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개론 리포트자유로운 여성들, 그들의 유토피아를 꿈꾸며대부분의 사회에서는 남성 우월주의의 관점에서 남성과 여성으로서의 젠더 정체성을 이분화시켜 학습시켜왔다. 현대에 이르러 남성의 영역과 여성의 영역의 뚜렷한 경계가 다소 변화하고 있는 경향이 있으나 아직까지도 많은 사회 분야에서 가부장적 권력에 의해 젠더관계가 규정되고 있으며 오래도록 우리를 지배해왔던 관념은 쉽사리 깨뜨려지지 않는 측면이 강하다. 이러한 모순 속에서 영화 과 소설 은 현실 사회와는 다른 사회적 성의 형성과 그에 따른 권력 관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는 기존의 가부장적인 사회구조에 대해 뒤집어보고 그 틀을 깰 수 있는 계기로 다가왔다.1. 사회적 성의 형성과 권력관계에서의 여성은 남성에게 순응적이며 종속된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남성의 권위에 저항하고,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시당하지 않고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서 제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사회의 중심적 위치로 나아가고자 하는 면모를 드러낸다.에서는 남성성과 여성성이 역전된 형태로 나타난다. 보편적 인간으로 상정되는 근육질의 움(여성)이 사회를 지배하고 통제하면서 공적인 영역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반면, 자그맣고 뽀얀 맨움(남성)은 집에서 섬세한 손길로 가사 일을 하고, 아이를 돌보며 움을 뒷바라지 하는 게 하나의 미덕이다.이렇듯 성 역할은 일상생활 속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지속적으로 학습되어 규정된 관습이다. 이러한 관습은 또한 남성과 여성사이의 지배구조-권력관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에서 나타난 종교의 체계는 지배하는 성의 우월성을 드러내고 있다. 마치 현실에서 를 외치듯이, 그들은 를 외치고 도나 제시카의 탄생 이전-이후로 시대 구분을 한다. 이러한 설정 자체도 재미있지만, 역전된 권력관계를 통해 지금 이 사회에 널리 퍼져있는, 그러나 너무나도 당연히 여겨지는 권력관계를 되돌아 볼 수 있게 해 주는 것에 큰 의미가 크다.2. 결혼관과 가족형태지금까지 결혼은 선택이기보다는 사람의 인생에서 정상적으로 거쳐 가야하는 일련의 과정이라 여기는 경향이 컸다. 결혼을 통해 가족을 이룸으로써 사회구성원을 재생산과 하여 사회의 존속을 가능하게 하는 고유한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에서의 결혼은 필요에 따라 자발적으로 선택되어지는 것이었다. 안토니아는 바스에게 결혼은 기피하지만, 자신의 욕구와 관련해 섹스상대는 되어줄 수 있다는 입장을 밝힌다. 이후에도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바스와 섹스를 즐기며 서로를 잘 챙겨주는 사이로 발전한다. 다니엘 또한 결혼을 거부하고 단지 아이만을 원했던지라, 모르는 남자의 씨만 받아 테레사를 낳아 기른다. 이는 스웨덴의 현실 사회를 나타낸 비디오 와 유사하게 보여졌다. ‘가족’ 이라는 개념이 허물어지고 성과 결혼에 대한 자유로운 사고가 자리 잡은 스웨덴에서 미혼모들은 천대받지 않고 오히려 완벽한 사회보장제도를 통해 보호받는다.다니엘은 자신의 딸 테레사의 교사와 동성애 가족을 형성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동성애는 숨겨야할 것, 부끄러운 것으로 인식되기에 사회적으로 환대를 받지 못하는 이슈이다. 반면 영화에서는 다니엘과 테레사의 교사간의 동성애에 대해서는 큰 문제가 대두되지 않으며, 자연적인 가족관계에 흡수되어 버림으로 정상적인 궤도권에 접하게 된다.3.문제점과 대안그러나 위의 모습들은 현실적인 한계를 지닌다. 에서 정부는 미혼모에 대해서 완벽한 복지를 보장했지만 외로움을 해결해 준다거나 정을 주지는 못한다는 문제점이 있었고 그에 따른 대안 중 하나로 제시된 것이 집합주택이었다. 집합주택은 안토니아스 라인에서 보여준 공동체적 생활양식보다는 보다 도시적인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행해지고 있는 대안적 공동체의 모습이기에 시사점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결합이 붕괴되어가는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방식인 것이다.
-목 차-I. 서론II. 봉건제와 그리스도교III. 11-12세기의 교회1. 교회 개혁과 성직 서임권 투쟁(1076-1122)2. 십자군 전쟁3. 교황권의 위기와 교회의 분열IV. 동요되는 중세 말기의 그리스드교1. 수도원 개혁운동2. 종파운동과 이단운동Ⅴ.결론Ⅰ.서론중세 유럽 1000년의 역사는 고대 로마 말기와는 상이한 전통 속에서 콘스탄티노플에 기반을 둔 독자적인 제국이 성장하고 발전했던 시기로 특징지어진다.서부 유럽은 400년경 로마제국의 옛 국경들은 파괴되어 게르만족과 슬라브족에 의해 압박당했고, 중세의 기독교는 종교적 절대성을 앞세워 인간 위에 군림했고 여러 가지 잘못된 일을 행하였다는 이유로 이 사이에 ‘암흑의 시대’를 거치고 있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중세는 많은 부정적 요소를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부정적 측면 이면에는 기독교 역사상 긍정적으로 평가해야할 많은 단면들이 공존하고 있다. 중세는 수많은 부정적 요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중세가 빛을 발하는 가장 큰 이유는 중세 시대가 갖는 그 고유의 가치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중세는 게르만 사람들이 서유럽 지역에 정착하면서 시작된다. 게르만족의 대이동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 서유럽에 정착한 그들은 기독교를 알게 되고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새로운 문명의 장을 연다. 5-6세기경의 중세 초기에는 로마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기독교 의식이나 신학적 틀을 모방하고 답습했으나, 8세기경에는 샤를마뉴의 탁월한 지도력 아래 카롤링의 르네상스를 이룩해 내고, 10세기경 신성로마제국이 형성되면서 소위 유럽인의 기독교라는 틀을 만들어 내게 된다. 이러한 유럽인의 기독교는 학문적으로는 스콜라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경건과 금욕은 수도원을 통해서, 교권과 제도권은 교황제의 이름 아래, 그리고 평신도들의 신앙은 평신도 경건 운동으로, 때로는 신비주의나 금욕운동으로 서유럽 특유의 기독교 문화를 구축했다.중세 문화의 근원은 기본적이면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 기독교에서 찾 없었다. 물론 자유로워진 농민 모두가 토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토지를 가지고 있던 많은 농민도 유럽각지에서의 게르만 민족의 침략으로 인해 생활이 위축되었고,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영주의 보호를 필요로 했으며, 영주의 군사적 보호 대신에 생산물을 상납하거나, 노동을 대신해 주었으며, 빚에 몰려 토지를 포기하고 대지주의 토지를 소작하는 계약을 맺었다. 바로 이것이 초기 봉건제이다. 이와 같은 형식은 영주와 더 큰 대영주와의 관계에서도 성립되었다. 이렇게 대영주에게 군사적 보호를 받은 대신 병력동원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농민, 영주, 대영주, 제후, 국왕으로 이어지는 봉건적 체제는 가속화 되어졌으며, 이 봉건제는 13세기를 정점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15세기까지 새로운 사회에 밀려날 때까지 그 세를 형성했다. 한편, 이러한 현상은 교회에도 파급되어 농민에 이르기까지 속죄와 내세 구원을 위해 토지를 기증했다.봉건 사회 속에서 교회는 내세관도 봉건제의 연장으로 이해되어졌다. 교회는 신의 나라의 일부분을 봉건 사회속의 교회와 일치시켰다. 교회는 이를 발판으로 봉건영주가 되었고 중세 전체에 걸쳐 봉건제의 가장 정점에 교회가 들어서게 되었던 것이다.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이 정착된 이후 교회는 중세 문화를 형성하는 실체가 되었으며 학문, 예술, 윤리, 사회, 자연, 그리고 인간적인 삶의 모든 형식을 규정하는 힘이 되었다.Ⅲ.11-12세기의 교회1.교회개혁과 성직 서임권 투쟁(1076-1122)880년에 바이에른의 왕 칼만이 죽은 다음부터 교황권은 점차 약화되어 갔다. 1046년 황제 하인리히 3세는 수트리 종교회의에서 교황권을 두고 서로 다투던 3명의 교황 후보를 모두 폐하고 독일 밤베르크 주교였던 수이드거를 교황 클레멘스 2세로 즉위시킨 후 자신 또한 황제로 대관 하여 자신을 로마의 보호자로 자처하였다. 이 시기에 이르러서야 교황권은 다시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하인리히는 로마에서 투스쿨란가의 세력을 완전히 말살시킨 후 1048년 툴의 주교였던 브루노(Bruno) 후부터 하인리히 5세 치세의 끝까지를 일컫는다. 이 분쟁은 주교 서임권 문제가 발단이 되었지만 이는 단순히 정치적인 대립이 아니라 지배권과 세계 전체를 둘러싼 근본적인 사고에 대한 원칙론적인 대립으로 전개되어 여러 양상으로 복잡하게 발전하여 교황과 황제간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시켜 갔다.카노사의 굴욕으로 황제가 성직자의 서임권을 포기한 것은 프랑크왕국 이래의 속권 우월의 전통이 사라짐을 의미하였으나 교권 우월은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였고 11세기 이후 중세 사회는 대체로 성속의 양권이 병립하여 상호제휴와 견제를 통해 함께 지배한 사회였다2.십자군 전쟁수백년동안 많은 그리스도교인들은 아랍인들의 방해 없이 성지인 예루살렘을 방문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방문의 자유는 셀주크튀르크족이 이슬람을 정복하고, 시리아와 팔레스티나를 정복한 후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할 때까지만 해도 보장되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이 위협을 받게되자 동로마 제국의 황제는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당시의 교황 우르반 2세는 이 도움요청에 기꺼이 응하였으며 로마교회와 비잔틴교회가 다시 화합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랐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의 불편한 관계를 정리하고 그리스도교의 수반으로서의 역할을 고수하려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교황 우르반 2세는 1095년 클레르몽 종교회의에서 전쟁의 정당성을 설교하였고, 참석한 수많은 성직자들과 기사들의 전폭적인 지지로 이른바 믿음을 지키기 위한 ?성스러운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그리스도교인들의 성지회복을 위한 투쟁이었다. 제 1차 십자군 전쟁에 참가한 대부분의 기사들은 프랑스 출신들이었고 거기에 영국과 노르망디 출신의 노르만족들이 가세하였다. 독일제국에서는 단지 로트링겐 지역에서 소수가 참가하였을 뿐이었다. 십자군은 1097년 초에 소아시아까지 진군하였다. 이 전사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고 스텝지대와 사막지대를 지나 1099년 여름 드디어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약 다섯 달 동안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 끝에 성지를 탈환할 수 있었다.스, 영국 등 민족간의 갈등과 경쟁으로 인해 평화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성직자와 신자의 구분을 심화시켰고, 강자와 부자들이 획득물을 독차지함으로써 빈부의 격차를 심화시켰다. 서?중 유럽에서는 지금까지의 그리스도교인들의 유대인들에 대한 관용이 사라졌고, 십자군은 어느 곳에서든지 “그리스도살인자”인 유대인들에 대한 증오심에 불타고 있었다. 이러한 증오심은 오래 전부터 유대인들의 거주지가 형성되어있던 라인강유역의 도시들에서 더욱 거세게 일고 있었다. 이렇듯 여러 측면으로 당시 사회에 영향을 미친 십자군전쟁은 1187년에 튀르크족에 의해 예루살렘이 재정복되면서 실질적으로 끝이 났다. 십자군 전쟁이 교황의 주도하에 치러짐에 따라 교회에 대한 교황권이 다시 강화되었지만 교회가 세속화되는 위험도 있었다. 많은 십자군들은 종교적인 경건성과 진실한 신앙심에서 전쟁에 참여하였지만 그들이 전쟁을 통하여 겪었던 것들은 종교적인 체험이 아니라 권력욕과 재산욕을 향한 인간들의 처절함이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십자군들은 신과 세상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에 회의하게 되고 점차 각자 독자적인 신앙생활의 지침들을 만들어 생활했다. 결국 십자군은 성지회복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은 그 결과보다는 오히려 전쟁을 치르면서 겪는 과정들이 미친 영향이 더 중요한 사건으로서 이 전쟁의 파장은 기존의 유럽중세사회를 점차 붕괴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3.교황권의 위기와 교회의 분열십자군 전쟁이 끝난 13세기 후반부터 유럽 사회는 변하기 시작했다. 국가의 실체로서의 그리스도교는 세속적 왕권과 종교적 왕권의 통합을 극도로 창출해냈던 교회는 십자군 전쟁의 실패이후 급속도로 쇠퇴하게 되었다. 황제권의 약화와 더불어 교황권 역시 약화되어 가면서 보편주의에 입각한 범유럽주의는 민족적인 지배체제의 형성과 더불어 와해되어갔다.다른 한편으로는 교회법의 발전의 결과로 교황 중심적인 교회의 체제가 입헌제형식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교회의 대분열이란 위기사태에 직면한 중세교회는 공의회운. 이렇게 교회가 국가의 실체로서 민중의 삶을 통제하고 교회의 전통이 그 체제를 옹호, 강화해내는 교회를 만들어냈다. 교회의 법을 어기는 자는 종교재판을 받아야 했고 스콜라 신학을 부정하는 행위는 이단 사상으로 위험시되었다.그런데 이것이 13세기에 들어서면서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중세말의 사회의 제반 상황이 변동함에 따라,그동안 체제내에서의 끊임없이 저항해오던 축적된 민중들의 열기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이러한 중세의 대표적인 저항운동은 수도원운동, 수도회, 그리고 종파운동과 이단운동 등으로 민중들의 삶속에 급속도로 전파되었다.1.수도원 개혁운동교회가 제국 교회로 탈바꿈하면서 교회의 지배층은 세속적 권력에로 계속 나아갔다.교회ㅣ 지배자들의 타락은 예수 운동의 전승자들인 민중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했고 그것이 수도원 운동으로 나타났다.이미 수도원 운동은 5-6세기 성 베네딕트에 의해서 시작되었다.청빈,순결.정결 등을 주장하면서 부패하는 교회의 갱신을 촉구한 이 베네딕트 수도원 운동은 많은 수도원 운동의 전형이 되었다.교회 세력이 외면적으로 확대되고 그 세속권력이 증대됨과 동시에 서유럽의 교회들은 타락의 양상을 보이기 시작하여 10세기에 그 타락상이 극에 달했다. 이에 수도원의 자립성을 강조하는 대규모의 개혁운동이 기욤 1세에 의해서 마콩에 세워진 클뤼니(Cluny) 수도원(909/910년 창설)에서 시작되었다. 이 수도원은 전적으로 교황의 직속으로 엄격한 베네딕트 계율을 지키는 생활로 되돌아가자는 혁신적인 수도원이었다. 국왕(제후)의 성직서임권 행사에 대한 비판과 함께 성직자들에 대한 금욕규정이 강화되고 성직매매가 금지되었으며 당시 귀족사회에 만연되어 있던 페데(Fehde: 결투)가 부분적으로 금지되었다. 이들은 개혁된 수도원과 긴밀한 결합을 유지하면서 점차 자(子) 수도원의 그물 구조를 형성했다. 클뤼니는 자(子)수도원의 수도원장 선출권을 직접 행사함으로써 국왕이나 제후들의 통제에서 벗어나 수도원을 로마교황에게 직속시켰고 중앙집권체제를 더욱 강화하여 갔다. 이는.
1. 서론2. 영상매체의 환경변화2.1. 제작환경의 변화2.2. 상영 시장의 변화2.3. 배급 시장의 변화3. 영상매체 환경의 발전방향3.1. 스크린쿼터제 고수3.2. 시나리오 환경 개선3.3. 예술 영화의 유통 지원3.4. 영화 산업의 저변 확대3.5. 사회성과 문화성의 회복4. 맺음말1. 서론우리는 21세기를 맞이하여 영상 문화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영화는 그 사회의 거울이자 문명의 유산이다. 인간의 진실한 기록이며 정신력의 표현이다. 즉 변화하는 현상의 삶을 담아내며 개인과 사회를 연결시키고 인간의 미래에 대한 이상을 대중들과 광범위하게 공유하는 예술이다. 비록 픽션이라 할지라도 영화 속에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와 사상, 생각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영상 문화의 시작이었고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영화는 그 창조성과 다양한 표현양식에 힘입어 새로운 시대에도 한 나라와 한 시대를 반영하고 언제까지나 영상문화를 주도하는 역할을 다하게 될 것이다.한국 문화의 대표적 상품이라 할 수 있는 영화산업은 「한국 영화의 중흥기-르네상스 시대」라 할 만큼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한국 영화의 시장 점유율은 199년 36%, 2000년 35.5%를 거쳐 2001년에는 46%를 넘어설 만큼 비약적으로 높아졌다. 2001년을 기준으로 볼 때 한국은 미국을 제외하고 자국 영화 점유율이 세계 1위인 것이다. 나 역시도 1999년도 "쉬리"와 같은 영화가 나오기 전인 고등학생 시절에는 한국 영화를 보기 위해 굳이 극장으로 가지 않았다. 왠지 한국영화는 집에서 비디오로 빌려보면 족하다고 말할 정도로 영화의 시나리오나 완성도가 그리 뛰어나지 못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한국영화. 저예산 영화. 독립영화를 보러 극장을 찾기 시작하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등의 영화는 비디오를 빌려보는 것으로 대체하게 되었다. 이렇듯 한국 영화는 국내 시장에서의 선전을 거듭하면서 단지 스크린 쿼터제라는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극장에서 상영되고 배우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도 한국 영화의 발전을 실감케 한다.이렇게 한국 영화가 발전하고 있는 시점에서 영상 매체의 발전을 대표하는 영화의 환경 변화를 고찰해보고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발전해야 할지를 미약한 실력으로나마 논하고자 한다.2. 영상매체의 환경변화한때 국내 시장 점유율이 15% 수준까지 낮아져서 극심한 위기에 몰렸던 한국 영화가 자신감과 활기가 넘치는 현 상황이 된 데에는 여러 원인을 들 수 있다.우선 관객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고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영화인들의 노력을 들 수 있다. 감독들은 끊임없이 변신하면서 변화에 부응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그러면서도 자기 색깔을 고집하려 했으며. 좋은 시나리오를 발굴하고 훌륭한 제작자나 투자자를 만나기 위해 노력하면서 영화를 향한 열정과 의욕을 잃지 않고 지켜 왔다. 자유로운 독립 영화 제작자들의 등장과 영화 아카데미의 인재 배출 등으로 영화계에 창의적이며 실험적이며 향상된 기술을 갖춘 인적 자원이 풍부해지고 있다.2.1. 제작 환경의 변화70년대에 TV가 각 가정에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영화는 점차 그 위력을 잃기 시작하였고 이어서 칼라 TV의 등장과 VTR의 개발 보급은 그때까지 안일한 상태에 머물러 있던 우리 영화산업에 치명타를 가하여 40대 이상 기성 세대의 발길을 영화관으로부터 철저하게 돌려 놓고 말았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하에서도 우리 영화산업에 있어서 발전의 기회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0대 젊은 관객은 그래도 꾸준히 영화관을 찾고 있었고 VTR의 폭발적 보급은 그에 상응한 영상소프트웨어수요를 창출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자연적으로 많은 영화 프로그램공급을 필요로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영화계는 이러한 영상 시장의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영화 산업적 기반을 제대로 구축하지 못한 채 80년대 후반 외국 영화의 국내 개방을 맞고야 말았다.디지털의 혁명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뉴미디어 시대를 맞이하여 아날로그(analog) 방식의 T다. 해외의 방송사와 제작사들은 이미 이 도구를 활용하여 양질의 영상 컨텐츠를 생산하기 위한 노하우를 차근차근 쌓아가고 있다. 영화 제작에서도 HDTV용 카메라를 쓰면 비디오 테입으로 제작되기 때문에 녹화와 재생을 자유롭게 할 수 있고 제작과 편집에 드는 시간적, 경제적 비용과 인력을 줄일 수 있다. 매체의 융합(convergence) 시대로 불리는 디지털 미디어 환경 속에서 영화 산업은 DBS, PPV 등과 같은 다양한 뉴미디어로부터 끊임없는 도전을 받고 있다.2.2. 상영 시장의 환경변화1982년 소극장(300석이하) 설립을 신고제로 하면서 대극장은 줄어들고 소극장이 전체 영화관의 60%정도를 차지할 수 있을 정도로 급격히 증가됐다. 그러나 이러한 소극장들은 대부분이 건물을 일시 임대하여 극장 시설로 활용하고 있던 영세 극장주들이 시설투자에 소홀히 함으로 인해 기성세대 성인 관객들의 외면을 초래해 극장 경영이 날로 어려워져 극장을 폐관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었다. 93년대가 되어서야 대기업들이 극장업에 직접 나서기도 했고, 한 건물 내에 여러 형태의 영화관을 동시에 운영하는 새로운 복합 극장 형태가 시도되었다. 그러나 기존의 영화관이 오늘날의 영화관 관객과 극장주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관객들은 점점 다양한 영화를 선택하기를 바라며 영화관 이외의 다른 시설들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극장주들은 최대의 이익을 위하여 상영관의 탄력적인 운영 방식과 수익이 증가하는 기타 시설의 유치를 희망한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 나라 영화관의 상황은 기존의 단일한 대형 상영관을 가진 영화관이 쇠퇴하고 다수의 스크린을 가진 복합 영화관이 증가하는 추세이다. 이러한 복합 영화관은 영화만 보는 곳으로 통하던 극장을 종합적인 여가생활 공간으로 변모시켰다. 또한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발맞추어 영상산업 패러다임의 변혁을 발빠르게 선도하고 있는 인터넷 전용 상영관이 최근 우후죽순으로 증가세를 보이고 있고, 일정한 규모를 가지고서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는 곳도 10여군데에 이른다이러한 영화산업은 극장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DVD(Digital Versatile Disk) 또는 Video Tape 등을 통해 다시 시장에 공급되는 체제를 형성하고 있다.2.3. 판매시장의 환경변화유통 측면에서의 변화도 괄목할 만 하다. 한국 영화계는 기획과 제작 못지 않게 배급을 중요하게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시네마서비스', 'CJ엔터테인먼트', '코리아 픽쳐스' 등의 대형 배급사의 출현과 1998년 이후 등장한 멀티플렉스 상영관의 지속적인 증가를 들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강우석(감독)의 '시네마서비스'라는 한국영화계의 메이저회사는 제작이나 배급에서 독보적인 영향을 행사하고 있다. 직접 제작은 물론 계열화한 영화사를 통해 제작을 확장함으로써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으며, 영화 상영관에 있어서도 서울을 비롯하여 부산, 대구, 광주 등 주요 지역의 핵심 상영관을 확보하고 있다. 심지어 국내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외국의 메이저 배급회사들조차 시네마서비스의 움직임을 주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유통에서의 변화-배급 시스템의 체계화는 영화 관람객의 영화 선택의 폭을 넓히고, 현대적인 시설을 갖춘 쾌적한 영화관람 환경을 조성함으로써 관람객이 꾸준히 증가하고 이와 더불어 흥행률이 올라가게 만들었다. 또한 한국 영화의 선전과 더불어 과거에 외국 영화 수입에만 관심을 두던 영화사들이 한국 영화 제작에 참여하려하고, 다양한 종류의 자본들이 영화계로 몰려드는 등 영상 분야의 투자 활성화로 안정적인 영화제작 자본이 마련되고 제작 여건이 선진화되었다. 그와 더불어 시나리오나 컴퓨터 그래픽의 활용 등으로 상당한 수준으로의 질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3. 영상매체 환경의 발전방향역설적이게도 한국 영화의 경쟁력은 시장 개방 이후부터 커지기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다. 외국 영화 시장 개방은 단기적으로는 한국 영화의 존립을 벼랑 끝으로 몰았지만 관객이나 제작자 모두에게 새로운 인식을 가져다 준 중요한 계기였다. 개방 이후 연간 350~400여 편씩 쏟아져 들어오는 외국 영화들을 보지 않기 위해서 이러한 때일수록 내일을 위해 더욱 정진해야 할 것이다.3.1. 스크린쿼터제 고수여전히 영화계 내외의 몇가지 일들은 우려를 금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고 있다. 영화법에 근거하고 있는 스크린쿼터제의 목적은 외국영화의 국내 영화시장 잠식을 방지하고 한국영화의 기업화와 활성화를 법적, 제도적으로 유도하겠다는 것으로, 한국영화 진흥을 위한 실천적 방법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스크린쿼터 현행 유지'는 95년 7월 헌법재판소의 합헌판결 이후 3권 분립 국가인 대한민국의 3권이 모두 합의한 사항이며. 국민의 뜻이다. 2001년도 한국 영화의 점유율이 50%에 육박했다는 것은 영화 역사상 보기 드문 현상일뿐더러 현상태에서 또 그러리라는 보장이 없다. 최근 한국 영화가 상승세를 타고 있기는 하지만 세계에서 우뚝 서기에는 아직 부족한 것이 많다. 한국 영상 산업의 발전이라는 장기적 안목을 견지하고 있다면 영화인과 국민은 우리의 소중한 생존권의 텃밭인 스크린쿼터제를 지켜내기 위해 분연히 일어서야 한다.3.2. 시나리오 환경 개선1990년도에 들어섰을 때 우리 영화계에서는 "시나리오 부재" 가 제일 큰 문제점으로부각되었었다. 어떤 이는 '한국 영화는 시나리오 작가가 없어서 망하게 될 것이다. 시나리오에 투자하라! '고 외치기도 하였다. 새로운 작가들에 의해서 새로운 시나리오들이 써지지 않는다면 무한 경쟁 시대의 한국 영화 시나리오는 살아남을 수 없다. 이제 우리는 변화된 상황에 적응해야 한다. 냉엄한 국제 현실은 우리의 원망이나 투정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도전과 응전의 역사적인 논리는 우리 영화사업의 생존에도 적용된다고 보아진다. 우리의 현실을 정확히 분석하여 직시하고 과학적이고 치밀하게 대응 방안을 찾아가야 한다. 그간 정치·사회적 환경이 영화소재를 제한하고 있었던 점도 시나리오 부재의 장애요인 중의 하나였다. 우리는 그 동안 종교 영화는 관련업계의 반발, 정치나 군관계는 관련 기관의 반발을 받는 등 영화소재 선택에서부터 그만큼 외국영화에 비해 불리한 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