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의 소비트랜드DVD 시장은 기존의 마케팅과는 진정으로 다른, 개별 고객 관리를 실천해야 할 시점에 처해 있다.아직도 우리는 고객 관계경영은 일부 소매업계나 금융 서비스업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 고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고객은 제품을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제품을 사용함으로써 누릴 수 있는 서비스를 구입하는 것임을 다시 한 점 되새겨야 한다1.생산자 관점제품을 만든다고 생각눈에 보이는 결함을 결정기술이 제품을 만든다고 생각경영상의 편리성을 중요하게 생각높은 생산성을 추구2.고객 관점서비스를 구매한다고 생각눈에 보이지 않는 결점욕구가 제품을 만든다고 생각자신의 편리함을 만든다 고 생각자신의 편리함을 최우선으로 원함질좋은 생활을 추구3.마케팅의취지 및 필요성-선행 마케팅과 기회선점디지털 시대 앞선 기술은 소비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적용되어야 하며 신기술, 신제품도 소비자니즈를 적중시켜야 부가가치를 창출함-쇼비자니즈에 대한 變化트렌드 추론 및 시사점, 아이디어 도출소비자도 미처 모르는 숨겨진 니즈를 Global 트렌드로 추론해 내고 각 트렌드에 따라 기업활동의 시사점 도출4.소비 트렌드- 많은 정보, 많은 지식으로 무장- 기업활동비판을 행동으로 옮김- 따뜻한 동료애 추구- 환상적 즐거움의 추구- 자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 바쁘고 지친 생활- 건강하고 장수하기 위해 노력5.성공적 기업특성- 시간을 벌어줌- 생활편리를 위해 서비스함- 정직하게 정보를 공개함- 안전하게 즐거움을 제공함- 가끔 부자가 된 느낌을 줌- 생활기반을 보호해 줌- 소비자를 찾아가 커뮤니케이션- 정신적, 신체적 건강을 보장함- 따뜻한 삶을 회복시켜 줌고객관계경영의 열쇠는 거대한 고객정보를 관리하고 판매, 마케팅, 전화응대, 서비스등 모든 고객접점의 연결 흐름을 통합하는 것1.소비자의 세대간 특성 비교베이비 붐 세대정보수단 :TV전달방식 : 단방향으로, 마케팅·교육·레져 ·문화 등 프로그램 선택 내용 한정이용자 : 관람자(Viewer)년도 : 1950년대커뮤니케이션 수단 : 편지, 시간적 여유특징 : 친구인사말 : Call Me세계: Office(현실세계)X 세대정보수단 ·:·Computer, Internet전달 방식 : 매체 구분 없이 사용년도 :1960중순 ~70년대N 세대정보수단 :Computer전달 방식 : 쌍방향으로 전환하며, 고객이 원하는 것을 실행하고 고객과 대화함이용자 :이용자(User)년도 :90년대커뮤니케이션 수단 :E-Mail, 즉시성(Real Time)특징 :Cyber Friend인사말 :E-Mail Me세계: On Line목표시장 20~30대의 특성1.인구규모가 매우 크다.Y 세대는 Echo Boomers, 밀레니엄 세대라고도 불린다. 1979~97년에 출행한 그들은 5~20세(미국 기준)사이의 젊은 이들로 X 세대의 3배이상인 6천만명 이상이며, 베이비붐 세대 (7천 2백만명) 이후 최대규모이다..2. 성장과정이 다르다.베이비붐 세대가 아직 윈도우 98을 배우는 동안, Y 세대는 탁아소에서 PC를 두드리고 있다. 즉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컴퓨팅을 시작하는 최초의 세대이다.3. 선호특성이 다르다.Y 세대중 가장 나이가 많은 이들은 현재 고등학교 학생으로 패션, 엔터테인먼트, Toy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져 있으며, 이들은 Old trend라 생각되면 곧바로 외면을 하는 경향이 있다.4. 브랜드매체지향적이다.Y 세대는 부모세대보다 더 매체 지향적이고 브랜드 지향적으로 자라났으나 부모세대와는 다른 광고매체를 선호한다.세대 시장의 중요성1.베이비붐 이후 최대의 기회이다.Y 세대는 인구규모가 매우 크다. 따라서 실패를 할 경우 받는 타격은 매우 클 것이다. 게다가 Y 세대는 집단내 선도 그룹이 특정 브랜드 하나를 추구하기 시작하면 다른 Y 세대들은 이들의 선호를 따른다는 특성이 있다. Risk가 큰 만큼 성공수익은 크다.2.구매력이 크다.Y 세대는 편부모 가족이 많아 양부모로부터 이중소득이 가능하여 이미 괄목할 만한 경제능력을 가지고 있다.
각 나라들의 언론역사(이하 언론사)를 살펴보면, 공통된 흐름을 찾아볼 수가 있다. 그것은 아마도 인류의 언론 발전사라는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최초의 언론 현상에서부터 미래 언론의 모습까지가 바로 그러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언론 발전사는 각국의 상황과 맞물려 각각의 모습을 나타내는데, 그것이 바로 각 나라들만의 언론사(史)일 것이다. 세계 여러 나라들은 자국의 언론사에 대한 나름대로의 연구와 고찰을 하고 있다. 그것은 자국 언론사에 대한 해석과 반성을 통해 보다 나은 언론의 모습을 만들어 나가는 밑거름이 된다. 그러나 그것들을 모아 세계 언론사적 의미로 재해석 한다면 인류 전체의 언론사에 대한 발전적 고찰을 할 수 있을 것이다.1. 영국 신문의 역사영국에서는 1276년 William Caxton에 의해 최초로 인쇄소가 설치되었는데, 이 인쇄소는 다만 서적을 출판하도록 당국의 허가를 받았고, 뉴스의 출판(news publication)은 계획된 바 없었다.영국에서는 그후 출판의 허가제(licensing system, 1530∼1695)가 실시되었는데, 이 같은 허가는 정부와 교회 그리고 대학을 위한 출판인들에게만 주어졌다. 그러므로 허가를 받지 않은 출판 행위는 처벌을 받게 되어 있고 1621년까지는 서적 외의 출판은 일체 허용되지 않았다.전술한 바와 같이 영국에서는 1621년까지 서적 외의 출판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Amsterdam의 Coranto는 1603년부터 1621년까지(1691년부터는 정기적으로) 영문으로 간행되어, 영국의 Nathaniel Butler 라는 서적상인을 통해 영국에서 판매되었다. 1621년 7월 Thomas Archer 라는 런던 인쇄인은 당국의 허가도 받지 않고 감히 Coranto를 런던에서 발간했다가 체포되었다. 그러나 같은해 9월 또 다른 인쇄인인 Nicholas Bourne는 런던에서 정식으로 허락을 받고 제 2의 Coranto를 발간했는데, 여기의 내용은 전적으로 외국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띠었으며, 따라서 정치적인 투쟁을 할 수 있었고, 의회에 대한 보도도 할 수 있게 되었다.영국신문은 이같이 미국 신문보다 먼저 발달했지만, 신문의 대중화와 이에 따른 값싼 페니신문이 나온 것은 오히려 미국이 앞섰다. 이같이 영국 신문이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신문의 대중화가 늦어진 것은 무엇보다도 인지세(1712~1861)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인지세(Stamp Act)는 신문에 무거운 세금 즉 일정액의 우표를 붙히게 함으로써 신문의 대중화를 방해했던 것이다. 즉 인지세는 신문 1장당 1페니의 인지세를, 광고는 매 1개에 1 shilling의 인지세를 물도록 의무화했던 것이다.그러므로 영국에서 미국의 페니신문(1883), 값싼 대중신문이 나타나게 된 것은 인지세가 폐지될 무렵인 1850년대 후반이다. 이전까지 신문의 보급은 무거운 세금 때문에 중산층에 국한되었던 것이다. 물론 신문의 대중화가 이루어지게 된 원인은 인지세 폐지 외에 인쇄 기술의 혁신, 철도의 발달, 경제 발전에 따른 개인소득의 증대 등을 들 수 있다.그러나 영국에서는 대규모 독자층(mass readership)을 대상으로 한 소위 타블로이드 저널리즘이 19세기 말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는 미국에서 보다 앞선 것이었다. 이 신문은 영국의 신문왕 Alfred harmsworth (North-cliff경)에 의해 창간되었으며, 영국에서 나온 최초의 페니신문은 1850년대 말의 데이리 텔레그라프(Daily Telegraph)이다.그는 1903년 또 다른 대중지인 데이리 미러(Daily Mirror)를 창간했는데, 이 신문은 곧 100만부를 돌파했다. 이 당시 인기가 있는 대중신문으로는 데이리 메일(Daily Mai)과 데이리 미러(Daily Mirror) 외에 데이리 익스프레스(Daily Express)가 있었는데 이들 신문은 수입을 백화점의 대형광고(display advertising)에 크게 의존했다. 대중지는 보다 흥미있고(entertaining) 선정적인 내용에 치중한 반면, 고급지는 진평화조약이 체결돼 1783년까지 신문의 수는 다시 35개로 증가되었다.전쟁의 종식과 함께 경제적 이익을 보존하려하는 보수적인 성향의 정치단체와 사회개혁을 원하는 정치단체가 정권장악을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되었으나 곧 연방당이라는 보수파들에 의해 정권이 장악되었다.1791년 수도(Capital)가 뉴욕에서 필라델피아로, 1800년 필라델피아에서 워싱턴으로 옮겨졌으나 신문의 중심지는 여전히 뉴욕이었다. 1800년 뉴욕에는 11개의 신문이 발행되었는데 대부분이 상인신문(mercantile paper)에 속했다. 즉, 이 당시부터 1830년대 페니프레스가 나오기 전까지는 상인신문의 시대로 보아야 할 것이다1 초기(1783-1801)이 시기의 가장 큰 특징은 일간지의 출현을 꼽을 수 있다. 최초의 일간지는 Benjamin Towne이 발간한 Pennsylvania Evening Post(1783)였다. 이것을 기점으로 1800년까지 대부분의 큰 도시에는 일간지가 생겨났다. 구독료는 일반대중이 부담하기에는 벅찼기 때문에 자연 독자층은 부유계급에 제한되어 있었다.판매 부수나 신문지면수도 미약했으나 후에 상업의 발달과 국민의 정치에 대한 인식의 증대, 신문인쇄기술의 개선, 신문의 우송에 대한 우편제도의 저렴한 요금 등으로 신문은 급진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2 중기(1801-1833)이때의 신문은 존립을 위해 정당이나 정치단체 등의 후원 기관의 내용에 치중하는 당파적인 경향이 강했다. 이 같은 현상은 18세기 말 각 정당이 그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각기 신문을 지원하거나 통제하기 시작하면서 노골화된 것이다. 이 당시 신문은 광고수입과 구독료만으로는 자립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신문은 자연 상인단체나 정당의 후원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같은 정부의 신문지원제도는 1830년대 페니프레스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쇠퇴했고 1850년에야 비로소 완전히 없어지게 되었다.3 후기(1833-1860)인쇄기술의 혁신, 교통과 통신시설의 발달, 인구의 증가, 산업화에 의한 소득의데, 이는 1830년대 이후 신문이 대중화되면서 경제적으로 자립이 가능했고, 통신사의 출현으로 객관적인 뉴스를 강조하게 되었으며, 부수의 증가에 따른 독자의 다양화는 공정한 뉴스를 필요로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이 시기의 미국 신문은 퓰리쳐를 중심으로 본격화 된 뉴저널리즘의 시대를 맞이하는데, 퓰리쳐는 St. Louis Post-Dispatch 와 뉴욕월드의 성공을 가져오는 과정에서 새로운 방식과 많은 개혁을 단행하여 뉴저널리즘의 대표가 되었다. 그는 우선 새로운 뉴스 정책을 채택하여 헤드라인을 사용하고 가십과 하찮은 뉴스도 세심하게 보도했으며, 속보성에 뒤지지 않기 위해 철저하게 전신뉴스와 케이블 뉴스를 이용하고, 중요하고 획기적인 뉴스라도 보다 쉽게, 흥미 있게 쓰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퓰리쳐의 월드지는 자유여신상 건립을 위한 모금운동 등의 개혁운동과 대기업 로비스트들의 독점과 부당 행위를 파헤치고 이를 반대하는 기사를 싣기도 하였으며, 사설을 신문의 심장부로 생각하여 사설을 통해 개혁운동과 진보적인 사고의 대변인 노릇을 하기도 했다. 또한 신문의 삽화 사용에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부수 조장 정책의 일환으로 쿠폰과 인기투표 등을 실시하기도 하였다.또한 이 시기에 들어서 미국신문에서는 황색저널리즘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황색저널리즘은 뉴저널리즘 시대에 나타난 선정적 신문으로서 외형이 보다 화려하고, 기발하며, 내용에 있어서도 보다 창의적이고 혁신적이었다. 이러한 황색저널리즘의 대표적인 저널리스트는 William Randolph Hearst를 들 수 있다.황색저널리즘의 발단은 퓰리쳐의 뉴욕월드와 허스트의 뉴욕저널간의 치열한 일요판 신문의 부수 경쟁에서 비롯된다. 이 경쟁에서 나타난 황색저널리즘의 특징으로는 불필요하게 큰 헤드라인과 활자를 독자의 시선을 끌기 위해 색을 넣어가며 사용했고, 사진을 지나치게 많이 사용했으며, 조작된 인터뷰 기사, 현혹 위주의 기사제목, 가짜 과학기사 등이 범람했고,, 일요판 부록에는 컬러 만화와 천박한 기사로 메워졌다는 것, 어느 틀이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보는 대로 말한다 식의 인간적이고 해설 중심적이며 발굴위주의 보도방식과, 과거 뉴스 보도에서 소외되었던 층의 적극적이고 심층적인 보도를 주장하는 경향이 대두 되었다.3) 프랑스 신문의 역사최초의 신문은 1631년에 발간된 La Gazette이며, 최초의 일간지는 1777년에 나온 Le Journal de Paris이다. 1789년 혁명 이전까지는 언론에 대한 탄압이 심해 언론의 발전을 크게 저해했다. 프랑스에서는 1836년 La Press를 계기로 신문이 대중화되기 시작했다.이 같은 신문의 대중화로 광고가 증가했고, 구독료는 반액으로 절감되었으며, 내용은 뉴스 위주로 바뀌게 되었다. 한편 프랑스 신문은 독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 연재소설을 싣기 시작했던 것이다.1854년에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신문인 Le Figaro가 발간되었으며, 이 신문은 창간 5년만에 부수가 30만에 달했으며, 중류 이하의 계층에 읽혀졌기 때문에 기사 내용이 단순하고 이해하기 쉬우며 친밀하게 쓰여졌던 것이다.프랑스에 있어서 신문의 황금기(golden age)는 1881년부터 1914년 사이라고 볼 수 있으며, 1914년에 이미 일간지는 인구 1,000명당 244부에 달했던 것이다. 1914년 파리에는 80개의 일간지가 있었는데, 이 가운데 Le Temps는 가장 진지한 기록의 신문(serious paper of record)에 속했고, Le Figaro는 온건한 계층을 대상으로 했고, La Croix는 과격한 카톨릭 계층(militant catholics)을 대상으로 했던 것이다. 1939년에는 1914년 파리 일간지의 반수 이상이 문을 닫게 되었으며, 기존 신문들은 우익정권(political right)의 대변자 역할을 했으며 부수도 크게 감소되었는데, 이 같은 이유로는 좌익계 신문인 Le Populair와 공산주의계 신문인 Le Soir의 경쟁 등을 들 수 있다.1930년대 프랑스 신문의 획기적 혁신은 영국식의 대중적 신문 형식을 채택하여 대중지 통과.
미국 신문은 대개 지방지이다. 우리나라 식으로 따지면 부산 00일보, 대구00신문, 광주 00일보라는 지역신문들이 신문업계의 주류다. 뉴욕 타임스라든지, 워싱턴 포스트, LA 타임스 또는 시카고 트리뷴, 보스턴 글러브등 미국 유력지의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다.우리나라처럼 전국을 무대로 발행되는 중앙지라는 개념의 신문은 유에스에이 투데이(USA Today)하나 정도일 것이다.경제지인 월 스트리트 저널은 전국적으로 배포되는 신문이지만 월 스트리트 저널도 원래 월 스트리트의 증권가 사람들 사이에주식 시세를 알려주기 위해 회람하던 조그만 회보 형태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창간 당시부터 전국을 겨냥해 간행된 신문은 유에스에이 투데이하나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이와 같이 신문이 각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되다 보니 나름대로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예를 들어 미국의 연예 및 흥행 문화의 중심이 LA의 할리우드인 덕에 LA 타임스가 이 분야에 있어서는 명성이 있고, 증권 경제 분야에서는 뉴욕 타임스, 정치 분야에서는 워싱턴 포스트, 정보통신과 실리콘 밸리의 뉴스는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이나 산 호세 머큐리 등이 권위가 있다.미국 신문들은 또한 나름대로의 편집 철학과 노선이 있다. 단순한 사실보도의 차원을 넘어서 철저한 사안 분석을 하고 선거와 같이 정치적인 선택이 필요한 이슈에 대해 신문사 차원의 의견을 공개적으로 표명하기도 한다.워싱턴 포스트나 뉴욕 타임스 등은 리버럴한 노선을 걷고 있는 것으로 잘알려져 있다. 반면에 월 스트리트 저널은 보수적인 신문이다. 이처럼 성향이 있다 보니 항상 반대 성향의 독자들을 위한 신문들이 역시 생기기 마련이다.미국 정치의 심장부인 워싱턴 DC 일대의 경우 보수적인 워싱턴 타임스가 진보적인 워싱턴 포스트의 대항마로 부상, 보수적인 독자층을 확보하면서 그세를 늘려가고 있다.이러한 신문들의 노선의 차이는 선거 철이 되면 확연하게 드러난다. 워싱턴 포스트나 뉴욕 타임스 등은 사설에서 드러내 놓고 민주당후보를 지지하고 월 스트리트 저널이나 워싱턴 타임스는 공개적으로 공화당 후보를 지지하는 논설을 게재한다.이처럼 각 신문들이 지지하는 후보를 공개적으로 발표한다는 것은 우리 나라언론에서는 상상할 수 도 없는 일이다. 언론의 공정성 등을 내세워 말 그대로 여론의 십자포화를 맞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그러나 미국과 같이 신문이 자신의 색깔을 밝히고 공개적으로 특정 정당이나 후보를 지지하는 것도 언론의 역할이라는 생각도 든다.어차피 정책 결정이나 후보 선택에 대하여는 어떤 개인이나 집단도 자신의 성향이나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니 만큼 오히려 신문 등의 언론 매체들이 자신의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힘으로써, 독자들은 그 신문이 보수적인 신문인지 아니면 이신문은 리버럴한 신문이지 하는 기본 인식을 바탕에 두고 내용을 읽어감으로써 오히려 윤색되지 않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장점도 있기 때문이다.또한 이러한 공개적 입장 표명은 당선자가 결정된 이후 언론 매체에 가해질지도 모르는 규제 등 각종 정치적 보복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는 장치로 기능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이렇게 다양한 성향과 지역적 배경을 가진 미국의 신문들이 여전히 즐겨 찾는 머릿기사는 법원 판결이나 재판 소식인 것 같다.예를 들면 마이크로소프트 사를 분할하라는 1심 판결을 번복하는 항소심 판결 같은 것이다. 물론충분히 전국적인 뉴스 거리가 되는 중요한 결정이기는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주요 신문들이 1면 머릿기사로 다루는 기사는 대통령 선거 결과나 전쟁발발 등을 제외하면 그리 흔한 경우가 아니다.특히 그날의 워싱턴 포스트를 보면 1면 기사 6개중에서 5개가 법원 판결이나 재판과 관련된 것을 보면, 법조 관련 기사가 미국 국민들에게 가장 영향력이 있고 재미도 있는 기사인 것 같다.미국에서 신문이 방송(특히 TV)에 대해서 경쟁관계에서 상호의존관계로 재설정한 근본적인 이유는 경제적 요인 때문이었다. 방송의 문화적, 사회적 영향력이 증대하면서 신문은 더이상 방송을 경쟁관계로만 파악할 수 없게 되었다. 신문 독자와 방송 시청자는 서로 분리된 집단이 아니라는 사실은 신문으로 하여금 방송에 대한 상호의존성을 강하게 만들었다. 이 점은 미국과 유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한국의 경우 초창기 신문과 방송 간의 관계에서 신문은 방송을 경쟁관계로 간주하지 않는 경향이 높았는데, 이것은 권력으로서 신문이 과거에 방송보다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미국에서 라디오와 TV가 전국매체로서 사람들의 일상생활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중반과 1950년 초반이었다. 인쇄매체는 라디오를 경쟁관계로 보지 않았지만, TV의 등장으로 상황은 바뀌었다. 신문은 TV와 광고경쟁을 해야 했기 때문에 TV라는 새로운 매체를 경쟁자로 파악했다. 신문들은 TV와 관련된 기사를 다루는 데 인색했으며 비판적으로 평가했다.미국에서 1960년대 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신문은 TV 현상을 가장 중요한 문화적 현상으로 파악해서 정기적으로 다루어야 할 가치있는 대상으로 받아들이면서1) 신문의 방송비평도 과거 부정적 태도에서 긍정적 태도로 바뀌었다. 신문이 TV라는 매체를 인정하면서 기사나 비평을 싣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 것이다. 이것은 신문이 연극비평이나 영화비평을 다루었던 방식과 다른 점이었다.연극이나 영화가 신문 안으로 들어오는 데는 긴 시간을 요하지는 않았다. 연극이나 영화가 신문을 경제적으로 위협한다고 판단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20세기 초반 신문의 상업적 저널리즘이 확대되면서 연극과 영화비평은 자연스럽게 고정적으로 게재되었다.결과적으로 1960년대 후반 미국에서 신문이 TV를 다루지 않을 경우 독자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우려가 TV와의 관계설정을 바꿔놓은 것이다. 반면 미국방송의 신문비평은 전무한 편이다. 이 점은 미국뿐만 아니라 공적 전통이 강한 유럽에서조차 마찬가지다. 미국 TV들이 시청률이 낮을 것으로 예상되는 신문비평에 시간을 할애할 이유가 없으며, 태생적으로 신문이 TV를 보는 시각과 TV가 신문을 대하는 방식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2) 미국신문의 방송비평:역사적 흐름다른 예술·문화활동에 비해 라디오와 TV 비평은 초보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미국에서 라디오가 등장한 이후 신문의 라디오 비평은 1920년대 초반부터 이루어졌는데 대체적으로 기술적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인기있는 기술’의 라디오 비평이 지배적이었다. 1920년대 초반 미국의 라디오 비평은 프로그램 내용보다 얼마나 기술적으로 잘 전달되었는가가 하나의 평가 척도였다.이것은 방송비평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다. 신문은 단지 어떤 프로그램이 전자적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가의 문제에만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이것의 의미는 방송은 단지 과학과 기술에 적용될 뿐이지 공적 정보매체로서 (대중)예술로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초기 라디오 방송에 대한 선입관은 라디오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TV등장 이후에도 여전히 이어졌다.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참여하면서 라디오 비평은 관심 밖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1941~45년 라디오는 전쟁채권을 파는 것과 전쟁 뉴스보도〔전쟁정보국(Office of War Information)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전직 CBS 뉴스 논평가인 엘머 데이비스(Elmer Davis) 주도하에 행해진 뉴스보도〕, 그리고 보편적인 도덕심을 세우는 데만 몰두했다.미국의 방송비평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가 제기된 것은 1946년 이후였다. 이것은 저널리스트나 학자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FCC의 청서(靑書, Blue Book)에서 비롯되었다. ‘방송사의 공적 책임에 대한 보고서’(Report on Public Service Responsibility of Broadcast Licensees)는 방송사업자들이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방송하겠다는 FCC에 대한 약속을 얼마나 이행했는가를 조사한 것이었다. 보고서는 방송이 지역과 사회에 대한 공적 사건을 다루는 데 미흡했으며 지나친 상업주의로 사회적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방송의 공적 책임에 관한 논쟁은 곧바로 당시 막 등장하기 시작했던 TV 비평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보고서는 라디오와 TV의 교육적 역할을 강조한 것이었기 때문에 규범적 방송비평이 확대되었다. 규범적 방송비평은 점차 약해지고 있지만, 여전히 유효한 방송비평의 한 기준이 되었다.1960년대 들어 방송비평은 사회과학자들과 인문학자들의 관심을 끌었지만 대부분 부정적인 것이었다. 사회과학자들은 방송의 영향과 효과를 중심으로 방송의 폭력과 성표현을 집중적으로 비판했다. 인문학자들도 방송 프로그램의 심미적 의미와 구조를 분석했지만, 방송 프로그램의 미학적 수준을 폄하했을 뿐이다. 특히 CBS가 지원한 클래퍼(Klapper)의 「매스 커뮤니케이션 효과」(Effects of Mass Communication)나 에론(Eron) 등이 조사한 「아동의 공격성 연구」(Learning of Aggression in Children) 등은 방송의 부정적 효과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고, 방송비평은 프로그램 자체에 국한하기보다 시청자와의 관계에서 설정되었다.반면 1960년대 저널리즘 비평은 조금씩 독자와 방송산업의 구미에 맞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다만 예외적으로 마셜 맥루언(M. McLuhan)은 저널리즘 비평과 아카데믹 비평 사이에 서 있었다.3)셸비(Shelby)는 미국에서 저널리즘 비평 전개와 관련, 1930~60년 7개 주요신문이 어떻게 방송을 비평했는지 분석하고 있다. 셸비에 따르면 방송비평은 리뷰(review)가 41%를 차지함으로써 방송산업, 방송제도 등을 다룬 것보다 2배가 많았다.4)로스먼(Rossman)의 후속연구는 1970년대 초 리뷰 기사가 과거보다 증가했다고 밝혔다. 리뷰(52%), 의견과 칼럼(16%), 프리뷰(preview)와 뉴스(18%), 인물과 인터뷰(9%) 등으로 나타났다.5) 미국 신문의 방송비평은 프로그램 비평이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뉴스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거의 침묵한 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