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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인류학] 우반동과 우반동 김씨의 역사
    고문서를 통해서 본「우반동과 우반동 김씨의 역사」-전경목1. 들어가기필자는 고문서)와 각종 기록 등을 통해서 전라북도 부안현에 있던 우반동(愚磻洞)과 이곳에 살았던 우반동 김씨의 역사를 통해서 한국 사회사나 문화사 등을 파악하고자 했다. 고문서를 이용해서 향촌생활사를 밝히는 작업은 무엇보다도 향촌사회의 여러 모습이 자세하게 담겨 있는 고문서를 이용하기 때문에 보다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조선시대의 생활상을 규명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전라북도 부안군 남동면에 있에 있는 보안면(保安面)에 위치하고 있는 우반동은 결코 하찮은 하나의 작은 ‘부분’에 머물지 않고, 우리나라 역사와 문화 ‘전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능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한다.이 마을은 현재 우신리와 우동리로 나뉘어져 있는데, 많은 사람들에게 실학의 비조로 일컬어지는 반계 유형원 때문에 잘 알려져 있다. 반계는 뛰어난 경륜에도 불구하고 초야에 묻혀 은둔생활을 하였는데, 을 집필하며 20여년을 보낸 ‘들쭉날쭉한 바닷가’가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이다. 그의 ‘반계(磻溪)’라는 호는 마을의 지명에서 따왔다.이 책은 부안김씨(扶安金氏) 가운데 한 집안이 이 마을로 들어와 우반동이 하나의 마을로 형성되는 과정과 그 성씨가 ‘우반동 김씨’로 널리 알려지게 되는 내용을 살피고 있다. 1부 에서는 경치가 아름다웠던 우반동의 모습을 소개하고, 이 우반동이 언제 형성되었으며 또 부안김씨 중 누가 이곳에 처음으로 들어오게 되었는지를 서술하고 있다. 이곳에 처음 들어온 사람은 김번(金?)으로 그의 조부 김홍원(金弘遠)이 인조 14년(1636년)에 유성민으로부터 이곳의 토지 일부를 사들인 것을 물려받고 나서이다.2부 에서는 우반동 김씨 가문에서 배출한 인물들에 대해 살펴보고 있는데, 현조(顯祖)들이 학문에 정진해 양반으로서의 교양을 함양하거나 봉제사(奉祭祀)?접빈객(接賓客)을 잘 하여 양반으로서 품위를 유지하자 이들 가문은 우반동에 거주하는 부안김씨라는 뜻으로 ‘우반동 김씨’로 불리게 되었다. 또한 우반동 관해 가문 나름대로 새로운 규정을 마련하고 이를 지키도록 힘썼으며, 이 규정이 후에 그의 자손들에 의해 하나의 중요한 규범으로 정착되었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부모의 제사를 아들과 딸이 돌려가며 지냈으며 그에 따라 유산도 균등하게 분배했었는데, 이러한 종법을 바꾸어 버린 것이다. 또한 우반동에 있는 토지와 노비들을 오직 아들들에게만 분배해 주도록 유언해 후손들이 우반동에 세거할 수 있는 기반을 굳건히 하였다.마지막으로 3부 에서는 17세기 후반에 태어나 18세기 초에 사망한 ‘김수종’이라는 인물을 통해 지방 양반들의 일생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김수종이라는 평범한 인물이 일상생활에서 품었던 기대와 시대의 흐름 속에서 겪을 수 밖에 없었던 여러 좌절들,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기울였던 그의 노력 등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규명해 보고 있다.2. 본론1) 한국고문서 연구동향한국의 고문서연구는 해방 이후에 시작하여 그 역사가 아주 짧을 뿐만 아니라 그 연구 결과도 극히 부진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고문서 연구가 이처럼 부진한 이유를 박병호는 세 가지 이유로 설명하는데, 첫째는 이용 가능한 고문서가 체계적으로 꾸며진 사료집으로서 公刊되어 있지 않은 점을 든다. 둘째는 고문서의 본격적 이용에 눈을 돌릴 겨를이 없는 학계의 사정 때문이며, 마지막으로 고문서를 근거로 사실을 고증하며 그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을 이른바 소박실증주의적 사관이라고 매도해 버리며 비능률적이라고 치부하는 잠재적 선입견 때문이라고 한다.한국에서 고문서연구의 시작은 일본인학자들에 의해서였다. 특히 사방박은 조선후기 대구지방 호적을 치밀하게 분석하여 후기 신분제의 변동에 대한 획기적인 설을 발표하였는데, 그가 자료로 이용한 조선조의 호적대장이 부정확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으면서도 17세기 이후 양반이 급격히 늘어나고 천민이나 양인이 줄어드는 현상을 통계적인 수치로 제시하였다. 또한 주등길지는 경성제국대학에서 수집한 고문서 중 토지매매문서를 분류하여 조선 후기 토지매매의 실고문서를 통해서 영남지방의 사족(士族)에 대한 경제적 상태를 살펴보는 것에 중점을 두고 연구를 진행하였고, 최재석은 고문서를 이용하여 17세기 가족제도의 실상을 밝히는 것을 연구의 주제로 삼았는데 그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17세기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던 동성혼이 상민층 사이에서는 간간히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주장한다.1980년대에 들어와 여러 신진학자들에 의한 여러 가지 연구 성과들이 쏟아지고 있는데 노비신분, 향리신분, 향약과 향안의 분석을 통한 향촌사회의 구조의 변화, 서원과 향교, 농민의 사회 경제적 성격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 등 그 방법이나 분야가 다양해지고 있다. 따라서 전경목의 「우반동과 우반동 김씨의 역사」 또한 이러한 연구동향과 시대사적 욕구에 의해 진행된 것임을 알 수 있다.현재 부안김씨 종중문서는 보물 제90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김종덕 김종규 김형복 김을술씨가 조선 연산 8년(1502)~융희 5년(1911)까지의 고문서 609점을 소유하고 있다. 내용은 대개 교지, 호적, 분재기, 토지문기, 노비문기, 간찰, 시권 등으로 당시의 사회경제사, 법제사, 국어분야, 전통문화 등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2) 지역문화사 서술의 방법론지금까지의 많은 역사기술서들이 중앙집권적이고 관료중심적인 사상에 의해서 씌여졌다고 해도 무방한 얘기다. 지역에 대한 연구가 곧 훌륭한 지역문화사를 만드는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지역+문화+역사’라는 세 가지 현상을 어떻게 조화시키면서 지역문화사를 쓸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많은 의문을 품은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지역에 대한 역사적 연구를 한 데 모아 둔다면 그것은 지역사 연구의 총합은 될지 몰라도 지역사 그 자체는 아닐 것이다. 역사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史實 event)이나 사실(事實 fact) 모두를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사관과 세계관에 따라서 해석하고 평가한 다음 새로운 역사를 쓰는 것인데, 지역사나 지역문화사는 지역에 대한 연구의 총합은 아니다.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역문화사라는 것이 지역사 중의 문 그리고 중앙과 지방에서 벗어나야 모든 지역이 동등한 권위를 갖는 지역개념으로 전환될 것이다. ‘부분’은 ‘전체’의 영역에 속하지만 나름대로 독자적인 단위체이다. 또한 한 지역의 역사를 기술한다고 했을 때, 정사(正史)서술의 방법을 근간으로 하면서 동시에 주제사나 정신사의 관점을 가져야만 한다는 점은 간과해서는 안 된다.지금까지 지역을 하나의 독립적인 생명체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했다. 국가와 민족이라는 거대한 담론 속의 한 부분으로서 이해하려는 측면이 전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역의 총합이 곧 국가민족이라는 관점에서는 결코 지역사를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 전체인 국가 입장에서 지역사를 이해하는 것과 부분인 지역의 입장에서 지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역문화사의 경우 지역사의 관점과 민족국가사의 관점, 그리고 세계사의 관점이 균등하게 조화를 이뤄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상징은 의식의 심층을 규정하고 한 번 규정된 의식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또한 상징도 지속적으로 재생산되면 권위를 갖게 되는데, 경기전 등의 권위는 상징권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그동안 국가 민족사라는 거대담론에 휩싸여 지역은 전체의 부분으로만 취급된 성향이 강하다. 문제는 서울인들의 지방인들에 대한 우월감이나 편견이 아니라 지방인들이 가지고 있는 그 편견의 무의식적 수용에 있다.따라서 고문서를 통해 본 「우반동과 우반동 김씨의 역사」를 지역문화사적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약간 지나칠 정도로 서울중심에서 한참 떨어진 부분에서 전체를 말하고 있다. 전라북도 한 군단위에서도 일개 촌락에 존재하는 토지매매문서, 합격증, 별급명문, 탄원서, 입안, 사령장, 분재기, 공증문서, 준호구), 편지, 선물목록, 갑신보 등의 많은 고문서들로 16~18세기의 생활문화상을 새롭운 시각에서 구성할 정도로 중심적 자료임에는 틀림없다.3. 맺는 말이 책과 고문서들을 통해서 우반동과 우반동 김씨의 역사를 조선후기 그 중에서도 특히 17?18세기의 사회상과 향촌사회 생활상인 사회였다는 점이라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그러나 이 문화연구 보고서에는 소량의 고문서라는 데이터를 가지고서 2백 여년의 역사를 읽으려고 했기 때문에 ‘과연 그럴까?’라는 의문을 하게 된다. 한 집안에서 현조라고 불릴만한 세 명의 인물을 가지고 가족사를 기술한다는 것도 근거의 불충분성 때문에 부족할 것이다. 만약 하나의 지역을 골라 그것에 대한 총체적인 접근방식을 사용했다면 어느정도의 신뢰성이 작용하겠지만 우반동 김씨 가운데 몇 명을 가지고서는 조선시대의 사회상을 제대로 조명하기가 어렵다.또한 연구자는 주관적인 개입을 배제한 체로 기술을 했더라도 소위 지방에서의 권문세가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측면에서 이것 역시 지역내에서의 서울과 지방을 갈라놓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사료의 미비함으로 인해, 그리고 연구자의 연구목적으로 인해 특정 분야에만 노력을 기울였겠지만 은연중에 양반사회를 옳다고 생각하게 하고 남존여비의 강화를 이끌었다고 보여진다.다음은 에 실린 신문기사다."조선중기 남녀 자유분방" .. 성균관대 호적대장 분석조선 중기시대 호적에는 "아버지"를 모른다고 표기한 사람이 많아 남녀관계 가 자유분방했던 것으로 추청됐다. 또 군역을 피하고 세금을 줄이기 위해 남자의 호적신고를 누락시킨 경우도 많았던 것으로 조사됐다.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원장 심윤종)은 7일 국내에서 처음으로 조선시대(16 06~1888년) 경상도 단성현(경남 산청 일부지역) 호적대장의 전산화작업을 마친 결과 이같이 나타났다고 밝혔다. 호적대장은 조선시대 정부가 지방행정단위로 인구를 조사해 정리한 장부로 오늘날의 주민등록원본과 비슷하다. 분석자료에 따르면 당시 호적에 "부"를 모른다고 표기한 사람이 많아 남녀관계가 자유분방했던 것으로 분석됐다. 또 노비(노동력)의 수를 늘리기 위해 양반들이 여자 노비를 통해 서자를 보는 매정한 사회상도 엿볼 수 있었다고 학교측은 설명했다. 남녀구성비를 보면 1678년의 경우 남자 4천 1백17명(50.2%), 여자 4천81명(49.8%).
    인문/어학| 2004.05.20| 6페이지| 1,500원| 조회(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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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이론] 그람시와 헤게모니, 그리고 문화
    그람시와 헤게모니, 그리고 문화1. 들어가기 -그람시, 그람시적 사고와 그 출발그람시는 자신이 11년 동안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에 의해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했었기 때문에 3000여 장에 달하는 저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옥중수고』라 불리우는 상당히 난해할 수밖에 없는 글과 가족과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만이 남아있다. 그리고 그람시에 대한 연구/비판을 해 놓은 책들은 많지만 과연 이것(그람시의 사상)이 문화를 공부하는 사람들게 어떠한 시각과 방법을 제시해 줄 수 있을지가 여전히 고민으로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는 그람시에 대한 잡다한 얘기들과 논의들, 그리고 사상들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한다.안토니오 그람시) Antonio Gramsci(1891∼1937).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토리노대학에 재학하던 중 이탈리아 사회당에 입당하였다. 1921년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립하여 코민테른에서 지도하게 된다. 1926년 파시스트 당국에 체포되어 죽기 전까지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였다. 마르크스주의의 결정론적 해석과 크로체의 관념철학에 반대하여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의 통일을 주장하였으며,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약점이었던 상부구조의 이론을 발전시키고 자본주의가 발달한 시민사회에서 사회혁명이 일어나는 조건인 프로레타리아트의 지도성 헤게모니의 논리와 그 실천적 기구(당)에 대해서 특별한 이론을 전개하였다.는 서구 맑스주의의 특징인 자본주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무관심, 혁명에 대한 낙관론 배격, 독단주의 반대, 문화에 대한 관심 등을 공유하면서도 문화적 상부구조의 문제를 정치적 문제로 간주하였다는 점에서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구별된다. 때문에 '정통'과 '이단' 사이에서 많은 논란을 겪게 되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47년 에서 그토록 자신 있게 예언하였던 자본주의의 종말은 여지까지 도래하지 않은 점') 『그람시 그 비판적 연구』서론에서 새로운 사상을 전개하게 된다.마르크스는 물질적 조건이 낡은 사회에서 충분히 성숙되어야만 새로운 사회질서가 생겨날 수 있다고인가? 둘째, 그렇다면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람시는 이 두 가지 문제를 하나의 요인으로 해결한다. 즉, 러시아와 선진 자본주의 국가는 전혀 다른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조건이란 경제적인 것이 아니다. 러시아에는 없지만 서구에는 있는 조건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시민사회의 전통이다 .시민사회와 대비되는 것은 국가라는 개념이다. 국가는 지배하고 시민사회는 견제한다. 이렇게 서유럽의 근세사는 시민사회와 국가가 서로 타협 속에서 긴장과 조화를 이루면서 전개되어 온 역사이다. 이렇듯 시민사회의 층이 두텁고 전통이 강하기 때문에 서유럽에서는 혁명 전의 러시아와 같은 혹독한 전제 체제를 수백 년 전에 일찌감치 끝낼 수 있었으며,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폭발성을 체제 내로 받아들이고 순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사회주의 혁명도 진정한 사회혁명이 아니라 위로부터의 정치혁명이라는 형태를 취하게되었다.그람시의 사상의 출발점은 그의 가정환경에서부터 시작된다. 그의 아버지는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후보의 선거운동을 하다가 정치적 보복을 당해 투옥을 당한다. 그래서 이 사건 전까지의 비교적 안정된 생활은 끝이 나고 가계는 급격하게 기울게 된다. 이때부터 그람시는 가난한 설움을 겪으면서 특히 소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도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였다는 울분에 '반역의 본능'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가 부모님께 보낸 편지에 의하면 토리노 대학에서 학업을 할 때도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하기 힘들어 고독하게 생활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가난의 경험이 그람시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만든 첫 번째 계기가 된다.그의 사상의 또다른 출발점은 바로 그의 태생지인 사르디니아 섬에 관련된 것이다. 당시 사르디니아 섬의 경제력의 가장 중요한 원천은 농축산물의 프랑스 수출이었다. 그런데 1889년 이탈리아 정부가 북부공업 부르주아지를 보호하기 위해 관세인상정책을 취하면서 큰 타격을 입게 되었고, 이로 인해 경제력은 급속도로니아 섬에서는 위에서 농민들이 보인 무정부적인 반란의 형태에서 보다 조직적이고 집단적인 투쟁의 방향으로 민중의 힘이 표출되기 시작한다.) 그람시 자신도 이 당시 '본토 놈들을 바다에 쓸어 넣어라'라고 혼자 수없이 되뇌었다고 고백했을 정도로 본토, 즉 국가에 대한 적대적 감정이 극에 달하였다.그래서 사르디니아에서 주창되었던 것은 소위 '사회 사르디니아주의'였는데, 이는 계급투쟁이라는 원론은 받아들였지만 타도해야 할 계급은 본토의 부자들로 한정시키고 있었다.그러던 중 1913년 사르디니아에서의 국회의원 선거가 본토를 대표하는 후보와 사르디니아를 대표하는 후보간의 경쟁양상을 띄지 않고 보수제파 대 근로자의 대결구도를 보고 생각의 전환을 가져오게 된다. 이제까지 사르디니아의 후진성을 강요하는 세력을 북부 부르주아지와 공업 노동자들로 파악했던 그람시는 사르디니아 빈민계급의 진정한 적은 북부 소유자 계급과 사르디니아의 반동집단들, 남부 전체의 반동집단의 연합이라는 점을 깨닫게 되며 비로소 소유계급과 무소유계급과의 갈등을 올바르게 인식하게 된다. 그는 사르디니아 특유의 후진성을 뛰어넘어 지방적, 마을적이 아닌 국민적 생활 방식과 사고방식을 지향하게 된 것이다.2. 본 론 -그람시의 사회구조, 헤게모니) 『그람시 헤게모니의 사회이론』 참조, 문화마르크스주의에 따르면 국가는 폭력적인 지배기구이다. 국가란 자본가 계급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는 도구이며, 심하게 말하면 자본가 계급의 결정을 정책으로 실행하는 집행위원회에 불과하다. 국가는 외곽 참호일 뿐이고, 그 배후에는 시민사회라는 강력한 요새와 진지가 버티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시민사회의 동의를 얻어내지 못하면 국가는 시민사회의 지지를 받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국가는 최소한도의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어야만 한다.) 『한 눈에 읽는 현대철학』 그람시 편여기서 그람시는 헤게모니라는 개념을 통해서 정치, 국가, 문화의 개념과 이론을 한 단계 발전시켰다. 그는 상부구조를 토대로 환원시키거나 부수적인 현상으로 파악가 가지는 한계를 뛰어 넘었다. 국가를 억압적 장치로만 파악하는 협의의 국가개념은 지나치게 협소한 것이며, 복잡한 현실과 문화의 국가의 기능을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데는 제한적이다. 그렇게 때문에 그람시는 국가의 개념을 광의의 국가개념으로 확장하기에 이르며, 이데올로기 투쟁의 중요성을 상기시켰다. 그람시가 상부구조를 시민사회와 정치사회로 나눈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상부구조를 시민사회와 정치사회로 세분하여 각각의 특성·차이·상관성을 규명한 것이고, 둘째는 토대와는 다른 특성을 갖고 있는 상부구조 영역 고유의 작동원리로서 '헤게모니'이론을 정립한 것이다. 그에게 국가는 '그 내부에 헤게모니와 그 장치를 포함하는 관료적 강제적 기구와 시민사회의 기관(정당, 노동조합, 학교, 신문, 교회, 단체)의 결합체'이며, '정치사회와 시민사화의 통일체'이다. 곧 국가는 '강제의 갑옷을 입은 헤게모니'인 것이다.경제결정론의 폐해는 동시대의 다른 맑스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람시에게도 독창적 연구의 결정적인 자극제가 되었다. 이러한 자극의 결과가 1926년∼1937년까지 수감기간 동안 옥중에서 집필된 『옥중수고 Prison Notebooks』) 『그람시 그 비판적 연구』에서 이탈리아 철학자 크로체는 『옥중수고』의 초판이 발간되었을 당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구성이 거친 가설적 사고들, 미해결의 자문(自問)들, 때로 근거 없는 억측과 의심들…판단하고, 구축하고, 하나로 종합하는 포괄적 사고력이 결여된 것이다"라고 치부했다.이다. 그의 이론은 경제결정론-기계주의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변증법적-역사적 역동성을 가진 시각으로 인간의 사회역사를 해석하고자 하는데서 출발한다. 그람시는 정치·이데올로기·문화를 물질적 토대의 반영인 상부구조라는 환원적 도식에 대해 명백히 반대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정치·이데올로기·문화의 역동적인 측면을 파악할 수 있고, 경제와 정치·이데올로기·문화의 복합적인 관계를 해명할 수 없는 것이다. 반대론자들로부터 관념론적이 아니냐는 의혹을 불러일으키기으로 그 사회의 지배계급이 '지도direction'를 통해 여타 계급·집단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영역으로써, 교육계·종교계·언론계·학술계 등의 사적 영역들을 지칭한다. 다시 말하면 '문화영역'이라고 지칭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영역에서 지배계급은 '문화적, 도덕적, 이데올로기적' 수단을 통해 여타 계급과 집단들의 '동의consent'를 이끌어 낸다. 반면에 정치사회는 정부·사법기관·경찰·군대와 같은 공적 기관들을 통해 지도에 반해 강압적이고 직접적인 '지배domination'를 행하는 장으로써 '정치영역'이라고 할 수 있겠다.그렇다면 이러한 구도 속에서 '헤게모니' 개념이 갖는 의미와 중요성은 무엇인가? 헤게모니란 물리적 강제와 힘으로서의 통치와는 달리 '지적·도덕적 지도력'에 의해 뒷받침되는 지배상황을 의미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피지배 계층들의 동의를 얻어내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즉, 서구의 부르주아사회에는 그간 다수의 합의를 바탕으로 한 사회적 안정이 있었기 때문에 사회주의적 변혁이 좌절되어왔다는 것이다. 그람시의 이러한 이해에서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는 토대의 단순한 반영이 아니라 '대중의 힘'으로 간주된다.한 집단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사회발전의 일반적 관심과 일치시킴으로써, 그리고 대다수 사회세력의 이익을 자신의 것과 진정으로 일치시킬 수 있을 때 헤게모니 집단으로 등장할 수가 있다. 그람시에 의하면 한 집단의 문화가 종속적인 단계에서 헤게모니 집단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자율성을 찾아야 하며, 그들을 적극적으로든 소극적으로든 지지하는 집단들로부터 지지를 이끌어 합의기반을 만들어야 한다. 결국 이데올로기 투쟁이란 서로 경쟁적인 기본 계급들이 자신의 헤게모니를 보다 보편적인 것으로 확장해 가는 과정이며, 그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진지전'의 과정이 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헤게모니는 소위 '유기적 지식인'에 의해 조직된다. 유기적 지식인은 헤게모니를 굳건히 하고 유지하려 애쓰는 지배층의 '대리인'으로서, 문화와 이데올로기 분야에서 지도력.
    인문/어학| 2003.06.03| 5페이지| 2,000원| 조회(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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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사] 부르디외의 <구별짓기>
    삐에르 부르디외『구별짓기 :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上』-제3장 아비투스와 생활양식 공간-제4장 장(場)의 역학(力學)1. 들어가기 -출신배경과 연구방향삐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프랑스 사회학계의 색다른 인물로 실존주의 철학자인 장 폴 샤르트르 이래 이어져 온 민중주의적 비판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까닭에 진정한 지식인은 세속적 권력과 정치경제적 권위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한다.부르디외의 연구의 가장 큰 특징은 현대사회에서 지배구조(계급구조)가 어떻게 유지되고 재생산되는지, 피지배계급(혹은 노동자)이 어떻게 그들의 지위를 받아들이는지에 대한 설명을 문화에 관한 분석을 중심으로 제기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를 하면서 객관적인 계급구조와 행위자들의 취향 사이의 밀접한 관련을 발견해 낸다. 구조와 행위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기보다는 그 사이를 매개하는 구조로서 '아비투스habitus') 부르디외는 아비투스에 상반되는 두 가지 측면이 내재함을 명확히 한다. 첫째, 과거의 사회적 조건에 의해 형성된 아비투스는 현실 속에서 적극적으로 표현되고 수정된다. 둘째, 아비투스는 개인들의 실천을 한계 짓는다.라는 새로운 개념을 끌어들여 기존의 이론들이 극복하지 못했던 구조와 행위의 관계를 파악하려고 시도한다.우리는 먼저 한 사상가의 이론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배경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할 것이다. 특히 부르디외의 학문적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 중의 하나는 그의 출신배경이 프랑스 남부의 시골출신이라는 것이다. 남부 사투리 때문에 겪어야 했던 파리 유학시절의 경험은 부르디외로 하여금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파악하게 만든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그는 시골 출신으로서 대학생활에 적응하는 데에 어려움과 갈등을 겪었으며, 그 갈등이 왜 생기는 것이며,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에 대해 몰두하기 시작했다. 대학이라는 '상징적 가치'가 자신의 환경과 경험을 통해 터득하며 지니고 있던 그의 모든 것보다 우월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또스러움을 내던짐으로써만 대학에서 적응할 수 있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현실과도 상당부분에 있어 상충하는 성격이 강하게 드러난다.이러한 의미들 외에도 우리가 부르디외의 학설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사회학자들에게 소홀한 취급을 받았던 '생활양식으로서의 문화현상'들까지 학문적 영역 안으로 끌어 들였다는 점에서이다. 또한 부르디외는 '아비투스habitus', '상징폭력symbolic violence', '문화자본cultural capital' 등의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지배구조의 재생산 과정을 고찰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그의 비판적 분석에 의해 자본주의 사회가 경제적 토대로부터 어느 정도 상대적 자율성을 지닌 문화적 도구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과 지배계급(계층)이 상징폭력을 통해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피지배계급(계층)에게 주입시킨다는 사실 등을 폭로할 수 있다는 것이다.2. 본 론 -아비투스와 장 그리고 구조부르디외에게 있어 아비투스와 장의 개념은 개인의 실천과 그 실천들이 생성한 사회적 세력관계를 지칭한다. 또한 장이란 개념이 사회적 세력관계들을 지시하지만 그것은 애초부터 대립을 미리 상정하는 단순한 양진영의 세력관계가 아닌 아주 다양하게 얽혀있고 구조화되어 있는 세력관계를 말한다. 따라서 장들 간의 관계는 모순/대립관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차이의 관계, 혹은 장들간의 위상적 관계가 함께 존재한다. 가령 '사회 세력들의 장'은 정치의 장, 경제의 장, 문화의 장과 같은 사회적으로 구조화되는가하면 지배계급의 장, 피지배계급의 장처럼 계급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부르디외는 행위자들이 가지는 취향을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어떤 것이 아니라 행위자들이 스스로의 경험과 생활 속에서 획득 후천적 성향으로 본다. 취향은 객관적 계급위치의 사회적 위계를 반영하는 문화적 위계로 조직화되기 때문에 취향들 사이의 갈등은 계급갈등으로 간주된다. 취향은 결국 소유하고 있는 자산에 의존하는데 이러한 자산의 소유는 각각의 사회계급들에 균등하게 분배되어 있는 않은 것이다. 그는의 관계를 인지하기 위해서 각 행위자들의 아비투스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p. 377)그는 문화와 경제가 상호구성망 속에서 복잡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경제의 계급구분은 반드시 문화의 상징적 구분을 발생키시는데, 이것은 단지 계급구조를 재발생시키고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문화적 취향) 부르디외는 문화적 취향을 세 가지로 구분하는데, 그것은 대체로 교육수준과 사회계급(계층)에 부합한다. 첫째는 정당한 취향으로서 고전적인 고급예술에 대한 취향을 말한다. 이러한 취향은 교육자본이 가장 풍부한 지배집단 분파에서 흔하다. 두 번째의 중류층 취향은 질이 좀 떨어지는 예술작품에 대한 취향으로서 중간계급에 많다. 마지막으로 대중적 취향은 대중음악이나 경음악 같은 작품을 선호하는 것인데, 노동계급에 가장 흔하다.에 있어서의 계급차이는 계급체계를 정당화하고 재생산하는데 기여하는데 이는 지배자들과 피지배자들 모두에 의한 '체계적 오인) 부르디외를 비판하는 여러 논자들은 오인, 상징폭력 개념의 애매모호함, 혹은 불완전성에 대해 지적한다. 이러한 시각에 의하면 오인은 이데올로기와 같으며 이는 허위의식이다. 과학적 인식 다시 말해 올바른 인식과정을 거치지 않은 개인들의 인식은 오염된 허위의식이다.'을 통해서 이뤄진다.(p. 281)아비투스habitus란 우리의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무의식적이고 보이지 않는 구조로서 '하나의 특정한 계급의 존재조건에 관련된 다양한 조건화 양식들이 생산해 낸, 지속적이면서 변화가능한 성향들의 체계'이다. 이러한 아비투스의 개념에 근거하여 부르디외에게 있어 각가가의 행위 안에서 작동하는 변증법이란 '구조화 하는 구조'로서 작동하는 경향을 가진 구조화된 구조 형태로서 구조와 그것의 내재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p. 280 '그림 8' 참조)아비투스는 실천적 행위로서 각 개인의 사회적 지위와 생활의 물적 조건에 따라 규정되는 객관적 잠재성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이 속한 환경 또는 존재조건의 산물로서, 교육과 가족에형태의 언어적-육체적 훈련을 통해서 사회구조는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고서도 세계 속에서 우리의 삶의 방식을 규정하는 행위양식으로 전환된다.자본은 모든 물질적이고 상징적인 대상들로 확장된다. 이해관심의 대상은 항상 물질적인 것만은 아니다. 신성화나 위신에 기반한 권위는 순수하게 상징적이며, 많은 양의 경제적 자본의 소유를 함축하지 않는다. 부르디외는 경제자본으로 환원될 수 없는 자본의 다양한 형태를 구분함으로써 경제 결정론적인 '계급(계층)개념'을 극복하고자 했다.그에 따르면, 경제자본economic capital은 상품과 서비스를 소비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는 돈과 물질적 대상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여타 재정자원과 자산뿐만 아니라 금전적 소득을 포함한다. 문화자본cultural capital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데, 이것은 사회화 과정 속에서 획득한 오랜 특성과 습관(육화된 문화자본), 가치 있는 대상물의 축적(객관적 문화자본), 그리고 공식적인 교육지격과 훈련(제도적 문화자본)을 포함한다. 사회자본social capital은 집단과 사회 연결망 내에서의 위치와 관계이다. 이것은 사회적 연결망에의 소속을 통해서 동원될 수 있는 실제적이고 잠재적인 자원들의 총합이다. 마지막으로 상징자본symbolic capital은 다른 세 가지 유형의 자본들이 정통적으로 승인된 형식인 위신/존망/명예/명성 등으로 규정된다.(p. 10∼13 참조)이러한 네 가지 유형) 네 가지 유형의 자본은 분배와 관계가 사회내의 객관적 계급구조를 결정한다. 사회의 전체적인 계급(계층)구조는 다양한 집단들이 소유하는 자본의 총량을 반영한다. 지배계급은 가장 많은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상징적 자본을 소유할 것이다. 중간계급은 이러한 형태의자본을 보다 덜 소유할 것이고 하층계급은 이러한 자본을 가장 적게 갖는다.의 자본 분배는 사회체계의 객관적 계급구조를 결정한다. 계급갈등은 상징을 특별한 자원구성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이데올로기로 동원하려는 데서 일어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인간 사회, 경제적 자원들의 특별한 유형을 가장 적합한 것으로 보이도록 하기 위해 상징들을 조작하려는 노력에서 생겨난다.아비투스가 자각·평가·행동이라는 정신적 그리고 육체적 구조의 형태로 개인들의 육체 속에 각인된 역사적 관계들의 총체라면, 장(場)은 어떤 권력(혹은 자본)의 형태들 속에 뿌리박힌 다시 말해 역사적으로 형성된 객관적 관계로 이루어진다. 장champ(場)) 행위자들이 자신들이 지닌 자본을 확대 혹은 유지시키려 경쟁하는 공간이다. 부르디외는 장을 일종의 '자본의 분배구조'라고 설명한다. 그렇기 때문에 각 장마다 분배구조의 위치에 놓여지는 자본은 상이하다. 예를 들면 권위, 지식인의 위세, 정치권력, 물리적 힘 등의 자본들은 하나하나의 장마다 자신의 가치를 새롭게 자리매김하게 된다.이란 공시적으로 파악할 때 입장들(또는 지위)의 구조화된 공간으로 드러난다. 부르디외의 이론적 모델에 따르면, 모든 사회는 여러 개의 장들(경제적 장, 교육적 장, 정치적 장, 문화적 장 등등)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그에게 있어서 이 장(場)은 '갈등의 영역'이다. 이 입장들의 특성은 그 공간 안에서의 그들의 위상에 종속되어 있으며, 그것을 견지한 사람들의 특성과는 무관하게 분석될 수 있다. 장(場)에는 장의 일반적인 법칙이 있는데, 즉 모든 장에는 기득권자가 가지고 있는 장을 뒤집어 엎으려는 새로운 계급(계층)과의 대립이 존재한다. 전자는 '보존의 전략'을 가지고, 후자는 '전복의 전략'을 가지고 특정 자본의 축적을 지향하게 된다.하나의 장(場)은 무엇보다도 다른 장들에 고유한 이해관계와 목표로 환원될 수 없고, 그 장에 들어갈 수 있도록 양성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인지될 수 없는 특수한 이해관계와 목적을 규정함으로써 정의된다. 이 둘 사이의 '구별짓기'는 음식, 필체, 말투, 스포츠, 예술 등을 통해 확연하게 구별된다고 부르디외는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서 결국에는 경제자본이 문화자본과 어떤 대립구조를 가지고 어떠한 아비투스를 통해 계층간의 갈등과 대립을 존속시키는지 사회과학적
    인문/어학| 2003.06.03| 5페이지| 2,000원| 조회(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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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 주거공간의 공간구조를 통해 본 쌀문화
    "주거공간의 공간구조"를통해 본 쌀문화Ⅰ. 들어가기Ⅱ. 주거공간 개념과 유형의 변화1. 주거공간의 개념2. 주거공간의 유형과 변화 ·3. 주거양식의 변화와 현대주택Ⅲ. 우리나라 가옥의 공간구조 및 역할1. 전통가옥의 구조면에서 살펴본 공간활용2. 현대가옥의 구조면에서 살펴본 공간활용Ⅳ. 맺음말Ⅰ. 들어가기 -한국인과 쌀문화우리 겨레는 쌀로 밥을 지어먹는 입식 민족이다. 안악 3호 고분의 벽화를 보면 오늘날과 같은 금속제 솥이 보급되기 전에는 시루에 쪄서 먹었음을 알 수 있다. 밥 가운데 가장 선호도가 높은 밥이 쌀밥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쌀밥을 백옥밥이라고 한다. 이러한 쌀밥이 우리 국민들에게는 항상 부족한 상태였다.역대 왕조들은 벼 재배에 온갖 힘을 기울여 벼재배 정책이 바로 정치였다. 삼국시대에는 많은 저수지를 만들었는데, 전라북도 김제의 벽골제는 당시의 양상을 말해주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계곡까지 논으로 개발하였고, 조선시대에는 많은 농서의 보급과 농민 스스로 연구를 거듭하였고 특히 냉해, 병충해, 한해, 태풍 등에 잘 견디면서 수확이 많고 맛이 좋은 벼품종의 개발에 힘을 기울였고 일본의 좋은 품종의 벼를 도입하기도 하였다.그러나 인간의 힘에는 한도가 있었으므로 벼의 생산이 순조롭기를 신에게 빌기도 하였고 햅쌀이 나면 신과 조상에게 감사하는 뜻으로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또 논에 물이 마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밥을 먹고 빈 그릇에 물을 붓기도 하는 풍습이 있기도 하다. 이와같이 귀중히 여겼고 생산된 쌀을 몹시 아꼈다. 그래도 쌀은 귀해서 평소에는 잡곡밥을 상식하고 생일날이나 잔치날이나 되어야 겨우 쌀밥을 먹을 수 있었다.이때에 쌀밥을 주식으로 삼은 것은 상류층이었을 뿐 서민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고려가요인 「상저가」에는 '들커덩 방아나 찧어 게궂은 잡곡밥이라도 부모가 잡수시고 남으면 내가 먹겠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이 시대에도 쌀이 서민의 주식이 되지는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까지도 쌀밥은‘옥밥’이었고 명절이나 제사 생일에나 맛볼 수 있는려놓고 초하루와 보름에 절을 하면서, 풍년 들기와 집안에 병과 불행이 없기를 빌었다.또한 쌀로 만든 최고의 음식 '술'이었다. 물론 떡이나 한과도 쌀로 만든 음식이지만, 술의 경우 그 풍미와 아취는 비견할 바가 아니다. 전통주는 제조 방법에 따라 양조 곡주와 증류수 등으로 나누지만 그 제조 방법은 대개가 비슷하다. 통밀을 물에 반죽해 발효시킨 누룩에 쌀, 찹쌀 등의 곡물을 물과 함께 버무린 다음 옹기나 술독에 넣어 발효시키면 노란 빛의 맑은 물이 떠오르는데, 이것이 흔히 약주라 불리는 청주(명천두견주, 교동법주, 백하주 등)다. 약주를 받아 내고 남은 술덧에 다시 물을 섞고 밥을 으깨 체로 걸러 낸 것이 막걸리, 또 술덧을 솥에 넣고 끓이면 낮은 온도에서 끊는 알코올이 기화돼 이슬로 맺히는데, 이를 받아낸 것이 소주(안동소주, 문배주, 이강주 등)다.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우리나라의 '쌀문화'는 가장 오랫동안 사람들의 소중한 먹거리 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만들어 온 중요한 먹거리였다. 산업화사회에 와서는 그 의미가 점차 퇴색되어가고 있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과 함께 그 의미를 찾고자 하는 작업이 이뤄지고 있어 천만 다행이다.Ⅱ. 주거공간의 개념과 유형의 변화1. 주거공간의 개념무엇보다도 우리민족은 수 천년 동안 쌀을 중심에 둔 농경문화를 형성해 왔기 때문에 '쌀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주거공간'에 대해 살펴봐야 할 것이다. 각각의 생성원리와 구성 및 쓰임새는 주먹구구식으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생활체계를 반영하는 것이기에 그 중요성이 크다.우선 주거는 인간에게 안정과 평화 속에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살다'라는 포괄적인 개념이다. 주거공간은 삶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인 가정생활을 담는 그릇으로 인간이 일정한 곳에 정주하여 생활을 해 나갈 수 있도록 마련된 거처이다. 외계로부터 인간을 보호하는 외적 울타리일 뿐만 아니라 생리적, 정신적 피로를 풀고 생활에 필요한 에너지를 재충전하는 활동의 원천이다. 주거공간은 일정한 장소를 점유하여 인간이 쾌적하게 머물 수 실학이 대두·번성하면서 이러한 사상을 토대로 토지나 행정기구의 개혁을 꾀했다. 특히 갑오농민전쟁과 갑오개혁(1894)은 조선시대의 사회제도에 커다란 개혁을 가져와 조선 초기부터 적용되었던 가사규제가 사실상 철폐되었다. 따라서 부(富)로서만 규모를 확장할 수 있게 되고, 중인주택에도 솟을대문이 건축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주택건축에서의 변화는 일찍이 개화에 눈을 돌렸던 중인계급의 주택에서 많이 나타났다. 1900년대의 주택건축은 외래양식의 전파, 시멘트·유리·벽돌·콘크리트 등 새로운 재료의 보급, 스팀 난방의 도입 등에 의해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었다. 즉 1883년 인천이 개항되면서 일본 거류민의 수적 증가와 서양인의 거주로 일본식과 양식 주택들이 건축되었다. 1920년대 이후의 일반서민주택은 가구(架構)의 규모가 3량(樑)에서 5량으로 그 수가 증가한다. 그러나 이는 실제 간살이 넓어진 것이 아니라 양반집에 대한 동경으로 같은 간살에 그 격식만을 빌려온 것으로서 서민주택에 금지되었던 부연을 처마에 달고, 납도리를 기둥 위에 얹을 때 나비장을 쓰던 것을 못으로 대신하기도 했다. 1930년대에는 재래의 소로 대신에 이를 반쪽으로 갈라 쪽소로 또는 딱지소로라 하여 안팎으로 갈라 붙이다가 바깥쪽만 붙여 치장하게 되었다. 굴도리는 '집장사집'에서 널리 사용되었고 때로 반쪽으로 갈라 외양으로만 온통 굴도리인 것처럼 보이도록 하기도 했다. 처마 길이가 짧아짐으로써 처마에 홈통을 달기 시작했으며, 들어열개의 분합도 미서기로 고쳤다. 기단의 높이가 높아지면서 기단 마구리에 금지되었던 잘 다듬은 장대석들이 사용되기 시작했고, 도료를 사용함으로써 목재에는 바니시를 칠하고 홈통에는 페인트를 칠하게 되었다. 1940년대에는 처마가 더 짧아지면서 함석으로 차양을 만들어 달고, 고급주택에서는 기단에 널보석이라 하여 재래의 디딤돌 대신에 기단을 따라 길게 디딤돌을 만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특기할 것은 1934년 6월 20일 공포된 '조선시가지계획령'에 의하여 신시가지를 조성한 것으로뒤바꿔 놓기에 이른다.뿐만 아니라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전통적 관념과 새로운 근대사조의 마찰이 끊임없이 진행되는 가운데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엉거주춤 변질되어 있는 생활의 한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오랫동안 전통적인 유교사상이 지배하여온 공간분리개념-內와 外, 主와 從의 엄격한 구별이 없어지고 서구의 평등사상, 합리주의 일변도의 사상이 우리 생활 속으로 깊이 들어옴에 따라 나타난 주거공간 질서의 새로운 변화라고 하겠다.생활에 여유가 있는 사람일수록 방의 수와 크기에 지나칠 만큼 신경을 쓰는데, 가족구성원의 개성이나 생활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주택은 그것을 소유하는 가족의 생활을 그대로 표현함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가시적이고 외형적인 면에 더 치중하고 있다. 그래서 지나치게 많은 가구와 도구가 필요하게 되고 주택전체의 공간의 균형과 동선에도 무리가 따른다.생활의 질이 향상됨에 따라 자녀들의 침실 역시 상당히 넓어져서 책상 외에도 침대, 옷장을 비롯한 수납가구, 심지어 간단한 응접세트까지 마련하려고 한다. 가정의 단란함은 구성원 스스로 다양한 접촉으로 끊임없는 상호 관심을 가져야 할 터임에도 불구하고 부모와 자녀와의 이러한 공간분리는 공동체적 중심으로서의 주택의 기능을 불가능하게 만들 우려가 있다.'ㄱ'자 모양의 전통적인 주택평면에서 마당을 중심으로 유기적으로 연결된 주택의 각 공간으로 가족간의 교감이 이루어지던 과거의 우리의 정황을 짚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서구의 물질위주의 합리적 사상 일변도에 서 고유한 인간관계의 개념을 회복하려는 시도가 현대 주택설계에서 무엇보다도 시급한 때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각성이야말로 우리의 특질을 살려 세계성을 확보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Ⅲ. 우리나라 가옥의 공간구조 및 역할1. 전통가옥의 구조면에서 살펴본 공간활용우리나라의 전통가옥은 농경문화 속에서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삶에 중심을 둔 주거공간이다. 따라서 집의 구조에서부터 만드는 재료에 이르기까지 주변에현은 이러한 것을 잘 보여주는 말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여성의 사회활동이 늘어나면서 전통적인 고정관념들이 상당부분 해체되어 남녀의 역할 구분이 뚜렷하지 않다.우리 옛말에 '한솥밥을 먹는다'는 말에서 보여지듯이 취사를 공동으로 하는 단위는 가족의 중요한 조건으로 인식된다. 취사의 단위가 곧 생활의 단위로 인식되는 것이다. 부엌살림을 주관하는 주부는 취사작업을 통하여 생활단위로서의 가족을 부양하게 된다. 따라서 하나의 부엌은 하나의 생활단위임을 의미하게 된다. 한 가족의 주부가 하나이듯이 한 주택내에서 하나의 부엌을 갖는다는 것은 별로 이상할 것이 없다.그러나 두 세대 이상으로 이뤄진 직계가족하에서 주부권을 갖는 어머니와 장차 그것을 이어받을 며느리는 부엌을 공유하기 때문에 때로는 고부간의 갈등을 겪게 된다.불을 지펴서 각종 음식을 조리하는 공간인 부엌은 주로 여성들의 공간인 안채에 안방과 바로 인접하여 위치하였으나 일부 대가들의 집에는 반빗간이라하여 별채로 독립시키기도 하였다. 전통한옥의 부엌은 작업동선을 고려해 볼 때 매우 불편한 구조를 지녔다. 부엌 바닥을 일반적으로 방바닥보다 75∼90㎝ 정도 낮게하여 아궁이에서 땐 불길을 방고래로 빨아들이도록 되어 있는 '온돌구조' 때문이다.부엌에는 2∼4개의 아궁이가 있었으며, 불을 때는 아궁이위 부뚜막에는 솥을 걸어두었다. 아궁이는 안방과 면한 벽쪽에 설치하여 음식물을 조리하면서 동시에 방을 데우도록 하였다. 부엌은 주택의 규모에 따라 안방과 건넌방에 각각 위치하는데 안방과 접한 부엌이 주된 조리공간이었으며, 건너방쪽은 물을 데우는데 쓰이는 등 보조적인 공간으로 이용되었다.부엌에는 조리용구와 식기 일습을 비치하는데, 조리용구로는 솥(무쇠솥 3∼5개, 놋쇠옹, 곱돌솥, 알루미늄솥 등)·쟁개비·뚝배기·오지냄비·무쇠화로와 풍로·번철·석쇠·국자·주걱·바가지·이남박·조리·물동이·똬리·옹배기·행주·도마·칼 등을 비치하였고 그 밖에 찬장·목판·항아리·찬합 등도 부업 세간이라 할 수 있다.옛날에는 이사를 하려면 먼저 서두르는 일이
    인문/어학| 2003.04.26| 23페이지| 1,000원| 조회(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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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인류학] 푸코의 권력과 지식 평가B괜찮아요
    Michel Foucault의 권력과 지식의 문제1. 들어가기인간의 삶은 항상 사회구조 안에서 개인이 속해있는(그것이 동일자이든 아니면 타자이든) 계층(혹은 계급)에서 살아간다(권력이 만들어 낸 이성의 범주이든 비이성의 범주이든). 만약 지식이 권력을 생성하고 그 권력이 주체(신체)를 억압하게 된다면 자신이 습득한 개인적인 지식 역시 그러한 개인적 주체를 억압하거나 강제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지식(앎)을 얻어야만 하고, 그렇게 얻은 지식을 가지고 각자의 생활체계 내부에서 외부를 경계하고 구분지어야만 된다. 그렇다면 한 시대의 지식인이 얘기하는 권력과 지식의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자.미셀 푸코) Michel Foucault(1925∼1984) : 프랑스 철학자. 구조주의를 대표하는 사람의 하나. 파리대학 반센 분교 철학교수를 거쳐 1970년 이래 콜레지 드 프랑스 교수를 지냈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후 정신의학에 흥미를 가지고 그 이론과 임상을 연구하는 한편, 정신의학의 역사를 연구 『광기의 역사』(1961), 『임상의학의 탄생』(1963) 등을 저작했다. 그 과정에 있어서 각 시대의 앎의 기저에는 무의식적 문화의 체계가 있다고 하는 사상에 도달하였다. 거기에 바탕을 두고 『말과 사물』(1966), 『지식의 고고학』(1969)에서 무의식적인 심적구조와 사회구조, 그리고 언어구조가 일체를 결정하며 주체로서의 인간이라든가 자아라고 하는 관념은 허망이라고 하는 반인간주의적 사상을 전개하였는데, 이것이 구조주의의 유행이 되었다.에게 진리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담론에 의해 규정되는 하나의 지식일 뿐이다. 또한 지식은 구성되는 것이며, 무언가를 포함시키고 무언가를 배제하는 것이라면 필연적으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을 가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바로 권력이다. 권력이란 권력의 소유자같은 실체가 아니라 관계의 개념이며, 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것이다. 따라서 국가권력이나 정치권력만이 아니라 사적인 영역에서 은밀히 작용하는 정체불명의 힘도 권력이다.지식과 권력이 가장 세속적으로 결합하는 곳이 바로 법이다. 법지식을 가지고 권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법집행이라는 권력의 행사는 바로 법지식 자체가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권력은 소유자나 속성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둘러싼 관계, 효과가 중요하다. 그래서 푸코는 이것을 계보학적으로 추적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식의 고고학과 권력의 계보학은 서로 보완하는 개념이다.) 푸코는 『담론의 질서』를 시작으로 새로운 연구방법인 계보학을 끌어 들이는데, 결국 이것은 고고학과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는데 유용한 방법론으로 사용된다.푸코의 관심은 고전주의시대) 푸코의 시대적 구분에서 고전주의시대는 17∼18세기를 일컬으며, 19세기 이후를 근대라고 한다.로부터 현대까지, 지식의 내용이 아니라 지식을 둘러싼 관계들에 집착해 있다. 즉, 지식이 어떻게 구성되는가에 있다. 지식이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무엇이 또는 누가 그러한 지식을 규정하고 그 지식을 이용해 권력을 생성하는가의 문제이다. 푸코는 서구의 합리주의와 이성주의에 대해 인식론적 비판을 시도한다. 그는 정상과 비정상, 동일자와 타자, 내부와 외부 사이에 의해 만들어져 있는 경계를 파괴하고자 한다. 그가 즐겨 사용하는 예에 의하면 소위 정상인과 그들에 의해 배제된 광인들 사이에 놓여진 구획선의 허구를 고발하고자 하는 것이다.광기는 이성과 언어를 부정하는 것을 가르킨다. 그렇다면 이성이 이성이 아닌 것을 정의하는 것은, 이성의 반대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동일자와 타자와의 관계라고 부른다. 동일자의 역사 속에서 타자의 역사를 서술할 수가 없다. 타자의 역사는 엄연히 존재해 왔으며, 지금도 존재한다. 동일자의 역사는 이성이 전제가 되었지만, 타자의 역사는 오히려 설명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푸코의 주체의 문제를 최후의 연구대상을 삼았지만 결국 완성을 이루지 못했다.2. 본 론1) 담론의 질서) 이 책은 푸코가 콜레주 드 프랑스에 취임하면서 행한 연설문이다.지식이 구성되는 것이라면, 구성요소가 있을 것이다. 지식의 구성요소를 상식적으로 보면 그것은 실재하는 사실, 푸코의 용어에 따르면 사물이다. 생산과 분배는 경제학의 사물이며, 세포와 유전자는 생물학의 사물이다. 그러나 사물만으로 지식을 구성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사물은 지식의 내용일 뿐이다. 내용은 표현을 가져야 하는데, 지식의 표현 그것이 바로 담론이다. 생산과 분배라는 사물을 경제학적 담론으로 구성하는 것이 경제학 지식이며, 세포와 유전자라는 사물을 생물학적으로 구성하는 것이 생물학 지식이다. 이렇게 지식의 구성요소는 말과 사물 두 가지이다.그리고 광기에 대한 지식은 곧바로 광기에 대한 담론으로 구성되는데, 이 담론은 시대마다 달라진다. 각 시대를 거치면서 지식의 담론은 발전하는 게 아니라 단지 달라질 뿐이다. 그래서 푸코는 지식에 대한 연구를 역사적으로 진행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역사란 목적을 가정하고 있으며, 이 목적에 따라 역사가 연속적으로 발전한다고 가정한다.또한 지식이 사물로 구성된다면 문제가 없지만 담론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생겨나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침묵의 문제이다. 지식은 구성되는 것으로 필연적으로 그 내용에서 빠져버리는 것들이 있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빠져버리는 것들 역시 담론에 의해 규정된다. 푸코에 따르면 광기는 17세기라는 역사적 특정시대에 역사 빠깥으로 내돌려진다. 그 이유는 17세기에 바로 정상(이성, 동일자)이라는 담론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정상이 있는 한 비정상(비이성, 타자)는 배제요소가 된다.『담론의 질서』에서 '배제'의 3가지 조직을 말하고 있다. 첫째는 대상에 대한 금지나 타부에 의한 배제로서 특히 성(sex)이나 정치의 현장에 나타난다. 둘째는 분리에 의한 거부이다. 정산적 정신과 광기, 이성과 비이성의 구분에 의해 광기와 비이성을 배제시켜 미친 사람의 말을 담론의 세계에서 추방시킨다. 셋째는 진위의 대립에 기초한 배제이다. 자의적인 진위의 판정에 의해 '거짓'으로 판정된 것은 일방적으로 언어 시스템에서 추방된다. 진리에의 의지에 의거한 이것이 푸코에 의하면 가장 기본적인 배제이다.(p. 10∼17 참조) 또한 「배제의 내부적인 과정들」에서는 주석과 저자와 교과서의 원리를 내세우면서 멘델이 유전법칙을 주장했을 때, 그게 이단으로 취급받았던 것은 '과목화된 오류') 과목이란 담론의 생산에 대한 통제의 원리이다. 그것은 규칙들의 항구적인 재활성화의 형태를 지니는 동일성의 놀이에 의해 담론에 그 한계들을 부여한다.(같은 책 p. 26)로 형성된 생물학적인 담론의 규칙에 의한 것이라고 했다.(p. 25)그리고 담론들의 통제를 가능하게 하는 과정들의 세 번째 그룹이 존재하는데, 이 그룹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이 담지하는 권력들을 지배하거나 그들의 출현에 관련되는 우연들을 쫓아 버리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들의 작동 조건들을 규정하는 것, 그들을 취하는 개인들에게 일련의 규칙들을 부과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아무나 그들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게 바로 주체들의 희박화이다.(p. 27)담론의 규칙적인 형성은, 어떤 조건들 하에서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 통제의 과정들을 통합할 수 있다. 그래서 비판적 과제는, 통제의 심급들을 문제 삼음으로써 동시에 그들을 형성해주는 담론적 규칙성들을 분석해야 한다는 것이다.(p. 44) 따라서 비판적 탐구들과 계보학적 탐구들은 교환가능하며, 서로에게 자문을 구할 수 있고 또 서로 상보적으로 기능할 수 있다. 분석의 비판적인 측면은 담론의 둘러쌈의 체계들에 관련된다.결과적으로 푸코는 타자들에 관한 담론, 즉 광인을 비롯하여 이 사회에서 타자들로 분류되는 사람들을 다루는 지식들-광인들을 다루는 정신병리학, 정신질환자들을 다루는 정신의학, 위험 인물들을 다루는 범죄학, 사회에 해로운 존재들을 다루는 사회학, 용공분자들을 다루는 정책학, 어린이들의 통제를 다루는 교육학 등-을 비판적 관점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이다. 즉, 푸코의 고고학과 계보학은 타자들에 대한 지식들을 다루는 담론들의 밑바탕에서 작동하고 있는 배제의 역할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p. 62)2) 푸코의 방법론고고학이란 이름으로 대변되는 첫 번째 시기에는, 어떻게 해서 정상적인 것에서 배제되었나를 연구한다. 그는 고대 중국의 백과사전의 동물 분류법) 『담론의 질서』, p. 57을 예로 들면서, 이 분류법은 현대문명의 관점에서 보면 부당한 것이지만 그 당시에는 사회적으로 당연한 것으로 인정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또한 특정한 방식으로 사물들을 정돈하도록 해 주는 무의식적인 기초인 에피스테메(epistem'e:인식틀)를 통해 서양의 지성사를 고고학적으로 접근한다. 현대의 에피스테메로 벼면 고대 중국의 에피스테메의 지식은 비정상으로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푸코는 한 사회에서 "이것이 지식이다"라고 주장할 수 있는 기준인 에피스테메는 무의식적이고 은폐적인 것이라고 말한다.두 번째 시기는 『담론의 질서』에서 시작하여 『감시와 처벌』, 『성의 역사1』에 이르는 시기로 계보학) 계보학이란 모든 것들에서 가치와 권력의지를 찾아내는 방법이다. 즉, 권력과 지식의 연계성의 계보를 밝하는 작업이다.이라는 이름으로 요약되는 시기이다. 그는 형벌과 감옥의 역사를 통해, 또는 성과 성욕에 관한 담론과 억압 장치를 통해 그것들 이면에서 작동하고 있는 권력을 드러내고 그 권력의 효과를 분석하는 작업을 한다. 정상과 비정상이라고 여겨지는 것 사이에 놓여있는 경계선은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들어내고 유지하는 힘과 권력
    인문/어학| 2002.09.24| 5페이지| 2,000원| 조회(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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