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상 가장 뛰어난 무공을 세운 인물을 꼽으라면, 한국인들은 당연히 임진왜란 때의이순신 장군을 첫 손에 꼽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해군의 활약으로 일본군의 보급선이 차단되었기에 전쟁을 승리할 수 있었다. 만약 이순신의 해군이 없었다면, 임진왜란에서 조선은훨씬 힘든 싸움을 벌였을 것이다.난중일기는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장군이 임진왜란 7년 동안의 전쟁 중에 쓴 일기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인 1592년부터 끝나던 해인 1598까지의 일을 간결·명료하게 기록하고 있는 대단히 중요한 전적 중의 하나로 국보 제76호로 지정되었다.일기의 주요 내용은 국난을 극복해낸 수군사령관으로서 충무공의 엄격하고도 지적인 진중생활을 평이한 문장으로 기록하고 있다. 특히 그 내용을 요약해 보면, 유비무환의 진중생활, 인간 이순신의 적나라한 모습과 생각, 부하를 사랑하고 백성을 아끼는 마음, 부하에 대한 사심 없는 상벌의 원칙, 국정에 대한 솔직한 간언, 군사행동에 있어서의 비밀 엄수, 전투상황의 정확한 기록, 가족 ·친지 ·부하장졸 ·내외 요인들의 내왕 관계, 정치 ·군사에 관한 서신교환 등이 수록되어 있다.우리가 난중일기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설명하지 않아도 자명하다. 첫째, 임진왜란 7년 동안의 상황을 가장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일기로서, 전란 전반을 살피는 사료로서의 가치와 나라의 위급을 구해낸 영웅의 인간상을 연구할 수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생사를 걸고 싸우던 당시의 진중일기로서 그 생생함이 더욱 돋보이며, 단순한 전쟁사 이상의 가치가 있다. 셋째, 그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등 여러 부문에 걸친 측면사와, 특히 수군의 연구에 도움을 준다. 넷째, 충무공의 꾸밈이 없는 충·효·의·신을 보여주는 글이라는 점에서 후세의 사람들에게 큰 귀감이 되고 있다. 다섯째, 무인의 글답게 간결하고도 진실성이 넘치는 문장과 함께 그 인품을 짐작케 하는 웅혼한 필치는 예술품으로서도 뛰어나다.목민심서가 공무원들과 정치인들에게 지침이 될 수 있다면 이순신 장군의 임진왜란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던 것이다. 늦게나마 왜국에 사신을 보내어 침략의 동태를 살펴보았지만 동인과 서인의 당쟁 논리에 밀려 사신들의 보고는 묻혀 버렸다. 오직 충무공만이 준비되어 있었을 뿐이었다.그는 곧 왜침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좌수영을 근거지로 삼아 전선을 제조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등 일본의 침략에 대처하였고, 나아가서 군량의 확보를 위하여 해도에 둔전을 설치할 것을 조정에 요청하기도 하였다.이듬해인 1592년 4월 14일 일본의 침입으로 임진왜란이 발발되었는데, 일본의 대군이 침입해왔다는 급보가 전라좌수영에 전달된 것은 이틀 뒤였다. 이날은 국기일이었으므로 그는 공무를 보지 않고 있었는데, 해질 무렵 경상우수사 원균으로부터 왜선 350여척이 부산 앞바다에 정박중이라는 통보에 이어 부산과 동래가 함락되었다는 급보가 들어왔다.이러한 소식에 접한 그는 즉시 전선을 정비하고 임전태세를 갖추었지만, 적을 공략하기에 앞서 전황을 면밀히 분석하였다. 그의 휘하 전 함대는 4월 29일 수영 앞바다에 총집결하여 매일 작전회의가 열리고 기동연습도 강행하여 완전한 전투태세에 임하게 되고, 그는 총지휘관으로 5월 2일 기함에 승선하였다. 다른 수군사령관들이 일본의 대함대의 위용을 보고 지레 겁을 먹어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도주한 것과 사뭇 대조적이다.7일 옥포 앞 바다에서 왜선 26척이 조선수군의 포화와 화시에 격파되고 많은 왜병이 궤멸되었다. 이 싸움이 옥포대첩으로, 그의 최초의 해전으로 기록된다.옥포해전이 있던 다음날에는 고성의 적진포에 정박중인 왜선 13척을 쳐서 불태웠다. 제1차 출동 후 전력을 보강하고 전선을 정비한 뒤 5월 29일 그는 거북선을 앞세우고 23척의 전선으로 여수항을 출항하였다. 노량 앞 바다에 이르러 조선수군은 곧 일본수군이 정박중인 사천으로 달려갔다. 그는 공격이 용이하지 않자 그들을 바다로 유인하여 섬멸할 계획을 세웠으며, 그 작전계획은 적중하여 왜선 12척을 파괴하고 많은 왜군을 섬멸하였다. 이 전투에서 장군께서 적의 조총탄에 맞다. 아군의 전선들은 적선을 포위하고 먼저 거북선을 돌입시켜 맹공을 가하였다. 이 싸움에서 왜군은 대패하였고 왜선은 모두 소실되었다.이처럼 해상에서 일본수군이 이순신 장군에게 연패를 하자 해전에서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하여 병력을 증강하였다. 장군은 약간의 판옥선으로 일본의 수군을 공격하면서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한 뒤 학익진을 쳐 일제히 총통을 발사하는 등 맹렬한 공격을 가하여 층각선 7척, 대선 28척, 중선 17척, 소선 7척을 격파하였다. 이 싸움이 그 유명한 한산도 대첩으로 장군의 병법의 뛰어남을 보여주고 있다.한산대첩 후 이순신 장군은 다시 전진하여 안골포의 적선을 격파하였다.장군은 안골포의 수심이 얕아서 적선을 유인하여 공격하려 하였으나 적선이 포구 밖으로 나오지 않자,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교대로 종일토록 적선을 공격하여 대선을 거의 침몰시켰다.제3차출동의 결과로 전라도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순신 장군는 왜침의 교두보인 부산포공격의 결단을 내렸다. 부산포는 이미 요새화 되어 적함 500여 척이 정박해 있어 여러 장수들은 부산포로 깊이 들어가기를 꺼렸으나, 이순신 장군은 과감하게 돌진하여 적선 100여 척을 격파하였다. 이러한 장군의 활약으로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일본군의 전진을 막아 이들의 작전에 큰 차질을 가져오게 하였다.그 후 명나라와 일본간의 강화회담이 진행되면서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가서도, 이순신 장군은 다음에 다시 있을 대전에 대비하여 군사훈련, 군비확충, 피난민 생업의 보장, 산업장려 등에 힘써 유비무환의 자세를 보여주었다.1597년 명·일간의 강화회담이 깨어지자, 본국으로 건너갔던 왜군이 다시 침입하여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는 원균의 모함과 왜군의 모략으로 두 번째 백의종군을 하게 되었다. 중도에서 어머니의 부고라는 슬픔까지 이겨내야 했다.이순신 장군의 부재로 인해 수군은 연전연패하여 예전의 그 위용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에 통제사에 재임용된 이순신 장군에게 남은 군사 120인에 병선 12척이 고작이었다.이러한 대결하여 31척을 부수는 큰 전과를 올렸다.이순신 장군이 매복해 있던 명량 해협 중 가장 폭이 좁은 울돌목은 폭이 좁아 함대는 종대로 전진해야 했다. 이 당시의 해전은 전 세계 어디에서나 적선에 접근하여 병사들이 배를 기어올라 선상에서의 난전을 통해 승부를 결정짓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수 척의 일본 돌격선들은 조선의 기함을 사방에서 포위하고자 양쪽으로 날개를 벌리며 우회하려 하였다. 그런데 바깥쪽으로 돌던 왜선들이 돌연 물 속에 숨어 있던 암초에 걸리면서 기동 불능에 빠지고 말았다.이때서야 왜 함대는 기함을 포위하려던 작전을 바꾸어 중앙으로 재집결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왜선들을 보고 있으면서도 기함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나 중앙으로 집결된 왜선들이 앞으로 전진하여 해협을 빠져나오는 순간, 좁은 물길을 가로막고 우뚝 서 있던 조선 함대의 기함이 서서히 옆으로 돌더니, 종대로 덤벼드는 일본 함대를 향해 지자포와 현자포 등, 함재포들을 일제히 발사하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갑판 위에 있던 병사들도 일제히 활과 총을 쏘아 대기 시작하니, 선봉에서 달려들던 일본 전함이 단번에 불길에 휩싸여 버렸다. 조선 함대는 우선 현자총통과 지자총통 등을 발사하여 일본 군함의 기동력을 마비시킨 후, 곧이어 조란환이라 불리는 새알 크기만한 쇳덩어리를 한 번에 100-200개씩 산탄으로 발사하였다. 이순신의 기함 한쪽에서 한 번에 발사되는 조란환은 모두 약 2척 개나 되어 갑판 위에 노출된 왜병들은 순식간에 몰살당하고 말았다. 이 전법을 이순신 제독은 합력사살이라고 하였다. 이는 역사스페셜에서도 설명된 전법으로 가히 신기에 가까울 정도의 치밀하고 정교한 전법이었다.조선 군함의 가공할 함포 사격에 일본군이 사기를 잃고 후퇴하려 했지만 물살이 그들을 조선 함대 쪽으로 밀어주고 있어서 후퇴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조선 삼도 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의 기함이 홀로 적을 맞아 약 1시간 동안 결사전을 전개하며 일본 함대를 차례로 격침시켰다.일본 수군이 육질 끌며 기다려 왔던 것이다. 또 전투경험이 적은 조선 수군에게 단 1척의 함선으로 수백 척에 맞서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자신감과 결전의 의지를 갖게 하는 것과, 그 반대의 효과를 왜군에게 주는 고도의 심리전 전술이었던 것이다.일본 함대는 서로 먼저 빠져나가려는 다툼으로 인하여 연쇄적으로 좌충우돌하였고 또 해협의 양측 암초에 부딪쳐 처절하게 파선되어 갔다. 무사히 빠져나간 듯 싶었던 함선들도 시속 11노트라는 가공할 속도로 흐르는 물살을 타고 마치 나는 듯 추격해 온 조선 함대의 함포에 맞아 침몰되어 갔다. 이 수라장 속에서 무려 100여 척 이상의 일본 군함들이 격침되었고 멀리서 대기하던 90여 척만이 도망갈 수 있었으나 그들도 거의 치명적인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이 전투의 승리로 인해 200여 척으로 구성된 최정예 함대에 10만 대병을 싣고 서울로 상륙하려던 일본군의 작전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일본은 불과 12척의 이순신 함대에 의하여 200여 척의 대함대 중 무려 133척을 잃었다.이 대해전에서 이순신 함대의 손실이 단 한 척도 없었다는 점이다. 일본측이 수만 명의 사상자를 낸 데 비하여 우리측 희생자는 불과 34명이었다.명량대첩으로 제해권을 다시 찾은 그는 군사를 옮겨 진을 설치하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둔전을 경작시켰다. 이로 인하여 장병들이 다시 모여들고 난민들도 줄을 이어 돌아와서 수만가를 이루게 되었으며, 군진의 위용도 예전 한산도시절에 비하여 10배를 능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단시일에 제해권을 회복하고 수군을 재기시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의 개인적 능력에 의한 것이었다.1598년 11월 19일 그는 노량에서 퇴각하기 위하여 집결한 500척의 적선을 발견하고 싸움을 기피하려는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을 설득하여 공격에 나섰다. 그는 함대를 이끌고 물러가는 적선을 향하여 맹공을 가하였고, 이것을 감당할 수 없었던 일본군은 많은 사상자와 선척을 잃었다. 그러나 선두에 나서서 적군을 지휘하던 그는 애통하게도 적의 유탄에 맞았다. 그다.
브레스트 오프 속의 민영화할리웃식의 블록버스터 영화들보다는 이런 가슴에 남는 영화를 좋아하는 편입니다.이 영화는 한 마디로 행정개혁론에서 배웠던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영국 광부들의 저항을 음악을 통해서 우회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같습니다. 대처리즘이라 불리는 제 생각으로는 너무 무지막지하게 진행한 이 민영화 정책으로 영화가 끝나며 올라온 자막에서 얼핏 수백개 이상의 광산이 문을 닫았다고 보았습니다. 석탄이 비록 석유에 비해서 비효율적이라 할지라도 이제껏 영국산업의 기반이 되어온 자원인 석탄을 한순간에 내동댕이 치면 과연 그 실업자들이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을 대처는 했을까하는 의문이 듭니다. 대처에 대한 영국인들의 감정이 어떤 것인지는 불과 10여년이 지난 시점에서 완전히 잊혀진 존재가 된 것을 보면 알 것입니다. 민영화를 저돌적이고 맹목적으로만 추진한 이유는 무엇이었고 결과는 어떠했을까하는 궁금함이 듭니다. 단순한 채산성으로 폐광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여주인공의 조사결과물이 경영진들에게는 한갓 쇼에 불과하다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요식상의 절차는 따르지만 그것은 형평성을 따지지 않는 권력자들의 의지인 것입니다.경제성과도 무관한 정치적 논리에 의해 민영화들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같습니다. 이 영화는 투쟁적인 영화라고는 보기는 힘들지만 서민들의 일상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느껴지는 것들이 감동적인 것같습니다. 맞벌이하며 하루에 수차례 마주치는 부부, 돈 때문에 가정이 붕괴되고 자부심마저 돈에 팔려버리는 세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악단장의 아들 즉, 광대라고 생각합니다. 어릿광대라는 부업을 하면서도 돈에 대한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웃는 얼굴 뒤에 눈물을 흘리는 광대가 바로 그 계층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영화는 이완 맥그리거라는 스타를 위한 영화도 아니고 그 사람이 주연이라는 느낌도 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항상 괴로움 때문에 술을 마시기에 연주를 실수하는 단원이나 악단장 부자가 더 빛을 발하는 연기를 한 것같습니다.영화에서도 현실을 반영하지 않고 마치 환상같은 모습만 보여주는 영화를 보면 거부감이 느껴집니다. 하물며 민영화를 하면서 거기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민영화만이 최선의 정책이라고 못 막듯이 추진해나간다면 정당성이 없기에 반발만 살 것입니다.이 영화에서는 민영화조차도 할 수 없이 폐광되어 버린 경우이지만 영향은 비슷할 것같습니다. 경제논리나 정치술수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사람들간의 관계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고 자신만의 안위를 걱정할 때 악단의 연주는 형편 없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추억으로서의 연주는 최고였다고 생각합니다.
책임의 개념책임의 사전전 의미는 맡아서 해야 할 임무나 의무로서 개인의 지위, 기능,행위 등의 본질에 의해 그에게 부과된 의무의 범위를 말한다. 즉, 역할과 관련된 개념으로서 특정 역할에서 파생되는 권한에 대응되는 개념이며 구체적인 행위의 차원과 관련된다.현대는 민주화되고 고도로 분업화된 사회이다. 따라서 개인의 자율적 결정의 폭이 넓어졌다. 물론 이에 따른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이 따르게 된다.민주사회는 자유를 추구하는 사회이고, 자유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르므로 다른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또한 책임에 포함될 것이다.사례제나라 경공이 정치에 관한 질문의 대답으로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라는 말이 있다. 즉,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사회가 바르고 아름다운 세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공자의 정명사상은 사회 구성원 각자가 자기의 이름 값을 하는 것 즉, 맡은 바 역할과 본분을 다 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해, 임금이 자신의 직분을 지키지 못하고 천명을 어길 때, 신하는 임금을 시해하는 불충을 저지르게 되고, 아비가 자신의 직분을 지키지 못할 때, 자식이 아비에게 행패를 부리는 불효를 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 사회의 구성원 각자가 자신의 이름값을 올바로 할 때, 즉 정명(正名)을 할 때 이 사회는 제대로 돌아가게 되고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말이다.책임이 결여된 사회는 총체적인 위기를 맡게 된다.경영인이 회사를 경영 할 때 정치인이 정치를 할 때 공무원이 행정업무를 볼 때 그리고 군인이 국방의 의무를 수행할 때 자신의 맡은 바 책임을 다 하지 않고 태만하게 수행한다면 그 조직과 사회 전체에 심대한 타격을 미칠 것입니다. 과거 삼풍백화점 붕괴나 성수대교 붕괴와 같은 대형 참사가 발생한 것도 책임감이 결여된 부실공사로 인한 것입니다. 자신이 맡은 바 역할을 다 하지 않고 나하나 정도 괜찮겠지라고 생각하고 책임을 다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사회는 건강하지 못한 사회가 될 것이다.정보화 사회에서 개인의 책임이 나아가 조직의 존속, 그 지역의 존속, 나아가 국가의 존속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국가수호의 측면에서 오늘날 군복무를 기피하는 젊은이들이 상당수 있다.이는 국가 속에서의 자유만을 바랄 뿐 그 자유를 위한 국방의 의무는 짐이라고 생각하고 거부하려는 행태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병폐는 기득권층 자녀가 그런 경향이 더욱 크다는 데 있다. 일찍이 로마시대의 귀족들이나 영국의 귀족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이 때까지의 혜택을 갚기 위해 앞장서 싸웠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해외 영주권자의 신분으로 병역의 의무를 당당히 수행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신성한 국방의 책무를 수행했을 때 비로소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국방을 수호하는 군인으로서 책임 의식을 갖고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아 수적인 열세 속에서도 이순신장군은 해전에서 승승장구하여 임진왜란을 승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6.25전쟁 당시에서도 북한군에 비해 화력의 열세 속에서도 미리 포대를 구축하고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은 덕분에 상당 시간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 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북한의 비정통성을 비교 설명하자국가의 정통성은 국민의 국가에 대한 신뢰와 지지의 근본 바탕이 되는 것으로 정통성은 국가가 대내ㆍ외적으로 존립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명분이다.이와 같이 정통성의 문제는 국가 기본체제와 질서유지, 나아가 민족통일과 민족사적 진로를 결정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남북이 대치되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 남북한 체제의 정통성에 대한 비교를 통해 우리체제에 대한 우월성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정통성에는 정치적 정통성, 국제적 정통성, 문화적 전통성이 있다.1. 정치적 정통성◇민족의 대표성민족 구성원의 의지가 반영된 민족의 대표성은 3.1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 3.1운동이야말로 우리 근대사에 있어 전 민족의 단결을 바탕으로 독립과 자주를 행동으로 실천한 민족 운동의 원천이기 때문이다.우리나라 헌법전문에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조항에서 명백하게 선언함으로써 3.1운동을 민족사적 정통성의 근간으로 하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그러나 북한은 3.1운동을 자본가 이익을 대변한 부르조아의 계급투쟁 이라고 규정함으로써 민족운동으로 보지 않고 계급 투쟁사의 입장에서 보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3.1운동정신의 계승을 헌법에 밝히고 있는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북한의 비정통성이 명확하게 구분된다고 하겠다.국가의 정통성 문제는 우리나라와 같은 민족분단국가에서는 민족사의 정통성 계승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백범 김구선생은 “모든 사상도 가고 신앙도 변한다. 그러나 혈통적인 민족만이 영원히 흥망성쇠 내지는 공동운명체의 인연에 얽힌 한몸으로 이 땅위에 남는다”며 민족의 항구성을 역설하였다.그러나 북한은 민족사적으로 볼 때도 6·25와 같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도발하였으며 오직 김일성·김정일 정권의 합법화를 위하여 민족사를 날조하는 반민족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법통성국가수립의 역사적 근거를 살펴보면 대한민국은 상해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았으며, 이는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에서 입증된다. 3·1운동 직후 1919년 4월초 수립된 상해의 임시정부는 당시에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제정하였다.그리고 1948년 정식으로 정부를 수립할 때 임시정부의 국호를 그대로 계승하여 대한민국으로 제정했다.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당시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결집한 민족의 유일한 망명정부로서 국내외 민족독립운동단체 중 항일투쟁의 총본부이며 대외적으로 우리 한민족을 대표하는 정통성 정부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또한 상해 임시정부는 그 인적 구성에 있어서도 이승만, 이시영, 김구, 신익희 등 독립운동의 대표적 지도자를 망라한 기구였으며 정부의 체제는 민주공화제를 지향하였다.일제 35년간 독립을 위한 우리 민족의 끈질긴 투쟁이 국제적으로 인정되지 못하였다면 우리나라에게 광복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구한말 대한제국의 역사적 정통성을 계승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임시정부는 우리나라 법통성의 뿌리이며 광복정책 수행의 구심정이었다. 주요간부들이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적극 가담함으로써 임시정부의 법통이 대한민국으로 이어지게 되었다.그러나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주체사상을 주장하는 북한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그 인사들을 부르주아의 앞잡이라고 주장하여 우리민족의 독립투쟁사를 왜곡하였다.오히려 광복과 동시에 북한지역에 진주한 소련군은 만주에서 도적질을 일삼던 김성주를 항일독립투쟁의 영웅, 김일성장군으로 위장시켜 괴뢰정부를 세웠다. 당시 김일성의 나이는 불과 33세였다.이는 한 개인의 역사날조는 물론이고 우리민족의 근·현대사를 욕되게 한 반민족적 행위이며 결국 민족사적 정통성을 부인한 결과이다.한 나라의 정통성은 대내적으로 국민의 지지로, 대외적으로는 국제적 승인을 통해 인정받을 수 있다.때문에 옛부터 새로운 나라나 정부를 수립할 때에는 이 사실을 이웃나라에 통보하여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절차를 취하였다.2. 국제적 정통성◇한 나라의 정통성은 대외적으로 국제적 승인을 통해 인정받는다. 외교, 교역 등 국제관계에서 한 나라의 정통성과 관련한 국제적 인정은 국가 간의 교류에 더 없이 중요하기 때문이다.우리 정부는 유엔이 결의한 절차에 의하여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그 해 1948년 12월12일 파리에서 개최된 제3차 유엔총회에서 48대6이라는 압도적 다수로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를 대표하는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공인받아 정식 국가승인을 가결하였다. 이것은 세계 절대 다수의 국가들이 우리 대한민국이 한반도 유일의 합법적 국가임을 인정해 준 역사적 사실이다.이와 같이 대한민국에 대한 국제적 인정은 소련과 그 위성국들 일부가 승인한 북한과는 격이 다른 것이다.그러나 북한 정권은 1950년 6월 25일 불법남침을 감행, 한반도를 공산화하려 하였다. 이에 유엔 중심의 전세계는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대한민국정부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민국을 비롯한 16개국을 파견하여 북한군을 무찔렀다.이는 북한 정권의 비정통성을 국제사회가 확인한 것이다.◇국제평화주의와 질서의 존중세계 각국은 제 1,2차 세계대전의 체험을 계기로 인류의 파멸을 방지하기 위한 전쟁 예방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각별한 노력을 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국제조약과 각국의 헌법에서 평화주의를 선언하고 침략전쟁을 금지하는 내용의 평화조항을 두고 있다.우리나라 헌법도 제5조 제1항에서 대한민국은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고 침략적 전쟁을 부인한다 고 규정하고 있다.또한 국제적으로 승인된 국제법규와 조약을 준수하고 성실하게 이행함으로써 국제질서를 존중하고 있다.헌법 제6조 제1항에서 헌법에 의하여 체결ㆍ공포된 조약과 일반적으로 승인된 국제법규는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가진다. 라고 하여 국제질서존중 의사를 명백히 하고 있는 것 등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책임과 의무의 성실한 이행을 약속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우리 군은 정부수립 이후 지금까지 세계의 각종 분쟁지역에 UN 평화유지군으로 참여하여 세계평화에 적극적으로 기여하고 있다.반면 북한은 한국전쟁을 일으켜 동족을 살상하고 세계평화를 파괴함은 물론 휴전 이후에도 정전협정을 위반하고 침략행위를 자행함으로써 국제적 긴장과 불안을 줄곧 가중시켜온 테러집단으로 분류되고 있다. 또한 북한은 한반도는 물론 일본열도와 미 본토까지 날아가는 대포동 스커드, 노동 1ㆍ2호 등의 미사일을 실전 배치하여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특히 최근에는 NTP(핵확산금지조약)탈퇴와 핵 개발 및 핵 보유선언으로 전세계의 감시를 받고 있다.3. 문화적 전통성◇문화적 전통성의 중요성세계적인 석학 미국 뉴욕대 니엘 퍼거슨 교수는 국가의 진정한 힘은 도덕에서 나온다. 고 정의하고, 그 나라의 내부 구성원이 자발적으로 수용하는 정당성과 외부인에게 비친 신뢰성 양자에 의해 국가의 실체인 정권이 유지된다고 했다. 따라서 그 나라의 자발적 수용의 정당성이라고 할 수 있는 도덕적 문화의 계승이야말로 국가의 정통성을 입증할 수 있는 척도가 될 것이다.특히 전통문화는 민족의 특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분야로서 특정집단에 있어서의 문화의 계승여부는 집단의 정통성 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문화적으로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가치있는 민족 고유의 문화와 역사적 전통을 발전적으로 계승시킬 수 있는 경우 가능한 것이다.대한민국은 문화적으로도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을 발전적으로 계승함으로써 민족사적 정통성을 유지해 왔다.◇남북한 문화적 정통성의 비교우리 대한민국은 민족의 귀중한 전통가치인 충ㆍ효ㆍ예의 문화전통을 그대로 존중하고 이를 기반으로 민주주의에 알맞는 새 가치관과 질서를 건설하고 있다.예컨대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의 하나인 효를 기반으로 한 가족간의 강한 유대로 맺어진 전통적 가족제도와 충을 기반으로 국민적 단합을 이룩할 수 있는 국가제도는 오늘날까지도 전통윤리 및 미풍양속으로 유지되고 있다.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는 가정과 학교에서 충과 효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으며, 가정에서는 매년 때에 따라 조상을 추모하는 제사를 올리고 정부나 사회기관에서 효자·효부상을 제정하여 효를 장려하는 것은 그러한 예이다.이에 반해 북한은 효의 전통적 윤리개념을 김부자 우상화로 변화시켰으며, 가정은 생활의 보금자리가 아니라 사회주의 혁명의 실습장이요, 공산주의의 정치적 도구로서 집단농장과 같은 생산단위로 파악하고 있을 뿐이다.또한 아동들에게는 그들을 낳아준 부모보다도 수령을 더욱 존귀한 `어버이'로 경애하도록 강요하고 있으며 공산당을 위해서는 언제든지 부모와 형제의 천륜도 배반하도록 하여 결국 `충성동이, 효성동이'라는 미명으로 김부자 우상화에만 이용하고 있다.