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우리는 지름이 10만 광년인 은하 속에 살고 있다. 그것도 수천 억 개의 은하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우주는 10억 년마다 5∼10%씩 팽창하면서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가장 먼 천체의 경우라면 그 빛이 약 80억 년 전에 떠난 셈이 된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우주는 과거의 모습일 뿐이다.그렇다면 우주는 무엇인가? 어떻게 생성되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지고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한다.Ⅱ. 본론1. 우리의 우주상중세까지 지배적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은 늘 존재해왔던 우주는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우주가 시간적으로 시초가 있는지, 또 공간적으로 한정되었는지에 관한 문제는 후세에 와서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의 불멸의 저작 『순수이성비판』에서 광범하게 검토되었다. 그는 이런 문제를 순수이성의 이율배반, 즉 모순이라고 불렀는데 그 까닭은 우주에 시작이 있었다는 주장과 우주는 영원히 존속한다는 반대 주장이 똑같이 믿을 만한 근거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사람이 거의 정적이고 변함없는 우주를 믿던 시대에 있어서 우주에 시작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하는 문제는 형이상학이나 신학에 속하는 문제다.1929년 에드윈 허블은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 발견은 마침내 우주의 시작의 문제를 과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셈이 되었다. 허블의 관측은 우주가 무한히 작고 무한히 밀도가 높은 빅뱅(big bang)이라는 시기가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빅뱅이 일어난 순간에 시간이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오늘날 과학자는 우주를 두 개의 기본적인 부분이론으로 설명한다. 일반 상대성 이론은 중력과 우주의 대역 구주를 기술한다. 한편 양자역학은 극히 미소한 규모의 현상을 다룬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두 이론은 서로 상충한다. 즉 두 이론이 모두 성립하지는 않는다. 오늘날 물리학의 주된 노력의 하나이고, 또 이 책의 주제는 이 둘을 모두 포함하는 새로운 이론을 찾는 것이다.2. 시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뉴턴은 모두 절대적 시간의 존재를 믿었다.물체들은 움직이고, 힘은 끌어당기거나 또는 반발하기도 하지만 시간과 공간은 영향을 받지 않고 그저 지속될 뿐이다. 공간과 시간은 영원히 계속된다는 것이 자연스러운 생각이었다. 그러나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는 사정이 전혀 달라진다. 공간과 시간은 역학적 양인 것이다. 영원히 존속한다라는 우주에 대한 낡은 생각은 이제 유한한 과거에 시작되었고 한정된 미래에 끝마칠지도 모른다는 역동적이고 팽창하는 우주란 개념으로 대치되었다.3. 팽창하는 우주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주관의 실마리는 1924년 미국의 천문학자 에드윈 허블이 우리 은하수가 유일한 은하가 아님을 밝혀내는 것에서 시작된다. 별은 너무나 멀리 있기 때문에 우리 눈에는 빛나는 바늘 끝처럼 보일 뿐이며, 우리는 별의 크기나 형태를 분간할 수 없다. 대다수의 별의 종류를 관측할 수 있는 유일한 특징은 별의 색깔뿐이라는 것이다. 허블은 다른 은하의 존재를 실증한 이후, 은하들의 거리를 재고 또 그 스펙트럼을 관측하는 데 여러 해를 소비하였다. 적색 변위의 발견은 우주가 정지해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팽창하고 있으며, 은하들 사이의 거리가 항상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1915년에 일반 상대성 이론을 발표한 아인슈타인마저도 우주는 정지해야 한다고 확신하였기 때문에, 그의 이론을 수정하여 이른바 우주상수를 방정식 속에 삽입하여 정지 우주를 가능하게 만들었다.프리드만은 우주는 어느 방향을 보아도 동일하게 보이고, 또 어디서 보아도 동일하다는 가정을 만족시키기 위한 3개의 모델을 제시하였다. 첫 번째 모델은 우주가 충분히 느리게 팽창하므로 은하들 사이의 중력이 팽창을 감속하여 마침내 정지하게 한다. 두 번째 모델은 우주가 빨리 팽창하므로 중력이 이를 좀 감속시키기는 하지만 팽창을 멈추게 할 수 없다. 셋째 모델은 팽창속도가 바로 두 경우의 경계 값을 가졌는데 공간은 평탄하다.(공간은 역시 무한하다) 프리드만의 모든 답은 과거의 어느 시기라는 주장을 펴도록 만들었다. 라플라스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행동을 포함하여 다른 모든 것들을 지배하는 비슷한 법칙들이 존재할 것이라고 가정했다. 그러나 비판자들은 과학적 결정론이 이 세계에 신이 개입할 자유를 침해한다고 생각했다.하이젠베르그, 에르빈 슈뢰딩거, 그리고 폴 디랙은 1920년대에 불확정성 원리를 기반으로 기존의 역학을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이라는 새로운 이론으로 재 정식화하였다. 이 새로운 이론에서 입자들은 각각 명확한 위치와 속도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위치와 속도가 결합되어 이루어진 양자 상태를 가지게 된다. 양자역학에서는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duality)이 존재한다. 어떤 목적을 위해서는 입자를 파동으로 생각하는 것이 유용하고, 또 다른 목적에서는 파동을 입자로 생각하는 것이 편리하다.아인슈타인은 자신이 양자역학의 개념들을 발전시키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양자역학에 극력 반대했다.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의 수립에 기여한 공적으로 노벨상을 수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우주가 우연에 의해서 지배된다는 사실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5. 소립자와 자연의 힘들아리스토텔레스는 물질의 연속을 믿었다. 즉 물질은 차례로 더 작은 조각으로 한없이 쪼개질 수 있으며,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알맹이에 이르는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데모크리토스와 같은 몇몇 그리스인은 물질이 본래 알맹이로 되어 있으며, 모든 것은 수많은 여러 원자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하였다.1911년 영국의 물리학자 어니스트 러더퍼드는 물질의 원자는 내부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드디어 밝혀냈다. 즉 원자는 극히 작은 (+)전기를 띤 핵과 그 둘레에 여러 전자가 궤도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1932년에 제임스 채드윅이 핵 속의 또 다른 입자로 중성자를 발견했다. 중성자는 양성자와 질량이 거의 같으나 전기적으로 중성인 입자이다. 약 2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양성자와 중성자는 `기본적 입자로 생각되었었다. 그러나 양성자가 고속으로 자의 개수의 제한이 없고, 따라서 강한 힘을 나타낼 수 있음을 뜻한다.6. 블랙홀본래 빛의 입자는 무한히 빠르게 달리므로 중력은 이를 감속시킬 수 없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빛이 유한 속도로 달린다는 뢰머의 발견은, 중력이 빛에 중요한 영향을 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암시하게 되었다. 이러한 가정에서 케임브리지 대학의 학감 존 미첼은 1783년에 《런던 왕립 협회 철학보고서》에서 별의 질량이 매우 크고 조밀하다면 그 중력장이 커서 빛이 밖으로 나올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미첼은 이런 별에서 나오는 빛은 우리에게 다다를 수 없으므로 별을 볼 수 없으나, 우리는 그 별의 중력 작용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천체는 우리가 오늘날 블랙홀 로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빛에 대한 중력의 효과를 모순 없이 설명하는 이론은 1915년에 아인슈타인이 제안한 일반 상대성 이론의 효시가 된다. 그러나 그 이론과 무거운 별에 대한 관련이 이해되기에는 다시 오랜 세월이 지나야 했다.찬드라세르카르의 한계를 넘는 별들은 연료가 고갈될 무렵에 큰 문제가 생긴다. 어떤 경우에 이들은 폭발하거나 많은 질량을 방출하여 한계 이하로 질량을 줄여서 중력 붕괴의 격변을 모면한다. 찬드라세르카는 배타원리가 그의 한계를 넘는 별이 중력 붕괴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음을 증명하였지만, 이러한 별이 어떻게 되는지를 1939년에 처음으로 입반 상대성 이론에 따라 구명한 사람은 미국의 젊은 과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였다. 오펜하이머의 연구로부터 우리가 오늘날 가지고 있는 묘상은 다음과 같다. 즉 별의 중력장은 시공간 속의 빛의 경로를 별이 없었을 때의 경로와 다르게 만든다.별이 어느 한계 반경으로 줄어들면 표면의 중력장은 매우 강해지기 때문에 광추면이 너무 기울어져서 빛은 별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별을 벗어나서 멀리 떨어져 있는 관측자에게 도달할 수 없는 사건의 집합, 즉 시공간의 구역이 생기는데 이것이 바로 블랙홀 이다.블랙홀 은 과학의 역사에 있어서 관측으로 그 확증이 얻어지기 이전에 자세한너지의 입자가 실제 입자로 변할 때까지 달리는 거리가 짧아지고, 따라서 방출의 율이 커지고 블랙홀의 온도는 높아진다. 밖으로 향하는 +에너지의 복사는 -에너지의 입자가 블랙홀로 유입하게 되는 양과 균형을 이루게 된다. 블랙홀은 블랙(검은) 이란 형용사가 거의 어울리지 않는다. 이들은 길게 백열 상태에 있고 1만 메가와트의 율로 에너지를 방출한다.우리는 원시적 블랙홀이 그 생애의 대부분 동안에 발사하는 r선을 찾아볼 수 있다. 원시적 블랙홀을 관측하려면 동일한 방향에서 적당한 기간, 이를테면 1주일 동안에 여러 개의 r선 양자를 검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r선은 배경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플랑크의 양자 원리에 따르면 개개의 r선 양자가 극히 높은 에너지(r선의 진동수가 극히 크기 때문에)를 가지므로 1만 MW라 해도 몇 개 양자의 방출로 충당된다.8. 우주의 기원과 운명우주가 극히 높은 온도에서 시작하여 그 팽창에 따라서 냉각된다는 묘상은 우리가 오늘날 가지고 있는 관측적 증거와 일치하고 있다.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빛이 한 고장에서 딴 고장으로 갈 수 없다면 다른 모든 정보 역시 그러하다. 그래서 우주 초기의 서로 다른 구역의 사이에서 온도가 같아질 까닭이 없는 것이다. 만약 대폭발 1초 후에 팽창률이 실제보다 1000억분의 1만 더 작았더라면, 오늘날의 크기로 팽창하기 이전에 수축되어 무너져버렸을 것이다.과학이 현재까지 밝혀냈던 한 묶음의 법칙은, 우리가 어느 한 시각에서 우주의 상태를 알고 있다면, 우주가 시간에 따라 어떻게 발전하고 있는 지를 불확정성 원리가 말하는 한계의 테두리 안에서 알려준다.혼돈적 경계조건은 우주가 공간적으로 무한하거나 혹은 우주가 무한히 많다는 것을 은근히 가정하는 것이다. 혼돈적 경계조건에 따르면, 대 폭발 직후에 어느 공간의 구역이 어떤 특정한 상태에 있을 확률이 어떤 뜻으로 동일하다. 즉 우주의 시초 상태를 순전히 임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만약 참으로 우주가 공간적으로 무한하거나 혹은 우주가 무한히 많뜻한다.
Ⅰ. 서론동해는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에 있는 연근해임에도 불구하고 심해저 지형으로 세계적으로도 특이한 지질구조를 갖고 있어, 학계의 많은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동해의 생성을 설명하는 여러 학설들 중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이론을 알아보고 이를 통해 우리나라 동해의 생성원인을 살펴보자.{동해 바다의 물을 거둬내고 그 안을 들여다보면, 3000m 깊이 아래로 넓은 분지가 있고, 분지 안에 툭 튀어나온 돌출부가 있다. 이 돌출 된 부분과 한반도 동해 해안선의 윤곽을 맞춰보자. 잘 들어맞는다. 그런 다음 굽어진 일본을 쭉 펴서 그 옆에 갖다 붙여보자. 동해는 사라지고 한반도와 일본이 붙어있는 모양이 된다.이는 단순한 조각 맞추기가 아니라, 과거에 일본이 아시아대륙에서 떨어져 나가 동해가 형성됐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실제로 동해 바다 속 돌출 부위가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에 존재했던 대륙의 조각이라는 사실이 이미 밝혀졌다. 러시아와 일본 지질학자들이 이 돌출 부위에서 대륙지각 기원의 화강암이나 변성암류를 발견했던 것이다. 이들은 동해가 형성되면서 대륙지각이 함몰된 것들이다.동해는 동서 폭이 약 1천1백km이고 남북 폭이 최대 2천km이다. 일본열도가 아시아 대륙에서 멀어진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동해는 언제 어떤 이유에서 생겨난 것일까?Ⅱ. 본론동해의 생성에 관해서는 많은 연구가 계속되고 있지만 아직도 여러 가지 학설이 분분한 상태다. 그 중의 하나가 일본이 대륙에서 떨어져 나가면서 동해가 생겼다는 열림설 이다. 즉 동해는 약 2800만년전 일본이 대륙에서 떨어져 나가면서 갈라지는 해저 지각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원래 일본은 지금의 한반도와 러시아 동해안에 붙어있는 유라시아판의 대륙지각이었는데, 2300만년 전 일본은 육지에서 분리되기 시작했다(그림-가). 일본이 한반도 동해안의 해안선과 평행하게 거의 직선으로 남쪽을 향해 미끄러져 내려간 것이다. 이 때 대륙지각이 찢어진 자국이 바로 울릉단층·후포단층·양산단층이다. 울릉단층이 이 때 생긴 가장 큰 주 단층이다. 이 단층은 동해안과 30∼60㎞의 거리를 두고 울진 앞 바다와 쓰시마섬을 지나 규슈지방 앞 바다까지 길이가 700㎞나 된다. 이 단층선을 중심으로 일본은 수 백킬로미터를 수평 이동했고, 이 과정에서 동쪽편 지각이 2∼3㎞ 밑으로 주저앉았다. 미끄럼 속도는 손톱이 자라는 속도, 즉 연간 10㎝ 정도였다. 하지만 2300만년 전에서 1800만년 전까지 약 500만년 동안 계속 미끄러지면서 근처의 지각을 여러 개로 조각 내 후포단층과 양산단층 등 새끼 단층들을 만들어냈다.당시 일본이 남진한 것은 태평양 해양판이 유라시아 대륙판과 부딪치면서 일본 지각판을 땅 밑으로 끌고 들어갔기 때문이다. 한반도에 붙어 있을 때 현재 동해에 있던 지각판은 두께 30㎞가 넘는 전형적인 대륙 지각판 이었지만, 태평양 쪽에서 일본을 잡아당기면서 이 판이 14㎞ 정도로 얇아져 결국 가라앉으면서 울릉분지를 만들어냈다. 울릉도 남쪽에 남한 면적과 비슷한 울릉분지와 일본분지·야마토분지 등 깊이 2,000m가 넘는 심해저가 만들어진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2단계는 1800만년 전부터 1200만년 전까지이다(그림-나). 이 때 일본 지각판은 미끄럼 남진운동을 중단하고, 회전운동을 시작했다. 동해에서 태평양쪽으로 나가려면 일본열도의 한 가운데를 밀어야 한다. 그러면 오른쪽의 일본 서부지방은 시계방향으로 회전하고, 동부지방은 시계반대방향으로 돈다. 이렇게 해서 원래 직선 모양이었던 일본열도가 ㄴ 자로 꺽이고, 동해와 울릉분지는 더 넓고 깊어졌다.3단계는 1200만년 전부터 현재까지이다(그림-다). 일본 서부지방은 울릉단층을 따라 거꾸로 북상하고 있고, 일본 동부지방은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일본 서부지방의 북진 때문에 울산에서 동쪽 100㎞가량 떨어진 동해의 수심 수 백미터 해저에서는 지각이 접히면서 충상 단층들이 만들어졌다. 울산과 포항 앞 바다에서 비교적 규모가 큰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 것은 이런 단층들에서 기인하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위와 같이 동해의 형성이 열림설 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여러 가지 모델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첫째, 주향 이동단층에 의한 당겨열림(pull-apart opening) 모델이다. 인도판의 북상으로 유라시아대륙은 인도판의 영향을 받게 되는데, 이러한 운동으로 히말라야산맥이 형성되며 인도지나반도와 넓게 터키지역의 아나톨리아 지역이 쐐기상으로 빠져나가게 된다. 이러한 지구조 운동을 lateral extrusion이라고 한다. 중국의 Sanshi Graben이나 바이칼호도 이러한 영향으로 생겨났다고 보고 있다. 동해의 경우는 동쪽의 타타르단층과 동해서측, 그러니까 울릉분지 서측 경계와 대한해협을 잇는 대한해협단층의 우수향 주향이동으로 그사이 지역이 벌어져 동해가 열렸다는 것이다.· 둘째, 후배호 확장(back-arc spreading) 모델이다. 태평양 지역의 해양 판들의 섭입으로 후배호의 위치에 있던 동해가 열렸다는 것입니다· 셋째, 일본열도가 부채꼴로 휘어 열렸다는 것이다. (fan-shape opening or bar-door opening). 마치 대문의 양쪽이 열리듯이 해서 동해가 형성되었다는 모델이다. 타나쿠라 구조선과 이토이가와-시즈오카 구조선을 경계로 일본열도는 북동부, 중부, 서남부로 나뉜다. 북동부는 시계반대방향으로 서남부는 시계방향으로 회전하였다고 하는 것인데 고지자기 연구결과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한다.동해의 생성을 설명하는 여러 모델 중 가장 유력하다고 생각되는 이론에 대해 설명하겠다.1. 부채꼴 식 확장모델동해의 형성 시기와 원인 규명은 과거 지질학자들에게 논란거리였다. 1960년대에 고지자기를 연구한 일본 학자들은 일본열도 암석의 잔류자화 방향을 측정했다. 이를 통해 백악기부터 신생대 제3기초까지 서남일본은 시계방향으로, 동북일본은 반 시계방향으로 휘어졌다고 해석했다. 일본열도는 ‘거울로 본 ㄴ자’처럼 굽어져 있고 동서와 남북으로 길게 뻗어있는데, 이를 각각 서남일본과 동북일본이라고 부른다. 그 직후인 1970년대에는 지질학자들이 동해의 바닥이 해양지각과 유사한 특성을 갖는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이는 지구과학의 혁명을 일으킨 판구조론의 열풍에 힘입어 동해가 확장됐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다.1980년대 초에는 일본열도의 암석에 대해 더욱 정밀한 고지자기 자료와 연대측정자료, 그리고 미화석 연구가 보태졌다. 그러면서 곧게 뻗어있던 일본열도가 휘어진 것은 약 1천5백 만년 전이었다고 밝혀졌다. 그때 태평양판이 일본열도 아래로 들어가면서 화산열 뒤쪽, 즉 일본과 아시아대륙 사이의 지각 하부에 대량의 마그마가 만들어졌다고 봤다. 이 마그마가 대류를 일으키면서 일본열도를 태평양쪽으로 밀어낸 결과, 서남일본과 동북일본이 각각 시계방향과 반 시계방향으로 회전하면서 동해가 열렸다는 것이다.이를 ‘부채꼴식 확장모델’이라고 하는데, 이는 2개의 부채 끝을 서로 일직선상으로 맞닿게 한 다음 바깥쪽으로 두 부채를 펼쳤을 때와 모양이 흡사하다고 해서 붙여졌다. 이 모델에 따르면 서남일본은 약 1천5백만년 전에 1백만년도 못되는 짧은 기간 동안 시계방향으로 회전한 반면, 동북일본은 대략 2천만-1천2백만년 전에 반 시계방향으로 회전했다. 하지만 이 모델은 여러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다. 확장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다는 점, 일본열도와 대륙조각들을 복원했을 때 일부분이 겹쳐진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동해 해저 시추 결과 동해 확장 초기에 형성된 화산암의 연대들이 2천만년 전후로 나타난다는 점을 설명하지 못한다.1980년대 중반 확장시기와 복원의 문제점에 관한 해결의 단서가 우리나라 포항일대의 화산 암류와 퇴적 암류에서 구한 고지자기 연구에서 포착됐다. 포항서쪽에는 양산 단층이 발달하는데, 한반도는 이 단층을 경계로 동쪽의 지층이 서쪽에 비해 20-30km 남쪽으로 어긋나 있다.1990년대 접어들면서 우리나라와 일본 학자들이 중심이 돼 포항지역의 신생대 지층에 대해 고지자기 연구를 실시한 결과, 약 1천7백만년 전 이전의 암석에서 구한 잔류자화 방향이 지금보다 동쪽으로 약 40-50°나 치우쳐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는 양산단층이 움직인 시기를 나타내주는데, 동해가 적어도 1천7백만년 전에 확장하고 있었다는 증거를 제공한 것이다. 따라서 일본열도가 회전하기 이전에 동해는 이미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처음 대륙이 갈라질 때 흔히 녹색응회암이라는 화산암이 분출된다. 일본열도에서 발견되는 녹색응회암의 연대는 약 2천3백만년 전인데, 이를 동해가 확장하기 시작할 때의 시기로 봤다. 이에 따라 일본열도가 약 2천3백만년 전부터 남쪽으로 평행하게 떨어져 나가다가, 1천5백만년 전 돌연 부채꼴 형태로 벌어졌다는 두 단계 확장설이 등장했다.동해가 두 단계로 확장하게 된 이유로는 남쪽에서 북상하던 필리핀 해판과 서남일본이 큐슈 부근에서 충돌한 것을 꼽았다. 필리핀 해판과 서남일본이 충돌하면서 평행하게 떨어져 나가던 일본열도가 회전하게 됐다는 것이다. 두 단계 확장설은 미국과 영국 고지자기 학자들의 필리핀 해판에 대한 고위도변화 연구결과들에 의해 확립돼 왔다. 그러나 이 가설 역시 일본열도 중앙부의 화살처럼 휘어져 있는 구조를 설명하지 못하는 문제점을 갖고 있다.2. 주향 이동단층에 의한 당겨열림모델
日本の 祭り‡ 목 차 ‡마쯔리(まつり) 란? 일본의 3대 축제 도쿄 간다제 오사카 텐진제 교토 기온제 그 외 주요축제 * 온천문화 bonus!야 마 보 코마쯔리(祭り)란?제사, 축제를 뜻하는 말 신이나 존경하는 사람에게 뭔가를 드리는 것을 의미 풍요로운 생산, 번영, 평화로운 생활 등을 기원 풍농, 풍어 기원도쿄 간다제(神田祭)시기 : 홀수 해 5월 15일에 가까운 주말 기원 :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 108개의 자치회에서 90개의 미코시(御輿)를 선보일 정도의 엄청난 규모http://www.ematsuri.ne.jp/kanda도쿄 간다제(神田祭)오사카 텐진제(天神祭)시기 : 매년 7월 24일 ~ 25일 기원 : 서기 949년에 덴만구(天滿宮)신사가 건립 이듬해 가미호코를 바다에 띄워서 표착한 해변에 제사단을 마련하여 시령을 안치하고 목욕재계한 것. 일본 3대 선상 마쯔리 중의 하나오사카 텐진제(天神祭)리쿠토교 힘찬 북소리를 신호로 도로를 행진하는 것 후나토쿄(船渡御) 약 100여척의 화려한 배들이 도지마가와(堂島川)와 오가와(大川)를 거슬러 올라가는 행사쿄토 기온제(祇園祭)시기 : 매년 7월 1일부터 31일. 기원 : 일본 중요 무형민속문화재로 약1100년 전에 전염병을 퇴치하기 위한 어령회(御靈會)쿄토 기온제(祇園祭)기온바야시 연주와 함께 17일 야마보코순행(山巡行)이 하이라이트삿보로 눈 축제(雪祭り)시기 : 매년 2월 초 1주일간 기원 : 1950년 고교생들이 6개의 설상을오도리 공원에 설치한 것이 계기 시민이 직접 눈 조각상 등을 만들어 전시 국제 눈 조각 경연대회 등 다채로운 전시와 행사 브라질의 리우 축제(카니발), 독일 뮌헨의 옥토버 축제와 함께 세계 3대 축제삿보로 눈축제(雪祭り)눈과 얼음 조각전시회는 세계적인 건축물을 비롯한 각종 캐릭터가 전시 세계적인 조각가들이 제작한 250개 이상의 작품 음악회·패션쇼·스키쇼·레이저쇼·노래자랑을 비롯한 국제 설상 경연대회, 눈의 여왕 선발대회 등의 각종 행사일본 온천(溫泉)일본열도의 지리적 특징 국토면적의 약 70%를 산이 차지 화산대에 속해 있어 온천자원 풍부 자연과의 아름다운 조화 노천온천 전체에 약 2000개 정도의 온천이 있어 온천욕이 보편화 유카타 착용 (일본식 욕의)일본 온천(溫泉)노보리베츠의 온천 축제시기 : 2월 온천가의 상징인 빨간 도깨비, 파란 도깨비를 맞이하는 의미 매서운 추위 속에서 벌거벗은 젊은이들이 물싸움을 즐기는 축제 아타미 · 벳부와 함께 일본 3대 온천노보리베츠의 온천일본 최 북단의 섬 홋카이도는 눈의 나라 거대한 온탕 직경 450m의 거대한 폭발화구에서 열탕이 끓어 넘치는 '지옥 계곡'에서 약 600m 거리의 산책로를 따라 독특한 풍광을 감상벳부(別府)의 온천 축제기간 : 4월1~2일 벳부시의 대규모 축제로 시민들이 참가하는 온천 카니발 온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산행하기, 야치키무용, 대명행렬 등의 행사 선산화(扇山火) 축제 벳부 온천축제의 첫날을 장식하는 선산 불지르기 행사벳부(別府)의 온천벳부8온천 - 성분이 다른 온천이 8군데 있으며 8탕순방 온천욕이 인기 벳부 지옥순례 - 땅속에서 분출하는 열탕, 분기 등이 마치 지옥을 연상 적, 청의 선면한 열천, 세차게 품어올리는 간헐천 등 각각 특색을 지님유카타(浴衣)옛날 천황이나 귀족들이 목욕할 때 사용하던 것 목욕 후나 여름에 입는 의복 안감으로 만든 기모노의 일종 마쯔리 때 미코시(神興)를 메는 사람들이 착용하는 유니폼 히로소데 보통 목욕 후에 입는 유카타로 겨드랑이 부분을 꿰매지 않음하카타 등불축제http://toumyou.hakata.net/main.html하다카마쯔리ありがとう~^^*{nameOfApplication=Show}
{{왜 하필 조선 후기의 회화인가기말 레포트 과제.. 무려 10가지나 되는 주제들이 주어졌다. 아부성 발언일지 모르나 항상 새롭고 재미있는 방식의 수업내용과 걸맞게, 레포트 주제 또한 진부한 주제에서 한발 벗어 난 참신한 주제가 많았다.연애 성공기, 만화 그리기, 그림 일기...그러나 이렇게 탐나는(?) 주제들을 뒤로하고 10가지 주제 중 진부하기 그지없는 조선 후기 회화의 사실주의 를 선택하기까지는 많은 괴로움과 고민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 주셨으면 좋 겠다. 애초에 연애 성공기 라는 제목만 들어도 설레임이 가득한 주제를 선택했었다. 하지만 군대 간 애인을 뒤로하고 고무신을 거꾸로 신는다는 것이 불가능한 현실에 굴복하고 말았 다. 나의 남자친구는 대한민국 공군. 타 군인들과 다르게 6주에 한번 꼴로 휴가를 나온다.과연 6주만에 작업에 성공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에 나의 능력으로는 역부족임을 깨닫고 눈물을 참으며 연애 성공기 를 포기 할 수밖에 없었다.또 그림을 그리는 데에는 영 소질이 없어, 만화 그리기나 그림일기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 다. 그래서 어릴 적 미술학원을 보내주지 않으셨던 부모님을 원망하기도 하면서 다른 주제 들을 탐색해 보던 중, 낯설지 않은 조선후기의 작품들을 발견하게 되었다.조선후기 회화의 사실주의. 이런 주제를 선택한 나에게 웬 고고한 척이냐는 반응을 보이는 이들이 많으리라 추측된다. 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조선후기의 회화는 우리에게 아주 익숙 한 작품들이 많다.김홍도나 신윤복의 풍속도를 생각해 보자. 이것도 어렵다면 더 쉽게, 서당에서 매를 맞고 우는 아이 그림이나 약간은 야시시한 차림의 여인들이 그네를 타는 그림은 공중전화 카드 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조선후기는 가장 미술이 융성하게 발전한 시기이며, 동시에 내가 좋아하는 화가가 많이 나온 시대이다. 좋아하는 화가라기보다는 누구나 아는 화가들이 많이 활동한 시기라는 점이 낯설지 않아, 다가가기에 부담이 없었다는 게 선택의 이유가 된 것 같다. 어쩌면 우리 회화사가 주는 그 위 그런 곳에 매몰되면 그 그림은 아무 것도 전해줄 수 없다는 이야기다. 즉, 그림 의 정신이 죽는다는 이야기인 것이다.사실론은 전신론과는 개념적으로 대비되는 것으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사실주의적 기법에 충실한 것을 말한다. 18세기 조선후기에 대두된 개념으로 동시대에 발달한 실학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역사적으로 중국의 청나라가 들어서자 그들을 따를 수 없다는 친명배 청(親明排淸)의 사상으로 인해 중국의 화풍에서 벗어난 독창적인 이론이기도 하다. 이런 사 실론은 여러 학자들이 논하였으며, 조선 후기의 발달했던 회화를 뒷받침해주었다. 그중 대 표적인 이하곤의 두타초(頭陀草)에서의 사진론(寫眞論)을 옮겨본다.{'내 일찍이 말하기를 시를 짓는 것은 화공이 사진(寫眞)하는 것과 같다. 한 획, 터럭 하나라도 같 지 않음이 없게 한 연후에야 가히 그 사람을 사(寫)했다한다. 다만 터럭 하나라도 같지 않으면 비록 단청(丹靑)의 공이 극에 달해도 신정(神精)과 서로 통하지 않으니, 어찌 그 사람을 사했다 할 수 있겠는가?'한마디로 이야기해서 그림의 우선은 정확하게 그리는 데 있다는 이야기다. 사실적 묘사에 충실하지 않고는 그 뜻이 아무리 높다하더라도 진정한 그림이 아니라는 뜻이다. 사실주의적 입장이요, 전신론과는 약간의 대비가 되는 화론이다.이제 조선 후기는 어떤 화론이 통하였는지 알아보도록 하자.조선 후기의 회화의 신경향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사실주의이다.그것은 자연(진경산수), 현실(속화), 감성(문인화풍) 모두에서 감성적 직접성을 강조하였고,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다. 서민의식의 대두, 청나라에 대한 반감으로 인한 독립적인 화풍의 구축, 실학사상으로 인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화풍이 이렇다 하여 전신론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 둘은 서로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했 다. 단지 양자 중에서 어느 쪽을 조금 더 강조하느냐에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박지원은 사 실성이란 모름지기 사의(전신)까지 다다랐을 때 참된 사실이라고 할 수한국인의 생활상을 소재로 삼아 다룬 조선후기 회화는 실학의 추이와 매우 유사함을 보여준다.▶ 남종 화법을 토대로 발전한 진경산수화남종화법은 이미 전대에 전래되었으나 본격적인 유행을 하게된 것은 조선후기부터이다. 표 암 강세황, 이인상, 신위, 김정희 등은 남종화의 유행을 부채질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러 한 남종화법을 토대로 발전된 한국적 회화인 진경산수는 한국에 실제로 존재하는 실경을 한국적으로 발전된 남종화법을 구사하여 그려낸 산수화법을 말한다. 본래 한국의 실경을 소재로 삼아 그리는 화습은 이미 고려시대에 생겨 조선초기와 중기에 걸쳐 계속 전통의 맥 락을 이어왔다. 그러나 겸제 정선이 창안한 진경산수는 비단 한국의 실경을 소재로 다룰 뿐 아니라 새로이 발전된 화풍을 지니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조선인들을 해학적으로 다룬 풍속화진경산수와 더불어 조선후기회화에서 가장 한국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풍속화이다. 속 화라고도 불리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풍속화는 역시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긍제 김득신 (1754~1822)등 후기 화원들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김홍도와 그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김득신은 주로 서민생활의 단면들을 소재로 삼아 해학적으로 표현하였다. 서민들의 생활주 변에서 찾은 재미있는 소재를 간결하면서도 초점을 이루는 구도 속에 익살스럽게 승화시킨 것이 김홍도와 김득신의 풍속화가 지닌 큰 특색이다. 신윤복은 남녀간의 애정문제를 파헤치 는데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따라서 그의 주인공들은 생업에 종사하는 서민들이기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따라서 그의 주인공들은 생업에 종사하기보다는 한량이나 기녀, 양 반들이 대부분이다. 신윤복은 산수나 옥우를 배경으로 그의 주인공들을 섬세하고 유연한 필 치로 산뜻한 채색을 구사하여 세련되게 표현하였다.▶ 서양화법의 전래조선후기회화와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은 중국을 통한 서양화법의 전래와 수용이 다. 남리 김두량, 이희영, 박재가 등의 일부 18세기화가들이 수용하기 시작한 서양화법은{궁궐의 의궤도나 예술분야에서 업적이 두드러진 학자이며 예술 가이다. 그는 시와 글씨 및 그림 모두에 능해 삼절(三絶)로 지칭되었다. 그림에 대한 높은 안목과 더불어 여러 화가들의 그림에 평을 남겼으며, 뚜렷한 화론(畵論)의 소유자로 남종화 법의 유행을 부채질한 인물로 이를 실제 그림을 통해 보여주기도 했다. 한마디로 학식과 예 술을 겸비한 조선시대의 평론가라고 할 수 있다.위 작품은 『송도기행첩』에 실린 16폭 그림 중 11번째 속한 작품이며 이 화첩 중 백미(白 眉)로 꼽힌다. 무엇보다도 이 화첩은 우리 산천을 소재로 한 진경산수라는 점과 표현기법에 있어 그 이전에 보기 힘든 화풍으로 그의 나이 40대 중반의 서양화 수용이라는 측면에서도 중시된다.일정한 톤의 묵선으로 바위와 나무를 나타내고 그 위에 옅은 담청색을 넓게 채색하여 화면 에 청신함과 산뜻함을 더 했다. 수면을 호분을 엷게 입혀 나타낸 것도 주목된다. 농담(색 감)을 달리한 먹색으로 바위에 입체감을 부여하고 있으며 자신 있는 빠른 필선으로 화가의 출중한 기량을 짐작케 한다.2 겸재 정선(1676~1759){{{겸재 정선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화가로 약관에 김창집의 천거로 도화서의 화원이 되고 그 뒤 현감을 지냈다. 처음에는 중국 남화에서 출발하였으나 30세를 전후하여 조선 산수화 의 독자적 특징을 살린 사생의 진경화로 전환하였으며 여행을 즐겨 전국의 명승을 찾아다 니면서 그림을 그렸다. 심사정·조영석과 함께 삼재(三齋)로 불리었다. 강한 농담의 대조 위 에 청색을 주조로 하여 암벽의 면과 질감을 나타낸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으나 후계자가 없어 그의 화풍은 단절되었다. 문재(文才)가 없었으므로 다만 서명과 한두 개의 낙관만이 화폭의 구석에 있을 뿐 화제(畵題)가 없다.{겸재는 강한 필세와 힘찬 필선으로 유명했다. 겸재는 84세까지 살았으며, 해악전신이라는 금강산 화첩도를 38세에 그려 이미 30대부터 화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고 생각할 수 있 다. 겸재의 걸작은 비교적 많은 편인데 대부분 진경산수이다. 머리 속의, 사대부의 평생도, 책거리나 호렵도와 같은 생활도 등 자기 삶의 주변을 대상으로 한 풋풋한 풍속화를 많이 그렸다. 50대 이후에는 유유자적하는 주변의 생활상에 대한 관심보다는 자신의 내면세계에 몰입하여 은일적인 그림을 많이 그렸 다. 비록 회화적인 면에서는 후반기의 그림이 뛰어나지만 그는 역시 풍속화가로 많이 알려 져 있다. 그건 아마도 역사적, 사회적 의미가 그의 그림에 대한 평가에 많은 비중을 차지하 기 때문일 것이다.2 혜원 신윤복(1758~?){{{김홍도에 이어 조선 후기 풍속화의 절정은 신윤복에 의해서 매듭 지어진다. 주지하다시피 김홍도가 농촌 생활을 중심으로 풍속화의 세계를 추구한 것과 달리 신윤복은 중세 말기의 변모하는 도회상의 단면을 드러내는데 주력하였다. 그리고 여속이나 노골적인 남녀의 애정 표현을 자신의 예술 세계로 끌어들여 조선 최초의 애로티스트 화가라고도 알려져 있다.신윤복이 대담하게 색정을 표출한 풍속화는 우리 나라 회화 사에서 그 유래를 찾기 어려운 에로티시즘을 발산하고 있다. 풍속화의 새 경향을 창출한 것이다. 당시 반상을 구분한 성리 학적 이념의 폐쇄적 굴레에서 볼 때 서울의 향락 풍조를 중심으로 현실 사회상을 꼬집은 그의 풍자에는 사대부의 윤리관이나 치레에 일격을 가하는 것이다. 또 그에 정면으로 도전 한 사회 의식이 깔려 있다.혜원 신윤복에 대해서는 여담이 많다. 신윤복은 김홍도와 더불어 조선시대 대표적인 풍속 화가로 꼽힌다. 두 사람은 직업화가였다는 점에서도 일치하는데 당시 김홍도가 뛰어난 재능 을 발휘하여 그 천재성을 인정받은 반면, 신윤복은 빛을 발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가 언제 어디서 태어나 어떻게 살다 죽었으며, 그의 인물됨이나 행적이 또한 어떠했는지에 대한 자 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또한 도화서에서 쫓겨났다는 신윤복에 관한 일화는 당시 지배 세력인 일부 사대부 층과의 결별도 당시 유교사회로부터 소외당한 이유이기도 하다{그 결별이 어쩌면 신윤복의 작품세계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준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Ⅰ. 서론인류는 모든 지구상의 생물 종 중 가장 성공한 종 중에 하나이다. 엄청난 번식력을 지닌 것도 아니고, 강한 신체로 다른 종들을 제압한 것도 아니다. 그럼 어떻게 인류는 가장 성공한 종이 되었을까? 아마도 그 원인은 공동체 생활을 통한 문명일 것이다. 모든 문명은 과학의 발달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과학의 발달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그렇다면 어떻게 인류는 과학이란 학문을 향유하게 되었을까? 진화학적인 측면에서 알아보도록 하자. 1859년, 영국의 찰스 다윈은 을 통해 인간은 신의 창조물이 아니라 원숭이로부터 진화한 것이라는 주장을 하였다. 찰스 다윈 이후 다른 인류학자들과 생물학자들의 지속적인 연구의 결과로 그의 주장은 사실로 인정되었다. 최근의 분자생물학연구에 따르면, 현생인류의 조상과 침팬지, 오랑우탄 등의 유인원의 조상이 갈라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5,6백만 년 전 이라고 한다. 유인원으로부터 현재 인간의 모습까지 진화할 수 있었던 것은 도구의 사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도구의 사용은 인간이 동물과 다른 특징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인류 문명의 발달에는 도구의 사용이 그 바탕이 되었다. 석기시대, 청동기 시대, 철기 시대로 나누는 것도 바로 인류의 발달을 도구를 기준으로 본다는 증거이다. 산업 혁명도 도구의 혁명이며 기계의 혁명이었다. 이처럼 인류 문명은 도구의 사용으로부터 시작되었고, 도구의 발달로 인류문명이 발달해 온 것이다.문명이란 문명이라고 이야기되어 질 수 있는 사회에서 살기 시작한 후에 일어난 인간의 생활 방식이다. 영어로 Civilization 이란 라틴어에서 온 도시의 시민들을 일컫는 것이다. 문명이란 예술, 의복, 기술, 정부 그리고 사회에서 일어나는 생활의 한 방식을 이루는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복잡한 경제적이고 행정적이며 사회적인 시스템을 포함하는 구조를 지칭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명들은 전세계 다양한 곳에서 독립적으로 성장했으며 고대 문명은 각기 다른 자연 환경을 기반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농업의 시작은 문명 발달로 나타나게 된다.Ⅱ. 본론(1) 생명과학의 발달인간의 평균 수명이 매우 높아졌다. 의료기술의 발달로 인해 많은 질병이 극복되었고, 아직까지 불치의 병이라고 여겨지는 암이나 에이즈 같은 몇몇 질병들도 극복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으니, 앞으로 10년이나 20년 후에는 사람의 평균 수명이 지금보다도 20-30년 혹은 40-50년 더 길어질지도 모르겠다. 또 어떤 유전적 질병들은 아직 사람으로서의 형체도 갖추지 못한 인간 배아의 단계에서도 치료될 수가 있다고 하니 굉장한 놀라움이다.그 뿐만이 아니라 금세기 인류에게 가장 큰 숙제였던 식량의 문제도 서서히 해결될 조짐이 보인다. 소위 생명과학의 놀라운 업적은 몸집이 두 배가 넘는 돼지를 양산할 수 있게 되었고, 한정된 면적에서 몇 배나 더 많은 곡물 생산도 가능하게 만들었으니 인류의 미래는 그리 어둡지만은 않은 것 같다. 적어도 건강을 유지하는 가운데 식량 부족의 걱정 없이 더 오랜 생명을 누릴 수 있게 되었으니 인류가 추구하는 행복은 이제 거의 모두 실현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이 놀라운 일들이 모두 생명과학의 업적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찬사를 보내고 있고, 또 어떤 이들은 인류의 미래가 바로 여기에 달려있다고까지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분야에서의 지칠 줄 모르는 연구는 그 구하기 어려운 장기를 그것도 다른 사람에게서 적출한 것이 아니라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아주 싱싱한 장기를 양산해 낼 수 있다고까지 장담할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인간의 생명까지도 실험실에서 꼭 같이 복제해 낼 수 있다고 하니 그 놀라움은 이제 우리의 상상을 훨씬 더 앞서가고 있는 현실이다. 어쩌면 가까운 미래에 사람을 살리기 위해 그 사람과 꼭 같은 유전자를 가진 복제인간을 만든 다음 거기서 필요한 장기를 적출하여 수술에 사용하고, 나머지는 쓰레기 버리듯이 폐기시켜 버리는 일이 현실화될 지도 모르겠다.이런 끔찍한 상상을 하면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 생명과학 분야의 이런 연구들은 과연 누구볼 때 오직 경험적이고 효율적인 것만이 지배하는 경험적 과학지식과, 과학의 이름으로 타인의 자유는 물론 존재까지도 침범하는 극단적인 개인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여기에 인간은 생명과학의 발전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인간 개인의 생명이 또 다른 개인의 생명을 위해 희생되고 만다.그러나 생명과학의 발전은 어디까지나 인간에 대한 봉사, 곧 인격이 존중되고 생명이 온전히 보호받은 인간에 대한 봉사가 그 목적이 되어야지, 그 발전을 위해 인간이 단순히 수단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인간의 건강과 생명, 나아가 인류의 행복을 위한다는 생명과학 분야의 노력과 연구가 인간 인격을 위한 윤리로 떠 받쳐지지 않는다면, 또 인간의 존엄성과 온전성을 존중하는 윤리와 조화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국 인간 파괴로 작용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2) 인간 복제, 인류의 미래인가 파멸인가오늘날 우리는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첨단 과학 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시대에 살고 있다. 모든 과학 분야에서도 특히 생명의 신비를 탐색하는 생명 과학은 금세기에 접어들어 다른 과학 분야와 비교해 볼 때 획기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그 하나가 최첨단 생물 과학의 지식, 정보 그리고 기술을 토대로 한 생물 공학이라는 새로운 바이오테크놀로지 (biotechnology)의 탄생이 바로 그것이다.20세기 과학의 모든 발견 중에서 가장 기념비적인 발견이라고 할 수 있는 왓슨과 크릭의 DNA 구조의 이중 나선형의 발견 이후 유전자의 발현과 복제의 기작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 었다. 자연계의 모든 생물체는 자기의 고유한 유전자의 발현에 따라 그 형질이 표현되는데, 그 형질에 대한 정보의 청사진은 DNA 분자로 구성되어 있다. 즉 DNA의 조성과 구조가 생 물이 지닌 모든 형질을 결정짓는다는 뜻이다. 즉 생명 복제는 이러한 유전자를 배양하여 똑 같은 유전자를 가진 ‘나 아닌 나’라는 또 다른 개체를 탄생시킬 수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유전자를 조작해 생명체를 개량하려는 과학자들의 시도는 오래 전부터 있었다. 그리고 과정을 보면, 50년대에 이미 개구리 수정란의 핵을 개구리 난자에 다시 이식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53년 왓슨과 크릭의 염색체 이중 나선구조 발견으로 유전 메커니즘이 규명되면서 생명의 창조 가능성이 부각되었다. 그리하여 70년대 에 개구리 수정란의 핵을 개구리 난자에 이식시켜 올챙이까지 키우는 데 성공했고, 80년대 에는 생쥐의 복제에 성공했으며, 95년에는 우리 나라에서도 우량 젖소를 복제하는 데 성공 했다. 그리고 지난 2월 23일 영국 에든버러 로스린 연구소의 아이언 윌머트(Ian Wilmut) 박 사 팀은 6년 생 암컷 양의 유두체(젖을 만드는)를 다른 양의 난자와 결합시켜 원래의 6년생 암컷과 동일한 유전자를 가진 동물을 복제하는데 성공했으며, 그 후 미국의 오레곤 주 비버 튼의 영장류 연구 센터의 돈 울브 박사가 복제 원숭이를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이 두 복제 실험의 성공으로 과학계는 물론 종교계와 정치계에도 엄청난 충격과 파문을 일으키면서 세인의 관심거리가 되고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양과 원숭이의 복제가 성공함에 따라서 미래에는 인간도 복제될 수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와 경계심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과연 인간 복제가 가져올 수 있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은 무엇인가?긍정적인 측면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의약과 식량 문제 해결에 큰 기여를 할 것이란 것과 대 체 에너지를 만들어 내어 환경 정화 분야에서 획기적인 공헌을 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인간 복제 기술은 현재 턱없이 부족한 장기 문제의 해결에 공헌할 것이라는 견해이다. 즉 심장 질환, 백혈병, 신부전 환자 등에게 얼마든지 새 장기를 공급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낙관하는 것이다.부정적인 측면으로는 만일 동물 복제가 인간 복제로까지 이어질 때, 자아의 개체성이 말살될 수 있으며 또한 이것이 범죄에 이용될 때, 우리는 걷잡을 수 없는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를 낳는 것이다.인간 복제가 갖는 이러한 양면성에 대한 문제를 논한다면, 끝이 없을 것이다. 우선은의 연구가 공개적이고 자유 의지로 이루어지고 인류에 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인간 지식 탐구의 한계는 없어야 한다.”라는 전제에서 “인간의 본성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많이 변했다. 현재도 사는 지역에 따라서 인간의 권리 에 차이가 있고 복제 인간이 탄생하더라도 인간은 그 환경에 맞게 적응해 갈 것이다.”라는 낙관론을 피력하며 이를 규 제하는 것은 오히려 인류의 올바른 발전을 무분별하게 막는 것이 라고 주장했다.이에 반해 복제 양 탄생의 주역인 아이언 윌머트 등의 과학자들은 의학적 혜택과 식량난 해 소를 위해 동식물 복제는 허용해야 하지만 인간 복제는 반대하는 입장이다. 특히 조지안 나스 등의 생 명 윤리학자들은 복제 인간이 탄생할 경우첫째, 복제 인간의 정체성은 무엇인가?둘째, 성의 개념과 기존 가족관계의 혼란셋째, 상업적 목적으로 인간의 인체가 장기 이식 시장에서 상품으로 전락할 가능성넷째, 무성 생식이 보편화할 때, 인간이라는 종(種) 내부의 유전자 다양성 소멸 등의 문제를 제기 했다.이러한 상반된 문제는 모두 근거가 있는 것이고 또 모두 인류를 위하는 관점의 표현이다. 따라서 이러한 두 가지 대립적인 관점을 어떻게 잘 조절해서 인류의 실제적 이익에 봉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는 인류 앞에 던져진 선택의 문제이면서 영원한 과제일 것이다.(3) 생명과학 시대의 인간의 선택과 책임지금으로부터 정확히 50년 전인 1953년 유전자의 본체가 DNA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생명공학은 또 다른 전환을 맞게 된다. 생명체의 유전자 정보에 대한 이해와 그 조작이 가능해 지면서 진화를 결정짓는 ‘자연선택’과 ‘변이’의 메카니즘에 ‘인간선택’이란 새로운 요소가 개입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불과 수 십 년만에 지구 생태계 메카니즘의 중요한 요소가 되어버린 ‘인간선택’이 35억 년의 지구생태계가 수용할 만큼 충분히 신중한 것인지 의문이다.‘인간선택’에 의한 개체변이, 세대변이는 아직 기본적인 합의조차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에서 기술력만 앞서가는 문제를 안고 있다. 최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