 없이 다른 남성과 대립하고 살아남는 자만이 조직에서 강자가 되어 사회를 살아간다. 마치 이 시대는 한국의 해방 후 80년대 초반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권력의 힘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시대를 대표한다. 이 시대의 여성은 성적(생물학적)으로나 여성의 사회 참여(인류학적)도가 낮고 참여를 해도 남성의 권력에 여성의 힘이 무참히 짓밟히는 사회이다. 그 틈 안에서 여성은 여성의 힘으로서 독립을 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니라 남성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회이다.시간이 흘러 지금은 여성은 과거와 달리 성적차별이 약해지고 경제적 참여도가 높아진 사회즉 현수를 통해 바라본 은주는 이제 여성도 남자가 이용하는 하나의 도구가 아니라 여성도 남성과 똑같은 이 시대의 인간으로서 대우를 받는 여성으로서 느껴진다. 하지만 지금도 여성은 아직까지 남성과 똑같은 사회적 관점으로서 바라 볼 수는 없다. 이 시대는 아직도 여전히 성차별이 있고 여성은 그저 성적도구로서 여겨지는 성매매의 한 상업수단으로서 여전히 이용당하고 있다. 여성은 아직도 사회에 독립적으로 생활 할 수 없는 존재로만 느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얼마 전에 총선에서도 볼 수 있듯이 각 당에서 비례대표1번을 여성으로 하고 있고 한나라당이 투표율이 내려갈 것이라는 예상을 한 후 박근혜씨를 대표를 했듯이 여성은 남성들한테 여전히 이용당한다고 생각한다. 선진국 에서는 여성은 남성과 평등한 사회를 이루고 있는데 이 지구상에는 아직도 여성이 그러지 못하고 있다. 이것의 원인은 원시시대부터 여성과 남성이 가족을 이루고 부족끼리 공간영역에 분쟁에서 어쩔 수 없이 나타만 힘이 있는 남성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에서 근원을 두고 있다. 지금의 시대는 그러한 종족간의 싸움도 없는데 왜 여전히 여성이 성차를 느끼고 있는가? 아직도 우리 남성은 여성에 대해 사회적인 고정관념에 대해 아직도 탈피를 못하고 있다. 혹은 여성이 인간의 한 부분으로 보지 않고 남성과 여성이라는 확실히 보여 지는 고정된 이분적인 사고에 아직도 우리 사회의 남성들은 그것에 대하여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지금의 여성학은 과거의 성차별에 대해 문제에 대한 학문으로 출발한 학문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학적, 심리학적 다양한 분야에 여성의 권리를 찾는 학문으로 발전하고 있는데 왜 아직도 우리 남성들은 여성을 지배하려는 것은 제 관점은 남성들은 남성의 권력이라는 힘이 여성에게 뺏기지 않으려는 그런 사고를 가지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과거에는 일부다처제가 있었지만 미래에서는 점점 여성의 권력이 커진다고 생각하면 경제적 능력이 없어지는 남성들이 여성에게 지배를 받는 시대가 올지도 모르겠다.
서양건축사 과제- 텍스트로서 역사적 선례와 건축 설계 -개인적 의견 - 건축사 또는 건축과 관계된 직업을 하는 사람은 건축사를 배울 필요가 있다 고 생각한다.건축사는 과연 설계를 위한 학문인가?교수님께서 나눠주신 글을 읽고 건축사(建築士)라는 학문이 건축업을 하는 사람한테 필요한 수많은 학문 중에 필요한 학문인지 이제까지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지금 나도 서양건축사 한국에서 대학교를 다니고 있어서 한국건축사(建築士)를 배우고 당연하다고 생각한 했는데 과연 나도 내가 이일을 하면서 建築士가 필요한 학문인지 생각을 해보았다. 결론은 ‘배워야 한다.’ 라고 생각한다. 강 혁이라는 필자가 이 글에서도 건축사가 필요한 학문인지 충분한 반론과 예를 들어서 설명하였다. 전 이 와는 별도로 그로피우스(Walter Adolph Gropius, 1883 ~ 1969)와 김중업(金重業, 1922 ~ 1988) 이 두 사람이 제자를 가르치는 방법 중에 건축사나 잡지책을 보는 것을 금했다고 했는데 전 김중업이라는 건축가가 과연 그 사람은 건축사나 건축 잡지에 영향을 받지 않고 건축설계를 했는지 의문이다.김중업 씨는 평양에서 태어나 일본(41-46년)으로 유학 52년부터 몇 년간 르코르뷔지에의 건축사무소를 들어가 작업을 같이한 사람이다. 한국으로 귀국 후 많은 활동을 하였는데 과연 김중업 씨는 자기 자신이 無에서 有를 창조한 모든 건축물들이 100% 독창적이라는 의견에 동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지금에 와서 김중업 씨의 작품은 르코르뷔지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들 말하고 있다.부산대 인문관 프랑스 대사관 롱샹성당그 한 예로 이 부산대학교 인문관을 들을수있다. “모던 건축의 선구자인 르코르뷔지에에게 배우고 귀국해 스승의 건축관을 국내에 적용한 역사적인 건물로 평가받고 있다. 1959년에 완공된 이 건물에는 코르뷔지에의 전성기는 물론 그의 수정된 건축관까지 중첩되어있다.“ 고 사람들은 평하고 있다. 이 건물 뿐만 아니라 프랑스대사관과 제주대학교 본관등 이건물에서도 김중업은 코르뷔지에서 볼수 있는 롱샹의 지붕과 비슷한 지붕을 설계를 하였는데 기둥에게 지붕을 띄어 독립적인 지붕을 설계한 부분을 모방을 했다고 생각한다.이 처럼 김중업 씨도 자기 자신도 창조라 생각했던 작업들도 훗날 건축가들 에게는 스승인 르 코르뷔지에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처럼 김중업씨 뿐만 아니라 제 개인적인 생각인지 모르지만 미스 반데로에, 안도 다다오, 자하 하디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처럼건축가 자신들도 각각 자기 나름의 주된 개념을 가지고 건축을 설계하지만 후에 자기 자신이 지어놓은 건축은 모아서 보면 자기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설계한 건축물에게 모자란 부분 또는 자신이 생각한 개념을 계속해서 표현하려 했던 것들이 보여 진다. 이 처럼 사람은 이 글을 쓴 필자도 말 했든이 자신이 살아온 환경 즉 사회의 문화, 인간관계 영향을 받을 없다고 나 자신은 생각하고 결론을 짓고 싶다.
● 디자인 원리 ●비례건축의 미는 각 부위의 치수가 올바른 비례를 이루고 있는 경우에 얻어진다. (Vitruvius)비례를 올바로 이해하면 아름다운 설계를 할 수 있다. (Alberti)○ 비례 : 부분과 부부, 부분과 전체 사이의 크기의 관계 -> 음악의 화음과 비교비례와 수학의 관계○ 르네상스 : 건축의 다양한 부분들간의 크기를 수학적 비례로 통일-> A. Palladio : 실의 비례를 절대적인 원칙으로 적용함.○ 인체의 성장과 수학적 비례 : 유아(1/4) -> 성인(1/8)-> 인체치수 비례의 중요성 : 그리스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부분과 부분, 부분과 전체의 관계○ 건축조형에 있어서 부분과 부분, 부분과 전체는 적절한 비례의 관계를 지녀야 한다.○ 그리스 신전에 대한 Woodworth의 실험 -> 가장 이상적인 비례는?A안은 지붕에 비해 기둥이 너무 약해 보여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느낌이다. 반면에 C안은 필요이상으로 기둥이 굵고 투박할 뿐 만 아니라 지붕도 낮아 상호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거의 대부분이 B안을 가장 아름다운 표현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 볼 수 있다.① 기둥의 전체 이를 고려했을 때 기둥의 굵기는 B안이 가장 이상적이다.② 지붕의 크기(박공지붕의 높이)와 지붕의 시각적 무게를 고려했을 때 가장 안정적으로 보인다.○ 적정한 크기의 비례가 만들어 내는 아름다움< P. Mondrian 작품과 조각보 >○ 한국과 일본의 전통건축에서 보는 비례 비례체계○ 비례의 수학적인 질서를 구축하기 위하여 일정한 비례의 법칙을 사용 -> 비례체계○ 석굴암의 비례체계○ 그리스 신전의 비례비례체계와 기하학○ 비례체계를 발전시키기 위하여 기하학적인 관계를 이용-> 밀라노 대성당-> 석굴암근대 디자인의 대표작인 이 의자는 1929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건축박람회 때 신축된 파발리온 실내에 전시되었던 작품이다. 박람회 개막 때 스페인 국왕과 여왕이 앉았던 의자로도 유명한 이 의자를 미스가 디자인할 때 먼저 정사각형을 그리고 측면을 디자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가로, 세로 1:1 비례의 정사각형 내부에서 원형 커브를 이루면서 교차하는 두 강선의 교차점은 사각형의 한 변을 2:3으로 분할하는 지점에 위치한다. 교차점이라는 것은 무게 중심을 알리는 것으로서 비례적으로 2:3으로 분할하는 지점은 구성물에 안정감을 느끼게 한다. 이처럼 어떤 디자인도부분과 부분간의 크기를 결정할 때 기하학을 사용하여 비례를 결정해 나간다.황금분할비 Golden Section, 황금비 Golden Proportion○ 고대부터 가장 이상적인 비례로 생각○ 페이너(Fechner, 1801-1887)는 감각을 수학적 법칙에 종속... -> 황금비의 실험○ 황금비의 세 가지 의미1) ? : 파르테논신전 조각가 Phiadas의 ‘Phi'에서 비롯(파르테논신전의 입면비 = 1:1.618)2) 신의 비례 : 르네상스 예술가 -> 황금비를 신의 비례Divine Proportion으로 인식3) 인체비례 : 전신의 길이(8)와 배꼽부터 발꿈치까지의 길이(5)의 비례○ 다빈치, 르 꼬르뷔지에의 인체비례이론 ○ 황금비를 적용한 건축물의 사례 무량수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지어져 한눈에 균형잡힌 5:3의 황금비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는 옆 그림과는 달리 기둥간격은 일정하지 않다. 양쪽 귀기둥이 위치한 측칸이 중앙의 기둥 간격에 비해 작게 구성되어 있어 가로폭과 세로폭의 비례가 1:1.6으로 1:1.618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거의 황금비와 근사치를 이룬다.
한국건축론(한국전통건축사 연구 방법과 문제)한국의 건축이라는 학문이 연구의 대상으로 하는 영역은 무척 광범위한 분야에까지 확대된다. 흔히 고고학분야에 속하는 선사시대에서 부터 시작하여 도성, 분묘, 사찰건축, 유교건축, 탑파와 부도 등의 석조미술, 주택건축 등 거의 모든 유형적 유구가 그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국의 고건축에 대한 조사 및 연구는 일정시대에 대부분 일본학자들에 의해 다소 왜곡된 우리의 얼을 깨닫고 우리의 미를 탐구하기 위한 의도로 시도되었다. 이는 어쩌면 식민사관에 입각한 축소지향적인 한국건축의 이해에서 벗어나 우리의 참된 면모를 찾고자한 애국적인 관점에서 한국문화 전반에 걸쳐 이루어졌다 할 것이다. 따라서 그의 연구는 건축부분에 국한되지 않고 오히려 한국의 전통문화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와 탐구의 출발이었다 할 것이다.아무튼 한국의 고건축을 연구하는 한국건축사는 이제까지 미술사의 한 부분으로 취급되어 오다가 우리의 고건축에 대한 인식과 자각이 일어나고 여기에 대한 조사, 발굴, 연구가 진행되어 감에 따라 근래에 들어 새로운 학문분야로 정리되어 가고 있으며 그 가치도 인정받고 있는 실정이다.1) 한국의 전통건축에 관한 연구한국의 전통건축에 관한 연구는 그 동안 여러 선학의 노력에 의해 오늘에 이르러서는 이미 상당한 양에 달하고 있으며 괄목할 성과를 보이고 있다. 여기서는 이제까지의 연구결과를 개략적으로 나마 살펴보고 기존연구에서 보이는 전통건축의 시기구분에 대하여 언급하려 한다.(1) 기존연구의 고찰전통건축에 대한 이해와 연구는 대한제국말 일본인들이 시도로부터시작되었으며1940년대까지는 일본학자들의 전통건축분야에 대한 조사와 건조물의 수리 및 보수, 그리고 논문과 저서들이 발표되어 건축사의 기초를 잡기 시작한 시기이다. 여기에서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한국인의 전통건축 연구가 일제하 적절한 자주적이고 민족적인 여과작용없이 무분별하게 도입된 외래문화에 젖어있던 우리학계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해방이후 1965년 까지는 일인학자의 작업을 반추하거나 발전기를 지향한 과도적 시기로 생각된다. 1966년 이후의 시기는 발전기의 초기단계로써 본격적인 전통건축의 결과물이 나오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더우기 최근에는 공간의 구성원리에 입각한 이론적인 접근도 상당수 나타내며, 이는 물리적 유산의 단순한 조사 연구의 차원을 뛰어넘을 뿐아니라 전통건축을 새롭게 볼 시각을 제시하고 있어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2) 전통건축의 시대구분건축사뿐 아니라 역사학에 있어서 시기구분의 문제는 사학자의 사관과 관련되므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전술한 바와 같이 전통건축에 대한 그동안의 연구결과는 방대한 양이나 시기구분에 대해서는 대략 2가지로 분류된다. 한국의 전통건축을 연구하는 후학의 입장에서는 선학들의 사관을 이해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전제하에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2) 한국건축에 대한 기존의 입지일찌기 한국민족의 역사를 논할때 반도라는 지리적 성격을 강조하여 사대성, 주변성, 정체성, 다변성, 으로, 민족적 열등감을 조장한 부류들이 있었다. 물론 잦은 외세의 침탈을 당한 한반도는 많은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근대화 초기에 있었던 한반도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 관계로 입었던 상처나 그 이후의 일본군국주의에 의한 굴욕적인 무단정치 및 식민지 경영등의 민족적 수난은 아직도 완전한 치유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영향으로 우리의 고유전통문화도 위축되고 때로는 외세에 의하여 격하 또는 왜곡되어졌고, 반민족적인 어용집단에 의해 비하되어 왔으며, 정치?사회적 혼란으로 인하여 우리로부터 등한시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근대의 건축문화에 있어서도 한국을 무대로 한 군국주의의 식민정책과 한말부터 시작된 그리스도교의 포교 등으로 인하여 많은 서양식 건축물이 그들의 필요에 의해 그들의 설계 및 시공으로 세워지게 되었으며, 일본식 건축물들이 모든 곳에서 세워졌다. 또한 광복 후 세계각국과의 문화교류가 활발해지고 건축에 대한 예술로서의 인식이 이루어지면서 단순, 명쾌한 외관을 갖고 있는 국제주의양식이 그의 정당한 연구도 없이 그저 표면의 모방에서만 그치는 바람에 값싸고 획일적인 건물들이 범람하게 되었다. 그러나 역사적 시련기가 지나고 정치적 안정과 경제가 성장하면서 우리의 고유한 전통문화를 찾자는 한국문화에 대한 연구의 시대적 요청을 필연적으로 나타내게 되었으며 새로운 역사관의 정립, 비교문화연구, 한국학정설독립, 문화유적의 조사, 발굴 등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러한 시기는 건축분야에 있어서도 광복 후 20년이 지난 1965년 경에 국립중앙박물관의 현상공모와 그 작품의 논의 과정에서 건축에 대한 전통론과 전통의식에 관하여 논의 되었는데, 이러한 부분에 대한 연구는 당연히 계속되어야 할 우리 시대의 필연적 과제로 생각된다. 이러한 차원에서 이 글을 먼저 한민족의 미의식과 한국건축문화형성의 요인을 개괄적으로 살피고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한국건축문화의 특성과 그 계승에 관하여 여러 학자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검토하고 필자의 견해를 제시하고자 한다.3) 한국건축문화형성의 요인건축은 자연적 환경과 인문적 여건에 따라서 나라마다 그 발전과정과 양상에 많은 차이를 나타내므로 한국건축문화의 업적에 대한 평가나 그 가치의 인식에 있어서도 한국의 자연적 요인과 인문적 요인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필요할 것이며, 한국건축문화에 대한 미래의 방향설정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되어 여기서는 한국의 건축문화를 형성하게 된 자연적 요인과 인문적 요인을 살펴보기로 하겠다.(1) 자연적 요인아시아 대륙의 작은 반도인 한국은 그 지리적 위치로 인하여 역사적으로 세계의 요충지가 되어 강대한 세력에 여러차례 침해를 받아 수난과 시련이 되풀이 되기도 하였으나, 대룩문화와 대양문화가 연합되는 지역이 되어 이 두가지 문화를 융합하여 민족고유의 문화적 특성을 형성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지질학적으로는 장년기 지형이 극히 적고, 대부분 고저기복이 적은 노년기 지형으로 전국토의 약 75%가 산이고, 건축에 있어서도 배산임수등의 풍수지리설이나 음양오행설의 사상적 적용에 무리가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지세에 있어서는 비교적 아담하면서도 아름다운 산이 많고 강물이 맑아서 금수강산이라 불리웠고 자연의 지세를 존중하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고 자연에 순응하려는 한국사람들의 생활경향이 양성되었다.기후는 중간성 기후로서 남쪽은 일본의 구주 및 시코쿠지방과 큰 차이가 없는 온난한 기후를 가지고 있으며 북상함에 따라 대륙의 영향으로 한서의 차가 심해서 겨울의 추위가 여름의 더위보다도 견디기 어려웠다. 이로 말미암아 한국고유의 온돌난방방식과 그에 대조적인 마루구조라는 바닥구조를 형성하게 되었다고 생각되어진다.(2) 인문적 요인인류학적으로 몽고인종에 속하는 한민족은 그 민족성에 있어서는 깨끗하고 맑은 하늘, 아담한 풍토환경등으로 인하여 저절로 결백청초를 상징하게 되는 흰빛을 사랑하게 되는 흰빛을 사랑하게 만들었고 백의민족이라 칭찬함을 받게 되었으며, 소박하고 아담하며 청초한 문화적인 특성을 만들었다.이와 같은 민족의 자질을 뒷받침하여서 발전한 한국의 문화는 동양문화의 원시적 기반을 형성하였던 동북아문화에서 요람기를 보내고 한문화에서 배워서 인도불교문화에 성숙하는 과정을 거쳐 이를 집약, 동화시켜서 민족고유의 문화로 발전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요람기에 있어서는 원시민간신앙에 의한 자연숭배, 한문화에서 배운 건축가구의 기본형식은 현재까지도 계승하여 재현되고 있고, 특히 음양오행설, 풍수지리설, 천문사상, 유교 및 도교등의 동양사상과 철학은 건축문화의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생각된다.또한 불교의 전래는 각 시대를 통하여 수많은 불사를 건립케하여 현존하는 고건축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나, 신라 및 고려시대에 있어서는 불교수용이 지나쳤던 까닭으로 폐단이 적지 않았으므로 조선시대에 와서는 불교가 정책적으로 억압되어 불교건축이 일시적으로 쇠퇴하고 유교가 융성하여 문묘, 향교 및 서원들이 건축되었다. 특히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외래문화의 영향을 집약, 이를 순화하고 동화하여 한국고유의 문화로 발전시켰으며 건축문화면에 있어서도 특성있는 발전을 가지고 온 시기로 생각된다.4) 한국건축의 전통계승(1) 전통의 개념전통이란 말의 일반적인 뜻은 『계통을 전한다.』어떠한 문화의 내용이 그 집단 내에서의 전통요소와 새로 가미된 외래요소로써 구성되어 있을때 그 전자를 우리는 전통문화라 한다. 전통이란 말은 원래 문자이외의 수단으로 무엇인가를 전수하는 행위자체나 전수되는 그 내용을 뜻하는 것이며 따라서 전수되는 모든 문화내용이 전통이라고 불리울 수 있지만 여러개의 문화를 놓고 볼때 그 문화내용에 있어서 특히 한 문화를 특색지우는 뚜렷한 기본적 요소
{목 차{제1장 조사목적1제2장 읍성의 구성21. 읍성의 특성22. 읍성구조가 갖는 의미7제3장 조사내용81. 고창의 읍성공간142. 무장의 읍성공간15제1장 서 론1. 조사의 목적현재 국내 대다수의 지방도시들 광주, 전주, 진주, 충주, 청주, 춘천, 원주, 강릉, 공주 등지는 물론이고 그 밖의 시·군청 소재지들 심지어 면사무소 소재지들까지도 그 중심지는 1,500년∼2,000년 전에 형성된 바탕 위에 그 원형은 거의 변함이 없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도시학이 체계화되기 위한 기초연구로서 도시형성의 연구는 필연적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전산업형도시를 대표하는 조선왕조 도시의 성격과 대지, 건축, 도로 등 각종 도시구조 제도가 연구됨으로써 오늘날 한국도시의 원형이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최근에 도시학의 발전으로 인해 읍성의 존재가 다시금 부각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는 근본적으로 읍성의 구조물 자체가 바로 도시의 원형이었음으로 인한 도시적 중요성 때문이다.제2장 읍성의 구성1. 읍성의 특징읍이란 주택-마을-읍-도시로 이어지는 집단 정주 체계에 있어서의 중간 단계에 위치하며, 읍성이란 읍의 지리적 경계부에 성을 쌓은 것을 의미한다.읍성은 주변지역에 대한 행정적 통제와 군사적 방위 기능을 복합적으로 담당하였으며 주로 통제사회의 생활 중심권에 집중 배치된 집단 주거지였다.우리나라 성곽의 기본체제는 삼국시대에 형성되어 조선초까지 서서히 읍성의 형태를 갖추어 나갔으며, 조선조 세종∼성종대에 이르러서는 많은 읍성이 축조되었다. 여지도서에는 전국의 334개 고을중 110개 고을에 읍성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가. 읍성의 개요1) 성곽의 일반적 분류지형적 조건에 의한 분류 - 평지성, 평산성축성 재료에 의한 분류 - 토성, 석성, 토석성, 목책성성곽 형태에 의한 분류 - 이중성, 삼중성, 월성, 만월성, 방성, 장성거주 주체에 의한 분류- 도성, 행재성, 읍성2) 읍성의 위치에 따른 기능{읍성의 위치기 능해안선 및 국경선에 집중 분포외적의 침략에 대비평야 지 네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평지형- 읍성의 사방이 비교적 평지로 되어있어 어느정도의 발전까지는 지형에 의해 제약받지 않는 입지형태산록형- 산기슭에 입지하여 사방중 한두면이 시가지 성장에 큰 제약을 줄 수 있는 입지형태구릉형- 읍성내까지 비탈진 경사면이 유입되어 성내 시가지의 발전조차 지형상의 제약을 받는 입지형태분지형- 소위 말하는 산성의 형태로 성곽이 산등성이를 따라 이어지고 성내가 분지화된 입지형태나. 읍성의 시설1) 관아지구- 동헌 및 부속기관, 객사, 향청, 옥사, 훈련청, 향교, 성황당, 사직단- 읍성 내부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인 객사, 동헌, 향청은 각기 중앙 정부의 왕, 고을의 수령, 고을의 향민을 상징하는 건물로 읍성내부의 공간구조의 3핵을 형성한다.{목 적시 설위 치제 사국가적사 직 단읍성의 서쪽문 조향 교민간신앙적성 황 당진 산교 육공 립향 교읍성외(방위가 결정되지 않음)사 립서 원읍성에서 먼 곳행 정동헌, 객사, 향청중앙에 위치2) 자연취락(민가)읍성은 가옥의 밀도가 높은 집촌을 이루었으며, 읍내를 통과하는 도로 양변에 시장과 가옥이 연립 배열되어 있다. 성의 남문에서 동헌에 이르는 T자형 중심도로를 제외한 다른 도로는 불규칙하게 발달되었다.3) 누 정경치가 수려한 곳에 위치시켰다.다. 읍성의 성문배치 및 도로망구조우리나라의 읍성은 예부터 배산임수의 입지를 택하여 읍기를 정하는 까닭에, 북쪽에 배산(진산)를 의지하고, 남쪽에는 평지가 형성되면서 남북으로 긴 장방형의 형태를 이루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따라서, 읍성의 성문배치는 기본적으로 통행에 불편이 없도록 각 방면에 설치하였는데, 배산에 의해 통행량이 적은 북쪽에는 아주 작은 규모로 부차적인 문을 내거나, 풍수지리설에 따라 북쪽에 성문을 두지 않는 경우도 많다. 즉, 가능하면 사방면에 성문을 내었으나 자연지형의 여건상 성문 개선이 어려운 경우에는 지형여건에 맞게 1∼2개소에 성문을 두었다. 읍성은 주로 인근 마을과 연결되는 교통로와의 관계에 의해 읍성의 간선도로망의 형태가 결정되었는데, 배치도이다.{일반적으로 진산을 배산으로 하고 그 아래에 읍성이 위치하고 있으며, 읍성에서 특징적인 것은 성내시설인데, 가장 대표적인 시설로는 객사와 동헌이 있다. 객사는 성내에서 가장 중요한 시설이었는데, 중앙으로부터 온 관리의 숙소였으나 국왕을 상징하는 전비를 안치하는 곳이었다. 동헌은 고을 수령이 공사를 처리하는 곳으로 객사와 더불어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그 외 성내에는 수령이 거주하는 아사(衙舍)와 그 가족이 사용하는 내아, 또는 내사 등이 있었다. 읍성이 행정적 기능외 군사적 시설로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각종 시설도 발달되었다. 음료시설로 샘(泉), 우물(井), 못이나 저수지(池) 등이 있어 성내에도 병사의 식수뿐 아니라 군마, 차사, 세탁 등에 필요한 물을 해결토록 하였다.한편 차고시설로 군기고를 비롯하여 각종 창고가 발달되었다. 읍성주변에 종교적 시설인 「3단 1묘」즉 사직단, 여단, 성황단과 문묘 등이 분포하고 있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성밖 동서남북에 동심원상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사직단은 서쪽에 문묘는 동쪽 향교 내부에, 성황단은 북쪽 진산 부근에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교육시설은 향교와 서원이 있는데, 향교는 공립학교에 해당되며 보통 부의 동남 3리 이내에 위치하고, 서원은 사립학교로 부의 10리 이내에 위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상업시설은 주례의 면조후시의 원칙이 있으나, 소도읍의 경우에는 성문 밖에 위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성밖에서 성문을 거쳐 성내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필수적인 인공시설 외곽에는 자연지형들이 외곽 경계의 기능을 하고 있다.마. 읍성의 유적{분 류일반적 특징동 헌위 치읍성의 북쪽에 위치객사와 동헌이 인접공적공간(동헌, 각 관청)과 사적 공간(내아)이 함께 위치규 모2고주 7량, 1고주 7량구 조장방형 평면온돌방과 대청으로 구획익공양식이 주류팔작 지붕, 겹처마관아문홍살문-외삼문-내삼문 순서외삼문이익공, 겹처마, 팔작지붕내삼문중앙에 솟을대문2. 읍성 구조가 갖는 의미가. 축읍성의 축은 T자형 도로라고 할 수 있으며,에 풍수지리설에 의한 도시조성은 사실상 어려웠다. 다만, 마을의 중심인 관아지구는 읍성내에서도 가장 길한 곳에 위치시키고 주변지세도 풍수적으로 이용되고 설명되어졌을 뿐이다. 풍수국면에서의 혈은 마을의 청사가 입지하는데 이곳은 주축상의 중심에 위치하게 된다. 주산과 마을나무가 만나 혈을 이루는 중심체계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성의 중심) (성과 속이 만남) (속의 중심, 샤머니즘)보통 읍성의 중심축상에는 내수로서 연못이 위치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산, 물, 나무를 민간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신격화되었던 것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평면형태는 자연지형지세의 형상을 강조하는 풍수지리설의 영향으로 부정형, 생물적 형태로 발전하였다.다. 의미적인 형태실용적 이유에서보다 의미 부여를 통행 형태가 결정된 사례가 나타난다. 읍성의 주변에 진산을 확보하여 주변까지 조망할 수 있게 하였으며, 긴급한 사태를 알리는 봉수대로서의 역할도 설정되었었다. 대부분 우리나라의 읍은 배에 비유되어 마을중앙의 마을을 돛이라 생각했으며 닻과 뱃머리 등 배의 구조물로 설명되어 졌다.{제3장 읍성공간과 특성{1. 고창읍성1) 연혁 및 특성고창읍성은 조선 단종원년(1453년)에 왜침(倭針)을 막기 위하여전라도민 들이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실기로 축성한 자연석 성곽이다.일명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하는 이성은 나주진관의 입암산성과 연계되어 호남내륙을 방어하는 전추기지로서 국난호국(國難護國)을 위한 국방 관련 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다.1965년 4월 1일 사적 제 145호로 지정된 이 성의 둘레는 1,684m 높이가 4 6m, 면적은 50,172평으로 동, 서, 북문과 3개소의 옹성(甕城), 6개소의 치성(雉城)을 비롯하여 성 밖의 해자(垓字)등 전락적인 요충시설이 두루 갖추어져 있다. 성내에는 동헌, 객사 등 22동의 관아건물(官衙建物)과 2지(池) 4천(泉)이 있었으나 전화(戰禍)로 소진(消盡)되고 성곽과 공북루만 남아 있던 것을 1976년부터 옛 모습대로 복원해 오고 있다.2)향청{조선시대에이 건물은 낮은 기단위에 전면에 자연석 초석을 사용하배면은 화강석 석주위에원형기둥을 세워 만든 이층 문루이다. 고창읍성에는 정문인 공북루(북문)와등양루, 진서루 등 3개소의 성문이 있는데 성문앞에는 적으로부터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옹성을 둘러쌓고 그 위에 여장(여람)을쌓아 성안에서 밖을 살필수 있는 현안관 총을 쏠수 있는총안을 만들어 놓았다. 공북루 전후 사적기와 상량문에는순치3년 (인조24년 : 1646) 병술 12월에 공북루를소건하고 그후 3회에 걸쳐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다.{4)객사객사중앙의 몸체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그리고 나라에 경사와 궂은 일이 있을 때 대궐을 향하여예를 올렸다. 왼쪽과 오른쪽에는 조정에서 파견된 관원들의 숙소로도 사용되었다. 또 예로부터 이 고장을 모양고을이라 하였고, 이것을 모양지관이라 하였다.{5)관청관청은 관주라고도 하였는데 지방 관아의 주방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던 곳이다. 이곳에서는 수령과 그 가족들의 식생활을 비롯한 빈객의 접대와 각종 잔치에 필요한 물품의 조달및 회계 사무를 관장 하였다. 이 자리에는 조선시대 관청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있어1991년 발굴 조사하여 1992년에 모습으로 완성하였다.6)동헌조선시대의 목과 도호부.군.현등 각 행정단위에는 중앙에서 파견된수령이 정부를 보던 청사를 세웠다. 이를 일반적으로동헌이라 하였는데 내동헌 곧 내아는 수령의살림집이다.언제부터 여기에 동헌이 세워졌는지는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조사된 자료로는 조선 선조 25년이후부터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건물은 1987년 발론 조사 때 확인된 유구와 각종 자료를 참고하여조선 시대의 동헌으로 1987년 내아는 1988년원모습으로 복원 했다.{7)작청7)척화비{이비는 조선 말기에 대원군이 펼친 쇄국 정책의 상징이라할 수 있는 것으로 병인년(1886)에 비문을 만들고 신미년(1871)에 세웠다.당시 서양의 열강들이 무력을 앞세워 문호의 개방을 요구하고엄청난 힘으로 밀어 닥치자 섭정의 자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