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이집트 개관제3세계 정치론제3세계 정치론제3세계 정치론제3세계 정치론1. 지형이집트의 지형은 국토의 면적에 비해 단순하다. 나일강 하곡(河谷)과 그 유역의 삼각주평야, 수에즈 운하 연안, 이곳을 제외한 넓은 사막지대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나일강 하곡과 삼각주평야를 형성하는 나일강은 상류의 에티오피아 고원에서 발원한 청(靑)나일과 아프리카 중동부 빅토리아호(湖)에서 발원한 백(白)나일에 합류하여 6,671km를 흘러 지중해로 유입하는 대하천이다. 아스완 이하의 사막지대를 통과하는 외래하천(外來河川)으로 그 지류의 대부분이 이집트 국내에 있다. 이 하천의 상류 부는 여러 군데의 급경사를 이루면서 흐른다.아스완에서 카이로까지는 양측에 사막으로 된 절벽을 끼고 너비 3 ~ 25km의 좁은 지역의 충적지 가운데를 띠[帶] 모양의 하천이 흘러간다. 카이로에서 그 하류 일대에 걸쳐 약 2만 4,000㎢의 면적을 가진 대 삼각주평야가 전개된다. 이 삼각주평야는 이 하천이 운반·퇴적한 물질로 비옥한 충적평야를 형성하며, 퇴적층이 매우 두꺼운데 알렉산드리아에서의 시추결과는 163m에도 기저(基底)의 암반에 달하지 못했다. 이 삼각주평야와 나일강 하곡평야는 곡창지대를 이루는 인구조밀지역이다. 하천 유수량의 조절이 어려웠던 옛날에는 하천 유수량의 연 변화(年變化)가 하안의 충적지에서 살고 있는 이집트인들에게 많은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1971년 아스완 하이 댐의 건설로 그 위협은 사라졌다. 아스완 남쪽으로 인공호인 나세르 호가 생겨 이 인공호의 물을 이용하여 사막지방의 관개를 통한 개발을 서두르게 되었다. 나일강은 농경을 하는 농부뿐 아니라 이집트인들의 생명선이 되는 젖줄이다. 나일강 동쪽에 마자 고원과 갈랠라·키블리아 산지 등이 발달해 있다. 이 곳은 결정질(結晶質)의 암석과 석회암으로 된 단조로운 고원과 대지가 남쪽의 에티오피아 고원으로 연이어 발달해 있다. 이 고원의 남부에 하마타 산지(1,977m)가 남서쪽을 향해서 점차로 높아져 해발고도 1,900m 정도고, 기독교 사제들은 무슬림의 금요예배에 나가 모스크에서 함께 독립을 부를 짖었다. 이집트 전 국민이 하나가 되어 "이집트인을 위한 이집트"를 부르짖었던 것이다. 이집트 역사는 이것을 '1919혁명' 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1919년 3월, 유관순을 비롯한 우국지사들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일제에 항거했던 시기에 이집트에서도 똑같이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영국 수상 로이드 조지는 자신들의 정책이 잘못 되었음을 인정하고,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중동군 사령관으로 명성을 날렸던 에드먼드 알렌비 장군을 새로운 고문관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특별히 밀어 조사단을 이집트에 파견해 해결책을 강구토록 했다. 이때 자글룰은 석방되어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에 관한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했다. 밀너 조사단의 보고를 근거로 영국, 이집트간의 교섭이 행해졌다. 영국은 이집트의 독립을 인정할 의사는 있었으나 여전히 그의 군대를 이집트에 주둔시키고, 적어도 외교, 국방, 재정상의 개입권만큼은 존속시키려고 했다. 그것은 결국 이집트를 신탁통치 하겠다는 말이었다. 결국1920년 8월에 양국의 협상은 결렬되고, 자글룰은 1921년 귀국해 보호권 종료와 계엄령 철폐를 부르짖고 돌아다녔다. 영국은 그를 다시 체포해 또다시 말타 섬으로 유배 시켰다. 그러나 고문관 알렌비는 이집트인이 원하는 기본적 수준의 독립을 주어야 한다고 판단해 본국을 꾸준히 설득했다. 그 결과 1922년2월28일, 비록 일방적이긴 하지만 영국은 이집트에 대한 보호 권을 공식 철폐하고 이집트가 독립 국가임을 선언했다. 동시에 교통, 방위, 외교 분야는 공식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는 영국이 책임진다는 방침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이미 노정된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다. 이 기습적인 독립선언에 이집트인들은 당황했으나 다음해인 1923년 4월21일에 헌법을 공포하고, 같은 해 9월에는 최초의 총선거를 실시해 국가체제의 근본과 틀을 정비했다. 그 해3월에 말타 섬에서 석방된 자글룰은 와프드 당을 결성해, 총선거에서 하원의 215석중 18 내에서도 초기 의장이었던 나기브를 제거함으로써 나세르의 권력을 공고히 해갔다.2) 유사 민간 정치 제도의 설립잠깐 동안의 직접 통치 기간 후 한국과 이집트의 군사 정권은 유사 민간화의 길로 들어섰다. 그것은 군 장교들의 대거 은퇴와 정부 요직에의 임명을 통해 이루어 졌다. 군 장교들은, 신 정권 정치적 정당성과 대중 지지기반의 확립을 위해 창설한 신정당들의 요직의 대부분도 차지하였다.따라서 유사 민간화 과정은 두 종류의 정치 기구, 즉 군부와 민간정치 기구, 특히 정당의 확립을 통해 이루어졌다.이집트 자유 장교들은 집권 후 급진적인 개혁 정책을 추진하고 대중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 일련의 대중 정치 조직을 건립하였다. 그들은 정치 통제와 개혁 정책수행에 필요한 대중 동원이란 당면적 목표를 달성할 목적으로 '해방집회'(1953∼58)와 '국민 연합'(1958∼61)을 차례차례 설립하였다.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정치기구는 '아랍 사회주의 연합' 이었다. 먼저 설립된 두 기구가 그 기능을 제대로 수행치 못한 채 해체된 이후 그 후신으로 조직 된 이 기구는 세 가지 기본 역할을 수행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첫째는 1953년 기존의 모든 정당들이 해체됨으로써 생긴 정치적 공백을 메꾸는 것이었고, 둘째는 대중의 자생적 동원을 방지하고 이를 국가 통제 내에서 조절하는 기능이었으며, 마지막 셋째 기능은 대중의 정권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고 동시에 대중의 정치적 통제를 보장할 이념적 선전 기능이었다. 이러한 역할을 지닌 아랍 사회주의 연합은 엘리트의 충원과 민중 동원을 목표로 한 정당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의 다양한 이해를 대표하고 형성할 독자적 힘을 가진 정당이 아니라, 나세르의 개인적 권력 하에서 "지방 지도자의 충원, 정권에 대한지지, 관료의 정책 수행에 대한 감시를 담당한 개인 권력의 부수 기관" 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지역 공동체 내에서는 대중적 참여를 신장하기도 했으나, 경제적 방법을 통해 정치 지도자를 선출하고 사회발전 과정에서 민중 동원의 역할을 수왔던 농촌인구의 이농현상은 크게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이농현상은 대도시의 이사팽창을 불러오고 도시슬럼화로 이어져, 정치, 사회적 불안을 가중시켜 근본적인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고 이에 대한 공감대가 매우 폭넓게 형성, 확장되고 있었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한국전쟁 중 면화가격이 폭락하자 면화수출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이집트 경제는 다시 한번 큰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사회적, 경제적으로나 이렇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 집권하게 된 나세르는 혁명 직후 광범위한 정치, 경제 개혁을 시도한다. 그 과정에서 왕족을 비롯한 구(舊)정치인들을 제거하는 데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고 대규모의 조직적 저항도 없었다. 그러나 군사정권으로서는 혁명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확보하고 보다 안정적인 혁명과업의 수향을 위해 대외적 문제보다는 국내문제, 특히 군사혁명 정권에 대한 광범위한 지지세력을 확보하고 이를 조직하여 정치안정을 이루는 것이 가장 급선무였다. 또한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복지국가 건설을 위한 근본적인 경제개혁과 구체적인 정책을 마련하고 나세르가 구상하고 있던 미래의 복지국가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야만 했다.정치, 사회 개혁과 경제개발을 통해서만이 위대한 복지국가의 건설에 한 발짝 더 다가설 수 있다고 믿었던 당시의 젊은 장교들은 어떤 특정한 이데올로기에 심취해 있거나 특정한 정치, 경제 체제를 선호하고 있었던 게 아니라 '조국의 근대화'라는 단 한 가지 목표만을 향한 순수한 애국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러한 '조국의 근대화'라는 애국적 목표달성을 위해 그들(주 자유장교단)은 크게 토지개혁, 아스완 하이댐의 건설, 공업화와 경제개발계획이라는 세 가지 핵심사업을 우선적으로 추진하였다.(1) 토지개혁혁명 후 두 달도 채 안 되어서, 제1차 토지개혁이 시행되었다. 시행초기에 혁명정부는 그동안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를 지배해 왔던 토지엘리트들의 경제적 기반을 제거하고 농업관련자산을 실제 경작자에게 재분배해 줌으로써 봉건제를 타파하고, 농업자본을 공업생산으로 유도해 보겠다세르의 노선과 정책에서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하였다.(1) 제 4차 중동전은 계획된 전쟁인가?어느 정도의 정치적 안정을 찾았는데도 사다트의 위치는 이집트가 직면하고 있는 경제적,사회적 당면과제들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진정으로 안정될 수 없었다. 사다트는 여러 계층으로부터 다양한 종류의 도전에 직면했다. 특히 막대한 군비지출과 경제정책의 실패로 파산 직전에 이르렀던 경제문제는 국민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었다. 나세르 시대에는 최우선권이 자급자족경제의 건설과 공평한 소득분배에 주어졌다. 주로 국유화와 공업화, 사회주의법, 생활필수품에 대한 보조가격 등을 통하여 추진되었던 이러한 정책들은 공평한 소득분배라는 측면에서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고 볼 수도 있으나, 경제효율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는 상당히 비싼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특히 1960년대 중반에 들어 소련의 비 군사원조가 줄어들고 미국의 식량원조마저 중단되자, 이러한 문제점들은 가시적으로 현실화되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1967년 6월 전쟁에 막대한 군사비가 지출되자 그렇지 않아도 어려움에 처해 있던 국민경제는 회생하기 어려울 지경의 수렁에 빠졌고, 사다트는 이러한 사실을 더 이상 숨길 수도 없었고, 또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다. 더구나 대부분의 국민들은 대 이스라엘의 연패에 따른 좌절감과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군부의 사기는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었고, 불만에 가득 차 있던 군인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또한 변호사협회를 비롯한 여러 단체들이 각기 집단이익과 정치적 자유를 요구하고 나섰고, 사다트 정권에 가장 강력하게 도전해 온 학생운동권의 시위도 날로 극렬해지기 시작하였다.이렇게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 사다트는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나 국내의 정치안정은 이스라엘에게 빼앗겼던 시나이반도를 되찾아 이집트 국민의 자존심을 되찾고 나세르가 망쳐놓은 이집트 경제를 근본적인 경제구조개혁을 통해 재건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사다트는 아직 정치적인 기반을 굳건히.
REPORT마케팅-시장세분화전략의 필요성-교과목: 마케팅교수님: 하대용 교수님학 과: 정치외교학과학 번: 97712008이 름: 전 우 식제출일: 2002.05.28♣ 목 차 ♣Ⅰ. 서 론Ⅱ. 시장 세분화1. 개 념2. 시장 세분화 요건 1) 측정 가능성2) 접근 가능성3) 충분성4) 이질성3. 시장 세분화 절차1) 시장내에 존재하는 현재 및 잠재적 욕구확인2) 세분시장을 구분하는 특징3) 각각의 욕구에 대한 수요측정4. 소비자 시장의 세분화1) 지리적 세분화 2) 인구통계적 세분화 3) 심리분석적 세분화 4) 행동 분석적 세분화Ⅲ. 표적시장 선정1. 개 념2. 표적시장 전략1) 비차별적 마케팅2) 집중적 마케팅3) 차별적 마케팅Ⅳ. 포지셔닝1. 개 념2. 전 략1) 제품속성에 의한 포지셔닝2) 제품군에 의한 포지셔닝3) 가격 및 품질에 의한 포지셔닝Ⅴ. 결 론Ⅰ. 서 론사람들은 태어나면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며 각기 다른 개성과 성격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 예쁜 것들이 다르게 나타난다. 이러한 사람마다의 개성과 특성은 사회가 변함에 따라 더욱더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앞에서 우리들이 배운 것 처럼 라이프스타일 변화, 인구의 변화, 소득의 증대와 지식수준의 향상, 기술의 발달등으로 인해 좀 더 자신에게 맞는 것을 찾으려고 하고 다른 사람들과 다른 것을 원한다. 한 예로 우리나라의 음료시장을 보자. 60.70년대 경쟁사의 부재와 소비자들의 욕구가 다양하지 못했기 때문에 청량음료라하여 칠성사이다와 코카콜라등의 몇 안되는 음료로 소비자들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소비자들의 지식수준의 향상과 소득수준의 증가등 사회전반적인 변화로 인해 소비자들의 다양한 욕구에 기업들이 반응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음료시장의 확대로 이어졌다. 콜라와 사이다에서 비만인을 위한 다이어트 콜라, 어린이를 위한 뿌요, 운동선수들이나 운동한 후에 마시는 포카리스웨이트, 탄산음료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이온음료나 건강을 위한 홍차나 녹차음료등으로 시장이 세분화 되었다. 이러한기는 힘들다 이에 기업들은 시장을 세분화 하는 것이다. 즉) 마케팅 김진성 법경사 1997 P. 278마케터들은 하나의 시장을 세분화하는 방법을 탐색하고 세분화된 시장정보를 수집하는 시장세분화 단계를 거쳐 가장 효과적인 세분시장을 선택, 접근하는 전략을 선정하는 표적시장을 선정 마지막으로 가장 적절한 전략을 결정. 이를 마케팅 믹스에 결합하여 특정 고객 집단의 욕구를 충족 시키는 제품믹스를 설계하여 기업의 욕구를 반영한다는 것이다.그렇다면 시장 세분화의 요건과 절차, 표적시장의 선정과정 그리고 포지셔닝 전략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소비자 시장부분을 중심으로 알아보자.Ⅱ. 시장 세분화1. 개 념) 마케팅, 김용호 외 7명, 학현사 2000, P.87현대에는 특정 마케팅에 대한 소비자들의 반응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이는 구매동기, 구매관습등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개의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맞는 마케팅을 제공할 수 없다. 예를들어 A기업이 DHA가 들어있는 음료를 만들었다 하자. 이 음료에 관심이 있는 계층은 아이가 있는 주부일 것이지만 다른 계층에는 관심 밖의 음료 일 것이다. 청바지는 10대와 20대, 만약 내부에 옥이 달린 팬티를 만들었다하자 중년의 서기능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을 것이다. 이 처럼 한 계층에서만 볼 수 있는 흥미와 관심을 유발 시키기 위해서 시장을 나누는 것이 시장 세분화이다.2. 시장 세분화 요건어떤 계획이나 목표든 효율적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조건이나 요건이 필요하다. 세분화도 마찬가지로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몇 가지 요건이 필요하다.1) 측정 가능성모든 자료가 마찬가지로 추정치의 자료만으로 효율성을 극대화 시킬 수 없다. D회사가 외손잡이용 차량을 만들었다 하자. 우리나라의 왼손잡이가 얼마나 되는지 또 상품을 만들었을 때 구매력이 얼마나 되는지 측정하기 쉽지않다. 그렇기 때문에 자료수집이 가능한 것을 세분화하는 것이 좋다.2) 접근 가능성세분시장은 최소의 비용과 노력으로 소비자에게 다가 갈 수 있어야 한다. 소비자가 사이즈가 50.60인지가 되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이들을 세분시장으로 한다면 고가의 가격이 선정 될 수 밖에는 없다. 그러나 소비자들은 고가를 주면서 까지 그 상품을 구매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4) 이질성현대는 소비자들이 자신들만의 개성과 자신들만의 것을 원한다. 기업이 세분시장으로 생각한 계층이나 집단이 있다면 다른 어떤 소비자 계층과는 달라야 할 것이다.3. 시장 세분화 절차1) 시장내에 존재하는 현재 및 잠재적 욕구확인마케터들은 현재나 미래의 소비자들의 욕구를 파악하기 위해서 직접 인터뷰나 설문조사를 통해 소비자들의 제품에 대한 만족수준과 개선할 점, 다른 어떤 제품을 원하는지 파악해야한다. 핸드폰 시장의 경우 풀잎형의 단순하고 무거운 것임에도 공중전화의 사용보다 편리하다는 점에서 소비자들은 구매를 했으나 기술의 발달과 소비자들의 욕구에 따라 세련된 디자인과 다양한 기능 - 인터넷과 위치확인등....-을 원했다. 이에 기업들은 폴더라는 가볍고 세련된 디자인을 선보였고 지금도 더 좋은 제품을 선보이려 한다. 또한 국내에서 뿐 아니라 국외에서도 통화가 잘 되는 핸드폰을 원하는 소비자들이나 인터넷 뿐 아니라 동영상까지도 되는 핸드폰을 원하는 소비자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소비자들의 욕구는 앞으로의 핸드폰 시장의 잠재적 세분시장이라 할 수 있다.2) 세분시장을 구분하는 특징앞에서 언급했듯이 다른 시장과 구분될 수 있는 이질성이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3) 각각의 욕구에 대한 수요측정기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단계 일 것이다. 기업은 이익을 목표로 하는 조직이기에 잠재적 매출액을 측정하여 세분시장의 가치를 평가하고 도전할 가치가 있는지 평가하는 것이다.4. 소비자 시장의 세분화소비자 시장을 세분화 하는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세분화의 기준에는 소비자 시장을 기술하는데 사용되는 심리적, 행동적 측면 뿐 아니라 많은 특성이 포함된다. 소비자 시장을 세분화하기 위한 기초로 지리적 ,인구 통계적, 심리분석적, 행동적 세분화가 있다.1) 지리적 세분화우리들이 생활명 백화점이나 명품들이 많이있다. 그와는 반대로 청주는 할인점이 발달되었다.2) 인구통계적 세분화가장 공통적 기준이면서 측정하기 쉽기 때문에 자주 사용되는 방법이다. 인구통계적 세분화에는 연령, 성별, 소득, 가족의 규모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① 연령: 말 할 것도 없이 각 연령별로 다른 관심사를 가지고 있다. 10대와 20대의 경우 자신을 가꾸는 데 관심을 가지며 또한 좋아하는 스타를 타라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30,40대는 부에 관심이 있으며 가족에게 신경을 쓴다. 50대의 경우는 건강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② 성별: 예전의 경우 남성과 여성의 욕구가 다르게 나타났다. 여성의 경우 대부분이 전업 주부였으나 여성의 사회참여도가 높아지면서 남성들과의 관심사와 차이가 없게 되었다. 또한 남성의 경우 여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화장품을 사용하는 경향이 많아졌다. 이런 변화로 기업들의 남성과 여성의 전유물이라 생각했던 제품들을 좀더 세분할 필요가 있다.③ 가족규모: 오늘날에는 가족의 형태가 크게 변하고 있다.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또한 미혼이나 독신자들과 자녀가 없는 부부들의 증가로 이들을 위한 기업의 마케팅이 필요하다.3) 심리분석적 세분화마케터들로 하여금 소비자들의 사회계층이나 개성과 같은 파악할 수 있다. 예를들면 시계를 생각해보자. 같은 가겨이라 하더라도 스포츠용 시계를, 심플한 디자인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두 소비자들의 개성이나 취향이 다르다는 것이다.4) 행동분석적 세분화말그대로 소비자들이 제품에 대해서 어떻게 행동하는가 하는 것이다. 어떤 소지자가 얼마나 사용하는지, 어떤 제품을 선호하는가에 대한 세분화이다.예를들면 대형매장에서의 석유소비와 개별 소비자의 석유소비는 천지차이이다. 또한 소비자들이 어떤 제품과 회사를 선호하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소비자들의 구매도는 다른 소비자들 보다 높기 때문이다.Ⅲ. 표적시장 선정1. 개 념) 마케팅, 김용호외 7명, 학현사 2000 P.104시장세분화를 한 후 기업은 얼마나 많보자. 얼마되지는 않았으나 거의 모든 생활에 카드를 사용하게되었다. 이에 카드 회사들은 소비의 주를 이루는 10대와 20대를 겨냥하여 영화관이나 음식점들에서의 할인이 되는 카드를 발급하였으며 자동차를 주로 사용하는 소비자들을 위해서 적립제도와 점수제를 도입하여 고객을 끌어 들였다.이런 표적시장 선정기준은 조직목표 및 이미지가 일치해야하며 기업의 목표와 부합되어야한다. 또한 경쟁사가 최소인 시장을 찾아야 한다.2. 표적시장 전략) 마케팅, 김진성, 법경사 1997 P.294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마케터들은 기준평가를 바타으로 시장전략을 결정해야 한다. 이런 전략에는 비차별적 마케팅, 집중적 마케팅, 차별적 마케팅으로 구분된다.1) 비차별적 마케팅) 마케팅, 김진성, 법경사 1997 P.295)))이는 모든 잠재적 구매자를 위한 제품, 가격, 유통, 마케팅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동일한 마케팅 믹스를 의미하는 대량 마케팅이하 할 수 있다. 즉, 전체시장을 단일 세분시장으로 취급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 전략은 제품차별화 전략을 수반한다. 여기서의 제품차별화는 자신의 제품을 동일한 시장에 제공되는 경쟁제품과 구분되게 할 때 발생한다. 예를들면 같은 성분의 두통약을 보자. 게보린과 타이레놀을 볼 때 근본적으로 같은 성분임에도 서로 자사제품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주장한다.2) 집중적 마케팅전체시장 중에서 하나의 세분시장을 선택하여 자신의 표적시장으로 삼는것을 의미한다. 오토바이를 예를들어 보자. Herley-Daviason은 초중량 오토바이 시장에만 집중하고 소형 오토바이나 산악용 오토바이를 생산하지 않는다. 이와는 반대로 Honda는 모든 오토바이 시장을 겨냥한다.3) 차별적 마케팅기업은 둘 또는 그 이상의 고객집단을 표적시장으로 선정하고 각각의 시장에 맞는 마케팅 전략을 개발한다. 자동차회사의 경우 소비자의 소득수준과 연령에 따라 제품을 생산하여 판매한다. 즉 연령별로 보면 20대의 경우 스포츠카나 짚차를 30,40대의 경우 중형차를 선호한다. 이 전략은 또한 기존 세분시장의
REPORT마케팅-소비자의 구매행동과 영향요인-과 목 명:마케팅담당교수:하 대 용 교수님기업들이 소비자의 시각에서 보기 시작한지는 얼마되지 않았다. 처음 기업들은 판매위주, 기업위주에서 소비자의 욕구, 필요에 대한 인식은 얼마되지 않는다. 이러한 변화는 기업환경의 변화나 소비자 환경의 변화가 산업화 이후 급속도로 변했기 때문인데 그 무엇보다 소비자들의 소비지출의 증대, 식생활과 식습관의 변화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소비자들의 상품이나 제품의 선택, 구매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유통시장의 변화로 인해 소매의 형태가 편의점에서 백화점으로, 백화점에서 할인마트로, 할인마트에서 버튼하나로 이루어지는 홈쇼핑으로의 변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패턴이나 인식의 변화가 이루어졌다 해도 소비자들의 제품 선택과 구매에는 다양성을 보인다. 어떤 소비자는 기업의 선호도에 의해 제품을 선택한다. 컴퓨터는 삼보, 자동차는 현대, 가전제품은 LG등의 기업의 이미지로 선택한다. 또 가격대를 보고 상품을 결정하는 소비자들도 있으며 자신의 개성을 살리는 상품을 결정하기도 한다. 이렇게 소비자들의 제품 선택과 구매에 다양성을 보인다.하지만 이런 다양성도 어떤 제품이냐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나지만 요즘의 소비패턴은 개성위주의 소비로 흐르고 있다.그렇다면 소비자들의 상품을 구매하는데 있어서 구매의 결정은 어떻게하며 구매결정에 잇어서 어떤 근거와 영향에 의해 결정되는지 알아보자.) 판매관리사, P 170소비자들은 구매결정 과정에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상표의 인식에 의해서 결정하는 습관적 의사결정과, 상품구매시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비교, 평가 후 결정하는 광범위한 의사결정, 습관과 광범위의 중간인 한정적 의사결정, 마지막으로 일반적 과정을 통한 의사결정이 있다. 이런 의사결정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으나 소비자들의 지각정도의 차이에 의해, 즉 관여도의 높고 낮음에 의해서 결정이 되어진다. 관여도가 낮을수록 습관적 의사결정에 의한 구매가 이루어지고 높을수록 광범위한 의사결정에 의해 구매가 이루어진다.그러나 이 모든 의사결정은 일반적 과정인 문제인식 → 정보탐색 → 평가 → 구매 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1) 문제인식 ; 문제인식은 인간이 상품구매 뿐 아니라 모든 것을 결정하는 하나의 과정이다. 제품구매시 내가 그것이 필요한지 아니면 광고를 보고 그 제품을 구매 할 것인지에 대한 인간의 사고이다.(2) 정보탐색 : 정보탐색은 만일 어떤 제품을 구매할 때 다른 제품과의 비교, 평가 할 수 있는 자료를 가지고 판단의 근거를 검색하는 과정이다. 소비자들은 인식도에 의해서 구매하는 경향이 크다. 과거의 경험에 의한 판단, 즉 내부탐색과 광고나 소비자의 개성 등과 같은 외부탐색이 있다. 이러한 내, 외부 탐색으로 평가의 기준을 만드는 것이다.(3) 평가 : 소비자들은 정보를 탐색한 후 환경적 요인과 개인적 요인를 통해서 자신이 선택한 상품을 다른 상품과 비교, 평가한다.(4) 구매 ; 소비자들은 정보탐색과 평가의 과정을 거쳐 비로써 구매하게 되는 것이다.이런 과정을 통해서 소비자들은 구매를 결정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런 구매결정 행동에 영향을 주는 요인은 무엇일까? 소비자들은 정보탐색과 평가과정에서 여러 가지 영향요인에 의해 구매를 결정한다. 외부환경요인과 개인적 요인 두 가지로 분석 할 수 있는데 외부한경 요인에는 문화, 사회계층, 가족 등이 있으며 개인적 요인으로는 지각, 동기, 개성으로 살펴 불 수 있다.(1) 외부 환경요인① 문화: 집단을 이루는 인간들의 독특한 생활양식을 말한다.한 예로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한복이라는 의상을 입었으며 일본의 경우 기모노라는 의상을 입었다. 또한 우리나라의 경우 70년대 사회를 보면 문화의 접변으로 인해 장발 과 미니스커트라는 패션문화를 이루었다. 이렇게 문화는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소비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② 사회계층: 서로 유사한 가치관, 흥미 등의 행동권을 가진 집단을 말한다. 상층, 중상층, 농어촌을 살펴보자. 상층의 경우 생활에 필요한 생활 필수품보다 사치품을 소비 할 것 이며 반대로 농어촌의 경우 생활필수품을 소비 할 것이다.③ 가족; 가족의 형태가 대가족에서 핵가족화 되면서 소비의 패턴도 함께 변하였다. 자연 식품에서 가공식품 위주로, 영구식품에서 일용식품으로 변했다.(2) 개인적 요인① 지각 : 어떤 것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음료수 광고를 보고 맛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자. 편의점에 갔을 때 그 음료수에 대한 생각이 났던 기억 들은 한번씩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이 광고를 보면서 그 음료수에 의미를 주었기 때문 이라 생각한다.
REPORT사회사교과목: 사회사학 과: 정치외교학과1. 계의 유래한국에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상부상조(相扶相助)의 민간협동체로서 삼한시대(三韓時代)에까지 소급되는 공동행사의 하나로 상호부조라는 주된 목적 아래 취미 또는 생활양식의 공통분야에서 성립되는 것으로 공동유희 ·제례(祭禮) ·회음(會飮) 등이 성행하였다.신라 때에도 여러 가지 형태의 계가 성립 발전하였으며, 그 예로서 여자들의 길쌈내기인 가배(嘉俳), 화랑들의 조직체인 향도(香徒) 등이 있었다. 또한, 궁중경제와 사원경제(寺院經濟)가 지배계급의 모든 활동의 중심을 이루던 이 시대에는 궁중에서 보(寶)라는 것을 조직 경영하였는데, 점찰보(占察寶) ·공덕보(功德寶) 등으로 기부받은 금전, 공동각출한 재원 및 기본자산인 토지 등을 운영하여 그 이익으로 사회사업이나 대부(貸付) 등을 하는 조직이었다.그 후 고려시대에도 보는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이익사회적 조직이어서 공동사회적인 계와는 성격이 다른 것이었다.조선시대에 와서는 계가 보를 닮는 등 비슷한 성격을 띠게 되었고, 고려시대의 보는 공공사업의 경비충당을 목적으로 기본기금을 설치하여 그 이식(利殖)으로 각종 사업을 운영하는 일종의 공공재단이었다. 그 종류로는, 학보(學寶) ·제위보(濟危寶) ·금종보(金鐘寶) ·팔관보(八關寶) ·광학보(廣學寶) ·경보(經寶) 등 종교상 ·경제상의 성격을 띤 것이었고, 사찰에 두었던 사설(私設) 금융기관인 장생고(長生庫)도 있었다.2. 계의 변질과 그 배경①계의 변질계는 처음에 사교(社交)를 목적으로 하여 1165년(의종 19)) 고려시대의 문신으로 본관 무송(茂松). 자 담연(湛然). 문하시랑평장사 필(弼)의 손자이며, 공부시랑 응규(應圭)의 아들이다. 음보(蔭補)로 수궁서승(守宮署丞)이 되고, 대악서승(大樂署丞)을 거쳐 내, 외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용강(龍岡)현령으로 재직시 사무를 명명백백하게 처리하였다고 한다. 그 뒤 시어사(侍御史) ·대부소경(大府少卿) ·형부시랑 ·삼사지사(三司知事) 등을 지내고 상서좌복야(尙書左재상들과 기로회(耆老會)를 만들었다.유자량(柳資諒)이 교계(交契:후에 敬老會)를 조직한 데서 비롯되었으며, 무신(武臣)의 난이 일어났던 의종 때에는 문무계(文武契) 등이 조직되어 문무간의 반목(反目)을 없애고 우호적인 교제를 하였으며, 동년자(同年者)끼리 동갑계(同甲契)를 만들어 친목을 도모하였다.조선시대에 와서는 계가 다방면에 이용되어 여러 가지 역할을 하고 그 조직과 목적에 따라 일정하지 않았으나, 모두 공동생활에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조선 중기에 정여립(鄭汝立)의 대동계(大同契), 이몽학(李夢鶴)의 동갑계 등은 비밀결사를 위한 계였다.조선 중기에도 친목과 공제(共濟)를 목적으로 한 종계(宗契) ·혼상계(婚喪契) 등으로 성황을 이루었는데, 점차 경제적인 곤란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호포계(戶布契) ·농구계(農具契) 등이 성립하였다. 그 역사적 배경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특히 세도정치(勢道政治)에 따른) 조선 후기 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還穀:양곡대여) 등 3대 재정행정을 둘러싼 정치부패.삼정(三政)의 문란으로 인한 정치기강의 해이는 탐관오리의 부정 ·부패를 더욱 조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거듭된 천재(天災)와 질역(疾疫)은 농민들을 더욱 곤경으로 몰아넣었다. 이와 같이, 사회의 불안이 고조되어 감으로써 화적(火賊) ·수적(水賊)도 성행하여 농민은 수령(守令) ·향리(鄕吏)의 주구(誅求)와 토호(土豪)들의 전횡 속에서 기근과 질역에 시달렸다.② 구체적 배경㉠ 정치세력의 부패19세기초 순조 대에 이르러, 왕실과 연결된 소수의 몇몇 집안이 국가 권력을 장악하는 기형적인 정치형태인 '세도(勢道)정치'가 헌종, 철종대로 이어졌다. 1863년 고종이 즉위한 후, 왕권의 회복을 도모한 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 안동김씨를 비롯한 세도 권력가들을 숙청함으로써 세도정치는 끝나는 듯하였다. 그러나 10년 뒤 대원군이 권좌에서 물러남과 동시에 민비의 집안인 여흥민씨에 의해 세도정치가 다시 시작되었다. 이들의 파행적인 정치운영은 만성적인 국가재정의 위기를 불러일으켰다. 중앙정줄어든 지방관청에서는 각종 잡세의 부과나 환곡, 고리대 등을 통하여 재정을 보충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자연히 봉건권력에 의한 농민수탈은 더욱 강화되었고, 이것은 19세기의 만성적인 삼정수탈의 계기로 작용하였다. 국가재정의 위기를 농민수탈의 강화를 통해 모면해 보려는 국가의 정책이 바로 삼정 문란을 야기시켰고, 그 가운데 세금의 부담은 자꾸만 빈농층에게 집중되어 갔던 것이다. 민씨정권은 통제력의 이완으로 지방관리의 부정을 통제할 수 없었을 뿐더러 오히려 탐관오리를 대량으로 양산하며 관리의 수탈을 조장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런 부패구조의 최종적인 희생자가 일반농민이었음은 다시 말할 것도 없다.㉡ 수취체제의 문란18세기 중반 이후 조선의 세금제도는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還穀)이라는 삼정(三政)체제로 확립되었다. 그런데 이 조세 수취제도는 제도 자체에 모순을 안고 있었는데, 모순의 내용은 기본적으로 ‘얼마를 수탈했느냐’는 것이라기보다 ‘누가 냈느냐’는 것이었다. 이 시기 세금은 평민층, 즉 직접생산자인 자·소작농에게 집중적으로 부과되고 있었다. 토지세를 말하는 전정(田政)의 경우, 토지소유주인 지주가 아니라 직접생산자 즉 지주에게 세를 물고 토지를 빌어 농사짓는 소작인에게 집중 부과되었다. 16세에서 60세까지의 양인 장정에게 부과된 군정(軍政)의 경우도 양반은 면제되었다. 환곡(還穀)의 경우 애초에는 춘궁기(春窮期:보리고개)에 관곡(官穀:관아의 곡식)을 싸게 빌려주어 농민들이 굶주림을 면하도록 하는 빈민구제책이었다. 그러나 그 이자를 국가재정에 충당하면서부터는 국가고리대의 성격을 띄었는데, 이 역시 일반 농민들에 부담되는 것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세금거두는 일을 담당한 수령과 아전은 중앙지배층과 결탁하여 자의적이고 무제한적인 수탈을 일삼아 농민들의 부담을 더욱 가중시켰다. 이처럼 삼정이라는 국가의 조세 수취제도는, 그 잘못된 구조와 파행적인 운영으로 직접생산자인 농민층의 성장을 가로막았을 뿐 아니라 생계의 기반마저 위협하고 있었다.이러한 비참한 여 상호부조의 계가 발달하고 공동작업을 위한 두레가 발달하였으며, 만성적으로 부족한 식량을 보충하기 위하여 구황작물(救荒作物)인 고구마 ·감자 등의 재배도 성행하였다.3. 계의 성격계의 성격은 조합(組合) 또는 종친회(宗親會) ·사설금융기관의 성격을 띤 것으로 그 종류를 보면, 친목 ·단결을 위한 계로서 종족일문(宗族一門)의 종계(宗契)인 종중계(宗中契) ·종약계(宗約契) ·문중계(門中契) 등이 있고, 동년자의 동갑계, 동갑의 노인의 친목을 위한 노인계(老人契), 동성자(同姓者)의 화수계(花樹契) 등이 있었다. 또한, 공제(共濟) ·구제(救濟)를 위한 계로서 혼인과 장례 등 일시적으로 많은 돈이 드는 경우를 위하여 혼상계, 제야(除夜)에 필요한 세찬계(歲饌契) ·위친계(爲親契) ·학계(學契) 등이 있었고, 인보단결(隣保團結)을 위한 계로서 동계(洞契) ·이갑계(里甲契), 계금의 운영에 의한 수입으로 세금을 납부하고자 하는 호포계, 군포(軍布)의 공동 납부를 목적으로 하는 군포계 등이 있었다. 특히, 농사를 위한 계로서는 둑의 축조 ·수리(水利)를 목적으로 한 제언계(堤堰契)를 비롯하여 소유토지를 공동 경작하여 그 수확을 계원이 분배하는 농계(農契), 소의 공동사용을 목적으로 한 우계(牛契), 농구(農具)의 공동구입 ·공동사용을 목적으로 한 농구계 등이 성행하였다. 또한, 영리를 목적으로 한 식리계(殖利契) ·지계(紙契) ·금계(金契) ·삼계(蔘契) 등도 있었다.4. 근대이후의 계국권피탈 후 일제는 제국주의적인 자본주의 침략과 구시대 협동체의 파괴를 목적으로 이들 계를 모두 해산시켰다. 8 ·15광복 후 금융기관의 경색과 인플레이션의 누진으로 투기적인 영리목적에서 계가 재빨리 부흥하였다. 특히, 6 ·25전쟁 후에는 도시중심으로 성행하여 서민금융을 지배하였으나, 유휴자본의 회전촉진 및 대부이자의 고율 등으로 인플레이션을 조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계조직 운영의 무질서로 가정문제에서 사회문제로까지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사설계는 서민의 목돈 마련에 큰 비중을 차지밖에 친목을 목적으로 하는 각종 계가 성행하고 있어 계는 국민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5. 계의 종류① 갑계(甲毅)같은 절에 있는 승려들이 친목과 절을 보조할 목적으로 조직한 계회로서동갑계(同甲毅)라고도 한다. 자(子)년생에서 사(巳)년생까지, 오(午)년생에서 해(亥)년생까지를 각각 1단체로 갑계를 만든다.그 방법은 계원이 되는 이들이 얼마씩의 입계금(入毅金)을 내고, 또 절에서 받은 찬조금으로 기본금을 삼아 식리(殖利)도 하고, 계원들의 공동노력으로 사중 공사를 맡아 생기는 소득을 계 자금에 넣어 기본금을 늘린다. 계원들이 늙으면 땅을 사서 절에 바치고, 그 밖에 필요한 불사(佛事)나 도구 따위를 계금으로 마련하여 절에 비치하기도 한다. 이 계는 경상도의 사찰들에서 성행하였는데, 한말까지 존속되었다.② 군포계(軍布契)조선 후기 한 마을에서 공동으로 군포(軍布)하기 위하여 조직한 계(契)로원래 군역(軍役)으로 군포를 납부하는 군보(軍保)는 1필이었으나, 점차 이 제도가 문란해지고 또 관원들의 수탈이 격심해지면서 도망한 자나 사망자의 군포까지도 면제되지 않고 납포하여야 하는 이중 삼중의 군역을 부담하게 됨으로써 무거운 신역(身役)으로 고통을 받게 되었다. 당시 16∼60세의 남정은 군안(軍案:군역 등록부)에 파기(識記)라 하여 해당자의 얼굴의 특징을 기록하였는데, 이는 당사자가 도망하거나 사망할 때이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후에는 이에 관계없이 도망자·사망자 등의 결원을 이(里)에서 대정(代定)하는 이정법(里定法)을 시행하였다. 즉 군역 당사자에게서만 군포를 징수하지 않고 한 이(里)에 배정된 군포는 한 마을에서 신분에 관계없이 공동으로 부담하게 하였다.군포계 또는 호포계(戶布契)는 이렇게 해서 생긴 것인데, 대체로 토지나 곡식·전재(錢財)를 공동으로 마련하여 그 지대(地代) 또는 이식(利息)으로써 자기 마을의 군포를 납부하였다. 이렇게 되니 군포 납부자와 군안의 군정(軍丁)은 일치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었으므로 군안은 유령인이 대리가하였다.
Report문화 인류학교과목: 문화인류학교수님: 조창희 교수님만약 사람들에게 인류의 기원이 무엇이라고 묻는다면 일부는 창조설, 또 일부는 자연 진화설을 들 것이다. 그러나 창조설이든 자연 진화설이든 공통분모가 있다. 그것은 '인간은 만물의 영장' 이라는 생각일 것이다. 다 알다시피 창조설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은 '신'이라는 존재에서 인간의 기원을 찾는다. 그와는 반대로 자연진화설은 지구라는 행성이 형성되면서부터 점차 진화되어 간다는 것이다.과학이 발달되고 문명이 발달된 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창조설보다는 진화설이 더 신빈성있게 다가 올 것이다. 또한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창조설보다는 진화설에 더 익숙해져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중학교 , 고등학교를 통해서 인류의 기원이 진화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배워왔기 때문이다. 즉 , 인류는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호모 에렉투스, 호모 사피엔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를 거치면서 지금의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류학자들의 진화설에 대한 연구와 그 근거를 알아보도록 하자.1924년 다트라는 인류학자가 화석을 통해서 최초 인류의 기원을 찾는데 성공함으로서 창조설의 근거에 반격 할 증거를 확보하게 되었으며 다른 인류학자들의 희망이 되었다. 그렇다면 인류학자들은 앞에서 말한 연구들을 어떤 벙법으로 연구 하였을까?인류학자들은 인류의 진화를 찾기까지 과거부터 현재까지 부단한 노력을 해왔다. 그 연구의 첫째는, 인간과 유사하다는 원숭이과의 침팬지를 통한 연구이다. 둘째, 화석을 통한 연구가 계속되어졌다.첫째, 원숭이를 통한 연구인류학자는 원숭이를 통해서 원숭이의 식습관이나 생활방식, 생존방식을 통해 최초의 인류를 찾기위해서 노력했다. 더욱이 원숭이과인 침팬지를 통해 다시말해 인류학자들은 인류의 진화과정에서 인간과 가장 유사하다는 침팬지와 인간을 분류함으로써 침팬지와 인간을 연구 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침팬지의 생존방식을 통해서 최초 인류가 생존하기 위해 무기를 사용했을 것을 유추해냈다. 차이점이 있다면 인간은 두발로 걸어다닌다는 것이었다.이런 침팬지의 연구에는 한계성이 있었다. 그래서 인류학자들은 화석을 통해서 최초의 인류를 연구하는데 주력하였다. 이것이 화석을 위한 연구이다.둘째, 화석을 통한 연구.화석은 무엇을 먹고 살았는지 키는 얼마인지 몸무게는 얼마인지를 알려주는 척도이다. 즉, 마모상태나 흔적들로 알 수 있으며 또한 탄소성분 분석으로 그 화석이 언제쯤의 것인지 알 수 있다. 이러한 화석을 통해서 최초 인류이며 우리의 조상인 오스트랄로 피테쿠스를 알아 낸 것이다. 또한 매장한 최초의 인류가 네안데르탈인이며 인간과 가장 유사하다고 생각되는 호모사피엔스 사피엔스는 농경생활과 미술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