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전법의 실시와 변천Ⅰ 머리말Ⅱ 고려 후기 농장의 발달과 사전개혁ⅰ 농장의 발달과 그 구조ⅱ 토지의 탈점과 인민의 몰락ⅲ 녹과전과 전민변정사업ⅳ 전제개혁의 논의와 사전개혁의 이념Ⅲ 과전법의 성립과 그 내용ⅰ 과전법의 성립 과정ⅱ 과전법의 내용과 그 운용Ⅳ 과전법의 붕괴와 지주제의 발달ⅰ 과전법의 붕괴ⅱ 직전제의 성립과 직전세 관수관급제ⅲ 직전법의 쇠퇴와 소멸Ⅴ 맺음말Ⅰ 머리말전통시대에 있어 토지제도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전통시대에서 경제력의 기반은 언제나 토지였기 때문이다. 공부를 하다 보면 사회경제사는 재미있기는 하지만 변화 양상의 복합성 때문에 언제나 골머리를 앓곤 한다.발표의 주제가 되는 麗末鮮初의 시대는 매우 역동적인 시기였다고 생각한다. 특히 정도전을 비롯한 개혁파 사류의 주장을 살펴보다보면 줄곧 감탄하곤 한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부분이고, 과전법에 대해서 확실하게 이해하고 싶어, 발표를 준비했지만 조금은 부족한 것 같아 아쉬움과 죄송함이 따른다.우선 이 글과 발표의 내용은 기본적으로 外 金泰永의 논문과 텍스트를 기본으로 준비하였음을 밝힌다.발표를 준비하면서 과전법의 실시와 변천이라는 주제를 포괄적으로 다루기에는 글의 분량과 발표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함을 느끼게 되었다. 따라서 본고와 발표의 내용은 특히 고려후기와 조선 초의 토지지배관계의 변천, 그리고 그것이 가지는 역사성에 대해 포커스를 맞추었다. 그것이 봉건적 토지사유론에 입각하여 있음은 물론이다.Ⅱ 고려 후기 농장의 발달과 사전개혁ⅰ 농장의 발달과 그 구조고려 후기의 사회경제상을 가장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용어는 농장(農莊)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농장은 이 시기의 특징적인 현상이었다. 중세사회에서의 경제력의 기반은 언제나 토지였기 때문에 대토지사유 현상은 중세 시기 어느 때나 있을 수 있는 토지 지배 방식이다. 고려 후기 대토지 소유를 농장이라고 특징짓는 이유는 그것이 ‘중세적 토지지배관계의 기축인 전주-전객제를 바탕으로 하여 형성되고 전개’된데 있다. 따라서 농장의 특토지탈점자를 찾아서 징벌하였다. 그 과정에서 기황후의 일족인 기삼만(奇三萬)이 옥사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정치관이 정동행성 이문소에 투옥됨으로써 정치도감의 활동은 두 달만에 사실상 중단되었다.계속되는 전민변정사업에도 불구하고 농장으로 인한 사회경제적 모순은 극복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농장주인 권세가들의 저항, 추진세력의 미약함, 원의 간섭과 원간섭기 아래서의 비정상적인 정치권력구조 그리고 사태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전민세력의 추진세력은 대체로 국왕과 신진관료였다. 국왕은 권세가의 과도한 토지탈점을 견제하고 국용을 확보하기 위하여, 신진 관료들은 당시 사회가 처한 사회경제적 모순을 해결하려는 입지에서 개혁을 추진하였다. 아직 실권을 장악하지 못한 그들은 왕권의 회복을 통해 자신의 생활안정과 민생의 안착을 기도하였다. 개혁의 열쇠를 쥐고 있는 주체는 당시의 정치권력구조에서 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의 추진의지와 목적에는 문제가 많았다. 왕은 자기의 정치세력을 강화하고 적대적인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변정을 이용하였다. 변정은 자신의 정치세력을 약화시키지 않는 범위 안으로 한정되었고, 왕의 측근세력은 철저히 비호되었다. 결국 전민변정은 정치세력간 대결양상을 띄었고, 그 과정에서 왕의 교체도 일어났다.전민변정은 농장발달을 현상적으로 파악한 데서 취해진 소극적인 개선책이라 할 수 있다. “농장은 고려의 수조권분급제도가 가진 모순으로 인해 생성”된 것으로 즉, 수조권이 직역을 매개로 세습되고 정치적 혼란기를 틈타 이것이 비정상적으로 비대화하면서 농민의 소유권을 잠식하여 성립된 것이다. 농장 발생의 원인은 소유권과 수조권의 갈등에 있었고, 그 전개방향은 수조권의 확장에 따른 소유권 침해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이는 결국 토지지배관계가 소유권으로 귀일되고 있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었으며, 그 이면에는 농업생산력의 발달이라는 현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 대책도 그러한 측면에서 강구해야했으나, 개혁세력은 당대의 사회경제적 모순을 문학 성석린(成石璘), 경상도는 전평양윤 장하(張夏), 전라도는 전밀직부사 최유경(崔有慶), 교주강릉도는 전밀직상의 김사형(金士衡), 서해도는 밀직제학 조운흘(趙云?)로서 모두 대간의 추천을 받아 임용하였는데, 각기 부사와 판관을 동원하여 토지를 고쳐 양전토록 하였다.5-2에서 보이는 것처럼 양전을 단행하기 전에 각 도의 안렴사를 보다 품계가 높고 권한이 강력한 도관찰출척사로 바꾸었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각 도 내의 군ㆍ관ㆍ민 모두를 총체적으로 지배하는 대권을 가진 상급 행정기관의 새로운 설치에 해당하는 것이다. 각 도의 장관을 파격적으로 격상시켜 전에 없던 큰 권한을 부여하는 지방 행정제도의 개편이 사전개혁을 위한 양전에 즈음하여 단행되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곧 어떤 세력가의 조업전이라든가 사전에 대해서도 무차별한 양전을 결행하고 무차별한 개혁을 단행하기 위한 대권의 위임과 직접 관련된 제도의 개편이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이 때 착수한 양전은 창왕 2년(1389)에 일단 완료되었는데, 그것이 장차 과전법시행의 바탕이 되는 기사양전이었다. 그런데 양전 사업은 단순히 토지 결부수를 조사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었다. 고려 후기 이후로 결부제란 것은 토지의 비옥도를 기준으로 상ㆍ중ㆍ하의 3등의 전품을 책정, 각 등급의 전품에 따라 결부의 실적(實積)을 다르게 책정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전지의 전품이 다르게 책정되면 그 전지의 결부 실적에 변동이 일어나고, 그러한 변동의 연쇄에 따라 종래까지 어느 자정(字丁) 단위에 묶여져 파악되어 오던 그 전지의 소속 자정에 변동이 일어나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 같이 전지의 소속 자정에 변동이 초래되기 마련이므로 가령 어느 전지일지라도 그 소유권의 보전을 위해서나 혹은 국가 수세권의 확보를 위해서도 양전에서 소유권자를 확인하고 대조하는 일은 불가피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기사 양전은 소유관계를 비롯한 토지의 지배관계에서 크나큰 변동을 야기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497,342결과 황원전 166,643결을 얻었는데, 결수를 헤아려 작정(作丁)하되 丁에는 각기 자호(字號)를 붙여서 전적(田籍)에 기재한다.사료 10에서 보이는 결과대로 기사양전의 결과로 확보된 토지는 실전 471,342결과 황원전 175,030결이었는데, 그것이 과전법을 운용할 기본 결총(結總)이었다. 실전은 현재 경작중인 토지를 가르키며, 황원전이란 황한(荒閑)ㆍ원진(遠陳)의 토지로서 사회의 안정에 따라 곧 기경이 예상되는 토지를 가리킨다.그리고 기사양전의 결과 확보한 전국 토지의 결총을 한꺼번에 말하지 않고 그것을 각기 경기와 6도의 것으로 구분하여 논한 이유는 어디에 있었는가. 그것은 경기의 토지를 여타 지역의 토지와 다소 다른 용도로 편성하려는 의도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즉, 고려의 사전이 중앙의 통제가 어려운 외방에 설치되어 결국 국가사회의 파국을 초래하기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감계하여 이제 사전을 경기지역에 한정하여 절급하는 원칙을 실현한다는 조처에 따른 것으로 이해된다.또한 여기에서 새로운 양전을 통해 확보한 전결의 전적을 작성하는 일에도 변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토지의 결부수를 헤아려 일정 단위로 작정하되 거기에다 천자문의 자호(字號)를 붙여 순차대로 전적을 작성한다는 것은 이미 조준의 1차 상소에서 세워 둔 원칙이었다. 다만 과전법체제하에서 전주의 성명을 기록하지 않는 원칙이 과전법에 와서 실현되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수조권자를 표시하는 전주의 성명은 기재하지 않았을지 몰라도, 현실상 소경전(所耕田)의 소유자 성명을 기재하는 전대 이래의 관행은 그대로 계승되지 않았을까 한다.조준의 1차 상소에서는 작정의 단위를 20결ㆍ15결ㆍ10결 단위로 조정한다고 제시하였지만 과전법체제에 와서는 그것에 10결 혹은 5결 단위로 규정되었으며, 뒤이어 5결단위로 정착되고, 과전법체제가 사실상 무너지고 난 후에도 작정방식은 그대로 준행되어 갔다.다음으로 과전법에서 규정한 각 과의 과전절급 규모와 내용을 확인해보겠다. 여기에서는 개인 해당 전결을 분할해낸다. 이 때 비록 절수지는 자손이 많다 하더라도 5결 작정을 파정하지 못한다. 이것은 절수지를 분할하여 전수(傳受)할 때에는 반드시 당해 기관을 통해 응당한 수속을 거치도록 규정함으로써 수조권의 사사로운 분할과 그 이동에 따른 은루(隱漏)따위를 방지하고자 한 조처였다. 그리고 그 분할과 이동에 있어서 파정(破丁)을 불허한 것은 자정의 파쇄(破碎)로 인한 토지 파악의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고 또한 한 자정안의 다수 지번(地番)들이 분할됨에 따라 일어나는 은루 따위를 막기 위한 조처였다.③수조지를 타인에게 증여하거나, 휼양전을 반환하게 되는 경우 부전(夫田)의 반을 수신전으로 수식하는 경우에도 역시 원래의 문권에서 해당 전결을 할감해 낸 다음 원권은 그 원주에게 돌려주어야 한다.④자기의 절수지 전부를 타인에게 증여할 경우에는 해당기관에 보고하고 원래의 전권(田券)도 반환해야 한다. 이 규정은 수조지의 전수(田受)를 해당기관의 수속을 거치게 함으로써 탈점, 은닉을 방지하고자 한 것이다.그리고 이 규정을 보면 일단 절급된 수조지는 그 분할 수식(收食)과 증여가 가능하도록 되어있다는 사실을 확인 가능하다. 단지 고려 후기의 사전이 사사로이 전수됨에 따라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는 사실을 거울삼아, 과전법에서는 그것이 반드시 국가기관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는 사실을 거울삼아, 과전법에서는 그것을 반드시 국가기관의 정당한 수속을 거쳐 시행하도록 법제로 규정을 두기는 하였다. 그러나 수조권의 분할과 증여가 가능하였다는 것은 이 시기 수조권에 입각한 토지지배가 아직도 강인한 힘으로 마치 물권(物權)처럼 행사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만큼 토지지배관계에서 지배층의 계급적 속성은 그만큼 강인했던 것이다.사료 161. 무른 과(科)에 충족하도록 수전한 자가 부모가 죽은 후 자기의 전지로써 부모의 전지와 바꾸고자 하는 경우는 청허(聽許)한다.2.범죄자 및 후손이 없는 자의 공문을 그 가인(家人)이 은닉하고 관에 환납치 않는 경우에는 그 죄를 통렬하게 다았다.
유럽의 공황 대응책에 대해 논하시오.1920대 후반에는 세계대전의 상처도 아물고, 복구와 부흥이 결실하여 유럽을 비롯하여 세계 각국이 안정을 되찾고, 국제협조가 고조되어 평화가 정착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1929년 10월 미국에서 발생한 경제공황은 곧 전 세계에 파급되어 전 세계적인 공황으로 진전되었다. 1929년부터 1932년 사이에 세계무역은 60% 이상이 감소하고, 세계의 물가는 3분의 1로 급감하였으며, 전세계의 실업자수는 3500만에서 5000만으로 추산되었다.이에 따라 유럽각국들은 이에 대해 대응책을 내놓으며 경제공황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시도했고, 여기에서는 크게 독일, 영국, 프랑스의 사례를 통해 유럽의 대응을 알아보려고 한다.첫 번째는 독일의 사례이다. 독일은 어느 나라보다도 공황의 타격을 가장 심하게 받았다. 독일은 미국의 자본을 도입하여 1924년부터 기적이라 할 정도로 급속한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미국자본은 대부분 단기 신용차관이었기 때문에 미국에서 일단 공황이 일어나자 미국인들은 서둘러 자본을 회수해갔다. 따라서 그 경제적 타격은 곧 공황으로 이어졌다. 독일에서 가장 큰 섬유 콘체르인 북독일 양모회사가 도산하고, 가장 큰 은행의 하나인 다나트 은행도 영업을 중지하고 말았다. 전후의 비참함을 견디어 내고 이제 막 안정을 되찾으려던 중소기업가, 봉급자, 이자생활자 등을 포함한 중산계급과 중소농민층이 공황의 여파로 다시 안정을 상실하고, 생활근거 그 자체에 위협을 받게 되었다.공황이 직접적으로 독일과 국제경제에 미친 영향 중 하나는 배상문제였다. 천문학적인 방대한 배상금문제로 독일은 큰 고역을 치르고 있었는데 공황 때문에 독일 경제가 파탄되자 배상문제가 심각한 정치 문제로 등장하였다. 독일에 대한 배상금 문제는 처음부터 난항을 거듭하였고 이 문제를 완화하기 위해 미국이 주도하여 도즈 안과 영 안을 차례로 만들어 배상금을 대폭 인하하였지만 대공황이 밀어 닥치는 바람에 그것도 소용이 없었다. 독일 국민의 맹렬한 방대에 부딪혀 뮐러 내각이 와해되고, 1932년 나치당의 히틀러가 집권하자 배상금 자체를 부당한 것이라고 선언하고 나서기 때문에 배상문제는 완전히 끝나고 말았다.이 때부터 바이마르 공화국은 사실상 막을 내리고 곧 나치 독재국가가 들어서 재무장 계획을 세우고 계획경제를 강력히 추진하였다.히틀러는 실업자 문제를 비롯한 공황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1933년 ‘경제 4개년 계획’을 세워 경제를 철저히 통제하였다. 노동임금과 물가를 규제하고, 증세정책을 단행하고, 대대적인 공공사업과 재군비를 위해 중공업을 진흥시키고, 식량의 자급자족을 위해 국가식량단을 조직하였고, 농업의 기계화를 촉진하고, 은행과 무역의 수·출입을 통제하고, 은행·보험 회사 각종 기업으로부터 현금을 강요하였다. 이리하여 중공업은 진흥되었고, 식량은 90% 정도 자급하게 되었으며 경제부흥도 상당히 이룩되었다. 재무장 계획에 따른 군수공업의 진전으로 실업자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었지만 국민복지 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국가의 영광’이란 이슈를 전면에 내걸고 무력으로 국력확장을 획책하고 나섰기 때문에 전쟁위기가 조성되었다. 대공황은 바이마르 공화국을 붕괴시켰고, 히틀러의 집권을 가능케 하였으며, 나치 독재국가는 처참한 제2차 세계대전의 원인을 제공하였다.두 번째로는 영국의 사례이다. 제 1차 대전 후 영국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기술개혁·산업시설 확충 등을 단행하여 번영하고 있었으나 미국에서 일단 대공황이 일어나자 곧 그 영향을 받았다. 주요 수출품인 면직물·기계류·철·석탄 등의 수출이 격감되고 해운업도 부진하자 재정상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실업자는 전체 노동자의 1/5에 해당되는 3백만에 달했고, 날이 갈수록 산업은 더욱 침체되어 실업자는 계속 쏟아져 나왔다. 결국 실업보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게 되었고 국가재정 부담이 큰 문제가 되어 경제적으로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큰 변혁을 야기시켰다. 노동당내각은 공황 속에서 막대한 적자를 안고, 그들의 정책인 실업수당이나 사회사업비를 삭감할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1931년 물러나고, 보수당과 자유당, 그리고 맥도날드가 영도하는 노동당 우파가 연립내각을 조직하였다.우선 새 내각은 실업수당과 사회사업비를 감축하였고, 또한 파운드화의 안정을 위해 3분의 1 평가절하와 금본위제도의 폐지를 단행하였다.이와 동시에 맥도날드 내각은 공황을 극복하고 경제를 재건하기 위해 정치적·경제적으로 새로운 조치들을 단행하였다. 우선 1931년 웨스트민스터 헌장을 만들어 영연방의 체제를 정비·강화하여 영제국 내의 정치적·경제적 유대를 강화하였다. 다음해 2월에는 수입세법을 제정하여 보호관게 정책을 채택하고 86년 만에 곡물법을 부활시켜 소맥관세를 부과하였다. 7·8월에는 캐나다의 오타와에서 영연방회의를 개최하고 공황타개를 위해 전통적인 자유무역주의를 포기하고 국민주의에 입각한 보호관세주의 정책을 채택하여 블록 경제체제를 확립키로 결정하고 ‘오타와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리하여 영국은 백 년 이상 군림하던 자유주의 경제와 자유무역을 포기하여 ‘자유주의적 영국’이 사라졌다. 이 협정은 ‘제국특혜협정’이라고도 부르는 것인데 영본국의 공산품이 자치령에 수입될 때 관세특혜를 주는 대신 자치령의 지하자원과 농산물이 본국에 수입될 때 역시 관세특혜를 주도록 하였고, 외국상품에 대해서는 수입관세를 무겁게 부과하였다. 영연방 경제 블록 내에서의 가격을 고정시키고 시장을 공유하며 자연 자원 상품시장을 독점하여 자급자족 경제권을 이룩하여 영연방의 파운드 블록 경제권을 형성하여 공황을 극복코자 하였다.오타와 협정에 의한 블록 경제를 통해 1933년 후반부터는 경기가 점차 회복되어 균형예산이 회복되었고 실업자도 3백만이나 되던 것이 1934년에는 150만으로 줄어들었다.실질적으로 이 연립내각을 영도한 것은 보수당이었고, 1935년의 선거에서도 승리하여 볼드윈이 다시 내각을 조직하고 균형예산의 유지에 노력하여 경제적 난관을 극복해 나갔다. 그러나 30년대 후반의 국제정세의 악화에 대비해야 했기 때문에 미해결의 경제 및 사회문제에는 손을 댈 수 없었다.마지막으로는 프랑스의 사례이다. 프랑스는 영국, 독일과는 다른 양상으로 공황이 전개되고 그에 대한 대응 역시 다르게 진행됨을 알 수 있다. 1차 대전 후 프랑스는 프랑화의 가치를 낮게 책정했기 때문에 1920년대 중반에는 프랑화의 가치가 안정되고 국내의 각종 개혁정책도 단행되어 일시적이나마 경제적 번영기를 맞이하였다. 특히 프랑스의 경제는 영국·미국·독일보다는 대규모 산업구조에 의존하고 있지 않았다. 보호관세정책과 1920년대에 비축해 두었던 저장품 때문에 공황이 직접적인 큰 타격을 지연시켜 점진적 경기하락으로 분산시킬 수 있었다. 이와 같이 프랑스의 국민경제는 비교적 균형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공황 초기에는 자급자족이 지속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프랑스는 공황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은 나라라고 할 수 있겠다. 당시만 하더라도 프랑스는 미국·독일·영국에 비하면 고도화된 공업 국가는 아니었고 아직 농업에 비중을 두고 있는 저자본주의국가였다. 프랑스는 관세정책으로 농업을 보호하고, 공업은 농촌사회에 상당한 정도의 판매시장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세계시장과는 큰 교역관계를 맺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미국의 대공황과 뉴딜정책에 대해서 논하시오.1920대 후반에는 세계대전의 상처도 아물고, 복구와 부흥이 결실하여 유럽을 비롯하여 세계 각국이 안정을 되찾고, 국제협조가 고조되어 평화가 정착하는 듯 보였다.특히 미국은 다른 교전국들과 달리 일찍이 기업의 전성시대를 맞이하여 세계경제를 주도하면서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다. 이러한 미국에 아무런 예고 없이 1929년 10월에 갑작스럽게 경제공황이 불어 닥쳤다. 그 첫 징조는 뉴욕의 증권시장에서의 주가의 폭락이었지만 그 전부터 공황의 조짐은 꾸준히 이어져왔으며 그 원인은 다양하게 존재하였다.대공황은 단기적인 경기후퇴라기보다는 장기간에 걸친 자본주의의 생산력 발전과 구조적 변화의 산물이었다. 중심부의 생산력은 1980년대 이래 과학적 연구 에 기초한 기술혁신과 생산과정의 재조직에 힘입어 크게 발전했고, 그래서 1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산업 생산고는 미국의 경우에는 5.9%, 독일에서는 4.3%라는 높은 연평균 성장률을 기록했다. 미국을 비롯한 유럽 주요 국가들은 전쟁의 피해에서 회복된 이후에 성장률이 크게 둔화되기는 했지만 산업생산고는 꾸준히 증가했다. 그러나 상품의 소비는 생산고만큼 빨리 둔화되지 못했다. 각국의 수요와 해외수출은 이 기간을 통해 늘어나던 상품생산량을 따라잡을 수 있을 정도로 확대되지 못했던 것이다.예를 들어 미국 산업을 주도했던 자동차 산업은 자국 내 시장포화라는 문제에 직면하여 산업발전의 속도가 급격히 감소하였고, 수요가 감소함에 따라 자동차 재고량은 늘어만 갔다.그리고 소득분배의 문제 역시 대공황을 불러일으킨 주요 원인이었다.미국사회는 엄청나게 번영하고 있었지만 1920년대 소득인구 5%가 전체 소득의 30%를 차지했다. 이러한 빈부 격차가 개선되지 않음으로써 노동대중의 구매력은 별로 증가하지 않았던 것이다.또한, 민간 건설 분야 역시 중요한 경제성장에 요인이었으나, 이 때에는 당장의 추가적 투자가 필요하지 않은 시점으로 보인다.마지막으로 당시 자본은 대기업(포드. 제너럴 모터, 대형 철강업체)경영인들의 손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이 기업들은 기존에 생산라인을 벗어난 생산적 투자영역에 혁신적이라 할 수 없었다.이러한 이유들로 생산적 투자의 통로가 좁아지게 되자 그들은 주식투기에 돈을 쏟아부었고, 그러한 상황에서 폭락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분명히 알아야 했지만 당시 사람들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전혀 모른 채 즐거워했다.그 결과 발생한 대공황은 순식간에 금융업과 농업, 그리고 공업에 파급되어 공업생산은 50% 이상 감소하고, 최악의 시기의 실업자의 수는 전 노동인구의 1/3에 해당하는 1600만에 달했으며, 농민의 수입은 60%가 줄고, 48개 주의 은행 중 47개의 은행이 문을 닫거나 예금인출을 제한하였다.종전 후 줄곧 정권을 담당해 온 공화당의 후버 대통령은 이러한 공황 대응에 실패하여 물러나고 1933년 민주당의 루스벨트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뉴딜정책으로 알려진 획기적인 공황타개정책을 실시하였다. 뉴딜정책은 단순한 임기응변의 공황타개책을 넘어선 경제정책의 획기적인 전환으로서, 구제(relief)와 부흥(recovery)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개혁(reform)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3R정책으로 불린다.뉴딜 제법안의 작성에 대통령 측근의 경제·법률 분야에서 진보적인 학자와 전문가 그룹, 즉 브레인 트러스트(brain trust)가 기용된 사실은 유명하다. 이렇게 하여 1933년에 입법화된 주요 정책은 다음과 같다.첫째, 긴급은행법 제정하여 재기 가능한 은행에는 대폭적인 대부를 해줌으로써 금융공황으로부터 은행을 구출하여 은행업무의 정상화를 도모하였다.둘째, 금본위제를 폐지하고 관리통화법을 도입하여 통화에 대한 정부의 규제력을 강화하였다.셋째, 농업조정법을 제정하여 농업의 구제를 도모하였다. 이것은 주요 농산물의 생산제한으로 과잉생산을 없애고 농산물가격의 하락을 방지하여 균형가격을 회복하려는 의도에서였다. 또, 농민에게 자금원조를 해줌으로써 농업구제에 대한 시도를 하였다.넷째, 전국 산업부흥법을 제정하였다. 이것은 각 산업부문마다 생산조절과 최저가격을 정하게 하였으며, 거기에는 고임금과 실업자구제계획이 포함되어 있었다.다섯째, 테네시강(江) 유역 개발공사를 설립하였다. 이것은 이 지역의 발전과 치수관개용의 다목적댐을 건설하여 종합적인 지역개발을 실행하려는 것으로서, 정부에 의한 전력 생산사업이라는 점에서도 획기적인 정책이었다.여섯째, 자원보존봉사단·연방임시구제국을 설립하였다. 이것은 정부자금에 의한 실업자와 궁핍자의 구제책으로서 설립한 것으로, 지방자치단체의 구제활동을 연방정부가 원조하려는 시도이기도 하였다.
일본은 왜 백제 부흥에 사활을 걸었나663년 백촌강 전투는 나·당연합군과 백제부흥군·일본·고구려 연합군이 충돌한 대규모의 동아시아 전쟁이었다. 백촌강 전투는 당시 동아시아의 주요 국가가 모두 관여한 사건인 만큼 그 성격에 대한 규명은 동아시아의 역사를 구조적으로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종래 백촌강 전투의 성격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있었다. 하나는 일본이 그 속국 내지 조공국인 백제를 구원하기 위해서 출병했다는 설이다. 이 설은 백제가 일본의 속국 내지는 조공국이었다는 전제 하에 출발한 것으로 주로 일본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은 백촌강 싸움을 당나라가 중심이 된 대제국주의와 일본이 중심이 된 소제국주의가 부딪친 고대 제국주의 전쟁으로 파악하는 것으로 이에 따르면 백제가 이전부터 왜를 大國視하고 있는 한편 일본은 백제를 조공국 즉 속국으로 간주하고 있는 입장에서 왜가 한반도의 백제에 출병하는 것으로 되어있다.다른 하나는 야마토정권의 지배층이 그들의 조국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출병했다는 설이다. 조국해방설은 백제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야마토정권의 수뇌부를 이루고 있었다는 전제 하에서 나온 것으로 주로 한국 측에서 제기된 견해다. 방송에서도 이러한 견해가 소개되고 있었는데, 당시 일본에서 파병을 결정한 천황 샤이메이에 주목하고 있었다. 이에 따르면 당시 일본의 지배층은 백제계 인물이었고, 백촌강 전투는 백제를 살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나 다름없었다. 이 전투는 일본의 백제계 사람들이 뛰어든 마치 1948년 조국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세계 각국에서 유대인들이 모여든 상황과 같다는 것이다.이렇게 백촌강 전투에 대해서 한·일 학계는 전혀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전자는 『日本書紀』 편찬 때의 일본 율령국가의 한반도 여러 나라에 대한 ?蕃國觀?으로부터 나온 이해이고, 후자는 막연한 추측으로 확실한 근거가 부족하다고 하는 점에서 양설은 각각 약점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한·일 학계의 다른 역사관은 각각의 고대국가의 우월성을 강조하여 현재와 연결시키려는 일종의 ‘강대국 콤플렉스’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인식차이로 인해 백촌강 전투가 가지는 역사적 중요성·의의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연구 성과는 미미한 것으로 보인다.백촌강 전투가 가지는 역사적 실체를 밝히기 위해서는 당시 야마토 정권의 외교정책과 동아시아세계 질서에 대한 탐구가 필요해 보인다. 현재 제기되고 있는 학계의 의견에 따르면 야마토 정권의 대외정책은 일본·신라·당의 3국 연합정책에서 친백제 정책으로 회귀하지만, 그 과정에서 백제가 멸망하자 왜는 당과 신라의 다음 목표가 일본 자신일 것이라는 극도의 위기감을 안게 되고 반도에 출병하는 것에 의해 백제부흥군과 고구려와 힘을 합쳐 신라를 치는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당의 위협을 저지하는 것을 지상과제로 삼고 있던 야마토 정권은 당·신라와의 3국 연합체제가 종국에는 당의 일본 열도에 대한 위협을 해소하지 못한 다고 판단했고, 백제를 구원하지 못하면 고구려가 무너지게 되고 고구려가 무너지면 일본은 직접 당의 위협 하에 놓일 수 있기에 일본열도에 대한 당의 위협을 저지하기 위해 백제구원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당과 싸우기 위해서 출병한다는 명분으로는 국내에서 폭 넓은 지지를 얻을 수 없었고, 만약 패배하는 경우에 일본에 대한 당의 위협은 배가될 것이었다. 따라서 직접 대결해야 할 세력이 당임에도 불구하고 백제를 구원하기 위해서 신라를 정벌한다던가 고구려를 구원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걸고 출병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백촌강 싸움의 성격은 속국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던가 조국부흥을 위해서라는 종래의 설과는 크게 다르게 설명된다.
일본의 천황제일본은 천황제, 정확히 말하면 상징 천황제라는 특이한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대통령제를 채택한 우리나라와는 달리 상징적인 의미로 천황이 정점에 존재하고, 수상이 정치의 총무를 관장하고 있는 정치체제이다. 사실 이 비디오를 보기 전에는 천황제의 역사와 현대적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볼 기회가 없었다. 비디오를 보면서 천황이라는 존재가 일본인들에게 주는 의미가 상당함을 확인하면서 조금 놀라기도 했다. 그래서 일본 천황제의 역사와 현대적 의미에 대해 조금 더 알아 보게 되었다.일본의 근대 이후의 천황제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대일본제국헌법』(1889~1947)의 神權 천황제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국헌법』(1947~현재)의 상징 천황제이다.『대일본제국헌법』의 천황은 “대 일본제국의 통치권을 총람하는 국가의 원수”였다.. 또한 “육해군을 통수하는 권한과 전쟁을 선포하고 강화를 하는 권한”도 천황에게 속해있었다. 요컨대『대일본제국헌법』의 천황은 입법·행정·사법·軍權 등 국가의 모든 권한을 장악한 유일한 최고 주권자였던 것이다.뿐만 아니라, 『대일본제국헌법』의 천황은 “萬世一系 존재”이기도 했다. 만세일계란 일본의 신화에 입각한 개념으로서, “神祖가 개국한 이래 連綿하여 一系인 皇統의 융성이 천지와 함께 무궁했으며 앞으로도 또한 그러할 것”이라는 것, 다시 말해 신적인 기원을 가지는 천황의 영원한 지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천황은 문자 그대로 “신성하여 범해서는 안되는 존재”였다. 요컨대 『대일본제국헌법』의 천황은 세속적 의미의 최고 권력자에 머무르지 않고, 現人神이라고 하는 초월적 권위까지도 체현하고 있었던 것이다.이에 대해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것을 선언한『일본국헌법』의 천황은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이제 천황은 일체의 국정에 관한 권능은 가지지 않으며, 오로지 헌법이 정하는 국사에 관한 행위만을 행하도록 되어있다. 천황은 헌법이 정한 12개의 국사행위, 즉 국사에 관한 행위의 위임(4조 2항), 내각총리대신 및 최고재판소장인 재판관의 임명(6조), 헌법 개정 법률 정령 및 조약의 공포, 국회의 소집, 중의원의 해산, 국회의원총선거 시행의 공시, 국무대신 및 법률이 정하는 다른 관리의 임면의 인증과 전권위임장과 대사 및 공사의 신임장의 인증, 대사(大赦) 특사, 감형, 형 집행의 면제 및 복권의 인증, 영전의 수여, 비준서 및 법률이 정하는 기타 외교문서의 인증, 외국의 대사 및 공사의 접수, 의식의 거행(7조)을 행하지만, 그 모든 행위는 헌법과 법률에 정해진 대로 행하지 않으면 안 되며, 또 반드시 내각의 조언과 승인에 따라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또한『일본국헌법』의 천황은 이제 더 이상 신이 아니라, 단지 “일본국의 상징이자 일본국민 통합의 상징”에 불과한 존재가 되었다. 상징천황은 대외적으로 국가를 대표하는 “국가원수”가 아닌 것은 물론이고, 전통적 의미에서의 군주도 아니었다.이렇게 現人神의 지위에서 벗어나서 인간의 존재가 된 천황은 세속의 영향력을 버리고 단순히 일본을 상징하는 존재가 되었지만, 이 상징 천황제에 대해서도 일본 내의 의견이 분분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현대 일본인들에게 상징 천황제가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첫째로 천황은 일본인들에게는 심정적 구심점의 역할을 해왔다. 오랜 봉건분할 지배시기에도 일본인들이 하나의 민족의식을 유지해 왔다고 볼 때 이 민족의식을 묶어준 중심은 최종적인 권위를 가진 천황이었다고 보인다. 신성을 갖춘 천황이 존재하여 왔다는 그 자체가 중요하고 그러한 천황은 권위의 원천이었다. 현재 일본에서도 국가통합의 관점에서 천황제를 유지하자는 의견이 거의 대다수임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천황이 가지는 일본 내의 통합력과 천황에 대한 심정적 동조는 히로히토의 투병기간과 사망 시기에 일본인들이 보인 행동에서 그 위력을 확인해 볼 수 있었다.둘째, 이러한 일본의 독특성의 강조는 만세일계의 천황이라는 점과 결부되어 일본중심주의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만세일계의 천황의 역사를 가진 일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덕천시대 후기부터 나타났다. 일본은 범접할 수 없는 신성을 가진 천황이 역사적으로 존재하여 왔기 때문에 다른 나라와는 비교할 수 없는 우월한 국가라는 관념이 생긴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20세기에 보여준 배타적 민족주의와 일본의 파시즘을 낳기도 하였다.셋째, 천황의 권위는 그 종교적 속성으로 인하여 세속정치의 지배자에게 정당성을 제공하는 근원이 되었다. 오랜 막부 지배기간 동안 실권자인 장군은 천황으로부터 임명되어 세속통치를 위임 받았으며 한편 정치 담당자에게도 편리하게도 천황은 세속통치로부터 멀리 떨어진 위치에 있었기에 그렇다. 비디오에서 보이듯 지금도 수상의 임명도 천황에 의해 행해지고, 국가적 행사에 천황이 참석한다.넷째, 최고의 권위자인 천황은 책임의 최종한계이기도 하였다. 큰 사건이 일어나고 그 책임의 한계가 모호할 때 정치실권자들은 천황의 뜻으로 유도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른바 “무책임의 체계” 속에 일본의 정치는 움직여 왔다고 하겠다. 이러한 무책임의 체계위에 군림한 천황에게 당연히 최종적인 책임이 있다고 하는 이 점이 바로 천황의 전쟁책임의 논거가 된다. 히로히토는 중일전쟁에 이어 제2차 세계대전 등 일본의 팽창주의 역사를 체험하면서, 세계적 전범이 되었지만 1946년 現人神로서의 神格을 부정하는 ‘인간선언’을 발표함으로써 면죄부를 받고, 상징적 국가원수가 된 사실은 이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 상징 천황제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다. 그 이유는 천황제의 부활까지 운운하는 신 보수주의 세력의 대두에 있다. 냉전체제 붕괴에 따른 국내 국내정치의 총 보수화 경향과 극우세력의 세력 확대는 천황의 지위격상을 위한 일련의 노력들로 연결되어 나타난다. 자민당내의 극우성향의 정치인, 보수적인 학자와 지식인, 우익단체 그리고 재계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천황의 지위를 규정한 일본헌법 제 1 조의 개정에 관한 논의는 그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천황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신 국가주의자들의 노력들은 1980년대 중반 이후 본격화되고 있었다. 대표적인 몇 가지 예를 살펴보면, 우선 황국사관을 강조하는 교과서 개정을 들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 극우단체의 하나인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는 민간 주도로 황국사관을 주장하는 교과서 개정작업에 착수하여 『新編日本史』를 집필하였는데 이는 1986년 7월에 문부성의 검정에 통과하여 교육되어지고 있다. 그런데 그 내용 가운데 1946년 1월 1일 발표된 천황의 조서가 천황의 “인간선언'”이라는 부분이 집필진의 완강한 거부로 삭제되어 있었다. 다음으로 황실행사의 범국가적 집행이나 정부 각료들의 신사참배를 지적할 수 있다. 1989년 1월 7일 옛 천황이 죽고 새로운 천황이 즉위하는 이른바 Xday를 맞아 일본정부는 헌법이 규정하는 “주권재민”이나 “정교분리”의 원칙을 벗어나 공적인 황실행사라는 이유로 123억 엔이라는 거액을 들여 다이조사이(大賞祭)를 감행했다. 정부 각료들의 神社참배는 1983년 나카소네 수상의 야쓰쿠니 진쟈(靖國神社) 참배 이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으며, 全각료의 야쓰쿠니 진쟈 참배에 동의한 자민당 내의 중·참의원의 수만 해도 300여명에 이를 정도다. 이와 함께 히노마루나 키미가요와 같은 또 다른 상징을 통한 신국가주의 사조의 강화도 천황제의 강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1987년 8월 일본 문부성은 “신학습지도요령”을 발표하여 전국 공립 초·중·고교의 입학식과 졸업식 때 히노마루를 게양하고 키미가요를 부르도록 하여 그 해 말까지 거의 모든 학교에서 이를 시행했다. 어느 국가든지 자신의 국기와 국가를 갖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으나, 일본의 경우 戰前 군국주의의 상징이던 히노마루와 천황을 숭배하는 내용이 담긴 키미가요를 부활시켜 교육과정을 통해 확산시켜 나감으로써 천황제의 강화와 신국가주의 의식을 확산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이는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이러한 천황제의 강화를 위한 노력들이나 이를 통한 신국가주의 사조의 확산은 냉전 후의 세계질서 재편과 관련하여 일본이 군사대국화나 패권질서의 추구의 길로 나아갈 지도 모른다는 주변국들의 우려와 경계심의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